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88만원 세대 발제를 대신하여...

 

 

 

 

  막상 발제를 하려니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될까 걱정이다.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 책을 조목조목 살펴보려면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간단히 요약하자면 서너 줄의 문장으로도 끝낼 수 있다. 출간한지 6년밖에 안된 이 책이 서술하거나 예견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너무 분명한 현실로 닥쳐왔기 때문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저자 한윤형은 이 책을 간단히 묵시록이라 정의했다.

  “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록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인데도, 요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어른들의 ‘상식’에 맞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후 세대의 평생 동안의 소득은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p176 ”

  최근 발간된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 역시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한윤형은 1983년생, 최태섭은 1984년 생으로 2007년 『88만원세대』가 출간되었을 당시, 딱 20대를 보내고 있던 바로 그 88만원세대이다. 한윤형은 지금 미디어스라는 인터넷 매체의 기자로, 최태섭은 박사과정 중 입대를 앞 둔 자유기고가로 살고 있다. 만만치 않은 이력과 능력을 가진 이들의 경우, 아마도 자발적 선택의 비율이 적잖겠지만, 여하튼 변변치 않고(? 미안하다);; 불안정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그나마 『88만원세대』의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다. 최태섭에 의하면 『88만원세대』이후 갑자기 불어 닥친 20대에 대한 동정론 덕분에 신문 귀퉁이나마 지면이 허락되고 여기저기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 2007년에 발간된 《88만원 세대》이후 한국 사회는 그 전에 없던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20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불쌍한 20대를 위한 동정 여론과 지원을 위한 움직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비로운 어른들의 지원을 받아 20대 당사자 운동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쁘게 움직였던 것은 언론과 출판이었다. 세대론을 표방하는 책들, 힘든 20대를 위로하겠다는 책들, 멘토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신문들은 너도나도 청년들을 필자로 섭외해 2030칼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잉여사회』p35 "

 

  우리가 지금 수없이 보는 멘토들과 소위 힐링용 책들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과연 20대에 필요한 것이 동정과 위로일까? 결국 또 하나의 고문에 불과할 희망을 속삭이는 걸까? 아니 우리사회가 지금 부딪힌 문제들이 20대만의 문제인 것일까?

 

 

 

 

  『88만원세대』는 우리나라에 처음 ‘세대론’ 이란 말을 대중화시킨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가장 충격을 받은 세대는 20대가 아니라 어쩌면 386세대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자부심에 넘치던 386세대는 아리랑치기라도 당하듯 뒤통수를 느닷없이 가격 당했다. 민주화의 주역으로 언제나 도덕적으로 당당했던 386세대는 졸지에 20대 나이어린 약자들의 몫을 강탈하는 파렴치한으로 전락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88만원세대』가 맨 먼저 지적하는 386의 과오는 거칠게 말해 민주화 운동의 정신과 실체적 삶의 이중적 태도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적 태도와 경제적 태도의 불일치이다. 프랑스 68혁명과 달리 우리의 87년 민주화 운동은 어떤 경제적 민주화도 요구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68혁명의 결과 모든 대학의 국유화를 성취했다. 대학 서열화를 폐지하고, 일 년에 50만 원 정도의 등록금으로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만약 우리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했다면, 20대 대학생들은 학자금 융자에이 허덕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대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사교육의 광풍에도 휘말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87년에 우리는 경제적 민주화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군부독재 정권만 물러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몰랐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은 ‘영광의 30년’이란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88만원세대』를 읽고 20대가 가장 격분했던 대목은 ‘서문’ 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지 않은 20대도 대부분 ‘서문’의 내용은 알고 있을 정도다. 서문의 시작은 007학점, 선동열 학점, 쌍권총, 기관총 등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전설적인 학점이야기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밑바닥 학점으로 졸업하고도, 이 억세게 운수 좋은 386세대는 척척 취직해서 쑥쑥 진급까지 하고, 현재 각계각처의 요직을 점령하고 있다. 영어도 못하고 능력도 없는 386세대가 ‘단군 이래 최대 스펙’ 인 20대들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이 어이없는 현실을 『88만원세대』가 적나라하게 까발린 것이다.

