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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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검색창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늘 ‘대출 중’ 이었다. 반납예정일을 기다리며 한 달 반가량을 노렸지만 어느 틈엔가 이 책은 또 대출되어 버렸다. 지쳐서, 사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그러자 또 요놈의 책이 도서관 서가에 떡하니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청춘이 예전에 달아나 버려서 그랬는지,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참 건성으로 보았다. 검색을 하기 위해 되풀이 책 제목을 두드리면서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청춘의 이 막막한 ‘우울함’에 한 번도 마음이 가닿지 않았다. 딱 386세대인 나는 이 우울한 88만원 세대와 한 번도 공감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그렇게 읽으려 했던 것은 우선 저자 한윤형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랄 수 있다. 이모팬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나는 그의 트윗을 팔로우하고, 그가 참여하는 윤여준의 팟캐스트를 듣고, 미디어스에 올라오는 그의 기사를 웬만하면 챙겨보는 팔로워, 말하자면 일종의 추종자이다. 저자 한윤형에 대해서는 안티조선운동사의 전설적인 소년논객 운운하는 소문들이 따라다녔고, 사실 나는 그의 어떤 아이디를 기억하기도 하지만, 최근에 일어났던 진중권의 블락사태 때문에 그를 주목하게 되었고, 트윗에 올라오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사실은 책 한권 선뜻 사기보다는 빌려보려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덤덤한 추종자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추종자들의 호기심에 딱 들어맞는 글이다. 똘똘한 소년이 어떻게 자라 이 암울한 시대의 우울한 청춘이 되었는지, 그 과정의 어떤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평범하달 수는 없지만, 이 개별적 청년의 삶은 그가 겪어 온 팍팍한 시대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몇 주 전에 가입한 주부독서회의 도서목록은 참 다채롭다. 7월 뿐 아니라 10월까지의 일정이 나와 있는데, 이중섭부터 네루다, 화폐전쟁까지 종횡무진이다. 그 중에<88만원 세대>도 있다. 나는 갓 들어 간 신참인 주제에 겁 없이 이의를 제기했다. <88만원 세대>가 절판 되었으니 책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저자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효용이 다 했다고 선언한 책을 굳이 지금 읽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다가, 책을 살 수 있다는 회장님의 한 마디에 GG했다. 사실 읽어서 나쁠 책도 아닐뿐더러 훌륭한 책이다. 괜히 아는 척 한 것인데, 거기엔 꼬인 마음이 있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우석훈은 자신이 의도한 변화가 20대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판을 선언했다. 우석훈은 <88만원 세대>를 읽은 20대가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기 바랐지만, 오히려 이 책을  핑계 삼아 행동하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학생시절, 몇몇 아이들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너희들은 수업을 들을 자격도 없다며 삐져서 문을 밀치고 나가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라 소리치던 일방적 권위주의의 변형이다.  이에 대해 공저자 박권일은 절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석훈의 주장은 책에 대한 과대평가이며, 책의 한계는 독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88만원 세대>는 2007년에 출판되었다. 우석훈의 절판 선언은 2012년에 있었으니, 우석훈은 고작 5년 만에 자신의 책에 대한 실천적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분기를 폭발한 것이다. 어디서 그런 자만심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책 한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을 품을 수는 있지만, 책 한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고 성깔을 부리는 것은 광태에 가깝다. 그것도 누구보다 청년세대를 잘 이해하는 것처럼 책을 썼던 저자가 말이다. 딱 386 세대인 저자 우석훈은 386세대와 88만원세대를 갈라놓으며, 88만원세대의 편에 서서 386세대를 비판했지만, 사실 우석훈의 태도는 딱, 그가 비판한 386세대의 그것과 같아 보인다. 이 개새끼들! 너희에겐 이 책이 과분해!! (물론 오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우석훈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아니라, 그 의미가 이렇게 읽힌다는 것이다. 세상이 하 흉흉하니 별 사족을 붙여야 한다.)

