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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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작가를...아니 작가의 작품을 알긴했지만 나는 작가를 쉽게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작가와 독자도 궁합이 있는 것일까? 여타의 독자들이 신경숙이란 작가에게 매료 당하고 있었을 때, 나는 작가의 작품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어쩌면 콧대 높은 독자이거나 맹꽁이 같은 독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작품에 변화 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이것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좋은 기회에 이 작품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작가는 엄마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엄마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마음이 든다. 우선 고마움, 미안함, 측은함 등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에게 고마우면 고맙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쉽게 말하지 못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는데 목구멍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마음 한쪽에 멍울져 남아있다. 난 왜 이리도 엄마에게 이 말을 못하는 못난 딸이 되었을까?

나의 엄마는 속정은 깊으시지만 그것을 웬만해서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당신의 감정 또한 웬만해서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아니 어쩌면 못하시는) 분이셨기에 그 성격 그대로 자식들이 물려 받았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가끔 말하곤 한다. 우리가 '오사박 하지 못하다'고. 즉 정 깊고 살갑지 못하다는 뜻이리라. 그럼 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을 닮은 걸 어쩌라구.'하지만 그것이 엄마 당신에겐 얼마나 큰 외로움일지, 아쉬움일지를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잘 알지 못했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말, 미안한다는 말은 그가 나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유지됐을 때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늘 너무 가까이 오래 있으면 그 표현이 얼마나 어색한지 한국 사람이면 다 안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이랴. 정작 고마워 해야할 사람에게 그리 말하지 못하는 것은.

소설은 어느 날 갑자기 엄마를 또한 아내를 잃어버린 큰 아들과 남편, 딸과 화자의 싯점에서 그의 부재를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나처럼 엄마의 눈을 보고, 손을 감싸 안고, 고맙다, 미안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차라리 이 방법으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이 소설을 잃고 눈물을 흘리지 않겠으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설속의 엄마는 결코 세련되거나, 학식이 많거나,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아무리 이런 것으로 결정되는 사회라고 해도 우리의 기억속의 어머니는 작가가 말하는 어머니와 그 맥을 같이한다. 

상황은 조금씩 달라도 옛날 우리네 엄마들은 거진 대부분은 이러고 사셨다. 어쩌면 그것이 여성의 삶이고, 일생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처럼 쉽지 않은 삶을 살아 가면서 가정이란 끈을 놓지 않았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엄마들은 그리고 딸들은 너무 쉽게, 엄마 같이 살지 말라고 또 엄마 같이 살지 않을꺼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누구 누구의 아내, 누구 누구의 엄마로 남는 것을 안타까와 하고, 거부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일뿐 그것을 선택했다고 잘 사는 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짖고 외치는 동안 여성성이 뭉게지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성이란 무엇일까?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듯이 '생명 탄생과 그 돌봄' 즉 모성애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빼고 얘기해 봤더니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사막처럼 변해버린 세상이다.   

소설에 보면 엄마인 화자가 너희들이 한창 자라느라 먹을 것을 밝힐 때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회상하기를 죽어가는 개 조자도 아내의 손에서 토실토실 잘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은 어머니를 가리켜 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희망으로 알았다고 회상한다. 이것이 바로 여성성 모성애인 것이다. 자기는 없고 남을 위해 바쳐진 삶.

그런데 우린 지난 세기 동안 페미니즘이란 미명하에 여성의 삶은 너무나 많이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착취 당했다고 하고, 상처 받았다고 하고, 도전적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생명 탄생과 돌봄'이란 여성성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왠지 여자가 결혼을 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을 '전락'이라고 지나치게 폄하하고 경도 되어진 시각에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도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도 학교에 가야하는 우리를 위해 새벽이면 일어나 도시락을 싸야했고 그것을 지겨워 했다. 그것도 우리가 아무 반찬이나 안 먹으니까 특별히 신경을 더 써야했다. 그러니 세상에 어떤 사람이 지겨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 것을. 그 의무에서 벗어난지 한참 지난 후에도 엄마는 그때를 돌이킬 때면 진저리를 낸다. 그래도 엄마는 그 의무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무엇이던지 잘 먹고 건강한 우리들을 내심 뿌듯해 하셨다.

