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이 끝났다. 박경수 작가의 전작 <추적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예전 기사에 의하면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작품은 <추적자>가 아니라 <황금의 제국> 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드라마는 <황금의 제국>이 아니라 <추적자>이다. 작가로서야 아쉽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황금의 제국>은 실패한 드라마다.

  기대와 믿음을 갖고 본방을 지켜봤지만, 몰입해 보기에는 인물들이 천편일률이고, 느슨하게 보기에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빠르고 복잡했다. 한마디로 보다가 지쳐버렸다. 작가는 아는 것도 할 말도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주요 인물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모든 인물들을 다 동원해 그걸 말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인물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스타일이 다양해야 할 텐데, 거의 모든 인물들이 다 최동성 회장처럼 아니, <추적자>의 박근형(의 역)처럼 멋지게 말한다. 걸핏하면, ‘오빠가 열 살 때 말이야....’, ‘요술램프가 있었는데...’, ‘고구마 두 개를 주웠는데...’ 따위로 시작한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는 오늘을 말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인용하지 않고는 눈앞의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최서윤, 최민재, 장태주는 물론 주변의 조역들까지 하나같이 비유법 대 마왕이 되어버렸다. 말투도 비슷하다. “ ~ 했네요.” 주어가 말하는 사람 본인인데도 죄다 “ ~ 했네요.”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뚜렷하게 구분지어 놓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 개성을 다 지워버렸다.

 

  내용은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성진그룹이라는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세 명의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합집산, 거듭되는 배반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마음을 붙일 인물이 없다. 모두 다 악하고 모두 다 측은하다. 맨손으로 시작한 태주가 우리 편인가 하면, 이놈은 어느새 악마와 손을 잡고 있고, 서윤이 측은한가 싶으면 제국의 공주님은 태생답게 차갑고 잔인하다. 욕망이 재능을 앞지르는 민재가 우리 모습이지 싶으면, 이놈은 또 교활하고 치사하다. 자본주의에는 도덕이 없다는 이 냉혹한 진실이야말로 작가의 뚜렷한 의도겠지만, 도무지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드라마의 힘을 빼버린 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의 여신 정이’ 같이 너무 번연한 구도만 짜증이 나는 줄 알았지, 이렇게 너무 복합적인 구도 역시 짜증이 날줄은 나도 몰랐다.

 

  사건의 전개 역시 현기증이 난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의 우리나라 경제사 자체가 어지러울 만큼 급변했다고 쳐도, 이것을 배경으로 주요인물들이 이합집산 하는 속도는 드라마계의 LTE라고 해야 할 것이다. 24회를 이어가는 동안 매회 반전이 일어나고, 매번 배반하고 손을 잡고 또 뒤통수를 치고 또 손을 잡고, 그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반전에 반전’을 몇 번이나 흥미롭게 보아 줄 수 있을까? 몇 번 거듭되다 보면 자동적으로 또 반전이 일어나겠지 싶고, 그 반전이 하나도 신선하지 않다.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가시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파장이 너무 긴 적외선이나 파장이 너무 짧은 자외선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시영역만이 다채로운 색깔을 빛내며 우리 눈에 아름답게 들어온다. 우리 마음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너무 느리게 번연하게 진행되는 ‘불의 여신 정이’ 같은 것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는 <황금의 제국> 역시 우리 마음을 파고들지 못한다. 이 드라마의 한계는 너무 많아 모자라고, 너무 풍부해 부족하다.

 

 

 

  그러나 드라마로서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제국>은 탁월하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없다는 것이다. 착한 자본은 없다. 빌 게이츠가 천문학적인 자선을 한다고 해도, 그의 인도주의적인 측면과는 관계없이(? 혹은 은밀한 관련성으로) 그는 무자비하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빌 게이츠의 자선은 경제적 착취를 가리고 있다. 선진국들의 원조 역시 마찬가지다. 후진국의 빈곤에 그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춘 채 인도주의적 자선을 베푼다. 이것은 빌 게이츠가 두 얼굴을 가진 악마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황금의 제국>은 그에 대한 답이다.

 

  <황금의 제국> 마지막 회는 누구나 예상했을 것처럼 태주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성진 그룹은 서윤이 끝끝내 지켜냈으나,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은 이 제국의 공주는 사무친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채 검찰에 연행되었다. 파국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모두를 덮쳤다. 황금의 제국이 선택하는 인간은 인간성을 제거한, 철저한 자본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2세대를 넘어 3세대 경영이 시작된 우리나라의 자본가들은 더 이상 무식하고 탐욕스럽지 않다. 고급문화와 폭넓은 지식의 수혜를 받아 점점 품격 있는 귀족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제국의 공주 최서윤의 형상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서윤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다. 최동성 회장으로부터 그의 상징인 만년필을 물려 받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착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최동성 회장은  말한다. “서윤아, 좋은 사람이 되지 마라.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딸이 황금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착한 심성을 버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애비는 비통하게 당부한다.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의붓어머니 한정희, 사촌 오빠 최민재 그리고 남편 장태주와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치러나가며 서윤은 동생을 버리고, 오빠를 버리고, 언니를 버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처럼 자신을 가르치며 보좌하던 박전무를 버린다. 홀로 댕그라니 남겨진 서윤은 하나씩 버려야 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래서 버림받은 것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듯 서럽게 오열한다.

  그러나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려는 자, 누구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자본이 가르쳐 준 냉혹한 진실이다. 서윤은 성재처럼 따뜻하게 살고 싶다는 여리고 여린 꿈을 버렸다. 민재는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동생을 잃었다. 태주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이들은 제국이 필요로 하는 무자비한 자본가가 되었다. 제국이 이들을 바꿔놓았다. 욕망을 미끼삼아서.

  제국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제국 그 자체이다. 절대반지처럼 그것을 가지려는 자는 누구나 그것의 지배 아래 놓인다. 자본가가 냉혹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차갑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도 황금의 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눈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 제국의 제단 앞에 광기에 휩싸인 태주는 끝끝내 아버지를 제물로 봉헌한다. 아버지 같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던 마지막 다짐을 배반하고, 보상도 없이 강제 철거를 지시한다. 진압 과정에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태주는 수술비마저 거부하고, 그 철거민은 아버지처럼 병원 침대 위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태주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설희는 검찰에 태주를 고발한다. 자신이 대신 옥살이를 한 살인 사건의 진범이 태주임을 밝힌다. 폭발할 듯한 태주 앞에 민재가 미끼를 던진다. 설희에게 횡령죄와 무고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태주는 절대반지를 버리고 아버지와 설희에게 되돌아온다.  그러자 황금의 제국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성진그룹과 웃음이 넘치는 식탁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주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손에 피를 묻힌 태주는, 무엇보다 황금의 제국을 엿보아 버린 태주는 쉽사리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주는 믿었다. 황금의 제국은 지옥이지만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면 거기가 곧 천국이 될 것이라고. 사랑하는 설희와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그러나 태주는 마지막에 홀로 광활한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황금의 제국>이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본 형성의 추악한 과정이다. 장태주는 최동성을 반복한다. 이미 성진그룹이라는 제국을 일군 최동성은 신화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그룹을 키워온 과정은 장태주가 보여주는 편법, 탈세, 사기, 탈취와 동일한 것이다. 장태주는 자신도 최동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최동성의 시대는 지났다. 6.25 전쟁과 전후 재건의 혼란기, 황금의 30년을 구가하던 경제성장의 시기를 틈타 자본을 축적하고 기업을 세우고 족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대는 끝났다. 이미 자본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고 맨 손으로 제국에 덤벼드는 돈키호테의 파국은 시작부터 예정된 것이다. 그나마 한 번 주어진 기회가 IMF 경제 위기였다. 10억 달러로 제국의 심장부에 들어 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그 제국 한 가운데에서 태주는 황족들의 실체에 경악한다. 맏아들은 무능하고, 큰 딸은 어리석고, 사위는 탐욕적이고, 며느리는 이기적이다. 태주는 자만한다.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제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훨씬 뛰어나니까. 그러나 태주는 몰랐다. 이들 각각은 무능하고 어리석지만, 제국 자체는 이미 탄탄하게 짜여있다는 것을. 그물망처럼 뒤덮인 정보력, 인맥, 조직력, 거기에다 성공한 자에 대한 세간의 존경까지, 실제로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런 구조라는 것을.

