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어디 커피가 러시아에만 있겠는가? 고종. 그 시대에도 이미 세계 각국에서는 커피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즐겼을 것이다.  

우리가 노서아 가비(러시안 커피)를 기억해야 하는 건 아마도 우리나라에선 고종이 그 음료를 최초로 마셨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더 정확히는 그의 부인이었던 명성황후였던 것 같다. 하긴 부창부수랬다고 그나 그녀나가 아닐까?) 그러나 책은 이것이 어떻게 우리나라 특히 고종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고종은 인현황후의 시해 전부터 황후와 함께 커피 마시기를 즐겨했고 러시아 공사관 시절에도 커피를 끊일 마땅한 시종이 없어 사람을 찾던 중 따냐가 차출된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이 된다.  

사실 따냐는 원래 그녀의 이름은 아닐터. 역관이었던 아버지가 나라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이유로 형을 받아 사살되고 그녀는 살기 위하여 조선을 버리고 러시아로 가야했다. 말하자면 따냐는 그때지은 그녀의 러시아 이름이다.   

노서아 가비는 역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것이었고 러시아에서도 익히 즐겨 마셨던 음료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기꾼이 되었고 역시 사기꾼인 이반을 사랑했다. 이반 역시 노서아 가비를 좋아해 진한 사랑을 나눈 뒤 함께 마시는 노서아 가비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좋은 매개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 사기꾼이 되었고 그 피가 그들의 내면에 흐르게 된 이상 이들에게 과연 진실한 사랑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온갖 협잡이 끊이지 않는 고종 주변에 그녀를 밀어 넣은 것도 이반이었다.그것은 고정의 커피를 끊여 주면서 무엇이든 정보가 될만한 것은 이반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흘려주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한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도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든다는 것은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중엔 고종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주변을 둘러싼 소인배의 짓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거기에 이반도 함께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고종의 커피를 끊여 주면서 한 나라의 군주이기 전에 한 남자의 절대 고독을 엿보게 된다. 그것은 자꾸만 그녀로 하여금 진실에 다가서게 만들고, 고종 역시도 그녀에게만큼은 진실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의 사기꾼이란 존재적 신분이 이반의 고종에 대한 시해(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섞음)의 위기에서 고종을 살렸고, 그녀는 음모에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까페를 운영하며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읽고나면 커피만큼이나 진한 여운이 남는다. 따냐와 이반의 사랑 그리고 그 사이의 고독한 남자 고종의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특히 전편에 흐르는 따냐와 이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갈구는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꾼에게 사랑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그 사기꾼이 서로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하려 한다는 것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서 남는 것은 역시 진실이다. 사랑하는 진실. 사랑하지 않는 진실. 

특히 이반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고독하면서도 냉혈하고 사랑하는 여자 앞에 끝까지 진실하고 싶어했던 이반 그리고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뇌리에 남는다. 이 이야기가 영화화된다고 하는데 과연 누가 이반을 맡을 지 자못 기대가 된다.(웬지 쉽지 않은 배역일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나 역시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커피를 마셔왔다. 커피를 처음 알기 시작할 무렵 나는 커피가 너무 좋아 빨리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길 바랬다. 그러면 또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고독한 고종만 같을까? 너무 고독해서 커피를 안 마시면 견딜 수 없었던 고종의 커피에 대한 갈구만 할 것이며, 진한 사랑뒤에 커피를 나눠마신 따냐와 이반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다른 모든 것엔 중독이 된 일이 없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 있어도 중독될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커피에 관한 한 나는 확실한 중독자다. 그렇다면 커피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인생은 살면 살수록 특별히 놀랄 일도 재미있지도 않아 보인다. 예전엔 커피 마시는 맛에 살았고, 커피 마시는 멋에 살았지만 지금은 커피 마시는 낙에 산다. 이 낙도 없으면 그 많은 나날 어찌 살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커피는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음미하며 마시게 되는 묘한 음료인 것 같다. 