그래도 엄마가 나은 자식 넷중 내가 가장 엄마의 애간장을 녹였던 문제 많은 자식이기에 엄마는 한동안 자식을 온전히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사셨다. 그때도 난 엄마를 조용히 다독이지 못했다. "엄마, 그건 엄마 책임이 아니야. 내 운명이 그런 거야."라고. 어쩌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엄마의 일말의 남은 자존심을 쓰러버리는 것이 되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꿋꿋이 당신 앞에 살아주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언제부턴가 나보다 더 자유하고 당당해 보였다. 엄마는 지금도 "너희들이 시집 장가를 갔으면 내가 이 고생을 안해도 되는데" 하면서 당신이 손수 장을 봐다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곤 하신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우리만 편하게 먹고 살기 위한 것만이겠는가?

오래 전 어느 해 봄, 교회에서 태안으로 야유회를 간적이 있었다. 그때 가족도 함께 와도 된다고 하길래 나는 엄마에게 같이 갈 건지를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평소 낮선 사람들 틈에 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서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서 나는 특산물을 싼 값에 사기 위해 그 길을 나선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냥 구경하고 놀기위해 온 것이었지만, 엄마는 오로지 어디에 뭐가 있고 이걸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나중에 서울에 도착하니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 짐이 한보따리였다. 엄마가 현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나는 사지 말라고 창피하다고 옆구리를 찌르곤 했었다. 그래도 엄마는 나의 이런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나 뿌듯해 하던지. 그 사온 것 가지고 두고두고 맛있게 먹었으면서도 말이다. 엄마는 그때 그랬다. 이것이 어디 나 혼자 먹자고 이러는 거냐고. 

그래. 모성애란 그런 것일 것이다. 나 혼자만 먹을 수도 있는데 가족과 함께 더불어 먹고 함께 잘 사는 것.  누군가는 그랬다. 돌볼 대상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정신병에 걸리는 법이 없다고. 정신병은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에서 생겨나는 거라고.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견 맞는 얘기 같다. 

난 안다. 엄마가 그리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게 사시는 그렇게 아직 돌볼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대상이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할 때 당신은 비로소 정말 늙어버리릴 거라는 것을.

얼마 전, 나는 우연히 물어 본적이 있다. 엄마는 언제까지 월경을 했냐고. "마흔 여덞까지 했지, 아마." 한다. 엄마가 그쯤했다면 나도 대충 그맘 때까지 할 것이다. 그때까지 얼마가 남았을까 헤아려 본다. 엄마는 월경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됐을 때 너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웬지 나는 그때가 됐을 때 좋아만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난 아직도 돌볼 대상이 없기 때문에. 엄마의 삶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앞으로 그 삶에 이를 수 있겠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삶은 이렇게 오래도록 엄마에게 기생에서 연명하고 있는데, 앞으로 우리 엄마는 누구에게 의탁했으면 좋을까 가끔 막막해지곤 한다. 그나마 엄마가 신앙을 가지고 저리 꿋꿋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엄마가 믿는 그분께 감사치 않을 수가 없다. 나이를 먹으니 엄마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눈물 지을 때가 많아졌다.

