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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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헤겔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젝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그런데 지젝은 왜 이 중요한 장을 굳이 ‘간주곡’이란 형식으로 끼워 넣었을까? <간주곡1>을 다 읽고 난 지금도 이런 의문은 남아있다. 왜?

 

  <간주곡1>은 쉬어가는 장이 아니다. 처음부터 헤겔의 인륜성과 시민사회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는 마르크스의 좌우명이 무슨 말인지에 대한 설명도 있다.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헤겔적 ‘화해’가 주체/실체 개념과 어떻게 관련지어 해석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열심히 줄을 치며 정리할 것이 너무 많아 걱정하던 참에, 결정적인 번역 오류를 하나 발견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번역이 매끄러운 편이라 생각했다. 몇몇 오탈자가 보이긴 했지만, 문맥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너무 어려워 이해를 못하는 내용은 번역이 어떻게 되었건 알 수 없으니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도 좋은 편이고, 전체적인 맥락을 거스르는 오역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딱 걸린 것이다. 마침 그 내용이 지젝의 『시차적 관점』에 나왔던 부분이라 대번에 눈에 뜨이기도 했지만, 번역된 내용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아 논리적 오류를 스스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때 마침 이 장이 <간주곡> 인 걸 핑계 삼아, 전반적 정리 보다는 이 번역 오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아직 영문판을 보지 못해 대조하지는 못했지만, 『시차적 관점』의 번역판과 영문판을 비교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449쪽의 마지막 문단, “화폐로부터 자본으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고전적 묘사 -그것은 분명히 헤겔과 기독교적 배경을 암시하고 있다- 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부터 456쪽 마지막 문단에서 시작해 457쪽에서 끝나는 “그렇다면 자본이 진정한 주체 또는 실체인가? ~” 까지는 『시차적 관점』의 121쪽 “무가 자랑하는 이 유일한 대상” 이라는 절의 전반부(p121~p126)와 거의 같은 내용이다.

  말하자면 지젝이 자기복제를 한 대목이다. 자기복제는 지젝의 주특기 중 하나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데, 여기서 지젝은 조금 발전된(?) 형태의 복제를 했다. 헤겔과의 관련성을 조금 더 상세하게 보태놓고 있다. (그런 것 같다.;; 내용이 복잡해서 ㅠ)

 

  여하튼 문제가 되는 대목은 여기다.

 

  「 앞의 인용문의 맨 처음 세 단어, 즉 ‘그러나 사실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먼저 물론 그것들은 이 사실이 어떤 거짓 가상 또는 경험을 배경으로 평가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자본 순환의 궁극적 목표는 여전히 인간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자본은 단지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충족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일상적 추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자본주의의 현실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자본은 자신을 낳지 않으며 노동자의 잉여가치를 뜯어낸다. 따라서 (자본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라는) 주관적 경험과 (착취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필연적인 세 번째 수준이 추가되어야 한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 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다시한번 - 라캉을 인용하자면- 진리는 픽션의 구조를 갖고 있다. 자본의 진리를 정식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은 자신을 ‘무염 상태로’ 낳는 자기운동이라는 이러한 픽션을 참조하는 방법을 통하는 것뿐이다. p456~7」

 