저자는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커피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시작한다. 저자의 커피에 대한 통찰이 놀랍다. 보통 마셔보지 않고는 이런 명구를 뽑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그중 기억에 남는 정의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커피는 맛보지 않은 욕심이며 가지 않는 여행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나오는 푸쉬킨의 시의 절묘한 배치란...!   

나도 인생의 낙을 얘기하리만치 나이가 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살아 온 날들에 비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아직은 더 욕심부려도 되고 인생의 여정도 그만큼 더 남아 있다. 그 길에 여전히 커피도 함께 하겠지. 그때 난 또 커피에 대해 뭐라고 말할 지 나 자신도 궁금해 진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함께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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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7-16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는 맛보지 않은 욕심이며 가지 않는 여행이다...
정말요? 저자가 이런 정의를..
지금 장맛비 소리 후두둑 들으며 카페라떼 한 잔 하고 있어요.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어제 속이 안 좋아 한 잔도 안 마시다가
지금 마시니 너무 좋으네요. 이 책 담아갑니다~~~

stella.K 2009-07-16 10:45   좋아요 0 | URL
카페라떼를 좋아하시는군요.
저자도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마시고, 후회한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런지 아시죠?ㅎㅎ

프레이야 2009-07-16 19:03   좋아요 0 | URL
크아~ 배불러서일까요??ㅎㅎ

stella.K 2009-07-17 10:14   좋아요 0 | URL
이걸 가르쳐 드리고 싶은데 안 갈켜 드릴랍니다.
나중에 책 보시면 아세요.ㅎㅎ
 
스트레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9
기예르모 델 토로 외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사실 호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나름 뱀파이어 이야기는 전에도 접해 본터라, 그 이야기가 가진 서늘한 매혹에 충분히 빠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매혹적인 뿐만아니라 철학적이기까지 해 감탄하면서 본적이 있다. 그후 책으로 사서 읽어 보려고 했는데 읽는데는 실패했다. 영화만큼의 감흥이 없었던 것이다. 

올해들어 뱀파이어 영화들이 다시한번 부활한 느낌이다. 그렇지. 뱀파이어어야 그 존재 자체가 몇 세기를 아우르는 것인데 한번만 만들어지고 마는 이야기라면 섭할 것이다. 이것 자체가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 끊임없이 새롭게 재탄생되는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도 나는 호러를 좋아하지 않으니 여전히 선택은 주춤할 것 같다. 

사실 이 책도 나의 도서 목록에서는 열외의 책이다. 그런데 워낙 평이 좋아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이 작품에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난 왜 매료당하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 감독이 써서 그랬을까? 각장마다 영상을 보는 듯한 것은 있다. 그런데 워낙 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움직임등을 설명하고 묘사하는데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 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본론으로 곧바로 진입하지 못하고 빙빙 도는데 질려버렸다.

저자야 이렇게 쓰고 그대로 찍으면 되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뭐란말인가?  

영화에서 첫 3분 내지 5분 동안 관객을 자로잡지 못하면 안된다는 영화적 법칙이 있다. 영화에서 단 몇초만으로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문자로 읽어야 하는데 이렇게 장황할 필요가 있는건가? 도대체 이 책이 두 권으로 나올 필요가 있을까?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이런 의문이 의미가 없는 것이 이 책은 총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 이런 의문이 얼마나 우문이랴! 

단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작가가 원래는 영화감독이면서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감독이 소설 쓰지 말라는 법이야 없지만 뭔가 모를 한계가 느껴진다. 이 사람은 자기식의 소설을 썼지 소설다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그나마 2권을 썼을 것으로 보이는 척 호건이 따라붙어 주긴 했지만 1권에서 재미를 못 봤으니 2권을 칭찬해 줄 마음은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2권을 척 호건이 썼는지 확실하지도 않고)  

게다가 요즘 소설계에서 즐겨 차용하는 영화적 기법에 회의가 느껴진다. 