"주님, 저의 엄마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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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흙 2008-11-21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또 울었어요. 이글 읽고서. '사랑한다는 말, 미안한다는 말은 그가 나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유지됐을 때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습니다...

stella.K 2008-11-21 18:32   좋아요 0 | URL
에고, 이제보니 파란흙님 울보셨군요.^^
 
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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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결혼한 여자들 거의 대부분은 결혼은 여자에겐 하나도 좋은 것이 아니며 남자들에게만 좋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말에(어느만큼은) 동의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결혼은 남자들에게도 힘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결혼이 남자들에게도 어려운 것은,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요 그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 날과 같이 경제가 불안하고 직장에 오래 살아남기란 게 쉽지 않은 세상에서 남자가 가정을 책임져 나가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렇지 않더라도 책에서처럼 그럴 염려는 아직 없는 부르조아 인텔리 부부라고 해도 아내와의 소득격차 때문에도 남자들은 은근히 열등감을 갖는다고 한다. 게다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방법을 몰라 좌충우돌하고 왕따가 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니 결혼은 남자에게도 결코 좋은 것이라고마는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면서 왜 결혼을 하냐고 물으면 결혼은 또 그 나름의 신비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결혼에 대해 함부로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금물일 것 같다.

결혼을 주제로한 작품은 많다. 이 작품도 그런 작품중의 하나다. 내가 읽으면서 조금 의아해했던 건 결혼 안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의 작가가 결혼의 풍경에 대해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솔직하고 시종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며 썼다. 어찌보면 작가 자신의 이야기일 것 같은 이 작품은 페이소스마저 느끼게 해 주는데 비록 결혼에 대해서는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솔직함 때문에 이 작품이 사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사실 결혼하면 누구만 좋고 누구는 나쁘고가 어디 있겠는가? 행복하면 다 같이 행복하고, 힘이 들면 다 같이 힘든 것이 결혼일 것이다. 그렇게 이분법적 사고는 결혼생활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남자의 시각에서 서글픈 결혼생활을 읊조리는 것이라 조금은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선 남자들의 결혼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들을 수 있어 나름 읽을만 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재치가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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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8-10-2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명절이 힘들어진 것 외에는 다 좋아진것 같은데요.... 결혼이란 누굴 만나 사느냐에 좌우되지 결혼 그 자체가 좋다 나쁘다 따질 것은 아니라고 봐요.^^

stella.K 2008-10-22 11:14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야클님!
정말 그렇겠죠? 결혼 자체가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는 거겠죠?
근데 야클님도 명절 땐 힘 드시구나.ㅎ

메르헨 2008-10-2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제목이 그래서 프랑스작가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결혼...좋아요.
영원한 내편이 있다는거.
내가 보는 세상만 있는게 아니더군요.^^
아이가 생기고나선 더욱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고 넓어진 느낌이랄까요?
그러면서도 때로 힘들긴 하죠.^^
스무살을 넘기면서 아버지의 어깨가 참 무거웠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남편(내편)을 보면 든든하면서도 측은하죠.
스텔라님의 쓰신 리뷰를 보면 꼭 그 책이 보고 싶더라구요.ㅋ 지름신 강림~

stella.K 2008-10-25 11:42   좋아요 0 | URL
ㅎㅎ 별로 잘 쓰는 리뷰도 아닌데 예쁘게 봐 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보세요.^^

진달래 2008-11-0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하면서 여자나 남자나 다 변화가 있는데, 그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가 결혼 성공에 대한 관건이 아닐까요... 전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데 좋단 넘이 없어서... ㅋㅋ 너무 속보이는 남자의 엄살이 전 귀여웠어요. 이 작품에서... ^^;;

stella.K 2008-11-04 13: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엄살.ㅎㅎ
저도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요.^^
 
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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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조금은 특이하다. 언듯 봐서는 늘 피곤에 찌들은 무기력한 현대인을 지칭하는 걸까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읽다보니 독특한 소설이란 생각이 들긴한다.

