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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질베르트를 향한 안타까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그라들었을 때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발베크로 떠나는 장면에서 4권이 시작된다. 하지만 발베크로 와서도 그녀를 깨끗이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은 똑같은 아픔으로 화자를 괴롭혔다. 어쨌든 낯선 장소로 여행을 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옅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겠지. 화자는 질베르트에 대한 고통과 사랑의 부활이 오래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 감정을 오래 지속시켜 줄 만한 옛 ‘습관’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 그래서 기분전환이 필요하거나 삶의 전환점이 되기 위해서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구나. 항상 있던 자리에서 일상의 루틴이나 감정의 습관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배어 있을 것이다. 화자는 그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습관의 변화, 즉 ’습관‘의 일시적 중단이 내가 발베크로 떠날 무렵에 ’습관‘의 작품을 완성했다. 습관은 사물을 약하게 하지만 안정시켜 주고, 사물의 붕괴를 초래하지만 그 붕괴를 무한히 유보한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날마다 이럭저럭 정신 상태에 따라 다음 날 정신 상태를 가늠해 왔다. 그런데 발베크에서는 새로운 침대가 - 그 침대 옆으로 파리의 아침 식사와는 다른 식사를 가져오는 - 질베르트에 대한 내 사랑을 길러왔던 상념을 더 이상 받쳐 줄 수 없었다. 칩거 생활은 세월의 흐름을 정지시키므로 시간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소를 바꾸는 일일 때가 있다.(물론 드문 일이긴 하지만) 발베크로의 내 여행은 그저 자신의 치유된 모습을 보고자 나서는 회복기 환자의 첫 외출과도 같았다.’(12P)
그런데 아픈 몸 –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 에 예민한 성격은 낯선 장소에 머무르는 일이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떠나올 때부터 어머니와 헤어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난 어머니가 나 없이도 살 수 있으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느꼈’(19P)다는 부분에서는 웃음도 났다. 이미 청소년 나이인데도 분리 불안을 느끼다니. 어쩌면 부모를 향한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일 수도 있겠지. 호텔 꼭대기의 전망 좋은 방도 파리의 내 방처럼 편하지 않았다. 잠을 못 이루는 등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 할머니와 손자의 애틋한 사랑과 할머니를 향한 존경심, 친밀함을 묘사한 부분은 따뜻한 감동과 함께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그랬기에 할머니와의 여행이 가능했겠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장면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을까.
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풍경 등 당시 부자들과 국제적인 저명인사들이 묵었던 호텔 분위기 등 묘사를 통해서 당시 귀족층의 여행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화자와 할머니가 묵었던 이 발베크 그랜드 호텔은 노르망디의 유명한 해변 도시 카부르 해변의 그랜드 호텔이 모델이며 프루스트는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휴가철을 보냈다고 한다. 여행지에 모인 여러 군상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삶, 여배우를 기다리는 연미복 차림 남자들의 설렘, 음식 이야기 등으로 계속된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다. 그런데 화자는 전혀 평온하지 않다. 하지만 낯선 고장의 사람들 모습에서 르그랑댕과 스완네 문지기와 스완 부인을 만나는 장면이 흥미로웠다. 스완이 <모세의 생애>벽화에 나오는 이드로 딸의 모습에서 오데트를 떠올렸듯이 말이다. 우리가 아는 인간 유형을 책 속 인물에서 발견하곤 하지 않는가.
할머니의 옛 친구 빌파리지 후작 부인을 같은 호텔에서 만났는데도 할머니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나의 눈에도 그 할머니는 귀족 계급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자기 할머니와 담소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다지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결국 아는 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17세기 극작가 몰리에르의 「아내의 학교」의 장면을 소환해 낸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1689년 세비녜 부인이 쓴 글이나 편지가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 당시 문화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해변에서 열리는 교향곡 연주회를 언급하는 장면은 오래전 가족 여행 때 해인사 경내에서 교향악단의 연주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멋진 감동을 떠오르게 했다. 정말 흔치 않았던 여행에서의 경험이었다.
만연체 문장에 좀 적응이 된 것일까. 술술은 아니지만 흥미롭게 읽힌다. 당시 귀족들의 문화생활이나 정치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 화자의 할머니가 옛 친구인 빌파리지 부인을 아는 척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둘도 없는 대화 상대가 된다. 샤토브리앙,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 위대한 작가들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일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귀족들의 삶을 비판하기도 한다.
화자 또한 낯선 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는데 차츰 적응해간다.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보이는 꽃들, 사람들, 풍경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이나 삶을 관대하게 생각하게 되는 마음의 여유를 찾고 있었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른들에 세계에 어울리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병약해서 혼자 외출도 못하는 상황이어서 그랬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청소년기에 꿈꿀 수 있는 이성에 대한 동경, 아직은 아니지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꿈꾸며 행복해한다. 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또 얼마나 애틋한지. 할머니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고 말하는데,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순수함이 느껴졌다.