  내가 애먼 독서회의 목록을 두고 대들었던 사연은 대강 이러하다. 그래서 나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기다렸다. 내가 아는 88만원세대의 대표 논객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의 2부와 3부는 직접적으로 <88만원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 나는 <88만원 세대>가 독서회에서 토의될 때, 반드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함께 논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이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혼자라도 꼭 이 책에 대해 떠들어 볼 심산이다. <88만원세대>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세대론을 도입했다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88만원세대>에 의해 ‘대상화된’ 그 88만원세대의 <88만원세대>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올라간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p132’ 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내려가는 사회’의 ‘내려가는 청춘’ 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이다.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으나 그 투자를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20대는 부채감에 시달리며p285’  침묵한다. 그리고 보수로부터도 진보로부터도 공격당한다. ‘20대 개새끼론’과 ‘20대 책임론’이 그것이다.  20대의 부모 세대인 50대 이상은 “배가 처부른 젊은이들이 눈높이를 높여 취직을 안 해서 외국인 노동자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범죄율도 상승하고 청년 실업률이 늘어나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p283"며 ‘20대 책임론’을 제기한다. 이 시대 한국의 경제 문제가 20대의 처부른 배 때문이라는 비난이다. ‘20대 개새끼’의 첫 발화자는 나꼼수의 김용민이라고 한다. 그러니 ‘20대 책임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가카때문이다’와 기본적 태도에서 동일할 것이다. 이명박 이후 수구집권의 모든 책임을 20대 개새끼에 전가하는 태도다.

  「한쪽은 20대 책임론으로 경제의 문제를 전가하고, 다른 한쪽은 88만원 세대론으로 한국 정치의 문제를 전가하니 담론의 세계에서 20대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이 말들이 올바르다면 20대들은 한국 사회문제의 유일한 원인이며, 20대들만 개조하면 한국 사회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다. 20대를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정말로 그렇게 믿는지 묻고 싶다. 현실로 돌아오면 20대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인 아버지와 민주당 지지자인 삼촌들에게 “언제 취직하냐”는 압박마저 받고 있을 게다.p283」

 

  우석훈이 ‘20대 개새끼!’(라는 뜻을 표출했다는 것이지,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해버린 지금에야 우스워져버렸지만, 사실 <88만원세대>는 20대에 한국사회의 모든 책임을 묻는 <20대 책임론>과 <20대 개새끼론>에 대한 일종의 ‘방어 담론’ 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구조’를 갖춘 세대론이 아니었던가. 이에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 세대 담론에 맞서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호출하는 세대론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대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지만, 그 책임을 《88만원 세대》에 전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p176」

  <88만원 세대> 출간 5년, 계급이나 계층의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단순 치환해 버린 ‘세대 담론’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있어왔지만, <88만원 세대>론은 말하자면 천박한 세대론으로부터 20대를 옹호하고 주체화시키기 위한 고급 세대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론은 세대론이다. 저자들 또한 이런 문제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박권일은 저자들의 작업이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를 입힌다는 것”이었으나 “세대론에 집중하다 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 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 되었다고 아쉬워한다. (p176)」

