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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1월 25일, 모임 후 쓴 글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는데, 아쉽다. 말 재주도 없지만,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닌데 반풍수 될까봐 더 그랬던 것 같다. 혜초님이 후기에서 ‘도전 정신’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나도 살짝 공감했다. 도핑님이 멋지게 칠판 앞에서 설명하시는 걸 보며, '아! 나도' 했더랬다 ㅋ. 마이크 잡고 서 본지 십 여 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다음번엔 펜을 들고 서 보고 싶지만, 하필 ‘하이데거’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눈 동냥한 하이데거는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하고 별로 친숙하지도 않다. 나찌 연루설이라든가, 한나 아렌트와의 연애(?)라든가 풍문만 조금 들어봤을 뿐이다. 여하튼 세미나에서 못했던 이야기, 그림도 그려가며 조금 정리해 놓고 넘어가고 싶다. 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깜짝 놀라움을 선물하시며, 구성원들의 투지를 자극해 주신 도핑님께 그날 전하지 못한 감사를 드린다.

 

 

 

  데카르트는 무조건 Cogito, ergo sum 이다. 데카르트 자신이야 어떠했던,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그렇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처음 데카르트에게 cogito는 포괄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의심’이었던 것 같다. 칠일 만에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동·식물은 물론 인간까지 창조하셨으니, 그 모든 것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나는 엄연히 살아있고, 밥 먹고 잠자고 이것저것 할 건 다할 뿐 아니라 그때마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는 등, 그 모든 것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갖고 있다. 여기에 무슨 의심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신을 의심하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의심했다.

  의심의 극단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육체조차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걸 느꼈을까?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텅 빈 우주에서 한 점 ‘생각’으로 움츠러들었던 데카르트는 그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물건’인 실체로 돌아왔다. 생각하는 물건 res cogitans의 res 는 物, 즉 실체, 물건을 뜻한다. 저자 바이셰델은 “이것으로써 인간적인 있음인 ‘나’의 고유성에 대한 응시가 가로막혔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어떤 단서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아,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고 썼다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인용문¹은 맨 아래에 덧붙였다.

 

 

  cogito 와 res cogitans의 차이를 이해하기는 물론 쉽지가 않다. 인용문¹의 데카르트적 주체와 칸트의 ‘초월적 통각 transcendental apperception’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해질 수 있지만, 사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이라는 개념은 더욱 만만치가 않다. ‘초월적’과 ‘통각’이 분명 한글이긴 한데, 그 의미는 전혀 우리의 상식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핑님은 더 어려운 칸트의 개념들도 잘 설명해 주셨다. 도핑님이 설명하신 내용들은 아마도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던 듯하다. 칸트는 세계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걸 표상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물物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무튼 칸트에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주체의 감각, 지성(오성), 이성을 통해 구성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이 주체는 바로 ‘초월적 통각’이다.(가끔 순수통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통각’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아니다. 어떤 ‘실체’는 아니라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 res cogitans' 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생각의 주체인 ‘나’, 그러니까 생각을 하고 있는 ‘경험적인 나’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끌어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그 내가 진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좀 쉬운 길을 통해 돌아가 보자. 세미나에서 잠깐 언급했고, 영실업님이 생각을 연장해 주신 영화들이 있다. <매트릭스>와 <블레이드 러너>.

  단순히 말하자면,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빨간 약의 세계와 파란 약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파란 약의 세계는 매트릭스 안의 세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 바쁘고 힘들고 정신없지만 또 한편으로 즐겁고 안락하고 매끄러운 세계. 24시간 빈틈없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흘러가는 세계.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로 오존층이 구멍 나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만, 이 세계 자체가 이미 구멍 뚫린 세계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 (w)hole! 라캉은 세계를 이중적 의미에서의 (w)hole 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도 꼭 네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뭔가 아닌 것 같고,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뭔가 세계의 ‘틈’, 구멍을 느끼는 사람들. 빨간약을 삼키는 사람들. 그들이 본 것은 거대한 인큐베이터 공장, 엄마의 자궁 같은 시험관 안에서 환상을 보며 실제로는 에너지를 빨리고 있는 인간 모양의 육체 덩어리들이다. 매트릭스 1편은 이렇게 매트릭스라는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인 시온을 대비시키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간단하다. 빨간 약을 먹고 잠에서 깨어나 진짜 인간의 의식으로 돌아오면 거짓된 환상의 세계를 끝장낼 수 있다. 그런데 3편으로 가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온 뿐 아니라 기계와의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그 안에서 버그인 네오와 또 다른 변종인 스미스 요원 등등,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고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지만, 어쨌든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단순화시켜 본다면 인간이 생각한다고 해서 그 생각의 주체가 실체로서의 나,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를 ‘의심’한 네오마저도 여전히 가상의 프로그램일 뿐, 실체로 존재하지 못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도주 중인 리플리컨트를 추적하는 형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놀랍게도(혹은 예측하신대로) 그 형사 역시 리플리컨트임이 밝혀진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 에 관한 이 영화에서 우리의 결론은 우리 역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형사는 자신이 쫒던 리플리컨트가 ‘자신을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어떻게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가?” 라고 놀라워한다. 물론 우리는 그 놀라움을 주인공 형사에게 되돌려야만 한다. “어떻게 너는 네가 리플리컨트임을 모를 수가 있니?” 하지만, 그 질문이 ‘자신을 인간으로 지각하는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일찍이 세익스피어께서,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던졌던 그 질문에 우리 인간 역시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밖에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 줄 그 무엇이, 혹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의심은 곧 존재에 대한 증거이고, 그것은 또 인간 보다 더 완전한 신에 대한 증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 완전한 신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해 줌으로써, 데카르트의 존재 증명은 순환 논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처음 ‘의심’이라는 부피 없는 한 점으로 응축되어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순간, 철학의 역사는 이미 되 돌이킬 수 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그리고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칸트가 데카르트적 주체를 이어 받아 ‘초월적 통각’ 이라는 개념으로 해낸 일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인 물 자체에 대한 허망한 사고는 일단 접어두고, 인간 이성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주워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를 확신한다. 레스 코기탄스로. 이것이 칸트가 데카르트를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주장이 가능한 이유일 것이다. “칸트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를, 데카르트적 레스 코기탄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하는 계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p28>”

