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2월 29일 쓴 글입니다.

 

 

  지난 여름 나는 처음으로 변비가 주는 극심한 고통을 체험했다. 위장약 때문이었다. 평소 변이 묽은 편이라 처음에는 변이 뭉쳐지는 것이 오히려 위가 정상화되는 신호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이 넘어가자 너무 단단하게 뭉쳐진 변이 좁은 문(항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도 커질 대로 커진 덩치를 밀어내지 못했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피를 보고도 모자라 관장약을 넣고 참 별별 짓을 다했다. 급기야 병원에 가려했지만 관장을 해주는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조짐이 좋지 않으면 더러울 것 같은 음식도 가끔 먹는다. 위가 나빠서 맵고 짠 음식은 물론이고 밀가루 음식도 먹지 않았더니 꼭 약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순한 음식이 장을 강하게 자극하지 못하여 장의 운동능력이 떨어진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요구르트나 채소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자장면 같은 약간 비위생적일 것 같은 음식들이 장을 더 잘 자극한다는 것을 먹어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위장관이라는 것도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순한 것, 자극적인 것 등이 적당히 섞여야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강렬한 체험이었다.

 

 

  “빵꾸똥꾸‘ 해리는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난리를 치른다. 엄마 현경이 야채를 먹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해리가 찾는 것은 오로지 갈비다. 해리는 갈비만 먹을 뿐 아니라 그 갈비는 해리만 먹어야 한다. 신애가 한 대라도 손을 대면 내꺼야를 외치며 사납게 빼앗는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해리는 갈비를 포기하지 않는다. 날마다 먹어도 또 먹어야 하고 모든 갈비는 해리의 것이어야만 한다. 갈비뿐만이 아니다. 신애가 조금이라도 먹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어김없이 해리가 빼앗아 버린다. 심지어는 해리가 버린 것조차 신애가 가지려하면 도로 빼앗아 버린다. 아빠가 분홍색 가방을 사오자 해리는 쓰고 있던 노란색 가방을 버리지만, 버린 노란색 가방을 신애가 매고 나오자 기어이 도로 빼앗아 버리고 만다. 그래서 신애는 보석이 쓰던 서류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그것도 모자라 해리는 우유에 금을 그어 두고 자기가 없는 사이 신애가 몰래 먹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는다. 해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빵꾸똥꾸”와 “내꺼야”다. 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빵꾸똥꾸”이고 해리네 집에 있는 모든 것은 “내꺼야”다.

  해리는 미움 받을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해리를 미워하기 보다는 해리를 보며 더 많이 웃는다. 해리역의 진지희가 입이 딱 벌어지게 연기를 잘 하기도 하지만, 해리를 통해 보여 지는 ‘자본의 욕심’에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실소이며, 그 풍자가 주는 웃음이다. 항문이 찢어져도 혼자만 먹으려는 그 욕심, 행여나 모르는 새 누가 먹을까 우유에 금을 그어 놓는 그 그악함. 해리는 원색적으로 나쁜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해리를 미워하는 만큼 측은해한다. 혼자 다 가졌지만 늘 혼자인 해리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가족들 중 누구도 해리와 놀아주지 않고 살갑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해리는 종이컵과 빈 박스만으로도 재미있는 신애와 세경을 부러워하고 부러운 만큼 심술을 부린다. 종이컵도 빼앗고 빈 박스도 빼앗아 버린다. 그러나 해리에게는 그 빈 박스로 손님 놀이를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 그래도 해리는 그 박스를 “내꺼야”로 만들고 만다.

 

  해리의 “빵꾸똥꾸”는 징계를 받았다. 할아버지 친구와 엄마 친구에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에게 심히 마음이 상하신 한나라당 어르신들이 어린이들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미루어 짐작컨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해리를 징계했다. 이후 한 동안 해리는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로 부르지 못했지만 우리의 김PD님께서 그 억압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대형 “빵꾸똥꾸”를 목놓아 외치게 해 주셨다.(지금 해리가 뭐라고 외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 때 보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한나라당 꼰대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마도 “빵꾸똥꾸”라는 버릇없는 비속어가 아닐 것이다. 해리가 보여주는 자본의 욕망. 먹기만 하고 내놓지는 못하는 무지막지만 자본의 탐욕. 전부 다 “내꺼야”여야 직성이 풀리는 소유욕. 가난한 자의 마지막 속옷까지 벗겨야 속 시원한 자본의 이기심.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변비현상. 해리가 보여주는 분칠하지 않은 자본의 맨얼굴에 심히 상하신 심기가 만만한 “빵꾸똥꾸”를 향해 터진 것일 것이다.

  그래봤자 어짜피 우리나라의 자본은 별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마트 피자를 거쳐 통큰 치킨에 와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물론 분칠을 원하지 않는 자본의 얼굴을 솔직하다고해야할까 뻔뻔하다고 해야할까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진 않았다. 논쟁은 5000원짜리 치킨의 가능성과 체인점의 폭리 여부로 흘러갔다.

  SSM과 이마트 피자, 통큰 치킨은 신애의 갈비 한 대마져 빼앗아버리는 해리의 탐욕이다.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도 허용하지 않는 해리에게 지친 신애는 급기야 해리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절교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던 해리는 신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친구인 적이 없으니 절교할 것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혼자가 된 해리는 자신 보다 덩치가 더 큰 남자 아이들에게 타이거 마스크도 빼앗기고 얻어 터져서 학원에 가는 것도 무서워하게 된다.

  아직 우리의 자본은 혼자가 되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본 보다 더 무서운 자본은 없다는 것인지 주저 없이 신애의 갈비 한 대를 빼앗고도 의기양양하다. 그런데 문제는 순환이다. 변비가 계속되면, 똥구멍이 궁극적으로 막히면 죽을 수밖에 없다. 동네 슈퍼, 피자가게, 치킨가게가 모두 문 닫고 나면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그 많은 물건, 삼성과 LG의 그 많은 제품들은 누가 사 줄 수 있을까. 88만원 세대가 취직을 못하고 가게도 못하고 계속 88만원 알바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스마트폰을 언제까지 사 줄 수 있을까?

  시크릿가든의 김주원이 운영하는 백화점은 VVIP 라운지를 운영한다. 일 년에 1억(?) 이상 팔아 주는 VVIP 1명이 일 년에 100만원 쇼핑하는 떨거지 100명보다 낫다는 계산이다. 계산상으로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틀어 한번 계산해 보면 어떨까? 그 백화점 하나가 아니라 전체 우리나라 쇼핑 시장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면? 그러면 일 년에 1억 구매자의 총 구매량이 많을까, 아니면 100만원 떨거지들의 총 구매량이 많을까? 떨거지들이 모두 사라지고 VVIP들만 구매하는 세상이 온다면 김주원의 백화점은 나날이 번창하고 행복할까? VIP니 VVIP니 하는 발상은 마케팅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피라미드의 아래쪽을 받치고 있는 것은 수많은 떨거지들이다. 이 떨거지들이 모두 구매력을 잃고 사라진다고 해도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그렇게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날 수 있을까? 명퇴해서 마지막으로 한다는 동네 치킨집 가족들이 그 떨거지인데, 동네 슈퍼 아줌마가 그 떨거지인데, 그것들이 다 망해서 떨거지들이 다 죽어버리면 도대체 그 백화점은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잉여가치는 원칙적으로 총자본의 관점에서 자신이 생산한 것을 다시 사는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가라타니 고진이 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맑스는 이렇게 조금 더 어렵게 말했다. “ 자본주의를 주인-노예 관계와 구별시켜 주는 점은 노동자가 교환가치의 소비자이자 소유자인 자신과 대면한다는 점, 그리고 화폐 소유자의 형태로, 화폐의 형식 안에서 그는 순환 과정의 분명한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무한히 많은 중심들 중 그 중심은 노동자로서의 특성이 소멸되는 중심이다. ”

  아무리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가 곧 노동자이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순환되는 돈이 없이는 노동자가 소비자로서 구매력을 가질 수 없으므로 자본 역시 아무런 잉여 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순환하지 못한다.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창조된다. 그러나 거기서 생산된 가치는 잠재적인 것일 뿐이고 상품이 판매되어서 M-C-M`의 순환이 완결될 때만 가치로 현실화 된다”

  빌 게이츠 같은 거대 자본가들의 기부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올 여름에 읽은 어떤 책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자선 행위-공익을 위한 그들의 엄청난 기부-는 단지 개인의 특이한 성격에서 나온 게 아니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그것은 자본주의적 순환의 논리적 정점이며, 엄격히 경제적 관점에서도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기부행위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치명적인 덫에 빠지지 않고 진정으로 필요한 빈자에게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균형을 재조정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 덧붙이면 그것은 균형을 재확립하고 주권적 소비를 통해 티모스(용기)를 주장하는 전쟁과 같은 또 다른 방식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설은 우리가 처한 슬픈 곤경을 암시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스스로 재생산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 재생산 사이클을 지탱하기 위한 경제 외적 자선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골치 아픈(나는 경제는 늘 골치 아프다;;) 이야기까지는 들어가지 않더라도, 일단 빌 게이츠의 자선 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을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의 논리적, 필연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최종 소비를 통하여 생산품의 가치를 현실화시켜 줄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입에 달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우리에게는 그런 논리를 갖추고 있는 자본가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의 자본은 여덟 살짜리 해리처럼 천진한 맨 얼굴을 하고 있다. 내일 똥구멍이 막히더라도 오늘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치우겠다는 천진한 탐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천진함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나는 아직 별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지만,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도 모른다. 원희룡이나 남경필 보다 때로는 보온 상수가 고마운 것처럼.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 만큼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두울 때 새벽이 온다는 말처럼.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해리는 신애와 함께 성장한다. 산골 소녀 신애는 해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질서를 배우며 쪼그라들고 혹은 성장하고, 해리는 신애와 더불어 함께 나누는 기쁨을 배운다. 어쩌면 우리 소박한 서민들의 꿈 역시 그러할지도 모른다. 부자들이 조금 더 나누어 주면, 일자리를 조금 더 늘려 주면, 서민의 상권을 보호해 주면, 비정규직 정규직 차별을 없애주면, 재개발로 쫒아내지 않으면.... 거꾸로 서민들이 쟁취해 나갈 수 있다면. 일 자리를 지키고, 상권을 지키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고, 교육의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안에서의 가망 없는 몸짓과 비굴한 콩고물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자기 터전을 뒤엎을 준비가 못된 (뒤엎지 않으려고 하는) 서민들의 꿈은 해리처럼 그렇게 우리의 자본이 성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낱 시트콤의 몽상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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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1일 쓴 글입니다.

