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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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베르트를 향한 안타까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그라들었을 때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발베크로 떠나는 장면에서 4권이 시작된다. 하지만 발베크로 와서도 그녀를 깨끗이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은 똑같은 아픔으로 화자를 괴롭혔다. 어쨌든 낯선 장소로 여행을 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옅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겠지. 화자는 질베르트에 대한 고통과 사랑의 부활이 오래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감정을 오래 지속시켜 줄 만한 옛 습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래서 기분전환이 필요하거나 삶의 전환점이 되기 위해서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구나. 항상 있던 자리에서 일상의 루틴이나 감정의 습관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배어 있을 것이다. 화자는 그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습관의 변화, 습관의 일시적 중단이 내가 발베크로 떠날 무렵에 습관의 작품을 완성했다. 습관은 사물을 약하게 하지만 안정시켜 주고, 사물의 붕괴를 초래하지만 그 붕괴를 무한히 유보한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날마다 이럭저럭 정신 상태에 따라 다음 날 정신 상태를 가늠해 왔다. 그런데 발베크에서는 새로운 침대가 - 그 침대 옆으로 파리의 아침 식사와는 다른 식사를 가져오는 - 질베르트에 대한 내 사랑을 길러왔던 상념을 더 이상 받쳐 줄 수 없었다. 칩거 생활은 세월의 흐름을 정지시키므로 시간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소를 바꾸는 일일 때가 있다.(물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발베크로의 내 여행은 그저 자신의 치유된 모습을 보고자 나서는 회복기 환자의 첫 외출과도 같았다.’(12P)

 




 그런데 아픈 몸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에 예민한 성격은 낯선 장소에 머무르는 일이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떠나올 때부터 어머니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난 어머니가 나 없이도 살 수 있으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느꼈’(19P)다는 부분에서는 웃음도 났다. 이미 청소년 나이인데도 분리 불안을 느끼다니. 어쩌면 부모를 향한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일 수도 있겠지. 호텔 꼭대기의 전망 좋은 방도 파리의 내 방처럼 편하지 않았다. 잠을 못 이루는 등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와 손자의 애틋한 사랑과 할머니를 향한 존경심, 친밀함을 묘사한 부분은 따뜻한 감동과 함께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그랬기에 할머니와의 여행이 가능했겠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장면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까.

 



 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풍경 등 당시 부자들과 국제적인 저명인사들이 묵었던 호텔 분위기 등 묘사를 통해서 당시 귀족층의 여행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화자와 할머니가 묵었던 이 발베크 그랜드 호텔은 노르망디의 유명한 해변 도시 카부르 해변의 그랜드 호텔이 모델이며 프루스트는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휴가철을 보냈다고 한다. 여행지에 모인 여러 군상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 여배우를 기다리는 연미복 차림 남자들의 설렘, 음식 이야기 등으로 계속된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다. 그런데 화자는 전혀 평온하지 않다. 하지만 낯선 고장의 사람들 모습에서 르그랑댕과 스완네 문지기와 스완 부인을 만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스완이 <모세의 생애>벽화에 나오는 이드로 딸의 모습에서 오데트를 떠올렸듯이 말이다. 우리가 아는 인간 유형을 책 속 인물에서 발견하곤 하지 않는가.

 



 할머니의 옛 친구 빌파리지 후작 부인을 같은 호텔에서 만났는데도 할머니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나의 눈에도 그 할머니는 귀족 계급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자기 할머니와 담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다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결국 아는 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17세기 극작가 몰리에르의 아내의 학교의 장면을 소환해 낸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1689년 세비녜 부인이 쓴 글이나 편지가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당시 문화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해변에서 열리는 교향곡 연주회를 언급하는 장면은 오래전 가족 여행 때 해인사 경내에서 교향악단의 연주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멋진 감동을 떠오르게 했다. 정말 흔치 않았던 여행에서의 경험이었다.

 

 

 만연체 문장에 좀 적응이 된 것일까. 술술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읽힌다. 당시 귀족들의 문화생활이나 정치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 화자의 할머니가 옛 친구인 빌파리지 부인을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는 대화 상대가 된다. 샤토브리앙,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 위대한 작가들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일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귀족들의 삶을 비판하기도 한다.

