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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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 왕』은 희랍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이다. 그리스를 뜻하는 ‘희랍’ 이란 낱말은 예전 세로쓰기 신문에서나 보았을 법한 낡은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단어는 최근에 희랍어 원문을 직접 번역하는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며, 그리스란 영어 대신 널리 퍼뜨리고 있는 추세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헬라스’ 이며, 이것의 중국어 음차가 희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헬라스라 한 것을 그리스라고 번역하는 것은, 외국인이 일연의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신라를 코리아라 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세종대왕이 “우리 코리아는..”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전문가들은 헬라스가 익숙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음차지만 희랍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현대의 국가 자체를 지칭할 때는 공용어-영어 표기인 그리스가 별 문제가 없지만,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직접 다룰 때는 내 생각에도 희랍이나 헬라스가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아직 입에 달라붙지는 않지만 나도 ‘희랍’에 정을 붙이는 중이다. 참고로 아테네를 아테나이로, 스파르타를 스파르테로, 테베를 테바이로 바꾸어 부르는 모양이다. 도시명은 여성 복수명사로 불러야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은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복잡하다. 여하튼 고유명사에 관한 번역은 논란을 부르기 마련일 테지만, 일어판이나 영문판의 중역이 아닌, 원본 직역이 많아지면서 보이는 변화라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 삼부작 중의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로 완결되는 이 삼부작은 막장 중의 막장 가족인 오이디푸스 집안이 거의 씨를 말리며 쫄딱 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7편 중 대표적인 세 작품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순서가 이야기의 전개 과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맨 먼저 상연된 것이 내용상으로는 맨 마지막인 ‘안티고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빈틈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 이유는 소포클레스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이미 희랍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소포클레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줄거리는 이미 전해 내려온 이야기나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소포클레스는 다만 이것을 비극의 형식으로 훌륭하게 완성해내었을 뿐이다. 희랍 비극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까지도 공동창작에 속한다고 한다. 골방 속에서 창작의 산고를 겪는 고독한 작가의 이미지는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희랍 비극의 양식과 그것의 상연 과정은 강유원의 『고전인문강의』나 <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 링크는 작년 말에, 희랍 비극에 대한 강유원의 강의를 내가 조금 정리해 둔 것이다.

 

 