 

 

오늘은 호수공원을 산책할까 합니다.

호수공원의 가을은 참 좋습니다.

가을이야 어디라도 안 좋은 곳이 있겠습니까만,

두어 시간을 물과 나무와 하늘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 작은 도시들마다 모두 있는 것은 아니니 조금은 자랑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싶습니다.

저희 집은 호수공원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아파트 입구를 나와서 똑바로 걸어 내려가면 호수공원 제1 주차장이 나옵니다.

여기는 고양시 노인 종합복지관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길에서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 앞에 네댓 분의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십니다.

할아버지가 혼자 할머니들 틈에 끼어 있기가 부끄러우셨는지 어쨌는지 신호를 무시하고 간간이 차가 지나는 차로로 앞질러 걸어가십니다.

뒤에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이 화를 내십니다.

“저러니까 노인들이 욕을 먹지. 저런 영감 때문에 우리가 다 욕을 먹어!”

“사고라도 나면 어쩌누.”

“글쎄 말이야.”

할머니들이 제 각각 거드십니다.

혀를 끌끌 차는 할머니들의 입성이 은근 품위 있고 조금은 화려해 보이기도 합니다.

고급스런 질감에 살짝살짝 들어간 반짝이 실과 반짝거리는 단추를 보니 백화점의 누구누구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의 옷은 보기보다 굉장히 비쌉니다.

지난 추석에 엄마와 함께 백화점 구경에 나섰는데 매장에 정상가격으로 팔리는 옷들은 죄다 7~80만원이 넘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재고로 팔아 치우는 블라우스 하나를 선물해 드렸습니다.

엄마는 굳이 본인이 사겠다고 하셨지만, 딸이 백수로 놀고 있다고 용돈도 받지 않으시니 7만원하는 재고라도 사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엄마는 저 보다도 옷이 많습니다.

그러고도 늘 틈만 나면 쇼핑을 하러 다니십니다.

물론 엄마도 정상가격에 파는 옷들은 꿈도 못 꾸지만, 친구 분들과 쇼핑을 다녀오시고 나면 가끔씩 부럽기도 한가 봅니다.

누구는 닥스를 누구는 버버리를 샀다는 말을 지나가듯 흘리시는데 저는 못 들은 척 합니다.

제 눈에는 노인이 아무리 잘 차려 입어봤자 노인이지 싶은데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엄마도 노인대학이나 모임에 가실 때는 한껏 모양을 냅니다.

그러면서도 함께 어울리는 할머니들의 수준에 비하면 턱도 없다고 하십니다.

너무 추레하게 하고 나가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염려하십니다.

사실 저희 엄마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도 영리하신 편이라 혼자서 영어 알파벳도 깨쳐 영어 간판도 더듬거리며 읽습니다.

엄마는 늘 배우기만 좀 더 배웠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좀 많이 배운 할머니들하고 어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시지요.

엄마 친구분들이 엄마를 국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넌지시 자랑도 하십니다.

학력을 속이기라도 한 걸까요? ㅎㅎ

 

일산은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물론 분당도 그렇다고 합니다만 사실, 수준에 차이가 있습니다.

분당이 강남이라면, 일산은 강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강남에 집을 가지기 힘든 것처럼, 부자 노인이 아니면 분당에 집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산에는 진짜 노인들이 많습니다.

일산이 신도시다 보니 토박이 빈민층은 없습니다만, 아파트 평수의 차이만큼이나 여러 계층의 노인들이 살고 계십니다.

진주 목걸이와 알 굵은 반지를 하고 다니는 부자 할머니들이 있는가하면,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의 작은 공원에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장기를 두며 소주를 마시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그 한쪽 옆으로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쪽파를 까서 파는 할머니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이 분들은 대체로 끼리끼리 노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아이들도 아파트 평수대로 노는 세상이라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젊은이들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냥 그렇게들 사실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늙으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일까요?

어쩌면 하루 종일 도라지를 까고 마늘을 까서 용돈을 버는 할머니들이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고 복지관에 앉아 한나라당 성향의 교수가 주입시키는 좌파 빨갱이 교육을 듣는 할머니들 보다 더 건강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저는 마음이 조금 언짢습니다.

찬바람이 불어도 쪼그리고 앉아서 쪽파를 다듬는 갈라터진 손과 알 굵은 반지를 낀 고운 손을 번갈아가며 마주칠 때면 마음이 오소소합니다.

좌판을 벌인 할머니는 욕도 잘하고 소리도 잘 지르십니다.

굵은 반지를 낀 할머니는 생전 들어보지도, 해보지도 못한 욕인지도 모릅니다.

한 줌만 더 달라는 손님들과 매일 승강이를 하는 통에 인상도 조금 찌그러져있습니다.

얼굴 한번 찌푸린 적 없어 보이시는 품위 있는 할머니는 인상도 온화합니다.

보통 나이를 먹으면 제 얼굴에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합니다.

쪽파를 파는 할머니는 한평생 무얼 그리 잘못하신 걸까요?

값비싼 반지를 낀 할머니는 얼마나 훌륭하게 사셨길래 저리도 고우신 걸까요?

얼굴이 정말로 그 사람을 말해 줄 수 있는 걸까요?

그건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것과 다른 것일까요?

 

사람들은 동안을 참 좋아합니다.

동안이라고 하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누가 빈말이라도 새댁이라 불러 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동안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만큼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십시오.

하루 종일 햇볕 아래 일을 하는 농부가 동안일 수는 없습니다.

고생모르고 살고, 좋은 화장품을 쓰고, 정기적으로 피부 마사지를 받고, 노화 방지 식품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누구나 동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동안이란 경제적 여유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동안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타고난 행운일 뿐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나이를 먹은 만큼 나이 값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겠지요.

 

 

정작 호수공원에는 아직 발을 디디지도 못했는데 너무 오래 신호등 앞을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호를 몇 번이나 흘러 보냈을까요.... 이제 차로를 지나 호수공원 안으로 들어갑니다.

호수공원에 있는 인공 호수는 마치 조롱박으로 만든 바가지처럼 생겼습니다.

바가지의 물을 담는 넓은 부분이 커다란 호수라면 바가지의 손잡이 부분은 조그만 호수라고 할 수 있고, 그 둘을 잇는 좁다란 목 부분에 정자가 있는 작은 섬 같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리로 이어져 있지요.

설명이 복잡하고 요령부득이라고요?

하하... 맞습니다.

사실 하나의 호수가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요, 게다가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정작 호수의 모양은 조롱박 바가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바가지의 손잡이 부분이 반대쪽 끝에도 하나가 더 달려있는 모양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일테면 수능을 위해 조카에게 선물하는 기다란 엿을 생각해 보면요, 이걸 예쁜 포장지로 길다랗게 포장해 놓고는 양쪽 끄트머리를 리본으로 묶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리본 밖으로 튀어나온 포장지 가장자리가 양쪽 끝에 앙증맞게 보일 텐데요.

호수 모양이 대충 이것과 비슷합니다.

전체는 삼등분이 되는데, 가운데의 길고 큰 호수와 양쪽 끝의 작은 호수 이렇게 세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호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호수공원을 묘사하려고 하면서 조롱박 바가지를 먼저 떠올린 것은 왜일까요?

그건 제가 딱 조롱박 바가지만큼만 호숫가를 산책하기 때문입니다.

반대편 끝의 작은 호수 부분은 너무 멀어서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답니다.

그쪽의 호수는 사실 제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 눈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면 있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안내하는 호수공원은 사실 호수공원의 제대로 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여드리는 호수공원도 호수공원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제 아무리 발이 단단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호수공원을 샅샅이 훑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호수공원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제가 보았던 어떤 것을 그는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 불성실한 안내자의 산책길이 영 미덥지가 않으시다면, 고양시 홈페이지에서 살짝 복사한 아래 지도를 잠깐 보시는 것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호수 오른쪽 편으로 녹색으로 칠해진 작은 섬 같은 곳이 보이시나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산책길은 바로 그 섬의 오른쪽으로 이어진 작은 호수 길 입니다.

여기는 봄과 여름에는 그다지 볼품이 없는데, 딱 지금 이 가을에 가장 걷기 좋은 길입니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고, 이어진 풀밭에는 버드나무가 기다란 잎을 늘어뜨리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버드나무들은 하나같이 호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물을 조금이라도 더 빨아올리려는 걸까요? 아니면 햇볕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일까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네댓 시 무렵이면 호수는 부드러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넓은 돗자리를 깐 연인들이 드러누워서 책을 보거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그 자리로 제가 걸어 들어간다면 그 그림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이제 작은 섬을 통과해 큰 호숫가로 난 가로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정자 옆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호수공원 관리사무소 조끼를 입은 젊은 청년이 자전거 안장에 버티고 앉아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뻥튀기 한 보따리를 손에 쥔 초로의 남자가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며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네요.

“아저씨, 빨리 나가세요! 안 나가려면 그 뻥튀기 저 주시고요”

“아, 글쎄...”