  영실업님의 글과 관련해서, 나는 세계 밖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리플리컨트나 좀비나 프로그램이라고 혹은 아니라고 확인해 줄 수 있는 세계 밖의 신이나, 아키텍터나 거대 컴퓨터 기업은 없다. 다만 뭔가가 이상하고, 찜찜하고, 흰 토끼가 나타나면 따라 나설 것 같다는 생각에 가끔씩 시달릴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내가 누구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내 살아 온 세월은 대하소설로도 모자라다는 엄마의 넋두리를 곧이곧대로 받아 적어 진짜 대하소설을 쓴다고 해도 아마 그 속에도 엄마 자신이 고스란히 모두 담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은 불가능하다. identity는 정체성이자 동일성이다. ‘법은 법이다’ 라거나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은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는 동어반복이 아니고는 그 정체성을 그것 자체와 동일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동일성은 사실 불투명하다. “피라미드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데카르트의 res cogitans가 자기 투명한 주체임에 반해 칸트의 초월적 주체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부름에 동일하게 응답한다. 엄마, 아줌마, 고모, 이모, 여보, 선생님, 고객님 등등.... 이런 호명에 “나는 과연 누구인가?” 따위의 생각으로 망설이다가는 정신병원에 격리되기 십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각종 부름들에 적당하게 혹은 적절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이라고 하는데, 이 정체성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촉박한 동일화 precipitate identification'를 통해 스스로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라캉은 죄수 이야기를 통해 이 동일화의 제스처를 설명하고 있는데, 역시 길고 까다로운 인용문²이어서 맨 아래에 덧붙인다. 죄수가 쓰고 있는 모자의 색깔을 함께 맞춰 보시면 재미있을 것이다. 죄수 셋, 모자는 하얀 모자 셋, 검정 모자 둘이다. 죄수는 각각 하나씩의 모자를 쓰고 있고 상대방의 모자 색깔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색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모자 색을 맞추어야 한다. 모두가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가 ‘촉박한 동일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요점은 “내 모자는 하얀 색이다”를 외치는 순간에도 주체는 자기 모자의 색깔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상징적 세계의 일원이 된다. 내가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떠맡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인간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저자 바이셰델은 데카르트에게 두 가지 혐의를 씌웠다. 코기토를 레스 코기탄스로 환원함으로써 “한 순간 인간의 여기있음을 독특하게 해석할 전망을 열었다가 다음 순간에 그것을 도로 덮어버렸다 p201”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는 것이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p202” 길어봤자 20페이지 정도에 한 철학자의 일생과 사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의 구성 방식상 이런 언술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레스 코기탄스에 관한 부분은 두어 해 전에 읽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다시 떠올리며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물론 자신은 없다. 칸트와 헤겔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 할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내 속에 들어있던 것을 끄집어 내 보았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도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마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쓰기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데카르트에 의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영화 <아바타>였다. 바이셰델의 의도와 동떨어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바타>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가진 영화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사용한다면, 판도라 행성을 침공한 인간이 근대적 주체의 자리에, 그리고 나비족과 판도라 행성의 자원이 객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역사상 근대는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서구인들은 피식민지 원주민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의 대상, 자원으로 취급했다. 근대적 발전은 자원의 개발 혹은 자원의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었으므로, 근대적 주체가 판도라 행성을 공격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바타>는 이런 근대적 주체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비족과의 대비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물론 영화가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 역시 잃어버렸던 낙원인 유기체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잃어버렸던’ 낙원이라는 것이 잃어버리기 전에도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그 낙원은 오직 잃어버린 후에만 사후적으로, 회고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요즘 금요일 밤에는 ‘남극의 눈물’을 본다. 펭권이 너무 귀여워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연 다큐들이 다 그렇듯이, 그것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자연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펭귄은 제 새끼를 먹이려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어야 하고, 자이언트 패트롤이라는 새는 또 제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아기 펭귄의 목덜미를 찢어 놓는다. 코끼리 해표가 새끼를 낳자마자 새들이 날아와 자궁 속까지 부리를 들이밀고 태반을 먹어 치우는 모습에는 속이 느물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남극의 밤하늘과 푸른 빙벽과 차가운 바다가 아름다운만큼이나 그 속의 생명들은 잔인하고 처절하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바로 그곳, 그 대자연의 질서로부터 안간힘을 쏟으며 빠져나왔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은 자연과 단절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비족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 없이도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족들은 그들의 머리채와 이크란의 갈기 같은 것을 맞대는 것으로 서로의 생각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관적 지성’ 이다. 칸트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직관과 지성 사이에 벗어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함을 주장했다. 무한한 존재(신) 속에서만 직관과 지성은 일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직관적 지성이 가능하다면 인간들 사이에 오해는 없을 것이다.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한번 쓰윽 보거나 그윽하게 응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읽혀진다. 신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런데 말도 필요 없고, 오해도 없는 세계는 무지하게 심드렁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인정받거나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사랑을 감추고 눈물 흘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느끼면 되고, 느낀 대로 행하면 된다. 느낀 대로 행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런데 그런 자유가 가능할까? ‘자유’라는 주제는 ‘주체’의 문제와 함께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라고 알고 있다. 이 묵직한 주제에 관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철학자들과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그냥 질문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

  <아바타>에서 내가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이 지겨운 글은 이제 끝을 내야겠다.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근대적 주체인 제이크였다는 사실이다. 침입자였던 제이크의 근대적 문명(사고) 없이는 나비족의 거주지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는 “상처는 상처를 낸 창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적합한 비유인지 알 수 없지만, 자연으로의 회귀가 근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그 ‘자연’은 잔인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바로 그 자연일 뿐이다. 우리가 돌아 갈 수 있는 판도라 행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인용문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중에서 ....

 

 

1. 인용문¹

 

  데카르트는 존재론적으로 일관적인 우주 속에 최초로 균열을 도입했다. 절대적 확실성을 “나는 생각한다.”라는 점으로까지 단축시킬 때, 잠깐 동안, 내 등 뒤에서 나를 지배하고 내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을 조종하는 사악한 천재의 가설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박사에 이르기까지 인조인간을 창조하는 과학자-조물주의 원형.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레스 코기탄스(생각하는 사물)로 환원함으로써, 말하자면 현실이라는 직물에 그가 낸 상처를 꿰맨다. 칸트만이 자기의식에 내재한 역설을 완전하게 표명한다. 칸트의 “초월적 전회”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주체를 “존재의 대사슬” 속에, 즉 우주라는 전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오히려 주체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탈구되어 out of joint” 있다. 주체는 그 자신의 자리를 구성적으로 결여하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라캉은 주체를 수학소 $로, “빗금쳐진” S로 지칭한다.p26....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절대적 확실성의 지점에 도달할 때 데카르트는 아직 코기토를 현실 전체에 상관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현실의 외부이고 현실에서 제외되어 있으면서 현실의 지평을 윤곽 짓는 지점으로서 파악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자신에게 대립된 객관적 세계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기보다는, 내속적인 개념적 사슬관계를 따름으로써 우리를 상위의 다른 표상들로 인도하는 표상이다. 처음에 주체는 코기토가 어떤 내속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에게 속하는 표상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의심은 불완전성의 표시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 없는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에 대한 표상을 함축한다. 결함이 있는 하위의 존재자나 표상은 상위의 존재자나 표상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완전한 존재(신)는 있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신의 진실한 본성은 외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장해준다. 기타 등등. 따라서 우주에 대한 데카르트의 최종적 관점에서 코기토는 복잡하게 얽힌 총체 속에 있는 수많은 표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현실의 일부이며 아직은 현실 전체에 상관적이지 않다.(혹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오로지 “즉자적으로”만 상관적이다.) p27 ..... 데카르트는 모든 대상 표상에 수반하는 텅 빈 “나는 생각한다.”에서 우리가 (사고하는, 그리고 사고하는 그 능력에서 스스로에게 투명한) 어떤 실정적 현상적 실체, 코기탄스를 붙잡는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내 안에 있는 사고하는 “사물”을 자기현시적이며 자기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형식과 생각하는 실체 사이의 위상학적 불일치를, 즉 “나는 생각한다.” 속에 포함된 사고의 논리적 주체의 동일성identity에 관한 분석 명제와 생각하는 사물-실체로서의 어떤 인격의 동일성에 관한 종합 명제 사이의 차이를 잃게 된다. 칸트는 이 구분을 표명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데카르트에 선행한다. p28.... 경험적인 “나”의 자기경험을 초월적 통각의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틈새는 경험적 현실로서의 존재와 논리적 구성물로서의 존재, 즉 수학적 의미에서의 존재의 구분과 일치한다.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통각의 “나”의 지위는 필수적인 동시에 불가능한(그것의 개념이 직관된 경험적 현실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불가능한”) 논리적 구성물의 지위이다. 요컨대 라캉적 실재the Real의 지위이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바로 경험적 현실을 실재적인-불가능한 것으로서의 논리적 구성물과 혼동한 것이었다. p29

