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나라
조너선 캐럴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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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젠가 모 작가는,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죄로 평생토록 책상 앞에서 글을 써야하는 천형을 지녔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아, 정말 그렇겠구나!'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지만 정말 책상 앞에서 평생 글을 써 대는 것을 가지고 '천형'이라고 까지 해야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잔인하고 끔찍한 말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수 많은 작가들은 왜 이 천형을 굳이 감내하려는 것일까? 또한 어떤 사람은, 작가들은 오만하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양, 전지적인 싯점에서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쥐락펴락 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듯 하다. 작가가 뭐라고 그리도 오만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의 역자의 후기가 눈에 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욕망과 걱정을 하게 되는 듯하다. 내가 창조한 세상, 내가 그려낸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과, 진짜 그렇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사이의 갈등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314~315p)   그렇다면 작가의 쓰는 행위를 천형이라고 말했던 그 사람의 말이 일견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내가 창조한 세상이 진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확률은 극히 미약하긴 하지만, 가끔 이런 질문은 해 본다. 어떤 독자가 내가 쓴 소설을 보고 거기 나오는 등장인물이 독자 자신임을 깨닫고 어느 날 명예훼손 죄로 고발을 해 온다면 그 작가는어떻게 하겠는가? 어차피 작가에 의해 창조된 등장인물도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을 쓰지 않겠는가? 이것은 정말 있을 법한 일로써 그런 독자를 대하는 건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쓰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작가는 왜 쓰는가?란 질문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물어왔던 질문이다. 거기에 대해 작가들은 나름대로 답을 달아 왔겠지만, 이 말은 또 얼마나 기가 콱 막힐 질문이란 말인가? 작가가 왜 쓰다니? 작가에게 욕망이 있다면, 내가 쓴 글이 단 한 사람의 독자에게만이라도 받아 들여져서 그로 하여금 같이 긍정하고 동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네가 모르는 이야기를 난 안다. 너 내 얘기 들어 볼래?"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작가 조너선 캐럴은 사람들에게 '경이감'을 일깨워 주기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어릴 때는 말하는 개나 귀신, 벽장 속 괴물, 보이지 않는 친구 같은 놀랍고도 신기한 일들을 아주 쉽게 받아들인다. 어른이 되면 이러한 것들을 잃으면서 '현실'이 아닌 것들을 밀어내는데, 캐럴은 그것이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며, 한 시인의 말을 빌려 그런 작업을 '경이로움의 재탄생'이라고 부른다. 어린 시절의 '경이감'을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312p)  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니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났다.

나는 동생과 자주 인형놀이를 즐겼는데, 주로 장식용 조그만 인형들이었다. 나는 이것들이 정말 살아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어었다. 그러면 정말 정성껏 돌봐 줄텐데. 그 무렵 TV 만화영화를 보면 어느 소녀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작은 사람을 돌봐주는 걸 보면서 나도 실제로 그 소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너무도 빨리 동화를 잊었다.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부터 동화를 읽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어른답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인가에 더 많은 촛점을 맞췄다. 이 책을 읽으니, 이 어른다움을 걱정하는 조너선 캐롤에게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우린 얼마나 꿈을 잃고 살아왔던 것일까? 현실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독자에겐 이 책은 다소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동화적인 것만도 아니다. 독특하고, 몽환적이다. 작가가 말하는 '게일런'이라고 하는 지명은 실제로는 없는 지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봤다. 저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이라는 곳이 없는 것처럼.

독자라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만 읽지 말고, 작가가 갖는 욕망이나 이면에 대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의외의 것이든 말이다. 작가는 말 할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네가 알지 못하는 얘기를 들려줬으니까 누구든 나의 전기를 좀 써 줘." 그런데 작가는 영리하다. 누군가 나의 전기를 써 줄 사람을 위해 작가의 육필원고,  작가의 집, 그가 살았던 동네의 모습이 어떠한지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자신의 전기를 쓰는 그 사람을 지켜 보고 또한 그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어한다. 못 말리는 병이고 섬뜩하다. 그래서 작가는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천형을 지녔고, 오만을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여, 부디 그 오만을 거부하지 말기를. 직시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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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6-12-2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님의 발언과 '건이와 경이'가 떠 올라서... ^^

