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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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고나면 드는 생각은 이렇다. 결혼은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하는 것일까? 

사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에 기대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만족할만한 해피 엔딩, 영웅의 탄생, 새로운 또는 재해석된 신화 이야기. 이런 것들에 이 작품은 한참 뒤쳐진 이야기란 말이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많은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사랑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마지막장을 덮고도 나름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런 이야기에 얼마나 많이 길들여져 왔는지? 뭔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결말을 보지 있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투덜대고 화내고 욕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을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네 인생 자체를 얘기하고 있다. 한치도 다를바 없는 인생을. 그러니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을 보면서 동감을 표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너무도 지루하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루한 것엔 또 두 가지로 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인생이 아직 이해가 안 가서 동화되지 못한 것과 또 하나는 너무 동화된 나머지 너무 잔잔하여 한숨짓게 만드는 지루함. 

그래도 난 이 작품이 좋았다. 같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한 없이 지루하기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성실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마지막엔 묵직한 울림까지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이 별 것 있겠는가? 그렇고 그런 거지. 그런데 그렇고 그렇게 끝내버리면 소설이 될 수가 없다. 그 별 것 아닌 것에 뭔가의 의미를 길어 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능력있는 작가냐 아니냐를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묻게 되는 것은 말했던대로 사랑없는 결혼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작가는 처음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 쿵린은 의사다. 소위 말하는 인텔리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권유와 집안 사정을 뿌리칠 수가 없어 자그맣고 못 생겼으며 게다가 전족까지 한 쉬위를 아내로 맞는다. 애정 없는 결혼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여인 우만나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을 하려한다.  

하지만 그 이혼은 쉽지 않다. 여러가지 제도적인 벽과 인습에 부딪혀 번번히 좌절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오랜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드디어 결혼 18년이 되면 배우자의 동의 없이도 이혼이 성립되는 그것으로 이혼에 성공하게 된다.  

18년. 그 긴 세월이면 애인에게서 느껴지는 짜릿하고 불 같은 감정도 쇠하여질대로 쇠하여진 세월이다. 결국 관계는 정이고 관성이다. 항상 짜릿함만 가지고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다. 이제는 그 오랜 관계 때문에도 쿵린은 우만나를 버릴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랑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의 답답한 성격 때문에 우만나와도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눴을 뿐 육체적인 욕망을 불태우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우만나가 강간을 당하고, 더 이상 불태울 욕망이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허락됐을 뿐이다. 또한 조강지처를 버리고 애인을 사랑한 것 때문에 주위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치와 모멸을 감수해야 했나? 그것은 우만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사랑은 이들에게 있어서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다. 뭐든 게 시기에 맞게 필요 적절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아면 얼마나 좋겠는가? 항상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문처럼 늘 삐거덕거리는 것이다. 읽다보면 인간 생태를 보는 것 같아 너무 사실적으로 와 닿는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옛날 우리나라 6,70년와 흡사하며 성의식 또한 닮은 꼴이다. 즉 이를테면 육체적으로 깨끗하면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 무식하고 힘없고 형님같은 조강지처기 때문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참기만 하는 것 등등.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옛날 중국사회인 만큼 인간의 내밀한 것까지 사화적 간섭과 제제가 심하다는 것 정도. 

