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로 이야기 2 - 홀로서기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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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가 점점 더 성숙해져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지로는 이제 본격적인 사춘기가 되었다.  

1권에서는 제멋대로고 자아가 강한 천둥벌거숭이 였다면 2권에서의 지로는 진지하다.

사람이 진지해진다는 것은 나와 세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에 골몰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2권에서의 지로는 여전히 고집이 세고 동시에 의협심도 강하다. 하지만 세상과 어떻게 타협하고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에 더 많이 치중하다 보니 쉽게(?) 자신의 뜻을 바꾸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선 바람직해 보인다. 그것은 지로 주위에 좋은 선생님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어른이 없다면 지로는 자기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다소는 삐뚤어지고 독단으로 흐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한 인간이 성숙하기까지 주위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사람 때문에 독단으로 흐를 수 있는 것도 막을 수 있으며 세상을 좀 더 긍정하고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아사쿠라 선생님은 지로에게 있어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 었던가?

물론 지로 주위에는 항상 좋은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로의 친할머니는 여전히 지로에겐 부담스럽고 싫은 존재다. 하지만 1권과 달리 그는 이제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으며 때론 불쌍하다고도 고백한다. 물론 할머니와 좋게 지낼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런 중에도 그런 마음까지 먹을 수 있다는 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때론 사람의 새로운 발견은 시간이 흘러야 진가가 들어나는 경우도 있다. 지로에게는 새어머니가 그랬는데 그전까지 그에게 새어머니의 존재는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어머니를 새롭게 조망하게 되는 건 상황과 환경의 변화가 가져다 주는 축복이 아닐 수가 없다. 

어찌보면 지로는 오늘 날을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오늘 날 지로같은 청소년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이만큼 진지하고 어른스러울 수 있을까? 

학원 다니기도 빠듯한 오늘 날의 청소년들이 언제 이렇게 자기 앞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진지해져 볼 수가 있겠으며 언제 어른들의 말을 청종할 시간이나 기회가 있을까? 그런 기회를 가져도 과연 좋은 말을 들려줄 그런 어른이나 선생이 있을까?  

물론 이것은 또 어쩌면 기우인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오늘 날의 청소년들이 공부만하고 자기가 관심있는 것이 아니면 나머지 것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런 이기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로벌 리더로서 내일을 준비하는 청소년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다면면 다행이다. 나는 청소년 아이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     

며칠 전 청소년들이 시국선언을 했다. 이것을 두고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겠다. 그것을 알려면 청소년들이 시국선언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며 과연 시의적절한 것인지도 생각해 볼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을 보면 하나 드는 생각은 우리의 아이들이 생각없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중에도 아이들을 잘 지도하고 조언해 줄 선생님이 계시다면 좋을텐데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된다.  

무조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너희들이 무슨 주제넘게 시국선언이냐고 윽박지르거나 반대로 그러한 청소년들의 까지도 정치에 이용해 먹는 선동적인 어른이 있다면 반성할 일이다. 단지 청소년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지라도 그것을 긍정해주고 앞으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미쳐질 것들에 대해 그리고 나라의 장래에 이득이 될 것인지 실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가 판단해 볼 수 있는 그런 것으로까지 사고를 넓혀 주고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지로가 뜻있는 친구와 함께 뜻하지 않게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아사쿠라 선생님 구명 운동을 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읽으면서 오래 전 나는 주일학교 교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 었을까 반성을 하게도 된다. 

아무튼 지로는 참 멋진 아이다. 본권은 청소년기가 주를 이루어 씌여진만큼 청소년기는 아무래도 생각이 많은 시기라 내용 역시 어느 만큼은 사변적인 생각과 대화체 문장들이 많아 보인다. 그래서 어찌보면 조금은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만큼 작가 자신의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읽는데 어려움이 있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1권 때도 그랬지고 자전적 소설이라 더욱 그렇긴 하겠지만 이 소설은 가식이 전혀 없다. 조미료 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담백함 그 자체만을 담았다.(어찌보면 7,80년대 소설을 읽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그래서 누구는 건조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배재되 있기 때문에 인생의 맛 그 순수함을 느낄 수 있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좋다는 느낌을 받는다. 진실을 담은 문학 작품은 그래서 그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는가 보다.(우리나라엔 이제 소개가 됐지만 일본에서는 꽤 오래된 작품인 듯 하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더불어 또 하나 생각한 것은 우리도 이 책처럼 자기 자서전 하나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것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이든 아니던 지간에 말이다. 그러면 지로처럼 감사할 것들이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진지하게 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살아 온 걸 책으로 쓰자면 10권쯤 나올 것이라고 하면서 왜 단 한 권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작고하신 이청준 선생의 '자서전들을 씁시다'란 책이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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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군화>를 리뷰해주세요.
강철군화 잭 런던 걸작선 3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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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좋은 소설을  읽었다. 