 

 

2. 인용문²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체의 상징적 동일화는 언제나 예기적인, 서두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40년대에 라캉이 그 유명한 논리적 시간에 대한 논문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상징적 동일화, 즉 상징적 위임의 떠맡음의 근본적 형식은, “X에 속하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나를 쫒아낼지도 모르는 타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나 자신을 X로서 인지하는”, 나 자신을 X로서 선언하고 공표하는 것이다.... 교도소장은 특별 사면으로 세 명의 죄수 중 한 명을 석방할 수 있다.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논리적 테스트를 통과하게 한다. 죄수들은 세 개는 하얀 색이고 두 개는 검은 색인 다섯 개의 모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자들 중 세 개를 죄수들에게 나누워 준다. 그러고 나서 죄수들은 삼각형으로 앉는다. 즉 죄수 각각은 나머지 둘의 모자 색을 볼 수 있지만, 자기 머리에 쓴 모자 색을 볼 수는 없다. 승자는 자기 모자 색을 가장 먼저 알아맞히는 사람이다. 색을 알게 된 죄수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는 것으로 이를 신호한다. 가능한 세 가지 상황이 있다. p145~6

 

 

 

- 검정 모자 둘, 하얀 모자 하나.

- 검정 모자 하나, 하얀 모자 둘.

- 하얀 모자 셋.

 

  내가 하얀 모자를 쓴 경우, 첫 번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약간의 유추가 필요하다. 내 눈에는 검정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이고, 나는 흰색일 수도 검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모자가 검정일 경우, 흰 색 모자를 쓴 다른 죄수의 눈에는 두 개의 검정이 보일 것이므로 그 죄수는 바로 일어나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죄수가 망설인다. 그렇다면 나는 흰색이 분명하다. 문제는 세 번째의 경우다. 역시 내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검은 색이라면, 흰색을 쓴 다른 죄수는 내가 두 번째 경우에 생각한 방식대로 추론해 나갈 것이다. 즉 제 3 죄수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모자는 흰색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죄수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 머리에서 검은 모자를 봤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나의 추론과 동일한 추론을 했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서둘러 내 모자가 흰색이라고 외쳐야 한다. 두 망설임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다른 죄수가 나 보다 먼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p146~7 책 내용을 축약했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하얗거나 검은) 모자는 내가 〔그것〕인 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내가 “나는 하얀 색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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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12일, 카페소모임 후 쓴 글입니다.

 

지브롤터님의 발제 글을 읽는데,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것이 진짜 내가 읽었던 책인가 싶어서, 다시 <철학의 에스프레소>를 빌려왔다. 사실 처음부터 중세 철학자들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제외하면 이른바 ‘듣보잡’ 이어서, 왜 이렇게 중세 철학자를 많이 넣었냐고 바이셰델이란 저자에게 투덜대기도 했다. 그런데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듣보잡은 그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차라리 내가 듣고 보는 것에 게을렀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중세 철학을 간단히 암흑기로 치부해 버리게 된 더 큰 이유는 나를 만들어 온 환경에 있다. ‘신’이란 존재와는 전혀 역사적 ·정서적 교감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 도대체 신이 내 삶의 한 귀퉁이에조차 들어 와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문학이나 철학이, 혹은 신앙인들이 신을 두고 하는 고민에 현실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고민을 말하자면, 오히려 신을 고민할 수 없는 것이 고민이다. 숱한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신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고뇌하고 속죄하고 울부짖는 그 격정들이 내겐 너무도 덤덤하고 평면적이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주인공들의 의식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신들의 존재가 내게는 언제나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무지가, 사실은 지知의 차원이 아니겠지만, 여하튼 그 무지가 장애물로 느껴질 때면 간혹 성경을 뒤적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누가 누구를 낳고에 걸려서 덮어버리고, 또 어떤 때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독선적인 신의 모습에 놀라서 덮고, 또 어떤 때는 행하신 기적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덮어버리고를 반복하면서 이십여 년 간 마음속에만 있는 성경을 여전히 얼마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얻어 들은 새로운 정보는 더욱 절망적인데, 신은 보여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을 보기 위해서는 혹은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는데, 그럼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인지...내게는 꽉 닫힌 원환이 아닐 수 없다. 신의 존재가 보이거나 혹은 이해되거나 해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덮어 놓고 믿을 수가 있는 것인지, 누가 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도 신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해 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미칠 것 같은 불안이 나를 덮쳐올 때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 것인가....

 

 

  중세 철학에는 신의 존재 증명이라는 주제가 있다. 다시 <철학의 에스프레소>를 읽으며 나는 일단 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여섯 명의 철학자 각각이 어떤 사상을 가졌나를 정확히 아는 것 보다 그것이 내게는 더욱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들의 증명에 동의할 수 있다면 내게도 드디어 신을 가질 방법이 생길 터이다.

  그런데 이 여섯 명의 철학자가 모두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런 발상 자체가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맞나 하는 회의를 데카르트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시점 이전에는 그런 물음 자체를 의식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철학의 역사는 이전 시대가 자명한 진리로 전제한 것들에 대한 의심과 질문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시대에는 당연하다고 전제했던 신을 두고 정말로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란 질문을 하고, 또 그 다음 시대는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사물을 두고 저것이 진짜 존재하는가? 그걸 보고 있는 나는 또 존재하는가? 란 의심을 하고, 최근에는 내가 하는 말의 주인이 진짜 나인가 아니면 거꾸로 언어가 나를 통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여전히 진행 중인데, 철학이 내놓은 답들이 그렇게 완벽하지는 못했던가 보다. 어떤 시대에는 정답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시대가 바뀌면서 오답처리 되기도 하고, 폐기되었던 오답들이 새로운 답의 단서로 다시 살아나기도 하니 말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스피노자는 그렇게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 칸트와 헤겔도. 그래서 이들을 읽는 것은 과거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인간적인 방탕함에 흠뻑 취했다가 뒷날 참회하고 훌륭한 신학 철학자가 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삶에 딱 접합한 방식인, 인간적 체험으로부터, 신을 증명해냈다고 한다. 그의 증명이란 것은 이렇다.

  “인간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참이 있음을 안다. 그렇다면 이성이 참 안에 있는지 측정할 수 있는 척도도 있어야 한다. 이성을 판단하는 척도는 이성보다 더 높은 것이어야 하며, 이성보다 높은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참의 척도인 신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을 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심스럽지만, 그 시대에는 아마 이런 증명법도 통용되었던가 보다. 더 높은 것,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의 존재는 곧바로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같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신에 대한 철학적 진술에 이를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에는, 인간과 나머지 현실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이 그 토대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그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신은 세계의 창조주이고, 세계는 신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유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토대를 이루는 제1전제이다.”

  뭔가 모순적이다. 사유의 제1전제를 그는 왜 다시 증명하려 했던 걸까? 앞 뒤 문맥을 이어보면 신의 존재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그는 또한 이성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 이성이란 것이 천 오백년도 더 지난 후세의, 기독 사상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일반인의 이성 개념과는 매우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게 신에 이르는 비법을 알려 주지 못했다.

 

 

  다음, 제목이 아예 ‘신의 증명’ 인 안셀무스가 있다. 그런데 조금 불길하게도 먼저 이런 문장과 만나게 된다.