물만두 2006-12-2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감탄감탄!!! 저는 횡설수설^^;;;

stella.K 2006-12-23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무슨 말씀이시온지...??
물만두님/에고, 무슨...제 리뷰는 그다지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도 않는 걸요 뭐.ㅜ.ㅜ

2006-12-2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6-12-2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ㅜ.ㅜ
 
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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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터일까? 우리나라에 칠리소스가 들어와 입맛을 사로잡아 것이.  이 칠리소스는 튀김닭을 먹을 때 같이 찍어 먹으면 느끼하지도 않고 톡쏘는 매콤 달짝지근한 맛이, 우리나라의 겨자나 일본의 와사비와는 또 다른 맛이다. 모르긴 해도 이 칠리소스는 남미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스쳐지나간다. 우선 남미의 이국적인 이미지와 강렬하면서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특유의 입심, 자유분망함,  남미를 배경으로한 몇편의 영화들. 그 속에 비쳐지는 빛과 어두움의 이미지가 나의 머릿속을 휘졌고 있어 리뷰 쓰기가 용이하지가 않다.  그만큼 다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을 풀어 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도 말해 보자면,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책 전편에 흐르는 앙헬 산타아고와 빅토리아의 사랑이다. 말을 훔친 죄로 5년 형을 받았지만 대통력 특별 사면 조치로 풀려난 앙헬은 우연한 기회에 발레리나가 꿈인 빅토리아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빅토리아의 가정환경은 불우하다.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피노체크 정권에 저항하다 목이 잘리고, 그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버린 어머니와 함께 살며 학교에서는 퇴학을 맞은 상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 희망은 없어 보이며,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발레리나가 되는 것. 그러나 이마저도 돈이없어 더는 배울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앙헬은 그런 빅토리아에게 용기를 주고, 학교에서 재시험을 치르게 해서 퇴학을 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녀가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오직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발레리나가 되어서 국립극장에 서게하기 위한 것. 때문에 앙헬은 그런 빅토리아를 위해 최선을 다 한다. 물론 후에 빅토리아는 시험을 망치게 되고 삼류극장에서 매춘을 하지만 끝까지 버리지 않고 도와주는 앙헬의 사랑이 인상깊다.

그러나 앙헬은 빅토리아를 사랑할 때와는 달리 그리 순수하지마는 않다. 오히려 불온하다. 잘 생긴 외목 덕에 수감시절 동료죄수로부터 윤간을 당하고, 그를 범한 사람들 중엔 간수 산토르도 포함이 되어있다. 자신이 석방되면 간수를 꼭 죽이리라던 앙헬과 그의 결심을 알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산토르는 희대의 악명 높은  살인범 리고베르토 마린을 한달 동안 몰래 빼내 앙헬을 죽이라고 한다. 앙헬이 석방되던 같은 날   금고털이범 베르가라 그레이도 석방이 된다. 그는 나이도 많고 아내와 자식에게 버림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으므로 남은 생애동안 착하게 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앙헬은 난장이 리라의 계획을 베르가라에게 알리고 한탕하자고 졸라댄다. 거기서 등장인물들과의 얼키고 설키는 내용이다.  총 50장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짧막한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완결된 장으로 읽혀져 완급을 조절하며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하고, 작가가 얼마만한 입심을 가졌는지를 가능케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곧 영화화 될 것이라고 하니 아마도 작가는 영화화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쓴 것 같다.  

정말 이 소설은 입심이 좋다. 거침이 없고, 물 흐르는 듯하며, 위트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 또한 칠레의 현대사의 질곡을 잘 녹여내고 있다. 또한 베르가라 그레이를 통해 인생을 관조하고, 등장인물을 통해 네루다나 레이몬드 카버의 인용구를 적절히 배합시키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는 탁월하다. 또한 앙헬과 빅토리아의 성애장면은 리얼하면서도 노골적이고 거침이 없다. 