  바다로 뛰어들기 전 태주는 서윤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진 것이 아니라고. 최동성 회장에게 진 것이라고. 태주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았다. 제국이라는 구조에 자신이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내가 당신들이 만든 제국 안에서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냐고 태주는 말한다.

 

  이미 떠돌이 무사가 왕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20년의 격변을 거치며 자본은 더욱 견고해졌고, 제국은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자에게만 세습된다. 최동성과 장태주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 해도 장태주의 패배는 그가 가난한 집 안에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다. 최동성 역시 빈손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성공 신화가 지금 이 시대의 청춘에게 전혀 어떤 위안도 희망도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방송이, 책들이, 멘토가 희망을 떠든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또 하나의 고문, ‘희망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고문의 끝에는 바다로 뛰어든 태주가 있다.

 

  태주와 서윤은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했다. 착하게 성공하는 동화를 꿈꾸었던 그들에게, 그들의 성공신화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작가가 들이민 진실은 냉혹하다. 우리가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을. 제국의 공주마저 자신을 다 내주어야 비로소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 SBS <황금의 제국> 공식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 경제사의 개요이다. 드라마의 빠른 전개를 따라가는데 도움을 준다.

 

1990년 신도시 개발

1997년 IMF

1998년 빅딜과 구조조정

2000년 벤처 열풍

2002년 부동산 광풍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2010년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는 시기

 

** 공식홈페이지에서 하나 더,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란?

 

전 국민이 황금의 투전판에 뛰어들었던 욕망의 시대.

그 욕망의 싸움터에 뛰어든 청년 장태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씨줄로,

국내 굴지의 재벌, 성진그룹의 가족사와 후계다툼을 날줄로,

우리 모두의 부끄러웠던 지난 20년의 욕망을 배경색으로 그려낸

우리 시대의 세밀화이며,

장쾌하고 비극적인 현대판 서사 영웅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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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88만원 세대 발제를 대신하여...

 

 

 

 

  막상 발제를 하려니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될까 걱정이다.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 책을 조목조목 살펴보려면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간단히 요약하자면 서너 줄의 문장으로도 끝낼 수 있다. 출간한지 6년밖에 안된 이 책이 서술하거나 예견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너무 분명한 현실로 닥쳐왔기 때문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저자 한윤형은 이 책을 간단히 묵시록이라 정의했다.

  “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록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인데도, 요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어른들의 ‘상식’에 맞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후 세대의 평생 동안의 소득은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p176 ”

  최근 발간된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 역시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한윤형은 1983년생, 최태섭은 1984년 생으로 2007년 『88만원세대』가 출간되었을 당시, 딱 20대를 보내고 있던 바로 그 88만원세대이다. 한윤형은 지금 미디어스라는 인터넷 매체의 기자로, 최태섭은 박사과정 중 입대를 앞 둔 자유기고가로 살고 있다. 만만치 않은 이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 아마도 자발적 선택의 비율이 적잖겠지만, 여하튼 변변치 않고(? 미안하다);; 불안정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그나마 『88만원세대』의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최태섭에 의하면 『88만원세대』이후 갑자기 불어 닥친 20대에 대한 동정론 덕분에 신문 귀퉁이나마 지면이 허락되고 여기저기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 2007년에 발간된 《88만원 세대》이후 한국 사회는 그 전에 없던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20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쌍한 20대를 위한 동정 여론과 지원을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비로운 어른들의 지원을 받아 20대 당사자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쁘게 움직였던 것은 언론과 출판이었다. 세대론을 표방하는 책들, 힘든 20대를 위로하겠다는 책들, 멘토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신문들은 너도나도 청년들을 필자로 섭외해 2030칼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잉여사회』p35 "

 

  우리가 지금 수없이 보는 멘토들과 소위 힐링용 책들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과연 20대에 필요한 것이 동정과 위로일까? 결국 또 하나의 고문에 불과할 희망을 속삭이는 걸까? 아니 우리사회가 지금 부딪힌 문제들이 20대만의 문제인 것일까?

 

 

 

 

  『88만원세대』는 우리나라에 처음 ‘세대론’ 이란 말을 대중화시킨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가장 충격을 받은 세대는 20대가 아니라 어쩌면 386세대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자부심에 넘치던 386세대는 아리랑치기라도 당하듯 뒤통수를 느닷없이 가격 당했다. 민주화의 주역으로 언제나 도덕적으로 당당했던 386세대는 졸지에 20대 나이어린 약자들의 몫을 강탈하는 파렴치한으로 전락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88만원세대』가 맨 먼저 지적하는 386의 과오는 거칠게 말해 민주화 운동의 정신과 실체적 삶의 이중적 태도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적 태도와 경제적 태도의 불일치이다. 프랑스 68혁명과 달리 우리의 87년 민주화 운동은 어떤 경제적 민주화도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68혁명의 결과 모든 대학의 국유화를 성취했다. 대학 서열화를 폐지하고, 일 년에 50만 원 정도의 등록금으로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만약 우리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다면, 20대 대학생들은 학자금 융자에이 허덕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사교육의 광풍에도 휘말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87년에 우리는 경제적 민주화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군부독재 정권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몰랐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은 ‘영광의 30년’이란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88만원세대』를 읽고 20대가 가장 격분했던 대목은 ‘서문’ 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지 않은 20대도 대부분 ‘서문’의 내용은 알고 있을 정도다. 서문의 시작은 007학점, 선동열 학점, 쌍권총, 기관총 등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전설적인 학점이야기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밑바닥 학점으로 졸업하고도, 이 억세게 운수 좋은 386세대는 척척 취직해서 쑥쑥 진급까지 하고, 현재 각계각처의 요직을 점령하고 있다. 영어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386세대가 ‘단군 이래 최대 스펙’ 인 20대들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이 어이없는 현실을 『88만원세대』가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다.

  이 충격적이고 강렬한 ‘서문’ 덕분에 저자들의 의도가 어찌됐건 간에 『88만원세대』는 표적을 빗겨, 세대 간 적개심의 화약고에 불을 붙여 버렸다. 그런데 20대들의 비참한 현실이 과연 386세대들의 이기적 탐욕에만 그 원인이 있을까?

