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김훈의 문학을 일컬어 “마초”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 그가 낸 책들을 다 읽어내진 못했지만, 그의 글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긴 하다. 그의 단편 “언니의 폐경”같은 경우는 이례적으로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소설은 순전히 두 자매가 이야기를 주도하고 이끌어 간다. 그래서일까? “언니의 폐경”을 읽었을 때 나의 느낌은 마치 차가운 쇳조각에 살을 덴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김훈이 마초들의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차피 이 세상의 이야기 중 거의 대부분이 남자가 나오고, 남자에 의해서 씌여지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러다가 그의 문학을 일컫어 마초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내는 책마다 화제가 아닌 적이 없었고, 특히 이 책 <남한산성>은 상종가를 치며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왜 그럴까? 요즘 인기 있다는 펙션 또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몰랐던 병자호란이나 인조에 관한 얘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가 김훈이 이 소설에서 얘기하려 했던 건 무엇일까?

알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김훈도 그런 것 같다. 그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호불호가 확실해 보인다. 그를 좋아한다면 왜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문체’를 좋아하는 것일 게다. 나는 그의 소설 <칼의 노래>로부터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의 문체는 한마디로 저기압 문체다. 읽고나면 가위에라도 눌린 듯 무겁지만, 뭔가의 깊은 울림이 있다. 이 작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마치 그때 당시를 여행하듯 명징하고, 인물이나 배경묘사가 적확하다. 모름지기 작가라면 이런 각을 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런데 싫어하는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작품엔 여성을 비하시키는 내지는 반페미니즘이라고 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작품이 여성이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꼭 그렇게 말해도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 보단 그를 변호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읽은 바로는)그는 여성을 다룰 마음이 아예 없어 보이는 듯 하다. 그에겐 오로지 마초 다시 말해 남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의 문학을 마초적이라고 했을 때, 작가는 과연 그 말에 동의할까? 아마도 그 말은 평론가들이 자기내들끼리 뭉뚱그려 말했던 것이 세상에 전파된 것은 아닐까, 싶다. 여성의 비하 역시 그가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초적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가 주로 남성을 그리긴 했지만 전형적인 마초를 표현하지는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리도 흠모해 마지않는 이순신 장군을 형상화 한 작품 <칼의 노래>에서 보면, 그는 이순신을 영웅호걸로 그리지 않았으며, 고뇌하는 남자로 그렸다. <남한산성> 역시도 우리가 익숙히 보아 온, 파벌이나 당쟁을 그리지 않고 고뇌하는 남자들을 그렸다. 인조도, 김상헌도, 최명길 역시도...

 

 

그렇다면 그의 작품에서 그리는 남성들은 왜 그리도 하나 같이 고뇌하고 있는 것일까?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남성은 그다지 전형적인 마초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상상이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남성들은 늘 선택을 강요받으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그것이 가정이든 나라든) 끊임없이 고군분투하고, 밥벌이의 지겨움에 몸서리치는 건 아닐까? 작가 김훈은 이것을 가감 없이 보여주게 되길 바랬을지도 모른다. 치욕을 기억하라고 하면서까지 하면서 말이다.

제법 비장해 보이긴 하지만, 역시 그것은 우리가 원하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마초는, 우리에겐 정복당해 온 역사만 있지, 어느 때고 정복한 역사는 없거나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작용은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마초적이 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늘 이것을 의도적으로 반(反)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냐? 이 책 어디에선가 작가가 그렇게 표현한 것처럼, 그는 어느 쪽도 아니며 그저 글을 쓸 뿐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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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26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mira95 2007-06-24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죠? 리뷰 좋네요. 저도 김훈 좋아하는데..<칼의 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남한산성>도 봐야죠.. 추천 누르고 갈게요^^

stella.K 2007-06-24 20:49   좋아요 0 | URL
아, 미라님! 반가워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렇게 반가울 수가...!^^

마노아 2007-06-2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산성보다 김훈의 문학을 논하셨군요. 마지막의 마초에 관한 이야기는 신선합니다. 그런 속내가 있을 수 있단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07-06-24 20:50   좋아요 0 | URL
김훈에 중독됐다고나 할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다락방 2007-06-2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굉장한 글이예요.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글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셨던 [언니의 폐경]은 『강산무진』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단편입니다.

stella.K 2007-06-25 09:3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고맙습니다. <언니의 폐경>은 확실히 작가의 작품중 단연 독보적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6-2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칸이 오줌을 휘갈기는 장면이요! 마초적이랄까.

stella.K 2007-06-25 09:32   좋아요 0 | URL
그렇긴 하죠. 하지만 칸의 비중은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죠.^^

드팀전 2007-06-25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초 이야기는 일단 김훈의 소설도 소설이지만 그보다 그가 가끔씩 하는 인터뷰나 기타 잡글들에서 보인 가부장적인 자신감과 반여성적인 멘트들에서 파장된게 아닐까요?

stella.K 2007-06-25 09:33   좋아요 0 | URL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왜 나는 잘 몰랐을까요...
 
