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1일 쓴 글입니다.
오늘은 호수공원을 산책할까 합니다.
호수공원의 가을은 참 좋습니다.
가을이야 어디라도 안 좋은 곳이 있겠습니까만,
두어 시간을 물과 나무와 하늘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 작은 도시들마다 모두 있는 것은 아니니 조금은 자랑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싶습니다.
저희 집은 호수공원에서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아파트 입구를 나와서 똑바로 걸어 내려가면 호수공원 제1 주차장이 나옵니다.
여기는 고양시 노인 종합복지관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길에서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 앞에 네댓 분의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십니다.
할아버지가 혼자 할머니들 틈에 끼어 있기가 부끄러우셨는지 어쨌는지 신호를 무시하고 간간이 차가 지나는 차로로 앞질러 걸어가십니다.
뒤에 서 있는 할머니 한 분이 화를 내십니다.
“저러니까 노인들이 욕을 먹지. 저런 영감 때문에 우리가 다 욕을 먹어!”
“사고라도 나면 어쩌누.”
“글쎄 말이야.”
할머니들이 제 각각 거드십니다.
혀를 끌끌 차는 할머니들의 입성이 은근 품위 있고 조금은 화려해 보이기도 합니다.
고급스런 질감에 살짝살짝 들어간 반짝이 실과 반짝거리는 단추를 보니 백화점의 누구누구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의 옷은 보기보다 굉장히 비쌉니다.
지난 추석에 엄마와 함께 백화점 구경에 나섰는데 매장에 정상가격으로 팔리는 옷들은 죄다 7~80만원이 넘었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재고로 팔아 치우는 블라우스 하나를 선물해 드렸습니다.
엄마는 굳이 본인이 사겠다고 하셨지만, 딸이 백수로 놀고 있다고 용돈도 받지 않으시니 7만원하는 재고라도 사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엄마는 저 보다도 옷이 많습니다.
그러고도 늘 틈만 나면 쇼핑을 하러 다니십니다.
물론 엄마도 정상가격에 파는 옷들은 꿈도 못 꾸지만, 친구 분들과 쇼핑을 다녀오시고 나면 가끔씩 부럽기도 한가 봅니다.
누구는 닥스를 누구는 버버리를 샀다는 말을 지나가듯 흘리시는데 저는 못 들은 척 합니다.
제 눈에는 노인이 아무리 잘 차려 입어봤자 노인이지 싶은데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가봅니다.
엄마도 노인대학이나 모임에 가실 때는 한껏 모양을 냅니다.
그러면서도 함께 어울리는 할머니들의 수준에 비하면 턱도 없다고 하십니다.
너무 추레하게 하고 나가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염려하십니다.
사실 저희 엄마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도 영리하신 편이라 혼자서 영어 알파벳도 깨쳐 영어 간판도 더듬거리며 읽습니다.
엄마는 늘 배우기만 좀 더 배웠어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좀 많이 배운 할머니들하고 어울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시지요.
엄마 친구분들이 엄마를 국졸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넌지시 자랑도 하십니다.
학력을 속이기라도 한 걸까요? ㅎㅎ
일산은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물론 분당도 그렇다고 합니다만 사실, 수준에 차이가 있습니다.
분당이 강남이라면, 일산은 강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강남에 집을 가지기 힘든 것처럼, 부자 노인이 아니면 분당에 집을 갖고 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일산에는 진짜 노인들이 많습니다.
일산이 신도시다 보니 토박이 빈민층은 없습니다만, 아파트 평수의 차이만큼이나 여러 계층의 노인들이 살고 계십니다.
진주 목걸이와 알 굵은 반지를 하고 다니는 부자 할머니들이 있는가하면,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의 작은 공원에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장기를 두며 소주를 마시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그 한쪽 옆으로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쪽파를 까서 파는 할머니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이 분들은 대체로 끼리끼리 노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아이들도 아파트 평수대로 노는 세상이라고는 합니다만 그래도 젊은이들에게는 변화의 가능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냥 그렇게들 사실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너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늙으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일까요?
어쩌면 하루 종일 도라지를 까고 마늘을 까서 용돈을 버는 할머니들이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고 복지관에 앉아 한나라당 성향의 교수가 주입시키는 좌파 빨갱이 교육을 듣는 할머니들 보다 더 건강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저는 마음이 조금 언짢습니다.