  “신을 인식하는 일은 중립적인 앎이 아니고 신에 대해 무한한 관심을 가진 통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요구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

  믿음과 앎의 문제에서 믿음이 앞선다는 이 원칙은 현대에 급조된 것이 아니라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명제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과는 별도로 안셀무스는 “진짜로 전제가 없는 출발점이 될 증명 근거를 찾았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유달리 고마운 일이다. 순수한 신의 개념 안에서 해냈다는 이 증명은 이렇다.

  “모든 인간은 바보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조차 신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신에는 절대적으로 가장 큰 것인 신의 이념이 존재한다. 여기서 크기는 양적인 관계가 아니라 존재가능성들 중에서 가장 큰 풍부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오성에 신이 존재한다면 현실로도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오성에만 존재하는 것이 오성과 현실에 존재하는 것보다 분명 더 작기 때문이다. 머릿속에만 있는 신에는 완전성, 곧 존재가 결핍되어 있다.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위대한 것으로서의 신은 현실적으로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중세에는 절대적으로 가장 큰 것을 신 이외의 개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나보다. 나는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이 큰 것’은 당연히 신이라는 생각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신은 가장 큰 어떤 것이기 때문에 관념으로 존재한다면 당연히 현실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관념만으로 있는 것 보다는 관념+현실로 있는 것이 더 큰 것이니까, 무엇보다 더 큰 신은 현실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증명법이다. 이 방법도 그다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가장 높고 큰 것에는 무조건 신의 이름을 붙인다는 전제에 동의하기가 힘들다.

 

 

  이성과 신앙이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펼쳤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시 해답을 구해보아야겠다. 그는 “신앙은 초자연적인 참과 관계한다. 세속적인 것들을 인식하는 분야에서 신앙은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계도 갖지 않는다. 그에 반해 자연적인 이성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현실을 지향한다. 이 분야에서는 이성적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 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 역시 신학자였다.

  “예를 들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원인을 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고 토마스는 말한다. 이 원인은 다시 더 높은 원인에서 기원한다. 그러나 이런 원인의 사슬을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최초의 원인이 있음이 분명하고 이 최초의 원인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원인’에 관한 탐구는 지금도 진행 중인 걸로 나는 알고 있다. 우주는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지만, 여전히 그 최초의 운동, 빅뱅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새로운 해답이 이미 제시되었는지 여부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혹은 지식 검색이 찾을 수 있는 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기만 할 뿐 정설로 인정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찌되었든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기했던 ‘최초의 원인’이라는 질문은 정작 그 자신의 명쾌한 해답과는 상관없이 지금도 과학자들의 골칫거리이자 탐구욕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성의 세례’를 받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 하는 대신 신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여기서 잠깐 고백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는 우리가 제일 나중에 공부할 비트켄쉬타인이라는 철학자가 언명한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 이외에 비트켄쉬타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이 말 역시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읽어 본 적이 없다. 단지 무척 멋지게 들리는 말이라는 것과 어떤 사람들은 얼토당토않게 이 말을 오용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침묵하는, 인정상 충분히 공감은 가지만 결코 자랑스럽지는 않을 그런 상황에다가 이 말을 떡 갖다 붙이고 합리화하는 것을 볼 때 진짜 욕이 치민다. 그리고 놀란다. 나 역시 여기저기서 주워 읽은 것들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불안 때문이다. 이 모임에 대한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는 이런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지식을 갖는 것이다. 누구나 인용할 수 있고 또 흔히 인용하는 유명한 명제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혹은 적어도 엉뚱하게 오독하지 않는 것. 문제는 간단할 지도 모른다. 모르면 안 쓰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사람이란 엉뚱한 욕망에 시달리는 허영의 동물인지, 멋진 건 쓰고 싶고 맛있는 건 먹고 싶어진다. 욕망을 탓하지 말고, 그 욕망에 제대로 된 길을 터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어쨌건 고백의 요지는 말하자면, 비트켄쉬타인에 대한 나의 인용 역시 충분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더불어 다시 결론을 내리자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 역시 내게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에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세 명의 철학자는 신을 훌륭하게 입증해 냈지만, 내게는 여전히 갇힌 원환처럼 보인다. 믿어야 보이고, 보이니 더욱 믿는다. 그것의 전제는 인간의 인식으로 알 수 없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 보다 더 높은 것 혹은 더 큰 것,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적 필요성이 곧 신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가 곧 존재를 입증한다는 사상이 아무래도 나는 납득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세적 '믿음'은 오늘날까지 폐기되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지고 있기까지 하다.

  어느 책에서 읽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제 1번에는 이런 말이 있다. “ ...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 역사적 유물론이 신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그 게임은 승산이 있다. 오늘날 신학은 알다시피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마른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옛날에 체스 명수인 꼭두각시가 있었는데, 사실은 탁자 안에 숨은 체스의 달인 곱사등이 난쟁이가 손으로 끈을 조종해서 체스를 둔 것이었다는 얘기에 신학과 역사적 유물론을 빗댄 것이라고 한다. 벤야민은 또한 신학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고도 했다. 언뜻 보아 상극일 것 같은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공생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 이상스럽게 들린다. 그런데 여기 벤야민의 이 테제를 다시 뒤집어 천명한 사람이 있다. “신학이라는 꼭두각시는 언제나 승리한다. 신학이 역사적 유물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누구와 싸워도 그 게임은 승산이 있다. 오늘날 역사적 유물론은 알다시피 보기 흉할 정도로 비쩍 마른 터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이 역전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정확한 답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개략적인 답에도 자신이 없다. 좀 더 많이 공부하게 되면 좀 더 확실한 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잠깐 진중권의 글 한 대목을 소개하는 걸로 얼마간 답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중권의 <아이콘>이란 책은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데 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을 진중권식 사회비평을 통해 소개하고 비판하는 글이다. 어떤 글들은 솔직히 내가 이해하고 있는 철학자의 모습과 조금씩 엇나 있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그는 진중권이 아닌가! 여하튼 진중권이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제 1번을 인용하고 있는 '유물론자의 신학'이란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열정을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중권이 언급하고 있는 지젝이라는 사상가는 그의 여러 저작들에서 ‘믿음의 도약’이라는 말을 되풀이 주장한다. 혁명적 순간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의 도약이다. 혁명은 어쩌면 끔직한 재앙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혁명도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래할 세상에 관한 완벽한 지식이 혁명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믿음이 새로운 세상을 가능케 한다고 읽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문제는 믿음이다. 그런데 앎 없이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믿음이 약한 자에게 보내는 지젝의 전언은 베케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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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6일 카페 소모임을 다녀온 후 쓴 글입니다.

 

나는, 누가, 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먹고 자고 울고 웃고 공부하고 일하는 이 육체, 이 확실하게 만져지는 실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 ‘주체’라는 말은 북한에 ‘주체사상’이란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 요상한 사상이 다 있구나 하는 정도 외에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말이었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내가 내 삶의 주체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굳이 나와 주체를 구분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한 8~9년 전쯤에 어떤 사이트에서 나는 참 요상한 용어를 보았다. : ‘빗금친 주체, $’

주체Subject는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빗금이 쳐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감옥의 창살과도 같은 빗금 말이다. 그 분이 쓴 글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미국 법정 드라마 ‘앨리 맥빌’에 관한 평문 비슷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빗금친 주체가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는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글은 참 멋져 보였고, 나는 간간이 올라오는 그 분의 글을 읽는 재미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그런데, 빗금친 주체가 뭐예요?”라는 참고 참았던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 분이 어떤 답글을 달았는지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 10년 가까이 흐르면서도 가끔 그 때 그 댓글이 떠오를 때면 나는 쌉쌀달콤하게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그분은. 나는 정말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체’라는 것이 철학의 역사 속에서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주제라는 것도, 그리고 그 문제의 ‘빗금친 주체’의 문제적인 성격도. 그러니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아줌마에게 그 오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철학자들의 사상이 한 마디로 요약되기 힘든 것은 아마도 그 한 단어 혹은 한 문장 안에 세대에 세대를 이어 오며 거듭된 고민과 부정의 부정이 역사로서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80년대에) 윤리시간에 배웠던 줄긋기 식 서양사라는 것이 무슨 공부가 될 수 있었겠는가.