“왜 말을 안 들으세요! 이건 제 일이예요. 아저씨 때문에 제가 왜 욕을 먹어야 해요! 나가시라니까요”

“뭐....”

 

호수공원은 제가 보기에도 참 관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굴러다니는 패트 병도 없고 그 흔한 과자 봉지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큰 행사가 있다거나 이런 때는 예외로 하고 평소의 산책길에 말입니다.

현장 학습 나온 유치원생, 멀리서 구경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 유모차 엄마들, 산책 나온 강아지들까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공원인데도 길바닥에 뒹구는 쓰레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잡상인도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으레 모여드는 김밥장사도 떡장사도 솜사탕장사도 뻥튀기장사도 아이스크림장사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저 자판기 안에 깔끔이 정돈되어 있습니다.

저 운수 나쁜 뻥튀기 아저씨는 호수공원 관리사무소의 이 빈틈없는 일 처리 능력을 몰랐던 것일까요.

저는 멀찌감치 서서 관리사무소 청년과 늙수그레한 아저씨의 일방적인 실랑이를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마치 비밀을 보아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호수공원이 이런 깨끗함을 유지해 온 비밀을 말입니다.

일산구의 주민들은 쓰레기가 없는 호수공원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더군요.

저 뻥튀기 아저씨는 이 호수공원에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니 말입니다.

저 역시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꼭 깨끗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 저는 어떤 찜찜함 속에서 그 자리를 비켜났습니다.

 

 

네, 저는 그냥 지나쳐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로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은행나무들이 줄 지어 있습니다.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은 아니지만 일산 신도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한 이십여 년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은 나무들입니다.

오늘은 벌써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많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아직은 짙푸른 나무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은행잎들은 노랗게 물들자 말자 떨어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떨어진 은행잎들은 발 아래로 밟히고, 무성했던 나무 가지는 잎을 잃으며 조금씩 여윈 팔을 드러냅니다.

마치 제 머리카락 같군요.

아침마다 저는 조금 우울합니다.

머리를 감을 때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시커멓게 뒤엉켜 있습니다.

이렇게 빠지다가는 곧 대머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엄마를 봐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여자라서 다행히 완전 대머리는 아니지만 앞머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 유전자를 타고 난 저 역시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 보다 먼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언니는 두피 마사지를 받고 여러 종류의 헤어 케어 제품을 씁니다만, 저는 그 보다는 간편한 방법을 쓰려고 합니다.

원래 제가 좀 게으릅니다.

그냥 웬만큼 빠지고 나면 가발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별로 좋지 않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척추분리증도 있고, 치아도 나쁘고, 위장도 약하고, 자궁도 좋지 않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부터 시달리고 있는 만성 두통도 아마 유전적 소인이 클 것입니다.

어떤 날은 이런 제가 너무 한심하고 우울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걸요.

이럴 땐 인간은 과연 평등한 것일까 의문이 듭니다.

평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요?

 

어쨌거나 평등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참 요즘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저는 정말이지 우리나라가 교육에 있어서만은 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시민운동이나 뭐 그런 것들을 하게 된다면 저는 무엇보다 평등한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대학까지 무상교육만 된다고 해도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 많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occupy' 사건 이후 세계의 금융자본주의가 어떤 위기를 맞게 될지, 어떤 대안 사회를 만들어 내게 될지, 이 엄중하고 역사적인 시기에 너무 소박해서 반동적인 소망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심정적으로 그렇습니다.

졸업도 못한 대학생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일 년을 휴학하고 알바를 해야 일 년 등록금을 벌 수 있는 이 현실은 진정으로 참혹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대학생들이 그 어처구니없는 거마대의 다단계 조직원이 될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저희 때만 해도, 과외해서 등록금에 하숙비와 용돈까지 벌어가며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뭐 그다지 공부를 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여하튼 졸업하고 취직하고 먹고 살만했습니다.

지금은 사회 체계 자체가 그런 것들마저 원천 봉쇄를 하고 있지만, 그런 사회를 눈 뜨고 용인한 저희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 많은 세대입니다.

 

 

저기 강아지 몇 마리가 보입니다.

단체로 산책을 나왔나 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만한 크기의 강아지들이 앙증맞은 옷을 입고 여기 저기 킁킁거립니다.

저렇게 조그마한 강아지들은 사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강아지가 아니라 개라고 불러야 할 만큼 나이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덩치 하는 복실이나 누렁이와 함께 자라나서 그런지 한 주먹도 안 되보이는 조그만 강아지를 어른 개라고 부르기는 차마 이상합니다.

호수공원에는 심심찮게 덩치 큰 개들도 보입니다.

작은 강아지 열 댓 마리 보다 더 덩치가 커 보이는 듬직하고 잘생긴 놈이 나타나면 산책하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놈에게 쏠립니다.

옛날 마당에서 기르던 똥개나 복실이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혈통이 있어 뵈는 놈들입니다.

이놈들은 거추장스런 치장도 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그대로 아름다운 털과 장대한 기골을 뽐냅니다.

작은 강아지들이 맞춰 입은 형형색색의 때때옷은 그것들에 비하면 누더기처럼 보입니다.

단연 호수공원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 아무나 기를 수 있는 개는 아닐 것입니다.

호수공원에는 사람들만큼이나 개들에게도 빈부의 격차가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유모차에도 있습니다.

한 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들은 일단 차체 자체가 매우 높습니다.

보통의 유모차에 비해 수십 센티는 높아 보이는 곳에 덩그렇게 앉아 있는 아기들은 마치 세상을 굽어보는 듯합니다.

주로 바퀴는 세 개이고, 네 개일 경우도 앞바퀴 보다 뒷바퀴가 훨씬 튼튼하고 커 보입니다.

낮은 유모차들 사이에 키 큰 유모차는 마치 벤츠나 BMW 같은 위용을 자랑합니다.

유모차만큼이나 키가 크고 늘씬한 젊은 엄마는 까만 썬글라스에 눈을 가린 채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높은 유모차의 아이가 자라나면 멋진 시베리안 허스키를 기르지 않을까요, 그리고 벤츠를 몰겠군요, 세월이 흘러 곱게 늙어 갈 때쯤이면 우아한 목걸이에 알 굵은 반지를 하고 노인 대학을 드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편의점 알바도, 거마대 다단계도 해 본적이 없겠지요.

제가 너무 삐딱한가요?

가을의 낭만이 넘쳐흐르는 이 아름다운 공원에서 빈부 격차 같은 우중충한 생각만 하고 있다고요?

 

 

아, 이런 저런 생각을 떨치고 이제 메타세콰이어 길을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전에 한석규가 “핸드폰은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든가 하면서 이동통신 광고를 찍던 그 메타세콰이어 길 만큼 울울창창 멋지진 않습니다만, 나름대로 풍취가 있습니다.

특히 이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호수공원은 호수를 끼고 맨 안쪽의 길과 중간 길 그리고 맨 바깥쪽의 길이 겹겹이 나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는 길이 두 겹으로 끊기기도 하지만 여하튼 같은 방향으로 돌아도 이 길, 저 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 중 메타세콰이어 길은 맨 바깥에 있으면서 바닥도 흙길 그대로여서 삼림욕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 요즘 SBS 수목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십니까?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재밌습니다.

송중기가 청년 세종을 멋지게 해냈지만, 연기하면 또 뒤지지 않는 한석규가 훌륭하게 세종역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저건 뭐지요?

메타세콰이어 길로 접어들기 전, 가로등에 달려 있는 저 그림을 한 번 보시지요.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지나갑니다.

 

 

 

가로등을 따라 이렇게 그림들이 주~욱 걸려 있습니다.

주로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아니 이게 왠일입니까?

‘나는 꼬추다’!!

왼쪽 그림은 방향이 거꾸로 인데 ‘나는 꼬치다’ 이네요.

'나는 XX다' 유형의 진술을 보면 저는 먼저 ‘나는 꼼수다’가 생각납니다.

‘나는 꼼수다’와 ‘나는 가수다’는 누가 원조이고 누가 패러디일까요?

역시 패러디하면 딴지 김어준 선생이겠죠.

‘나는 가수다’는 3월 초에, ‘나는 가수다’는 4월 말에 시작했습니다.

저도 ‘나는 가수다’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꼬추다’에는 ‘나는 꼼수다’의 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단지 ‘ㄲ’ 돌림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는 꼬추다’가 불러 오는 웃음은 다분히 그것의 외설스러움에 있겠지요.

‘나는 꼼수다’에도 어떤 외설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감히 가카를 상대로 온갖 치부를 들쳐 내며 낄낄거리는 악동들의 그 외설스러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나는 남근이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남근은 지배의 상징이지만, 사실 그 남근은 거세당해 있습니다.

그림 속의 꼬추도 구멍이 뚫려 있군요.

그 구멍을 누군가의 얼굴이 가리고 있습니다.

마치 완전한 꼬추인양 말입니다.

저게 우리의 가카일까요?

가카의 나라는 이미 가카의 그 야비한 얼굴로는 다 메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남근, 거세, 빗금친 대타자....이런 것들은 까다로운 개념인데 저는 어느 책에서 읽은 그런 개념들을 그 개념의 정의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연상해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어려운 말을 쓰면서 금방 들통 날 얄팍한 지식을 뽐내는 것이 귀여워 보이기에는 제가 너무 늙어 버린 것이 맞겠지만, 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그냥 즈려밟고 가시오길 바라옵니다.

 

 

이제 다리가 아픕니다.

배도 슬슬 고프네요.

오늘은 저기 굴다리를 지나 애수교를 돌아오기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겠습니다.

갈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작은 호숫가 풍경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길이라도 걷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길도 공원 안쪽으로 들어 올 때 보다는 나갈 때의 경치가 더 운치 있습니다.