요셉과 그 형제들 4 - 이집트에서의 요셉 (하)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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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언제 나왔는가를 돌아보니 2001년 11월에 나온 걸로 되있다. 그 무렵 신문의 북섹션에 어느 기자의 리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나는 이 책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 했었다. 

이 책은 알겠지만, 창세기 40장부터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에 관한 이야기다. 내용은 간단하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그로인한 이복형들의 시셈으로 인해 함정에 빠지고, 그후 이집트의 노예상인에게 팔려가 갖은 고생 끝에 이집트 총리대신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상 성경 본문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9장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고, 그나마 어린아이에게 구연동화를 읽어주듯 너무나 교훈적이고 정형화 된 듯하여 어른들에겐 그닥 와닿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았을까? 이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로부터 들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얼마나 재밌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지 말 그대로 빨려들어가듯 했고, 침을 흘려도 침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감전 됐다고나 할까? 나는 그만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내가 사춘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고, 성경을 펼쳤을 때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얼마나 그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지, 지금은 그 나이의 몇 곱절을 살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야기에서 조금도 자유하지 못한 채 세월을 살면 살수록 이 이야기에 빚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가 성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생각해 보라. 자신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않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는지. 그러기에 나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이야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귀한 것, 신비스러운 것은 쉽게 문을 여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토마스 만도 이 이야기에 20년을 바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한 것 같아도 그 신비로움은 가히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솔직히 난 1권부터 3권까지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앞서 밝혔지만, 너무 지루해 이 책을 발견했던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그 다음 권은 언제 읽을지 기약에도 없었다. 독후감도 써놓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드디어 4권을 읽었을 때 내가 비로소 깨달은 건, 3권까지는 4권과 그 이후의 것(6권까지)을 말하기 위한 전초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경대로라면 3권까지는 야곱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고, 요셉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복형들은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끊이지 않고 펼쳐진다. 그리고 4권의 내용은 이렇다. 이집트 노예상인에 의해 팔려간 요셉이 포티파르(성경은 보디발이라고 했다)라고 하는 이집트의 최고 권력가의 시종이 된다. 그러나 요셉은 포티파르의 아내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결국 포티파르의 아내는 그를 유혹하는데 실패하자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덮칠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 주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것 또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를 상당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후에도 요셉의 이야기는 더 전개가 되겠지만 아마도 요셉과 무트의 이야기는 전체를 통털어 가장 매혹적이고 백미라고 꼽을만 하지 않을까? 그것은 확실히 토마스 만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물론 4권에서도 예의 그 끊임없이 펼쳐지는 만연체의 문장은 여전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금치 못하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만연체의 문장속에서 발견하는 보석 같은 문장 또한 매우 훌륭할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가슴에 사무치도록 요셉을 향한 그리움과 정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마음은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성경에 잠시 언급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같이 잠자기를 종용했다는 이 짧은 문장이 그녀를 대변해 주기엔 한참 역부족이다. 또한 그 뜻을 결국 이루지 못하자 증오의 마음으로 변해 요셉을 스스로 배신하는 여인의 마음이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4권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는 것에서 단순히 교훈만을 찾으려 하면 안될 것이다. 요즘 같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어쩌면 요셉은 비웃음을 살 인물일지도 모른다. 요셉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성은 언제나 자유로왔다. 성을 숭배하는 신이 있었고, 그 시대의 창녀는 신을 받드는 신녀로서 추앙을 받았까. 그러니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 유혹을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런 속에서 요셉이 그토록 육체적 순결을 지키고자 했는지 토마스 만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요셉을 대변해 준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이 어떠했을런지 그 파장과 떨림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요셉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 무트가 요셉을 어느 정도나 생각했는지 생생하게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내내 서사시가 뭔지를 새삼 깨달았으며, 마치 대작 오페라를 보는 듯한 상상에 사로잡혔ㅅ다. 더불어 왜 이런 훌륭한 이야기가 오페라나 뮤지컬 또는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토마스 만이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닌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위해 읽기도 하겠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신화로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작가라면 이야기의 전범이 될만한 신화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토마스 만은 작가로서 충분히 충실했다고 본다.  내가 이 이야기에 두근거리는 떨림이 있고, 빚을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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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09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가 기네요. 표지가 인상적이에요. 그치만 너무 길어서 읽을 엄두가..;;;