빌파리지 후작 부인의 조카인 생루와 화자의 친구 블로크, 샤를 뤼스 씨 등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야기의 맥을 자꾸만 놓쳤다.ㅎ 그래서 앞으로 다시 가서 또 읽고...를 반복하고. 그러다가 발베크를 떠나기 전에 생루가 할머니께 사진을 찍어 드려도 좋은지 물어봤다며 들떠서 치장하는 할머니를 보고 화가 났고 그동안 할머니를 잘못 보아 온 게 아닐까, 하는 화자의 복잡한 감정이 엿보여서 웃음이 났다. 역시나 독점하고 싶은데, 할머니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질투를 하고 있었다. 단둘이 있고 싶고 할머니 얼굴에 키스하고 싶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무관심한 할머니를 원망하며 울다가 잠이 들었다. 이런 손자가 있다면 요즘 할머니들 정말 행복하겠지. ㅋㅋㅋ 너무 귀엽다.^^
마차 여행을 하면서 거리에서 보게 되는 소녀들을 향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다. 한창 이성에 관심 있을 나이였으니까. 그 무리들은 노인을 뛰어넘는 등 장난이 지나친 걸 보고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무례한 아이들로 비친다. 시모네 댁 딸이라는 아름다운 소녀와 사귀고 싶어하다가도 변덕스럽게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아무튼 발베크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의 얼굴을 보고 사귀어보고 싶은 마음, 그들을 관찰하고 몇 장에 걸쳐 묘사해 놓은 부분을 보면 소녀들을 보는 즐거움을 낙으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날마다 다른 옷을 입었으며 새 모자와 새 넥타이를 보내 달라고 파리에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특정한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행복으로 여겼다. 소녀들을 향한 마음은 아래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그녀들 모두를 사랑하면서 그중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을 만날 가능성이 내 일상에서 유일하게 감미로운 요소였기에, 다니지 이 만남의 가능성만으로도 내 삶의 온갖 장애물을 허물 수 있을 듯한 희망이 생겼고, 동시에 이 희망은 내가 그녀들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주 분노로 이어졌다.(319P)’
감성이 넘치는 청년의 이성을 향한 애끓는 마음이 엿보여 웃게 만들었다.
이후 이야기는 거의 소녀들 틈에서 어울리며 보낸 이야기다. 스완이 말했던 화가 엘스티로를 리브벨의 레스토랑에서 만나게 되고 교류가 시작되면서 끝없이 그림 이야기가 펼쳐지고, 화실에 드나드는 소녀들과 교제하면서 그 중 알베르틴을 사랑하게 된다. 어느 정도 서로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화자는 알베르틴의 요청으로 그녀의 방에 놀러 갔는데, 뜻밖에 거부당하게 된다. 그 충격인지 화자의 마음은 소녀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라는 제목이 참 시적으로 다가왔는데, 어떤 향수를 느끼게 했다. 바로 소녀 시절의 추억 말이다. 여기서 ‘나’는 마음껏 소녀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목소리가 새의 목소리보다 더 다양하고 음량이 풍부한 악기보다 더 많은 음이 담겨 있다고. 그리고 목소리가 변하듯이 얼굴도 계속해서 변해 가리라는 ‘시간’의 흐름 그 ‘덧없음’을 연상시켜주었다. 이 작품에는 사랑이 없다고 한다. 뒤에 나오는 제목을 보면 알베르틴도 지나가는 사랑을 예고하는 것 같다. ‘대상 없는 탐색’이나 내면에서 나오는 감정인 ‘질투’가 프루스트적인 사랑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완전한 소유’는 그 자체로 ‘사랑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부분도 신선한 해석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고통의 과정을 거쳐 글쓰기에 천착하며 이런 대작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원래 「되찾은 시간」의 일부분으로 계획되었던 것을 알베르틴에 관한 부분을 추가 집필하여 1919년 12월에 ‘공쿠르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완독!^^
<기억에 남는 문장>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근면한 습관이 한 권의 작품을 탄생시키듯이, 현재의 기쁨이 아닌 과거에 대한 현명한 성찰이 우리에게서 미래를 보호해 준다.’(291P)
이번 이야기는 ‘작가의 꿈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작품 전체적인 구상과 집필을 마친 다음 출판사를 찾았다고 한다. 아마도 위의 저 문장을 되새기며 ‘근면한 습관’으로 그 많은 분량의 원고를 썼나 보다. 몇 군데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그라세 출판사에서 자비출판을 조건으로 출간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