특히 오후 서너 시 경이라면 말입니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는 아름답지만 왠지 헛헛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느낌이 저는 언제나 좋습니다.

 

저쪽 잔디밭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이컵에 차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거나 따뜻함이 그리웠던 사람들이 종이컵을 하나씩 건네받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세요?”

“성당 다녀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아하, 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중이군요.

가만, 그런데 왜 단속하는 관리사무소 직원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뻥튀기는 팔면 안 되고, 차는 팔아도 된다는 걸까요?

제 눈에는 공짜로 나눠주는 저 종이컵이 전혀 공짜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뻥튀기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가의 상품인걸요.

교회를 사고판다는 것, 교인의 수에 따라 권리금이 책정된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닙니다.

저분들이 하고 있는 것이 선교인지, 장사인지 저는 정말 의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이제 우리나라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북한의 삼대 세습이 어이없는 봉건적 작태라면, 대를 이어 교회를 물려주는 세습 목사들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훌륭한 소명의식인가요?

대를 물리는 장인 정신인가요?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이 혼란하고 어려운 세상에 몸소 실천해 보여줄 때, 우리는 기꺼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지 않을까요...

 

 

이제 다시 제1 주차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늘의 산책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호수공원 근처의 아람누리 도서관도 보여 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합니다.

아마 어제 늦은 밤까지 이탈리아의 어느 기호학자의 책을 읽느라고 잠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저녁에는 A4 10매를 채워야 하는 과제물도 작성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안내가 별로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고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다시 정신 맑은 날이 오면 정말 멋지게 호수공원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10월 말이나 11월 초까지는 호수공원이 가을의 정취를 잘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단풍은 짙어가겠지만, 그 만큼 쌓이는 낙엽도 늘어 가고, 더 깊고 더 쓸쓸한 호수공원의 가을이 되겠지요.

참 언제라도 직접 호수공원을 거닐어 보고 싶으시다면 살짝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길동무도 되어 드리고, 차도 한 잔 대접해 드리지요.

산적 같은 아저씨가 직접 볶아 만든 맛있는 커피가 있는 따뜻한 찻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커피가 싫으시다면 아저씨가 직접 만든 생강차도 좋고 레몬차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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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5일, 서민 교수님의 글을 읽고 쓴 글입니다.

 

 

  서민 교수님이 살짝 곤경을 치르고 있다. 6월19일에 올린 "연아야, 미안해”란 글 때문이다. 민감한 시사 문제를 풍자와 해학으로 돌파하는 평소 교수님의 글은 그 스타일 탓인지, 서민적인 너무나 서민적인 생김새 탓인지, 우호적인 댓글들로 훈훈한 편인데, 이번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매우 비판적인 독자와 한 치도 비껴 설 의사가 없는 교수님 간의 팽팽한 댓글 논쟁이 붙었다. 물론 서민 교수님의 글은 황상민 교수의 소위 “김연아 교생 실습 쇼, 발언”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목으로 짐작하겠지만, 서민 교수님은 시쳇말로 김연아 편이다. 본문 자체의 내용은 단순하다. 길지 않은 글의 반 이상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우리 김연아에 대한 추억과 헌사다. 나머지 반은 감히 그런 김연아를 비판하는 몰염치한 자들에 대한 개탄이다. 단순화시키면, 염치가 있는 사람이면 김연아가 뭘 하건 예쁘게 봐줘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금메달을 땀으로써 국민들이 원하는 걸 다 해 줬기 때문이다.

  서민 교수님은 댓글에 답글 달기를 좋아한다. 심지어는 자작 댓글을 만들어 답글다는 놀이도 즐긴다. 이 글에 실망했다거나, 황교수의 문제제기를 오해하고 있다거나 하는 댓글에도 일일이 답글을 달았는데, 논쟁의 와중에 교수님은 살짝 방향을 틀어서, 김연아를 까는 것은 자유이나 “사실 관계를 확인”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까는 것에 대해 자신은 김연아를 방어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전체적인 느낌은 그런 형식적 논리 보다는 ‘배은망덕하게도 우리 연아를...’에 가깝다. 심지어는 김연아가 열심히 공부하는 대신 금메달을 못 땄으면 어떻게 되었겠냐는 협박성 발언도 한다. 약간 흥분하셨는지, 어떤 답글에서는 대학 수업 자체가 꼭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만큼 훌륭하거나 유익한 것도 아니란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반 발짝 더 나간 것 같아 위험스럽기도 하다.

  나는 김연아를 별스럽게 좋아하지 않는다. 김연아 보다는 서민 교수님을 훨씬 좋아한다. 물론 그의 글, 콕 집어 말하면, ‘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 에 올라오는 의뭉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글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한 번도 교수님이 좋아하는 댓글 놀이에 동참한 적도 없으면서, 다분히 흥분 상태에서 쓴 듯한 글을 물고 늘어진다면 참으로 ‘염치’가 없는 짓일 것이다. 사실 교수님의 글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수고롭게 반대할 만큼 김연아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김연아를 보면 왠지 불편한 최근의 마음이 김연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여러 가지 현상과 얽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그걸 좀 정리해 보고 싶었다.

 

 

한동안 뜸했던 김연아 CF가 평창 동계올림픽 선정 이후에 다시 TV를 점령한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라도 한 편 보려면 김연아 광고 몇 편을 연속해서 보아야 할 때도 있다.(그래도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계약이 끝난 걸까..) 처음엔 살짝 짜증이 났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나오는데, 머리 돌아가는 광고주라면 왜 거액을 들일까 싶었다. 정작 제품은 보이지도 않고, ‘또 김연아네’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뭐 그건 오지랖 넓은 참견질이고, 보는 입장에서는 똑 같은 얼굴을 되풀이 보는 것이 지겹다. 천하의 장동건이라 해도 한꺼번에 이 드라마 저 드라마에서 바람둥이로 나왔다가 도망자로 나왔다가 경찰로 나왔다가 그러면 헷갈려서라도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다. 혼자 다 헤쳐 먹어라! 는 욕설도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서민교수님 글에 달린 댓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김연아가 공격당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인데 ‘은퇴와 CF’ 다. 나도 나름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로 김연아를 편드는 사람들은, CF에 대한 반감을 단순히,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심보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근거 없는 상상이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대한 일종의 사례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평창의 땅 값과 개발권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에 의하면, 올림픽이 유치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기업들이 있다. 올림픽 유치 활동의 핵심인물인 김연아는 그들에게 당연히 매우 고마운 존재다. 인지상정이든 뭐든 갑자기 쏟아진 김연아 광고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다. 나도 Product Manager란 명목으로 광고 작업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데, 내가 광고주라면 김연아는 그다지 매력적인 모델은 아니다. 그렇게 많은 광고에 마구잡이로 나오는 모델이라면, 광고를 통해 판촉 되는 것이 제품이라기보다는 김연아 자신의 명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기업들이 모두 모델 선호도 조사 따위, 제한된 통계 값에 눈멀었다면 하나마나한 생각이지만 말이다.

 

 

  여기엔 또한 평창 동계올림픽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얽혀있기도 하다. 나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그다지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6년 아시안 게임이래, 그리고 지자체 시행 이래 우후죽순으로 개최되고 있는 국제 행사는 대부분 지자체에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수 조원 경제 효과라느니, 흑자라느니 예측은 무성했지만 실제로 그런 이익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흑자는 고사하고 적자만 아니어도 감지덕지할 판이다. 그런데도 그런 행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금 열리고 있는 여수 엑스포도 시작부터 관객이 없다느니, 여수 상권은 더 죽었다느니, 말이 많다. 하지만 대규모 행사가 열리면 반드시 이득을 얻는 집단들이 있다. 땅값이 들썩이고, 개발권이 넘어가고, 하여튼 막대한 행사비용이 흘러 들어가는 곳이 있고 그들은 그만큼의 이익을 남긴다. 쪽박을 차는 것은 실패한 행사의 후폭풍에 시달려야 하는 지자체와 그 주민들이다.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모르던 86·88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평창, ‘Korea’ 했다고 해서, 무조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국민이 얼마나 되었을지 미지수다. 속을 대로 속아 봤고, 겪을 만큼 겪어 봤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의 시작이고, 이미 97년 이래 우리 국민들은 양극화와 빈곤화의 위협에 시달려 왔다. 잔치판 벌여 놓고 속없이 좋아할 여유도 없고, 그렇게 어수룩하지도 않다. 여차하면 뒤통수가 까일 판인데,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김연아는 그런 평창 올림픽을 상징한다. 게다가 유치가 끝나자마자 광고를 쏟아내면서 거액을 쓸어갔다. 말하자면 손익이 불확실한 국제 행사에 가장 눈에 띄는 이익을 챙긴 사람이 김연아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김연아 CF에 대한 반감에는 이런 맥락이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논거 없는 추론일 뿐이지만, 여론의 움직임은 다분히 감성적이다. 김연아든 어떤 스타든 그들의 거액의 몸값이 논리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사랑과 찬사가 감성적이듯, 가혹한 비난과 질책 역시 다분히 감성적일 수 있다. 스타는 어짜피 감성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다. 예능 프로에 나와서는 먹고, 입고, 노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팔면서, 갑자기 사생활을 침해한다고 징징거리면, 예컨대 상도가 아니다.