이미 100여 년 전에 잭 런던에 의해서 씌여졌고 우리나라에선 아직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때 운동권에선 많이 읽혀졌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난 왜 이제야 이 책을 알았을까? 하긴 난 그 시절 운동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바도 많지 않았고 거의 무관심 했으니 이런 책이 인구에 회자가 된 줄은 알지 못했다. 그때만해도 불온서적이 아니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세상 참 좋아졌다.  

저자는 서기 27세기 통일된 사회민주주의의 문헌학자 앤서니 메러디스가 에이비스 에버하드의 원고를 공개하는 형식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것은 20세기 초 에이비스 에버하드의 남편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어니스트 에버하드의 일대기를 에이비스의 입을 빌어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당시 미국의 과두지배체제(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하에 자본가들은 넘쳐나는 잉여를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자본을 추척하고 있었고 이를 비판하며 중산층의 몰락과 늘어난 노동자들의 실업과 빈곤의 문제로 허덕이는 가운데 이런 불공평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사회주의자 어니스트와 이에 동조하는 세력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어니스트가 여러 지식인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어니스트가 꿈꾸는 세상에 대해 이론적인 것을 증명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와 그의 추종세력의 투쟁 과정이 사실적이며 박진감 있게 그려져 있다.

물론 작품은 어느 한쪽의 승리를 그리지 않고 사회주의자 계속적인 투쟁을 다짐하며 끝을 맺고 있다. 여기서 나는 '물론'이란 단어를 썼는데 그것은 100년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계급 투쟁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어찌보면 앞으로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지구가 없어지지 않는한 숙명의 라이벌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전망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선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며 저자는 이렇게 열린 결말로 끝을 낼 수 밖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잭 런던이 초두에 '서기 27세기 통일된 사회민주주'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도 사회주의가 승리하게 되길 바라며 이 책을 썼던 것 같다. 

애석하게도 잭 런던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지금은 21세기 초 이 책을 읽은 벽안의 독자인 나 역시 사회주의가 승리하는것을 살아생전에 볼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잭 런던이 말했던 과두지배체제와 강철군화의 망령은 20세기 초가 그랬던 것처럼 21세기 초에도 여전히 아니 더 또렷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보라. 오늘 날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은 80%의 노동자 집단이 아니다. 단 20%의 자본가 집단이 세상을 지배한다. 아니 누구는 상위 3%만이 세상을 지배한다고도 한다. 그리고 못 사는 사람은 여전히 못 살고 잘 사는 사람은 여전히 더 더욱 잘 산다. 우리가 비난해 마지않는 건 이런 비대칭의 사회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자본가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하여 눈을 뜨지 않는 것과 그들의 오만과 횡포다. 

억울하면 출세하랬다고 자본가들은 그들에 대하여 놀리기만하고 자꾸만 자본주의의 환상만을 심어준다. 그리고 조금만 자기네들의 세계가 위태로워지면 잭 런던이 말했던 '강철군화'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위태롭게 만든다.    

바로 어제 우린 한 나라라의 대통령을 지냈던 어르신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충격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르신의 죽음을 언론에 공식 발표했던 그분의 최측근중 한 사람은 울먹이며 우리나라의 언론을 비난했고 특히 조중동이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통탄해 마지 않았다.  