 

 

 『88만원세대』는 경제학답게 그 원인을 밝히는 작업에 게으르지 않다. 우리가 급격한 경제 체계의 변화를 체험한 것은 물론 1997년 IMF 구제금융 때이다. 지금은 20대의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4~50대 실직 가장들의 자살이 연일 화제가 되던 때였다. 1990년대 10년간 소위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나는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한다. 명예퇴직자 명단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어느 과장님은 퇴직금을 받아 김가네 김밥을 열었네, 어느 부장님은 디자인 하청 사업을 시작 했네 따위의 소문들이 매일 돌았다. 무엇이 명예롭다는 건지,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 나가는 것이 명예라는 건지, 그 이름도 아햏햏한 명예퇴직의 광풍이 불고 나자, 부서 개편이 잇달았다. 처음 들어보는 팀제가 도입되고, 대리가 팀장인 팀도 과장이 팀원인 팀도 생겨났다. 그렇게 연공서열제는 파괴되고 성과급제가 도입되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IMF 사태는 당연히 우리의 잘못처럼 인식되었지만, 사실 그것은 세계경제가 1970년대부터 주요 경제 기조로 채택한 신자유주의가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낸 최초의 사건일 따름이다. 약 10년 뒤인 2008년,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역시 금융위기를 맞이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실패가 확인된 상징적 사건이다.

  여하튼 전면적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장은 무한 경쟁에 돌입했고, 그것의 최종 결과는 ‘승자독식’ 사회이다. “the winner takes it all" 의 결과는 당연히 심각한 양극화이다. 이제 10:90의 사회를 넘어 'Occupy Wall Street'에서 보았듯 1:99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승자독식의 구조는 우리나라에만 특유한 현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세계화가 완성된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까지 이 잔인한 구조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독 『88만원세대』가 세대 간 경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승자독식 체제가 아무런 완충 지대 없이 그대로 국가 구성원 개개인을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막 경제 체제 안으로의 편입을 준비하는 20대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86세대와 특히 유신세대는 IMF 사태 당시 이미 실직의 피바람을 겪었지만, 그 당시는 아직 재기의 기회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10년 동안 승자독식 구조가 단단해져감에 따라, 장벽은 높아지고 재기는 물론 최초 진입조차 힘겨운 시대를 맞이했다. 20대가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할 시기에 10:90 혹은 1:99의 구도가 완성 되어 버린 것이다.

 

  『88만원세대』가 386세대를 비판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 ‘완충지대’ 에 있다. 완충지대의 마련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386세대가 오히려 장벽을 높이고 경쟁을 격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386세대의 상징인 노무현 정권에 있다. 참여정부는 ‘선택과 집중’ 을 경제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독과점을 강화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또 하나 386세대의 과오는 사교육 광풍에 있다. 인질 경제라고 할 만큼 사교육은 10대를 인질로 잡고 부모들의 경제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386세대가 사교육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들이 가장 근거리에서 IMF의 칼바람을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원이나 대리, 기껏해야 과장 초년 차 정도에 IMF를 맞은 386세대는 명예퇴직의 1차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386세대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 문제와는 달리,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개인의 각개 돌파를 선택했다.

  386세대가 더욱 역설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라는 사실이다. 딱 386인 나 역시 한 번도 사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학원은 전면 금지되었고, 몰래 받는 극소수의 최상위층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어떤 과외도 받을 수가 없었다. 부모들의 경제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딱 그 386세대가 부모가 된 지금, 어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제1 조건은 부모의 경제력이 되어 버렸다. 부가 세습되듯, 학력 또한 세습되고, 신분은 고착화 되어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좋았던 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들은 경제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교육에 매달린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버는 족족 사교육비로 헌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의 결과는 뻔하다. 가난한 사람이 전부를 다 쏟아 붓는다 해도 부자들을 따라 갈 도리는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멈출 수가 없다. 국민 경제가 사교육에 매몰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정작 자신들의 노후 대책은 거의 전무하다. 이제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먼저 그만둘 수가 없다. 죄수의 딜레마에 걸린 것이다. 개미지옥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멈추는 자가 제일 먼저 먹히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승자독식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완충지대를 마련하고 있다. 일본은 연공 서열제로 세대간 경쟁을 약화시키고, 미국은 법원이 보호하고, 스웨덴 스위스 등의 유럽은 국가가 나서서 20대의 경제적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의 체제가 만든 승자독식 구조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유럽에서 심상찮게 일어나고 있는 네오파시즘, 일본의 넷우익, 미국의 그칠 줄 모르는 인종차별주의 등은 승자독식 구조의 패자들이 발산하는 광기어린 분노와 절망의 산물이다.

 

 

  나는 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한 세대간 경쟁이건, 1:99로 표현되는 계급간 적대이건, 그 어느 것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균열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구멍만 틀어막는다고 무너질 건물이 멀쩡히 서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88만원세대』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장 큰 희생양에 주목하면서, 20대에 덧씌운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암울한 세대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386세대에 너무 많은 책임을 돌려 버렸다. 그것은 한 세대가 과오보다 더 많은 질책을 받는다는 억울함의 측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위기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전도를 야기한 것에 있다.

  실제로 얼마 전 공저자 중 한 명인 우석훈은 이 책의 절판을 선언했다. 자신이 해법으로 제시한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에 대해 20대가 엉뚱한 응답을 한 것에 대한 분노를 절판으로 표출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88만원세대』는 바리케이드를 치라고만 했지, 정작 바리케이드를 칠 적대의 전선에 혼란을 가져다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20대는 바리케이드 대신 386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며, 더욱 더 토플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386은 적개심의 대상일 순 있지만, 바리케이드를 칠 진정한 적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가 쳐져야 할 자리는 이 책이 해법을 제시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내 건 바로 그 자리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저자들은 3가지 제약조건을 규정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방정식의 변하지 않는 상수 같은 것이다.

  첫째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 둘째는 세계화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의 조건이라는 것, 세 째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했던 포디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포디즘 시대는 말하자면 자본도 노동도 웬만큼 행복할 수 있었던 시대로 그려진다. 진짜 그 시절이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국이 하는 세계 시장의 하청 역할을 우리가 해내던 시대였다. 대량생산에는 반드시 대량소비가 필요한데 이 소비자는 다름 아닌 노동자들이다. 기업은 선의에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정도의 급여를 지불해야 했고, 그 돈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써 그 돈을 다시 기업에 돌려주며 경제를 선순환시켰다. 그런데 해마다 냉장고를 바꾸고 TV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성장한 세계경제는 더 이상 포디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 째와 둘째 역시 어쩔 수 없는 제약 조건인 것일까?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꿈꾸는 것, 그것이 시작이 아닐까?

 

 

  여하튼 이 글은 독서회의 발제를 목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니, 마지막으로 『88만원세대』가 제안하는 해법을 간단히 짚어 보겠다. 위의 3가지 제약조건 아래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이 물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실행할 수 있고 그 만큼 현실성이 높은 것들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라는 말을 한 것뿐이다.

 

  첫 째는 사교육 폐지와 대학의 국유화이다.

  두 째는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정책을 폐기하고, 정규직화 유도 등의 승자독식 구조 완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다.

