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에클레시아 -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
양광모 지음 / 선율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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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역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교회 예배만 왔다 갔다 하니 무슨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카페 목회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었을 때야 알게 되었다. 하긴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리라는 법 있나? 벌써 오래 전부터 서울의 알만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닌 학교 강당을 이용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 교회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도 계시고, 병원, 교도소, 양로원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니 카페라고 계시지 않을 리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니 장소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옛날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 동굴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21세기다. 최첨단 4차 산업을 부르짖을 때 교회는 여전히 20세기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난 왜 이 책에서 사역의 다양성과 희망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우울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처음에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존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내가 현재 너무 건강하고 스마트한 교회를 다녀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챤으로 전락한 탓일까? 아니면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도 한때는 모든 교회의 칭송을 받는 교회를 다녔지만(현재도 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 울기도 많이 울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어느새 동화되고 닮은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평신도로서 그렇게 상처 받고, 울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선 한 번도 회의를 해 본적은 없다. 싫으면 그 조직에서 나오면 그만인 것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신앙을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의 문제였지 조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날 대형 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다. 하도 비판을 받으니까 이것도 하나의 트렌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형 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소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건 말의 오판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하나님이 언제 그에게 이것을 판단하고 비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요는 그도 교회를 다닐진대 비판하는 데는 빠르고 기도하는 데는 느리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그것부터 점검해 봐야할 일은 아닐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무슨 대형 교회를 옹호한다고 오해할까봐 그것도 조심스럽긴 하다. 요는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런 과격하고도 이분법적인 비판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해서 나온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어떤 그릇은 귀히 쓰일 그릇으로, 어떤 건 천히 쓰일 그릇으로 빚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토기장이가 그 용도에 맞게 빚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형 교회의 비판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끼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나왔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형 교회 자체의 내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동시에 사이비 종교의 음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봤을 때 분열케 하는 사탄 마귀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형교회의 부정과 부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모범적인 교회가 어느 날 사회적 이슈가 되고 비판을 받을 때 평신도로서 그것을 감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 그런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다. 나라고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나?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다니고 있는지. 늘 다니던 교회를 다니는 관성 때문이라고 말 한다면 섭섭한 말이 될 것이다. 그 교회 말고도 좋은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에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다. 다른 건 고사하고 은혜 받은 교회는 함부로 못 떠나겠는 것이다. 선대 목사님이 한때 기독교계 명망 있는 지도자였고, 그분의 기독교계에 미친 설교와 공로라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교회에서 조차 상처를 받았다. 상처만 받았다고 한다면 못 다닐 교회가 내가 지금 현재 다니는 교회다. 분명 은혜를 받았기에 나는 교회가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을 때 같이 비판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건 또 신비라고 밖에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구구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교회 사역자들은 평신도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은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있게 하셨다고 교인들에게 철석 같이 가르쳐 놓고 그들은 정작 교회에 있지 않은 것 같다. 평신도는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와 함께 순교할 마음이 있는데 과연 교회 사역자들은 그럴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기는 하다. 새로운 목회를 해 보겠다고 잘 나가던 교회를 사임을 했다. 거기에 나름의 이유와 기도로 씨름한 나날과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면서 지금까지 알아왔고 격려해줬고 격려 받았던 교인들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던가? 잘 나가는 교회 목사들은 떠나는 뒷모습도 멋이 있더라. 그리고 당장 떠나지 않더라도 교회 안에 서서 각 지역을 거점 삼아 2년마다 한 번씩 뺑이 돌리더라. 그러니 목사와 평신도 간에 무슨 정을 쌓겠는가? 저 목사는 길어야 2년 후면 헤어질 사람. 물론 기도 부탁 정도는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정도지 오래 두고 볼 사이는 못 되더라.

 

남자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어디나 그렇지만 교회도 남성 목회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비해 평신도는 여성이 많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성은 대화를 원하는데 남자는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듣는 귀는 발달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이 가면 갈수록 별로라고 생각했던 건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했으니 생생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도 내내 가르쳤을 목회의 신학적 원리를 이 책에서조차도 반복하고 있더란 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간증문처럼 그 카페를 다니면서 은혜 받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존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뭔가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깰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교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소형화시킨 건 아닌지.

