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저자의 트윗을 팔로우하게 되었다. 출판하자마자 입대한다는 애절한(?) 사연에, 하루에도 몇 번을 ‘사라~ 사라~’ 외치는 통에, 모른 채 할 수 없어 『잉여사회』를 주문했다. 물론 저자는 나를 전혀 모르고, 나도 대강 읽는 트윗 글을 제외하면 그를 모른다. 그런데 트윗은 참 묘하다. 막상 팔로우 당하는 사람은 상대의 존재도 모르는데, 팔로우 하는 입장에서는 막 아는 사람 같고 이럴 때 책이라도 한 권 사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특히 공적인 트윗과 사적인 트윗을 마구 섞는 사람의 경우, 그 사생활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일방적인, 감정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트윗에 익숙해지기가 아직도 쉽지는 않다. 여하튼 『잉여사회』표지 날개에 붙은 사진은 절로 ‘어머;;’ 가 튀어나오게 했다. 생각보다 통통하고 예상외로 단정하고.. 뭐 그런 모습이 트윗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게다가 1984년생이라니, 입대한단 말이 새삼 짠하게 느껴졌다. ...부디 건강하게 복무하시길 바란다.

 

 

 

  한윤형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올라가는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라는 표현을 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다.

  이 루저들이 최태섭이 말하는 ‘잉여’ 이다. 그러나 최태섭의 잉여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싸우지도 못했기에 루저도 아니다”. 루저라고 불릴 자격마저 박탈당한 이들 잉여, 그들은 누구이며 도대체 어떻게 출현했을까?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잉여에 대한 어떤 정의보다 마음에 날아 와 꽂히는 것은 바로 수 십, 수 백 통을 되풀이 써야했을 ‘자기 소개서’ 다. 무수히 거절당한 자기 소개서 속에 긴장해서 웃고 있는 그 얼굴들이 바로 우리 시대 잉여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잉여들을 가장 먼저 예언한 책은 『88만원 세대』이다. 한윤형은 이 책을 ‘묵시록’ 이라 표현했고, 최태섭은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래는 없다는 묵시록의 예언대로, 잉여사회는 도래했다. 짧은 인생을 아무리 들추어 곱씹고 곱씹어 작성해 본 들 대다수의 자기 소개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 암울한 사회가 온 것이다.

 

 

 

 

  『잉여사회』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는 조금 다른 형식의 글이다. 한윤형의 책이 수필에 가깝다면, 최태섭의 책은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대중화된 사회과학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다지 딱딱하지 않고 잘 읽히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책에서 라캉과 지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최태섭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로운 빈곤> 이라는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지만, 곳곳에서 라캉과 지젝의 용어가 보인다. 사실 ‘잉여’라는 말 자체도 그 영향권에 있다고 우긴다면 우길 수 있다.

 

  「잉여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 혹은 체계가 만들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작동할 때 잉여가 발생한다. 잉여는 전체가 설명하거나 포괄하지 못하는 비-전체이고, 체계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불쑥 등장하는 우발성이다. p79」

  「잉여는 그것이 전체나 체계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릴 때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가 체계와 전체에게 제공하는 곤란함이란 그것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p80」

  「잉여는 팔수도 없고,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며, 소비자로도 부적절한 어떤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는 숨을 쉬고 먹는 입은 있으되 말하는 입은 없다. 이들은 결핍 그 자체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구멍이다. p85」

 

  체계 혹은 세계는 비-전체( not-all) 라는 라캉의 정의는 그의 유명한 명제 ‘대타자는 없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비-전체는 다른 말로 W(hole)이라고도 하는데 이 구멍, 바로 이 잉여 때문에 체계는 전체가 될 수 없다. 잉여의 존재는 곧 체계의 불가능성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hole 없이 Whole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구멍 없이는 체계가 작동할 수 없다. 불가능성의 조건이 곧 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오드라덱’까지 등장하면 도저히 라캉과 지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잉여는 과잉이며 결핍이다. 남아도는 것이 잉여다. 사회에 남아도는 인간이 잉여인간이다. 그런데 잉여인간은 그 자체로 결핍된 인간이다. 사회 안에 그의 자리는 결핍되어 있다. 그럼에도 잉여는 사회라는 체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잉여를 만들어 낸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1997년 우리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만들어 낸 체계이다.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지만, 구조조정 없는 신자유주의란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잉여를 만들어내는 구조인 것이다.