찬바람이 불어도 쪼그리고 앉아서 쪽파를 다듬는 갈라터진 손과 알 굵은 반지를 낀 고운 손을 번갈아가며 마주칠 때면 마음이 오소소합니다.
좌판을 벌인 할머니는 욕도 잘하고 소리도 잘 지르십니다.
굵은 반지를 낀 할머니는 생전 들어보지도, 해보지도 못한 욕인지도 모릅니다.
한 줌만 더 달라는 손님들과 매일 승강이를 하는 통에 인상도 조금 찌그러져있습니다.
얼굴 한번 찌푸린 적 없어 보이시는 품위 있는 할머니는 인상도 온화합니다.
보통 나이를 먹으면 제 얼굴에 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들 합니다.
쪽파를 파는 할머니는 한평생 무얼 그리 잘못하신 걸까요?
값비싼 반지를 낀 할머니는 얼마나 훌륭하게 사셨길래 저리도 고우신 걸까요?
얼굴이 정말로 그 사람을 말해 줄 수 있는 걸까요?
그건 관상을 보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것과 다른 것일까요?
사람들은 동안을 참 좋아합니다.
동안이라고 하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누가 빈말이라도 새댁이라 불러 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동안이라는 것이 정말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만큼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십시오.
하루 종일 햇볕 아래 일을 하는 농부가 동안일 수는 없습니다.
고생모르고 살고, 좋은 화장품을 쓰고, 정기적으로 피부 마사지를 받고, 노화 방지 식품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누구나 동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동안이란 경제적 여유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동안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타고난 행운일 뿐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나이를 먹은 만큼 나이 값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겠지요.
정작 호수공원에는 아직 발을 디디지도 못했는데 너무 오래 신호등 앞을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호를 몇 번이나 흘러 보냈을까요.... 이제 차로를 지나 호수공원 안으로 들어갑니다.
호수공원에 있는 인공 호수는 마치 조롱박으로 만든 바가지처럼 생겼습니다.
바가지의 물을 담는 넓은 부분이 커다란 호수라면 바가지의 손잡이 부분은 조그만 호수라고 할 수 있고, 그 둘을 잇는 좁다란 목 부분에 정자가 있는 작은 섬 같은 곳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리로 이어져 있지요.
설명이 복잡하고 요령부득이라고요?
하하... 맞습니다.
사실 하나의 호수가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고요, 게다가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정작 호수의 모양은 조롱박 바가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바가지의 손잡이 부분이 반대쪽 끝에도 하나가 더 달려있는 모양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일테면 수능을 위해 조카에게 선물하는 기다란 엿을 생각해 보면요, 이걸 예쁜 포장지로 길다랗게 포장해 놓고는 양쪽 끄트머리를 리본으로 묶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리본 밖으로 튀어나온 포장지 가장자리가 양쪽 끝에 앙증맞게 보일 텐데요.
호수 모양이 대충 이것과 비슷합니다.
전체는 삼등분이 되는데, 가운데의 길고 큰 호수와 양쪽 끝의 작은 호수 이렇게 세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호수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호수공원을 묘사하려고 하면서 조롱박 바가지를 먼저 떠올린 것은 왜일까요?
그건 제가 딱 조롱박 바가지만큼만 호숫가를 산책하기 때문입니다.
반대편 끝의 작은 호수 부분은 너무 멀어서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답니다.
그쪽의 호수는 사실 제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 눈이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면 있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가 안내하는 호수공원은 사실 호수공원의 제대로 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여드리는 호수공원도 호수공원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제 아무리 발이 단단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호수공원을 샅샅이 훑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호수공원의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도 제가 보았던 어떤 것을 그는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쨌든 이 불성실한 안내자의 산책길이 영 미덥지가 않으시다면, 고양시 홈페이지에서 살짝 복사한 아래 지도를 잠깐 보시는 것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파란색으로 칠해진 호수 오른쪽 편으로 녹색으로 칠해진 작은 섬 같은 곳이 보이시나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산책길은 바로 그 섬의 오른쪽으로 이어진 작은 호수 길 입니다.
여기는 봄과 여름에는 그다지 볼품이 없는데, 딱 지금 이 가을에 가장 걷기 좋은 길입니다.