조중동 그들이 누구인가?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고 권력의 단물을 달게 빨아 들였던 21세기 강철군화들이 아닌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어니스트의 아니 잭 런던의 통찰에 거의 전율하다시피 했고, 어찌보면 이런 계급 사회의 문제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잭 런던은 먼 미래 27세기엔 사회민주주의가 승리해서 오랜 과거의 일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열린 결말이라고 해도 긍정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글쎄, 서기 27세기라. 정말 그때쯤이면 잭 런던이 바라던대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현되어 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에서 살아 본적이 없고 자본주의가 아닌 세상에서 산적이 없다. 그래서 솔직히 죽을 때까지도 사회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는 세상을 보고 죽을 것 같지는 않다. 하다못해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독교회 조차도 자본주의의 단물을 빨아 먹은지가 오래됐는데 내가 어디서 잭 런던이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이상향을 보겠는가?  

그래. 내 당대에선 사회민주주의 승리를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먼 미래에서라도 사회민주주의가 승리하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훗날에 강철군화에 짓밟혀 비명에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도 그 죽음이 헛되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덧) 이 작품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탁월한 작가는 통찰력이 있으며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를 생각해 보았다. 또한 잭 런던은 상당히 지적이면서 뛰어난 문체의 소유자였다. 오죽하면 각주조차도 재미있다.  

그래서일까? 나 개인적으로는 미국 문학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않지만 잭 런던의 작품은 앞으로 몇 작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말랑 말랑한 소설만 읽어 온 나에게 이런 소설은 모처럼 의식을 깨우는 맛이 있어서 좋았다. 내가 알고 보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알 필요가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  

장 지글러의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내가 지금 어떤 사회속에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벽안의 독자들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여러분도 노동자계급도, 우리 모두 인류 역사의 장을 어둡게 만든 그 어떤 전제정치보다 잔혹하고 끔찍한 강철군화 아래 짓밟히겠지요. 그런 전제정치에 잘 맞는 이름이죠. 강철군화!" (1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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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2009-05-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가 22년 전에 읽은 책이라서 반갑네요. 대학 새내기때 읽었던 책인데, 읽고 나서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지금도 그 느낌이 있답니다. 정말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stella.K 2009-05-26 10:4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빨려들어가듯 읽었습니다.
잭 런던 참 매력적인 작가더군요.^^

2009-05-25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로 이야기 1>을 리뷰해주세요.
지로 이야기 1 - 세 어머니
시모무라 고진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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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좀 두꺼워서(무려 600페이지가 넘는다) 읽기가 좀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묵직한(내용으로 보나 두께로 보나)책이 한 권도 아니고 무려 세 권이란다. 앞으로 2,3권을 계속 읽을지 모르겠지만(기회만 된다면 모두 완독하고 싶은 생각도 확실히 있다. 그런데 왜 서평단은 1권만 보내주는지 모르겠다. 이왕 서평단에게 서비스 할 것 같으면 끝까지 잘 해라! 2,3권은 너희들이 사서 봐라는 식의 이런 이벤트는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1권까지의 나의 소회를 먼저 말한다면, 근래에 보이드문 만족한 독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고 많은 자잘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큰 감동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읽다보면 주인공이 세상과 자아에 눈 떠가는 과정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가 있다. 또한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면서 아련해지는 순간이 참 많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묻게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찌보면 철학적 질문이라기 보단 교육학적 질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했다. 이 질문이 교육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인간은 많은 혼란을 겪게 될 것 같다. 

지로의 경우를 보자. 그는 날 때부터 교육을 위해 남편이 어느 초등학교 교지기(아마도 지금의 수위쯤 되는 것 같다.)로 있는 유모의 집에 일정 기간 위탁되어 진다.  

참 단순하지 않은가? 과연 교지기가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남의 자식인데 그 집에 잠시 위탁되어진다고 해서 과연 교육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인생 초반 지로는 엄마와 적지 않은 갈등을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친할머니와 갈등, 형제들 특히 동생과의 갈등은 내내 지로를 힘들게 만든다. 그러니 지로의 교육을 위한 선택을 위해 교지기의 집에 맞겨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로가 인복은 있는가 보다. 1권은 지로 인생의 청소년기까지만 다루고 있는데 중간 중간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초기 엄마와 친할머니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암초 같은 존재였다. 사실 어찌보면 이들도 긴 안목에서 봤을 때 지로에게 꼭 나쁜 사람으로만 비쳤던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나쁜 사람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니까.  또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내가 성숙해진다. 당시는 괴롭긴 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도 지로 인생에 있어서 정말 다행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리고 유모가, 의붓 외할아버지와 중학교에 들어와서 만난 선생님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중학교 생활이 심드렁 할 때 만났던 선생님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되고 인생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또한 그것은 지로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정말 나에게도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쳤던 선생님이 몇 분 계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지 못할 선생님이라면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던 담임 선생님이셨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건 이선생님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고, 내가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도 이선생님의 영향이 크다.    