나는 초두에 칠리소스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을 하였다. 아마도 이 책에 흐르는 정서는 칠리소스의 톡 쏘는 듯한 맛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관망하고 인생을 관조하는 그것은 역시 작가다운 면모를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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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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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민규의 소설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이란 책에서였다. 그 책은 한 해 동안 문단에서 주목 받아온 작가들의 단편을 한 권에 묶은 책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명성에 비해 읽을 기회가 없었던 나로선 새로운 독서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음...박민규의 소설이 이렇구나.'하는.

그 단편이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은 기억에 거의 없다. 쳇, 불과 지난 여름에 읽었는데 기억에 없다니...(다시마라도 먹어야 하려나? ) 단지 기억하는 건 우리나라의 소외계층의 어느 사춘기 소년의 이야기를 다뤘던 것 같다. 거기에 무슨 아이스크림 먹는 이야기도 나왔던 것 같은데...아무튼 그 소외계층의 어느 사춘기 소년을 다룬 작가의 시선이 나름 신선했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전의 소설들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선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그를 소설가 이외수에 비하곤 한다. 정말 독특하기로는 이외수 못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말투는 조금은 달라 보인다. 이외수는 거침없이 말하는 쪽인데 비해 박민규의 말투는 어눌하다.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매력적이긴 하다. 그런 사람에게선 뭔가 할 말이 많아보이고, 풍부한 느낌의 소유자일거라고 상상해 보곤한다. 단지 그것을 말로 푸는 사람이 아닌 부류라고까지 생각하는 건 지나친 상상일까?

그의 다른 소설은 어떨지 몰라도, 이 소설은 정말 독특했다. 박민규에 대해서는 세인의 말들이 구구한가 보다. 어떤 사람은 좋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의 이전 소설들을 별로 접해 보지 않은 나로선 이 작품은 '비교불가'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고, 단지 독특하다는 느낌만으로 나는 좋았다고 말할 뿐이다.

우선 이 소설은 읽고 있으면 재즈를 연상시킨다. 음악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로선 재즈의 깊고도 오묘한 세계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겠지만, 그래도 상식적으로 아는 건 즉흥과 변주가 가능한 그 자유로움이 있다는 것은 음악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물론 그 때문에 재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쉽게 받아 들여지는 않는 것이기도 하다.  <핑퐁> 역시 그랬다. 읽기에 따라선 낮설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탁구가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 운동종목이 이 소설을 이해 하는데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단지 작가는 기승전결에 구애 받음이 없이 기본적인 골격만을 가지고 그때 그때 떠오르는 연상에 따라 글을 채워넣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나는 여기서 마이너리티를 생각해 본다. 한때 나도 창작을 배운 적이 있지만, 강사들이 가르쳐 주는 소설 쓰기의 공식이 있다. 그들은 조금 조금 다르긴 하지만 큰 골격에서는 하나 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 인물은 이렇게 구축을 하고, 배경을 좀 더 튼튼히. 기승전결은 이렇게 등등. 물론 그들은 현장에서 뛰는 명망있는 작가들이다. 작가지망생들에겐 정말 진짜 작가가 되는 게 소원이겠지만, 그들에게서 사사를 받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는 신춘문예를 뚫기 위한 비법전수는 아니었을까? 작가가 되는 길이 꼭 그렇게 신춘문예 내지는 모 문학지 신인작가상을 받아야 가능한 걸까? 요즘 이 장르가 뜨고 있으니 이 방면의 글을 써 볼까? 나는 이렇게 쓰고 싶은데 독자들은 이런 것을 원하고 있으니 이렇게 써 봐야하지 않을까란 경계선생의 유혹이 왜 없을까? 그러다 보면 그들이 쓰는 소설은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 항상 다루는 등장인물이 하나 같이 잘 나가는 사업가, 의사, 변호사인 것처럼 작가 역시도 그런 인물들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늘 비슷한 인간군만이 항상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 가리워져 있다. 그런 획일화 된 사회를 어떤 작가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싶어한다. 화려하고 그럴듯한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 사회의 소외계층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 운동가가 소외계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목청을 높이면 뭘하겠는가? 그들의 백마디 구호 보다 이런 <핑퐁>같은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여 보인다.