  이 충격적이고 강렬한 ‘서문’ 덕분에 저자들의 의도가 어찌됐건 간에 『88만원세대』는 표적을 빗겨, 세대 간 적개심의 화약고에 불을 붙여 버렸다. 그런데 20대들의 비참한 현실이 과연 386세대들의 이기적 탐욕에만 그 원인이 있을까?

 

 

 『88만원세대』는 경제학답게 그 원인을 밝히는 작업에 게으르지 않다. 우리가 급격한 경제 체계의 변화를 체험한 것은 물론 1997년 IMF 구제금융 때이다. 지금은 20대의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4~50대 실직 가장들의 자살이 연일 화제가 되던 때였다. 1990년대 10년간 소위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나는 그 당시를 생생히 기억한다. 명예퇴직자 명단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어느 과장님은 퇴직금을 받아 김가네 김밥을 열었네, 어느 부장님은 디자인 하청 사업을 시작 했네 따위의 소문들이 매일 돌았다. 무엇이 명예롭다는 건지,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 나가는 것이 명예라는 건지, 그 이름도 아햏햏한 명예퇴직의 광풍이 불고 나자, 부서 개편이 잇달았다. 처음 들어보는 팀제가 도입되고, 대리가 팀장인 팀도 과장이 팀원인 팀도 생겨났다. 그렇게 연공서열제는 파괴되고 성과급제가 도입되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IMF 사태는 당연히 우리의 잘못처럼 인식되었지만, 사실 그것은 세계경제가 1970년대부터 주요 경제 기조로 채택한 신자유주의가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낸 최초의 사건일 따름이다. 약 10년 뒤인 2008년, 신자유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역시 금융위기를 맞이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실패가 확인된 상징적 사건이다.

  여하튼 전면적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장은 무한 경쟁에 돌입했고, 그것의 최종 결과는 ‘승자독식’ 사회이다. “the winner takes it all" 의 결과는 당연히 심각한 양극화이다. 이제 10:90의 사회를 넘어 'Occupy Wall Street'에서 보았듯 1:99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승자독식의 구조는 우리나라에만 특유한 현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세계화가 완성된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까지 이 잔인한 구조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독 『88만원세대』가 세대 간 경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승자독식 체제가 아무런 완충 지대 없이 그대로 국가 구성원 개개인을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막 경제 체제 안으로의 편입을 준비하는 20대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86세대와 특히 유신세대는 IMF 사태 당시 이미 실직의 피바람을 겪었지만, 그 당시는 아직 재기의 기회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 10년 동안 승자독식 구조가 단단해져감에 따라, 장벽은 높아지고 재기는 물론 최초 진입조차 힘겨운 시대를 맞이했다. 20대가 경제활동을 시작해야 할 시기에 10:90 혹은 1:99의 구도가 완성 되어 버린 것이다.

 

  『88만원세대』가 386세대를 비판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 ‘완충지대’ 에 있다. 완충지대의 마련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386세대가 오히려 장벽을 높이고 경쟁을 격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386세대의 상징인 노무현 정권에 있다. 참여정부는 ‘선택과 집중’ 을 경제 정책의 근간으로 삼아, 독과점을 강화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또 하나 386세대의 과오는 사교육 광풍에 있다. 인질 경제라고 할 만큼 사교육은 10대를 인질로 잡고 부모들의 경제력을 고갈시키고 있다. 386세대가 사교육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들이 가장 근거리에서 IMF의 칼바람을 목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원이나 대리, 기껏해야 과장 초년 차 정도에 IMF를 맞은 386세대는 명예퇴직의 1차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386세대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 문제와는 달리,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개인의 각개 돌파를 선택했다.