  세 째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보호하고 대기업의 공룡화를 제제한다.

  네 째는 알바시장의 청소년 노동자를 보호한다.

등등의 세부적인 사항들이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 의해 암울한 예언서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언제나 불길한 예언은 적중률이 높은 편이다.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 어떤 해법도 실행하지 않고 그대로 이 구조가 정착되면 미래는 어둡기 짝이 없다고 예언했다. 6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어두운 긴 터널의 어디쯤에 와있는지도 가늠하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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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헤겔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젝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그런데 지젝은 왜 이 중요한 장을 굳이 ‘간주곡’이란 형식으로 끼워 넣었을까? <간주곡1>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이런 의문은 남아있다. 왜?

 

  <간주곡1>은 쉬어가는 장이 아니다. 처음부터 헤겔의 인륜성과 시민사회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는 마르크스의 좌우명이 무슨 말인지에 대한 설명도 있다.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헤겔적 ‘화해’가 주체/실체 개념과 어떻게 관련지어 해석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열심히 줄을 치며 정리할 것이 너무 많아 걱정하던 참에, 결정적인 번역 오류를 하나 발견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라 생각했다. 몇몇 오탈자가 보이긴 했지만, 문맥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너무 어려워 이해를 못하는 내용은 번역이 어떻게 되었건 알 수 없으니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도 좋은 편이고, 전체적인 맥락을 거스르는 오역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딱 걸린 것이다. 마침 그 내용이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 나왔던 부분이라 대번에 눈에 뜨이기도 했지만, 번역된 내용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아 논리적 오류를 스스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때 마침 이 장이 <간주곡> 인 걸 핑계 삼아, 전반적 정리 보다는 이 번역 오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아직 영문판을 보지 못해 대조하지는 못했지만, 『시차적 관점』의 번역판과 영문판을 비교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449쪽의 마지막 문단, “화폐로부터 자본으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전적 묘사 -그것은 분명히 헤겔과 기독교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부터 456쪽 마지막 문단에서 시작해 457쪽에서 끝나는 “그렇다면 자본이 진정한 주체 또는 실체인가? ~” 까지는 『시차적 관점』의 121쪽 “무가 자랑하는 이 유일한 대상” 이라는 절의 전반부(p121~p126)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말하자면 지젝이 자기복제를 한 대목이다. 자기복제는 지젝의 주특기 중 하나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데, 여기서 지젝은 조금 발전된(?) 형태의 복제를 했다. 헤겔과의 관련성을 조금 더 상세하게 보태놓고 있다. (그런 것 같다.;; 내용이 복잡해서 ㅠ)

 

  여하튼 문제가 되는 대목은 여기다.

 

  「 앞의 인용문의 맨 처음 세 단어, 즉 ‘그러나 사실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먼저 물론 그것들은 이 사실이 어떤 거짓 가상 또는 경험을 배경으로 평가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자본 순환의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인간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자본은 단지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충족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일상적 추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은 자신을 낳지 않으며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뜯어낸다. 따라서 (자본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라는) 주관적 경험과 (착취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필연적인 세 번째 수준이 추가되어야 한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 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다시한번 - 라캉을 인용하자면- 진리는 픽션의 구조를 갖고 있다. 자본의 진리를 정식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은 자신을 ‘무염 상태로’ 낳는 자기운동이라는 이러한 픽션을 참조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뿐이다. p456~7」

 

  ‘앞의 인용문’ 이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인용한 대목이다. 화폐에서 자본으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설명으로, 흔히 대중 강사들이 C-M-C니 M-C-M이니 적어 놓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하튼 여기서 지젝은 ‘in truth, however' 라는 세 단어에 주목한다. 이 책은 truth를 사실로, 『시차적 관점』은 진실로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이 단어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정확한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in truth, however' 는 무언가를 부정한다. 사실은 말야, 진실은 말야로 시작할 때 우리 역시 뭔가 그게 아닌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truth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자본 순환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 즉 C-M-C 시대의 원칙이다. 물건과 물건을 바꾸기 위해 화폐는 단지 편리한 수단일 뿐이던 시절 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생각은 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상계적이다. 어쨌든 욕구충족이라는 상상은 ‘truth’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truth' 가 아닌 것이 있다. 그 보다 오히려 역으로 말해야 할텐데, 자본주의의 현실 즉 'reality'는 ‘truth' 가 아니다. 상상도 ‘truth' 가 아니고, 현실도 ‘truth' 가 아니다. 그럼 이 'reality'는 무엇인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다. 자본이 자본을, 돈이 돈을 낳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들어 낸 잉여가치가 돈을 불리는 것이다. 최근 학생으로부터 국정원에 고발당한 강사 임승수는 몇 해 전 시립도서관 강좌에서 자본주의의 이 'reality'에 대해 아주 생생한 사례를 들어 준 적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가진 돈을 몽땅 꺼내놓고 한 달간 우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면, 과연 돈이 저절로 증가해 있을까? 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reality'도 ‘truth' 는 아니라고 한다. 다시 그렇다면 ‘truth' 는 무엇일까? 지젝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현실 사이에 세 번째 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주관적 경험이란 자본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단이라는 상상이다. 객관적 현실은 당연히 착취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제 3항은 객관적 기만, ‘objective deception’ 이다. 기만이 객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런데 여기서 번역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대목에, 게다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에서 저자는 전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을 해버렸다. 사실 지젝의 뜻과는 완전히 상반된 번역이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 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여기에는 물론 전제가 있다.  인용한 대목 전체는 이 책과 『시차적 관점』에 동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전치사 하나 바꾸지 않고 지젝이 그냥 복사한 것 같다. 그런데 만에 하나 지젝이 마음을 바꿔먹고 저 부분만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면, 이 문제는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지젝의 문제가 되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문맥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두 책에 나오는 내용이 완전 동일하다고 전제하기로 한다. 이제 『시차적 관점』의 번역을 보기로 하자.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현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인, “객관적 기만”과 (자본의 신비한 자기 생성적 순환 운동에 내재하는) 부인된 “무의식적 환상” 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의식적 환상’과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 생성적 순환운동’ 의 관계이다. 『헤겔 레스토랑』 에서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주어로서 자본의 순환 운동을 부인한다. 반면에 『시차적 관점』에서는 무의식적 환상의 내용이 바로 자본의 순환 운동이다.  부인되는 것은  바로 이 무의식적 환상이다.

 

  『시차적 관점』 번역의 정확성을 검토하기 위해 영어 원문을 살펴 보자.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which is the truth (although not the reality)

 

  "unconscious" fantasy 다음에 나오는 괄호 속의 ‘of’ 는 여기서 동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부인된 무의식적 환상 (자본의 신비한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이라는)’ 으로.  물론 수동태 ‘disavowed’ 는 부인된 것이지,  부인하는 능동적 입장이 아니다. 무의식적 환상은 부인된 것이지, 무의식적 환상이 부인한 것이 아니다.

  ‘of' 가 동격으로 쓰여야 하는 이유는 의미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상으로도 그렇다. 그 앞의 문장 역시 동일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도 동격으로 쓰이고 있다.