 



 화자 또한 낯선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는데 차츰 적응해간다.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보이는 꽃들, 사람들, 풍경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이나 삶을 관대하게 생각하게 되는 마음의 여유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른들에 세계에 어울리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병약해서 혼자 외출도 못하는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청소년기에 꿈꿀 수 있는 이성에 대한 동경, 아직은 아니지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꿈꾸며 행복해한다. 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또 얼마나 애틋한지. 할머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말하는데,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순수함이 느껴졌다.

 



 빌파리지 후작 부인의 조카인 생루와 화자의 친구 블로크, 샤를 뤼스 씨 등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야기의 맥을 자꾸만 놓쳤다.ㅎ 그래서 앞으로 다시 가서 또 읽고...를 반복하고. 그러다가 발베크를 떠나기 전에 생루가 할머니께 사진을 찍어 드려도 좋은지 물어봤다며 들떠서 치장하는 할머니를 보고 화가 났고 그동안 할머니를 잘못 보아 온 게 아닐까, 하는 화자의 복잡한 감정이 엿보여서 웃음이 났다. 역시나 독점하고 싶은데, 할머니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질투를 하고 있었다. 단둘이 있고 싶고 할머니 얼굴에 키스하고 싶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관심한 할머니를 원망하며 울다가 잠이 들었다. 이런 손자가 있다면 요즘 할머니들 정말 행복하겠지. ㅋㅋㅋ 너무 귀엽다.^^

 



 마차 여행을 하면서 거리에서 보게 되는 소녀들을 향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한창 이성에 관심 있을 나이였으니까. 그 무리들은 노인을 뛰어넘는 등 장난이 지나친 걸 보고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무례한 아이들로 비친다. 시모네 댁 딸이라는 아름다운 소녀와 사귀고 싶어하다가도 변덕스럽게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아무튼 발베크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의 얼굴을 보고 사귀어보고 싶은 마음, 그들을 관찰하고 몇 장에 걸쳐 묘사해 놓은 부분을 보면 소녀들을 보는 즐거움을 낙으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날마다 다른 옷을 입었으며 새 모자와 새 넥타이를 보내 달라고 파리에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특정한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행복으로 여겼다. 소녀들을 향한 마음은 아래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그녀들 모두를 사랑하면서 그중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을 만날 가능성이 내 일상에서 유일하게 감미로운 요소였기에, 다니지 이 만남의 가능성만으로도 내 삶의 온갖 장애물을 허물 수 있을 듯한 희망이 생겼고, 동시에 이 희망은 내가 그녀들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주 분노로 이어졌다.(319P)’




감성이 넘치는 청년의 이성을 향한 애끓는 마음이 엿보여 웃게 만들었다.

 



 이후 이야기는 거의 소녀들 틈에서 어울리며 보낸 이야기다. 스완이 말했던 화가 엘스티로를 리브벨의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되고 교류가 시작되면서 끝없이 그림 이야기가 펼쳐지고, 화실에 드나드는 소녀들과 교제하면서 그 중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다. 어느 정도 서로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화자는 알베르틴의 요청으로 그녀의 방에 놀러 갔는데, 뜻밖에 거부당하게 된다. 그 충격인지 화자의 마음은 소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라는 제목이 참 시적으로 다가왔는데, 어떤 향수를 느끼게 했다. 바로 소녀 시절의 추억 말이다. 여기서 는 마음껏 소녀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목소리가 새의 목소리보다 더 다양하고 음량이 풍부한 악기보다 더 많은 음이 담겨 있다고. 그리고 목소리가 변하듯이 얼굴도 계속해서 변해 가리라는 시간의 흐름 그 덧없음을 연상시켜주었다. 이 작품에는 사랑이 없다고 한다. 뒤에 나오는 제목을 보면 알베르틴도 지나가는 사랑을 예고하는 것 같다. ‘대상 없는 탐색이나 내면에서 나오는 감정인 질투가 프루스트적인 사랑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완전한 소유는 그 자체로 사랑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부분도 신선한 해석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거쳐 글쓰기에 천착하며 이런 대작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원래 되찾은 시간의 일부분으로 계획되었던 것을 알베르틴에 관한 부분을 추가 집필하여 191912월에 공쿠르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완독!^^

 