그러나 시간은 그렇게 말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는 것 같아도 사람을 한순간 바꿔놓는 위력을 가졌다. 시간은 인간의 생노병사의 법칙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다. 인간은 나이먹고 늙어짐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하다못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 앞에서 조차 바뀌는 것이다. 그때기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 아내에 존재를 재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 말미에서 쿵린이 자조하듯 되까리는 사랑에 대한 재인식에 공감이 간다. 또한 더불어 누가 못 생기고 전족을 했으며 배우지도 못하고 이혼 당한 사람이 인생에서도 패배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남자는 병들과 외로워 봐야 조강지처의 소중함을 안다고 했다. 쿵린은 아직 병들지는 않았지만 외로워졌을 때야 비로소 전처를 새롭게 보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쿵린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그 결혼이 평생 불행할건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한다. 이 작품은 시간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쿵린의 기다림에서 수위의 기다림의 승리를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인생은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한 것 같아도 그 안에 조그만 희망이 있다. 이 작품은 그것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문학이란 많은 미사여구와 현란한 이야기적 장치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그것에 값하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그것까지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진. 그는 참 좋은 필력을 가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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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
커리드웬 도비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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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은 왜 권력 앞에 굴복하는가를 요리사, 이발사, 화가 그리고 이발사의 형의 약혼녀 ,요리사의 딸, 화가의 아내가 각각 1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고백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왜 권력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권력을 갖고자 원한다면 먼저 그 권력을 가진자의 눈에 띄어야 하고 그에게 봉사해야 한다. 대통령의 요리사, 이발사, 화가라. 언뜻보면 그다지 권력을 탐하는 자처럼 보이지도 않아 보인다. 그들은 직속 참모라기보단 오히려 대통령에게 봉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에게 권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도 그들도 사람인 것을.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DNA구조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권력을 탐하는 인간 그 이면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추악하기 보단 인간의 또 다른 약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대통령의 아내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발사는 대통령이 자신의 형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그를 면도해 주면서도 면도칼로 그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잠재워야만 했다. 또한 요리사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며 여자들과 하룻밤을 쉽게 보내는 쾌락에 빠져든다. 그러면서 새로 만난 두목의 아내를 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권력에 머리를 조아린 자의 전형이 아닌가? 권력은 가진 자 치고 의로운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주는 물을 마시고 사는데 어찌 그 물이 시원하다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표현했다기 보단 그 권력을 가진 자에게 굴복하는 피권력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자조하는 듯한 어조다. 자신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인간은 그렇게 쉽게 권력자 앞에 무너지고 자신의 영혼을 그처럼 쉽게 파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자기보호 본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권력 앞에 그렇게 쉽게 머리를 조아린다고 그 권력이 자신을 지켜주는가? 이 책은 그것을 묻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뇌리를 맴돈다. "양심의 가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는, 후회란 좀처럼 오래가지 않는다." 상당히 통찰적이면서도 자조적이다. 

이 책은 생각보다 좀 어렵다. 그래도 문장은 제법 묵직하다. 만만히 볼 작품은 아닌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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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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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작가가 요즘 흔히 하는대로 영화화 될 것을 생각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무엇보다 추리였던 만큼 혹시나 놓치고 가면 맥을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처음엔 꽤나 신경 써서 꼼꼼히 읽어 나갔다. 무엇도다 북유럽 작가가 쓴만큼 기대는 더욱 증폭히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읽고나서의 허망함이란 북유럽의 한기만큼이나 시리다고나 할까? 어떻게 이런 작품을 아가사 크리스티에 견주겠다는 건지 좀 심하다 싶다.(물론 그 수식어라는 거 다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거 진작에 알고 있긴 했지만)  

물론 나야 추리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많이 읽지도 못했다. 하지만 추리라고하면 상당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야하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고, 중간을 지나서는 엄청난 뭔가 엄청난 반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추리 매니아가 아닌 나도 알고 있다. 

더구나 이 작품은 영화화 될 것을 생각해서 쓴 작품이 여실했던만큼 영화적 문법을 확실히 보여줬어야했다고 본다. 그것은 영상적 이미지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이 책은 480여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쓸데없는 없는 인물 묘사나 상황 묘사로 페이지를 채워 늘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살해된 알렉스가 아니라 경찰관 파트리크와 전기 작가라는(난 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추리 작가나 범죄 소설가라면 설득력이 있는데 왠 뜬금없는) 에리카의 활약상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역할이라는 게 그다지 볼만한 것이 없다. 너무 정적이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웬 연애질이란 말인가? 뭐 같이 일하다 보면 눈이 맞아 연애도 할 수 있다지만 여기선 그 번지수가 아니다. 그냥 학창시절 못 이룬 사랑을 어찌하다 보니 같은 일을 하게되서 나이들어 이루는 그야말로 독자들은 별로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내용들이다.   

거기다 양념 격으로 심심하면 한번씩 나와주는 에리카의 동생 안나와 제부의 갈등 관계. 집에 관한 추억과 현실적인 문제도 나열만 있다 뿐이지 이걸 가지고 재대로 된 요리도 못하면서 페이지 수만 할애하고 있다. 마무리 짓지 못하는 이야기를 왜 그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인지... 

어디 그뿐인가? 에리카와 알렉스는 친구 관계라고는 하지만 아주 친한 친구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조금 우정있게 지내다 멀어진 친구 사이다. 작가적 호기심은 있을 수 있겠지만 죽은 친구를 위해 글을 쓴다고 한다. 그것도 전기가 아닌 소설로. 그런데 소설 내용은 없고 글 쓰는 건 너무 어렵다고 칭얼대기만 한다.  

