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
이춘기 지음, 이복규 엮음 / 학지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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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 일기의 주인인 이춘기 옹은 아내가 암 발병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전엔 왜 일기를 안 썼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그가 왜 그때를 기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알 것도 같다. 물론 아내의 발병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그렇다고 속절없이 무너질 수마는 없지 않았을까?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는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읽는 나는 왜 이리도 마음이 먹먹하던지. 뭔가 동화된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까운 누구도 불치의 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불행은 다 나와 한 다리 건너의 사람들의 것인 줄 알았다.

 

당시는 1960년대가 막 시작됐을 때다. 나의 아버지 돌아가셨던 90년대도 암은 어려웠는데 그 시절은 더 암담하지 않았을까? 시간차만 있다뿐이지 그나 우리 집이나 하루 세끼 밥 먹고 돈 버느라 일했고, 밤이면 자는 똑같은 일상을 살았을 텐데 이렇게 누구는 병이 들고, 누구는 그 병든 가족을 간호해야하며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참 아득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춘기 옹의 일기는 참 담담하고 담백하다.

 

내가 남의 일기를 이렇게 문학으로 향유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물론 최근 카프카의 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만큼 관음의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카프카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다가 그만 학을 떼었다. 어찌나 어렵고 난해하던지. 카프카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으면 모를까 나 같이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멋모르고 펼쳐들다 낭패 보기 쉽다. (그건 또 어쩌면 시간에 쫓겨서 읽느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엔 사춘기 때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읽었던 감동은 여전하다. 그렇게 엄혹하고 참혹한 세상에서도 그녀의 일기는 얼마나 순수했는지.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최근 들어 유명 작가의 일기가 나오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동안 일기를 문학의 범주에 넣어 주지도 않았(던 것 같). 이 책 말미에도 이춘기 옹의 일기를 엮은 이복규 교수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 책은 우리 학계에서 비교적 열세에 있는 일기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일기인 만큼 이춘기 옹의 개인 일상사를 다루고 있지만 아내의 간호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물가, 사람 사는 표정,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처럼 사대주의가 강한 나라가 또 있을까?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값어치가 달라진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역사를 보는 시작은 더하다. 전문가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만을 들으려고 하고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너무 한정적이다. 예를 들면, 이 책 읽다보면 1997625일에 이춘기 옹이 쓴 6.25 회상 부분이 나온다. 한 개인으로 그날이 어땠는지를 짧지만 강렬하게 쓰고 있다. 벌써 29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

......아이들이 개 두 마리하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총성이 나더니 마당의 개 두 마리가 그만 피를 토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아이들은 마당에 그대로 쓰러졌다(354p).

얼마나 놀랍고 사실적인가? 그 일이 일어났던 똑같은 시간에 어떤 사람은 또 어떤 것을 보고 어떻게 쓸지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인지하는 것이야 똑같겠지만 보고 느끼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사실이란 관점에서 이것을 좀 더 넓게 수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이야 어떻든 오직 교과서에만 의존하려고 하니 우린 역사를 너무 소극적이고 소홀하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삼 개인의 6.25 회상기란 책이 있으면 한 권 사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시대를 표현한다면 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 날을 회상하고 싶다. 그날 내가 일기를 썼는지도 기억에 없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하지만 그 시절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일기를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기억해 줄만한 건 이춘기 옹이 그날의 시세를 일기에 자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화폐개혁이 있기 전이라 원 대산 환으로 계산을 했다. 그리고 62년인가? 그때 화폐 개혁이 되면서 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게 좀 이해가 갔다. 당시론 복숭아를 재배해 그것으로 살림을 꾸리곤 했는데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을 테니 돈의 들고 남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자수성가한 자린고비 스타일이라 병으로 사경을 헤매시기 전까지 조그만 수첩에 돈의 지출내역을 꼬박꼬박 적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걸 지금도 가지고 있었다면 좋은 기록이 되지 않았을까? 일기였다면 내가 어떻게든 보관했었을 텐데 저런 건 써서 뭐하나 구두쇠니까 저러시겠지 하며 관심도 갖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난 중학교 들어가면서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야 방학숙제로 썼으니 그걸 일기라고 할 수도 없고 그걸 쓴 노트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중학교는 초등학교완 달라도 많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 쓰기가 성인이 되고부터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쫓은 건 아니지만 어떤 신념 비슷하게 안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죽을 때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일기를 쓰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 친구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래도 너만의 고백이나 정리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러자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짐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일기를 태워줄 사람이 필요한데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견 타당한 것도 같았다. 아니 오히려 멋있게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쓴 일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난 이때부터 일기에 대한 애증이 시작이 된 같다. 정말 나도 그 친구처럼 죽을 때 될 수 있으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기록의 의무와 흔적이 서로 충돌했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에선 블로그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걸 쓰니 굳이 일기라고 따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의 엮은이도 노트든, 스마트폰이든 블로그든 어디든 열심히 기록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일기를 블로그에다 쓰는 건 간단치가 않다. 그건 낙서나 잡담의 의도가 많고,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몇 번의 정서가 필요하다. 또 아니 할 말로 함부로 대놓고 누구 욕도 못하겠다(물론 비밀글로 쓸 수도 있지만 블로그의 기본은 글을 공개한다는 것에 있다). 책엔 이 옹이 재혼녀와 의붓딸에 대한 미움도 가감 없이 쓰곤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전적 일기 쓰기는 그것이 가능하다. 누가 문법 틀리고, 철자 틀려도 뭐랄 사람이 없다. 요즘엔 다시 고전적 일기 쓰기를 하고 있는데 블로그에 쓰는 것 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쓸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난 엮은이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무엇이 됐든 써라다.