 

subjective experience (of capital as a simple means of efficiently

satisfying people’s needs) and objective social reality (of exploitation)

 

  이 책, 『헤겔 레스토랑』의 번역에서도 이 부분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unconscious" fantasy 부분에서만 엉뚱한 번역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부분의 번역이 진짜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truth' 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판타지는 reality 가 아니라 fiction이지만, 이 판타지가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작동시킨다.

 

   지젝은 이 부분을 되풀이 설명한다. 문제의 이 대목에 10여 페이지 앞서,  지젝은 현실 reality와 실재 the Real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unconscious fantasy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the Real 이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자기를 끌어 올리는 자본의 광적인 순환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오늘날의 메타재귀적 투기들에서 정점에 이르고 있다- 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낳으며 인간이나 환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윤만 추구하는 이러한 괴물의 유령은 이데올로기적 추상화이며, 그러한 추상화의 이면에는 현실의 사람들과 자연적 대상들  -자본주의적 순환은 이들의 생산적 능력과 자원에 기반하고 있으며, 거대한 기생충처럼 이것에 기식하고 있다-  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너무나 단순화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상화’가 사회 현실에 대한 우리 (금융 투자자)의 오인에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정확히 물질적인 사회적 과정 자체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 이라는 것이다. 긴 행렬을 이룬 무수한 사람들 전체, 그리고 종종 나라 전체의 운명이 자본의 ‘독아론적’인 투기적 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데, 이 자본은 사회 현실에 자신의 운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축복받은 무관심을 갖고 최대 이윤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 바로 거기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이 있는데, 전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사회경제적 폭력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그것은 더 이상 구체적인 개인들과 그들의 ‘사악한’ 의도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순수하게 ‘객관적이며’, 체계적이고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 사이의 라캉적 차이와 만나게 된다. ‘현실’은 상호작용과 생산 과정에 연루되어 있는 현실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규정하는 자본의 냉혹한, ‘추상적인’ 유령 같은 논리다. 이러한 간극은 어떤 나라의 경제 상황이 심지어는 국민 다수의 형편이 전보다 악화되었는데도 국제 금융 전문가들에 의해 양호하고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 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이다. p444」

 (짚고 넘어가자면,  중간 부분의 ‘현실적’ 은 reality의 그 real이 아니라 the Real 의 real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real은 때때로 그 의미를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말로는 차라리 실재적이라고 하면 더 좋았을 것 같다......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  

  증권시장이 그 직접적 예이다. 주식시장은 기업의 현실과 무관하게 움직인다. 유령같은  실재가  시장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즉 “어떤 사회구성체의 내속적인 개념적 구조를 묘사하려면 먼저 그것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자본주의의 진짜 모습은 바로 ‘탈산업화된’ 형태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드러난다.

 

  「오직 이처럼 철두철미한 ‘탈물질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즉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대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명제가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것보다 훨씬 더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갖게 될 때,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인 사회적 현실이 자본의 유령적 또는 투기적 운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자체가 점점 ‘유령화될’ 때야 비로소, 간단히 말해 견고한 물질적 대상들과 유동적인 이념들 사이의 통상적인 관계가 전도될 때야 비로소 - 오직 그러한 시점에서야 비로소 데리다가 자본주의의 유령적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완전히 실현된다. p448」

 

 

 

  어떻게 보면 자그마한 오역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 길게 다룬 것은 이 대목이   ‘간주곡1’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번역 오류는 사실 옮긴이가 the Real과 reality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에 실패한 증거가 될 위험도 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 웃기기는 하다.  그런데 안그래도 오독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까다로운 지젝이 아닌가.  그 지젝을 꿋꿋이 읽어가는 독자를 생각한다면, 번역에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이다.

 

  마지막으로 오역이라 의심되는 부분의 『시차적 관점』 영어판을 옮겨 놓는다.

 

 

「 how are we to read its first three words, "In truth, however"? First, of course, they imply that this truth has to be asserted against some false appearance or experience: the everyday experience that the

ultimate goal of capital’s circulation is still the satisfaction of human needs, that capital is just a means to bring this satisfaction about in a more efficient way. This "truth,” however, is not the reality of capitalism: in reality, capital does not engender itself, but exploits the worker's surplus-value. There is thus a necessary third level to be added to the simple opposition of subjective experience (of capital as a simple means of efficiently satisfying people's needs) and objective social reality (of exploitation): the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which is the truth (although not the reality) of the capitalist process. Again—-to quote Lacan—-truth has the structure of a fiction: the only way to formulate the truth of capital is to present this fiction of its "immaculate" self-generating movement.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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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저자의 트윗을 팔로우하게 되었다. 출판하자마자 입대한다는 애절한(?) 사연에, 하루에도 몇 번을 ‘사라~ 사라~’ 외치는 통에, 모른 채 할 수 없어 『잉여사회』를 주문했다. 물론 저자는 나를 전혀 모르고, 나도 대강 읽는 트윗 글을 제외하면 그를 모른다. 그런데 트윗은 참 묘하다. 막상 팔로우 당하는 사람은 상대의 존재도 모르는데, 팔로우 하는 입장에서는 막 아는 사람 같고 이럴 때 책이라도 한 권 사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특히 공적인 트윗과 사적인 트윗을 마구 섞는 사람의 경우, 그 사생활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일방적인, 감정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트윗에 익숙해지기가 아직도 쉽지는 않다. 여하튼 『잉여사회』표지 날개에 붙은 사진은 절로 ‘어머;;’ 가 튀어나오게 했다. 생각보다 통통하고 예상외로 단정하고.. 뭐 그런 모습이 트윗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게다가 1984년생이라니, 입대한단 말이 새삼 짠하게 느껴졌다. ...부디 건강하게 복무하시길 바란다.

 

 

 

  한윤형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올라가는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라는 표현을 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다.

  이 루저들이 최태섭이 말하는 ‘잉여’ 이다. 그러나 최태섭의 잉여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싸우지도 못했기에 루저도 아니다”. 루저라고 불릴 자격마저 박탈당한 이들 잉여, 그들은 누구이며 도대체 어떻게 출현했을까?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잉여에 대한 어떤 정의보다 마음에 날아 와 꽂히는 것은 바로 수 십, 수 백 통을 되풀이 써야했을 ‘자기 소개서’ 다. 무수히 거절당한 자기 소개서 속에 긴장해서 웃고 있는 그 얼굴들이 바로 우리 시대 잉여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잉여들을 가장 먼저 예언한 책은 『88만원 세대』이다. 한윤형은 이 책을 ‘묵시록’ 이라 표현했고, 최태섭은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래는 없다는 묵시록의 예언대로, 잉여사회는 도래했다. 짧은 인생을 아무리 들추어 곱씹고 곱씹어 작성해 본 들 대다수의 자기 소개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 암울한 사회가 온 것이다.

 

 

 

 

  『잉여사회』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는 조금 다른 형식의 글이다. 한윤형의 책이 수필에 가깝다면, 최태섭의 책은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대중화된 사회과학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다지 딱딱하지 않고 잘 읽히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책에서 라캉과 지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최태섭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로운 빈곤> 이라는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지만, 곳곳에서 라캉과 지젝의 용어가 보인다. 사실 ‘잉여’라는 말 자체도 그 영향권에 있다고 우긴다면 우길 수 있다.