고전을 읽다보면 현대 드라마의 전형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모든 신데렐라 드라마의 원형(?.. 내가 아는 한)이다. 우리가 흔히 캔디로 통칭하는 주인공은 사실 엘리자베스이다. 별 볼일 없지만 자존심 하나는 꼿꼿한 여자가 사랑과 왕자님이라는 양손의 떡을 얻어내는 최고의 성공사례가 이미 19세기 영국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영국의 엄마들은 딸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오만과 편견』을 권한다고 하며, 얼마 전 영국은 10파운드 화폐에 다윈 대신 오스틴의 초상을 넣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이 책과 오스틴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마다 다를 것이지만,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문학사적 가치의 이면에 내포된 신데렐라를 향한 여성들의 숨겨진 욕망 때문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해본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그렇다. 지적이고 듬직한 남편과 열정적이고 매혹적인 청년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름다운 여인, 비극적 결말. 삼각관계와 불륜을 소재로 한 소위 막장 드라마의 아름다운 원형이 여기에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막장 드라마의 최강자는『오이디푸스 왕』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넷씩이나 둔 근친상간의 참극은 아무리 막 나가는 현대의 막장 드라마도 감히 넘보지 못할 절대 금기의 영역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어떤 이들에게는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그 금단의 영역을 넘본 아슬아슬함 때문일 것이다. 기껏해야 계모나 계부, 사촌이나 사돈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막장 드라마는 감히 『오이디푸스 왕』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 드라마의 원형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이 고전이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까닭은 무엇일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고전 완역판을 한번 정독해 본다면, 조금이나마 혹은 어렴풋이나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세 편에 걸쳐 펼쳐지는 오이디푸스 가족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훑어보자.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다. 그런데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아버지가 테바이의 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왕이 된 것은 그 유명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재앙으로부터 구해냈기 때문이다. 아침에 네발, 점심에 두발, 저녁에 세발 어쩌고 하는 수수께끼는 그 출처를 몰랐지만 우리 어린 시절 추억의 한 귀퉁이에도 존재하는 유명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한 도시를 구한 영웅으로, 인간들 중의 가장 현명한 인간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자신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희랍어 ‘휘브리스 hybris' 의 뜻은 오만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취임 당시 자신은 휘브리스라는 말을 듣지 않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데, 휘브리스라는 단어를 쓴 것 자체가 ‘나 고전 좀 읽었다’는 휘브리스질 같아 우습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랍 비극의 주제는 대부분 인간의 휘브리스를 경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웅은 오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오만함 때문에 신의 영역을 넘보는 잘못된 판단(하마르티아, hamartia)으로 비극을 맡게 된다. 여하튼 오이디푸스는 희랍 비극의 영웅답게 휘브리스와 하마르티아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데 아들, 딸 낳고 한껏 휘브리스의 절정에 서 있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온다. 테바이에 역병이 돌고, 이 재앙의 원인에 대한 신탁을 받아 오는데, 그 신탁이야말로 오이디푸스 가족에게는 진짜 재앙의 발단이 되어 버린다. 결국 출생의 비밀과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밝혀지자,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가슴에 꽂힌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바이로부터 추방시켜달라고 탄원한다. 여기까지가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즉각 테바이로부터 추방되지는 않는다.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은 이 재앙 같은 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지 몰라서 우물쭈물 세월을 보내는데, 그 사이 오이디푸스는 추락한 장님으로서의 삶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느닷없이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추방하고, 오이디푸스의 큰 딸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지팡이를 자처하며 희랍세계를 떠돌다가 콜로노스에 도착한다. 콜로노스는 아테나이의 한적한 교외로 소포클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희랍의 모든 도시들이 이 불행하고 불길한 인간을 재앙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아테나이는 그가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입성을 허락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아무것도 아닌자, 'nothing'으로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 갑자기 테바이의 왕 크레온,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앞뒤를 다투며 그를 찾아 달려온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장성한 뒤 테바이를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로 했는데, 둘 사이 싸움이 일어나 한 아들인 폴리네이케스가 외국으로 달아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로 쳐들어와 두 아들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지지하는 아들이 승리한다는 것으로,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는 서로 오이디푸스를 데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장님이 되어 희랍세계를 떠돌 때, 그를 가혹하게 내친 크레온과 자신을 전혀 도우지 않은 두 아들 모두를 저주하며, 제우스신의 계시에 따라 콜로노스의 숲 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 때 (nothing) 비로소 중요한 무엇인가가(something) 되었다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는데, 정확한 문장은 잊어버렸다. 여하튼 이때의 something이란 nothing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말하는) 'less than nothing' 이다. 속된 말로 하면 바닥을 봐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으로 휘브리스의 절정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장님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것something’ 이라는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자 안티고네는 테바이로 돌아온다. 그러나 전쟁으로 두 오빠 모두 죽고, 테바이의 왕이자 외삼촌인 크레온은 테바이를 침략한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한다. 크레온은 인간의 법을 들어, 이민족을 데리고 조국에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를 처벌한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 맞서 신의 법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다. 국법을 어긴 죄로 안티고네는 산채로 동굴에 갇히고, 안티고네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설득하지 못하자 안티고네와 함께 동굴에서 죽는다. 크레온의 아내 또한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살한다. 『안티고네』로 오이디푸스 삼부작은 완결되는데, 오이디푸스의 일가족 중 살아남은 자는 안티고네의 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딸인 이스메네와 처남인 테바이의 왕 크레온 뿐이다. 이스메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두고, 국법을 먼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니 안티고네와 대립했다. 크레온은 살아남았지만 아내와 자식을 잃고 파멸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대사는 유명하다.

 

   오오 조국 테바이의 시민들이여, 보라, 이분이 오이디푸스다.