탈레스 - 만물의 근원은 물,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  플라톤 - 이데아,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헤겔 - 변증법 .....

  하지만, 어제 ‘철학의 에스프레소’ 독서 모임을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 줄긋기에 핵심이 들어있기는 있었구나. 한 철학자의 인생을 축약한 저 짧은 어구, 저 간결한 한 문장을 철학의 역사 속에서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철학자의 사상 뿐만 아니라 철학사의 흐름도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물론 말처럼 그렇게 쉽지도 않을 것이고, 거꾸로 철학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야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겨우 알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마도 소크라테스 자신 보다 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소크라테스 이후 2,000년을 이어오며 나 자신, 자아, 자기, 인간, 주체에 대해 탐구해 왔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너 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데, 데카르트가 세운 ‘자아의 확실성’ 이라는 것도 근대를 통과하면서 와장창 무너지고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가?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현대의 주체론은 소크라테스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깊고 넓은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일 터이다.

  물론 우리가 배웠던 윤리학 책을 조금 더 길고 재미있게 늘여 놓은 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철학의 에스프레소>라는 책으로는 사실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철학자는 지루하고, 어떤 철학자는 뭘 저런 고민을 평생토록이나 했나 싶기도 하다. 철학 전공자나 깊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계지도처럼 사상사의 지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잘 짜여진 내용일 수도 있지만, 초보자의 눈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따로 놀고 있어 아무리 두 눈을 부릅떠 봐도 보이는 것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한 가지 주제를 놓고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현대 철학자들이 그 고민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나를 살펴볼 수 있는 그런 구성이었으면 조금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가령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혹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가 보는 사물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일치하는가?’ 또는 조금 더 실용적으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가는 필요한가?’ 같은 물음들을 철학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플라톤은 민주정을 두 번째로 나쁜 정치체로 폄하했고, 스피노자는 ‘대중은 공포에 떨지 않을 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발언을 했고(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인민주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했다고 하고, 지금 현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탈출하기 위한 해법으로서 민주주의가 지켜져야 할 가치인지 과감히 버려야 할 장애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도 자본주의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1%대 99%의 대결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를 떼어 내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자유에서 민주주의를 분리해 내면 될 것인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분리 불가능성을 주장해야 할 것인지 등등의 문제가 사실 우리 눈앞에 있다. 거창한 담론 같지만 당장 내년에 닥친 두 번의 선거와 이 문제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선거 혹은 대의제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투표에 의한 선거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심스럽다. 국민이 뽑은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국민 99%의 뜻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뽑기는 했지만 혹은 뽑기도 싫어서 투표도 안했지만, 어쨌든 국회의원들은 그저 국회의원들이고 시쳇말로 우리 아랫것들과는 다른 윗것들일 뿐이라고 생각하고들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민주권’이 의미하는 우리들의 권리는 어떻게 국가 속에서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이익의 관점에서 그리고 나의 투표 행위가 갖는 의미의 측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이런 고민은 이제 와서 불쑥 인류에게 닥친 문제는 아니다. 그리스 때부터 이런 고민은 계속되어 왔다. 플라톤의 고민은 형이상학적인 이데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 형태가 가장 훌륭한 형태인가에 대해 집중되어 있다. 그의 <국가(政體)> 완역판은 7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아직 읽어 보지는 않았다. 주문만 했다.;;)

  나는 소위 ‘철학’ 이란 것을 지극히 우연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체계도 없고 계보도 없이 중구난방 읽어 오고 있다. 소설도 아닌데, 밥 먹고 사는 일과 아무 관련도 없는데, 누가 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틈틈이 꾸준히 읽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의 핏줄인 탓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집안 살림은 굳이 외면하시고 논어, 맹자, 주역 같은 것을 혼자 방에 앉아서 오랫동안 읽으며 사셨다. 아버지는 가끔 주역에는 우주의 모든 법칙이 있다고 하셨지만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형이상학이나 관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 우리 삶의 조건, 사회가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방식과 너무너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 무슨 말인지 무지하게 어려워서 욕을 절로 내뱉으며 읽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만한 소설이나 어떤 놀이보다도 이 철학 책 읽기가 나는 재미있다. 그리고 읽다 보면 이상하게 끌리는 철학자들이 있다. 문장이 매혹적이어서 혹은 발상이 발칙해서, 반전이 놀라와서 등등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그의 사상에 이끌려 이 책 저 책을 찾아 읽게 되는데, 가만히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생각들은 대부분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그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 들어있다. 이미 잊혀진 철학자를 다시 불러내어 자신의 철학 체계에 발판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은 또 늘 싸운다. 자신이 불러 온 철학자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비판을 다시 비판하고, 서로 네가 오독했네, 내가 제대로 이해했네, 지지고 볶으며 때로는 절교하고, 인신공격도 해가면 피 터지게 싸우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른다. 인지상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의 말이 맞거니 싶지만, 그걸 또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 이제는 그들이 오독이네 뭐네 하는 그 원 철학자의 책을 읽고 싶어진다. 물론 너무 어렵다. 철학자들끼리도 잘못 읽었네, 아니네 하는데 내가 그걸 직접 읽는다고 어떻게 제대로 읽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또 그걸 꾸역꾸역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칸트도 흘끔거리고 헤겔도 뒤적이고 라깡의 세미나도 찾아보고, 뭐 그런 욕심을 내고 만다.

  사실 누구 말이 맞는가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단 생각을 요즘에 한다. 철학자들이 과거의 철학자들을 불러내는 이유는 그 과거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 과거의 철학자 자신이 생각한 것과 온전히 일치하게 읽어 내려는 예의바른 후배의 가상한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사유에 체계를 세우기 위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다시 그려 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얼짱 각도라는 것도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얼굴도 보는 방향에 따라 다 다른 것인데, 한 사람의 사상이라고 해서 관점에 따라 왜 다르게 읽혀지지 않겠는가. 어떤 관점에서 보았건 그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서 모순되지 않고 논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올바른 독해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어디 영어나 한자뿐이겠는가?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어서 어제 독서 모임의 후기를 쓰려다 후기는 쓰지 못하고, 떠오르는 생각의 꼬리를 따라 가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았다. 철학 책 읽기도 이와 같아서 아마도 <철학의 에스프레소>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첫 번째 꼬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니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가장 멋지게 보이는 철학자는 니체였다. 역시 위험한 남자는 매력적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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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4일, 카페 소모임에서 공부하며 쓴 글입니다.

 

‘Cogito, ergo sum’

라틴어로 좀 멋을 냈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이 유명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신하는 데 그토록 머리를 쥐어뜯었다는 데카르트가 생뚱맞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벌써, 그런 ‘자명한 나’, 그런 ‘투명한 주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또 현대 철학의 대세라고 하니, 철학이란 뭔 별 세계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을 멀고 먼 별 세계의 유희쯤으로 치부하다가도 어느 날 문득 나 역시 그런 물음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내가 누구지?” “내 의지라는 게 진짜 내 것일까?” “인간은 평등할까?” 내가 철학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윗것들의 싸움이 아랫것들의 삶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랫것들의 삶을 구조적으로 결정짓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쩌면 철학 역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구조 짓는 가장 실질적인 학문은 아닐까?, 철학에 관한 우리의 독서가 이 질문에 대한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에 대한 본문의 짧은 요약이다.

