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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ㅣ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카뮈에 의하면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 『페스트』와 『반항인』은 각각 하나의 쌍을 이룬다. 앞의 쌍은 부조리 즉 부정의 계열, 뒤의 쌍은 반항 즉 긍정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눈에 딱 들어오는 단순한 구별 방법도 있다. 앞의 쌍은 책이 얇은 반면, 뒤의 쌍은 두껍다. 거의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런데 읽기는 오히려 『페스트』와 『반항인』이 쉽다. 『이방인』과 『시지프의 신화』가 운문 같다면, 『페스트』와 『반항인』은 산문이다. 특히 『페스트』는 카뮈가 이렇게 술술 읽혔나 싶을 만큼 편안하다. 『이방인』을 덮고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아련하다면, 『페스트』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훨씬 명료한 카뮈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페스트』는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페스트 발병, 2부는 페스트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 3부는 페스트에 의해 파괴된 삶, 4부는 페스트와 싸우며 변화하는 사람들, 5부는 페스트의 종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최근에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떨친 정유정의 『28』과 비슷하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28』이 장르 소설의 형식을 따르며 사건의 전개에 치중한다면, 『페스트』는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달리 극적인 사건은 없다. 폭동도 거의 없고, 대단한 혼란도 없다. 현대 재난물의 공식인, 재앙의 발병원인이 인간의 탐욕이라는 식의 반성적 도입부도 없다. 평온하고 따분하던 일상에 쥐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하고 곧바로 페스트가 창궐한다. 소설 『페스트』가 집중하는 것은 오직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페스트에, 죽음에 대항하는가? 『페스트』는 전쟁, 특히 나치가 일으킨 전쟁에 대한 비유이지만, 인간 실존의 조건인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서술자가 주목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초월적 태도, 도피적 태도, 투쟁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페스트가 진행됨에 따라 변화한다. 폐쇄된 도시에서 그들의 운명은 결국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랑베르는 파리의 신문기자다. 취재차 왔다가 억류된 이방인이다. 랑베르는 어떻게 해서든 오랑을 빠져 나가려고 한다. 자신은 이 도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사 리유에게 페스트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리유 자신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리유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고 달랜다. “하지만 나는 이 고장 사람이 아닌데요!” “지금부터는 유감입니다만, 선생은 이 고장 사람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페스트와 무관한 사람은 없다. 죽음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랑베르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시도한다. 거듭된 좌절 끝에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 그 때 랑베르는 돌연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러나 이제는 볼대로 다 보고 나니, 나는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이 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p282”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발병하자, 신의 징벌이며, 겪어 마땅할 불행을 겪는 것이라 설교한다. “오늘 페스트가 여러분에게 관여하게 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조금도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 없는 재앙은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 ... p135” 그렇다고 파늘루 신부가, 몇 년 전 동남아시아의 쓰나미를 두고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죄를 받은 것 운운했던 우리나라의 목사라는 인간들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 파늘루 신부는 보건대에 자원하여 페스트에 대항해 함께 싸운다. 페스트가 절정에 치달았을 때, 카스텔이라는 의사가 죽어가는 어린 아이의 몸에 혈청을 주사한다. 새로운 혈청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이 어린 아이는 자원 보건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 죽는다. 리유는 파늘루 신부에게 말한다. “허, 이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당신도 그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p293” 파늘루 신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하지만, 그 역시 어린 아이의 고통을 어떻게 의미화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진다. 두 번째 설교에서 파늘루 신부는 고백한다.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영생의 환희가 그 고통을 보상해 줄 것이라 말해버리는 것이 쉽겠지만, 실상은 그 점에 대해서는 자기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그리고 외친다. “여러분, 드디어 때는 왔습니다. 모든 것을 믿거나, 모든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우리들 중의 누가 감히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p301” 페스트는 이제 그 누구보다 파늘루 신부 자신에 대한 신의 ‘타작’ 인 셈이다. 어린아이의 죽음 앞에서, 파늘루 신부는 신에 대한 사랑이냐 혐오냐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는 선택하지 못한다. 타루의 말에 의하면 “죄 없는 사람이 눈알을 잃게 될 때, 한 기독교인으로서는 신앙을 잃거나 눈알이 빠지거나 해야 마땅하죠. 파늘루 신부는 신앙을 잃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그는 갈 때까지 갈 거예요.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p308” 파늘루 신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런데 그의 사인은 ‘미상’ 이다. 의사는 페스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증세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죽은 아이에게 유죄를 선언할 수도 없고, 신을 부정할 수도 없던 파늘루 신부는 스스로 페스트에 걸려 죽어야 했던 것이다. 신부는 아마도 상상임신처럼 상상의 페스트를 앓았을 것이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타루는 자원 보건대를 만든 사람이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재판에서 한 남자에게 사형선고 하는 것을 목격한 타루는 가출한다. 고생과 성공을 맛본 그는 언제나 뇌리를 떠나지 않던 사형선고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정치 운동에 뛰어든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인간을 죽일 권리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선고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 온 자신 역시 그 싸움을 통해 오히려 사형선고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한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했던 그런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죽음을 야기시키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속을 썩이는 것 같지 않았고, 적어도 자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 그들은 나에게 붉은 제복이 옮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곧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전적으로 일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일단 한번 양보하게 되면 끝도 없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역사는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많이 죽이는 자가 승리하는 모양이니 말이예요. 그들은 모두가 살인에 미친 듯이 열중해 있습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p336”
타루의 말은 『반항인』에서 까뮈 자신의 주장과 같다. 붉은 제복은 레닌-스탈린주의에 대한 유비로 볼 수 있다. 또한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이름을 떨친 ‘죽음의 대천사’ 생 쥐스트 이기도 하다.
