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 톰스 캐빈 아셰트클래식 2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그림, 마도경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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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제도에 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들어오긴 했지만, 지금도 인간을 사유 재산으로 본다는 게 충격적이긴 하다. 어떻게 인간 고유의 가치를 사유화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 역시 노예를 다룬 이야기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학교에서야 그냥 지식으로 들어 넘기고 실제로 노예를 다룬 이야기는 영화 <뿌리>를 접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서구에서는 노예제도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엔 오랫동안 '노비제도'가 있었다. 어린 시절 <뿌리>를 보면서 과연 서양의 노예제도와 우리나라의 노비제도가 무엇이 다를까? 인간을 사유화하기는 똑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나쁘기로는 서양의 그것이 나쁜 것일까? 우리나라 노비제도가 더 나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더랬다. 모르긴 해도 서양의 노예제도가 조금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서양은 적어도 자기 동족을 노예로 삼지는 않지 않으니까.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양반과 천민이 구분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민중 대다수는 그렇게 노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랄하기로는 서양과 우리나라 중 어디가 더 악랄할까? 그때 내 옆에 누워 자던 언니는 그야 당연 서양이 더 악랄하지라고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언니의 비논리적이면서도 팔은 안으로 굽는 막연한 애국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누가 감히 가늠해 볼 수 있을까? 그것은 그 시대를 몸소 겪어 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억압 받고, 착취 당한 것은상처 그 자체이므로 정도의 차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의문은 정말 우문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묘한 반감이 있는가 보다. 아주 오래 전,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영화라 기억엔 거의 없지만, 백인 소년 영웅 만들기? 뭐 그런 것쯤으로 기억이 되는 것 같다. 처음엔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인간 승리의 영화는 다 감동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백인 소년 하나가 승리함으로 인해서 주위의 흑인들이 더불어 복을 누린다는 그런 식의 설정이 다시 생각해 보니 꽤 못마땅했다. 그것을 알고는 당시 이 영화를 보고 열광했던 사람들에 대해 나는 냉소하다 못해 조소를 날리곤 했다. '영화를 볼 줄 모르시는구만. 쯧쯧.'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바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결국 이 책이 노예해방에 도화선이 됐다곤 하지만, 그래서 결국 그것을 이루어냈지만 하지만 백인들에 의해 노예제도가 만들어졌으며, 백인에 의해 그것이 폐지가 된 것이 아닌가? 나름 클러어한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왜 흑인에 의한 해방은 없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신들의 치욕의 역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미국의 역사는 아니 흑인의 역사는 다시 씌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흑인의 역사는 지금도 베일이 가리워져 있다는 게 좀 아쉽다. 

이 책이 성경을 토대로 씌어졌듯이, 성경에 의해 노예제도가 만들어지고 성경에 의해 노예제도가 폐지가 됐다는 것은 확실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을 두고 '몽학선생(?)'이란 말을 가끔 하곤 하는데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한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다. 성경, 그 거룩한 책을 두고 누구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 하지만, 누구는 거기서 진리를 발견하고, 사랑과 평등을 발견하지 않는가? 결국 성경으로 인해 알곡과 쭉정이가 가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책은 참 착하게 씌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황은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평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아마도 작가 개인의 성향이기도 하겠지만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도덕적 가치나 연민의 태도 등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사실 난 톰의 삶에 대한 태도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노예가 됐다고 다 불행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향 아프리카는 신의 저주를 받은 땅이라고 했을 때도 톰만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사실 저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귀속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보면 불명예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톰은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거기서도 인간의 사랑과 정의를 꽃피웠다. 그런 삶의 태도가 비난 받을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하겠는가? 바로 톰은 실제인물이며 저자로 하여금 영감을 줬다고 하지 않는가? 기억할 일이다. 나의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가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며 어떻게 세상을 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노예해방은 백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느 작은 흑인 노예로 부터 시작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가 폐지된지는 이제 200년이 흘렀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해방은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선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노예는 폐지됐을지 몰라도 인간의 착취와 억압은 지구 어디선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종차별에서도 자유하지 못하다. 200년이 지난 지금 이 작품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 또 나와 줄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 내용은 달리하지만 그 형태는 반복된다. 그래서 우린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진정한 인간해방의 노력은 여전히 펜 끝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인간의 정신을 갈고 다듬는 노력은 계속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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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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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지는 며칠 되었다. 그런데 문득 문득, 내가 이 책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자꾸 리뷰 쓰기가 망설여졌다. 그래도 뭔가는 말해야 할 것도 같은데... 