 

 

 

 

13. 가면 뒤의 철학자 혹은 데카르트

 

 

1.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인식한다고 믿는 모든 대상이 의심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이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만은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이 생각을 가지는 나도 존재한다. 의심조차도, 그리고 바로 그 의심이야말로 내가 여기있음을 증명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기만당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p200

 

 

2. 데카르트가 중세의 철학이 거의 관행적으로 행하던 대로 가장 근본적인 확실성의 지점을 신에게서 찾지 않고 인간에게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은 이후의 철학에 결정적인 모습을 부여했다. 그 이후로 근대의 사색은 인간을 자기 자신 위에 세우고, 그를 자신에게서 나온 확실성에만 맡기는 것이 특징이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자율성으로서, 데카르트에게서 최초이며 결정적인 철학적 토대를 얻었다. p201

 

 

3. 데카르트가 구상한 인간에 대한 견해에서 또 다른 불행한 발전과정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의 본질은 생각하기일 뿐이다....그로써 의식을 가진 존재, 곧 ‘생각하는 물건’인 인간과, 의식이 없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인 다른 것들 사이에 건너가기 어려운 심연이 열렸다. ‘나’는 구체적인 세계 속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사유되지 않았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 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 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에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14. 십자가에 못 박힌 이성 혹은 파스칼

 

 

1. 동시에 인간의 완전한 무력함도 드러난다. “수증기 조금이나 물 한 방울이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러나 또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생각할 힘이 있고, 그것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그것 보다 더 고귀하다.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모든 것이 자기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 p211

 

 

2. 원죄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의 지적 이해력에 어울리는 통찰의 가능성들을 넘어간다. 이성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다른 것이 참된 확실성을 가능하게 한다. 곧 믿음이 그것인데, 믿음의 장소는 이성이 아니라 심정(마음)이다..... 믿음은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지는 않는다. 종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끝없는 카오스’가 열려 있다....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특별한 종류의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모험이다. .....“너희의 모든 통찰은, 너희 안에서는 참도 구원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찾아낼 것을 약속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 p216~7

 

 

 

 

덧붙임 : 데카르트의 주체가 근대의 유물로 퇴락한지 오래라고 하지만, 여기 다시 데카르트적 주체를 재단언하고자 하는 주장이 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마주한 코기토가 여전히 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다로운 주체>의 서문을 조금 소개한다.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

 

 

하나의 유령이 서구의 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 데카르트의 주체라는 유령이. 모든 학술 권력들은 이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하여 동맹하였다. (새로운 전체론적 접근법을 지향하면서 ‘데카르트적 패러다임’의 권좌를 노리는)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와 (데카르트적 주체를 담론적 허구이자, 탈중심화된 텍스트적 기제들의 효과라고 보는) 후근대적 해체주의자. (데카르트의 독백적 주체성으로부터 담론적 간주체성으로의 이동을 역설하는) 하버마스적 의사소통 이론가와 (작금의 약탈적 허무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근대적 주체성의 지평을 ‘횡단’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존재의 사유에 대한 하이데거적 지지자. (자아의 고유한 무대라는 것은 결코 없으며 단지 경쟁하는 힘들의 복마전이 있을 뿐임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지과학자와 (무자비한 자연 착취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유물론을 비난하는) 심층 생태론자. (부르조아적인 사고하는 주체의 환영적 자유는 계급 분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적 (후-)마르크스주의자와 (이른바 무성적 코기토라는 것이 사실 남성의 가부장적 형성물임을 강조하는) 여성주의자.

자신들의 적들로부터 데카르트적 유산과의 인연을 아직 적절히 끊지 못했다고 비방을 받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반동적’ 적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급진적’ 비판가들에 대해서도 데카르트적 주체성이란 낙인을 찍으며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이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1. 데카르트적 주체성은, 모든 학술 권력들에 의해, 강력하고도 여전히 활동적인 지적 전통으로서 계속 인정받고 있다.

2. 지금이야말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파당들이 전 세계 앞에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지향을 표명하여,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유령이라는 소문에다 데카르트적 주체성 자체의 철학적 선언을 대치시킬 절호의 시기다.

 

그리하여 이 책은 데카르트적 주체를 재단언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 데카르트적 주체의 거부는 오늘날 학계의 모든 투쟁적 당파들의 암묵적 협정을 형성하고 있다. 비록 이 모든 정향들이 공식적으로는 사활이 달린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데카르트저 주체를 거부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단일을 이룬다. 물론 요점은, 코기토라는 개념이 근대 사유를 지배해왔던 그 가장 속에서의 코기토 (자기-투명한 사고하는 주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잊혀진 이면을, 코기토의 과잉적이고 불승인된 핵심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인데, 이는 투명한 자아라는 안심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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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 을 반쯤 읽고 나서야, 나는 살짝 안도의 웃음을 웃었다.

  얼마 전 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와 일종의 거래를 했다. 후마니타스는 책 한 권을 공짜로 보내주고, 나는 글을 한 편 써서 보내주는 것이다. 번역하자면, 내가 후마니타스의 판촉행사 중 하나인 서평단 모집에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뽑혔다는 말이다.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공짜 책 한권에 좋아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스를 열고 책을 손에 들자, 책의 무게 보다 채무의 무게가 먼저 전해졌다. ‘써야한다.’ 미끼만 떼먹고 도망가기엔 얼굴의 두께가 미치지 못하고, 읽을 만한 서평을 쓰기엔 능력이 닿지 않는다. 이토록 자명한 사실을 왜 나는 모르는 척 했는지 모르겠지만, 책은 도착했고, 글은 쓰여야 했다.

  책을 조금 읽어보자, 어쩌면 나는 서평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첫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8년)에서부터 최근의 저서인 『멈춰라, 생각하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일관하여 주장해 온 ‘적대의 전치(轉置, displacement)’에 관한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끔찍하게도 일본의 넷우익이 절멸을 외치는 ‘재일코리안’은 나치들이 가스실에 몰아넣은 ‘유대인’ 의 형상과 너무나 똑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서둘러 희미한 기억을 쫒아 지젝의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지젝이 ‘유대인’이라고 한 것을 ‘재일코리안’이라고 바꾸어 읽고,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웃었다, 살짝. 이건 서평이 아니라 공식에 대입하는 문제 풀이야.

 

 

 

 

1. 파시즘의 귀환? 

 

 

  <거리로 나온 넷우익>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회원들을 추적한 논픽션이다.(p8)” 재특회가 말하는 재일특권은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것을 빼앗아 누리고 있다는 특권인데,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상실감과 분노이고, 그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다.