물론 작가 박민규는 어떤 사회주의 이상을 바라고 이 소설을 쓰진 않았으리라. 그냥 자신이 오래 전에 알았던 중학생 두 명에 관해 소설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썼을 것이다. 작가는 왜 그처럼 소외계층을 소재로 글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 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의 자유로움이 좋았다. 모모하지 않으면 모모할 수 없는. 이 형식주의과 권위주의를 거스르고 싶은데도 어느 샌가 모르게 거기에 눈을 두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마땅치 않기도 하다. 왜 사람들은 주류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비주류의 삶도 삶일텐데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유독히 눈에 띄는 건 쉼표(,)의 문장부호 였다. 어느 저명한 어른께서는 문장부호의 남발을 지적해 나 역시도 못 쓰는 글이긴 하지만 문장부호를 너무 많이 쓰는 건 아닐까 신경이 씌이곤 했는데, 박민규는 지나치리만치 문장부호를 쓰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도 어쩌면 작가의 자유로움이라면 자유로움이라고 인정해 주자.  하지만 내내 들었던 생각은 왜 <핑퐁>일까 였다. 전체를 아우를만한 단서는 그다지 있어 보이진 않는다. 단지 핑퐁이란 건, 내 생각에 인류가 깜박해버린 것과 절대 깜박하지 않을 것 간의 전쟁인 셈이야.(219p) 란 말을 되내어 보는 수 밖에.

어찌보면 주류적 글쓰기 보다 비주류적 글쓰기가 더 자유로워 보인다. 형식에 얽매임도 없이 재즈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글을 쓸 수만 있다면 나의 글쓰기에 좀 더 용기를 가져봐도 되지 않을까? 난 왜 이리 눈치를 많이 보고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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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1-0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즈같은 소설... 읽고 싶어집니다. 꾸욱~

마태우스 2006-11-07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는군요. 재즈같다구요...으음. 사놓고 냉장고 위에 놔뒀는데 읽고 싶어지네요 . 운동보다 이 책이 더 많은 걸 알게 해주나보군요. 으음...

stella.K 2006-11-0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네. 읽어보세요. 추천 고마워요.^^
마태우스님/야호~! 나 오늘 마태님께 추천 받았다!!!!!!!

가시장미 2006-11-08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읽지 않고 있는책. ㅠ_ㅠ 보고싶어요. ㅋㅋㅋ 리뷰도 멋지십니다!

stella.K 2006-11-0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봐. 괜찮은 것 같아.^^
 
오! 행복한 카시페로 마음이 자라는 나무 9
그라시엘라 몬테스 지음, 이종균 그림, 배상희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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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이던가? 우리와 같이 사는 다롱이를 정관수술을 시켜 주었다. 그냥 여느 돌아다니는 개라면 그런 수술을 시켜주고 말고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롱이는 사람과 함께 사는 애완용 개인만큼 사람과 함께 살려면 필수적으로 해 주어야 했다. 정관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괜시리 녀석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도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온다. 어떻게 운 좋게 애완용 개로 발탁이 돼 사람 손에 잠시 머물지만 그것이 좋을 것 같아도 사실은 굴욕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재로 개는 길들여지는 존재로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굴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가끔 TV에도 보면 심하게 사람 손에 의해 길들여진 개들을 본다. 그들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 냄으로 머리가 좋은 개로 판명이 되고, 주인은 좋아라 하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곤 한다. 어려운 미션을 완수해 내는 개는 확실히 똑똑한 개라고 할 수 있긴 하겠지만, 자기네들 세계에서는 그것을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할지는 사람인 우리로선 모를 일이다. 어떻게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만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개의 관점에서 인간을 풍자해 내는 작가의 필치가 확실히 노련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개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풍자하려고 했던 것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청소년 문학이란 장르를 표방했던 것만큼 청소년들에게 확고한 자기 정체성과 세상의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읽으면서 공연히 이 세상에 대해 화가 나기도 했다.  왜 세상은 그렇게 꿋꿋하게 용기있게 헤쳐 나가야 할 대상으로만 이해되고 소통되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시각들이 있을텐데 좀 더  공존하고, 화해하며, 서로 평화로이 잘 사는 그런 패러다임 가지고는 설정이 안 되는 것일까?  청소년. 아직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굳어지기 전, 그 나이에 세상은 어려운 것이며 험난 하다고 자꾸 주입해 주고, 그러기 때문에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하고, 실력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경쟁적이 돼야 한다고 자꾸만 몰아 붙여준다면, 과연 그들이 앞으로 살 2,30년 뒤는 정말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좋고, 편안하고, 안락한 것만 가지고는 이 세상을 잘 살 수가 없다. 그러면 바보가 될 것이다. 인류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역사고,  역경과 여려움이 없다면 퇴보하기 마련이다. 역경을 뚫지 못하면 어떤 누구에게도 그 존재에 어울릴만한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다. 카시페로란 이름은 주인공 개가 마지막으로 갖게 된 멋진 이름이다. 이 이름을 소유하기 까지 그 개는 한낱 보잘 것 없는 개였고, 이름도 그냥 그것에 걸맞는 이름을 소유했을 뿐이었다. 카시페로란 이름은 가히 성경의 야곱이 온갖 시련을 다 이겨내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하나님께 하사 받은 것과 맞먹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자신 스스로란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자꾸만 실존주의에 매료되는 것 같다.

