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12월 29일 쓴 글입니다.

 

 

  지난 여름 나는 처음으로 변비가 주는 극심한 고통을 체험했다. 위장약 때문이었다. 평소 변이 묽은 편이라 처음에는 변이 뭉쳐지는 것이 오히려 위가 정상화되는 신호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이 넘어가자 너무 단단하게 뭉쳐진 변이 좁은 문(항문;;)을 통과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도 커질 대로 커진 덩치를 밀어내지 못했다. 저절로 눈물이 났다. 피를 보고도 모자라 관장약을 넣고 참 별별 짓을 다했다. 급기야 병원에 가려했지만 관장을 해주는 병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조짐이 좋지 않으면 더러울 것 같은 음식도 가끔 먹는다. 위가 나빠서 맵고 짠 음식은 물론이고 밀가루 음식도 먹지 않았더니 꼭 약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순한 음식이 장을 강하게 자극하지 못하여 장의 운동능력이 떨어진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요구르트나 채소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자장면 같은 약간 비위생적일 것 같은 음식들이 장을 더 잘 자극한다는 것을 먹어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위장관이라는 것도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순한 것, 자극적인 것 등이 적당히 섞여야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강렬한 체험이었다.

 

 

  “빵꾸똥꾸‘ 해리는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난리를 치른다. 엄마 현경이 야채를 먹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해리가 찾는 것은 오로지 갈비다. 해리는 갈비만 먹을 뿐 아니라 그 갈비는 해리만 먹어야 한다. 신애가 한 대라도 손을 대면 내꺼야를 외치며 사납게 빼앗는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해리는 갈비를 포기하지 않는다. 날마다 먹어도 또 먹어야 하고 모든 갈비는 해리의 것이어야만 한다. 갈비뿐만이 아니다. 신애가 조금이라도 먹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어김없이 해리가 빼앗아 버린다. 심지어는 해리가 버린 것조차 신애가 가지려하면 도로 빼앗아 버린다. 아빠가 분홍색 가방을 사오자 해리는 쓰고 있던 노란색 가방을 버리지만, 버린 노란색 가방을 신애가 매고 나오자 기어이 도로 빼앗아 버리고 만다. 그래서 신애는 보석이 쓰던 서류가방을 들고 학교에 간다. 그것도 모자라 해리는 우유에 금을 그어 두고 자기가 없는 사이 신애가 몰래 먹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는다. 해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빵꾸똥꾸”와 “내꺼야”다. 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빵꾸똥꾸”이고 해리네 집에 있는 모든 것은 “내꺼야”다.

  해리는 미움 받을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해리를 미워하기 보다는 해리를 보며 더 많이 웃는다. 해리역의 진지희가 입이 딱 벌어지게 연기를 잘 하기도 하지만, 해리를 통해 보여 지는 ‘자본의 욕심’에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실소이며, 그 풍자가 주는 웃음이다. 항문이 찢어져도 혼자만 먹으려는 그 욕심, 행여나 모르는 새 누가 먹을까 우유에 금을 그어 놓는 그 그악함. 해리는 원색적으로 나쁜 캐릭터이지만 우리는 해리를 미워하는 만큼 측은해한다. 혼자 다 가졌지만 늘 혼자인 해리가 불쌍하기 때문이다. 가족들 중 누구도 해리와 놀아주지 않고 살갑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래서 해리는 종이컵과 빈 박스만으로도 재미있는 신애와 세경을 부러워하고 부러운 만큼 심술을 부린다. 종이컵도 빼앗고 빈 박스도 빼앗아 버린다. 그러나 해리에게는 그 빈 박스로 손님 놀이를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 그래도 해리는 그 박스를 “내꺼야”로 만들고 만다.

 

  해리의 “빵꾸똥꾸”는 징계를 받았다. 할아버지 친구와 엄마 친구에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에게 심히 마음이 상하신 한나라당 어르신들이 어린이들에게 유해하다는 이유로(미루어 짐작컨대,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해리를 징계했다. 이후 한 동안 해리는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로 부르지 못했지만 우리의 김PD님께서 그 억압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대형 “빵꾸똥꾸”를 목놓아 외치게 해 주셨다.(지금 해리가 뭐라고 외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 때 보면서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한나라당 꼰대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마도 “빵꾸똥꾸”라는 버릇없는 비속어가 아닐 것이다. 해리가 보여주는 자본의 욕망. 먹기만 하고 내놓지는 못하는 무지막지만 자본의 탐욕. 전부 다 “내꺼야”여야 직성이 풀리는 소유욕. 가난한 자의 마지막 속옷까지 벗겨야 속 시원한 자본의 이기심.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변비현상. 해리가 보여주는 분칠하지 않은 자본의 맨얼굴에 심히 상하신 심기가 만만한 “빵꾸똥꾸”를 향해 터진 것일 것이다.

  그래봤자 어짜피 우리나라의 자본은 별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마트 피자를 거쳐 통큰 치킨에 와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물론 분칠을 원하지 않는 자본의 얼굴을 솔직하다고해야할까 뻔뻔하다고 해야할까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진 않았다. 논쟁은 5000원짜리 치킨의 가능성과 체인점의 폭리 여부로 흘러갔다.

  SSM과 이마트 피자, 통큰 치킨은 신애의 갈비 한 대마져 빼앗아버리는 해리의 탐욕이다.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도 허용하지 않는 해리에게 지친 신애는 급기야 해리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절교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던 해리는 신애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친구인 적이 없으니 절교할 것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혼자가 된 해리는 자신 보다 덩치가 더 큰 남자 아이들에게 타이거 마스크도 빼앗기고 얻어 터져서 학원에 가는 것도 무서워하게 된다.