   그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가 당당했으니

   그의 행운을 어느 시민이 선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보라, 그러한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뇌의 풍파에 휩쓸렸는지를!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경구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새겨놓은 것인지, 이미 새겨진 말을 소크라테스가 유행시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여하튼 소크라테스의 말이 인간의 무지를 강조한 것이라면, 신전의 경구는 신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인간일 뿐이므로 그 한계를 알라는 경고에 가깝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운명은 신만이 아는 것이니 까불지 말라는 소리다. 즉 인간의 휘브리스에 대한 경고이다.  코러스가 비통하게 노래하듯 가장 현명한 인간 오이디푸스도 오만에 빠져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신이 내린 운명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다음 장면은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눈을 찌른 후의 것이다.

 

   코러스 : 오오 그대 무서운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떻게 감히 그처럼

              자기 눈을 멀게 할 수 있었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허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다.

 

 

어쩌면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오만함, 휘브리스는 이 마지막 문장에 있다. 신의 운명을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그 운명에 대한 책임만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 자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이 처연한 의지야말로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만한 도전이 아닐까?

 

이인화라는 작가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제목이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중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오이디푸스 왕』역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행복하다 기리지 말라는 코러스의 경고는,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신의 경고와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파헤치고야 만다. 오이디푸스는 "Who am I ?" 에 대한 답을 얻은 대가로, 그 휘브리스의 대가로 두 눈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린 그 두 눈을 찌른 것은 신이 아니라 ‘가련한’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오만한 인간의 처절한 파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린 파멸 앞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인간의 그 도저한 의지에 있다. 그것은 징벌인 동시에 구원이다. 손수 자신의 눈을 찌른 순간 오이디푸스는 신이 쳐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칸트는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 두려움에 떠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 거대함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다. (숭고에 관한 칸트의 개념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신이 예정한 파멸에 의해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nothing로 추락했지만, 바로 그 순간 스스로의 눈을 찔러 파멸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음으로써 그는 마침내 어떤 무엇인 자 - something가 되었다.

 

 

 

 

 

* 반년 전쯤 나는 민음사판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위해 이글을 쓰면서 인용문은 인터넷과 강유원의 CBS 강의를 참조했는데, 아마도 천병희의 번역판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인용문의 정확한 출처 (번역자)는 잘 모르겠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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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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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왜 그랬을까? 일곱 난장이들이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왜 백설공주는 문을 열어 주고 말았을까? 저자의 답은 간단했지만, 책을 넘겨보기까지 머리 굳은 나는 그럴듯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책에는 15개의 동화가 나오고, 양치기 소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는지, 라푼젤은 누구를 위해 머리를 길렀는지 따위의 질문이 쏟아진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목차를 들여다보며 굳은 머리를 살살 풀어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가 될 법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이 동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독자 또한 이제는 동화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이 맞을 것이다. 동화는 아이들의 세계다. 나무인형이 사람이 되고, 늑대가 말을 하고, 왕자님이 수시로 우리를 구하러 달려오는 세상은 아직은 꿈꿀 수 있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닳고 닳은 어른들에게 이 순수한 동화의 세계를 들이미는 것일까?

 

동화는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서 어린 시절 읽었다는 명심보감이나 동몽선습만큼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재하고 있다. 명심보감은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과 명구를 편집하여 만든 책’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한마디로 선현들의 훌륭한 말씀을 깊이 새겨야 된다는 말이다. 동화는 이 직설적인 ‘금언’에 상상과 꿈을 덧입혀 화려한 치장을 해놓았다. 그 알록달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푹 빠져들 때, 아이들이 진정 빠져들어 가는 곳은 어른들의 가치관이 촘촘히 짜놓은 기성 세계의 법칙 속이다. 아이들은 동화와 함께 어른들의 세계에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빨간 모자 소녀>는 할머니 댁에 심부름 가는 길에 엄마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샛길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은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엄마가 금지한 샛길은 온통 궁금하고 새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누구도 다니지 않아, 온전히 피어 있는 꽃들과 갖가지 작은 생명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지 못해 더 궁금한 굽어진 길들. 소녀는 그 끌림을 뿌리치지 못하고 샛길로 빠졌다가 죽을 고생을 한다. 교훈은? 엄마 말씀 잘 듣고 남들이 다니는 큰 길로만 다녀야 안전하다. 그럼 엄마 말씀은 어떤 것?