영화적 기법이란 게 쉽게 말해서 영상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더불어 허리우드적 구성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든 재밌게 색다르게 읽이면 좋은 것 아닌가? 하지만 (아직까지)그런 소설에 문학적 향취를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은 아닌가 회의가 느껴진다. 한마디로 "너희들이 문학을 알아?'다. 아, 나는 왜 그놈의 '허리우드적'인 것에 닭살이 느껴질까?  

편집이 문제인 것인지 각장의 처리도 매끄럽거나 일정하지 않으면서 그장 말미에 똥폼잡는 표현들(번역자에게 미안하지만 저자를 생각하면 좀 웃음이 난다. 어차피 태평양 건너의 사람인데 이런 일개의 독자가 비웃었다고 꿈쩍이나 하겠냐만)이란...! 

사람들은 이 책에 열광하고 빨리 영화화 되길 기다리겠지만 난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기존의 고전적 이미지의 뱀파이어의 고혹적인 매력을 안다면 말이다. 고전적 뱀파이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런데 여기선 기계적이며 물리적인 장치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한다.   

모르긴 해도 이 이야기는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이며 영화화되도 별점 두개 반 많아야 세 개 이상 받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아님 말구!) 

영화에서 초반 3분 내지 5분에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다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고 보듯, 책 역시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특히 이런 허리우드적 소설일수록. 전체 분량 4분의 1 또는 3분의 1에서 독자를 사로잡지 못했다면 더 이상의 기대를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평점이 좋은 책에 혼자 냉소하자니 뻘쭘하다. 그냥 나와는 인연이 없는 책이라고 덮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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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타리에이 베소스 지음, 정윤희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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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북유럽의 소설을 접할 기회가 흔하던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겐 흔치 않은 독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작품은 지극히 목가적이고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친환경적이라고나 할까?(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쁘려나?) 그렇지 않아도 책 표지가 아름답다. 등장인물도 단출하고 기계적인 느낌이 하나도 없다. 또한 읽으면서도 작가의 충실한 묘사에 마치 사진을 찍듯 영화를 보듯한 느낌이다.  

특히 육체의 나이는 37세지만 정신 연령은 5살에 멈춘 마티스의 정서와 느낌, 경험 등을 작가는 이 작품에 오롯이 담아냈다. 이야기는 이미 오랜 세월 누나와 단 둘이 살았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살게 될 것만 같은 그의 집에 벌목꾼 예르겐이 함께 살게 되면서 겪는 마티스의 체험과 감정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냈다.  

사실 백수로서의 삶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런 지루한 삶에도 잔잔하지만 소소한 사건 하나씩은 일어나 줘야하지 않는가? 그래서 숲속에서 소녀들도 만나고 뱃사공으로도 살아 본다. 그것은 마티스에게나 소녀들에게나 다 같이 좋은 경험이되었다. 하지만 낮선 사람과의 동거는 어떨까? 

마티스는 지적 장애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정서를 우리가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적인 면에서 장애는 없다고는 하나 어린 아이와 같은 자아 또는 그 정서를 어느만큼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허리우드가 배출해 낸 이야기 방식에 길이 들여져서일까? 읽는내내 그래도 마티스가 뭔가 일을 내지 않을까? 그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있어 무슨 사건 하나를 해결하고 이런 장애아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신화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는 것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그런 독자의 바램을 일부러 피해간 듯해 보이기도 하다. 그냥 지적 장애를 가진 마티스의 느낌, 그의 생각만을 따라 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인간 삶의 보편성과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언제까지나 지루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에 그다지 매료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앞뒤가 안 맞는다거나 수준 낮은 소설이라고 얕잡이 볼 것도 아니다. 솔직히 이렇게 쓰기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허리우드 영화가 아닌 예술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허리우드식 영화나 이야기는 가만히 눈으로만 따라가줘도 몰입도가 자연 상승하지만 예술 영화는 괜히 심각해진다. 여기서 뭔가를 찾아야만 할 것 같고 의미를 유추해내야만 할 것 같다. 뭐 그러다 철학도 하게 되겠지. ㅋ  