저자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이 소설의 양식은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한다. 피카레스크 소설이란은 하층계급 출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자기자신과 상대방의 생활을 풍자대상으로 삼는 풍자문학을 뜻하는 것이 한다. 그것은 매력적인 소설 분야인 것 같다. 하지만 난 왠지 이 소설이 자꾸 말미에 갈수록 사람의 관점을 부여하는 것 같아 김이 빠졌다. 끝까지 팽팽하게 개의 관점을 유지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서로를 위해 주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은 좋긴 하지만, 기왕 파카레스크 소설을 지향하는 거라면 굳이 영웅 만들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의 하층민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드러낸 것은 아닌가  하여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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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5 0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10-25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롱이 만세!!
소설과 상관없이 스텔라님 서재의 등장견물이니까요.

stella.K 2006-10-25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4:28분님/그 시간까지 잠 안 주무시고 제 글을 읽으셨다니...흐흑~! 말씀하신 부분은 고쳤습니다. 요즘 마음이 바빠서 오타 무지하게 많네요.>.<;;
가끔 제 서재 이름을 '백세주가 있는 서재'로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 어느 분의 서재 이름과 너무 닮은 듯하여 자제하고 있습니다요. 난 백세주가 그렇게 좋더라! ㅎㅎ

니르바나님/우리 다롱이를 이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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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 참 재미있다.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토속적인 분위기. 에로틱한 관능이 뒤섞여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의 오감을 자극한다.

 

음식을 매개로한 문학작품이 몇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 함께 '바베트의 만찬'이나 '초콜릿' 같은 작품은 훌륭한 음식문학이다. 그런데 그것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식욕과 성욕을 같은 층위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음식에 최음제와 같은 작용을 하는 뭔가가 숨어있는 것일까?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서 본 것은, 해피엔딩은 해피엔딩인데 동시에 사랑은 사필귀정인가라는 것이다. 이야기가 우울하거나 비극적이지 않고 해피엔딩이니만치, 작가는 애초에 티타가 페드로와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며 행복한 결말은 독자를 만족시킨다. 하지만 비극적 결말이 더 많은 여운을 남긴다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작가는 오래도록 독자들이 자기의 작품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비극으로 몰아가는 것을 선호해 왔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보통의 통례인데, 10대의 나이에 타타와 페드로가 만나고 서로 사랑을 느끼지만, 막내가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은 확실히 너무 가혹하다. 혹자는 이런 소설의 설정에 웃음을 금치 못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집안에 전통이란 명목하에 흐르는 금기는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티타의 집안에 그런 전통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우습게 볼 것은 못 된다. 그래도 티타와의 사랑를 포기하지 못한 페드로는 차선으로 그녀의 언니와 결혼을 한다. 어찌보면 의리와 신의를 배반하지 않는 페드로의 용기있는 결단일수도 있고 또 어찌보면 황당하다.