  ‘앞의 인용문’ 이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인용한 대목이다. 화폐에서 자본으로의 이행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설명으로, 흔히 대중 강사들이 C-M-C니 M-C-M이니 적어 놓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하튼 여기서 지젝은 ‘in truth, however' 라는 세 단어에 주목한다. 이 책은 truth를 사실로, 『시차적 관점』은 진실로 번역하고 있다. 어쨌든 이 단어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 정확한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in truth, however' 는 무언가를 부정한다. 사실은 말야, 진실은 말야로 시작할 때 우리 역시 뭔가 그게 아닌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truth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자본 순환의 궁극적 목표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 즉 C-M-C 시대의 원칙이다. 물건과 물건을 바꾸기 위해 화폐는 단지 편리한 수단일 뿐이던 시절 말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생각은 라캉식으로 말하면 상상계적이다. 어쨌든 욕구충족이라는 상상은 ‘truth’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truth' 가 아닌 것이 있다. 그 보다 오히려 역으로 말해야 할텐데, 자본주의의 현실 즉 'reality'는 ‘truth' 가 아니다. 상상도 ‘truth' 가 아니고, 현실도 ‘truth' 가 아니다. 그럼 이 'reality'는 무엇인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다. 자본이 자본을, 돈이 돈을 낳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만들어 낸 잉여가치가 돈을 불리는 것이다. 최근 학생으로부터 국정원에 고발당한 강사 임승수는 몇 해 전 시립도서관 강좌에서 자본주의의 이 'reality'에 대해 아주 생생한 사례를 들어 준 적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가진 돈을 몽땅 꺼내놓고 한 달간 우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면, 과연 돈이 저절로 증가해 있을까? 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reality'도 ‘truth' 는 아니라고 한다. 다시 그렇다면 ‘truth' 는 무엇일까? 지젝은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현실 사이에 세 번째 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주관적 경험이란 자본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단이라는 상상이다. 객관적 현실은 당연히 착취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제 3항은 객관적 기만, ‘objective deception’ 이다. 기만이 객관성을 가진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런데 여기서 번역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아주 까다로운 대목에, 게다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부분에서 저자는 전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을 해버렸다. 사실 지젝의 뜻과는 완전히 상반된 번역이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 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여기에는 물론 전제가 있다.  인용한 대목 전체는 이 책과 『시차적 관점』에 동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전치사 하나 바꾸지 않고 지젝이 그냥 복사한 것 같다. 그런데 만에 하나 지젝이 마음을 바꿔먹고 저 부분만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면, 이 문제는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지젝의 문제가 되버릴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럴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문맥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두 책에 나오는 내용이 완전 동일하다고 전제하기로 한다. 이제 『시차적 관점』의 번역을 보기로 하자.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현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진리인, “객관적 기만”과 (자본의 신비한 자기 생성적 순환 운동에 내재하는) 부인된 “무의식적 환상” 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의식적 환상’과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 생성적 순환운동’ 의 관계이다. 『헤겔 레스토랑』 에서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주어로서 자본의 순환 운동을 부인한다. 반면에 『시차적 관점』에서는 무의식적 환상의 내용이 바로 자본의 순환 운동이다.  부인되는 것은  바로 이 무의식적 환상이다.

 

  『시차적 관점』 번역의 정확성을 검토하기 위해 영어 원문을 살펴 보자.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which is the truth (although not the reality)

 

  "unconscious" fantasy 다음에 나오는 괄호 속의 ‘of’ 는 여기서 동격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부인된 무의식적 환상 (자본의 신비한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이라는)’ 으로.  물론 수동태 ‘disavowed’ 는 부인된 것이지,  부인하는 능동적 입장이 아니다. 무의식적 환상은 부인된 것이지, 무의식적 환상이 부인한 것이 아니다.

  ‘of' 가 동격으로 쓰여야 하는 이유는 의미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상으로도 그렇다. 그 앞의 문장 역시 동일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서도 동격으로 쓰이고 있다.

 

subjective experience (of capital as a simple means of efficiently

satisfying people’s needs) and objective social reality (of exploitation)

 

  이 책, 『헤겔 레스토랑』의 번역에서도 이 부분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unconscious" fantasy 부분에서만 엉뚱한 번역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부분의 번역이 진짜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truth' 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판타지는 reality 가 아니라 fiction이지만, 이 판타지가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작동시킨다.