<기억에 남는 문장>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근면한 습관이 한 권의 작품을 탄생시키듯이, 현재의 기쁨이 아닌 과거에 대한 현명한 성찰이 우리에게서 미래를 보호해 준다.’(291P)

 




 이번 이야기는 작가의 꿈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작품 전체적인 구상과 집필을 마친 다음 출판사를 찾았다고 한다. 아마도 위의 저 문장을 되새기며 근면한 습관으로 그 많은 분량의 원고를 썼나 보다.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그라세 출판사에서 자비출판을 조건으로 출간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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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9-04 21: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4권 완독 축하드려요~♡ 이젠 표지만 봐도 설레는 이작품! 할머니밖에 모르더니ㅋㅋ 사랑은 역시 움직이는거 맞죠😆

모나리자 2021-09-05 20:1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미미님.^^
할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랑 짠하고도 정말 웃기더라구요. ㅋㅋ
역시 움직인다는 말이 맞았어요.^^

새파랑 2021-09-04 21: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르셀은 사랑꾼입니다 ㅋ 4권 완독 축하드려요~! 그런 그가 앞으로 사랑에 더 집착(?)하게 되는 이야기도 재미있어요😆

모나리자 2021-09-05 20:22   좋아요 3 | URL
네, 앞으로 나올 얘기도 기대되는데요.
뒷부분은 그림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좀 빨리 읽지 못했네요. 잘 모르는 게 많아서... 한번 읽어서는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ㅎㅎ

붕붕툐툐 2021-09-04 21: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4권 완독 축하드려요!! 4권쯤 되면 술술 읽히는군요!ㅎㅎ 저는 실제로는 읽히는데 심리적 저항감은 여전한 작품이라 자꾸 뒤로 미루고 있어욤~ㅋㅋㅋㅋㅋㅋㅋ
원래 앞으로 읽을 책은 리뷰에서도 줄거리 실눈으로 읽는데 이 리뷰는 다 읽었어용~ 헤헷!

모나리자 2021-09-05 20:24   좋아요 3 | URL
네, 감사합니다~ 술술까지는 아니고 조금 적응되는 수준? 이었어요.ㅋㅋ
분량도 갈수록 두꺼워져서 걱정이에요. 5권도 500쪽이 넘어요.ㅋㅋㅋ
감사합니다. 툐툐님.^^

막시무스 2021-09-05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습관에 관한 작가의 고찰이 맘에 팍 꽂히네요!ㅎ 즐건 휴일되십시요!

모나리자 2021-09-05 20:25   좋아요 2 | URL
네, 인용한 문장 좋지요? 그런 시간들이 모여서 이런 대작을 완성했나 봅니다.
편안한 저녁 시간 보내세요.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09-05 1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르셀의 잃시찾은 사실상 개별적인 스토리로도 완성도가 높은 단편이 될정도로 뛰어난 작품, 읽을 수록 문장마다 스며있는 인생의 통찰력이 담겨 있죠 이제 4권을 넘어섰으니 완독의 길은 더욱 가까워졌네요 모나리자님 응원합니다 ^ㅅ^

모나리자 2021-09-05 20:26   좋아요 3 | URL
맞아요. 만연체 문장으로 읽기는 힘들지만, 속속들이 숨어있는 보물 같은 문장들이 보이더라구요. 이렇게 한권 한권 읽으면서 나아가면 되겠죠?
응웒 감사합니다~스콧님~~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_^
 

두 미국인 노파가 키 큰 시각장애 노인을 억지로 잡아끌어 길을건너게 해준다. 하지만 그 외디푸스 맹인 노인이 더 좋아했을듯싶은 건 돈이다. 돈, 돈, 찻길 건네주는 도움 같은 게 아니라.
- P30

춤추는 텁석부리 앞에서 왕의 사촌이 내게 알려준다.
저 사람은 철학자라고, 그의 말인즉, 철학자가 되려면 네 가지가필요하다고, 첫째 아랍어 학사 학위가 있을 것. 둘째 여행을 많이할 것. 셋째 다른 철학자들과 많이 접촉할 것. 넷째, 현실에서뚝 떨어져, 예컨대 해변 같은 곳에 있을 것.
- P48