 

<피노키오> 의 ‘엄마’ 요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해. 게으름은 아주 무서운 병이야. 어렸을 때 빨리 고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고칠 수가 없단다.~ 학교가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던 피노키오는 첫 등굣길에 책을 팔아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엄청난 고생을 한다. 납치되고 팔려가고 죽도록 일하고. 집나가서 갖은 개고생을 겪은 끝에 피노키오는 할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진짜 사람이 된다. 학교에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든, 그게 싫거나 안 되면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벌든, 그래야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교훈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말 잘 듣고 부지런히 일해!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칸트는 교육이란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단체로 앉혀 놓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그렇게 규율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정해진 시각에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산업 사회의 일터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p41」

 

이 책의 저자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동화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까발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교육이 아이들을 그리고 우리 어른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은 너무 많이 들어서 듣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답이 없어 더욱 외면하고 싶은 질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것을 도대체 어쩌라고 자꾸 이런 지적질 인가 짜증도 난다. 근대 교육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말 잘 듣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우리나라의 교육은 가히 1%를 위해 99%가 죽어나가는 미친 시스템 이다. 시스템 앞에 선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다. 그런데 왜 자기만 안다는 듯이 잘난 척인가 싶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시스템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 바라는 것이야말로 개인들의 외면이다. 그것이 무지이든 체념이든 냉소이든 결과는 동일하다. 시스템의 작은 틈도 가느다란 균열도 막아주는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외면이다. 북한산 인수봉의 바위도 가느다란 틈 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얼었다 녹으면서 결국 깨져 떨어졌다. 인명이 다친 불행한 사고이지만, 하루에도 수만의 발길을 받아내고도 끄떡없던 바위도 작은 틈과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갈라졌다. 모든 시스템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이 책이 번연한 소리를 지겹게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재미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 나도 이렇게 길들여졌구나 새삼 깨닫게도 되고,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아이, 죽어라고 치마 길이를 줄이는 아이, 거울만 쳐다보이는 아이들이 우리 교육의 부산물이 아니라 필연적 산물임을 아프게 느끼게도 된다. 선생님 저자는 매일 부딪히는 학교의 현실을 동화에 빗대어 불같이 토해낸다. 다혈질에 직설적인 성격일 것 같은 저자의 문장도 꾸밈없고 거침없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이라는 부제답게 교육 현장 그리고 사회 곳곳의 문제를 입바르게 지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그렇게 매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동화는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다. 그러다보니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동화 해석도 있지만, 무리하게 꿰맞춰 어색한 해석도 있고, 왜곡이다 싶을 만큼 편향된 해석도 있다. 그러나 조금 거슬리는 몇 편을 못 본 척 눈감아 주면, 무릎을 딱 치며 얻게 되는 깨달음의 기쁨이 있다.

 

그런데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책장을 넘기기 전에 각자의 해답을 찾아 보시길 권유드린다.

 

 

 

 

 

 

<칸트의 '훈육' 부분, 5월 13일 추기>

** 어디서 읽었던지 기억해 내지 못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어제밤 누워 희미한 기억을 따라 이 책, 저 책 넘기다, 딱 마주쳤다. 찾았다! 기억과는 다르게 칸트를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저자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p66~67

 

  인간이 동물적 충동들 때문에 자신의 정해진 목표인 인간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바로 훈육이다. 예컨대 훈육은 인간이 야생적이고도 무분별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훈육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며, 그것의 작용은 인간의 자연적 제어불능을 막아내는 것이다. 교육의 긍정적 부분은 가르침이다.