  왜 나만 갖고 그러냐는 항변도 우습긴 마찬가지다. 다들 하필 ‘나’를 갖고 칭찬할 땐 좋아하다가, 하필 ‘나’를 비판하면 억울해 한다. 전두환도 그랬고, 문대성도 그랬다. 그래서 하필 서민교수님이 다른 스포츠 스타들도 다 그런데 왜 하필 김연아만 갖고 그러냐고 할 때 정말 깜짝 놀랐다. 하필 김연아가 아니면, 하필 누구를 갖고 그래야 합리적일까. 그런 논리면 왜 하필 김연아만 광고를 찍는지, 똑 같이 금메달을 딴 다른 선수들도 있는데, 골고루 찍어야 공평하고 논리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많은 금메달리스트들 가운데 유독 김연아에게 더 감동을 받았다, 왜냐고? 대중문화 분석가나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건 논리보다 감성의 영역이다. 사랑은 원래 그렇다.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평소에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논란이 나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정작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구조이다. 김연아 CF 비판에는 분명히 이런 요소가 작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나는 배가 아픈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건 승자독식 구조에 대한 우리 정신이 앓는 무의식적 증상이다. 과민성대장증후군 같다고나 할까. 김연아 뿐 아니라 톱스타들의 광고료, 출연료 등은 상상을 초월한다. 드라마 1회 출연료가 수 천 만원을 가볍게 넘더니 억대에 이르렀다는 기사도 있다. 대신 제작진이나 엑스트라 일당은 알려진 대로 노동착취 수준이다. 이걸 당연한 걸로 보는 것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시각이다. 스타들이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물론 돈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이건 당최 주관적이어서 나는 그다지 기쁘지도 않다, 그래도 물건을 살 때마다 나는 이 갑부 스타들에게 돈을 뜯겨야 한다.), 스타들이 천정부지로 몸값을 올리면 올릴수록 최소한의 몫마저 빼앗겨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타만으로는 절대로 아무런 작품을 만들 수 없는 데도 말이다.

  승자독식에 대한 승인은 우리사회의 작동 원리기도 하다. 99%의 ‘occupy'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도 우리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졸 초봉을 보면 이런 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기업들의 대졸 초봉은 연봉 육천에 육박하는 곳부터 시작해서, 20대 상위 기업이 연봉 사천을 넘기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이 시대에 말이다. 일본과 비교해 보아도 우리나라 상위 대기업의 대졸 초봉은 터무니없이 높다고 한다. 반면에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걸 보면서 대기업은 역시 훌륭해 라고 하실 분은 없을 것이다. 자기 직원들에게 퍼다 주는 후한 임금이 결국 협력업체라고 불리는 중소기업들, 하청업체들을 쥐어짜서 챙긴 이익의 일부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리해고, 비정규직, 해외 외주 같은 방법들도 동원된다. 뭐 그렇다고 기술개발도 빼놓지는 말자.

  그런데 하청업체에 다니는 어떤 친구가 발주업체인 대기업의 신입사원 월급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고 하자. ‘갑’과 ‘을’로 만나서 업무를 함께 하는 사이라면, 같은 또래인 이 친구의 상대적 박탈감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비난받아야 하는가. 사촌이 땅 사면 배나 아파하는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인간으로? 이 친구가 해야 할 일은 다시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거나,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만드는 초인적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뿐인가. 아니면 닥치고 살거나.

  이럴 때 우리는 배가 아파야 한다. 증상이 있어야 병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통증은 일종의 구조신호다. 통증이 심해지기 전까지 우리는 뭔가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그런 상태를 겪기도 한다. 대졸 연봉 5,900만원 기사에 신경질도 나고, 이병헌 회당 출연료 1억에 입이 딱 벌어지기도 하고, 채널을 돌릴 때 마다 김연아가 노래하고 웃는 것이 짜증이 나기도 한다. 부럽기만 한 사람도 있고, 분노가 치솟는 사람도 있고,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대중의 즉자적인 감정에 정연한 논리를 요구한다면 그것이 더 무리한 발상이다. 분석하고 해석하고 논리를 만들고 여론을 이끄는 것은 지식인들, 정치인들, 소위 사회 지도층들이 해야 할 일이다. 서민교수님이 경향신문에 실린 김동률 교수의 에 분노하면서 “이 딴 글을 경향에서 실어줬다는 것...” 이란 답글을 달았는데, 나는 서민교수님의 이번 글도 좀 다른 의미에서 경향이 지면을 할애할 만한 생산적인 글인가에는 의문이 든다. 평소 서민교수님의 핵심을 찌르는 시론時論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보지 않은’ 황교수의 발언이 성급했는지는 몰라도, 사실이 놓치거나 심지어는 은폐하는 진실도 있기 마련이다. 까놓고 말하면 김연아의 교생 실습은 당연히 쇼다. 고대 재학 자체가 쇼인데, 빠지지 않고 실습을 했건 말건, 크게 보면 그건 쇼다. 고대 측 자체도 ‘보여주기’ 위해 김연아를 입학시켰고, 김연아 역시 자신에게든 대중에게든 ‘보여주기’ 위해 대학교에 이름을 걸었다. 그리고 언론 역시 ‘보여주기’ 위해 굳이 김연아의 교생실습을 대서특필했다. 모든 관계가 ‘보여주기’를 중심으로 엮여 있는데, 그것을 쇼라는 다소 선정적인 언어로 지칭했다고 뭐 그리 대수인지 모르겠다.

  이 논쟁을 단순히 쇼 발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리로만 한정하지 말고, 우리사회의 구조와 관련하여 지지자와 반대자의 관점을 분석하는 쪽으로 확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왕 서민교수님이 뛰어들었다면 말이다.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는 분이시니까. 그런데 내 생각에는 그런 냉철함을 찾기에는 서민교수님이 김연아를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다. 연아가 예쁜 것도 사실이고, 한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니, 이해해드릴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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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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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검색창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늘 ‘대출 중’ 이었다. 반납예정일을 기다리며 한 달 반가량을 노렸지만 어느 틈엔가 이 책은 또 대출되어 버렸다. 지쳐서, 사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그러자 또 요놈의 책이 도서관 서가에 떡하니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청춘이 예전에 달아나 버려서 그랬는지,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참 건성으로 보았다. 검색을 하기 위해 되풀이 책 제목을 두드리면서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청춘의 이 막막한 ‘우울함’에 한 번도 마음이 가닿지 않았다. 딱 386세대인 나는 이 우울한 88만원 세대와 한 번도 공감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그렇게 읽으려 했던 것은 우선 저자 한윤형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랄 수 있다. 이모팬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나는 그의 트윗을 팔로우하고, 그가 참여하는 윤여준의 팟캐스트를 듣고, 미디어스에 올라오는 그의 기사를 웬만하면 챙겨보는 팔로워, 말하자면 일종의 추종자이다. 저자 한윤형에 대해서는 안티조선운동사의 전설적인 소년논객 운운하는 소문들이 따라다녔고, 사실 나는 그의 어떤 아이디를 기억하기도 하지만, 최근에 일어났던 진중권의 블락사태 때문에 그를 주목하게 되었고, 트윗에 올라오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사실은 책 한권 선뜻 사기보다는 빌려보려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덤덤한 추종자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추종자들의 호기심에 딱 들어맞는 글이다. 똘똘한 소년이 어떻게 자라 이 암울한 시대의 우울한 청춘이 되었는지, 그 과정의 어떤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평범하달 수는 없지만, 이 개별적 청년의 삶은 그가 겪어 온 팍팍한 시대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몇 주 전에 가입한 주부독서회의 도서목록은 참 다채롭다. 7월 뿐 아니라 10월까지의 일정이 나와 있는데, 이중섭부터 네루다, 화폐전쟁까지 종횡무진이다. 그 중에<88만원 세대>도 있다. 나는 갓 들어 간 신참인 주제에 겁 없이 이의를 제기했다. <88만원 세대>가 절판 되었으니 책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저자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효용이 다 했다고 선언한 책을 굳이 지금 읽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다가, 책을 살 수 있다는 회장님의 한 마디에 GG했다. 사실 읽어서 나쁠 책도 아닐뿐더러 훌륭한 책이다. 괜히 아는 척 한 것인데, 거기엔 꼬인 마음이 있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우석훈은 자신이 의도한 변화가 20대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판을 선언했다. 우석훈은 <88만원 세대>를 읽은 20대가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기 바랐지만, 오히려 이 책을  핑계 삼아 행동하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학생시절, 몇몇 아이들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너희들은 수업을 들을 자격도 없다며 삐져서 문을 밀치고 나가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라 소리치던 일방적 권위주의의 변형이다.  이에 대해 공저자 박권일은 절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석훈의 주장은 책에 대한 과대평가이며, 책의 한계는 독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88만원 세대>는 2007년에 출판되었다. 우석훈의 절판 선언은 2012년에 있었으니, 우석훈은 고작 5년 만에 자신의 책에 대한 실천적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분기를 폭발한 것이다. 어디서 그런 자만심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책 한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을 품을 수는 있지만, 책 한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고 성깔을 부리는 것은 광태에 가깝다. 그것도 누구보다 청년세대를 잘 이해하는 것처럼 책을 썼던 저자가 말이다. 딱 386 세대인 저자 우석훈은 386세대와 88만원세대를 갈라놓으며, 88만원세대의 편에 서서 386세대를 비판했지만, 사실 우석훈의 태도는 딱, 그가 비판한 386세대의 그것과 같아 보인다. 이 개새끼들! 너희에겐 이 책이 과분해!! (물론 오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우석훈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아니라, 그 의미가 이렇게 읽힌다는 것이다. 세상이 하 흉흉하니 별 사족을 붙여야 한다.)