그러고 보면 어른은 말 그대로 선생(先生)이고, 선생이어야만 한다. 

책에도 보면 지로의 친할머니는 지로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놓은 인물로 나오는데 아이를 탓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지로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지로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었다. 아이가 나쁘다면 누구에게로부터 영향을 받았겠는가? 그것 또한 어른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나무란다는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그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어른이 먼저 훌륭해지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나 자신 훌륭해 질 수 없다면 훌륭한 어른 밑에 있도록 해줘야 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주위에 내 아이를 맡길만한 훌륭한 어른이 있는가? 우리의 아이가 언젠가 나를 보고 배울지도 모르는데 나는 과연 본받을만한 어른인가? 이것에 우리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날의 교육도 그렇다. 지식을 전수하는 면에서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열이란 건 세계적으로 그 명성과 권위를 자랑하지만 진정한 전인교육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이 전인교육이라는 건 아무리 교육공학이 발달이 되어도 사람이 아니면 전수할 수 없는 것인데 누가 전달해 줄 것인가? 과연 이 책에 나오는 선생님들이 이 시대에도 존재할까?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에게 감동스러웠던 건 지로가 인생의 수 많은 역경과 안개속을 하나 하나 헤치며 나가는 장면이 참으로 좋았고 지로가 정말 사랑스러운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런 점에서교육의 완성은 인격의 완성을 이루는데 있다는 생각을 새삼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사랑 받기에 합당한 존재들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 존재와 사명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데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자신의 경험과 깨달은 바를 고백적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체험에서 나오는 고백처럼 울림이 강한 것도 없을 것이다.  

책이 지나치게 두껍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수도 있겠지만 쉽게 풀어낸 문체가 읽는데는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고 몰입도 좋았다. 일독을 강추한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고 싶다면...!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시누헤1,2>. 자아에 눈 뜨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에서.(나 개인적으론 그다지 권할 생각은 없는 작품이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남에게 이기는 길을 구하지 말라. 나를 이기는 길을 찾기에도 인생은 짧다." 

"......다른 이의 허물을 사랑하는 것이 지혜이며 용기다."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면 너의 고통부터 견뎌라." 

"......나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더라도 그를 위해 좋은 일이라면 그를 위해 실천하라." 

"......젊음은 누구에게나 불행하다.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5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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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를 리뷰해주세요.
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6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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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이 참 좋아졌단 생각이 든다. 내가 사춘기 시절엔 따로 '청소년 문학'이란 장르가 없거나 있어도 극히 미미했던 것 같다.  있다면 <얄개전>이나 <내 이름은 마야> 정도랄까? 그나마 그런 책들은 절판된지 워낙 오래라 잘 검색도 되지 않는다.  

그것을 다른 말로 '성장 문학'이라고도 한다지.  그 시절 그런 장르가 활성화 되지 않았던 시절엔 으레 <데미안>을 읽었어야 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고전을 읽어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시절이 좋아 당당히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을 받고 이 분야의 작가도 심심찮게 배출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청소년 만세!다.   

기회가 좋아 청소년 시절을 보낸지 한참 된 나로선 웬간해서 읽지 않을 책을 읽었다. 구병모라. 작년에 알게된 전아리나 <완득이>의 김려령과 함께 차세대 청소년 문학의 트로이카는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찌보면 순수라게 성장 문학으로만 하기도 모호하다. 그러기엔 환상적인 요소도 갖추고 있어서 환상 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긴 요즘에는 수순한 한 가지 장르만을 표방하지 않는 장르도 많고 그렇다면 이 작품도 역시 그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또 환상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고도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기도 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성장 문학으로보든 환상 문학으로 보든 삶의 진지한 성찰까지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사춘기에 무슨 삶의 진지한 성찰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춘기도 삶은 삶이다. 왜 진지한 성찰이 없겠는가? 