 

사실 일기는 어떠한 비판이나 가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쓴 사람에 대한 예의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대 차와 성의식의 차이로 인한 해석과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옹이 아내를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도 이해가 갔지만, 이후 재혼과 삼혼을 하는 동안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고 좀 아쉽기도 했다. 그것은 그때는 가부장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또 그러니만큼 여성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그는 그저 가정을 건사할 여인이 필요했다. 식모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래서 결국 재혼녀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데 그가 일기 중 성경 잠언을 인용한 바 있는 이 현숙한 여인이 당시의 남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됐을지 알고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봐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래야 연구 가치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짐, 두 어린 아들에 대한 애틋함, 하다못해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바빠 예배를 드리지 못한 생활인으로서의 버거움이 일기에 올올이 드러나 찡했다. 문체가 좋은 글만이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진솔한 글을 읽으면 자신이 평범해서 초라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런 평범함에서 오는 것이다.

 

난 이 책 계기로 엮은이 말대로 우리나라가 개인의 일기를 활발히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것조차도 사대주의에 빠져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의 일기만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야말로 초야에 묻힌 한 노인의 일기고, 기록이며 미시사이기도 하다. 그가 원래 유명해서가 아니라 30년을 일기를 쓰다 보니 유명해졌다. 작지만 한 가지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한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상이 무료하다, 의미가 없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함에 묻혀 사는 거지만 그 평범함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이춘기 옹은 몸소 보여줬다.

 

사실 처음엔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이춘기 옹이 30년간 쓴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좀 더 편집을 다양화 하거나 내용이 겹치는 것을 제외하고 그대로를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이 옹이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뭔지 모르게 아쉬웠다. 하지만 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려면 관찰하고 일기를 쓰라고.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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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2-02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너머에서도 의미를 찾으시며 읽으시는 것 같아요.
작고 사소한 것 같아도 꾸준히, 성실하게 한다는 것, 중요한데 갈수록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지요? 한방에 대박을 터뜨려야 성공한 것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안타까워요.
저도 6살때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꾸준히 써왔는데, 어릴 때 쓴 그 그림일기장을 어머니께서 이사하시면서 다 버리셨다는군요 ㅠㅠ

stella.K 2018-02-03 18:19   좋아요 0 | URL
일본은 그런 풍토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작고 소소해도 재밌고 즐거우면 기꺼이 읽어 주잖아요.
우리나라는 쓸때없이 대륙적 기질이 있어서일까요?
그냥 그렇게 봐주기로 했습니다.ㅋㅋ

이책 정말 편안하게 읽혀서 좋았어요.
일찍 상처하고 가장으로 참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구나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노년엔 복락을 누려야 하는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게 참 아쉽더군요.
그런데 우리네 인생이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그냥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면 좋겠어요.^^

2018-02-0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2   좋아요 1 | URL
아, 그랬나요? 옛날 선비는 그랬군요.
우린 기록을 함부로 다루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춘기 옹의 일기가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일기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근데 일기는 잘 쓰고 계십니까?
우리 역사 한번 만들어 보십시다요!ㅋㅋ

2018-02-03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8   좋아요 1 | URL
ㅎㅎ 그건 운이 좋아서 낸거죠.
무엇보다 저 같이 초야에 묻힌 사람의 책이
뭐 그리 대단해서 후속을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겠습니까?ㅋ

그런 건 고사하고 저도 일기 쓰고 있는데
나중에 저 죽어서라도 책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ㅎ
님도 건강하시죠?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8-02-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올해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8-02-05 13:07   좋아요 0 | URL
입춘대길 건양다경. 좋은 말이죠.
서니님도 그리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또 새로운 한 주입니다. 힘차게 시작하시길!

페크pek0501 2018-02-0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뭔가 풀어 내서 속 시원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일기를 씁니다. 제가 나중에 보려고 기록을 위해 일기를 쓰기도 하지요.
제가 죽은 다음에 글이 흔적으로 남는 건 싫어서 만약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느끼면 가족에게 제가 쓴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 달라는 유언을 할 것 같아요. ㅋ

stella.K 2018-02-06 20:36   좋아요 0 | URL
오,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가족이 듣지도 않을 거예요.
유산으로 남겨야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