호숫가에는 갈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고, 이어진 풀밭에는 버드나무가 기다란 잎을 늘어뜨리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버드나무들은 하나같이 호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물을 조금이라도 더 빨아올리려는 걸까요? 아니면 햇볕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일까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네댓 시 무렵이면 호수는 부드러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버드나무 가지 아래로 넓은 돗자리를 깐 연인들이 드러누워서 책을 보거나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그 자리로 제가 걸어 들어간다면 그 그림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이제 작은 섬을 통과해 큰 호숫가로 난 가로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정자 옆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호수공원 관리사무소 조끼를 입은 젊은 청년이 자전거 안장에 버티고 앉아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뻥튀기 한 보따리를 손에 쥔 초로의 남자가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며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네요.
“아저씨, 빨리 나가세요! 안 나가려면 그 뻥튀기 저 주시고요”
“아, 글쎄...”
“왜 말을 안 들으세요! 이건 제 일이예요. 아저씨 때문에 제가 왜 욕을 먹어야 해요! 나가시라니까요”
“뭐....”
호수공원은 제가 보기에도 참 관리가 잘 되어있습니다.
굴러다니는 패트 병도 없고 그 흔한 과자 봉지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큰 행사가 있다거나 이런 때는 예외로 하고 평소의 산책길에 말입니다.
현장 학습 나온 유치원생, 멀리서 구경 온 할머니 할아버지들, 유모차 엄마들, 산책 나온 강아지들까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공원인데도 길바닥에 뒹구는 쓰레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잡상인도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으레 모여드는 김밥장사도 떡장사도 솜사탕장사도 뻥튀기장사도 아이스크림장사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저 자판기 안에 깔끔이 정돈되어 있습니다.
저 운수 나쁜 뻥튀기 아저씨는 호수공원 관리사무소의 이 빈틈없는 일 처리 능력을 몰랐던 것일까요.
저는 멀찌감치 서서 관리사무소 청년과 늙수그레한 아저씨의 일방적인 실랑이를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마치 비밀을 보아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호수공원이 이런 깨끗함을 유지해 온 비밀을 말입니다.
일산구의 주민들은 쓰레기가 없는 호수공원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더군요.
저 뻥튀기 아저씨는 이 호수공원에서 무엇으로 인식될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니 말입니다.
저 역시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꼭 깨끗하기만 해야 하는 걸까, 저는 어떤 찜찜함 속에서 그 자리를 비켜났습니다.
네, 저는 그냥 지나쳐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로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은행나무들이 줄 지어 있습니다.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은 아니지만 일산 신도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한 이십여 년은 족히 되지 않았을까 싶은 나무들입니다.
오늘은 벌써 노랗게 물든 나무들이 많습니다.
지난주만 해도 아직은 짙푸른 나무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은행잎들은 노랗게 물들자 말자 떨어져 버리기 시작합니다.
떨어진 은행잎들은 발 아래로 밟히고, 무성했던 나무 가지는 잎을 잃으며 조금씩 여윈 팔을 드러냅니다.
마치 제 머리카락 같군요.
아침마다 저는 조금 우울합니다.
머리를 감을 때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시커멓게 뒤엉켜 있습니다.
이렇게 빠지다가는 곧 대머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엄마를 봐도 그렇습니다.
엄마는 여자라서 다행히 완전 대머리는 아니지만 앞머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 유전자를 타고 난 저 역시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 보다 먼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언니는 두피 마사지를 받고 여러 종류의 헤어 케어 제품을 씁니다만, 저는 그 보다는 간편한 방법을 쓰려고 합니다.
원래 제가 좀 게으릅니다.
그냥 웬만큼 빠지고 나면 가발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별로 좋지 않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척추분리증도 있고, 치아도 나쁘고, 위장도 약하고, 자궁도 좋지 않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부터 시달리고 있는 만성 두통도 아마 유전적 소인이 클 것입니다.
어떤 날은 이런 제가 너무 한심하고 우울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태어난 걸요.
이럴 땐 인간은 과연 평등한 것일까 의문이 듭니다.
평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요?
어쨌거나 평등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참 요즘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저는 정말이지 우리나라가 교육에 있어서만은 평등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시민운동이나 뭐 그런 것들을 하게 된다면 저는 무엇보다 평등한 교육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대학까지 무상교육만 된다고 해도 이런 사회적 불평등이 많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occupy' 사건 이후 세계의 금융자본주의가 어떤 위기를 맞게 될지, 어떤 대안 사회를 만들어 내게 될지, 이 엄중하고 역사적인 시기에 너무 소박해서 반동적인 소망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쨌든 심정적으로 그렇습니다.