 

  「잉여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 혹은 체계가 만들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작동할 때 잉여가 발생한다. 잉여는 전체가 설명하거나 포괄하지 못하는 비-전체이고, 체계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불쑥 등장하는 우발성이다. p79」

  「잉여는 그것이 전체나 체계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릴 때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가 체계와 전체에게 제공하는 곤란함이란 그것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p80」

  「잉여는 팔수도 없고,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며, 소비자로도 부적절한 어떤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는 숨을 쉬고 먹는 입은 있으되 말하는 입은 없다. 이들은 결핍 그 자체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구멍이다. p85」

 

  체계 혹은 세계는 비-전체( not-all) 라는 라캉의 정의는 그의 유명한 명제 ‘대타자는 없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비-전체는 다른 말로 W(hole)이라고도 하는데 이 구멍, 바로 이 잉여 때문에 체계는 전체가 될 수 없다. 잉여의 존재는 곧 체계의 불가능성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hole 없이 Whole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구멍 없이는 체계가 작동할 수 없다. 불가능성의 조건이 곧 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오드라덱’까지 등장하면 도저히 라캉과 지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잉여는 과잉이며 결핍이다. 남아도는 것이 잉여다. 사회에 남아도는 인간이 잉여인간이다. 그런데 잉여인간은 그 자체로 결핍된 인간이다. 사회 안에 그의 자리는 결핍되어 있다. 그럼에도 잉여는 사회라는 체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잉여를 만들어 낸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1997년 우리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만들어 낸 체계이다.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지만, 구조조정 없는 신자유주의란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잉여를 만들어내는 구조인 것이다.

  쓰 레기통에 넘쳐나는 자기소개서는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노력이 잉여를 진정한 잉여로 만든다. 결핍이 잉여의 ‘필요조건’ 이라면,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지만 그 만큼 슬프기도 한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 은 잉여의 ‘충분조건’ 이 된다.

 

 

 

 1부가 잉여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작업이었다면, 2부는 우리 시대 잉여의 생생한 모습을 소묘한 보고서다.

  최태섭에 의하면, 결핍과 과잉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 잉여들의 존재론적 위상은 좀비와 유령이다. IT 시대에 좀비와 유령이 대거 출몰하는 공간은 당연히 인터넷 세상이다. 디시인사이드부터 일베까지 잉여들의 활약상은 종횡무진이다. 잉여들은 딱히 어떤 편도 아니다. 자신들을 거절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잉여들의 아햏햏한 병맛은 예기치 않게 날카로운 세태 풍자가 되기도 하고, 약자를 향한 집단 폭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튈지 알 수 없는 무정형한 이질성의 이면에는 잉여들이 느끼는 공동의 감각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그것이 거칠고 패륜적인 욕설과 기행이든, 혹은 장난스레 외치는 잉여 선언이든, 혹은 잉여적인 것에 대한 기이한 열광이든 이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잉여성은 우리들의 발밑에서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불안한 흔들림과의 연관 속에 존재한다. 그 흔들림은 우리를 병맛 넘치고 잉여로운 ‘ㅋㅋㅋ'의 연대로 이끌기도 하지만, 끝 모를 적대의 최전선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p172」

 

  불안은 잉여시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키르케고르가 이미 불안을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은 ‘자유에의 현기증’이며,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젝 역시 키르케고르의 불안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어쨌거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에는 긍정성이 있다. 그 불안의 심연을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잉여들의 불안은 어떨까? 언뜻 보면 잉여들의 불안에는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여기에 자유니 구원이니 하는 단어들은 망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키르케고르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 했다. “자신의 자유의 심연 때문에 어지러울 때 정신은 어떤 유한한 긍정성 속에서 지지기반을 찾으며 자유를 포기한다.<시차적 관점 p182>”

 

  잉여들 역시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인터넷 세상이라는 안전한 지지기반을 찾아 불안을 외면한다. 그리고 적의 형상을 만들어 내 불안과 불만을 해소한다.

 

  「불안과 불만을 계속 유지한 채로 이어지는 교착상태와 신경쇠약은 그 해법으로 파시즘과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누군가 이 긴장을 해소해준다면, 눈에 보이는 확고한 적의 피로 우리들의 손을 씻게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외 상태’를 선언할 주권자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한 적도 없는 독재에 대한 향수는 ‘무언가가 앞으로 맹렬하게 나가고 있다’라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나가기는커녕 멈춰 있고, 오히려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제자리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다. p249 」

 

  유럽의 신나치주의, 일본의 재특회, 우리의 일베는 이렇게 탄생한 잉여이다. 이들이 내뱉는 과격한 언사, 폭력적인 행동, 위험한 사고는 그러나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다. 지젝은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히틀러가 나쁜 것은 그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용기가 없었다. 독일 자본주의가 처한 곤경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독일인들은 퇴폐적인 부르주아 질서로부터 깨어나길 원했지만,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꿈을 만들어 냈다.

 

 

 

  잉여사회를 돌파할 해답은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저자 최태섭 역시 두루뭉술한 희망을 던져 놓을 뿐이다. 살아남아, 그 속에서 성장하고, 연대하자?

그렇다고 누구처럼 ‘짱돌을 던지고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뻔뻔하게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 소개서의 스펙을 채우기도 바쁜 잉여들에게는 그저 웃기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계산은 이미 나왔다. 죽어라 쏟아 부어도 1% 혹은 10% 정도만이 잉여를 벗어날 수 있다. 체계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최태섭이 결어로 삼은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 에 일말의 현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넘치는 잉여력이 체계를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발밑을 흔드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온몸을 맡기는 용기가 필요할 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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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3-09-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글을 읽고 저자 최태섭을 팔로잉하려고 했는데 이미 입대했다면 뭥미?? ㅋㅋ

말리 2013-09-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어제까지 트윗에 출몰했는데, 아직 들어갔다는 멘션들이 없는 걸 보면... 붜 이 달에 가긴 간답디다. MRI에 내시경까지 샅샅이 훑어도 아픈데도 없다네 ㅋㅋㅋ
 
[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2부. 물 자체 The thing itself : 헤겔

 

 

 

04_

오늘날에도 여전히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은 가능할까?

 

 

 

 

  4장 전체는 헤겔에 대한 변명처럼 보인다. 통상 헤겔은 한때 이름을 드날렸으나 지금은 도서관 서가에나 꽂혀 있는 낡은 철학자로 인식된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가 그랬듯,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후대의 난장이들에 의해 극복된 것이다. 이것을 지젝은 단절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지젝은 헤겔에 대한 단절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주장한다. 헤겔의 핵심적 사상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오인 속에 너절하게 비판되었기 때문이다. 지젝이 헤겔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절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절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망자를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듯이, 제대로 된 단절만이 헤겔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절대지를 소유했다고, 신의 마음을 읽는다고, 자신의 정신의 자기운동으로부터 현실 전체를 연역할 수 있다고, 자임하는 절대 관념론자’ 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물론  ‘이성의 간지’ 이다.