무중력 증후군이라. 뭔가를 풍자하는 듯도하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집단 무의식을 약간은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해 볼려고 하는 건 아닌가? 요즘의 혼돈의 사회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때 아니 지금도 그 충격에서 완전히 자유한 것도 아니지만, 쇠고기 광우병에 대한 집단적 반발 또 그에 대한 지나친 우려라는 인식속에서 도무지 누구의 말이 옳고 이 현상을 뭐라 규정지을 수 있으며 이것을 주도하는 세력을 뭘까? 우리는 어디에 서야하며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렇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앞서 말한 그로테스크한 풍자 소설이란 시도는 좋았지만 그 깊이엔 미흡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름 구성은 좋았지만 읽으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냥 흔히 있을 수 있는 상황에 몇가지 그로테스크한 상징을 섞어 놓은 것 같다. 그냥 인간의 행동 양식을 지배하는 집단적 무의식이 무엇인지를 좀 더 깊이있게 파헤쳤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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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8-08-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재도 특이하고 주제도 있었지만 문제는... 재미가 좀 덜 했다는 거...
에효... 전 공감이 잘 안 가더라구요. ㅋㅋ
 
시계탑
전아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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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몰랐다(아마도 본인은 지금쯤 이 유명하다는 말을 꽤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만한 문체를 가지고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게 가히 놀랍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왠만한 작품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교만해서인지 아니면 뭘 몰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기고 뛰고 나른다는 요즘의 작가들에게 함부로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가는 뭔가 다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 연이를11살 때부터 19세까지를 홀수 나이로 아우르고 있다. 연이의 삶을 이루고 있는 주변은 어둡고 칙칙하다. 띨멍한 병욱이,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늘 다른 사랑을 꿈꾸는 엄마, 자기 세계에만 웅크리고 있는 같은 반의 서영이 등. 하나 같이 밝은 구석이라곤 없다. 그 가운데 영악한 아이로 자라는 연이의 내면 세계 역시 음습하며 어찌보면 스산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도 울지 않는 아이. 학교에서 여행을 보내 주는 것도 겉으로는 근사한 이유 같아도 그 속내를 알고 보면 좋은 것마는 아니지만 그것을 냉정히 이용할 줄 아는 아이. 연이는 꿈은 꾸지 않지만 현실을 그 어떠한 미사여구나 어줍짢은 해석없이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병욱과 서영이 셋이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본 연극 <청춘예찬>을 떠올리게도 한다. 물론 연극의 내용은 좀 다르긴 하지만 그것 역시 어두운 10대 말을 다루고 있고 보고나면 조금은 우울해진다. 책을 읽다보면 나의 11세는, 13세는...17세, 19세는 어떠했는가를 반추하게 만든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처럼 특별하지는 않았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사치스럽진 않아도 별 부족할 것 없이 살았다. 그런데도 나 역시 그때를 떠올리면 웬지 공허롭고 우울하다. 너무 엉터리 같이 살아 10대를 다시 살아보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10대를 다시 산다고 좋을까?

누가 10대의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했는지, 비전을 가지라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전체 사춘기 아이들 중  상위 3% 이내의 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 아닌가? 그 반대의 아이들은 오히려 세상을 냉정하게 이용해 먹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또 왜 사춘기 소설은 그토록 칙칙해야 하는 것인지 작가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밝게만 그려도 구라 같지 않은가?

어쨋거나 이 영악하기 이를데 없는 이 책의 작가 만큼은 지켜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그만한 나이에 이런 작품을 쓴다면 앞으로 그녀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될 때는 어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작가의 건필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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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8-06-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지켜보고 싶다하니 나도 지켜보고 싶어지는 이 마음!!
잘 지내죠? ^^

stella.K 2008-06-27 16:18   좋아요 0 | URL
앗, 플레져님! 오랫만이어요.
잘 지내죠? 자주 좀 봐요!^^
 
렘브란트 반 라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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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을 보는 것은 나에겐 그다지 편하고 좋은 것은 아니다. 전에 에밀 졸라의 <작품>이란 책을 읽었는데 결국 읽다 읽다 그 끝을 보지 못하고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세잔을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하게 그려놔 책에서 자양분을 얻기 보다 오히려내 안의 기운을 뺏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글쎄...지금쯤 그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때 보단 좀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으려나?