5천 프랑 달라는 그의 말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내가 웃음을터뜨리니, 그는 이른바 ‘차이점‘을 내세운다. (여기서 우리가서로 다르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한인간으로가 아니라 하나의 욕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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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4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에 과하게 접하고 있다가 뚝 떨어져 보있는거 팔요한 것 같아요 ㅎㅎ
좋은 날 되세요~

모나리자 2021-09-10 11:08   좋아요 0 | URL
아이쿠.. 이 댓글을 깜빡 잊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초딩님.^^
낯선 풍경 구경하는 재미로 읽으면 좀 신선한 느낌이 드는 책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초딩님.^^
 
萬引き家族【映畵小說化作品】 (單行本)
是枝 裕和 / 寶島社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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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이 작품을 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감독이라고 한다소설도 쓰는 영화감독이라니이 작품에 대한 영화도 있다 하니 좀 한가해지면 보아야겠다이 작품은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다왜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야 했을까하나하나 밝혀지는 등장인물이 살아왔던 배경이 양파껍질 벗기듯이 드러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나같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식에게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장소가 되는 배경은 스미다가와(隅田川) 불꽃놀이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걸 보니 도쿄 시내 어디인 것 같다몇 해 전 일본 여행 때 숙소가 근처에 있어서 매일 스미다가와 위의 다리를 건너다녔다문득 그립다.

 


 매주 수요일에는 단지에 있는 슈퍼에 가는 날이었다쇼핑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시바타(柴田)의 가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다포인트도 3배로 주기 때문에 손님도 많고저녁 준비로 한층 바쁜 오후 5시를 노리는 것이었다그 날은 아침부터 2월 최저기온을 갱신할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오사무와 쇼타가 파트너가 되어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이나 식재료를 훔치는 일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었다.

 


 어느 날 오사무와 쇼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가 5층 건물 낡은 단지 입구 옆 온갖 잡동사니가 늘어져 있는 귀퉁이에서 여자아이가 벌을 서는 것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한겨울에 어른용 큰 샌들을 신은 채 말이다다섯 살 유리였다몇 차례 더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오사무가 유리를 집으로 데려온다범죄신고 당하기 전에 돌려보내라는 노부요의 말을 듣고 데려다주러 함께 갔는데유리의 집에서는 부부싸움을 하는지 폭력을 휘두르는 소리가 났고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노부요는 분노에 떨고 그런 엄마에게 맡길 수 없다며 데려오기로 결심한다유리를 씻겨주고 쇼타의 연습복 옷을 입히다가 화상자국을 발견하게 된다왜 이렇게 되었는지 물으니 유리는 넘어져서 그렇다고 대답한다그렇게 어린아이도 자신의 엄마를 나쁘게 말하기는 싫었나 보다유리는 밤에 자다가 오줌을 싸서 노부요를 화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조금씩 적응해간다그런데 언제까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2개월이 넘어도 친부모는 경찰에 수색 의뢰는 물론 유리를 찾지도 않았다쇼타는 갑자기 식구가 늘자 기분이 묘해진다.

 


 이 집 단독 주택에는 80세의 하쓰에가 50년 전부터 살고 있었는데주변은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었다팔지 않고 이 집에서 떠나는 것을 거부했고 주변은 개발로 인해 사방이 온통 아파트가 되었다오사무와 노부요가 아들 며느리인가 했는데... 아네쨩오바쨩아니쨩... 이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별스럽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 남이었다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서로 남남이 만나 가족을 이룬 것이었다여기에 집을 나와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키가 있다.

 



 아키는 친동생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이유로 질투와 소외감을 느끼고 있던 중 하쓰에를 만나 이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또 하쓰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카타로 이사를 하고 연락이 끊어졌다또 남편은 바람이 나서 하쓰에를 버리고 집을 나갔는데그 남편이 낳은 아들이 아키의 아빠였다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오사무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상처받고결혼 후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온 노부요파친코에 간 부모에 의해 뜨거운 여름날 혼자 차 안에 있던 쇼타를 오사무가 데리고 와서 가족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탁 공장에 다니고 있던 노부요는 어느 날 해고통지를 받게 된다절친이었던 동료 네기시와 둘 중에 하나는 해고할 수밖에 없다는 사장의 말을 듣는데... 오사무가 공사장 인부로 일하던 중 다리를 다친 후 게으름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상황에 이런 날벼락같은 말이었다그런데 동료 네기시는 노부요에게 그만 두어달라고 말한다비밀을 지킬테니까노부요는 넥타이핀을 고객의 주머니에서 훔친 것을 들켰나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뉴스

행방불명이 된 여자아이의 뉴스.