 

명백히 사랑은 둘 중의 하나다. 주변의 여러 많은 장애 때문에 이루지 못하거나, 그것을 뛰어 넘거나. 그러니 차선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예를들면 성경의 야곱 같은 경우가 대표적일거라고 보는데, 라헬을 사랑하기 위해 언니 레아를 먼저 취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런 풍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지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 거기엔 금지된 사랑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꽤나 호된 몸살을 앓는다.  성경에도 보면 두 자매가 서로 남편 야곱을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고 질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에도 보면 티타는 언니 로사우라의 끊임없는 의심과 질시를 받으며 산다. 그것이 성경의 그 대목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사람의 먹는 것이 성욕을 자극하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페로몬이라고 하는 냄새가 성욕을 자극하며, 상대의 관능적인 섹시함이 성욕을 자극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라헬과 레아가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무슨 식물을 가지고 협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 식물은 최음제에 해당하는 식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식욕이 채워지면 성욕을 채우려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음식의 화학적 반응을 저자는 문학적으로 꽤나 위트있고 능청스럽게 잘도 표현해 내고 있다.

 

사랑 이야기는 일대 일의 관계 보다 삼각관계일 때가 재미있고 극적이다. 타타와 로사우라, 페드로가 전반부를 이끌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티타와 페드로, 의사 존의 관계가 부각이 된다. 거의 존과 결혼이 이루어질 뻔했던 티타. 이 둘을 지켜보는 페드로의 질투와 방황이 대비가 된다. 티타의 관점에서 볼 때 존의 사랑은 다분히 이성적이고 신사적이다. 그런데 비해 페드로와의 사랑은 감성적이고 본능적이다. 그리고 결국 그 본능에 충실해서 티타는 존이 아닌 페드로를 선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사랑은 그것이 에로틱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성적이기 보다 본능적인 것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페드로의 우유부단함에 혀를 차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존이 더 미온적여 보인다. 상대를 배려하며 끝까지 신사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그런 태도가 더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당신 아니면 안된다는 굳은 의지가 표명된다면 티타는 예정대로 존과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사적이고 인격적이면 거기엔 여백도 포함하고 있는 얘기다. 그것은 상대의 선택에 어느 만치는 여유를 주는 것이 된다. "당신은 내가 아니어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하는 식의. 그렇다면 나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한테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선 거스를 수 없는 강한 육체의 욕구를 제어할 수 없어 결국 페드로와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말이다.

 

확실히 해피엔딩은 사필귀정일 때만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을 이루기까지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은 달콤 쌉싸름하기만 한가? 그러면이야 좋게.  떫다 못해 쓰고 고통스럽지. 우리는 이렇게 재미있게 보지만. 그런 사랑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것일까? 이 책은 유쾌하고도 쌉싸름하게 잘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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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6-10-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헬과 레아가 남편을 차지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그 식물이 뭐에요?
갈쳐주세요!!!!
제가 정말 좋아라하는 책인데... 스텔라님도 읽으셔서 기뻐요 ^^ 추천드세요.

stella.K 2006-10-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플레져님! 귀찮아서 대충 쓰고 넘길려고 했더니 님에게서 딱 걸렸네요. ㅎㅎ. <합환채>라고 하네요. 자귀나무라고도 하는가 본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잘 안 나와 있네요.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정력에 좋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안 그렇겠습니까? 야곱은 레아와 라헬 말고도 몇 뇨자를 더 거느렸답니다. ㅋ. 추천 고마워요.^^

가시장미 2006-10-1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나도 좋아하는 책인데. ^-^ 리뷰 너무 멋지게 쓰신거 아니예요~~ 갈수록 리뷰쓰는 실력이 발전을 거듭하시는 것 같네요. 요즘 전 리뷰 하나도 안 쓰는데.. 자극좀 받아야겠어요. 으흐흐흐 저도 추천~!! ^-^

stella.K 2006-10-20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너 같은 사람이 있어 내가 불을 키고 더 열심히 쓸려고 하잖니. ㅎㅎㅎ 요즘은 하는 일이 있어 책도 많이 못 읽고 리뷰 안 쓴지도 꽤 됐다. 리뷰는 처음엔 안 썼는데 그도 익숙해져 보니 이젠 안 쓰면 싱겁더라. 내가 무슨 책 읽었는지도 모르겠고. 짧게라도 꼭 쓰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