특별히 이 작품은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는 액자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 같은데  주인공이 위저드 베이커리에 숨어들어 겪는 에피소드는 그 나름의 좋은 구성과 이야기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주인공을 그다지 힘있게 바꿔 놓지는 못하고 있어서 종반에 가까울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고 자조하듯 끝나버리는 것도 별로 신통치가 않아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작가가 처음부터 주인공의 욕망이나 인생관에 대해 잘 드러내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주인공이라고는 해도 소극적이고 목격자 또는 관망하는 인물로 밖엔 보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끝도 별로 특별한 전망 없이 아, 얘는 이러면서 크고 역시나 소시민답게 기성 세대에 편입해 살겠구나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작년에 문학계를 온통 들썽이게 만든 <완득이>를 보라.(개인적으로 난 이 작품이 아주 많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완득이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욕망 때문에 독자 역시도 읽는 맛을 느꼈고 함께 흥분했었다. 이전에 이런 이야기가 흔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독자들은 어쩌면 이런 책에 목말라 했었을 것이고 그 목마름을 <완득이>가 정확히 스트라이크를 날려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올해 우린 얼마나 전망 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말에 의하면 내년은 올해보다 더 어려울거라고 말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위로 받고 싶고, 무엇인가로부터 힘을 얻고 싶어한다. 주위엔 안 되는 사람만 봐왔기 때문에 누구라도 힘 있게 도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픽션이던 논픽션이든 말이다. 언제까지 작가는 독자들의 바람을 외면한 채 독야청청할 수 있을거라고 보는가? 물론 작가는 잘 아는 이야기를 써야하고 스스로재미를 느껴야 한다. 하지만 독자를 외면하고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독자를 사로잡는 획기적인 이야기를 쓰거나 그럴 수 없다면 독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시도는 좋았으나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성장 문학의 틀은 갖췄으돼 주인공을 전망있게 그리지 못했으며, 환상 문학을 시도했으나 그 이야기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은 어떨지 기대하고 싶어지기는 한다. 다음 차기작은 좀 더 농익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패쓰^^)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그림자를 판 사나이> 환상 문학의 계보를 잇는다면...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환상 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에 관심있는 이.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못 오지. 인간의 몸은 그 자체가 우주이지만, 사랑을 위해서조차 내놓기에 턱없이 작고 모자라. 그런데 고작 증오를 위해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지."(1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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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터>를 리뷰해주세요.
스웨터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선물
글렌 벡 지음, 김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과연 제목이 '스웨터'가 맞느냐고 묻고 싶었다.

책은 너무나 예뻤다.  

글쎄, 편견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예쁘게 꾸민 책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책은 예쁘기만하지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게 평소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은 그런 나의 생각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았다.  

물론 이 책이 씌여진 의도는 짐작이 간다. 자전적 성격을 띄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쓴 것 같다.  

하지만 제목이 '스웨터'라면 그것과 얽힌 특별한 사연 또는 책 전체를 아우르는 뭔가의 아우라가 있을 법도한데 난 도무지 그것을 찾을 수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알겠다. 사실 엄마도 아들이 원하는대로 자전거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아들은 엄마가 떠 준 스웨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정말 반갑지 않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심술도 부려보고 짜증도 내고 싶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교통사고로 즉사를 하고 만다. 그 아들이 엄마가 선물한 그 스웨터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갖는 진정한 의미 보다는 엄마로부터 스웨터 선물을 받기 까지의 상황 설명이 너무 길고(물론 저자 자신이 그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스웨터가 나오고도 그것에 촛점을 맞추기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떤 삶을 살아왔나가 또 장황하다. 그러니 도대체 스웨터가 뭐 어쨌단 말인가? 그리고 알듯 모를 듯한 할아버지가 등장에 이야기의 신비감을 안겨 주려고 했지만 그의 존재도 너무 미미 해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에 그다지 기여를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의미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차라리 제목을 '스웨터'라는 명사를 붙이기 보다 동사나 형용사로 표현될 수 있는 제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이 반감이 될 것 같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뚱맞지는 않을 것 같다. 도대체 이 책의 원제도 '스웨터'였을까? 의문을 가져 본다. 가끔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원제와 상관없는 제목이 붙여지는 경우고 있는데 그럴 경우 편집자의 실수(?)는 결코 가볍게 용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원제 그대로 씌여졌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럴 경우 잘못을 탓해 뭐하겠는가? 태평양 건너 생명부지의 사람을. 