「유럽 정신은 전 인류와 함께라면 신에 대항하여 투쟁할 수 있으리라고 오랫동안 믿어온 연후, 이제 스스로 소멸되지 않으려면, 도리어, 인간들에 대항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항거하여 몸을 일으켜, 인류 위에 억센 불멸성을 세우고자 했던 반항자들은, 이번에는 그들 자신이 살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기겁을 한다. 만일 그들이 후퇴한다면, 그들은 죽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 만일 그들이 전진한다면, 그들은 죽이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반항은, 그 기원으로부터 이탈되고 파렴치하게 변장된 채, 온갖 차원에서 희생과 살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배분적 정의이고자 했던 반항의 정의는 요약적 정의가 되고 말았다. 은총의 왕국은 정복되었다. 그러나 정의의 왕국 역시 붕괴되고 있다. 유럽은 이 실망으로 죽어가고 있다. 유럽의 반항은 인간의 무죄성을 변호했었다. 그러더니 이제 자기 자신의 유죄성에 대하여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반항이 전체성을 향해 몸을 던지자마자, 반항은 가장 절망적인 고독을 자기 몫으로 받는다. 반항은 전 인류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었다. 그런데 이제 반항은 통일성을 향해 나아가는 고독자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가는 희망 외에 다른 희망을 갖고 있지 않다.『반항인』p308」
반항은 통일성을 요구하지만, 역사적 혁명은 전체성을 요구한다. 전체주의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혁명은 도래할 유토피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를 강요한다. 정의의 왕국을 위해 살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혁명은 반항의 정신을 배반한다. 반항은 불가피한 살인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논리적인 살인은 결코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세계를 통일하고 정의를 실현할 수는 없다. 반항자는 반항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살인하지 않으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반항자는 살인에 동의할 수도 없고, 전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다.
「반항자는 그러므로 휴식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선을 알고 있지만 본의 아니게 악을 행한다. 그를 지탱하는 가치는 결코 그에게 결정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그는 이 가치를 끊임없이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그가 획득한 존재는 반항이 다시 그것을 지탱해 주지 않으면 무너져버린다. .. 암흑 속에 빠진 그의 유일한 미덕은 암흑의 어지러운 현기증에 굴복하지 않는 데 있다. : 악에 얽매인 그의 유일한 미덕은 집요하게 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반항인』p314」
반항자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그는 밀어 올리면 굴러 떨어지고, 또 밀어 올리면 또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끊임없이 밀고 올라가는 시지프이기 때문이다. 반항자는 아름다운 영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카뮈는 반항자의 손이 깨끗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반항은 선과 악의 긴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인 선을 추구할 때 반항은 무력해 지며, 악의 효율성에 손쉽게 넘어갈 때 반항은 살인이 된다. 악의 중력에 대항해 비상하려는 그 노력만이 반항인의 유일한 덕이다.
타루는 모든 살인을 거부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을 죽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타루는 이 모순 속에 마음의 평화를 잃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은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해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p339” 타루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성인이 되는 것이다. 신을 안 믿지 않느냐는 리유의 물음에 타루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는 사람은 신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p341 ”
인간이 성인이 될 수 있을까? 타루는 페스트가 패퇴하여 물러갈 즈음에 페스트에 결려 죽는다. 타루를 보는 카뮈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타루를 반항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는가 싶으면, 실패한 반항인의 씁쓸한 모습을 그린 것처럼도 보인다. 페스트에 대항해 자원 보건대를 앞장서서 꾸리며 열심히 싸우지만, 그는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한 듯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형선고 뿐이다. 타루는 성인이 될 수 없으므로 죽어야 한 것일까? 죽어서 성인이 된 것일까?
『페스트』는 알제리의 오랑시를 몇 개월 간 휩쓸었던 페스트에 관한 기록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충실한 기록의 서술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의사 리유이다. 리유는 맨 먼저 페스트의 징후를 알아채고, 시 당국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고, 타루의 자원 보건대를 이끌며 페스트와 직접 맞서 싸운 중심인물이다. 처음 보건대 조직을 위해 리유를 찾아갔을 때 타루는,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헌신적이냐고 리유에게 묻는다. “ ..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p176” 리유는 페스트가 어떻게 될지, 다음에 무엇이 올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은 당장 해야 할 일,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리유와 타루의 오랜 이야기 끝에 타루는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 드렸나요, 선생님?” 이라고 묻고, 리유는 “가난입니다.” 라고 답한다. 리유는 타루처럼 고뇌하는 인간도 아니고 대단한 사상을 가진 인물도 아니다. 그저 눈앞의 현실에 맞서 싸우는 평범한 의사이다. 그러나 이 페스트의 지옥에서 조용히 투쟁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바로 리유이다.
리유는 카뮈의 마음속에 있던 반항인의 참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리유는 신을 믿지도 않고, 성자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 의사이다. 의사는 끊임없이 죽음과 싸우는 사람이다. 의사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결국은 패배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인간의 편에 서서 죽음과 싸워야 하는 직업(소명)이다. 파늘루 신부도 타루도 죽었지만 리유는 살아남아 이 기록물의 서술자가 된 것은 바로 리유가 의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반항인이란 죽음과 싸우는 의사이다.
하지만 타루의 보건대 없이는 리유 역시 페스트와 맞서 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리유와 타루는 서로를 보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둘을 합치면 완전한 이상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통일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통일을 향한 인간의 투쟁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완전한 반항인이 아니라 참된 반항인이 되고자 하는 다수의 반항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소설『페스트』는 이런 반항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다. : “다만 공포와 그 공포가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무기에 대항하여 수행해나가야 했던 것, 그리고 성자가 될 수 없고 재앙을 용납할 수도 없기에 그 대신 의사가 되겠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행해나가야 할 것에 대한 증언일 뿐이다. p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