  「 “지금 많은 일본인이 빈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꽤 많아요. 매년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일코리안은 외국 국적이면서도 우선적으로 생활보호 지원금을 받고는 일본에 대해 비판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곤을 이유로 재일코리안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특권을 향유하면서 차별 반대 운동이나 전쟁범죄 추궁 같은 사실무근의 반일 활동을 하는 재일코리안이야말로 일본의 적이 아닙니까?”(p57~8)..... 젊은이들이 직장이 없는 것도, 생활보호 지원금이 끊긴 것도, 재일코리안과 같은 외국 국적 주민이 복지나 고용정책에 무임승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뿐이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p60)」

  일본의 재특회는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니다. 이미 20C 초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파시즘이 그랬고, 다시 돌아온 유럽의 네오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현실은 단순한데, 원인은 복잡하다. 혹은 원인은 멀리 있고, 해결할 방법은 없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는 것 보다는 보이는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비록 그것으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현실이 달라 보이기는 하고, 어두운 삶이 갑자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2. 전치된 계급투쟁

 

 

  「“우리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특권에 대한 비판이고, 엘리트 비판입니다.” “원래 좌익은 사회의 엘리트잖아요. 예전의 전공투 운동도 사실은 엘리트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다들 특권계급이었잖아요. 차별이다 뭐다, 우리한테 따지는 노동조합도 다 엘리트에요. 그렇게 잘사는 사람들이 없어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엘리트들이 재일코리안을 비호해 온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일특권 문제에 경각심이 없는 거고요.” 여기서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비주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엘리트라고 규정함으로써 특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p60~61)」

  나도 재특회의 입에서 나온 ‘계급투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지젝에 의하면 계급투쟁이 맞기는 하다, 전치된 형식으로서의.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순수한 우파 인종주의처럼 보이는 그런 요소들조차 사실은 전치된 노동계급의 항의 형태인지 주시해야 한다. 물론 고용위기를 야기하는 외국 노동자들의 유입을 중단하라는 요구에는 인종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공산권 국가들로부터 흘러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과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주노동력의 유입은 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억제하기 위한 자본주의 전략 중 일부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부시가 노동조합의 압력에 굴복한 민주당보다 멕시코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합법화에 더 열심이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은 한물 간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부터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신비화시키는 것에 대칭적으로 “아이 씻은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듯이,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은 은폐하고 그것을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에 대한 단순한 주장은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1~2」

  일본의 재일코리안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식민지인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책임이 없다. 이 책에 의하면 오히려 그런 역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여하튼 이들의 위기의식은 재일코리안 뿐 아니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국인 등의 외국 이주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외국 이주민들 문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 수도 2011년에 이미 130만명이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정확한 수치는 찾기 힘든 것 같다. 불법 체류자 수가 상당할 테니)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하는 노동현장에서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곧바로 임금 하락과 일자리 경쟁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분노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자리를 뺏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로 향한다. 계급투쟁이 전치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은 진정한 적인 자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이 적대의 신비화이다.

  재특회가 ‘특권’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재일코리안과 일본의 엘리트 및 좌파를 연결 짓는 단순함은 우습지만, 엘리트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우리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물론 일베다. 솔직히 나는 일베를 잘 모른다. 게시판에 들어가 본적도 없고 그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 본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이 재특회와 비슷할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그들은 아마도 ‘루저’일 것이다.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의 저급함을 보면 그들의 학력 인증 소동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조금 현학적인 용어를 들이댄다면, 아마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재특회와 같이 엘리트를 미워하고 좌파를 증오한다. 그리고 관용(똘레랑스) 따위의 정치적 올바름(PC)을 조롱한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이야말로 반-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지젝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다문화주의에 의해 은폐되어 버리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특회나 인종주의자들의 ‘관용’에 대한 조롱은 엘리트 좌파가 은폐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자신들도 모른 채 폭로 하고 있는 셈이다. ‘관용 따위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물론 그런 다음 그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돌진한다. 돌격! 재일코리안. 돌격! 종북이.

 

 

3. 좌파적 꿈의 부재

 

 

  「“어쩐지 학력이 높고, 어쩐지 월급이 많고, 어쩐지 보호받고 있다, 가해자들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재특회 회원 대부분이 이런 가해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처지라는 사실인지도 모릅니다.”p344 ....이들 가해자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안정된 직장을 독점하고, 누군가가 지켜 주고, 발언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대변해 주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도 듣기 좋은 인권이나 복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뿐이다. 약자의 편인 척하면서 자신들은 편한 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유함까지도 독점하고 있다. 위선자이며 약탈자이다.p345...“그런 불만과 불안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게 재특회라고 생각해요.” p345」

  재특회라는 단어만 없다면, 이건 우리 사회가 소위 강남좌파에게 가지는 반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좌파가 진짜 좌파인가를 떠나서, 좌파는 왜 이렇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답하자면, 좌파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훈은 분명하다.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이 좌파적 꿈의 부재라는 공백을 채우고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4」

  우리나라 역시 좌파는 파산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우리가 본 것은 비전도, 능력도, 도덕도 상실한 추악하고 무능한 좌파였다.

  「“...지금 좌익의 어디에 매력이 있습니까? 반쯤 체제화된 좌익보다 아나키한 매력으로 가득 찬 우익이 젊은이들의 위험한 욕구에 훨씬 부응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장래의 전망을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자극으로 가득 찬 운동이 재미있죠. 뭐, 일본인의 지적 수준이 가장 낮은 시기에 인터넷을 매개로 우익만 성장한 것은 불행입니다만.”p348...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 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 현상’이 생긴 것이다.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이 변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p348」

  「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찾으려는 것은 일본인인 자신을 지켜 주는 강한 ‘일본’이다. 원래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흡수하는 기능을 해온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좌익이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p346~7」

  재특회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를 증언한다. 발터 벤야민의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p148) 문제는 재특회가 아니라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 현 사회에 대한 불만을 누가 어떻게 조직하는가 하는 점이다.

 

 

4. 포퓰리즘의 긍정적 기능 :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

 

 

  재특회의 활동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보통 포퓰리즘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위험하고 파괴적이고 무질서하다. 그런데 기존의 체계, 기존의 법질서 아래에서는 절대로 ‘잘 안 풀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정답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쳐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깨버리려는 이들의 욕구가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계몽된 자유주의-테크노크라트 엘리트에게 포퓰리즘은 고유하게 원-파시즘적인 것으로, 정치적 이성의 붕괴이자 맹목적인 유토피아적 열정의 분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폭동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5」

  국가라든가, 국익이라는 말만 나와도 파시즘 운운하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적인 열광은 언제나 광적인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심형래의 디워 논쟁을 거치며, 그런 의심은 더욱 공고해 졌다.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의 분출은 그렇게 나쁜 것인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기억해 보자. 플로리다에서의 부정 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는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취지로 부시를 차기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가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 ... 플로리다의 예는 그럼에도 민주주의 안에 계속 ‘대타자’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복종해야 하는 선거 규칙이라는 절차적 ‘대타자’ 말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이 중지시키는 것이 바로 규칙에 대한 그 무조건적 의지, 바로 ‘대타자’이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언제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이유이다. 만약 선거가 조작되었다면 ‘인민의 의지’가 강제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경고. 그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압력의 위협 말이다. 심지어 선거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가 존중되더라도 선거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이라는 것, 선거는 그 실체적인 가치가 다른 데 있는 정치적 과정을 공고히 해 줄 뿐이라는 태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8」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엘 고어를 승복하게 만든 민주적 절차, 민주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중지시키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있다.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평등주의의 논리.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안이 (형식적)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통과되었을 때, 그것을 중지 시킨 것은 국민들이 법 절차를 넘어 요구한 무조건적인 민주주의였다. 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때 가장 널리 불리고 가장 소리 높여 외쳐진 구호는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였다. 이것은 헌법이라는 법질서에 등록된 제1원칙이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법질서 위에 있다. 어떤 법적 질서나 제도라도 국민의 뜻에 반하게 되는 경우, 그 질서와 제도는 즉각적으로 중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포퓰리즘의 긍정적 차원은 민주주의적 규칙들에 대한 잠정적인 중지에 있다. 민주주의는 - 오늘날의 일반적 의미에서- 무엇보다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민주주의의 최소 정의는 적대가 논쟁적 게임으로 흡수되는 것을 보증하는 어떤 형식적 규칙들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7」