  아직 우리의 자본은 혼자가 되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 자본 보다 더 무서운 자본은 없다는 것인지 주저 없이 신애의 갈비 한 대를 빼앗고도 의기양양하다. 그런데 문제는 순환이다. 변비가 계속되면, 똥구멍이 궁극적으로 막히면 죽을 수밖에 없다. 동네 슈퍼, 피자가게, 치킨가게가 모두 문 닫고 나면 이마트와 롯데마트의 그 많은 물건, 삼성과 LG의 그 많은 제품들은 누가 사 줄 수 있을까. 88만원 세대가 취직을 못하고 가게도 못하고 계속 88만원 알바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스마트폰을 언제까지 사 줄 수 있을까?

  시크릿가든의 김주원이 운영하는 백화점은 VVIP 라운지를 운영한다. 일 년에 1억(?) 이상 팔아 주는 VVIP 1명이 일 년에 100만원 쇼핑하는 떨거지 100명보다 낫다는 계산이다. 계산상으로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틀어 한번 계산해 보면 어떨까? 그 백화점 하나가 아니라 전체 우리나라 쇼핑 시장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면? 그러면 일 년에 1억 구매자의 총 구매량이 많을까, 아니면 100만원 떨거지들의 총 구매량이 많을까? 떨거지들이 모두 사라지고 VVIP들만 구매하는 세상이 온다면 김주원의 백화점은 나날이 번창하고 행복할까? VIP니 VVIP니 하는 발상은 마케팅의 측면에서 여러 가지 장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피라미드의 아래쪽을 받치고 있는 것은 수많은 떨거지들이다. 이 떨거지들이 모두 구매력을 잃고 사라진다고 해도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그렇게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날 수 있을까? 명퇴해서 마지막으로 한다는 동네 치킨집 가족들이 그 떨거지인데, 동네 슈퍼 아줌마가 그 떨거지인데, 그것들이 다 망해서 떨거지들이 다 죽어버리면 도대체 그 백화점은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잉여가치는 원칙적으로 총자본의 관점에서 자신이 생산한 것을 다시 사는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가라타니 고진이 한 말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 맑스는 이렇게 조금 더 어렵게 말했다. “ 자본주의를 주인-노예 관계와 구별시켜 주는 점은 노동자가 교환가치의 소비자이자 소유자인 자신과 대면한다는 점, 그리고 화폐 소유자의 형태로, 화폐의 형식 안에서 그는 순환 과정의 분명한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무한히 많은 중심들 중 그 중심은 노동자로서의 특성이 소멸되는 중심이다. ”

  아무리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비자가 곧 노동자이다.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순환되는 돈이 없이는 노동자가 소비자로서 구매력을 가질 수 없으므로 자본 역시 아무런 잉여 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순환하지 못한다.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창조된다. 그러나 거기서 생산된 가치는 잠재적인 것일 뿐이고 상품이 판매되어서 M-C-M`의 순환이 완결될 때만 가치로 현실화 된다”

  빌 게이츠 같은 거대 자본가들의 기부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올 여름에 읽은 어떤 책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자선 행위-공익을 위한 그들의 엄청난 기부-는 단지 개인의 특이한 성격에서 나온 게 아니다. 진심이든 위선이든 그것은 자본주의적 순환의 논리적 정점이며, 엄격히 경제적 관점에서도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기부행위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치명적인 덫에 빠지지 않고 진정으로 필요한 빈자에게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균형을 재조정하는 것과 같다. 또 하나 덧붙이면 그것은 균형을 재확립하고 주권적 소비를 통해 티모스(용기)를 주장하는 전쟁과 같은 또 다른 방식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설은 우리가 처한 슬픈 곤경을 암시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스스로 재생산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 재생산 사이클을 지탱하기 위한 경제 외적 자선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재생산될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골치 아픈(나는 경제는 늘 골치 아프다;;) 이야기까지는 들어가지 않더라도, 일단 빌 게이츠의 자선 행위는 자본주의적 순환을 유지하기 위한 자본가의 논리적, 필연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최종 소비를 통하여 생산품의 가치를 현실화시켜 줄 구매력 있는 소비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 입에 달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우리에게는 그런 논리를 갖추고 있는 자본가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의 자본은 여덟 살짜리 해리처럼 천진한 맨 얼굴을 하고 있다. 내일 똥구멍이 막히더라도 오늘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치우겠다는 천진한 탐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천진함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 나는 아직 별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지만,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울 지도 모른다. 원희룡이나 남경필 보다 때로는 보온 상수가 고마운 것처럼.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그 만큼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어두울 때 새벽이 온다는 말처럼.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해리는 신애와 함께 성장한다. 산골 소녀 신애는 해리를 통해 자본주의의 질서를 배우며 쪼그라들고 혹은 성장하고, 해리는 신애와 더불어 함께 나누는 기쁨을 배운다. 어쩌면 우리 소박한 서민들의 꿈 역시 그러할지도 모른다. 부자들이 조금 더 나누어 주면, 일자리를 조금 더 늘려 주면, 서민의 상권을 보호해 주면, 비정규직 정규직 차별을 없애주면, 재개발로 쫒아내지 않으면.... 거꾸로 서민들이 쟁취해 나갈 수 있다면. 일 자리를 지키고, 상권을 지키고,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고, 교육의 평등을 쟁취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안에서의 가망 없는 몸짓과 비굴한 콩고물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자기 터전을 뒤엎을 준비가 못된 (뒤엎지 않으려고 하는) 서민들의 꿈은 해리처럼 그렇게 우리의 자본이 성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낱 시트콤의 몽상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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