우선, 작가가 외양에서 풍기는 이미지답게 꼼꼼하고, 촘촘하게 글을 썼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로선 작가의 <나의 달콤한 도시>를 드라마를 통해 보고,  책을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말미에 정말 열심히 썼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 여성적 감수성이 드러내서 일까? 잔잔한 감동은 있지만 굵직한 뭔가를 던져 주기엔 다소 미흡하지 않나 싶다. 물론 그렇다고 작품 자체를 즐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사람은 기본적으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가족이란 나의 평안과 안락을 위해 있어주길 바라는 것이지 일정 부분 그것이 보장되면 사람은 여간해서 그 동굴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동굴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누구도 침범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으니 우리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집안에 살아도 서로 모르는 수 밖에.

사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제시한 가족은 어찌보면 가장 흔한 중산층 가족 형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옥이 화교라는 점이 약간은 특이할 수도 있다할지 모르나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인물 설정이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우리나라도 외국인과의 결혼이 잦아 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혼도 흔한 양상이다. 어떤 가족학자는 인간은 평생 두 번 이상의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오래 전에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이혼이 흔한 현실에서 개인의 정신적 성숙도는 이혼 현실을 못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속 은성이처럼 아빠를 싫어하고, 새 엄마를 싫어하며, 그들에게서 난 자신의 이복 동생도 싫어하지 않는가?

사실 가족관계의 문제는 은성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장인물 하나 같이 가족의 좋은 구성원이 될만한 자질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 유지가 유괴되지 않았다면 이들의 문제는 잔잔한 수면 밑에 잠식되어 있다가 언제 수면 위로 솟아 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고요 속에 있다. 너무도 잔잔하고, 너무도 불안하여 오히려 일탈을 꿈꾸지 않았던가? 유지의 유괴로 인해 그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의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에서 그렇게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그나마 유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가 건드려졌지 왠만해서 유괴 같은 큰 사건은 누구에게나 잘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을 보면 이런 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문제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왜? 사람은 동굴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즉 유지처럼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원래 이래야 하는가 보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렇게 불안 하지만 그것이 어느 만큼 보장되고 확보가 되면 여간해서 그 동물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지는 친구도 안 사귀고 자신이 얼마만한 자질이 있고 없고 간에 그냥 바이올린 연주라는 그 동굴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가? 그리고 기껏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오지만 유괴나 당하고.  그러므로 유지는 태어나면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진정한 관계 맺기가 쉽지 않고 사회성이 낮은인물이 된다.  오늘 날의 가족도 그렇지 않는가? 그저 나는 누군가의 아내고, 남편이며, 딸이고, 아들이란 명분만 있을 뿐 그에 따른 인간적 도리는 없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면 기본적인 의식주에 별 불만이 없으며 살아가는 것에 별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 위에 물질만능만을 추구하니 인간적인 도리라는 게 물질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난 유괴되었던 유지가 집에 돌아 오고(물론 그 결말이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을 통해 그동안 없던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생겨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가족이란 이제 혈연으로만 연결되지 않는다. 어려울 때 같이 염려 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이 가족이다. 그저 단순히 내 불안한 동굴을 지켜주기 위해 가족이란 기본 단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미스터리 형식을 취했던 만큼 밝게 해피앤딩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유지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불안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끝을 맺는다.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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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1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가족관계가 해체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그래도 역시 의존하게 되는것은 가족인것 같아요^^

stella.K 2010-01-20 11:50   좋아요 0 | URL
이제까지와 다른 형태의 가족은 있겠지만 해체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해저 2만리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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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작가정신에서 <해저2만리>가 번역되어 나왔다.  아마도 같은 제목의 책으로는 가장 최근의 번역본이고 원전을 완역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번역본 중 단연 권위가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도톰하고도 큼직한 하드카버에 생생한 일러스트가 눈을 끈다. 하긴, 쉴새없이 바닷속 풍경들과 생물들에 대한 설명을 말로써만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리 그 표현이 뛰어나다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러스트가 있어주면 보기에도 좋고 이해도 빠를 것이다.  