   제어불능은 법으로부터의 독립에 있는 것이다. 훈육에 의해 인간은 인류의 법에 종속되며 법의 제약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초기에 성취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자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일단 자유에 익숙하게 성장하게 되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자유에 대한 자연적 사랑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인 거친 상태를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본능이 이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Kant and Education, London : Kegan Paul, French, Trubner & Co, 1899, pp 3~5) 

 

  한편으로 칸트는 훈육이 인간 동물을 자유롭게 만들고 자연적 본능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훈육의 표적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인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과도한 사랑, 천성적 ‘제어불능’임이 분명한데, 이는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즉 이 제어불능 속에서, 고유하게 예지적인 또 하나의 차원이, 즉 인간이 자연적 인과율의 현상적 연결망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중지시키는 차원이, 폭력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성의 이야기는 자연 대 문화라는, 즉 도덕 법칙이 우리의 자연적 ‘정념적’ 쾌락 추구 성벽을 제약한다는 표준적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투쟁은 도덕법칙과 비자연적인 난폭한 제어불능간에 있는 것이며, 이 투쟁에서 인간의 자연적 성벽들은 오히려 인간의 안녕을 위협하는 제어불능의 과잉에 대항하여 도덕법칙의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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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는 어른이 아이를 위해 쓰고 남긴 것이 아니라 저자가 아이들의 견해를 궁금해 한 나머지 자 ~너희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하고 던져놓은 미끼 같단 생각을 저는 가끔 해요.
어릴때도 그랬고 커서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던 동화 ㅡ
왜일까요? 늘 어른은 아이들에게 이래야만 뭔가 얻을 수있다 ㅡ라는 식. 이라서 ..저는 순수하게 안본 것 같아요. 거래로 봤지.. 교육은 훈육이란 ㅡ말그대로 거래인셈이죠. 사회와 부합하기위한 ..그게 인격형성에 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수없지만, 착한 아이표가 되는 것 만큼은 그리 썩 달가운 건 아니에요. 한번쯤 스스로 틀리다 말한 길도 가보고 스스로 어른이 되는걸
아이들은 아는 데 ..어른들이 편하자고 막는 걸 수도 있단 ㅡ심각한 문제적 시선도 ..한번 가져보는 중예요. 인간은 자연인여야하는데..자꾸 규격화 시키는 힘 ㅡ 이게 뭘까 ..하고요. 기성세대ㅡ의 잣대로 만든 교육론이 아닌가 ㅡ하고 말이죠.
순 ㅡ얼토당토 인 엉망 진창 이야기라는거 아는데..
그냥 그럴 수도있지않냐 ..하는거죠.
아이들은 그리 순수하지도 못말리게 천사같지도 않아요.
어쩌면 어른보다 현명하기까지 하죠.
자꾸 틀에만 가두는 이 시대의 교육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많은 공부는 어른이 더 필요하단 생각예요.
동화도 역시 어른에게 필요하죠.
순수한 (?)아이들이 필요한 것처럼.
왜...삐딱하지...!? (저 동화 좋아해요!^^)

왜 문을 열어주느냐...그거야말로 백설이 자신의 의지가
원하니까 ㅡ아닐까요?
그 어릴적에 버려는 졌어도 숲은 그녀에게 관대했다면 관대했어요. 그러니 그녀는 그리 꺼리낄 만한 것이 없는
셈 ㅡ이고요.딱히 트라우마가 숲 이나 문 자체엔 없기에..
(뭐래니, ㅎㅎ)
문열면 안된다는 말이 없었다면 그런 의식˝을 아예 하지도 않았을텐데. ..안그런가요?
 
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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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독서회 책. 잘 쓴 책. 그런데 하 많은 작가들이 다룬 시대라 다들 어디선가 읽은듯한 인물들. 수필형식이라 소설임에도 태백산맥 같이 인물들이 극적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음. 오히려 박완서와 가까운 듯. 다른 출판사의 번역본을 표현만 살짝살짝 바꿔 사기 출간한 책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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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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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쓰는 김에 줄리아 스튜어트의 또 다른 책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올해 독서회의 첫 번째 책. 회원들 반응은 신통치 않음.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잡다한 이야기들로 집중이 안된다고. 나는 좋았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씁쓸하나마 웃음을 찾아가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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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고르의 중매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안진이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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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앉으니 생각이 막힌다. 그래도 뭔가는 남기고 싶고, 처음 해보는 100자평을 눌렀다. 남미의 마르케스나 이사벨 아옌데 혹은 이탈노 칼비노의 `마술적(?)` 기법이 떠오르는데, 그렇게 본격적은 아니고 드레싱처럼 살짝 뿌려놓은 것 같다. 유쾌하고 따뜻하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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