렘브란트 역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가의 삶이란 게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평전으로든 소설로든 이미 접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술가들이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빚진 돈을 갚기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됐고, 우리의 부유한 톨스토이 할아버지도 끝내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졋다고 하지 않은가? 모짜르트나 베토벤은 어떤가? 내가 읽은 렘브란트도 말년이 그다지 행복해 끝난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했던 건, 저자의 작품에 대한 다채로운 표현 때문이었다. 저자는 소설적 문체만을 구사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렘브란트를 묘사하고 있다. 거기엔 주로 희곡적 방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게 참 이채롭게 느껴진다. 그런 것으로 보아 작가는 희곡에 대해 아주 조예가 깊거나 아주 관심이 많아 보인다. 또한 이밖에도 서간체도 사용하고 있고, 시도 들어가 있으면 한 인물에 대한 다양한 조명, 이를테면 '나'라고 하는 1인칭과 그를 보는 또 다른 시선 3인칭을 적절히 대비한 것 또한 작가가 렘브란트를 얼마나 신중히 다루고 싶어했는지를 볼 수가 있다. 더구나 문체는 상당히 지적이다. 그래서 지적 욕구를 채워 주기에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보다 보면, 또 다른 점에서 이 책을 생각하게 만든다. 즉 이를테면 개인적 신앙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주인공의 노력이다. 알겠지만 렘브란트가 살았던 시기는 바로크 시대로서 신의 세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 자신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 시대는 예술 작품 속에 자신이 믿는 신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길 즐겨했고 그래야 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비롯해 당대의 서양 예술가들은 성서를 토대로한 예술 작품을 그리기 좋아했으며 그것은 상당히 사실적이며 오늘 날까지도 명화로서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렘브란트도 인간이었던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 자신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만큼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금욕적으로 살았던 것도 아니었고, 인간적 실수나 없었던 것도 아니다. 때론 비난 받아 마땅할 일도 행하였으며 그런 자기 자신을 변호하느라 고뇌하는 것들을 본다. 특히 돈과 여자의 문제에 있어서 말이다.

돈과 여자라. 독실한 신앙이든 아니든지간에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고 깨끗해지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거기에 여자가 끼었다는 것이 같은 여자로서 껄쩍지근하긴 하지만 어차피 여자와 남자는 서로 끌리는 존재임에 틀림없으니 그냥 이성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란 말로 돌려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리고 여자가 사회적 약자인 것도 사실이니까. 렘브란트도 남자가 아니던가.

이 책을 읽고 있어서였을까? 요즘 부쩍 신앙과 인간의 위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하기야 이런 생각이 어디 한때뿐이었겠는가? 작년에 기독교에 대한 맹비난과 철퇴를 맞은 후로 나는 부쩍 왜 그들은 기독교인을 비난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문제는 신앙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점과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신앙은 순결함 그 하나만으로 지켜질 수 없다는 것에 비극이 있는 것 같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았고,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겠지만, 그는 그렇게 그려야 자신의 몸값이 올라가고 칭송을 받았다. 이것은 확실히 그에겐 또 다른 의미에서의 십자가였을 것이고 딜레마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러지 않던가? 저가 만일 신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것을 거부하시고 온전히 고난을 받으셨지만, 이후의 많은 신앙인들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다가 그 자신 스스로가 그 십자가에서 내려 온다. 그 이유는 그 십자가가 너무 극악스러워서일 수도 있고, 그 스스로가 신적 권위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십자가는 여전히 지고 쓸쓸히 죽어간다. 이 책에서도 렘브란트의 말로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일 것이다. 렘브란트는 실제로는 더 평안하게 죽어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더 비참하게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든 그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고, 그것으로인해 구원도 받으며, 그것으로인해 위해를 가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인해 남에게 도움도 주는 법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개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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