어디 그뿐인가? 400쪽 정도에 다다르면 죽은 알렉스의 감추어진 비밀이 그녀의 아버지로 인해 진술 되어지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성폭력은 개인에게 있어서 처참한 상처를 입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독자에겐 새롭지가 않다는 것이다. 독자는 같은 성폭력이어도 뭔가 대단한 비밀이 벗겨지는 것을 원하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아버지에 의해 진술될 것을 앞에 그처럼 장황한 나열이 필요했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딸을 위해 책을 써 달라고 에리카에게 부탁하고 격려까지 한다. 이게 정상적인 정서를 가진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원래 부자는 못된 사람이어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가문의 수치스런 역사를 감추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이긴 하다. 그렇다면 통조림 공장을 하며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로렌트 가문에 대해 파트리크와 에리카는 뭘했는가? 그래야 한 사람은 사건을 파헤치고 한 사람은 글감을 찾아야 한다. 둘 다 진실을 찾되 서로 그 기능은 다른.    

알렉스를 10살 때 성폭행했다던 유아성도착자라던 닐스 로렌트는 이름만 거론될 뿐 작품을 통털어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안데르센(?)과 그의 어머니 베라. 결국 아들 때문에 알렉스를 죽인 것이 되는데 이 설정이 맞는 설정인 것인지? 복수는 로렌트의 노마님에게 해야하는데 왜 애꿎은 자기 아들과 같은 처지인 알렉스를 죽여야 하는 것인지? 그런 모성이라면 닐스를 어떻게든 찾아내 아작을 내주던가 노마님에게 해야 맞는 것이 아닌가? 닐스 로렌트가 끝까지 가리워진 신비의 인물로 나오는데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암시만 줄뿐 마땅히 독자를 납득할만한 어떠한 설득력도 없다. 그리고 베라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나오지도 않은 채 끝은 되게 모호하게 관련없는 진술로 끝나고 있다. 

이외에도 문제점은 많아 보이지만 더 거론하고 싶지가 않다. 그저 이렇게 결함이 많고 되다만 이야기가 영화화 됐다니 그 영화는 어떨까? 궁금할 뿐이다. 한마디로 뭐하나 시원하게 재대로 건드려 주는 게 없다.  

나 역시도 아가시크리스티의 부활이니 어쩌니 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긴 하지만 이런 터무니 없는 수식어는 좀 뺐으면 한다. 돌아가신 추리의 여왕님 관속에서 다시 일어나실라.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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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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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가 인상적이다. 기다란 액자안에 해변가에서 웬 낮선 남자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고 그 사이를 개 두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웬지 이 남자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곡을 연주하고 있을 것만 같다.  

심플하면서도 뭔가 비대칭스럽다. 그러면서도 책 제목은 어딘지 모르게 낭만적여 보인다.  

독일계 보스니아 작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배경 역시 90년대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 때를 다루고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전쟁의 참상을 우울하게 그리고 있을 것만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쩌면 그리도 수다스러운지. 별로 처참하지도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나름으로 보는 눈이 따로 있는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 어렸을 땐 어땠을까? 나 역시 어린 아이답게 세상을 보고 느꼈을 텐데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너무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안네의 일기'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이 생각이 났다.   

알겠지만 안네의 일기는 전쟁중에도 안네란 소녀의 너무나 맑은 심성으로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글을 써서 오히려 처연하게 느껴지는 책이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정말 6.25 그 시대에도 전쟁을 모르는 동네 하나쯤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사실 알고 보면 이런 영화나 소설은 찾아보면 더 있을 것도 같다. 영화 '지중해'도 그렇지 않던가?   

폭풍 중의 고요가 있는가 하면 폭풍전야도 있다. 그래서 세상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왜 전쟁하면 비참할거라고만 생각하는가? 물론 거의 대부분이 비참하다. 무고한 시민이 다치고 죽어나가는데 거기에 무슨 평화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어렵고 힘든 때를 지날수록 악해질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선하고 인류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신비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인간이고 지옥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난 이 작품이 내가 앞서 말했던 일련의 작품 보다 좋다고 말하기엔 다소 조심스러워진다. 사실 나의 경우 동유럽 그것도 보스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호기심에 선택했지만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낮선 문체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또 어쩌면 내가 보스니아를 너무 몰라서 일지도 모른다.   