  내가 애먼 독서회의 목록을 두고 대들었던 사연은 대강 이러하다. 그래서 나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기다렸다. 내가 아는 88만원세대의 대표 논객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의 2부와 3부는 직접적으로 <88만원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 나는 <88만원 세대>가 독서회에서 토의될 때, 반드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함께 논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이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혼자라도 꼭 이 책에 대해 떠들어 볼 심산이다. <88만원세대>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세대론을 도입했다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88만원세대>에 의해 ‘대상화된’ 그 88만원세대의 <88만원세대>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올라간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p132’ 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내려가는 사회’의 ‘내려가는 청춘’ 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이다.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으나 그 투자를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20대는 부채감에 시달리며p285’  침묵한다. 그리고 보수로부터도 진보로부터도 공격당한다. ‘20대 개새끼론’과 ‘20대 책임론’이 그것이다.  20대의 부모 세대인 50대 이상은 “배가 처부른 젊은이들이 눈높이를 높여 취직을 안 해서 외국인 노동자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범죄율도 상승하고 청년 실업률이 늘어나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p283"며 ‘20대 책임론’을 제기한다. 이 시대 한국의 경제 문제가 20대의 처부른 배 때문이라는 비난이다. ‘20대 개새끼’의 첫 발화자는 나꼼수의 김용민이라고 한다. 그러니 ‘20대 책임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가카때문이다’와 기본적 태도에서 동일할 것이다. 이명박 이후 수구집권의 모든 책임을 20대 개새끼에 전가하는 태도다.

  「한쪽은 20대 책임론으로 경제의 문제를 전가하고, 다른 한쪽은 88만원 세대론으로 한국 정치의 문제를 전가하니 담론의 세계에서 20대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이 말들이 올바르다면 20대들은 한국 사회문제의 유일한 원인이며, 20대들만 개조하면 한국 사회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다. 20대를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정말로 그렇게 믿는지 묻고 싶다. 현실로 돌아오면 20대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인 아버지와 민주당 지지자인 삼촌들에게 “언제 취직하냐”는 압박마저 받고 있을 게다.p283」

 

  우석훈이 ‘20대 개새끼!’(라는 뜻을 표출했다는 것이지,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해버린 지금에야 우스워져버렸지만, 사실 <88만원세대>는 20대에 한국사회의 모든 책임을 묻는 <20대 책임론>과 <20대 개새끼론>에 대한 일종의 ‘방어 담론’ 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구조’를 갖춘 세대론이 아니었던가. 이에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 세대 담론에 맞서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호출하는 세대론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대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지만, 그 책임을 《88만원 세대》에 전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p176」

  <88만원 세대> 출간 5년, 계급이나 계층의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단순 치환해 버린 ‘세대 담론’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있어왔지만, <88만원 세대>론은 말하자면 천박한 세대론으로부터 20대를 옹호하고 주체화시키기 위한 고급 세대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론은 세대론이다. 저자들 또한 이런 문제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박권일은 저자들의 작업이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를 입힌다는 것”이었으나 “세대론에 집중하다 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 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 되었다고 아쉬워한다. (p176)」

  당의糖衣, 그 사탕발림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88만원 세대>는 그 덧입힌 옷이 내용의 전부인 양 인식되고 이용되어 왔다. 물론 이 당의 코팅은 이미 천유로 세대라는 유행어를 가진 유럽이나 일본에서 습득해온 선진국형 기술이다. 이 코팅 기술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저자 우석훈마저 20대 개새끼해버리고 말았으니(뜻이 그렇다고 ;;), 이 책에 대한 오해를 단순히 독자의 몫으로만 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착한 세대론이든 나쁜 세대론이든, 그것이 사회 구조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원인을 하나의 뚜렷한 적의 형상을 통해 은폐해 버린다는 것에 있다. 그 결과 저자들의 의도와 얼마만큼 부합하는지 모르겠지만, 386세대 전체는 20대에 의해 진짜로 나쁜 개새끼가 되어버렸다. 386이 욕을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20대는 자신의 문제를 편리하게 386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사회에 오히려 더 무관심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우석훈이 지금에 와서야 비난한 20대의 냉소는 사실 우석훈 자신이 386세대를 20대의 주적으로 던져 주었을 때 예견되었어야 마땅했는지 모른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386 주적’ 놀이의 엉뚱한 계승자가 바로 변희재라는 한윤형의 주장이다. 물론 변희재의 386세대와 젊은 세대 편가르기는 세대론이 아니라 ‘변형된 인종주의’라는 박권일의 지적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여하튼 《88만원 세대》의 백미로 꼽히는 서문을 통해 저자들은 ‘개념 없고 노력도 안 하면서 정치적 관심도 없는 되바라진 20대’와 ‘편하게 취업해서 운동 경력으로 꼰대질 하는 386세대’라는, 적대의 전선을 불타오르게 했다. 변희재류가 여기에 꼬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는 20대 청춘들에게 덧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겨 냈다. 그러나 그것은 ‘묵시론적인 예언’서 이기도 했다.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론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인데도, 요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어른들의 ‘상식’에 맞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후 세대의 평생 동안의 소득은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p176)」

  이 묵시록은 틀렸는가? 현실의 단면을 말하자면, 이 예언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 저자 한윤형에 의하면 ‘계층 불평등의 세대 전이’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된다. 단,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에서. 물론 여기서 개념이 충돌한다. ‘특정 계층 내’의 ‘계층 불평등’ 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아마도 중산층이라고 불렸던 특정 계층이 몰락하면서 계층이 분화됨과 동시에 그것이 세대로 전이된다고 읽어야 될듯하다. 여기서 한윤형은 ‘미래’를 강조한다. 한윤형이 말하는 계층 불평등이란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래의 세대에게 곧  전이될 불평등을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88만원 세대론’은 원래부터 88만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다. 박권일은 여러 지면에서 자신은 ‘88만원 세대론’이 청년 빈곤층과 기성세대 빈곤층의 연대를 위해 쓰이기를 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88만원 세대’ 담론이 지적한 문제와 그 담론이 성공한 요인은 모두 중산층의 불안 심리 내지는 중간계급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즉 ‘계층 불평등의 세대전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세대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계층이 사실상 그간 한국의 내수 경제를 지탱해왔단 점을 생각하면 이들 내부의 ‘세대 문제’야 말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라 할 수 있다. p179~180」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가 터져 나오는 방식이다. 88만원 세대의 묵시론적 예언은 미국, 유럽, 일본 할 것 없이 세계 도처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바라보는 중간계층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가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던 ‘좌파적 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이다. 50대의 보수화뿐만 아니라 20대의 보수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자신들의 주적인 386세대가 좌파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적개심은 자연히 20대들을 좌파의 대척점에 서도록 추동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중간계급의 욕망’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고, ‘중산층의 불안’은 공포에 가까워진다.

 

 

  인디고 연구소의 젊은이들이 슬로베니아로 날아가 직접 지젝을 인터뷰한 책인 <불가능성의 가능성> 에는 68혁명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프랑스의 많은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 68년의 가장 멋진 순간을 무엇이라 말하는지 아십니까? 근교에서 당신은 차를 타고 와서, 노트르담 성당 북쪽에 차를 주차하고, 그리고는 센 강을 건너서, 시위를 하고, 차 몇 대에 불을 지르기도 하며, 여러분의 차가 아니니까 딱히 신경 쓰지도 않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가서 카페에 앉아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p127」

  이 무슨 된장녀스런 시위담일까 싶지만, 80년대 386들도 시위하고 밤새 막걸리 집에서, 호프집에서 술 퍼먹고 노래하고 토론했다. 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여유와 그런 처지를 말하는 것이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자유와 평등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게거품을 무는 것이 위선처럼 보이지만, 논쟁과 토론은 그런 곳에서 활발히 벌어진다. 논쟁과 토론이 없다면 희생과 투쟁은 있어도,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거나 합의해 나가기는 어렵다. 왜 사회 전체에 대한 투쟁은 노동자 계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만한 중간계급, 상부구조와 토대가 일치하지 않는 강남좌파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가에 대한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다. 먹고 살만해야 자유고 평등이고 자각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자유라는 최소한의 공간’ 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88만원 세대>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 명문대생들이었다는 현상에 대한 또 다른 풀이가 될 수 있다. 명문대생들에게는 어쨌든 88만원 세대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는 있다. 잠시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지만, 운 좋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격차는 <88만원 세대>가 보여주는 묵시록만큼이나 끔찍하다. 그러나 지잡대의 경우, 현실에 출구는 없다. 차라리 환상을 가지는 것이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취직 걱정을 하는 지방대생들은 차라리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 출발선상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토익 점수 따고 자격증 따면 명문대생과 비슷한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위안하거나, 이게 실패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을 때에도 살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일단 위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게다. 이들에게 《88만원 세대》담론은 벗어날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체념하고 따르는 것이 빠르다. p153~4」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80년대 이른바 386세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특권층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졸업만하면 취직 걱정은 없었고, 취직만하면 먹고 살 걱정은 없던 시절이다. 2,000년대 촛불집회 역시 중간계층의 열망이었다. 참가자들 각자의 구체적 욕망이 무엇이었던 간에, 먹고 살만해진 그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갈망했다. 그것의 상징이 강남좌파다. 강남에서 학원해서 진보당에 쾌척하는 삶의 모순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강남 학원은 계급을 더욱 공고히 하고, 진보당의 기본 이념은 계급철폐에 가까울 텐데도 말이다. 여하튼 경제적 여유가 우파든 좌파든 선택할 수 있는 사상의 여유마저 만들어 준 셈이다.

  지금 정치 참여를 놓고 서로 삿대질 해대는 386세대와 88만원세대의 격차도 비슷한 양상이다. 먹고 살만한 386세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먹고 살기가 막막한 88만원세대 앞에 개죽이 스티커를 내밀며 속으로 바가지바가지 욕을 해댔던 2004년 총선 때의 소위 ‘투표독려 캠페인’이 생각난다. 민망하다.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일이 자랑스러웠는데, 기실 이면에 놓인 이런 사회적 문제에는 전혀 무지했다. 우리는 참 해맑은 386이었다.

