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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2부. 물 자체 The thing itself :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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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은 가능할까?
4장 전체는 헤겔에 대한 변명처럼 보인다. 통상 헤겔은 한때 이름을 드날렸으나 지금은 도서관 서가에나 꽂혀 있는 낡은 철학자로 인식된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가 그랬듯,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후대의 난장이들에 의해 극복된 것이다. 이것을 지젝은 단절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에 대한 단절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주장한다. 헤겔의 핵심적 사상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오인 속에 너절하게 비판되었기 때문이다. 지젝이 헤겔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절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절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망자를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듯이, 제대로 된 단절만이 헤겔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대지를 소유했다고, 신의 마음을 읽는다고, 자신의 정신의 자기운동으로부터 현실 전체를 연역할 수 있다고, 자임하는 절대 관념론자’ 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물론 ‘이성의 간지’ 이다.
지젝은 이에 대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 오른다’ 로 응답한다. 어떤 이성도 운명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은 불투명한 미래 속에 주체가 내린 결단과 행위에 의해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를 통해 필연성이 구성될 뿐이다. 행위가 일어난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다. 의미는 사후적으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젝이 강조하는 개념은 ‘소급성’ 이다. 헤겔의 '전제의 정립'이 바로 소급성을 의미한다. 세계는 이미 완성된 전체, ‘총체성’이 아니라 '비전체'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 닫힌 빗금쳐진 세계에 소급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면, 그 때 비로소 총체성이 얻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완전하지 않다. 그 중심에는 항상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대타자는 (W)hole 로서의 전체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대강 이렇다. 지젝이 되풀이 강조했던 것들이라 그렇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었다. 지젝의 헤겔 해석은 정통이 아니라 일종의 이단이라는 풍문이 있지만, 해석에 정통이 없다는 것이 바로 탈구조주의 시대의 이론이 아닌가? 지젝의 해석이 자신의 논리 내에서 정합성을 획득했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해석을 택할 것인가는 독자들의 선택일 뿐이니 말이다.
0.
역사적 사유의 주요 특징은 ‘단절’ 이후에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 이후에 다시 중세 철학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헤겔에 대해서도 똑 같은 단절을 말한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이후로는 다시 헤겔의 전통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그런데도 지젝은 부단히 헤겔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지젝에게 헤겔과의 단절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단절은 비록 헤겔에게서 정점에 달한 모습으로 구현된 관념론과의 단절을 표방하지만 헤겔 사유의 결정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
단절은 무시가 아니라,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철학적 경의’ 가 되어야 한다. 계승과 확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다. 그러나 헤겔과의 단절은 마치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없었던 것처럼 사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표방되었다. 지젝이 헤겔의 ‘사변적 사유’를 재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헤겔과의 진짜 단절을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1. 헤겔 대 니체
헤겔에게 패배를 성공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전혀 ‘실제적인 것’ 이 아니다. 오직 형식적인 전환만 있을 뿐이다. ‘패배 자체를 승리로 제시하려는 관점의 변화’ 만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진짜 승리라 할 수 있을까? 니체에 의하면 이 승리는 가짜다. 싸구려 속임수다. 상식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관점의 변화만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주사파의 정신승리와 무엇이 다를까?
지젝이 들고 나오는 것은 헤겔의 ‘부정성’, 부정의 힘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예로 삼고 있다. 내용은 통과! (다음 절에 이어지므로..)
2. 투쟁과 화해
헤겔의 사상을 ‘모든 것은 변한다.’로 파악하는 통상적 인식은 철저히 반 헤겔적이다. 이 오해를 대중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반동과 진보,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갈등으로 규정하며, 헤겔을 ‘영원한 투쟁’의 철학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헤겔에게 투쟁의 외적 장애물은 환상에 불과하다.
「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주체가 적으로, 극복해야 할 외적 장애물로 지각하는 것은 주체의 내재적 비정합성이 물질화된 것이다. 투쟁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은 정합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형상을 필요로 하며, 그의 정체성 자체가 적에 맞서 있는 것에 달려있다. p368」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유대인이다.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침입자라는 유대인 형상은 자본주의 사회질서의 비정합성, 즉 계급적대를 은폐하기 위한 대리물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체제인 것이다.
「주체는 투쟁에 뛰어들며, (일반적으로 승리 자체 속에서) 패배하며, 그리고 이 패배가 그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 헤겔을 니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리를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즉 니체가 소생시키려는 활기 넘치는 영웅주의의 순진성, 모험의 열정, 투쟁에 전면적으로 뛰어들려는 열정 또는 승리 또는 패배의 열정. - 이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이다.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그리고 패배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p369」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적 화해를 기만적이라 비판한다. 현실의 적대성은 그대로 두고 이념 속에서만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현실을 변혁하는 대신 단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만 제안할 뿐이라고 헤겔을 비꼬았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런 비판은 헛 다리 짚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헤겔에게는 “소외로부터 화해로 이행하려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지각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헤겔의 화해는 관념적일 뿐이고 현실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철저한 사회변혁을 통해 현실적 화해가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 여전히 옳은 것이 아닐까?