 

나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옷을 벗고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말씀만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중간자적 목회자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그것에 근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글속엔 아직도 뭔가 자신이 없던 걸까? 뭔가 끊임없이 자신의 목회 형태를 설명하려고 하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마치 기업을 세일즈 하는 것처럼. 하긴 이제 5년 된 사역이라고 하던데 증명 보다는 설명이 더 많은 시기 아닌가? 한 사역이 뭔가를 증명하려면 적어도 1015년은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카페 목회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려하는 것도 없지 않다. 결국 거기서 은혜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훗날 어떻게 될 건지. 물론 그것까지 신경 쓸 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성 교회에 대한 편견만 높아져 결국 진입하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눌러 앉을 건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이 또 다른 측면해서 오염되고 훼손되는 건 아닌지. 분명 기성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교회가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명백히 필요한 거지만, 교회는 기성 교회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있다.

 

책을 보면 교회가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난 이게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한국 초대교회 시절 사경회를 하면 거의 하루 종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말씀 듣는 게 좋으면. 게다가 우리나라 교육열 끝내주지 않는가? 물론 저자가 지적이 처음도 아니고 나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있다. 평신도들은 옛날의 평신도들이 아니다. 옛날엔 사회가 단순하지만 지금은 복잡하다. 그러므로 뭐든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뭐든 편중이고 편식이 문제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해서 마치 기성 교회는 없어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주범(?)이 한때 그런 교회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 민망함은 또 어쩔 것인가? 그건 마치 괜찮은 집을 지어놓고 게스트 하우스나 마당에 텐트쳐 놓고 지내는 집주인은 아닌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다 못 짓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었다. 모름지기 왕이 지었으니 얼마나 화려했겠는가? 하지만 우린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뿐 그 성전이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오늘 날 교회가 너무 화려하다고 사회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에 동조한다. 교회는 화려할 수도 있고 아담할 수도 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공간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목회자와 주요 임직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관리자일 뿐이다. 오늘 날 교회가 목회자의 권한이 큰 건 유감이긴 하다. 아마도 그건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것이 아니면 성도들이 목사를 쥐고 흔든다. 언제나 그렇듯 조화는 없고 극과 극만 있다. 중요한 건 교회에 깃든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분명 그 목회자의 몫일 것이다.

 

교회도 조직이고 보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섞지 않으려면 자정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 자정 능력이 그 조직의 몇 퍼센트면 가능하겠는가? 5 퍼센트다. 이건 그냥 상징적인 숫자일 뿐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근거는 있다. 성경을 보면 의인 다섯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했다. 오늘 날 교회가 그토록이나 문제가 많다면 벌써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줄어들지언정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한 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치유하는 교회를 자처했던 모 교회는 정말 유독 새신자 보다는 기성 신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 받고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다. 모순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어느 교회는 새신자만 등록 가능한 교회도 있다.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의 목회가 됐던 사명을 받아서 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맡겨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한다. 물론 세상적으론 틀리지 않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하나님 편해서 그게 과연 최선인지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나중엔 차선의 것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저자의 목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책을 읽어 보았더니 평신도에 대해 잘 모르기는 기성 교회 목회자와 무엇이 다른지 몰라서 나의 평소 생각을 밝히는 것뿐이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하던 기성 교회 목회를 하든 크게 봤을 때 평신도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단지 선택만 할 뿐이다. 결국 목회자란 그가 옳은 선택,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전을 주고 협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목회자는 평신도가 자신의 사역에 협력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게 잘못 됐다기 보다 선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저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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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2-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가 문제점이 더 많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권력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역시 작은 교회일 듯해요.
정들만 하면 2년 후 떠나는 목사 - 이것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걸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 건가요?

stella.K 2018-02-08 13:29   좋아요 0 | URL
캬~! 역시 예리하시군요.
그런데 알려지기는 큰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처럼
그렇게 보도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작은 교회라고 문제가 없겠냐는 거죠.
마치 작은 교회는 동정을 받아야할 거처럼 되고.
물론 작은 교회에서 힘들 게 목회하시는 분들 계시죠.
그니까 제 말은 교회뿐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장단점을 보고, 긴 안목에서 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완벽한 조직이나 단체는 없으니까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그것도 장단점은 있는 거죠.
같은 사람 2, 3년 봐주기는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저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조직에서 2, 3년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제가 워낙에 그런 체질이 못 되서
상처 받는 일도 많답니다.ㅋㅋ

2018-02-0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