stella.K 2007-04-0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어제 리뷰 고치고 있는데 알라딘 에러가 나서 고치지도 못하고 왕짜증이었슴다. 그세 와서 보셨군요.
이 책 좀 길긴하죠. 저도 왠만해선 긴 책 안 보는데 꼭 완독해야 할 이유가 생겼답니다.^^
 
초콜릿
조안 해리스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초콜릿'이란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을 해 봤더니 이 이름을 달고 있는 책이 수십 권이 뜬다. 좀 놀랐다. 원래 초콜릿이 사람의 입맛을 달콤 쌉싸름하게 유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로라는 작가들이 이것을 소재로 그렇게도 많이 책을 내놓은 줄은 미처 몰랐다. 책도 유행을 타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초콜릿'이 한때의 트렌드였다면, 얼마 전엔 '개'를 소재로한 이야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올해는 '고양이'가 트렌드다.

 

이 책은 저자의 음식 3부작 중 하나라고 한다. 블루베리, 오렌지, 초콜릿을 소재로 했다. 몇년 전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동명 영화를 인상 깊게 본적이 있어, 한번쯤 소설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봤을 때나 책으로 읽었을 때나 내가 갖는 의문은 정말 '초콜릿'이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가이다. 초콜릿을 싫어하진 않지만 일부러 즐겨하진 않는다.  요즘엔 초콜릿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선언했는지 젊은 두 남녀의 욕망의 줄다리기를 컨셉으로한 한 CF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초콜릿이 사람을 강하게 끌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하지만 막상 편의점엘 가서 이 초콜릿의 가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까지의 먹고자 하는 욕망은 사라지고 과연 이 가격에 이 초콜릿을 사? 말아? 갈등하고 있는 나를 보면 나는 '상대적인 금욕주의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보면 먹는 것에 대한 유혹이 성에 대한 유혹을 앞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유혹을 보라. 그깟 사과 알만한 선악과를 따 먹겠는가? 말겠는가를 고민하다 어처구니 없이 한입 베어 먹은 걸 가지고 벌거벗은 수치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하지 않는가? 그 역사 이후 우리 인간을 얼마나 많이 먹는 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며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했더란 말인가? 게다가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고 보자는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기가 차고, 걸상만 빼고 뭐든지 다 만들어 먹는다는 중국 사람들 보면 신기해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깟 '초콜릿'이 뭐 그리 대수라고 이처럼 은밀하고도 서정적이게 이야기를 써 놨더란 말인가?  

 