"이처럼 아직 아닌 것으로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의 갑작스러운 소급적 전도(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목표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에서 갑자기 그것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간다) p373"가 헤겔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으로부터 구해준다는 것이 지젝의 반론이다.
「최종적 화해에서 변하는 것이라고는 주체의 관점뿐이다. -주체는 패배를 인정하며, 그것을 승리로 재기입한다. 따라서 화해는 적대성의 극복이라는 통상적인 이념 이상인 동시에 이하이다. 이하인 것은 아무것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상인 것은 이 과정의 주체가 (특수한) 실체 자체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p374」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지젝이 예로 든 ‘성령’은 수긍이 간다. 회중은 그리스도의 진짜 환생을 고대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회중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귀환인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기만이다. 회중을 성령으로 보는 것 그것이 화해라는 것. 지젝이 늘 하는 말로, 패배를 승리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항상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진정한 사변적 의미는 오직 반복적인 읽기를 통해서만, 첫 번째의, 잘못된 읽기의 사후효과 (또는 부산물)로만 나타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는 과잉적인 혁명의 사생아가 아니라, 합리적인 근대적 국가에 도달하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실패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불필요한 과잉으로 드러난다.
3. 해야 할 이야기
「진정 역사적인 사유는 어떻게 그처럼 보편화된 ‘모든 것은 변한다’와 단절할까? ..열쇠는 소급성이라는 개념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헤겔과 마르크스 관계의 핵심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르크스에게서 헤겔로 돌아가야 하며, 마르크스 자체를 ‘유물론적으로 전복’시켜야 하는 주된 이유이다. p380」
소급성은 예를 들면 과거를 재창조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작가는 자신의 선도자들을 창조한다. 그의 작품은 미래를 수정하듯이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수정한다.” 고 했다. 대표적 작가는 역시 카프카 이다.
우리도 지금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두고 투쟁을 하고 있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사실이지만,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이냐 민족사관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좌표를 차지한다.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전락할 수도 있다. 현재의 투쟁이 과거를 소급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헤겔적 소급성의 핵심적인 철학적 함의는 그것이 충분근거율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오직 과거의 원인들의 총합이 미래의 사건을 규정하는 일직선적 인과성이라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 소급성은 (과거의, 주어진) 원인들의 집합은 결코 완벽하고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이유들은 일직선적인 질서 내부에서 그것들의 효과들에 의해 소급적으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p390」
4. 운명을 바꾸기
소급성에 관한 설명을 조금 더 들어 보자. ‘진정한 행위’ 에 있어 소급성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일상적 활동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단지 우리 정체성의 좌표들을 따를 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위는 행위자들의 존재의 잠재적인 ‘초월론적’ 좌표들 자체를 (소급적으로) 변화시키는, 또는 프로이트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우리 세계의 현실성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지하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 움직임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건이” 재귀적으로 일종의 “그것이 조건으로 주어진 어떤 주어진 것 위로 되접어 꺾이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순수 과거가 우리 행위를 위한 초월론적 조건인 반면 우리 행위는 새로운 현실적 현실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소급적으로 이러한 조건 자체를 변화시킨다. p392」
소급성이 그토록 핵심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좌표 자체를 바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10년'이란 유행어는 소급성을 놓고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을 어떻게 소급시키는가에 따라 우리의 좌표는 달라진다. 발전하는 좌표인가, 퇴보하는 좌표인가.
헤겔의 ‘이성의 간지’는 조롱거리로 전락할 때가 많다. 역사적 과정의 끈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성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목적론적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전혀 헤겔과 상관이 없다. 헤겔에게는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 도구가 되기를 자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스탈린주의적 혁명가 상을 위한 자리는 없다. 뿐만 아니라 헤겔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 역사적 필연성은 역사 실현의 우연적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과정은 그 자체로 열려있고, 결정되어 있지 않다.
5. 미네르바의 부엉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사유가 사후에야 존재를 따른다는 헤겔의 통찰이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는 사유의 우위를 다시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깨를 올라타고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역사의 텍스트에 부합하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 자체는 반복해서 소급적으로 재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소급성이 미래를 선험적으로 예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아오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행위의 결과들을 완전히 예견할 수 있다면 주체의 자유는 없다. 다만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들을 실현하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을 배경으로만 주체는 자유롭다.