  당의糖衣, 그 사탕발림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88만원 세대>는 그 덧입힌 옷이 내용의 전부인 양 인식되고 이용되어 왔다. 물론 이 당의 코팅은 이미 천유로 세대라는 유행어를 가진 유럽이나 일본에서 습득해온 선진국형 기술이다. 이 코팅 기술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저자 우석훈마저 20대 개새끼해버리고 말았으니(뜻이 그렇다고 ;;), 이 책에 대한 오해를 단순히 독자의 몫으로만 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착한 세대론이든 나쁜 세대론이든, 그것이 사회 구조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원인을 하나의 뚜렷한 적의 형상을 통해 은폐해 버린다는 것에 있다. 그 결과 저자들의 의도와 얼마만큼 부합하는지 모르겠지만, 386세대 전체는 20대에 의해 진짜로 나쁜 개새끼가 되어버렸다. 386이 욕을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20대는 자신의 문제를 편리하게 386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사회에 오히려 더 무관심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우석훈이 지금에 와서야 비난한 20대의 냉소는 사실 우석훈 자신이 386세대를 20대의 주적으로 던져 주었을 때 예견되었어야 마땅했는지 모른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386 주적’ 놀이의 엉뚱한 계승자가 바로 변희재라는 한윤형의 주장이다. 물론 변희재의 386세대와 젊은 세대 편가르기는 세대론이 아니라 ‘변형된 인종주의’라는 박권일의 지적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여하튼 《88만원 세대》의 백미로 꼽히는 서문을 통해 저자들은 ‘개념 없고 노력도 안 하면서 정치적 관심도 없는 되바라진 20대’와 ‘편하게 취업해서 운동 경력으로 꼰대질 하는 386세대’라는, 적대의 전선을 불타오르게 했다. 변희재류가 여기에 꼬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는 20대 청춘들에게 덧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겨 냈다. 그러나 그것은 ‘묵시론적인 예언’서 이기도 했다.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론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인데도, 요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어른들의 ‘상식’에 맞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후 세대의 평생 동안의 소득은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p176)」

  이 묵시록은 틀렸는가? 현실의 단면을 말하자면, 이 예언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 저자 한윤형에 의하면 ‘계층 불평등의 세대 전이’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된다. 단,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에서. 물론 여기서 개념이 충돌한다. ‘특정 계층 내’의 ‘계층 불평등’ 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아마도 중산층이라고 불렸던 특정 계층이 몰락하면서 계층이 분화됨과 동시에 그것이 세대로 전이된다고 읽어야 될듯하다. 여기서 한윤형은 ‘미래’를 강조한다. 한윤형이 말하는 계층 불평등이란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래의 세대에게 곧  전이될 불평등을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88만원 세대론’은 원래부터 88만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다. 박권일은 여러 지면에서 자신은 ‘88만원 세대론’이 청년 빈곤층과 기성세대 빈곤층의 연대를 위해 쓰이기를 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88만원 세대’ 담론이 지적한 문제와 그 담론이 성공한 요인은 모두 중산층의 불안 심리 내지는 중간계급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즉 ‘계층 불평등의 세대전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세대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계층이 사실상 그간 한국의 내수 경제를 지탱해왔단 점을 생각하면 이들 내부의 ‘세대 문제’야 말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라 할 수 있다. p179~180」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가 터져 나오는 방식이다. 88만원 세대의 묵시론적 예언은 미국, 유럽, 일본 할 것 없이 세계 도처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바라보는 중간계층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가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던 ‘좌파적 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이다. 50대의 보수화뿐만 아니라 20대의 보수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자신들의 주적인 386세대가 좌파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적개심은 자연히 20대들을 좌파의 대척점에 서도록 추동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중간계급의 욕망’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고, ‘중산층의 불안’은 공포에 가까워진다.

 

 

  인디고 연구소의 젊은이들이 슬로베니아로 날아가 직접 지젝을 인터뷰한 책인 <불가능성의 가능성> 에는 68혁명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프랑스의 많은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 68년의 가장 멋진 순간을 무엇이라 말하는지 아십니까? 근교에서 당신은 차를 타고 와서, 노트르담 성당 북쪽에 차를 주차하고, 그리고는 센 강을 건너서, 시위를 하고, 차 몇 대에 불을 지르기도 하며, 여러분의 차가 아니니까 딱히 신경 쓰지도 않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가서 카페에 앉아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p127」