그런데 이 책의 홍보 문구와 수식어가 생각보다 화려하다. 이 책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에 버금가는 걸로 말하고 있다니. 좀 심하다 싶다. 그래도 그건 용서한다고 치자. 디킨즈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거론하면서 이걸 고전의 반열에 올리고 싶어한다는 건 너무 도가 지나치다 싶다. 아무리 저작권과 상관없는 작품이라고 해도 <크리스마스 캐럴>은 정말 고전이다. 그렇다면 이 책도 50년, 70년 후에도 독자들한테 회자될 거라고 보는가? 돌아오는 크리스마스까지 버틸 수나 있다면 다행 아닐까? 지금은 3월인데?  

솔직히 출판사의 이 근거없는 과장광고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우롱당하는 것 같아 적잖이 불쾌했다.  

너무 지루해 (미안한 일이지만) 결국 읽다 읽다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아, 물론 말을 조심하자. 나에게 안 좋게 읽힌 책이 넘에게도 안 좋을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아닌 것처럼, 책도 궁합이 맞는 책이 있고 안 맞는 책이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이 책은 나에게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독자들의 입맛은 까다롭다. 이젠 책이 하도 많아 책을 보는 안목도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저자나 출판 관계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아무 책이나 갖다 붙이지 말고.  

부언하자면, 영화의 경우 관객이 5분 이내에 이 영화가 제미있을 건지? 내가 끝까지 봐도 좋을 영화인지를 안다고 한다. 책의 경우는 어떨까? 책의 두께마다 다르겠지만, 그 책의 처음 3분의 1이나 4분의 1쯤을 읽어보고 이 책이 끝까지 읽혀질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그렇다. 그래도 서평단이라 책의 마지막 5분의 1을 놔두고 접고 말았다. 서평단 아무나 할 거 아닌 듯 싶다.ㅋ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평이하게 읽힌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옵션이니 통과하자.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세상 사는 용기를 잃은 사람에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세상은 적이 아니야, 굳이 세상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단 말이다." 할아버지는 계속 말씀을 이어갔다. "너의 적은 너 자신 일 뿐이다.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사람은 없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야. 옆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세상은 아주 달라 보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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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3-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런 책도 한국에 나오는군요. 원제는 christmas sweater에요. 여기서는 크리스마스마다 유명인들이 이렇게 잔잔한 이야기 써서 책으로 많이 내는데요, 사실 내용보다 저자 이름보고 사는거에 가깝죠. (그리고 미국애들이 이렇게 별거 아닌 이야기에 약하기도 하고 ^^;;) Glenn beck은 유명한 CNN 진행자에다가 상당히 보수 논객이거든요. 저자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이나 관련이 없는 한국 독자들이 보기에는 매우매우 쌩뚱맞을 듯;;; 그것도 그렇고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좀 오바가 많이 심하네요 ㅎㅎ 마음에 들지 않는 책 읽고 리뷰까지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려 ㅎㅎ 추천은 책이 아닌 스텔라님 노고에 드립니다 ^^

stella.K 2009-03-16 11:30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키티님 설명 듣고보니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내내 읽으면서 도대체 왜 내가 이책을 읽어야 하나 한심하게 느껴졌다는...ㅜ
아마도 우리나라 작가가 썼다면 좋아라 읽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작품이 외국에 번역되서 나왔으면 저 같은 생각
똑같이 할 사람이 있겠네요.
어떤 작품을 번역할건가 신중하게 고민해서 낭비를 막아야 할텐데
너무 생각들이 없네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우리나라에도 먹히는 거 아니거든요.
알라딘 서평 도서도 좀 신중해졌으면 하는데, 연타 두 번 때리고 나니
기운이 빠지네요. 앞으로 보내주는 책들 이런 수준이면 어쩌나 해서요.
암튼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키티님.^^

2009-03-17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