어쨌든 난 작가의 충실한 묘사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 내용은 좀 버거웠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감정이입이 문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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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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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 문학이란 장르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책을 소재로한 문학을 일컫음인데 당장 생각나는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그밖에도 '꿈꾸는 책들의 도시'나 '바람의 사나이'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뭐가 있을까? 오래전에 <TV 문학관>에서 김탁환의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원작을 방영한 것을 최근에 본적이 있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솔직히 우리나라가 책을 참 안 읽는 민족 중 하나라는데 과연 이런 고급한(?) 문학을 구사하는 작가가 있을까 싶었는데 보면서 과연 김탁환이다! 찬탄을 자아냈다.(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는 좀 아쉬웠다.) 그후 이걸 책으로 읽어 볼까해서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찾아 봤더니 절판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는 알려진 책 보다 안 알려진 책들이 너무 많고 이미 알려졌더라도 그것의 책으로거의 생존은 참 짧은 것 같다. 그래 어쩌자고 그 책이 절판이 되었더란 말인가? 정말 서럽다. 잊혀진다는 것은!(물론 헌책방 같은데 가면 아직은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약간은 다른쪽으로 흘러갔다. 이번에 읽은 이 책 '편집된 죽음' 역시 상당히 재밌고 흥미롭게 읽힌다.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듯하고 더구나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어(작가는 스릴러가 아니라 서스펜스라고 하긴 하지만)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건 복수극이다. 과연 이런 완벽한 복수극이 있을 수 있을까 싶게 기가막힌 운도 따라준다. 너무 완벽해 현실에선 존재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사람의 로망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이 채울길 없는 인간의 로망을 책이나 영화가 채워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채워 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잘난 사람의 복수는 쾌감이 반감이 된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어딘가 찌그러져 있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뭔가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뭐든 완벽해 보이고 잘나 보이는 사람한테 하는 복수가 좋아 보인다. 왜냐구? 대리만족의 쾌감이 있으니까.  

세상에 잘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문제는 그 몇 프로 되지 않는 인간이 평범 내지는 평범 이하의 사람을 가지고 놀고 짓밟는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자극을 받는 것은 그들의 정의감이다. 정의란 이름으로 그 잘난 사람을 응징하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주인공도 우리가 볼 때 꼭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가진 기술 중에 '위조문서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나 갖는 능력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이 놈의 '평범'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상대적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막다른 골목이나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가진 능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에드워드도 애인 야스미나가 죽은 것이 그의 친구이자 적인 니콜라의 짓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역시 이 작품의 압권은 주인공의 복수의 과정이다. 유려한 심리 묘사와 책의 위조 과정이 마치 영화를 보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느 영화 감독이 영화화 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만하다 싶다. 기회가 되면 영화로 보고 싶은데 아직 영화로 보기엔 다소 요원한듯도 하다.(언제 방영했었나? 아는 분은 연락 바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허리우드 냄새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적 글쓰기 보단 아예 허리우드적 글쓰기를 작정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작품은 다분히 나르시즘적이다.(차라리 아예 작가를 나르시스트라고 해야하려나?)  

솔직히 나는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닌데 영화나 글쓰기만큼은 허리우드적이 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싶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세계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 나름 고민을 갖는 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허리우드적인 것이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소설이나 영화가 허리우드를 쫓을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세계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이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공부한 탓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공부해 보라. 허리우드 작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좀비가 되어 이 모양이 되는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나 할까?ㅋ)  

그래도 뭐 일단 '재밌다'는 점에선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허리우드표는 재밌는 것' 또는 '재밌는 건 허리우드' 뭐 그런 공식이라면 문제는 여전히 남을테지만 어쨌든 재밌는 건 사실이다.  

