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1월 6일 카페 소모임을 다녀온 후 쓴 글입니다.

 

나는, 누가, 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먹고 자고 울고 웃고 공부하고 일하는 이 육체, 이 확실하게 만져지는 실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 ‘주체’라는 말은 북한에 ‘주체사상’이란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뭐 요상한 사상이 다 있구나 하는 정도 외에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말이었다. 지구가 둥근 것처럼 내가 내 삶의 주체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굳이 나와 주체를 구분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한 8~9년 전쯤에 어떤 사이트에서 나는 참 요상한 용어를 보았다. : ‘빗금친 주체, $’

주체Subject는 자유롭지 못하고 항상 빗금이 쳐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감옥의 창살과도 같은 빗금 말이다. 그 분이 쓴 글은 참으로 아름다웠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미국 법정 드라마 ‘앨리 맥빌’에 관한 평문 비슷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빗금친 주체가 어떤 맥락으로 쓰였는지는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 글은 참 멋져 보였고, 나는 간간이 올라오는 그 분의 글을 읽는 재미에 홀딱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그런데, 빗금친 주체가 뭐예요?”라는 참고 참았던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 분이 어떤 답글을 달았는지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 10년 가까이 흐르면서도 가끔 그 때 그 댓글이 떠오를 때면 나는 쌉쌀달콤하게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나 난감하셨을까, 그분은. 나는 정말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체’라는 것이 철학의 역사 속에서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주제라는 것도, 그리고 그 문제의 ‘빗금친 주체’의 문제적인 성격도. 그러니 철학의 ‘철’자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아줌마에게 그 오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철학자들의 사상이 한 마디로 요약되기 힘든 것은 아마도 그 한 단어 혹은 한 문장 안에 세대에 세대를 이어 오며 거듭된 고민과 부정의 부정이 역사로서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80년대에) 윤리시간에 배웠던 줄긋기 식 서양사라는 것이 무슨 공부가 될 수 있었겠는가.

탈레스 - 만물의 근원은 물,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  플라톤 - 이데아,  데카르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헤겔 - 변증법 .....

  하지만, 어제 ‘철학의 에스프레소’ 독서 모임을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 줄긋기에 핵심이 들어있기는 있었구나. 한 철학자의 인생을 축약한 저 짧은 어구, 저 간결한 한 문장을 철학의 역사 속에서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철학자의 사상 뿐만 아니라 철학사의 흐름도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물론 말처럼 그렇게 쉽지도 않을 것이고, 거꾸로 철학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야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겨우 알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마도 소크라테스 자신 보다 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소크라테스 이후 2,000년을 이어오며 나 자신, 자아, 자기, 인간, 주체에 대해 탐구해 왔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너 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는데, 데카르트가 세운 ‘자아의 확실성’ 이라는 것도 근대를 통과하면서 와장창 무너지고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가? 주체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현대의 주체론은 소크라테스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보다 훨씬 깊고 넓은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일 터이다.

  물론 우리가 배웠던 윤리학 책을 조금 더 길고 재미있게 늘여 놓은 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철학의 에스프레소>라는 책으로는 사실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철학자는 지루하고, 어떤 철학자는 뭘 저런 고민을 평생토록이나 했나 싶기도 하다. 철학 전공자나 깊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세계지도처럼 사상사의 지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잘 짜여진 내용일 수도 있지만, 초보자의 눈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따로 놀고 있어 아무리 두 눈을 부릅떠 봐도 보이는 것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한 가지 주제를 놓고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현대 철학자들이 그 고민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나를 살펴볼 수 있는 그런 구성이었으면 조금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가령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혹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가 보는 사물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은 일치하는가?’ 또는 조금 더 실용적으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가는 필요한가?’ 같은 물음들을 철학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플라톤은 민주정을 두 번째로 나쁜 정치체로 폄하했고, 스피노자는 ‘대중은 공포에 떨지 않을 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발언을 했고(그렇다고 스피노자가 인민주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민주주의를 반대했다고 하고, 지금 현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탈출하기 위한 해법으로서 민주주의가 지켜져야 할 가치인지 과감히 버려야 할 장애물인지에 대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도 자본주의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1%대 99%의 대결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를 떼어 내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자유에서 민주주의를 분리해 내면 될 것인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분리 불가능성을 주장해야 할 것인지 등등의 문제가 사실 우리 눈앞에 있다. 거창한 담론 같지만 당장 내년에 닥친 두 번의 선거와 이 문제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선거 혹은 대의제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이다. 투표에 의한 선거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의심스럽다. 국민이 뽑은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국민 99%의 뜻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뽑기는 했지만 혹은 뽑기도 싫어서 투표도 안했지만, 어쨌든 국회의원들은 그저 국회의원들이고 시쳇말로 우리 아랫것들과는 다른 윗것들일 뿐이라고 생각하고들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민주권’이 의미하는 우리들의 권리는 어떻게 국가 속에서 제대로 반영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 스스로의 이익의 관점에서 그리고 나의 투표 행위가 갖는 의미의 측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이런 고민은 이제 와서 불쑥 인류에게 닥친 문제는 아니다. 그리스 때부터 이런 고민은 계속되어 왔다. 플라톤의 고민은 형이상학적인 이데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어떤 국가 형태가 가장 훌륭한 형태인가에 대해 집중되어 있다. 그의 <국가(政體)> 완역판은 7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아직 읽어 보지는 않았다. 주문만 했다.;;)