 

 

 

  20대가 정말로 보수화되었는지, 정치에 무관심한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는 통계도 있고 그 반대되는 논거도 있다. 이번 대선만 보더라도 20대는 열심히 투표했다. 그런데도 졌다. 중요한 건 사실 이런 논쟁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다. 정당이 그려내는 꿈이든 운동가들이 보여주는 청사진이든, 진짜 능동적인 미래의 비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열심히 적들을 만들어 반대만 해왔다. 이회창만, 이명박만, 박근혜만 아니라면 이 가혹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연히 사라질 것처럼 행동해 왔다. 노무현도 김대중도 못한 것을 문재인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또 한 번 속아 주었다. 다음 번엔 안철수에게 속아 줄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속아주면서 한없이 ‘내려가는 사회’에 살아야 하는 걸까? 아마도 평등자유라는 좌파적 꿈, common이라는 공동의 삶에 대한 대안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약 없이 냉소하며 속아주어야 할 것이다. 가짜 적들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하면서, 파시즘의 광기에 시달리면서. 그러니 당장 꿈을 그려낼 능력이 모자란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엉뚱한 적을 만들어 내기 보다는. ‘재특회’는 생각 보다 가까이 우리 안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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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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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7일에 카페 과제로 쓴 글입니다. 진중권의 <아이콘>에서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 관한 글을 비판한 내용입니다.

 

 

내게 『시차적 관점』은 특별한 책이다. 세미나라는 새로운 공간을 열게 된 첫 책이기 때문이다.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우리 세미나는 ‘죽치고 수다 떨기’가 진화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몇 년 동안 함께 수다를 떨어온 지인들이 있고, 다들 책을 좋아하고, 나만 빼고 업이 모두 공부고, 그것도 인문·사회 쪽이고, 그러다 보니 이왕 하는 수다, 좀 체계적으로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내가 3년째 해오는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세미나라는 말에 떨리기는 했지만, 이왕 아는 얼굴들이고, 그것도 반은 반말, 오다가다 존댓말, 나머지는 그냥 어미도 없이 몇 시간씩 수다 삼매에 빠지는 사이라, 창피해봤자 뭐 어떠냐는 배짱으로 시작했다. 나름 업자들 사이에 실력도 족보도 가방끈도 없이 끼어드는 것이 부담이자 민폐였지만, 설레기도 했다. 마침 그때 나는 막 백수 생활을 시작했고, 남아도는 시간과 엉뚱한 의욕으로 퇴사이후 놓았던 공부를 다시 했다. 사실 대학교 때 공부에 별 흥미도 관심도 없었던 터라, 공부도 안 했고 아는 것도 별로 없이 겨우 졸업만 했는데, 회사에 턱 들어가고 보니, 공부를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어서, 학교 때도 안하던 전공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다. 이런 이야기하면 요즘 청년들에게는 참 미안한데, 그 때는 그렇게 하고도 어렵지 않게 취직해서 먹고 살았다. 여하튼 그렇게 한 10년 공부하고, 손 놓은 지 또 한 10년이 다 되서, 새까맣게 밑줄도 긋고, 여백에 메모도 해가며 생판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됐다.

  보태는 것 없이 배우기만 할 처지고, 시간도 많고 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제라는 것을 맡게 됐다. 물론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요약을 하든지, 중요한 부분 발췌를 하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서, 무작정 덤벼들어 발제라고 나름 십여장을 만들었다. 사실은 내심 좀 놀래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세미나 첫 날, 내가 돌린 발제를 받아들고 다들 놀라던 모습이 생각난다. 예상대로(?) 다들 놀랐다. 내가 했던 발제문은 화려했다. 직장 생활 10년 동안 갈고 닦은 파워포인트 솜씨를 십분 발휘해, 컬러풀한 도표들을 가득 그려놓은 것이다. 사업 기획안이나 제품 교육 자료를 떠올리며 정성을 쏟았다. 피땀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좀 과장하면 그렇게 뻥쳐도 쇠고랑차지는 않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부실한 허리가 끊어질 듯해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있었다.

  『시차적 관점』은 어려운 책이다. 한 문장을 놓고 각자의 해석이 분분했던 세미나를 떠올려 봐도 그렇다. 이 책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 지금까지의 지젝은 잊어라! 지젝 스스로 ‘대작’이라 칭한 문제의 책~ ” 문제의 책, 맞다. 지젝이 주장하는 이론도 문제적이고, 그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고, 문제 많은 번역도 참기 힘든 문제고. 그런데도 나는 참 용감했다. 시퍼런 칼 날 같이 위험한 지젝의 사유를 서너 단어로 탁탁 잘라 네모 혹은 타원의 도형 안에 얌전히 가두고는 화살표를 착착 그려 넣어, A와 B를 합하면 C가 나온다는 식의 도식으로 만들었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뇌구조 그림처럼, 지젝에게 칸트는 뭔가 미흡하고, 헤겔은 훌륭하고, 라캉은 진리고, 그러니까 칸트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문장이 나오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볼 것, 헤겔 운운하면 무조건 수용!, 뭐 이런 식으로 나의 머리를 포맷했다. 사실 그건 내가 해석할 수 없는 문장들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자 꼼수였다. 그렇게라도 딱딱 갈라놓지 않으면,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윤곽조차 그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건 내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습득했던 몸에 밴 방법이라, 지금도 나는 그렇게 사고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논리는 그렇게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여하튼 결과를 말하자면, 그렇게 나는 첫 세미나에서 ‘새 됐다.’ “제 과제에서 도식 나오면 전 점수 안줘요 ㅋㅋ" 하던 지인을 민망하게 보면서, 그래도 나는, 일목요연한게 얼마나 좋은데 흥, 속으로 그랬다. 도식은 사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확정되어 버린, 이미 굳어 버린 사고 속에서 철학적 사유는 더 이상 살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던 것 같다.

 

 

  씨네21에서 진중권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정말 반가웠다. 바로 그 『시차적 관점』을 진중권도 읽고, 글까지 썼다는 사실이 참 기뻤다. 멋진 삼촌 옆에서 괜히 우쭐한 느낌?

  푸른바다님의 막쪽글 과제인, 진중권의 『아이콘』은 2010년 4월부터 1년간 씨네21에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 만든 책이다. 이 칼럼은 지금도 연재되고 있다. 주로 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우리나라의 시사적 문제와 엮어서 쓴 글인데,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소개를 보면, ‘아이콘을 누르면 복잡한 명렁어 없이 컴퓨터를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듯, ‘개념어’를 누르면 철학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아도 철학적 수준의 깊은 사유가 가능하다‘ 는 것인데, 읽는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중적 칼럼으로는 훌륭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의 『아이콘』에는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서 따온 ‘개념어’를 다루고 있는 칼럼이 몇 편 있다. 그런데 그 글들을 읽고 나는 왠지 서운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이 그만큼 좋아해 주지 않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여하튼 그랬다. 사실 진중권이 지젝을 좋아할 리는 없을 것이다. 진중권은 사민주의자로 알려진데 반해(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그렇게 불린다.), 지젝은 사민주의자를 오히려 혁명의 장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것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서운’ 운운한 것은 사실, 내가 진중권에게 『시차적 관점』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혐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사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뿐이다) 한국의 벤야민이라고 할 정도의 진중권을 두고,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을 두고, 그런 의심 자체가 내 자신에게도 깜짝 놀랄 일이지만,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는 칼럼은 정말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 막쪽글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꼬였다. 진중권의 『아이콘』과 진중권이 언급하고 있는『시차적 관점』의 관련 부분을 다시 읽어 보고 썼어야 할 글을 지난 번 『아담의 오류』감상문을 쓰면서 뜻하지 않게 주절거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세미나를 할 때도, ‘바틀비’가 우리나라 상황에 적절한 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유럽은 복지국가와 사민주의를 여러 가지 형태로 시험해 보았거나 실행중인 사회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복지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너무 일찍 온 ‘바틀비’는 대단히 생뚱맞게 보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제대로 끝도 맺지 못한 그 글은 진중권에 대한 성급하고도 잘못된 비판이다. ‘바틀비’는 거칠게 이해하고, 개략적으로 다룰 경우 영락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단히 예민한 주제이다. 인디아나 존스에나 나오는 아득한 협곡 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떨어져 죽기 십상이다. 더우기 나는 인디아나 존스도 아니고, 존스를 쫒아가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는 나쁜 편의 졸개 정도 급임에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다리 위에는 애초에 발을 디밀지 말아야 했다. 디밀었어도 얼른 돌아 나와야 한다. 내가 지젝의 철학을 자유롭게 다루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때 다시 ‘바틀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에 대해서만 글을 쓰려고 한다. 죄송하다. 이제 시작이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라면 우리는 이미 오래된 지혜를 가지고 있다. “네 말이 옳다, 그리고 네 말도 옳구나, 허허허” 그 자애로운 웃음으로 황희 정승이 무엇을 목적하고 무엇을 이루었건, 그는 그렇게 조선 최고의 영의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중용’이라는 말도 있다. 서적『 중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중용’이라면 사전적 의미대로 잘 사용하고 있다.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

  그러면 지젝의 ‘시차적 관점’ 이 이런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시차적 관점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의 정반대, 중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덧붙일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그렇다. 진중권 역시 이 점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가 가진 입장에 따라 세계는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저마다 자기의 가치는 ‘해일’만큼 중요하며, 거기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은 ‘조개’만큼 하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판정해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철학에서는 흔히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입장을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제 입장이 바로 그 공통분모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독단이리라.」

  그런데 진중권은 독단도 아니고, 상대주의도 아닌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어 한다. 우리의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도 옳고, 너도 옳아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 말로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가치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말해줄 객관적 기준 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이 선택되지 않은 다른 입장들에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것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이 그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

  인터넷 상에서 투사의 이미지와는 달리 여기서 진중권이 추구하는 해법은 참으로 자애롭고 인자하여, 황희 정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 태도 자체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답을 하필이면, 그것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젝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젝이라면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차라리 독단을 주장한다. 그것이 뭐 어떻다는 것인가? 적대세력에게 우리는 부당하고, 우리에게 적대세력 역시 부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 부당함이 누구를 향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1%인가? 99%인가? 다원성을 인정하며 실천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없다. 그 물음 자체가 불필요하다....아마 이렇게. 진중권의 결론을 읽어 보면서, 내가 왜 이런 무모한 주장을 하는지, 변명해 보겠다.