왜 더운 여름엔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라는 건지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강추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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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들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노석미 그림 / 살림Friends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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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즈 네신은 터키의 유명한 풍자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 몇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가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난 그의 작품을 이전에 대해 본적이 없었고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그를 만났다.  

작가가 유명하긴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우리가 잘 아는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터키작가 오르한 파묵도 경의를 표한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난 또 유감스럽게도 아직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터키 작가는 아지즈 네신이 처음이었고 그건 다소 낮선 경험이기도 했다.  

사실 뭐 꼭 '낮설다'는 표현을 굳이 써야하는 걸까? 문학이란게 국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긴 해도 결국 인간에 관해 말하고 인간성을 추구하는 게 문학이고 보면 하나로 통하는 뭔가가 있다. 그래도 굳이 낮설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터키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3세계 국가일 수 밖에 없고 그동안 국내에 터키 문학이 그다지 많이 소개가 되지 않았으며 거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그 나라가 이슬람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처음 대해 본 문학작품 치고는 묘한 매력이 묻어난다. 이국적인 매력이라고나 할까?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 작가는 짧은 글 속에 자신의 유년 시절을 잘 녹여내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재료로 이렇게 글로써 빛어낼 수 있다면 우리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글로써 표현해 볼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자신 안에 있는 여러 가지가 자극 받을 수 있는데 이 책을 읽으니 나 역시 어린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예를들면,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오줌 싸고 돌아와 엄마를 속여 옷이 갈아 입은지 오래 됐으니 빨아야할 것 같다고 하나 하나 벗어내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있은 기억. 아버지 친구분들이 술이 취에 밤늦게 들이 닦쳐서는 술김에 어린 나와 내 동생에게 돈을 준다는 것이 5천원짜리를 받은 것이다. 그때 돈 5천원이면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 그 시절 나와 동생은 엄마에게 하루 군것질 10원씩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5000일은 엄마에게 손벌리지 않아도 될 테니 동생에게 너와 나 둘이만 아는 비밀로 하자고 했다가 실패했다.(그때는 5000일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를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날 위해 피아노를 사 주셨지만 난 그것을 기뻐하기 보다 부담스러워 전전긍긍했던 기억 등이 읽으면서 오버랩이 되었다.    

작가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고, 모르긴 해도 노년에 이르러 썼던 것 같기도 한데 역시 어린 시절은 늙어도 변하지 않은 채 우리안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아득해져 오는 느낌이다.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작가는 가난해도 좋은 부모님 밑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물론 어머니가 병약했던 건 작가에겐 안타까움이었겠지만 곳곳에 부모님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묻어나 있다. 

작가는 특별히 풍자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풍자 작가라. 이것이 보기엔 쉬운 것 같아도 풍자를 표현하긴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인생을 관조할 줄 알아야 하고 거기서 유머를 길러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항상 물어 본다고 한다. 왜 풍자 작가가 되었느냐고. 그러면 그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한 후 하지만 자신을 풍자 작가로 만든 것은 자신의 삶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눈물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고 있다.(24p)  

작가의 말이 참 의미심장하다. 그의 눈물이 자신을 풍자 작가로 만들었다니!  그렇다. 이건 분명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은 눈물뿐이고 고로 슬픔과 고통이 많다. 하지만 거기서 위트와 유머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 하나의 풍자를 건져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인생을 곱씹은 나날이 있어왔는지 우리는 다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문학이란 도구는 얼마나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가? 

세상에 아지즈 네신만한 또는 그 보다 더한 눈물과 아픔을 지닌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 안에만 간직하고 있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킴으로 그는 오늘 날까지도 터키가 가장 추앙해마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삶도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슬픔이 그 누군가에겐 웃음이 되고 약이 될 수만 있다면 그의 삶은 그 누군가에게로부터 경의를 받아 마땅한다. 그것이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니어도 말이다. 

오늘 아지즈 네신은 특별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풍자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있다. 한번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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