 

   지젝은 이 부분을 되풀이 설명한다. 문제의 이 대목에 10여 페이지 앞서,  지젝은 현실 reality와 실재 the Real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unconscious fantasy는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the Real 이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자기를 끌어 올리는 자본의 광적인 순환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오늘날의 메타재귀적 투기들에서 정점에 이르고 있다- 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낳으며 인간이나 환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윤만 추구하는 이러한 괴물의 유령은 이데올로기적 추상화이며, 그러한 추상화의 이면에는 현실의 사람들과 자연적 대상들  -자본주의적 순환은 이들의 생산적 능력과 자원에 기반하고 있으며, 거대한 기생충처럼 이것에 기식하고 있다-  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너무나 단순화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상화’가 사회 현실에 대한 우리 (금융 투자자)의 오인에 특징적일 뿐만 아니라 정확히 물질적인 사회적 과정 자체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현실적’ 이라는 것이다. 긴 행렬을 이룬 무수한 사람들 전체, 그리고 종종 나라 전체의 운명이 자본의 ‘독아론적’인 투기적 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데, 이 자본은 사회 현실에 자신의 운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축복받은 무관심을 갖고 최대 이윤이라는 목적을 추구한다. 바로 거기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체계적 폭력이 있는데, 전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사회경제적 폭력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그것은 더 이상 구체적인 개인들과 그들의 ‘사악한’ 의도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순수하게 ‘객관적이며’, 체계적이고 익명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 사이의 라캉적 차이와 만나게 된다. ‘현실’은 상호작용과 생산 과정에 연루되어 있는 현실의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적 현실인 반면 실재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것을 규정하는 자본의 냉혹한, ‘추상적인’ 유령 같은 논리다. 이러한 간극은 어떤 나라의 경제 상황이 심지어는 국민 다수의 형편이 전보다 악화되었는데도 국제 금융 전문가들에 의해 양호하고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 현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자본의 상황이다. p444」

 (짚고 넘어가자면,  중간 부분의 ‘현실적’ 은 reality의 그 real이 아니라 the Real 의 real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된다. real은 때때로 그 의미를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말로는 차라리 실재적이라고 하면 더 좋았을 것 같다......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  

  증권시장이 그 직접적 예이다. 주식시장은 기업의 현실과 무관하게 움직인다. 유령같은  실재가  시장을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즉 “어떤 사회구성체의 내속적인 개념적 구조를 묘사하려면 먼저 그것의 가장 발전된 형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예견한 자본주의의 진짜 모습은 바로 ‘탈산업화된’ 형태의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드러난다.

 

  「오직 이처럼 철두철미한 ‘탈물질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명제, 즉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대기중으로 사라진다’는 명제가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것보다 훨씬 더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갖게 될 때, 그리고 우리의 물질적인 사회적 현실이 자본의 유령적 또는 투기적 운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자체가 점점 ‘유령화될’ 때야 비로소, 간단히 말해 견고한 물질적 대상들과 유동적인 이념들 사이의 통상적인 관계가 전도될 때야 비로소 - 오직 그러한 시점에서야 비로소 데리다가 자본주의의 유령적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이 완전히 실현된다. p448」

 

 

 

  어떻게 보면 자그마한 오역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 길게 다룬 것은 이 대목이   ‘간주곡1’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번역 오류는 사실 옮긴이가 the Real과 reality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에 실패한 증거가 될 위험도 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 웃기기는 하다.  그런데 안그래도 오독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까다로운 지젝이 아닌가.  그 지젝을 꿋꿋이 읽어가는 독자를 생각한다면, 번역에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이다.

 

  마지막으로 오역이라 의심되는 부분의 『시차적 관점』 영어판을 옮겨 놓는다.

 

 

「 how are we to read its first three words, "In truth, however"? First, of course, they imply that this truth has to be asserted against some false appearance or experience: the everyday experience that the

ultimate goal of capital’s circulation is still the satisfaction of human needs, that capital is just a means to bring this satisfaction about in a more efficient way. This "truth,” however, is not the reality of capitalism: in reality, capital does not engender itself, but exploits the worker's surplus-value. There is thus a necessary third level to be added to the simple opposition of subjective experience (of capital as a simple means of efficiently satisfying people's needs) and objective social reality (of exploitation): the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which is the truth (although not the reality) of the capitalist process. Again—-to quote Lacan—-truth has the structure of a fiction: the only way to formulate the truth of capital is to present this fiction of its "immaculate" self-generating movement.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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