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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4일, 카페 소모임에서 공부하며 쓴 글입니다.
‘Cogito, ergo sum’
라틴어로 좀 멋을 냈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이 유명한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존재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신하는 데 그토록 머리를 쥐어뜯었다는 데카르트가 생뚱맞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벌써, 그런 ‘자명한 나’, 그런 ‘투명한 주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또 현대 철학의 대세라고 하니, 철학이란 뭔 별 세계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을 멀고 먼 별 세계의 유희쯤으로 치부하다가도 어느 날 문득 나 역시 그런 물음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내가 누구지?” “내 의지라는 게 진짜 내 것일까?” “인간은 평등할까?” 내가 철학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윗것들의 싸움이 아랫것들의 삶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랫것들의 삶을 구조적으로 결정짓는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어쩌면 철학 역시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구조 짓는 가장 실질적인 학문은 아닐까?, 철학에 관한 우리의 독서가 이 질문에 대한 단초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에 대한 본문의 짧은 요약이다.
13. 가면 뒤의 철학자 혹은 데카르트
1.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인식한다고 믿는 모든 대상이 의심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이 대상에 대한 나의 생각만은 존재한다. 그럼으로써 이 생각을 가지는 나도 존재한다. 의심조차도, 그리고 바로 그 의심이야말로 내가 여기있음을 증명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나는 기만당한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 p200
2. 데카르트가 중세의 철학이 거의 관행적으로 행하던 대로 가장 근본적인 확실성의 지점을 신에게서 찾지 않고 인간에게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은 이후의 철학에 결정적인 모습을 부여했다. 그 이후로 근대의 사색은 인간을 자기 자신 위에 세우고, 그를 자신에게서 나온 확실성에만 맡기는 것이 특징이 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자율성으로서, 데카르트에게서 최초이며 결정적인 철학적 토대를 얻었다. p201
3. 데카르트가 구상한 인간에 대한 견해에서 또 다른 불행한 발전과정이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의 본질은 생각하기일 뿐이다....그로써 의식을 가진 존재, 곧 ‘생각하는 물건’인 인간과, 의식이 없고 생각하지 않는 존재인 다른 것들 사이에 건너가기 어려운 심연이 열렸다. ‘나’는 구체적인 세계 속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사유되지 않았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 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 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에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14. 십자가에 못 박힌 이성 혹은 파스칼
1. 동시에 인간의 완전한 무력함도 드러난다. “수증기 조금이나 물 한 방울이 인간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러나 또한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무력함을 생각할 힘이 있고, 그것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해도 인간은 자기를 죽이는 그것 보다 더 고귀하다.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모든 것이 자기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 p211
2. 원죄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의 지적 이해력에 어울리는 통찰의 가능성들을 넘어간다. 이성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다른 것이 참된 확실성을 가능하게 한다. 곧 믿음이 그것인데, 믿음의 장소는 이성이 아니라 심정(마음)이다..... 믿음은 객관적인 확실성을 갖지는 않는다. 종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끝없는 카오스’가 열려 있다....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특별한 종류의 확실성을 가져다주는 모험이다. .....“너희의 모든 통찰은, 너희 안에서는 참도 구원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까지만 도달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찾아낼 것을 약속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 p216~7
덧붙임 : 데카르트의 주체가 근대의 유물로 퇴락한지 오래라고 하지만, 여기 다시 데카르트적 주체를 재단언하고자 하는 주장이 있다. 오늘 우리가 다시 마주한 코기토가 여전히 유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다로운 주체>의 서문을 조금 소개한다.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
하나의 유령이 서구의 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 데카르트의 주체라는 유령이. 모든 학술 권력들은 이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하여 동맹하였다. (새로운 전체론적 접근법을 지향하면서 ‘데카르트적 패러다임’의 권좌를 노리는)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와 (데카르트적 주체를 담론적 허구이자, 탈중심화된 텍스트적 기제들의 효과라고 보는) 후근대적 해체주의자. (데카르트의 독백적 주체성으로부터 담론적 간주체성으로의 이동을 역설하는) 하버마스적 의사소통 이론가와 (작금의 약탈적 허무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근대적 주체성의 지평을 ‘횡단’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존재의 사유에 대한 하이데거적 지지자. (자아의 고유한 무대라는 것은 결코 없으며 단지 경쟁하는 힘들의 복마전이 있을 뿐임을 경험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지과학자와 (무자비한 자연 착취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유물론을 비난하는) 심층 생태론자. (부르조아적인 사고하는 주체의 환영적 자유는 계급 분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판적 (후-)마르크스주의자와 (이른바 무성적 코기토라는 것이 사실 남성의 가부장적 형성물임을 강조하는) 여성주의자.
자신들의 적들로부터 데카르트적 유산과의 인연을 아직 적절히 끊지 못했다고 비방을 받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반동적’ 적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급진적’ 비판가들에 대해서도 데카르트적 주체성이란 낙인을 찍으며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학술적 정향이 어디 있는가?
이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1. 데카르트적 주체성은, 모든 학술 권력들에 의해, 강력하고도 여전히 활동적인 지적 전통으로서 계속 인정받고 있다.
2. 지금이야말로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파당들이 전 세계 앞에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지향을 표명하여,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유령이라는 소문에다 데카르트적 주체성 자체의 철학적 선언을 대치시킬 절호의 시기다.
그리하여 이 책은 데카르트적 주체를 재단언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 데카르트적 주체의 거부는 오늘날 학계의 모든 투쟁적 당파들의 암묵적 협정을 형성하고 있다. 비록 이 모든 정향들이 공식적으로는 사활이 달린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데카르트저 주체를 거부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단일을 이룬다. 물론 요점은, 코기토라는 개념이 근대 사유를 지배해왔던 그 가장 속에서의 코기토 (자기-투명한 사고하는 주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잊혀진 이면을, 코기토의 과잉적이고 불승인된 핵심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것인데, 이는 투명한 자아라는 안심되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