이 이야기는 186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희안한 괴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바다에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아로낙스 박사는 그의 하인인 콩세유와 그의 조수격이면서 작살꾼인 네드랜드와 함께 그 괴물의 정체를 알아 보기 위해 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 그들은 바다에 떨어지게 되고, 마침 문제의 거대한 바닷 괴물의 몸체에 떨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것은 '노틸러스'란 잠수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잠수함 내부를 보게되고, 그곳 함장인 네모 선장을 알게 된다. '네모'란 라틴어로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라는데 그만큼 그는 모호하며 신비스러운 존재다. 또한 그의 특징중의 하나는 지상의 세계를 싫어하며 오직 바다속을 좋아해 잠수함 안에서만 살며 바닷속에서만 산다는 것. 아무튼 이때부터 그들의 모험은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며 미완인채 끝을 맺고 있다. 과연 이 책은 읽는이로 하여금 모험심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랜 전, 쥘 베른의 또 다른 작품인 <지구속 여행>이란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쥘 베른을 나 자신 좋아하고,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작품속 리텐부로크 교수나 이 작품 속의 아로낙스 박사나 오버랩 되듯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은 하나 같이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하긴 그런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박사도 하고 교수도 하겠지. 그런데 그것은 또 어찌보면 쥘 베른의 분신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도 그런 말을 했지만 어쩌면 바닷속 풍경이나 생물들의 묘사를 그처럼 쉴새없이 쏟아낼 수 있단 말인가? 웬만한 해양학자 못지 않은 방대한 지식이다. 그렇다고 쥘 베른이 해양학에만 관심이 많았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배나 잠수함에 대한 지식 또한 누구 못지 않게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디 그뿐인가? 과학의 또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이것 못지 않은 지식을 또 다른 소설속에서 뽐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내가 읽은 <지구속 여행>은 지질학이나 다른 여타 식물들에 관한 지식을 뽐내고 있다. 그러니 쥘 베른은 과학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만큼은 그 호기심이 엄청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을 소설로 승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정말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그래 맞아, 바다 속도 엄연한 세상인데 내가 너무 지상에만 눈을 고정시켰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지상에서의 그것도 이쯤되면 그 관심이 시들해지기도 한다. 무엇이 새롭게 발견되고 발명되어도 시큰둥이다. 그렇다고 무엇하나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나의 나태함이 새삼 일깨워지는 것이다.

바다 속은 얼마나 신비로울까? 우리가 아쿠아리움만 가도(난 아직 아쿠아리움도 가보지 못했지만) 입이 벌어지는데 실제로 바다속을 여행해 본다는 건 얼마나 신비로울까? 평생을 살아도 그런 체험을 못해 볼 내 인생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책으로나마 간접 경험을 해 볼 수 있으니 쥘 베른에게 고맙다고 해야하겠지.  

사실 이것은 책으로만 읽기엔 아쉬움이 많다. 영상으로 펼쳐진 무언가를 본다면 정말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그래서 실제로 영화화 되기도 했다는데 워낙에 오래전에 만든 영화라 지금 본다면 또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다. 

책 뒤에 보면 부록으로 '쥘 베른과 그의 시대'라고 해서 그의 연보와 함께 시대적으로 무엇들이 발견됐고, 발명 되었는지를 비교해 놓은 페이지가 눈을 끈다. 그것을 읽고 있노라면 그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었으며 과학자며, 미래학자고 예언가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솔직히 이 책은 보는이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소 엇갈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권하기엔 조심스러워진다.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과학(특히 해양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지만, 나 같이 과학엔 문외한이고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에겐 약간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삽화가 많이 있어 그 지루함을 반감시켜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읽는데 가독성이 있는 것도 아님을 참고적으로 밝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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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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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난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에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자살의 소식은 더 더욱. 하루가 멀다하고 매스컴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쏟아내고 있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에 비유될만큼 각박해질대로 각박해진 세상에서 다른 어떤 소식은 다 익숙해져도 이놈의 죽음의 소식은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그렇지만 뭔가 망치로 머리를 맞는 느낌이다.  

