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박현희 지음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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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왜 그랬을까? 일곱 난장이들이 그렇게 신신당부 했는데, 왜 백설공주는 문을 열어 주고 말았을까? 저자의 답은 간단했지만, 책을 넘겨보기까지 머리 굳은 나는 그럴듯한 답을 찾지 못했다. 이 책에는 15개의 동화가 나오고, 양치기 소년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는지, 라푼젤은 누구를 위해 머리를 길렀는지 따위의 질문이 쏟아진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목차를 들여다보며 굳은 머리를 살살 풀어보는 것도 쏠쏠한 재밋거리가 될 법하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의 목적이 동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독자 또한 이제는 동화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이 맞을 것이다. 동화는 아이들의 세계다. 나무인형이 사람이 되고, 늑대가 말을 하고, 왕자님이 수시로 우리를 구하러 달려오는 세상은 아직은 꿈꿀 수 있는 아이들의 세상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닳고 닳은 어른들에게 이 순수한 동화의 세계를 들이미는 것일까?

 

동화는 알려진 것만큼 그렇게 순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화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대에서 어린 시절 읽었다는 명심보감이나 동몽선습만큼 전통적인 가치관을 내재하고 있다. 명심보감은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중국 고전에서 선현들의 금언과 명구를 편집하여 만든 책’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한마디로 선현들의 훌륭한 말씀을 깊이 새겨야 된다는 말이다. 동화는 이 직설적인 ‘금언’에 상상과 꿈을 덧입혀 화려한 치장을 해놓았다. 그 알록달록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푹 빠져들 때, 아이들이 진정 빠져들어 가는 곳은 어른들의 가치관이 촘촘히 짜놓은 기성 세계의 법칙 속이다. 아이들은 동화와 함께 어른들의 세계에 길들여지기 시작한다.

 

<빨간 모자 소녀>는 할머니 댁에 심부름 가는 길에 엄마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샛길로 들어갔다가 죽을 뻔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은 안전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새로운 것도 없다. 엄마가 금지한 샛길은 온통 궁금하고 새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누구도 다니지 않아, 온전히 피어 있는 꽃들과 갖가지 작은 생명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알지 못해 더 궁금한 굽어진 길들. 소녀는 그 끌림을 뿌리치지 못하고 샛길로 빠졌다가 죽을 고생을 한다. 교훈은? 엄마 말씀 잘 듣고 남들이 다니는 큰 길로만 다녀야 안전하다. 그럼 엄마 말씀은 어떤 것?

 

<피노키오> 의 ‘엄마’ 요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해. 게으름은 아주 무서운 병이야. 어렸을 때 빨리 고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고칠 수가 없단다.~ 학교가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던 피노키오는 첫 등굣길에 책을 팔아 유랑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엄청난 고생을 한다. 납치되고 팔려가고 죽도록 일하고. 집나가서 갖은 개고생을 겪은 끝에 피노키오는 할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 나무 인형 피노키오는 진짜 사람이 된다. 학교에서 부지런히 공부를 하든, 그게 싫거나 안 되면 부지런히 일을 해서 돈을 벌든, 그래야만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교훈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럼 말 잘 듣고 부지런히 일해!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칸트는 교육이란 어떤 내용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교육의 목적이 있다고 했다. 단체로 앉혀 놓고 정해진 시간 동안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그렇게 규율에 잘 적응하는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정해진 시각에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산업 사회의 일터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p41」

 

이 책의 저자는 고등학교 선생님이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단지 동화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까발리는 것에 있지 않다. 그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교육이 아이들을 그리고 우리 어른들을 과연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은 너무 많이 들어서 듣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답이 없어 더욱 외면하고 싶은 질문이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것을 도대체 어쩌라고 자꾸 이런 지적질 인가 짜증도 난다. 근대 교육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말 잘 듣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우리나라의 교육은 가히 1%를 위해 99%가 죽어나가는 미친 시스템 이다. 시스템 앞에 선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다. 그런데 왜 자기만 안다는 듯이 잘난 척인가 싶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시스템이 깨지는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 바라는 것이야말로 개인들의 외면이다. 그것이 무지이든 체념이든 냉소이든 결과는 동일하다. 시스템의 작은 틈도 가느다란 균열도 막아주는 것이 바로 구성원들의 외면이다. 북한산 인수봉의 바위도 가느다란 틈 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얼었다 녹으면서 결국 깨져 떨어졌다. 인명이 다친 불행한 사고이지만, 하루에도 수만의 발길을 받아내고도 끄떡없던 바위도 작은 틈과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갈라졌다. 모든 시스템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이 책이 번연한 소리를 지겹게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재미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에 나도 이렇게 길들여졌구나 새삼 깨닫게도 되고,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아이, 죽어라고 치마 길이를 줄이는 아이, 거울만 쳐다보이는 아이들이 우리 교육의 부산물이 아니라 필연적 산물임을 아프게 느끼게도 된다. 선생님 저자는 매일 부딪히는 학교의 현실을 동화에 빗대어 불같이 토해낸다. 다혈질에 직설적인 성격일 것 같은 저자의 문장도 꾸밈없고 거침없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 이라는 부제답게 교육 현장 그리고 사회 곳곳의 문제를 입바르게 지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이 그렇게 매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동화는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다. 그러다보니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동화 해석도 있지만, 무리하게 꿰맞춰 어색한 해석도 있고, 왜곡이다 싶을 만큼 편향된 해석도 있다. 그러나 조금 거슬리는 몇 편을 못 본 척 눈감아 주면, 무릎을 딱 치며 얻게 되는 깨달음의 기쁨이 있다.