  나는 소위 ‘철학’ 이란 것을 지극히 우연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체계도 없고 계보도 없이 중구난방 읽어 오고 있다. 소설도 아닌데, 밥 먹고 사는 일과 아무 관련도 없는데, 누가 읽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틈틈이 꾸준히 읽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의 핏줄인 탓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집안 살림은 굳이 외면하시고 논어, 맹자, 주역 같은 것을 혼자 방에 앉아서 오랫동안 읽으며 사셨다. 아버지는 가끔 주역에는 우주의 모든 법칙이 있다고 하셨지만 나는 전혀 믿지 않았다.), 철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형이상학이나 관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 우리 삶의 조건, 사회가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방식과 너무너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 무슨 말인지 무지하게 어려워서 욕을 절로 내뱉으며 읽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만한 소설이나 어떤 놀이보다도 이 철학 책 읽기가 나는 재미있다. 그리고 읽다 보면 이상하게 끌리는 철학자들이 있다. 문장이 매혹적이어서 혹은 발상이 발칙해서, 반전이 놀라와서 등등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그의 사상에 이끌려 이 책 저 책을 찾아 읽게 되는데, 가만히 읽다 보면 그가 말하는 생각들은 대부분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그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 들어있다. 이미 잊혀진 철학자를 다시 불러내어 자신의 철학 체계에 발판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은 또 늘 싸운다. 자신이 불러 온 철학자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비판을 다시 비판하고, 서로 네가 오독했네, 내가 제대로 이해했네, 지지고 볶으며 때로는 절교하고, 인신공격도 해가면 피 터지게 싸우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른다. 인지상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의 말이 맞거니 싶지만, 그걸 또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 이제는 그들이 오독이네 뭐네 하는 그 원 철학자의 책을 읽고 싶어진다. 물론 너무 어렵다. 철학자들끼리도 잘못 읽었네, 아니네 하는데 내가 그걸 직접 읽는다고 어떻게 제대로 읽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또 그걸 꾸역꾸역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쩔 것인가.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칸트도 흘끔거리고 헤겔도 뒤적이고 라깡의 세미나도 찾아보고, 뭐 그런 욕심을 내고 만다.

  사실 누구 말이 맞는가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단 생각을 요즘에 한다. 철학자들이 과거의 철학자들을 불러내는 이유는 그 과거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 과거의 철학자 자신이 생각한 것과 온전히 일치하게 읽어 내려는 예의바른 후배의 가상한 태도를 견지하기 위해서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사유에 체계를 세우기 위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다시 그려 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얼짱 각도라는 것도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얼굴도 보는 방향에 따라 다 다른 것인데, 한 사람의 사상이라고 해서 관점에 따라 왜 다르게 읽혀지지 않겠는가. 어떤 관점에서 보았건 그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서 모순되지 않고 논리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올바른 독해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어디 영어나 한자뿐이겠는가?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마련이어서 어제 독서 모임의 후기를 쓰려다 후기는 쓰지 못하고, 떠오르는 생각의 꼬리를 따라 가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았다. 철학 책 읽기도 이와 같아서 아마도 <철학의 에스프레소>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의 첫 번째 꼬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니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가장 멋지게 보이는 철학자는 니체였다. 역시 위험한 남자는 매력적인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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