졸업도 못한 대학생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일 년을 휴학하고 알바를 해야 일 년 등록금을 벌 수 있는 이 현실은 진정으로 참혹합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대학생들이 그 어처구니없는 거마대의 다단계 조직원이 될 생각을 하겠습니까.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저희 때만 해도, 과외해서 등록금에 하숙비와 용돈까지 벌어가며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뭐 그다지 공부를 했다고 할 수도 없지만, 여하튼 졸업하고 취직하고 먹고 살만했습니다.
지금은 사회 체계 자체가 그런 것들마저 원천 봉쇄를 하고 있지만, 그런 사회를 눈 뜨고 용인한 저희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 많은 세대입니다.
저기 강아지 몇 마리가 보입니다.
단체로 산책을 나왔나 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만한 크기의 강아지들이 앙증맞은 옷을 입고 여기 저기 킁킁거립니다.
저렇게 조그마한 강아지들은 사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강아지가 아니라 개라고 불러야 할 만큼 나이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 덩치 하는 복실이나 누렁이와 함께 자라나서 그런지 한 주먹도 안 되보이는 조그만 강아지를 어른 개라고 부르기는 차마 이상합니다.
호수공원에는 심심찮게 덩치 큰 개들도 보입니다.
작은 강아지 열 댓 마리 보다 더 덩치가 커 보이는 듬직하고 잘생긴 놈이 나타나면 산책하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놈에게 쏠립니다.
옛날 마당에서 기르던 똥개나 복실이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혈통이 있어 뵈는 놈들입니다.
이놈들은 거추장스런 치장도 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그대로 아름다운 털과 장대한 기골을 뽐냅니다.
작은 강아지들이 맞춰 입은 형형색색의 때때옷은 그것들에 비하면 누더기처럼 보입니다.
단연 호수공원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아마 아무나 기를 수 있는 개는 아닐 것입니다.
호수공원에는 사람들만큼이나 개들에게도 빈부의 격차가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유모차에도 있습니다.
한 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들은 일단 차체 자체가 매우 높습니다.
보통의 유모차에 비해 수십 센티는 높아 보이는 곳에 덩그렇게 앉아 있는 아기들은 마치 세상을 굽어보는 듯합니다.
주로 바퀴는 세 개이고, 네 개일 경우도 앞바퀴 보다 뒷바퀴가 훨씬 튼튼하고 커 보입니다.
낮은 유모차들 사이에 키 큰 유모차는 마치 벤츠나 BMW 같은 위용을 자랑합니다.
유모차만큼이나 키가 크고 늘씬한 젊은 엄마는 까만 썬글라스에 눈을 가린 채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높은 유모차의 아이가 자라나면 멋진 시베리안 허스키를 기르지 않을까요, 그리고 벤츠를 몰겠군요, 세월이 흘러 곱게 늙어 갈 때쯤이면 우아한 목걸이에 알 굵은 반지를 하고 노인 대학을 드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편의점 알바도, 거마대 다단계도 해 본적이 없겠지요.
제가 너무 삐딱한가요?
가을의 낭만이 넘쳐흐르는 이 아름다운 공원에서 빈부 격차 같은 우중충한 생각만 하고 있다고요?
아, 이런 저런 생각을 떨치고 이제 메타세콰이어 길을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전에 한석규가 “핸드폰은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라든가 하면서 이동통신 광고를 찍던 그 메타세콰이어 길 만큼 울울창창 멋지진 않습니다만, 나름대로 풍취가 있습니다.
특히 이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호수공원은 호수를 끼고 맨 안쪽의 길과 중간 길 그리고 맨 바깥쪽의 길이 겹겹이 나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는 길이 두 겹으로 끊기기도 하지만 여하튼 같은 방향으로 돌아도 이 길, 저 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 중 메타세콰이어 길은 맨 바깥에 있으면서 바닥도 흙길 그대로여서 삼림욕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 요즘 SBS 수목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십니까?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재밌습니다.
송중기가 청년 세종을 멋지게 해냈지만, 연기하면 또 뒤지지 않는 한석규가 훌륭하게 세종역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저건 뭐지요?
메타세콰이어 길로 접어들기 전, 가로등에 달려 있는 저 그림을 한 번 보시지요.
사람들이 킥킥거리며 지나갑니다.
가로등을 따라 이렇게 그림들이 주~욱 걸려 있습니다.
주로 아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아니 이게 왠일입니까?
‘나는 꼬추다’!!
왼쪽 그림은 방향이 거꾸로 인데 ‘나는 꼬치다’ 이네요.