  이 무슨 된장녀스런 시위담일까 싶지만, 80년대 386들도 시위하고 밤새 막걸리 집에서, 호프집에서 술 퍼먹고 노래하고 토론했다. 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여유와 그런 처지를 말하는 것이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자유와 평등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게거품을 무는 것이 위선처럼 보이지만, 논쟁과 토론은 그런 곳에서 활발히 벌어진다. 논쟁과 토론이 없다면 희생과 투쟁은 있어도,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거나 합의해 나가기는 어렵다. 왜 사회 전체에 대한 투쟁은 노동자 계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만한 중간계급, 상부구조와 토대가 일치하지 않는 강남좌파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가에 대한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다. 먹고 살만해야 자유고 평등이고 자각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자유라는 최소한의 공간’ 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88만원 세대>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 명문대생들이었다는 현상에 대한 또 다른 풀이가 될 수 있다. 명문대생들에게는 어쨌든 88만원 세대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는 있다. 잠시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지만, 운 좋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격차는 <88만원 세대>가 보여주는 묵시록만큼이나 끔찍하다. 그러나 지잡대의 경우, 현실에 출구는 없다. 차라리 환상을 가지는 것이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취직 걱정을 하는 지방대생들은 차라리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 출발선상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토익 점수 따고 자격증 따면 명문대생과 비슷한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위안하거나, 이게 실패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을 때에도 살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일단 위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게다. 이들에게 《88만원 세대》담론은 벗어날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체념하고 따르는 것이 빠르다. p153~4」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80년대 이른바 386세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특권층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졸업만하면 취직 걱정은 없었고, 취직만하면 먹고 살 걱정은 없던 시절이다. 2,000년대 촛불집회 역시 중간계층의 열망이었다. 참가자들 각자의 구체적 욕망이 무엇이었던 간에, 먹고 살만해진 그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갈망했다. 그것의 상징이 강남좌파다. 강남에서 학원해서 진보당에 쾌척하는 삶의 모순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강남 학원은 계급을 더욱 공고히 하고, 진보당의 기본 이념은 계급철폐에 가까울 텐데도 말이다. 여하튼 경제적 여유가 우파든 좌파든 선택할 수 있는 사상의 여유마저 만들어 준 셈이다.

  지금 정치 참여를 놓고 서로 삿대질 해대는 386세대와 88만원세대의 격차도 비슷한 양상이다. 먹고 살만한 386세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먹고 살기가 막막한 88만원세대 앞에 개죽이 스티커를 내밀며 속으로 바가지바가지 욕을 해댔던 2004년 총선 때의 소위 ‘투표독려 캠페인’이 생각난다. 민망하다.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일이 자랑스러웠는데, 기실 이면에 놓인 이런 사회적 문제에는 전혀 무지했다. 우리는 참 해맑은 386이었다.

 

 

 

  20대가 정말로 보수화되었는지, 정치에 무관심한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는 통계도 있고 그 반대되는 논거도 있다. 이번 대선만 보더라도 20대는 열심히 투표했다. 그런데도 졌다. 중요한 건 사실 이런 논쟁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다. 정당이 그려내는 꿈이든 운동가들이 보여주는 청사진이든, 진짜 능동적인 미래의 비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열심히 적들을 만들어 반대만 해왔다. 이회창만, 이명박만, 박근혜만 아니라면 이 가혹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연히 사라질 것처럼 행동해 왔다. 노무현도 김대중도 못한 것을 문재인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또 한 번 속아 주었다. 다음 번엔 안철수에게 속아 줄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속아주면서 한없이 ‘내려가는 사회’에 살아야 하는 걸까? 아마도 평등자유라는 좌파적 꿈, common이라는 공동의 삶에 대한 대안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약 없이 냉소하며 속아주어야 할 것이다. 가짜 적들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하면서, 파시즘의 광기에 시달리면서. 그러니 당장 꿈을 그려낼 능력이 모자란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엉뚱한 적을 만들어 내기 보다는. ‘재특회’는 생각 보다 가까이 우리 안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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