노부요는 깜짝 놀라서 유리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네기시와 타협을 한다.

  

 


 어느 날 하쓰에가 바닷가에 놀러 가자고 제안을 한다난생 처음 해수욕장에 간 쇼타와 링(유리)과 이들은 정말 가족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파라솔 아래 앉아 이들을 바라보며 하쓰에는 [고마웠습니다]라는 아무도 듣지 못한 인사를 하더니다녀와서 얼마 안되어 거짓말처럼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아키가 맨 처음 보았다.

 

 


그리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이며 이 집 가족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니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는 것이다감춰졌던 사실도 드러난다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하쓰에를 마루밑에 묻는데... 죽은 사람의 연금을 찾아와서 기분이 들뜨고... 뭔가 일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는 듯했다.

 

 


 어떤날쇼타가 자주 갔던 [야마토야]의 할아버지는 어느 날 네 여동생에게는 시키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된다그때부터 쇼타의 마음이 조금씩 변화가 있는 듯했다처음엔 유리가 이 집에 왔을 때 거부감을 느끼던 쇼타는 유리와 친남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이 들었다하루는 유리가 목마르다고 했는데 돈은 없고 그 슈퍼로 향한다문이 닫혀있어서 다른 슈퍼로 가서 물건을 훔치다가 종업원에게 들키고도망을 가고끈질기게 따라온 종업원과 정면으로 마주서고 도망칠 곳 없던 쇼타는 만만한 높이로 보이던 해자 언덕에서 뛰어내려 다리를 다치고 만다이 사건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그리고 이 가족을 모두 해체시켰다당연히 좀도둑질도 끝났다그건 다행이었지만.

 

 


 참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장면이 있었다다리를 다치고 6개월 만에 병원에서 나온 쇼타와 오사무가 노부요를 면회하고 나서 오사무가 사는 아파트에 갔다가 하룻밤 자고 가기로 한다그날 밤 눈이 펑펑 내렸다한밤에 둘이서 눈사람을 만드는 장면이다쇼타는 그렇게 둘이서만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오사무와 쇼타서로의 가슴에 새겨질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다음 날쇼타를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며 배웅하는데쇼타를 부르며 버스를 쫓아가며 달리던 오사무는 어린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고 만다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던 쇼타는 오사무가 보이지 않게 되자그제서야 [아빠]라고 처음 불러보았다한번 만이라도 듣고 싶다고 오사무가 그토록 말했건만.

 

 


 이런 오사무의 모습이 의외여서 먹먹한 감동이었다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인지쇼타만 두고 도망가려 했던 것이 부끄럽고 후회되어서 그랬을까집으로 돌아간다고 쇼타에게 말한 건 거짓말이었다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고누구도 그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었다한편 모든 것을 혼자 뒤집어 쓰기로 결심했던 노부요는 결국 구치소에 들어가게 되었다폭력으로부터 아이를 구해 가족을 만들었지만 자식을 버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노부요는 쇼타에게 부모를 만나라고 권유했지만 거절했고유리는 부모에게 돌아갔지만 여전히 단지 밖 복도에서 놀고 있었고손등에는 다시 멍자국이 보였다.

 


 

 가족이란 무엇인가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법이라는 사회적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이 만비키 가족은 자신의 피붙이인 혈연관계의 가족들에게는 상처와 아픔만 받았다그래도 여섯 명이 가족이 되어 보냈던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주변 사람들은 평소에 이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다가 뉴스가 터지자 사방에서 몰려와 물밑을 내려다보듯이 들여다보았다소외된 계층의 사각지대를 살피고 사회복지가 골고루 미치는지 관심을 갖자고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로도 해석되었다일본 사회의 이야기지만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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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30 11: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극장에서도 보고 원작까지 챙겨 읽을 정도로 좋아 하는 작품입니다 고레다 감독 영화는 믿고 보면서 원작까지! 읽게 만들정도로 뭉클한 감동잔잔한 여운까지 있어서 좋아합니다 만삐끼 가족에서 아역의 연기가 넘 ㅎ현실적이여서 뭉클! 감독이 후기에서 촬영할때 아역 배우들의 감정 이입이 어른들에 비해 월등하다고 고레다 감독 작품중에 [걸어도 걸어도] 제일 좋아합니다 ^ㅅ^