 

그런데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주었을까요? 

책장을 넘기기 전에 각자의 해답을 찾아 보시길 권유드린다.

 

 

 

 

 

 

<칸트의 '훈육' 부분, 5월 13일 추기>

** 어디서 읽었던지 기억해 내지 못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어제밤 누워 희미한 기억을 따라 이 책, 저 책 넘기다, 딱 마주쳤다. 찾았다! 기억과는 다르게 칸트를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저자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었다.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p66~67

 

  인간이 동물적 충동들 때문에 자신의 정해진 목표인 인간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바로 훈육이다. 예컨대 훈육은 인간이 야생적이고도 무분별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훈육은 단지 부정적인 것이며, 그것의 작용은 인간의 자연적 제어불능을 막아내는 것이다. 교육의 긍정적 부분은 가르침이다.

   제어불능은 법으로부터의 독립에 있는 것이다. 훈육에 의해 인간은 인류의 법에 종속되며 법의 제약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초기에 성취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자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으로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일단 자유에 익숙하게 성장하게 되면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자유에 대한 자연적 사랑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인 거친 상태를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본능이 이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Kant and Education, London : Kegan Paul, French, Trubner & Co, 1899, pp 3~5) 

 

  한편으로 칸트는 훈육이 인간 동물을 자유롭게 만들고 자연적 본능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절차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훈육의 표적은 직접적으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인 것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과도한 사랑, 천성적 ‘제어불능’임이 분명한데, 이는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즉 이 제어불능 속에서, 고유하게 예지적인 또 하나의 차원이, 즉 인간이 자연적 인과율의 현상적 연결망에 얽매여 있는 상태를 중지시키는 차원이, 폭력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덕성의 이야기는 자연 대 문화라는, 즉 도덕 법칙이 우리의 자연적 ‘정념적’ 쾌락 추구 성벽을 제약한다는 표준적 이야기가 아니다. 반대로 투쟁은 도덕법칙과 비자연적인 난폭한 제어불능간에 있는 것이며, 이 투쟁에서 인간의 자연적 성벽들은 오히려 인간의 안녕을 위협하는 제어불능의 과잉에 대항하여 도덕법칙의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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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는 어른이 아이를 위해 쓰고 남긴 것이 아니라 저자가 아이들의 견해를 궁금해 한 나머지 자 ~너희는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하고 던져놓은 미끼 같단 생각을 저는 가끔 해요.
어릴때도 그랬고 커서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던 동화 ㅡ
왜일까요? 늘 어른은 아이들에게 이래야만 뭔가 얻을 수있다 ㅡ라는 식. 이라서 ..저는 순수하게 안본 것 같아요. 거래로 봤지.. 교육은 훈육이란 ㅡ말그대로 거래인셈이죠. 사회와 부합하기위한 ..그게 인격형성에 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알수없지만, 착한 아이표가 되는 것 만큼은 그리 썩 달가운 건 아니에요. 한번쯤 스스로 틀리다 말한 길도 가보고 스스로 어른이 되는걸
아이들은 아는 데 ..어른들이 편하자고 막는 걸 수도 있단 ㅡ심각한 문제적 시선도 ..한번 가져보는 중예요. 인간은 자연인여야하는데..자꾸 규격화 시키는 힘 ㅡ 이게 뭘까 ..하고요. 기성세대ㅡ의 잣대로 만든 교육론이 아닌가 ㅡ하고 말이죠.
순 ㅡ얼토당토 인 엉망 진창 이야기라는거 아는데..
그냥 그럴 수도있지않냐 ..하는거죠.
아이들은 그리 순수하지도 못말리게 천사같지도 않아요.
어쩌면 어른보다 현명하기까지 하죠.
자꾸 틀에만 가두는 이 시대의 교육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많은 공부는 어른이 더 필요하단 생각예요.
동화도 역시 어른에게 필요하죠.
순수한 (?)아이들이 필요한 것처럼.
왜...삐딱하지...!? (저 동화 좋아해요!^^)

왜 문을 열어주느냐...그거야말로 백설이 자신의 의지가
원하니까 ㅡ아닐까요?
그 어릴적에 버려는 졌어도 숲은 그녀에게 관대했다면 관대했어요. 그러니 그녀는 그리 꺼리낄 만한 것이 없는
셈 ㅡ이고요.딱히 트라우마가 숲 이나 문 자체엔 없기에..
(뭐래니, ㅎㅎ)
문열면 안된다는 말이 없었다면 그런 의식˝을 아예 하지도 않았을텐데. ..안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