6. 잠재태 대 잠재성
‘헤겔은 영원 속에서 시간을 지양한다.’ 고 비판받는다.- 그렇다. 하지만 이 지양 자체는 우연적인 시간적 사건으로 출현해야 한다. ‘헤겔은 우연성을 보편적 합리적 질서 속에서 지양한다.’고 비판된다. - 그렇다. 하지만 이 질서 자체는 우연적인 초과에 달려 있다. ‘헤겔의 투쟁은 대립물들의 화해의 평화 속에서 지양된다.’ 고 비난받는다.- 그렇다. 그러나 이 화해 자체는 그것의 대립물로,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출현해야 한다.
헤겔에 반대하는 주장은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들이 헤겔의 사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헤겔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주장을 전개하기는 쉽다. 즉 그의 체계는 범주들로 완전히 ‘포화된’ 집합으로,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의 논리학에서 각각의 범주는 벗어날 길 없는 내재적·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선행 범주들로부터 이어지며, 이러한 범주들의 계열 전체가 자폐적인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주장이 무엇을 놓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은 이처럼 ‘포화된’, 자족적인, 필연적인 전체가 아니라 그러한 전체가 형성되는 열려 있고 우연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비난은 존재와 생성을 혼동하고 있다. 즉 그것은 헤겔에게서는 소급적으로 존재의 필연성을 낳는 생성 과정인 것을 존재의 고정된 질서(범주들의 네트워크)로 간주한다. p414~5」
「비전체의 그러한 존재론은 철저한 우연성을 주장한다. 필연성을 손에 넣는 어떠한 법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법칙이 그 자체로 우연적이다. - 그것은 어느 순간에든 뒤집어질 수 있다. 그것은 충족근거율을 중단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식론적 정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존재론적 정지이기도 하다. 즉 인과적 규정들의 네트워크 전체를 결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쇄 자체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으로, 생성의 내재적 우연성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어떠한 선-재하는 질서에도 종속되지 않은 그러한 생성의 카오스가 철저한 유물론을 규정하고 있다. p418」
우연성은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잠재태와 분명히 구분된다. 잠재태의 사례는 주사위 던지기다. 주사위에는 6개의 숫자가 잠재되어 있고, 던져서 나온 숫자는 그것의 잠재태가 실현된 것이다. 잠재성은 7번째의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무엇인가의 출현이다.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는 헤겔을 잠재성이 아니라 잠재태의 철학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잠재성은 가능한 것들의 집합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출현하며, 선-재하는 가능한 것들의 집합에서는 어떠한 자리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가 현행화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 새로운 것은 단지 선-재하는 가능성을 현행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행화가 자신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소급적으로 열어 주는) X가 출현할 때 등장한다. p419」
따라서 무로부터 어떤 현상의 출현은 더 이상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반대로 신의 비존재의 표시이다. 자연은 비전체로, 어떤 초월적 질서나 힘이 그것을 조종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여기서 유물론적 개념이 된다. ‘기적’은 신의 비존재의 드러남이다.
「생성 과정은 그 자체로서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필연성 자체의 생성(점진적이고 우연적인 출현)이 된다. ‘실체를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또한 (다른 무엇보다) 바로 이것이다. 즉 공백으로서의 주체, 자기 관계 맺기적인 부정성으로서의 없음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모든 새로운 형상이 출현하는 무 자체이다. 다시 말해, 모든 변증법적 이행 또는 전도는 새로운 형상이 무로부터 출현하고, 소급적으로 자신의 필연성을 정립 또는 창조하는 이행이다. p423」
7. 원환들의 헤겔적 원환
헤겔은 “정신이 정신인 것은 오직 자체의 결과로서 일 뿐” 이라고 했다. 이 말은 헤겔의 정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통상적 인식이 심각한 오인임을 보여준다. : 정신은 자신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며, 그런 다음 자신을 그러한 타자성 속에서 인식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내용을 재전유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사람들은 비슷하게 답한다. 일단 내가 먼저 있고, 이 내가 밖으로 나가 대상이 됐다가, 그 대상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시 나로 돌아오는 뭐 그런 거지 ;; 그런데 지젝에 의하면 먼저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없다. 나, 자아라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하는 과정에서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먼저’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헤겔에게 “정신이 되돌아가는 자아는 그러한 복귀 운동 자체 속에서 생산되며 복귀 과정이 되돌아가는 것은 그처럼 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 된다. 본질의 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질이 자신을 외화하는 과정은 동시에 그러한 본질 자체를 낳는 과정이다. 즉 ‘외화’는 정확히 자신을 외화하는 본질의 형성과 동일한 것이다. 본질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외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본질은 오직 넓은 만큼만 깊다는, 너무 많이 인용되는 헤겔의 발언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신을 외화하고 그런 다음 소외된 실체적 타자성을 재전유하는 주체라는 유사-헤겔적 주제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타자성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선-재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는 타자 속에서의 이러한 소외 과정을 통해 출현한다. p429~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