이 작품을 읽을 때도 그랬다. 난 그저 제목이 그럴 듯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야기는 중딩 계집아이의 자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역시 나에겐 멍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난 자살이란 단어에 멍때리는 느낌만 가졌을 뿐이지 그 나머지 것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왜 죽었는지, 뭐 때문에 죽었는지, 그 죽음의 정황에 대해서 추측만할 뿐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의 자살에는 답이 뻔해 보인다. 십중팔구는 왕따 아니면 성적비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청소년의 자살. 그리고 이후에 남은 사람들의 심경에 관해 상당히 사실적이면서도 감수성 짙게 그렸다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은 자살한 천지의 입장만을 대변하지 않고 천지와 관련된 인물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물의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그러므로 그 인물 하나하나에 읽는 사람이 공감이 가도록 했다.  

하긴 우리는 누가 자살을 했다면 혀를 끌끌차며 동정부터 앞질러 한다. 그러나 자살한 당사자만이 가장 불쌍하고 동정 받아야 할 존재일까? 살아있는 사람은 다 강한 자인가?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이 작품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읽다보면 죽은 천지보단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하다못해 천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화연이까지도 함부로 비난할 수 없게 만든다. 

사실 왕따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이 문제를 위해 나름 노력들을 하겠지만 왕따가 알고보면 단순한 양상이 아니라는 걸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왕따를 하는 사람도 나름의 매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바보여서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힘이 있어서 왕따의 가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찌보면 이 작품은 그것의 반대적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천지는 똑똑한 아이다. 아니 영악하다고 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어찌보면 이 아이는 이 이야기의 열쇠를 쥔 인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아이들도 나름 영악해 보인다.  

사실 자살은 자신이 약해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의 천지는 그렇다. 오히려 이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화가나 있고, 이런 세상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심판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보아진다. 선택이라.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상당히 자의적이며 동시에 오만한 것이 아닌가? 천지의 자기 서술 방식 또한 그렇다. 천지는 영악해서 자신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누군가는 화연을 심판하고 조롱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누가 죽은 천지를 무조건적인 동정으로만 일관할 수 있을까?  

천지를 온전히 동정하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엄마와 언니 만지다. 그도 그럴 것이 천지를 낳았고 천지와 한 핏줄을 나눈 사이가 아닌가? 세상은 죽은 천지에 대해 뭐라고  욕 할지라도 그들만큼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참 읽는 나도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특히 천지가 죽고 난 후에도 그들 모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천지의 손길이 닿은 물건 또는 똑같은 일상속에서 천지만 없다는 사실에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엄마와 만지가 나누는 이야기는 또 얼마나 위트가 담겨져 있는가? 그래서 더 슬프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슬퍼도 사는 것. 슬픈데 웃긴다. 웃긴데 슬프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엄마와 만지가 나누는 대화가 있다. 만지가 엄마에게 묻는다. 신 같은 거 믿냐고?신은 정말 있냐고? 그때 엄마는 자신있게 대답한다. 자신은 신이란 신은 다 믿는다고. 나쁜 짓 하라는 신은 없지 않냐고? 딸은 또 묻는다. 그런데 왜 나쁜 사람들은 그냥 둘까? 그러자 엄마는 또 말한다. 그래서 잡아가는 사람도 만들지 않았냐고. 하지만 엄마는 차마 이 말 한마디는 내놓지 못한다. '기집애야, 나한테는 니들이 신이고 종교였어.'(113~114p)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이런 부모를 두고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죄악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 역시 아주 가끔은 나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곤 한다. 나 세상 떠나는 건 그다지 슬프지 않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남아 있을 나의 엄마와 가족들의 슬픔을 생각하면 세상 떠나는 것도 쉽지는 않겠다 싶기도 하다. 내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엄마에겐 정말 신이요 종교였을 텐데 그런 내가 엄마의 가슴속에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라. 더 이상의 상상은 감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작가는 끝까지 천지의 이야기를, 살아 있는 엄마와 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화연의 이야기를 완성해 간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어쩌면 세상을 용서하는 천지만의 또한 작가만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천지는 화연이에게 왕따를 당할 때부터 어떻게 하면 그 친구에게 복수할 것인가를 알았을 것이다. 죽음으로 복수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천지의 죽음을 완성할 수 없다. 그런 복수도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닐까? 죽을 것인데 그런 삶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죽음 앞에 누구도 경건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또한 지혜롭게도 유서 대신 다섯 개의 봉인 실을 만들어 살아있는 사람이 퍼즐을 맞추도록 했다. 그것이 용서를 위한 천지만의 방식이고 남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화연이를, 세상을 용서하기 위한 방식. 비록 그것이 '방향 잃은 용서'일지라도 말이다. 