  쓰 레기통에 넘쳐나는 자기소개서는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노력이 잉여를 진정한 잉여로 만든다. 결핍이 잉여의 ‘필요조건’ 이라면,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지만 그 만큼 슬프기도 한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 은 잉여의 ‘충분조건’ 이 된다.

 

 

 

 1부가 잉여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작업이었다면, 2부는 우리 시대 잉여의 생생한 모습을 소묘한 보고서다.

  최태섭에 의하면, 결핍과 과잉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 잉여들의 존재론적 위상은 좀비와 유령이다. IT 시대에 좀비와 유령이 대거 출몰하는 공간은 당연히 인터넷 세상이다. 디시인사이드부터 일베까지 잉여들의 활약상은 종횡무진이다. 잉여들은 딱히 어떤 편도 아니다. 자신들을 거절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잉여들의 아햏햏한 병맛은 예기치 않게 날카로운 세태 풍자가 되기도 하고, 약자를 향한 집단 폭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튈지 알 수 없는 무정형한 이질성의 이면에는 잉여들이 느끼는 공동의 감각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그것이 거칠고 패륜적인 욕설과 기행이든, 혹은 장난스레 외치는 잉여 선언이든, 혹은 잉여적인 것에 대한 기이한 열광이든 이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잉여성은 우리들의 발밑에서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불안한 흔들림과의 연관 속에 존재한다. 그 흔들림은 우리를 병맛 넘치고 잉여로운 ‘ㅋㅋㅋ'의 연대로 이끌기도 하지만, 끝 모를 적대의 최전선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p172」

 

  불안은 잉여시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키르케고르가 이미 불안을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은 ‘자유에의 현기증’이며,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젝 역시 키르케고르의 불안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어쨌거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에는 긍정성이 있다. 그 불안의 심연을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잉여들의 불안은 어떨까? 언뜻 보면 잉여들의 불안에는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여기에 자유니 구원이니 하는 단어들은 망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키르케고르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 했다. “자신의 자유의 심연 때문에 어지러울 때 정신은 어떤 유한한 긍정성 속에서 지지기반을 찾으며 자유를 포기한다.<시차적 관점 p182>”

 

  잉여들 역시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인터넷 세상이라는 안전한 지지기반을 찾아 불안을 외면한다. 그리고 적의 형상을 만들어 내 불안과 불만을 해소한다.

 

  「불안과 불만을 계속 유지한 채로 이어지는 교착상태와 신경쇠약은 그 해법으로 파시즘과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누군가 이 긴장을 해소해준다면, 눈에 보이는 확고한 적의 피로 우리들의 손을 씻게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외 상태’를 선언할 주권자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한 적도 없는 독재에 대한 향수는 ‘무언가가 앞으로 맹렬하게 나가고 있다’라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나가기는커녕 멈춰 있고, 오히려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제자리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다. p249 」

 

  유럽의 신나치주의, 일본의 재특회, 우리의 일베는 이렇게 탄생한 잉여이다. 이들이 내뱉는 과격한 언사, 폭력적인 행동, 위험한 사고는 그러나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다. 지젝은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히틀러가 나쁜 것은 그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용기가 없었다. 독일 자본주의가 처한 곤경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독일인들은 퇴폐적인 부르주아 질서로부터 깨어나길 원했지만,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꿈을 만들어 냈다.

 

 

 

  잉여사회를 돌파할 해답은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저자 최태섭 역시 두루뭉술한 희망을 던져 놓을 뿐이다. 살아남아, 그 속에서 성장하고, 연대하자?

그렇다고 누구처럼 ‘짱돌을 던지고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뻔뻔하게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 소개서의 스펙을 채우기도 바쁜 잉여들에게는 그저 웃기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계산은 이미 나왔다. 죽어라 쏟아 부어도 1% 혹은 10% 정도만이 잉여를 벗어날 수 있다. 체계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최태섭이 결어로 삼은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 에 일말의 현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넘치는 잉여력이 체계를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발밑을 흔드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온몸을 맡기는 용기가 필요할 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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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3-09-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글을 읽고 저자 최태섭을 팔로잉하려고 했는데 이미 입대했다면 뭥미?? ㅋㅋ

말리 2013-09-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어제까지 트윗에 출몰했는데, 아직 들어갔다는 멘션들이 없는 걸 보면... 붜 이 달에 가긴 간답디다. MRI에 내시경까지 샅샅이 훑어도 아픈데도 없다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