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이 끝났다. 총 55회로 1년이 살짝 넘게 방송했는데, 나는 몇 달 전부터 팟캐스트로 들어왔다. 구수한 말솜씨에 끌려 심심풀이 삼아 듣기 시작했는데, 고전을 읽는 깊이가 만만치 않다.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했다. 1주일에 1회, 한 회에 20여분 정도로, 한 권의 책을 많게는 10회까지 읽기도 하니, 줄거리만 쓰윽 훑고 가는 피상적인 독해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들어 본 인문학 강의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틈날 때마다 되풀이 해 들어도 지겹지 않고 좋은 공부가 된다.

 

“라디오 인문학”이란 프로그램 이름에 걸맞게 <맥베스>, <걸리버 여행기>, <오디푸스 왕>,<유토피아(이것도 소설인가?)> 등의 문학, 철학서로는 플라톤의 <향연>, 역사 분야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갈리아 원정기> 등을 읽었고 그 외에도 <군주론>, <판옵티콘>, <직업으로서의 정치> 등을 읽었다.

 

진행자는 항상 “거리의 철학자 강유원 박사님” 이라고 소개하는데, 헤겔 철학을 전공했고, 학교 보다는 주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 모양이다. 정치철학을 하며, 역사와 전쟁사, 무기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에도 강의를 해 주면 좋겠지만 지방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도서관 담당자에게 한 번 제의해 보려고 한다.

 

방송을 마친다는 말에 아쉬워 검색을 해 보니 몇 권의 책이 있다. 그 중 『인문 고전 강의』를 빌려 왔다. 이 책 역시 2009년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묶은 것이다. 매주 두 시간씩 40주간 진행한 강의에는 <라디오 인문학>의 내용과 겹치는 것도 있지만 주로 다른 책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가 있는데, 마침 내년 초 독서회에서 읽을 책으로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이 있어, 참고가 될까하여 그리스 비극에 관해 조금 정리해 두려고 한다. <라디오 인문학>에서도 들은 내용이지만, 책으로 다시 읽으니 정리하기가 훨씬 쉽다.

 

 

 

 

고대 그리스하면 우리는 도시국가, 폴리스를 떠올린다. 그런데 폴리스는 단지 도시 혹은 도시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인민을 의미하기도 했고, 그들의 공동체를 뜻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정확하게는 “인간은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란 의미이다. 정치적 공동체는 물론 학문, 예술, 운동, 규율까지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정치가 폴리스의 삶 전체를 관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때의 정치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의미했다. 운동, 전쟁, 연극 관람까지도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폴리스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과 같다. 동물적 목숨만이 붙어 있을 뿐 공동체의 삶이 없다는 의미에서 아감벤이 새롭게 유행시킨 로마의 ‘호모 사케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비극 역시 폴리스에서 상연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처음부터 연극으로 상연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읽히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극 작가 혼자만의 작품도 아니다. 고대의 예술작품은 집단 창작의 성격을 갖고 있다. ‘고독한 예술가’ 라는 이미지는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최근의 개념이다.

 

그리스 비극은 아무 때나 상연되는 것이 아니다. 매년 3월과 4월 사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행해지는 연극 경연대회에서 공연된다. 얼어붙은 대지를 깨우고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기 위해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폴리스의 주요한 행사다. 돈 많은 시민들 몇 명을 뽑아 돈을 대게 하면, 코레고스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합창단원인 코로스를 뽑고 시인과 배우를 모집한다. 이 때 경연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시인과 배우는 제비뽑기로 추첨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돈이 가장 많은 코레고스가 가장 좋은 시인과 배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부에 관계없는, 기회의 평등, ‘공정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이런 원칙이 실현된 것이다. 그들은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민회의 추첨을 통해 뽑았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물론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폴리스의 구성원들 즉 2~3만 명의 남자 시민들이다. 지금의 평등 개념과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공동체적 삶에 포함되지 못했다.

 

여하튼 이렇게 한 팀이 짜이면, 시인은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써야 했다. 비극 3부작을 트릴로기Trilogy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3부작, 3부작 하는 것도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 3부작이 되어야 ‘완성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극 Tragedy 의 어원은 트라고디아 Tragodia다. ‘염소의 노래’란 뜻이다. 트라고스 Tragos가 염소, 오디 Odie가 노래다. 비극을 공연할 때 디오니소스 신에게 염소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부정을 씻기’ 위해서 이다. 부정을 씻는다는 말이 바로 카타르시스 Katharsis 이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이 해소되어 개운해진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아~ 깨운하다” 는 느낌이다.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는 목적도 바로 이 카타르시스에 있다. 희생제물을 바쳐 부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개운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비극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중심은 코러스다. 코러스 사이사이에 대사가 부차적으로 끼어들어 있을 뿐 대사가 중심이 된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대사를 에페이소디온Epeisodion이라 불렀고, 이것이 에피소드 Episode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스 비극을 우리가 책으로 읽을 때 코러스 부분을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자세히 읽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러스의 역할은 다양하다. 코러스는 극의 전체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하고,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며 감정을 쏟아 붓기도 하고, 등장인물과 대립하며 함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코러스를 통해 우리는 비극의 줄거리와 비극을 관람하는 그리스인의 입장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를 기억해 보자. 시험에 잘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름도 생소하게 들린다.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 그리고 별칭이 없는(?) 에우리피데스가 있다.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경험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비극에서도 신이 주역을 맡으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신에 귀의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비극의 주제를 이룬다. 신이 내린 운명에 발목 잡혀 있으나 신의 의지 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된다.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뿐만 아니라 그에 뒤이은 조국 아테나이의 전성기를 맛보았고, 뒤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조국을 덮쳐 오는 불안한 시기를 두루 겪었다. 한편 조국의 영광에 대해서 소문밖에 듣지 못했던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며, 신에 대한 믿음도 인간에 대한 믿음도 굳건하지 않다. 이들 3대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을 이어서 읽는다면,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따라 어떻게 작품의 서사 양식이 달라지는 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이 확신에 차 있을 때와 그 가능성이 포기되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음미해 보는 재미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로 아주 유명해 졌고, <안티고네>는 헤겔 뿐만 아니라 현대의 철학자들도 끊임없이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디푸스>는 'less than nothing'으로, 모든 것을 잃고 눈을 찔러 nothing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something인 된 인물로 지젝에 의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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