  규칙들에 얽매인 민주주의를 중지시키고, 새로운 규칙을 위한 정치적 논의를 촉발시키는 것이 포퓰리즘의 긍정적 의미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에는 반드시 인민people의 폭발적 분노, 열광적 지지, 광적인 헌신이 뒷받침 된다. 그것만이 오로지 인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운 십만의 촛불 행렬이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5. 포퓰리즘의 이론적 옳지 않음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우리가 채택해야 할 올바른 운동의 형식인가? 지젝은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재특회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재일코리안’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더군요. 한편에서는 조선인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고 욕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그런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받고 있는 일본인은 정말로 한심한 거죠. 그런데 그런 모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 역시 한때는 재특회의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공격하기 좋은 목표를 찾은 데 신이 났는지도 모르죠. 재일조선인은 불쌍한 약자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얽매여 왔던 우리에겐 터부를 깨는 쾌감이 있었어요. 비뚤어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저 자신도 터부를 깨뜨림으로써 세상의 권위나 권력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198」

  「그들이 가진 분노의 메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치관이 혼돈스러운 시대에 아이덴티티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겁니다. 사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질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간신히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죠. p346」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에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유도 알지 못한다. 혼돈 속에서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해 준 것은 또렷하게 제시된 적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구성적인 ‘신비화’가 있다. 그것의 기본 제스처는 상황의 복잡성과 대면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 그것을 유사-구체적인 ‘적’의 형상과의 분명한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에 기반한 현상, 무력함의 승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3~4」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위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23~4」

 

 

6. 앎에 대한 거절

 

  우리는 사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행위자’의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위험한 사례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나꼼수가 우리에게 심어준 환영이 그것이다. 가카만 물러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환영은 달콤한 허상이었으나 우리는 열광했다. 나꼼수의 성공비결은 포퓰리즘의 물신주의적 특성을 완벽하게 활용한 것에 있다. 상황의 복잡성을 가지 쳐내고, 가카라는 분명한 적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닥치고’ 가카에게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우울한 현실의 내재적, 구조적 문제는 은폐되고, 모든 원인은 가카라는 특수한 개인의 탐욕과 무지에 돌려졌다. 그러나 비록 나꼼수와 문재인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해결방법이 요원한 원인을 파헤치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적에게 떠맡기는 편리함을 선택했다. 우리 행동의 바탕은 바로 이 ‘앎에 대한 거절’ 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포퓰리스트들에게 사실 혹은 진실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일코리안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다는 사실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NLL포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 같은 것은 그들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신주의란 사고의 역작용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권리를 탈취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적인 것이 아니라, 재일코리안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모두 일본인의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인식이 그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재특회와 함께 토론해 보고 싶었다는 재일코리안이 막상 그들의 시위를 눈앞에 대하자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는 고백은 당연하다. 만약 재특회 회원이 이 재일코리안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는 이 재일코리안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총코는 죽어버렷!”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빌 것이다. 어떻게? 일상의 선량한 이웃 유대인을 둔 반유대주의자의 이야기가 이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이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의 선량함과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간극에 당황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추론에 이렇게 대답한다.

  「 그의 대답은 이러한 간극, 이러한 어긋남 자체를 반유태주의를 위한 논증으로 돌리는 것이리라.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느냐? 그들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겉모습의 가면 뒤에 그것을 숨기고 있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이중성이야말로 유태인의 근본적인 습성이다.” 바로 이렇게 처음 보기에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사실도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위한 논증으로서 기능할 때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p95<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7. 반동적 행위와 능동적 행위

 

  그렇다면 적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허상이라는 것인가? 적과의 투쟁, 계급투쟁과 같은 대의에의 헌신은 언제나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뜻인가?

  「미친 주장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히틀러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 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감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히틀러의 매혹에 반대해야 한다. 물론 그는 사악한 인간이고 수백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정적인 용기를 가지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추구한 것을 실행한 인간이라는 매혹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매혹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매혹이 틀렸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실제로 사태를 변화시킬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행위는 아무런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반동 행위이고, 그가 상연한 거대한 혁명의 스펙터클은 자본주의 질서가 지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뿐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31~2」

  여기에 반동적 행위(리-액션, 수동적)와 진정한 행위(액션, 능동적)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포퓰리즘적 폭력의 선동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속고 있는 군중의 분노를 (재)촉발하기 위해 그들은 자살을 범죄로 곡해한다. 즉 그들은 일종의 자살인 파국(내재적인 적대의 결과)을 외부의 범인이 일으킨 것처럼 단서를 조작한다. 이것이 진정한 급진적-해방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가 다른 이유이다. 이 상황에 꼭 맞는 니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해방적인 정치는 능동적, 즉 자기 비전을 강제하는 반면에 포퓰리즘 정치는 근본적으로 반동적,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반작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55」

  재특회는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외부의 침입자가 일으킨 범죄로 바꾸어 버린다. 이들은 스스로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능동적으로 행위 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을 구조화하고 있는 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볼 지혜도, 파괴할 용기도 없다.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외부의 희생양, 재일코리안이다.

  「회원들 중에는 세상의 모순을 풀 열쇠를 모두 재일코리안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치도, 경제도, 재일코리안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도 한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재특회야말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p356」

  적대는 존재한다. 적은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사회 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사회는 처음부터 조화롭지 않았고, 언제나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일자리는 재일코리안에 의해 탈취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작동 논리에 의해 언제나 항상 부족한 상태를 유지하게 구성된 것이다. 이 적대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는, 재일코리안을 수 만 번 절멸시킨다고 해도 결코 재특회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

 

 

8. 재특회의 토양 : 주변화는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찌질한 인간들, 사회의 루저, 쓰레기들은 무시하거나 주변화하면 자연히 고사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방송이나 과도한 관심이 이들을 키운다고 비판한다.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 역시 ‘사쿠라’라는 보수 위성 방송국이 스타로 키워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하나의 스타 상품이다. 상품이 성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시장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들어난 사건이 후지TV 반대 시위다. 6천명 이상의 일반 시민이 참가했다는 후지TV 반대 시위는 이 방송국이 한류 드라마를 많이 방송한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잘 생각해보면 방송국이 외국방송을 필요 이상으로 방영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대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이상하다. p314」

  「김치찌개가 인기 랭킹 1위로 소개된 것이 어째서 편향인가? 그런 하찮은 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에 떠다니는 희미한 ‘반한국’, ‘반북한’의 목소리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뿐이 아닌가? p314」

  「나는 거기서 재특회의 배경을 본 것 같았다. 후지 TV 반대 시위 참가자들은 돌출된 언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착점은 재특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재특회처럼 과격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낳고 있는 것은 이렇게 세련된 사람들의 어딘가 우울한 분노다. 재특회의 배후에 일반 시민이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p314」

  이 배후에 있는 일반시민들의 ‘우울한 분노’는 언제라도 요원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다. 재특회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특수한 불씨일 뿐이다. 줄지어 서 있는 일반 시민들이 ‘앎에 대해 거부’하고, 재특회가 내던진 재일코리안이라는 적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할 때 파시즘의 광풍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한 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위험이 일본보다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동지를 원하는 사람, 도피처를 원하는 사람, 돌아갈 장소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재특회는 유인하듯이 불러들인다. p356」

  진중권 같은 지식인이 일베 현상을 루저나 주변화 시켜야 할 쓰레기로 조롱하며 유희하고 있는 동안,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일반시민’을 ‘유인하듯이 불러들이’며 사회를 위험하게 움직이는 자들은 바로 이들 재특회나 일베,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혹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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