 

  지젝은 이에 대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날아 오른다’ 로 응답한다. 어떤 이성도 운명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운명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은 불투명한 미래 속에 주체가 내린 결단과 행위에 의해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필연적인 것이 먼저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를 통해 필연성이 구성될 뿐이다. 행위가 일어난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다. 의미는 사후적으로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젝이 강조하는 개념은 ‘소급성’ 이다. 헤겔의 '전제의 정립'이 바로 소급성을 의미한다. 세계는 이미 완성된 전체, ‘총체성’이 아니라 '비전체'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 닫힌 빗금쳐진 세계에 소급적으로 의미가 부여되면, 그 때 비로소 총체성이 얻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완전하지 않다. 그 중심에는 항상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대타자는 (W)hole 로서의 전체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대강 이렇다. 지젝이 되풀이 강조했던 것들이라 그렇게 어렵지 않으면서도 재미있었다. 지젝의 헤겔 해석은 정통이 아니라 일종의 이단이라는 풍문이 있지만, 해석에 정통이 없다는 것이 바로 탈구조주의 시대의 이론이 아닌가? 지젝의 해석이 자신의 논리 내에서 정합성을 획득했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해석을 택할 것인가는 독자들의 선택일 뿐이니 말이다.

 

 

 

 

 

 

0.

 

 

  역사적 사유의 주요 특징은 ‘단절’ 이후에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 이후에 다시 중세 철학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헤겔에 대해서도 똑 같은 단절을 말한다.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이후로는 다시 헤겔의 전통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그런데도 지젝은 부단히 헤겔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지젝에게 헤겔과의 단절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단절은 비록 헤겔에게서 정점에 달한 모습으로 구현된 관념론과의 단절을 표방하지만 헤겔 사유의 결정적 차원을 무시하고 있다.”

  단절은 무시가 아니라,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철학적 경의’ 가 되어야 한다. 계승과 확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다. 그러나 헤겔과의 단절은 마치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없었던 것처럼 사유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표방되었다. 지젝이 헤겔의 ‘사변적 사유’를 재주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헤겔과의 진짜 단절을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1. 헤겔 대 니체

 

 

  헤겔에게 패배를 성공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전혀 ‘실제적인 것’ 이 아니다. 오직 형식적인 전환만 있을 뿐이다. ‘패배 자체를 승리로 제시하려는 관점의 변화’ 만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진짜 승리라 할 수 있을까? 니체에 의하면 이 승리는 가짜다. 싸구려 속임수다. 상식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았는데, 관점의 변화만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과연 주사파의 정신승리와 무엇이 다를까?

  지젝이 들고 나오는 것은 헤겔의 ‘부정성’, 부정의 힘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예로 삼고 있다. 내용은 통과! (다음 절에 이어지므로..)

 

 

 

 

2. 투쟁과 화해

 

 

  헤겔의 사상을 ‘모든 것은 변한다.’로 파악하는 통상적 인식은 철저히 반 헤겔적이다. 이 오해를 대중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반동과 진보, 새로운 것과 낡은 것,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갈등으로 규정하며, 헤겔을 ‘영원한 투쟁’의 철학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헤겔에게 투쟁의 외적 장애물은 환상에 불과하다.

 

 

  「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주체가 적으로, 극복해야 할 외적 장애물로 지각하는 것은 주체의 내재적 비정합성이 물질화된 것이다. 투쟁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은 정합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형상을 필요로 하며, 그의 정체성 자체가 적에 맞서 있는 것에 달려있다. p368」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유대인이다.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침입자라는 유대인 형상은 자본주의 사회질서의 비정합성, 즉 계급적대를 은폐하기 위한 대리물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적 문제를 은폐하기 위한 체제인 것이다.

 

 

  「주체는 투쟁에 뛰어들며, (일반적으로 승리 자체 속에서) 패배하며, 그리고 이 패배가 그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 헤겔을 니체로부터 분리시키는 거리를 명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즉 니체가 소생시키려는 활기 넘치는 영웅주의의 순진성, 모험의 열정, 투쟁에 전면적으로 뛰어들려는 열정 또는 승리 또는 패배의 열정. - 이 모든 것이 부재하는 것이다.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그리고 패배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p369」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적 화해를 기만적이라 비판한다. 현실의 적대성은 그대로 두고 이념 속에서만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현실을 변혁하는 대신 단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만 제안할 뿐이라고 헤겔을 비꼬았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런 비판은 헛 다리 짚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헤겔에게는 “소외로부터 화해로 이행하려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지각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헤겔의 화해는 관념적일 뿐이고 현실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철저한 사회변혁을 통해 현실적 화해가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 여전히 옳은 것이 아닐까?

 

 

  "이처럼 아직 아닌 것으로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의 갑작스러운 소급적 전도(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목표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에서 갑자기 그것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간다) p373"가 헤겔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으로부터 구해준다는 것이 지젝의 반론이다.

 

 

  「최종적 화해에서 변하는 것이라고는 주체의 관점뿐이다. -주체는 패배를 인정하며, 그것을 승리로 재기입한다. 따라서 화해는 적대성의 극복이라는 통상적인 이념 이상인 동시에 이하이다. 이하인 것은 아무것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상인 것은 이 과정의 주체가 (특수한) 실체 자체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p374」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지젝이 예로 든 ‘성령’은 수긍이 간다. 회중은 그리스도의 진짜 환생을 고대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의 회중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귀환인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기만이다. 회중을 성령으로 보는 것 그것이 화해라는 것. 지젝이 늘 하는 말로, 패배를 승리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은 항상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진정한 사변적 의미는 오직 반복적인 읽기를 통해서만, 첫 번째의, 잘못된 읽기의 사후효과 (또는 부산물)로만 나타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는 과잉적인 혁명의 사생아가 아니라, 합리적인 근대적 국가에 도달하기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실패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사후적으로만 불필요한 과잉으로 드러난다.

 

 

 

 

3. 해야 할 이야기

 

 

  「진정 역사적인 사유는 어떻게 그처럼 보편화된 ‘모든 것은 변한다’와 단절할까? ..열쇠는 소급성이라는 개념에 들어 있는데, 그것은 헤겔과 마르크스 관계의 핵심 자체와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마르크스에게서 헤겔로 돌아가야 하며, 마르크스 자체를 ‘유물론적으로 전복’시켜야 하는 주된 이유이다. p380」

 

 

  소급성은 예를 들면 과거를 재창조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작가는 자신의 선도자들을 창조한다. 그의 작품은 미래를 수정하듯이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수정한다.” 고 했다. 대표적 작가는 역시 카프카 이다.

 

 

  우리도 지금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두고 투쟁을 하고 있다. 역사란 이미 일어난 사실이지만,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는 뉴라이트적 역사관이냐 민족사관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좌표를 차지한다.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전락할 수도 있다. 현재의 투쟁이 과거를 소급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헤겔적 소급성의 핵심적인 철학적 함의는 그것이 충분근거율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오직 과거의 원인들의 총합이 미래의 사건을 규정하는 일직선적 인과성이라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 소급성은 (과거의, 주어진) 원인들의 집합은 결코 완벽하고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이유들은 일직선적인 질서 내부에서 그것들의 효과들에 의해 소급적으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p390」

 

 

 

 

 

4. 운명을 바꾸기

 

 

  소급성에 관한 설명을 조금 더 들어 보자. ‘진정한 행위’ 에 있어 소급성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일상적 활동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단지 우리 정체성의 좌표들을 따를 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위는 행위자들의 존재의 잠재적인 ‘초월론적’ 좌표들 자체를 (소급적으로) 변화시키는, 또는 프로이트적 용어로 표현해보자면, 우리 세계의 현실성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지하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 움직임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건이” 재귀적으로 일종의 “그것이 조건으로 주어진 어떤 주어진 것 위로 되접어 꺾이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순수 과거가 우리 행위를 위한 초월론적 조건인 반면 우리 행위는 새로운 현실적 현실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소급적으로 이러한 조건 자체를 변화시킨다. p392」

 

 

  소급성이 그토록 핵심적인 이유는 우리가 서 있는 좌표 자체를 바꾸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10년'이란 유행어는 소급성을 놓고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을 어떻게 소급시키는가에 따라 우리의 좌표는 달라진다. 발전하는 좌표인가, 퇴보하는 좌표인가.