'나는 XX다' 유형의 진술을 보면 저는 먼저 ‘나는 꼼수다’가 생각납니다.
‘나는 꼼수다’와 ‘나는 가수다’는 누가 원조이고 누가 패러디일까요?
역시 패러디하면 딴지 김어준 선생이겠죠.
‘나는 가수다’는 3월 초에, ‘나는 가수다’는 4월 말에 시작했습니다.
저도 ‘나는 가수다’를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꼬추다’에는 ‘나는 꼼수다’의 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단지 ‘ㄲ’ 돌림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는 꼬추다’가 불러 오는 웃음은 다분히 그것의 외설스러움에 있겠지요.
‘나는 꼼수다’에도 어떤 외설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감히 가카를 상대로 온갖 치부를 들쳐 내며 낄낄거리는 악동들의 그 외설스러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나는 남근이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남근은 지배의 상징이지만, 사실 그 남근은 거세당해 있습니다.
그림 속의 꼬추도 구멍이 뚫려 있군요.
그 구멍을 누군가의 얼굴이 가리고 있습니다.
마치 완전한 꼬추인양 말입니다.
저게 우리의 가카일까요?
가카의 나라는 이미 가카의 그 야비한 얼굴로는 다 메울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횡설수설하고 있습니다.
남근, 거세, 빗금친 대타자....이런 것들은 까다로운 개념인데 저는 어느 책에서 읽은 그런 개념들을 그 개념의 정의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연상해서 늘어놓고 있습니다.
어려운 말을 쓰면서 금방 들통 날 얄팍한 지식을 뽐내는 것이 귀여워 보이기에는 제가 너무 늙어 버린 것이 맞겠지만, 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그냥 즈려밟고 가시오길 바라옵니다.
이제 다리가 아픕니다.
배도 슬슬 고프네요.
오늘은 저기 굴다리를 지나 애수교를 돌아오기까지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겠습니다.
갈대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작은 호숫가 풍경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길이라도 걷는 방향에 따라 느낌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길도 공원 안쪽으로 들어 올 때 보다는 나갈 때의 경치가 더 운치 있습니다.
특히 오후 서너 시 경이라면 말입니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는 아름답지만 왠지 헛헛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느낌이 저는 언제나 좋습니다.
저쪽 잔디밭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이컵에 차를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거나 따뜻함이 그리웠던 사람들이 종이컵을 하나씩 건네받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세요?”
“성당 다녀요.”
이런 소리들이 들립니다.
아하, 교회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중이군요.
가만, 그런데 왜 단속하는 관리사무소 직원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뻥튀기는 팔면 안 되고, 차는 팔아도 된다는 걸까요?
제 눈에는 공짜로 나눠주는 저 종이컵이 전혀 공짜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뻥튀기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가의 상품인걸요.
교회를 사고판다는 것, 교인의 수에 따라 권리금이 책정된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닙니다.
저분들이 하고 있는 것이 선교인지, 장사인지 저는 정말 의문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이제 우리나라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북한의 삼대 세습이 어이없는 봉건적 작태라면, 대를 이어 교회를 물려주는 세습 목사들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요?
훌륭한 소명의식인가요?
대를 물리는 장인 정신인가요?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진정한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이 혼란하고 어려운 세상에 몸소 실천해 보여줄 때, 우리는 기꺼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지 않을까요...
이제 다시 제1 주차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늘의 산책은 여기서 끝이 났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호수공원 근처의 아람누리 도서관도 보여 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합니다.
아마 어제 늦은 밤까지 이탈리아의 어느 기호학자의 책을 읽느라고 잠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저녁에는 A4 10매를 채워야 하는 과제물도 작성해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안내가 별로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고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 주십시오.
다시 정신 맑은 날이 오면 정말 멋지게 호수공원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10월 말이나 11월 초까지는 호수공원이 가을의 정취를 잘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단풍은 짙어가겠지만, 그 만큼 쌓이는 낙엽도 늘어 가고, 더 깊고 더 쓸쓸한 호수공원의 가을이 되겠지요.
참 언제라도 직접 호수공원을 거닐어 보고 싶으시다면 살짝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길동무도 되어 드리고, 차도 한 잔 대접해 드리지요.
산적 같은 아저씨가 직접 볶아 만든 맛있는 커피가 있는 따뜻한 찻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커피가 싫으시다면 아저씨가 직접 만든 생강차도 좋고 레몬차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