영화에서는 비주얼이 상당히 좋다. 정말 줄리엣 비노쉬가 만드는 초콜릿을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것도 그거지만 찬 바람을 뚫고 두 모녀가 어딘가를 가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때 둘이 입었던 빨간색 망또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초콜릿은 잃어버렸던 부부의 사랑을 이어주고, 인간관계의 화해를 가져오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자기 선언을 하게 만드는데 묘한 마력(?)을 뿜어낸다. 특히 종교적인 위선과 권위에 도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저자가 종교를 초콜릿이란 도구를 통해 허위와 권위를 수면위로 끌어올리려 했다는 것이 일견 아쉽게도 느껴졌다. 물론 종교에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난 왠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까발리려고 했던 것 같다 나름 그것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닌지라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게다가 어찌보면 작가는 신앙을 흠잡으려 했다기 보다 인간의 자유가 종교적인 위선과 권위에 짓밟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아마도 그것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자의 문체가 서정적여서 좋다. 하지만 흠이 있다면 요즘같이 흡인력있고 재밌게 읽혀지게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한권의 책을 읽는데 며칠이 걸렸던가? 감히 입에 떠올리지도 못하겠다. 초콜릿 본연의 유혹보다 이 책을 이쯤해서 덮을까 하는 유혹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완독했다. 다행히다. 읽는 내내 진한 코코아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그런 유혹은 다시 없어지긴 했지만. 그 보단 매일 인스탄트 커피 두 스푼에 설탕 한 스푼, 우유 섞은  커피 한잔의 유혹이 더 크니까 그것으로 코코아의 유혹을 대신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열린 책에서 찍어내는 이 페이퍼백 소설에 적지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고래적부터 책의 모양새가 그래왔겠지만, 개개인의 인체공학에 맞춘 책이 앞으로 등장 하겠는가? 기대도 안한다. 하지만 너무 가볍게 만든 탓에 편하게 책상에 놓고 가볍게 한장씩 넘길 수  없었고, 꼭 손으로 들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만일 어떤 사정이 있어 한 손으로만 생활해야 하는(그것이 한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간에) 사람에겐 엄청 불편한 것이다. 어쩌다 책을 읽다 머리나 콧등이라도 긁을라치면 읽은 페이지를 잃어버리지 않게 책을 엎어 놓고 긁어야 한다. 그 불편함을 아는가? 게다가 글씨와 행간은 왜 이리도 작고 촘촘한 것인지? 이것을 문학은 좋아하나 눈 나쁜 선배나 어르신한테는 결코 선물해서는 안될 책 1순위가 되어 버렸다. 나 역시도 시력이 예전만 같지 않이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기차게 좋은 내용이 아니면 손도 대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아무리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는 하지만, 기왕이면 책 내용도 좋고, 튼실하게도 만들면 좋지 않은가? 싸게도 팔면 금상첨화겠지만 싸게 파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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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3-1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었는데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책으로 다시보면 기억이 나려나요? 님의 리뷰를 보니까 그래도 책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stella.K 2007-03-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느낌이 다르더구요. 좀 더 섬세하다고할까? 책으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겁니다.^^

rancet 2007-06-0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의 '페이퍼백' 시리즈에 대해서 저는 찬성입니다. 어서 다른 출판사에서도 좀 따라해줬음할 정도이니까요. 어제께 교보문고에 가서 문학 섹션에 갔었는데, 이제는 책의 표지가 만화책의 표지와 같아 졌더라구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책은 사용성을 파는게 아니라 영혼을 파는 상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담는 그릇이 넘치는 것이 좀 마뜩지않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말이에요. '초콜릿'은 그래도 아주 두꺼운 편은 아니지만, 같은 시리즈의 '새의 노래'는 600쪽이나 됩니다. 만약 이 페이퍼백 시리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드커버나 정본을 사시면 되겠지요. 출판사는 오히려 독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고 이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거의 모든 책들은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이 같이 나옵니다. 물론 시간상의 선후는 있지만, 책의 내용을 보는 입장에서라면, 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도, 열린책들 출판사의 '페이퍼백'은 좋은 기회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꾸벅~