  386세대가 더욱 역설적인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라는 사실이다. 딱 386인 나 역시 한 번도 사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학원은 전면 금지되었고, 몰래 받는 극소수의 최상위층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어떤 과외도 받을 수가 없었다. 부모들의 경제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딱 그 386세대가 부모가 된 지금, 어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가의 제1 조건은 부모의 경제력이 되어 버렸다. 부가 세습되듯, 학력 또한 세습되고, 신분은 고착화 되어버렸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좋았던 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들은 경제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교육에 매달린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버는 족족 사교육비로 헌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의 결과는 뻔하다. 가난한 사람이 전부를 다 쏟아 붓는다 해도 부자들을 따라 갈 도리는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멈출 수가 없다. 국민 경제가 사교육에 매몰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정작 자신들의 노후 대책은 거의 전무하다. 이제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먼저 그만둘 수가 없다. 죄수의 딜레마에 걸린 것이다. 개미지옥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멈추는 자가 제일 먼저 먹히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승자독식 구조를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완충지대를 마련하고 있다. 일본은 연공 서열제로 세대간 경쟁을 약화시키고, 미국은 법원이 보호하고, 스웨덴 스위스 등의 유럽은 국가가 나서서 20대의 경제적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유의 체제가 만든 승자독식 구조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유럽에서 심상찮게 일어나고 있는 네오파시즘, 일본의 넷우익, 미국의 그칠 줄 모르는 인종차별주의 등은 승자독식 구조의 패자들이 발산하는 광기어린 분노와 절망의 산물이다.

 

 

  나는 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지 않는 한 세대간 경쟁이건, 1:99로 표현되는 계급간 적대이건, 그 어느 것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균열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구멍만 틀어막는다고 무너질 건물이 멀쩡히 서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그렇게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88만원세대』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가장 큰 희생양에 주목하면서, 20대에 덧씌운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암울한 세대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386세대에 너무 많은 책임을 돌려 버렸다. 그것은 한 세대가 과오보다 더 많은 질책을 받는다는 억울함의 측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위기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전도를 야기한 것에 있다.

  실제로 얼마 전 공저자 중 한 명인 우석훈은 이 책의 절판을 선언했다. 자신이 해법으로 제시한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에 대해 20대가 엉뚱한 응답을 한 것에 대한 분노를 절판으로 표출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88만원세대』는 바리케이드를 치라고만 했지, 정작 바리케이드를 칠 적대의 전선에 혼란을 가져다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20대는 바리케이드 대신 386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며, 더욱 더 토플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386은 적개심의 대상일 순 있지만, 바리케이드를 칠 진정한 적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리케이드가 쳐져야 할 자리는 이 책이 해법을 제시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내 건 바로 그 자리가 되어야 할지 모른다. 저자들은 3가지 제약조건을 규정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방정식의 변하지 않는 상수 같은 것이다.

  첫째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 둘째는 세계화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의 조건이라는 것, 세 째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가능했던 포디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포디즘 시대는 말하자면 자본도 노동도 웬만큼 행복할 수 있었던 시대로 그려진다. 진짜 그 시절이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국이 하는 세계 시장의 하청 역할을 우리가 해내던 시대였다. 대량생산에는 반드시 대량소비가 필요한데 이 소비자는 다름 아닌 노동자들이다. 기업은 선의에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생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정도의 급여를 지불해야 했고, 그 돈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구매함으로써 그 돈을 다시 기업에 돌려주며 경제를 선순환시켰다. 그런데 해마다 냉장고를 바꾸고 TV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성장한 세계경제는 더 이상 포디즘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 째와 둘째 역시 어쩔 수 없는 제약 조건인 것일까?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꿈꾸는 것, 그것이 시작이 아닐까?

 

 

  여하튼 이 글은 독서회의 발제를 목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니, 마지막으로 『88만원세대』가 제안하는 해법을 간단히 짚어 보겠다. 위의 3가지 제약조건 아래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들이 물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실행할 수 있고 그 만큼 현실성이 높은 것들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라는 말을 한 것뿐이다.

 

  첫 째는 사교육 폐지와 대학의 국유화이다.

  두 째는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정책을 폐기하고, 정규직화 유도 등의 승자독식 구조 완화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다.

  세 째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보호하고 대기업의 공룡화를 제제한다.

  네 째는 알바시장의 청소년 노동자를 보호한다.

등등의 세부적인 사항들이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 의해 암울한 예언서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언제나 불길한 예언은 적중률이 높은 편이다.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 어떤 해법도 실행하지 않고 그대로 이 구조가 정착되면 미래는 어둡기 짝이 없다고 예언했다. 6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어두운 긴 터널의 어디쯤에 와있는지도 가늠하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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