 「 시차적 관점이란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다 줄 것이다. 」

  내가 읽은 『시차적 관점』에서 시차적 관점이란 정확히 이것과 반대의 개념이다. 충돌하는 두 입장을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습관이 아니라, 하나의 입장과 그 공백을 보거나, 반대의 입장과 그것의 공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두 가지 방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이론의 층위에서 사유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보는 행위의 층위에서는, 동시에 두 가지 입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차는 동일한 X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관점으로 구성된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 두 관점들 사이에는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성, 극소의 반성적 왜곡이 존재한다. 우리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과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우리가 첫 번째 관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공백을 채운다. (시차적 관점 PV, p63)」

  팽팽히 당긴 활시위의 양 끝처럼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인 것, 혹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이다. 다른 비유를 하자면 루빈의 꽃병처럼, 하나의 꽃병을 보거나 두 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둘 다 볼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도 해봤다. 순간적으로는 가능한 것 같지만, 다만 이경규의 눈알 굴리기처럼 눈이 재빠르게 대상을 바꾸어 가며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될 뿐이다. 팽팽하게 눈을 부릅떠봤자 눈물이 날만큼 눈알만 아플 뿐이다.

   지젝은 책의 서주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시차적 관점에 관해 설명한다. 그 중 하나가 벤야민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다. 벤야민은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하던 중, 나치 요원에게 붙잡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스페인 국경 마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03년 놀라운 이야기가 어느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다. 벤야민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의 스파이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죽기 몇 달 전 벤야민이 집필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충격적인 분석인 『역사철학테제』 때문이다. 『테제』를 우연히 읽게 된 스탈린이, 이 『테제』에 근거한 벤야민의 새로운 집필계획을 알게 되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출판을 저지하려고 했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벤야민과 스탈린은 결코 조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두 이야기가(나는 한 가지 사례만 소개했다)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축하는 관계가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결코 조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단락의 층위들이라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스탈린’이 대표하는 것을 ‘벤야민’과 같은 층위로 이동시키는 것, 즉 스탈린적인 관점에서 벤야민의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두 이야기가 기조로 삼고 있는 허상, 즉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 상호 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의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 PV, p13)」

  벤야민의 암살설이 성립하려면『테제』를 놓고 벤야민과 스탈린이 같은 층위, 즉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테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분석을 읽어내지 못한다. 스탈린의 관점에서 『테제』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스탈린이 『테제』를 읽고 벤야민을 암살했다는 것은, 꽃병과 얼굴을 한꺼번에 봤다는 의미다. 왜 지젝이 스탈린을 저차원에 두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전제에 동의하고 보면 시차적 관점에 대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테제』는 하나의 실체이지만, 우리는 스탈린의 관점을 갖거나 벤야민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차적 관점이다. 두 관점은 동시에 동일한 층위에 존재하지 못한다. 진중권이 해석한 시차적 관점은 이와 반대로, 두 개의 관점을 동일한 활시위에 올려놓고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다 줄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차적 관점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불가능한 주장이기도 하다.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보려할 때, 현실에 더 가깝게 갈 수 있기는커녕 현실이란 것이 구성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달에 나는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을 읽었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찰스 디킨스의 이 유명한 소설을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설명하는 사례로 들고 있는데, 소설 읽은 자랑(?)도 할 겸하여, 조금 소개한다. 물론 시차적 관점에 대한 구체적 사례이기도 하다.

 「 핍이 “거액의 유산상속인/ 큰 기대를 걸만한 사람 man of great expectations"으로 지목될 때 사람들은 이를 그가 세상에서 성공하리라는 예견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런던의 가식적 화려함을 포기하고 남루한 어린 시절의 공동체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가 진정 그의 인생에 각인되었던 예언에 따라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런던 상류사회의 공허한 흥분을 떠날 용기를 낸 후에야 비로소 그는 “큰 기대를 걸 만한 사람” 되기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헤겔의 반성과정(reflexivity)에 대해 논하고 있다. 주인공이 시련을 겪으면서 그의 성품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성품을 평가하는 윤리적 기준 역시 변한다. ...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 의미하는 바다.: 그것은 실패를 진정한 성공으로 바꾸는 관점의 전환이다..( PV, p60~1) 」

  핍은 결과적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산상속인이 되는 것에 실패함을 통해서 문자 그대로의 man of great expectations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great expectations을 통상적인 어법에 따라 막대한 유산으로 보았을 때 핍은 그것에 실패했지만, ‘커다란 기대’ 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핍이 런던의 화려함 대신 남루하지만 진정한 공동체를 선택한 행위야말로 말 그대로 큰 기대를 걸 만한 사람임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핍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 부가 곧 성공임을 확신하는 고향 마을의 속물들에게 핍은 그저 유산 상속에 실패하고 런던에서 쫓겨난 가난뱅이일 뿐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핍은 결코 man of great expectations일 수가 없다. 반면 핍을 친아들처럼 키워준 조에게는 빈털터리 핍의 낙향이야말로 조의 기대, great expectations에 부응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성공이다. 소설을 읽는 전지적 시점에서는 핍은 성공했음과 동시에 실패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핍은 성공했거나 실패했을 따름이다. 핍이 ‘막대한 유산’과 ‘커다란 기대’를 동시에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신과 같이 전지적 시점으로 살지 못한다.

  여기서 핍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것은 전적으로 관점의 전환이다. 핍은 돈 한 푼 없이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것은 핍이 막대한 유산을 받을 것이라는 예견에 대한 ‘부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은, 우여곡절을 거쳐, 드라마라면 보통 유산에 대한 거절의 행위가 오히려 행운의 계기가 된다는 식으로 진행될 텐데, 핍이 원래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에 성공한다는, 행복한 ‘정-반-합’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에서 실제로 핍에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핍은 여전히 빈털터리다. 바뀌는 것은 유산 상속의 실패라는 ‘부정’을 제대로 된 인간의 증거로 보는, 인간성의 성공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부정의 부정’이며, 시차적 관점으로의 전환이다. 이렇게 보면 시차적 관점 역시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세상 일 마음먹기 달렸다는 지혜는 중용만큼이나 오래된 교훈일 것이다. 그러나 시차적 관점은 체념이나 달관 따위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는 분명코 아니다. 현실의 변혁을 위해 관점을 바꾸는 것이지, 현실에서 물러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관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진중권은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고 했다. 지난 촛불집회 때, 전통 좌파와 촛불대중의 갈등을 두고, 진중권식의 시차적 관점을 적용하여 한 말이다. 전통좌파의 관점에서 촛불은 오른쪽에 있다. 촛불(대중)의 관점에서 오른쪽에 있는 것은 오히려 전통좌파이다. 촛불이 왼쪽에서도 깜박이고 동시에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는 그의 표현은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왼쪽에서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촛불(대중) 자신이고, 오른쪽에서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전통좌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깜박이는 촛불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신이 아니라면, 방관자일 뿐이다. 촛불집회를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방관자, 다시 말해 촛불집회라는 세계 밖에 있는 제3의 시점만이 차지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 사례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 속에는 불행히도 세계 밖이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세계-내-존재 이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면서도 실천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점은 없다. 물론 좌우의 촛불을 모두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처음 내가 자유주의적 촛불대중이었다고 가정하자. 내 눈에 촛불은 전통좌파 보다 훨씬 왼쪽에 있다. 왼쪽에서 깜박이는 촛불. 그런데 집회에 참가하다가 진보신당에 가입하게 되었고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어느 순간 전통좌파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촛불, 그것은 아마도 분명히 오른쪽에서 깜박일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내가 왼쪽의 촛불을 본 적이 있다고 해서, 이제 왼쪽과 오른쪽의 촛불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다. 전통좌파가 된 나는 더 이상 왼쪽의 촛불을 볼 수 없다. 촛불 자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제 분명히 오른쪽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렇다면 타협과 화해는 불가능한 것일까? 사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자신의 관점만 주장하며 살 수는 없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게도 되고, 하나씩 양보하며 주고받기도 하고 대충 어울려 산다. 그렇지만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진중권이 해일과 조개의 비유를 통해 그 적대의 심각성을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 유명한 사례가 최보은일 텐데, 운동권 출신의 페미니스트인 그녀는 오래 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진보일 수 있다”고 말해 진보세력을 경악케 했다. 최보은은 진보와 페미니즘을 통합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근본적인 적대를 드러냈다. 지젝은 이 적대를 불가피하다고 본다. 물론 어떤 적대가 가장 보편적인 적대인지 가려줄 객관적 기준은 없다. 관점에 따라 자신의 적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정통좌파에게 그것은 물론 계급 적대이다. 페미니스트에게는 성적 적대이고, 생태주의자에게는 인공과 자연의 적대이다. 우리는 자신의 적대가 가장 보편적임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보편은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만들어진 보편, 구멍 뚫린 진리이다. 진리는 구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보편적 진리임을 믿어야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학적 차원 없이 혁명은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바꾸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것에 대한 비합리적 열정, 신학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시차적 관점으로의 이동은 기존의 관점으로 구성된 세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신념의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왼쪽에서 깜박이던 촛불은 신념의 도약에 의해서만 오른쪽에 자리할 수 있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내가 이해한 『시차적 관점』의 관점에서 진중권의 ‘시차적 관점’을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함께 『시차적 관점』을 읽었던 세미나 지인들의 관점과도 일치하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지젝 자신의 관점에는 얼마나 근접해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힘껏 생각을 뻗쳐 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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