엄마가 만지의 고등학교 입학 상담을 위해 학교를 찾던 날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가 눈을 끈다. 

   
 

요즘 애들은 충분히 똑똑한 거 같은데, 얼마나 더 똑똑해지고 싶어서 그렇게 공부하나 말라요. ......(엄마) 

가르치는 입장에서 이런 말 참 우습지만, 어른들이 그렇게 시키잖아요.(선생님)  

어찌된 게 요즘 애들은 단체전은 없고 개인전만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혼자 다 하려나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겠어요.(엄마) 

부모님들이 시상대에 여럿이 올라가는 것보다, 자녀 혼자 올라가는 모습을 더 원하는 게 아닐까요?(선생님)  (160p)

 
   

 부모라면 다 이런 마음일 것이다. 내 아이가 신이고 종교인데 그런 생각 드는 거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오늘 날 교육의 통렬한 비판이기도 하다. 결국 내 사랑하는 아이가 우상이란 말이다. 우상 같은 사랑은 독이다. 내 아이를 우상처럼 사랑하면 병이 들고만다. 왜 우리의 아이들을 혼자있게 만드는가? 애초부터 우리의 학교를 여럿이 함께 시상대에 올라갈 수 있는 단체전의 장으로 만들었더라면 천지 같은 비극은 반복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잘 지내니?"라는 저말이 없었다면 자신 또한 생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어른들이 하는, 너 밖에 없다. 사랑한다. 모두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실은 아이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정말 이런 거짓말 우린 몇번이나 하고 살았던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잘 지내?"라는 인사가 너무 일상적이고 건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후 그 입에 발릴 것 같은 그 인사가 그렇게 힘을 지니는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나 역시 앞으로 우아한 거짓말보다 만나는 사람에게 저 질문을 더 많이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개인적으론 작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완득이' 보단 이 작품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무래도 '완득이'는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그다지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고 다음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한 글자 한 글자 찍어내듯이 글을 썼을 것 같은 작가의 문체 곳곳에서 묵직한 울림도 받았다. 무엇보다 청소년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지긋한 애정이 느껴져 작가에게 고마움이 느껴졌다. 정말 보기 드문 수작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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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11-2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관심있었어요. 완득이는 그닥 공감하며 읽지 못했음에도 이상하게 작가의 이 후속작 소식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stella님은 잘 계신거죠? ^^

stella.K 2009-11-30 12:3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책은 정말 다르더군요.
hnine님도 읽으시면 감동 받으실 것 같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 고마워요.
님도 잘 지내시죠?^^
 
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다. <바람의 화원>을 통해 펙션과 추리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줬던 작가가 이번엔 침니아이랜드와 뉴아일랜드라고 하는 가상의 안개의 도시에서 펼치는 범죄 스릴러를 들고 독자들을 찾아 왔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첫 장을 펼쳤을 때 좀 놀랐다. 이게 과연 내가 알던 그 작가가 쓴 소설이 맞나? 다시한 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정명 작가의 작품이 맞다. 그런데 꼭 영국의 어느 추리 작가의 작품인 것 같다. 등장인물이 우리나라 고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작가는 작품의 세계화를 노린 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보게도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그렇고 그런 만만한 작품이었다면 겉멋들었다고 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이 그렇듯 단락 단락이 자로 잰듯하며 마치 영화에서 한 프레임 안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듯 정교하다.   

제목도 제법 근사해 보인다. 가제본으로 받았을 땐 '나에 대한 너의 거짓말'이었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이 정식 판본에선 이렇게 <악의 추억>으로 거듭났다. 또한 정식 발매를 하기 전에 독자들을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하는 등 작가와 출판사측이 들인 공력이 얼마만했을런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알마 전, 작가는 모 신문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김부남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썼다고 밝혔다. 김부남 사건이라. 한때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언제나 그렇듯 너무도 쉽게 우리의 뇌리속에서 잊혀졌던 이야기를 작가는 용케도 잊지 않고 이 작품 속에서 살려냈구나 싶었다. 당시 그 사건은 어렸을 적 이웃집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성인이 되어 결혼생활에 지장을 겪는 등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이 결국 사건이 발생한지 십수 년이 지난 후 결국 가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 나도 언젠가 이 이야기의 전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대하고나서야 아니 정확히는 이 인터뷰 기사를 접했을 때야 비로소 기억이 난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 것이냐. 주위에 또는 내가 직접 당한 일이 아니고 보니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조두순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가해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 또는 거세를 해야한다며 떠들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잠잠하고 희생자들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이 안타까워 이 작품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참, 이런 작가가 있다니. 웬지 숙연해진다.  