모나리자 2021-08-31 14:53   좋아요 2 | URL
와우~그러셨군요! 역시! 영화 먼저 만들고 책을 썼나봐요. 영화로 봐도 잔잔한 감동을 줄 것 같아요. 키키 키린이 하쓰에 역할로 나왔나봐요. 영화 소개 잠깐 봤거든요. [걸어도 걸어도] 영화 좀 한가해지면 저도 보고 싶네요.
넷플릭스에서 자꾸 신규 콘텐츠 추천하면서 저를 유혹하고 있는데 아직 못 보고 있네요.ㅎㅎ
감사해요. 스콧님.~^^

새파랑 2021-08-30 1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름을 들어본거 같아서 검색해보니 본 작품은 없네요ㅜㅜ
키키키린 책에서 보고 낯이 익은거 같아요. 일본원서 독서라니 역시 모나리자님은 대단 👍

모나리자 2021-08-31 14:56   좋아요 2 | URL
네, 아직 번역본이랑 없는 것 같아요. <키키 키린의 편지>란 에세이를 작년에 읽었는데 저도 거기서 본 이름이더라구요. 영화감독에 소설도 쓰다니 참 능력자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나오더라구요. 공부가 되니 원서 읽기가 시간은 걸리지만 보람은 있어요.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그런데 『춘분 지나고까지의 게이타로는 ‘엽전점 노파의 예언을 그러한 것으로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배우지 않았는가. 그것은 오로지 현재에만 관계하는 것으로 까마득한 미래라든지먼 과거라든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소세키적 작품‘
이란, 바로 ‘엽전점‘의 말처럼, 현재로서 표층에 드러나 있는 것의 유희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과거나 미래를 뚜렷이 드러나게 비추는 거울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거울이 그 표면에 비춰 내는것은 자기 자신의 현재에 다름 아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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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눕는 것이 극히 나태한행위라고 한다면, 건네받는 것도 또한 극히 소극적인 행위이다. 그 나태하고 소극적인 행위는 반드시 주인공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연기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마음의 경우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으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빈사의 아버지의 베갯머리였고, 또한 「풀베개의 화공인 ‘내가 바다를 내려다보는 벼랑 끝의 풀 위에 벌렁 드러누워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시흥에 재촉을 받아 하이쿠와 한시를 사생첩에 기록해 갈 때 노숙자 같은 남자와 나미 씨가 느닷없이 나타나 여자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로 건네주는데 나는그 물품의 수여를 무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P61

 그렇다고 해도, 이 어느 편이든, 건네받는 것이 드러눕는 것과 한 쌍의운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이불 곁에서 건네받은 선생의 편지는 ‘나‘를 곧바로 행동으로 몰아세우고 있었고, 드러누운 나의 곁에서 이루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물건의 수여도 ‘나‘를 즉시 사고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에서 주고받는 것은, 그러니까 소세키적 존재에 있어서는 그 행동과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는 부적과 같은것이다. 멈춰 서서 두뇌를 텅 비우는 것으로 운동을 방기한 소세키적
‘존재‘는 그 대상의 여하에 상관없이 부적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 명하는 대로의 운동을 조직해 가는 것이다.


- P61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이타로의 낭만취미도 아니고 모리모토의 방랑벽도 아니다. 아침 목욕을 하는 두 사람의조우가, 마음에 나오는 가마쿠라의 바다 속에서의 선생과 ‘나‘의 그것과, 물의 현존이라는 점에 있어서 서로 닮아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작품의 풍토도 작중인물의 성격도 이야기의 전개 방식도 전혀 이질적이지만 첫머리에 물속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서사적구조가 양자에 공통되어 있는 것이다. 물이라고 하는 습기에 찬 환경의 소세키적 특질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지금은 우선 이 공통점에만 착목하기로 하자. 이미 마음의 경우가 그랬고, 또한 『풀베개』에도 그것과 닮은 정황이 그려져 있는데, 소세키적 존재의 다수는 젖고 습기 찬 환경 속에서 마주친 인물에게 강력히 매혹되어 그와의 접근을 시도한다고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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