 

 

  헤겔의 ‘이성의 간지’는 조롱거리로 전락할 때가 많다. 역사적 과정의 끈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성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목적론적 개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전혀 헤겔과 상관이 없다. 헤겔에게는 역사적 필연성을 이해하고 그 도구가 되기를 자임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스탈린주의적 혁명가 상을 위한 자리는 없다. 뿐만 아니라 헤겔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 역사적 필연성은 역사 실현의 우연적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과정은 그 자체로 열려있고, 결정되어 있지 않다.

 

 

 

 

5. 미네르바의 부엉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사유가 사후에야 존재를 따른다는 헤겔의 통찰이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는 사유의 우위를 다시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깨를 올라타고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역사의 텍스트에 부합하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 자체는 반복해서 소급적으로 재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소급성이 미래를 선험적으로 예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날아오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행위의 결과들을 완전히 예견할 수 있다면 주체의 자유는 없다. 다만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들을 실현하는 행위자가 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을 배경으로만 주체는 자유롭다.

 

 

 

 

6. 잠재태 대 잠재성

 

 

  ‘헤겔은 영원 속에서 시간을 지양한다.’ 고 비판받는다.- 그렇다. 하지만 이 지양 자체는 우연적인 시간적 사건으로 출현해야 한다. ‘헤겔은 우연성을 보편적 합리적 질서 속에서 지양한다.’고 비판된다. - 그렇다. 하지만 이 질서 자체는 우연적인 초과에 달려 있다. ‘헤겔의 투쟁은 대립물들의 화해의 평화 속에서 지양된다.’ 고 비난받는다.- 그렇다. 그러나 이 화해 자체는 그것의 대립물로,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출현해야 한다.

 

  헤겔에 반대하는 주장은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들이 헤겔의 사상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헤겔에 반대하는 통상적인 주장을 전개하기는 쉽다. 즉 그의 체계는 범주들로 완전히 ‘포화된’ 집합으로, 우연성과 불확정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의 논리학에서 각각의 범주는 벗어날 길 없는 내재적·논리적 필연성에 따라 선행 범주들로부터 이어지며, 이러한 범주들의 계열 전체가 자폐적인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주장이 무엇을 놓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은 이처럼 ‘포화된’, 자족적인, 필연적인 전체가 아니라 그러한 전체가 형성되는 열려 있고 우연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비난은 존재와 생성을 혼동하고 있다. 즉 그것은 헤겔에게서는 소급적으로 존재의 필연성을 낳는 생성 과정인 것을 존재의 고정된 질서(범주들의 네트워크)로 간주한다. p414~5」

 

 

  「비전체의 그러한 존재론은 철저한 우연성을 주장한다. 필연성을 손에 넣는 어떠한 법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법칙이 그 자체로 우연적이다. - 그것은 어느 순간에든 뒤집어질 수 있다. 그것은 충족근거율을 중단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식론적 정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존재론적 정지이기도 하다. 즉 인과적 규정들의 네트워크 전체를 결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쇄 자체가 ‘결론이 나지 않는’ 것으로, 생성의 내재적 우연성을 위한 공간을 열어준다. 어떠한 선-재하는 질서에도 종속되지 않은 그러한 생성의 카오스가 철저한 유물론을 규정하고 있다. p418」

 

 

  우연성은 잠재성이다. 잠재성은 잠재태와 분명히 구분된다. 잠재태의 사례는 주사위 던지기다. 주사위에는 6개의 숫자가 잠재되어 있고, 던져서 나온 숫자는 그것의 잠재태가 실현된 것이다. 잠재성은 7번째의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무엇인가의 출현이다.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는 헤겔을 잠재성이 아니라 잠재태의 철학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잠재성은 가능한 것들의 집합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무엇인가가 출현하며, 선-재하는 가능한 것들의 집합에서는 어떠한 자리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가 현행화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 새로운 것은 단지 선-재하는 가능성을 현행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행화가 자신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소급적으로 열어 주는) X가 출현할 때 등장한다. p419」

 

 

   따라서 무로부터 어떤 현상의 출현은 더 이상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반대로 신의 비존재의 표시이다. 자연은 비전체로, 어떤 초월적 질서나 힘이 그것을  조종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여기서 유물론적 개념이 된다. ‘기적’은 신의 비존재의 드러남이다.

 

 

  「생성 과정은 그 자체로서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필연성 자체의 생성(점진적이고 우연적인 출현)이 된다. ‘실체를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 또한 (다른 무엇보다) 바로 이것이다. 즉 공백으로서의 주체, 자기 관계 맺기적인 부정성으로서의 없음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모든 새로운 형상이 출현하는 무 자체이다. 다시 말해, 모든 변증법적 이행 또는 전도는 새로운 형상이 무로부터 출현하고, 소급적으로 자신의 필연성을 정립 또는 창조하는 이행이다. p423」

 

 

 

 

7. 원환들의 헤겔적 원환

 

 

  헤겔은 “정신이 정신인 것은 오직 자체의 결과로서 일 뿐” 이라고 했다. 이 말은 헤겔의 정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통상적 인식이 심각한 오인임을 보여준다. : 정신은 자신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며, 그런 다음 자신을 그러한 타자성 속에서 인식하며, 그리하여 그것의 내용을 재전유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사람들은 비슷하게 답한다. 일단 내가 먼저 있고, 이 내가 밖으로 나가 대상이 됐다가, 그 대상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시 나로 돌아오는 뭐 그런 거지 ;; 그런데 지젝에 의하면 먼저 존재하는 나라는 것은 없다. 나, 자아라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하는 과정에서 소급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먼저’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헤겔에게 “정신이 되돌아가는 자아는 그러한 복귀 운동 자체 속에서 생산되며 복귀 과정이 되돌아가는 것은 그처럼 돌아가는 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 된다. 본질의 외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본질이 자신을 외화하는 과정은 동시에 그러한 본질 자체를 낳는 과정이다. 즉 ‘외화’는 정확히 자신을 외화하는 본질의 형성과 동일한 것이다. 본질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외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한다. -본질은 오직 넓은 만큼만 깊다는, 너무 많이 인용되는 헤겔의 발언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신을 외화하고 그런 다음 소외된 실체적 타자성을 재전유하는 주체라는 유사-헤겔적 주제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타자성을 정립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선-재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주체는 타자 속에서의 이러한 소외 과정을 통해 출현한다. p42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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