stella.K 2007-06-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ncet님,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페이퍼백과 하드카바, 같이 나와야 하는 것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몰라서일까요? 열린책들의 어떤 책들은 하드카바가 안 나오는 것 같던데...그래서 불만인 거죠. 맞아요. 책은 영혼을 파는 거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갈수록 찾아 보기가 어려운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흐흑~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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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소설가들이 독자를 웃기기 시작했다. 웃기는 소설가가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웃기는 수준이 전과는 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예전엔 웃기는 쪽에선, 나는 전혀 웃기지 않은 척 눙치고 있는데 상대가 웃어주면 좋은 일이지 하며 엄숙을 가장한 그런 것이었다면, 요즘의 작가들은 아예 작정하고 나도 웃고, 너도 웃고 우리 다 같이 웃자는 식인 것 같다. 그것이 나쁠 것은 없다. 모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지. 내가 먼저 재미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어찌보면 작가는 자기 글의 제1의 독자인지도 모른다. 내가 재밌게 느끼지 않는데 남 보고 재밌게 읽어달라고 하면 그건 어불성설일게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재밌다. 웃긴다. 나름 톡톡 튀는 재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읽으면서 살짝 걱정되는 건, 작가가 독자를 웃겨서 나쁠 건 없지만, 모든 작가가 이것을 들고 나온다면 '웃음 강박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웃는 것이 좋다고 하니 웃긴 웃는다만,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웃길거냐에 경도된 나머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걸 놓치거나 부각시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앞지른 걱정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얘기 하자면 나는 이 작품에서 개그적 요소를 발견했고(이를테면 소설 어디엔가 보면 스파이들이 보는 책목록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거 보고 정말 웃겼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이 웃겼다) 그래서 웃긴 했지만, 앞으로 한동안 우리 소설에 이런 개극적 요소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콜럼버스의 달걀' 같과 같은 소설이다. 누구든 한번쯤 다루어 봄직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생각 못하고, 안 다루었는지 모르겠다. 아는대로, 007 영화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제임스 본드는 승리를 의미하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매번 바뀌는 본드걸과의 달콤하고도 야스러운 포즈로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걸고 넘어지는 것은, 정말 보여지는 짜릿한 엔딩이 과연 실생활에서도 이어지고 있느냐라는 의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거 얘기라면 찾아보면 더 나오지 않을까? 나의 경우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렇던데. '그래 좋아.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왕자님과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됐어. 그런데  삶은 현실이거든. 그 이후의 삶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신데렐라 이야기의 속편을 쓰는 사람이 없다. 이 기회에 내가 한번 써 봐?'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많은 가능성과 참신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기대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일까?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걸까? 못한 걸까? 정말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이 책에서 007은 해피엔딩과 달리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간단하게 미미양을 배신하고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한다. 이에 미미는 복수를 위해 스파이 교육을 받는다. 그랬으면 당연 끝까지 복수를 해야하지 않는가?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슬쩍 비껴간다. 작전 한번 실패해 봤더니 사람이 보이더라는 식이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떠한 깨달음이었는지 사람이 저 모습이 되기까지는 나름의 많은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려고 했겠구나. 그러니 어쩌겠니? 서로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인류애를 좀 발휘해 줘도 괜찮지 않겠니? 그래야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뭐 그런 식의 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정도의 지점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소설이 너무 짧지 안았을까? 작가가 성직자 같을 필요야 없겠지만 암시 정도에서 끝내버리면 독자가 성에 안 차한다. 특히 나 같이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독자는. 아니면 설득될 때까지 더 많은 에피소드와 이야기를 전개해 보던가? 뭔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지점에서 대충 뭉개고 마니 김이 빠진다. 그러니 여기에 굳이 '미미양의 모험'이란 타이틀까지 달고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그냥 '미미양의 깨달음' 정도이지 않았을까? 모험이 모험다워지려면, 뭔가 박진감이 넘치고 어려워도 목표치까지 가 보고 갔다가 그 이후에 오는 것들을 조용히 음미해 보는, 뭐 대충 그런데까지 나갔어야 '모험'이란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았을까?

물론 사람의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거 가지고 독자를 설득시킬 수는 없다. 독자는 인물이 변하는 것을 추적해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미미양이 나중에 무엇을 깨달았던지 간에 007을 복수하기로 했다면 해 봤어야 했다. 그리고나서 남는 건 뭐였는가를 얘기해야 완결된 맛이 느껴지지 않을까? 복수를 위한 모험이었을텐데 재대로 해 보지도 않고 끝내 버리다니 좀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 책은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나를 자극시켰다. 우선 앞서말한 모 작가의 재밌게 쓰기에 또 한번 좋은 사례(?)를 보여줬고, 작가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너무 성급하게 일찍 뭔가를 드러내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거야 설교가나 상담가들이 하는 거 아닌가? 그것이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독자의 가려운 부분을 충분이 긁어주고 등장인물과 충분히 놀다가 끝내줘도 늦지 않은 거 아니겠는가. 그런 여유가 아쉬운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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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3-0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라는 것 같기도 하고, 보지 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stella.K 2007-03-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선택은 자유죠. 저 같은 경우 선물 받아서 읽은 거거든요.^^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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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토머. 토포러. 메모리모자이커. 타임스키퍼 등등. 화자가 캐비닛에서 꺼낸 파일들 보면 하나 같이 너무 그럴 듯해서, 정말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는 줄만 알았다. 근데 뭐란 말인가? 주의사항을 보니, 이 캐비닛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 이라지 않는가. 띠옹~!  속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귀가 얉은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야기가 좋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제부턴가 보이는 것, 드러난 것에 더 많은 거짓과 위선이 있어 믿지 못하는 버릇이 생겨서일까? 암튼 난 이런 이야기가 꽤 흥미롭고 마음이 갔다. 하지만 저 주의사항을 읽었을 때 꼭 허무했던 것마는 아니었다. 작가는 어찌보면 있지도 않는 것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 드러난 것들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감싸 안고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고 속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왜 소설을 읽는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사실 읽으면서도 내가 속을 것을 어느만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속였다고, 독자인 내가 속았다고 어떻게 100%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정도가 심한 '심토머'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그 비스무레한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에 심심치 않게 공개되서 정말 놀라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니, 저러고 어떻게 살아?"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도 산다. 우리와 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나는 작가가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고딕체로 어찌보면 푸념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연극 대사 같기도 한 그 툭툭던지는 말들이 참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개다가 소설가가 뻥을 치지는 능력이 없다면 그게 어디 소설간가?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속을 줄 알면서 그 속는 맛 때문에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 작가는 독자를 속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평범하든 비범하든 그 이야기속에서 인간의 인간됨의 진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재주가 작가에게 없다면 우리는 소설을 읽지 않을거라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자극할만한 뭔가의 울림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읽지 않을 거란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나름의 구조적인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읽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이 소설은 참 독특하고 기존의 소설적 화법을 과감하게 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것이 문체는 어찌보면 하루키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도 같고, 나중에 공대리가 잡혀가 손가락, 발가락 잘리는 것을 보면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 역시도 내내 킥킥대고 웃으며 읽다가 말미에 갈수록 약간은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뭔가 늘어지는 것 같다는 그 지점에서 나름대로 잘 마무리하고 나왔다는는 점이겠지.