어느 평론가는 작가를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 비견하곤 했는데, 포어 역시 내가 읽어보지 못한 작가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감당이 안되기는 이 작가와 마찬가지 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너선 사프란 포어를 좋아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신중히 결정하란 말 밖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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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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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쑤퉁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짼데 내가 읽은 '나, 제왕의 생애'에서는 환상적 우화를 선보였다면 이 작품은 뭐랄까 인간의 원초적이면서도 원시적인 욕망을 여지없이 까발렸다고나 할까? 유독 쌀에 집착하는 우릉과 그 가족의 내면 풍경을 흡입력있게 묘사한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나, 제왕의 생애'처럼 그의 글은 이미지적이어서 영화적 상상력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작가가 지닌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릉과 그 가족의 내면 풍경을 읽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콩가루에 난장판이 어디 있겠는가? 작품은 교활함에, 변태에, 피 범벅은 말할 것도 없고, 무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런 가족이요 가정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더구나 작품에서는 이런 가족관계가 우릉 1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대에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읽다보면 처참하다는 느낌이 들고 읽다보면 그들이 차라리 측은하다는 느낌이 들기까지 한다.   

아무리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가족만큼은 서로를 보듬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고아로 태어나서 한 번도 타인의 사랑 아니야 친절을 받아보지 못한 우릉은 그저 세상에 대한 원한과 복수로 산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유일한 위로요 소망이었던 건 '쌀'이었다. 아니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작가는 왜 다른 하고 많은 것 중에 주인공의 욕망의 대상을 '쌀'로 정한 것일까?  

작품의 배경은 20세기 초 중국 사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그 무렵이면 먹고 살기 힘들었을 때이다. 그 시절엔 누구나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시대이고, 살기 위해 먹기보단 먹기 위해 살아야 했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쌀에 유독 많은 집착을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저 유명한 펄벅의 <대지>에서의 왕룽을 떠올리게도 한다. 물론 그 작품에서 주인공 왕룽은 땅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는 게 다르다는 것이고, 이 작품에서는 언급한 '대지'보다 더 극악스럽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다른 것일 것이다.('대지'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해 보자면, 그 작품은 여성 작가가 썼기 때문에 아무래도 뭔가 여성적 정서가 있어 보인다. 또한 서양인으로서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중국적 작품은 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다는 건 자명하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얘기했을 때 '원초적'이란 표현을 썼다. 그것은 주인공의 욕망을 가감없이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원시적'이라는 표현도 썼다. 그것은 우릉의 가정이 전혀 교육받지 못하고 전혀 문화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교육 받지 못하고 문화적이지 않은 면들은 또한 2대에 걸쳐 있다. 만일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 향유를 누렸더라면 그처럼 극악스러스럽고 비참한 최후를 맞지도 않아 보인다. 게다가 그 비참한 최후란 게 우릉의 최후일뿐 그것은 여전히 계속될 것만 같다.  

인간은 원래 악하다. 그 악한 면을 깨우치지 못하면 무엇이 선이며 악한지도 모르게 된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적 환경은 그것을 어느 만치는 깨우치고 완화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하는 건 교육과 문화적 환경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다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리 없는 그들은 나의 불행 전부가 남 탓인 양 전가하며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악만이 남아있을 것 같지 읺은 관계의 흐름 속에서도 아주 희미하게 남아 인간의 연민과 정을 느껴볼 수 있는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것은 치윈이 언니 쯔윈이 자신의 팔찌를 훔쳐 갔을 때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을 것처럼 만나러 가지만 언니의 처량한 신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돌려 받기를 포기했을 때나, 사고로  언니가 죽었을 때 울었다는 점 들은 인간이 마냥 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남자여서 일까? 크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은 지극히 마초적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작품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반면교사라고, 앞서 언급한 교육적이고 도덕적이며 문화적인 측면은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끝까지 시종일관 인간의 악한 면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작품은 그래서 괜히 내 영혼까지 악하게 물들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작품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어쩌면 그것을 표현하되 위트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읽다보면 그래서 사랑이 중요하며, 도덕이 중요하고, 교육이 중요함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을 작가가 교훈적으로 보여줄려고 했다면 이 작품은 자칫 지루하고 빤한 것을 보여준다고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쑤퉁은 이야기꾼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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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7-31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전 한권도 못 읽어보았는데

진달래 2009-08-0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쑤퉁... 이름만 들어봤어요.
이 작품도 꼭 기억해둬야겠네요. ^^

stella.K 2009-08-05 10:34   좋아요 0 | URL
이 사람 좋아요. 이 사람의 작품은 읽는대로 모아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