그런데 정말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왜 그처럼 냄비에 물끊듯 하다가 이내 잠잠해져 버리는 걸까? 김부남 사건이 어디 그때 한때의 사건으로 종결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김부남 사건까지는 아니어도 성폭력 피해자는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말마따나 그들은 잠깐 나왔다 잊혀진다. 그렇게 반복해서 우린 현재 나영이 사건까지 왔다. 나영이 사건은 또 언제까지 사람들의 뇌리속에 기억될까? 그런데 이번에 놀라운 건 지금까지 성폭력 가해자가 생각 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가해자에게 그것 밖에 안 되는 형을 내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법이 가벼우니 조두순 사건에서처럼 거세를 해야한다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들끊는 것이 아닌가? 실로 인권이 피해자를 옹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는 꼴이 되고 있으니 어쩌면 이 나라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이중의 피해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차는 가해자에게, 2차는 국가가. 과연 국가는 이들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김부남 사건에서 보듯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것이다. 누구는 그럴지 모르겠다. 이것은 피해자가 직접 행한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그러므로 죄가 없는거라고. 그 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렇게만 보는 것도 석연치 않다. 악에 대한 심판은 악의 피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악은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어떤 면에선 또 다른 죄악을 낳은 것이란 생각도 든다. 마치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이 물린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따라서 다른 사람의 목덜미를 무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말하자면 우린 악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것이다. 악의 고리는 끊어져야 하는데 뭔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큰 수렁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다.  

이정명 작가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궁금해졌다. 과연 김부남이라는 사람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해자를 찔러 죽였을 때 마음이 후련 했을까? 지금은 행복할까? 모르긴해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다. 다소는 후련했을지도 모르지. 가장 좋은 건 그 일을 안 당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이 선행이 됐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왜 그것을 묵인했던 것일까? 

오늘도 모 소아정신과 의사가 나영이 사건을 보고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범죄 수사에서의 증언이 아니라 치료라고. 맞는 말이다. 피해자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환자를 두고 몇 번씩 진술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은 고문이다. 이런 수사 방식은 정말 고쳐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놓고 가해자에게 익숙하고 뻔한 형을 내린다면 이것은 필시 짐승같은 검찰에 무능한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엔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건 우리나라는 성범죄자들에게 너무 소극적이다. 그들의 신상을 공개할 것이냐 말것이냐, 전자발찌를 착용할 것이냐 말것이냐, 거세를 할 것이냐 말것이냐 이런 것 가지고 인권 침해 소지 논란만 물고 늘어진다. 사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피해자측에서 보자면 가장 소극적인 안전망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폭력피해자 못지 않게 가해자 역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매스컴이나 여타의 치료기관에서는 그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난 이것이 더 화가난다. 진단과 비판만 있을 뿐 행동이 없다. 김부남 사건도 애초에 양쪽의 치료가 이루어졌더라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과연 악의 피해자가 악을 심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끝은 완벽하지 않다. 악은 반드시 선으로만 정복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이다. 악으로 악을 심판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착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탄탄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결말을 내고 있다. 등장인물 저마다에 갖는 트라우마는 말하고 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해결을 보여주지 못하고 또한 이들이 벌이는수사도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보여주지 못한 체 안개의 도시처럼 모호하게 끝을 맺고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마무리져야 할런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문제만을 제기하고 끝내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맘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일이란 게 문제 제기만 해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 결론이야 앞으로 성폭력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냐 또는 이를 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 아쉬운 것은 제목대로 '악의 추억'이었다면(독자로서 이 제목에 만족한다) 악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간군상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악의 실체와 악의 반대 개념인 선에 관해서어느 정도 언급해야 하지 않았을까? 오늘 날의 세대가 악은 얘기할 줄 알면서 그의 반대 개념인 선에 대해서는 얘기하기를 주춤하는 세대가 되어버린 듯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죄와 벌'을 얘기했던 도스토옙스키가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렇게 이 작품은 약간의 아쉬움은 남지만 나는 당분간 작가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더 좋은 작품을 쓰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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