읽다보니, 앞으로 작가들은 점점 발품 팔아 글을 쓰지 않고, 있는 재료와 상상력만 가지고 글을 쓰게 될거라고 하시던 나의 옛 스승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분의 말은 맞는 말이된지 오래고, 이 소설에서도 새삼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작가에게 있어서 취재력이 없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가 될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도 완성하게 발품 팔아가며 소설을 쓰고 계시는 조정래 씨나 최인호 씨 보면 그분들이 어떻게 취재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또한 작가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취재력 좀 발휘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처음에 이 글줄을 읽었을 때 설마...했다. 하지만 봐라. 내가 언제 독자로서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거 봤나? 위에서 바로 쓰지 않았나? 취재력 좀 발휘해 보라고. 그의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이 말은  독자를 잘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작가 나름의 방어술이었을까?

뒤에 작가 전경린과의 인터뷰 내용이 참 절절하다. 역시 작가란 배곪는 직업이란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배 곪는 줄 뻔히 알면서 작가가 뭐 그리 좋다고 못되서 안달하는 것일까? 그래도 그에겐 춘섭이라고 하는 고마운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친구가 그랬다지,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고. 그래서 2년간 매달 50만씩 그를 도와줬다고 한다.  멋있는 친구다. 지금 그는 수천억원 매출 올리는 사장이 되었다고 하니, 분명 위에 계신 분께서 그의 갸륵한 마음을 알고 복을 주신게다. 일개 작가지망생 나부랭이 밖에 안되는 나도 가끔 아는 사람 만나면 아는 척 씨부리고 다닌다. 작가는 명예직이라고. 작가가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줄 아냐고? 왜 작가는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없이 오직 이 나라의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글만 쓰면 안되는 걸까?

최재천 교수가 지난 주일 TV에 나와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린 위기란 말은 너무 잘 쓴다고. 인문학의 위기, 자연과학의 위기, 경재위기 등.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다. 이것이 믿겨지느냐고.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만에 이런 발전을 이룩한 나라는 전세계적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린 아무런 가진 자원이 없다. 우리나라가 내세울 것은 오로지 학문 연구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5백명의 가능성 있는 학자를 1년에 4천만원씩 10년 간(?) 무상으로 지원해 주면, 그들이 훗날 각 분야에서 브레인으로 그동안 연구한 것을 쏟아낸다면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냐고. 그렇게되면 총 200억 정도가 드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경재 규모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좋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5백 명에 글쟁이는 과연 낄 수 있을까? 아니 끼어야만 한다. 아니면 춘섭 씨 같은 친구나 배우자를 만나던지...

아무튼 문학동네가 또한번 '김언수'라는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를 배출해 냈다. 어느 심사평에서처럼, 나 역시도 김언수란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무슨 글을 썼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가 된다. 그런데 이 작가 겸손하기도 하고 자신만만 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의 말대로 작가가 단순히 돈 없고, 빽 없는 독자 하나를 후려쳐서 책 한권 더 팔아먹을 요량이라면 귀싸대기를 맞아도 싸다. 그런데 난 이 작가에게 따귀를 올려 붙일 생각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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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0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믿고 싶었지만 때리고는 싶더군요. 마지막에서요^^:;;

stella.K 2007-02-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물만두님이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