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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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었다고 하려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도 읽어야 할 것이다. 완역본으로 추정되는 펭귄 클래식판 『로빈슨 크루소』의 존재를 확인했으나, 아쉽게도 읽지 못하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실린 <작품해설>을 통해 개략적 정보를 얻었다.

 

문학 해설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김화영은 도표를 그려 두 작품과 그것들의 모델이 된 사건을 비교해 놓고 있다.

   

 

 

 

실존인물인 셀커크라는 선원은 1703년에 무인도에 혼자 남았고, 디포의 로빈슨과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각각 1659년과 1759년에 무인도에 난파되었다. 다니엘 디포가 소설을 발표한 것은 1719년, 미셸 투르니에는 1966년 이다.

 

디포의 시대는 17C의 과학 혁명을 거쳐 18C 말의 산업 혁명으로 넘어가는 시기다. 서구 사회가 이성과 과학을 바탕으로, 자신감에 넘치던 때이다. ‘산업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로빈슨 크루소』가 탄생하기에 가장 적절했던 시기인 셈이다. 이에 반해 1,2차 세계 대전을 겪은 20C 중반의 서구는 근대 합리주의의 폐허 위에 포스트모던의 이상을 세우고 있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어야 했던 것은 역사의 마땅한 귀결인 셈이다. 그러므로 『로빈슨 크루소』가 자연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역설한 반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문명에 대한 자연의 귀환을 그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모던, 근대는 주체의 시대이다. 디포의 로빈슨은 섬을 지배하고 다스린다. 섬은 지배의 대상일 따름이다. 인간 프라이데이 역시 철저히 대상화된 타자, 야만적 노예일 뿐이다.

 

포스터 모던은 주체를 타도의 대상 또는 해체의 대상으로 본다. 주체가 물러나고 타자가 등장한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서 변광배는 포스트모던을 “서구철학사에서 중심을 차지했던 ‘일자’의 폭력으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났던 ‘타자’가 그 중심을 향해 획책한 반란p18” 이라고 정의한다. 샤르트르에서 시작해서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라캉, 리쾨르,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중후반의 인문학 담론을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이 바로 타자이다. 타자에 대한 이들 철학자들의 담론은 물론 제 각각이다. 그러나 타자가 더 이상 주체를 위한 단순한 대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에게도 처음에 섬은 단순한 대상일 뿐이었다. 섬은 개척과 지배의 대상으로, 창조주인 로빈슨 자신에 의해 질서를 부여받아야 했다. 그러나 디포의 로빈슨과는 달리 투르니에의 로빈슨의 마음속에는 다른 가능태로서의 섬의 모습이 순간순간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방드르디가 왔다. 처음에 방드르디는 무시무시한 의식을 거행하는 야만적 타자들의 일원이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목숨을 구해주게 된 방드르디는 부려야할 노예 - 타자였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그 천진성과 무구함으로 로빈슨이 섬에 이루어 놓았던 모든 질서를 날려버리고 동료 혹은 타로 카드가 예언한 대로 쌍둥이가 된다. 타자는 주체와 하나가 된 것이다. 로빈슨과 방드르디, 로빈슨과 섬은 모두 원소들로 화하고, 주체와 객체, 나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 ‘태양의 로빈슨’으로 태어난다. 사실 세계의 모든 것은 우주가 폭발할 때 발생한 원소들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유기체와 무기물, 주체와 객체, 하늘과 땅, 모두 동일한 입자들에서 탄생했으므로, 결국에는 하나이다.

 

 

 

주체는 타자와 하나이지만, 동시에 주체의 바깥에 존재해야 한다. 무인도에 난파한 후 곧 로빈슨은 혼자만의 삶에 진저리치며 타자의 존재를 갈망한다. “시각적 환상, 허깨비, 착란, 눈뜨고 꾸는 꿈, 몽환, 광기, 청각의 교란 등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성벽은 우리의 형제,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혹은 원수, 하여간 그 누구, 오 하느님, 그 누구인 것이다! p 67~8 ” 마지막 12장의 ‘죄디’ 역시 타자의 존재가 삶의 동력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방드르리가 화이트버드호를 타고 떠나 버린 것을 안 후 로빈슨은 죽으려고 동굴을 찾아 간다. 거기서 뜻밖에 화이트버드호에서 탈출한 어린 소년을 만난다. 로빈슨은 그 소년의 손을 잡고 언덕 꼭대기로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며, 소년에게 목요일이란 뜻의 ‘죄디’란 이름을 붙여준다. 죄디는 로빈슨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이다.

 

   

 

추기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원제는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 이다. 불어 ‘Limbes’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림보이다. 천주교 자체를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나 세례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사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지대이다. 말하자면 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사는 곳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자연의 무구한 상태 그대로다. 디포의 산업사회가 파괴된 곳 위에 투르니에는 림보라는 이상향을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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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4-06-06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가 <에밀>에게 권한 최초의 책이 <로빈슨 크루소> 라 한다. 투르니에가 1759년을 시작으로 삼은 이유다. 그런데 루소가 왜? <로빈슨 크루소> 를 어떤 시각으로 본 걸까? 청교도적 자본주의 윤리와 식민지 개척을 옹호한 책인데. 하긴 프랑스 혁명의 모델이 로크가 기초한 영국 자본주의 국가였다니.. 루소의 자유, 평등 개념도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말리 2014-06-06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쓸모 있는 기술은 가장 빈약한 보수를 받고 있다...반면 한가한 사람과 부자만을 위해 일하는 소위 에술가라는 작자들은 불필요한 물건에 엄청한 가격을 매긴다... 부자가 그러한 것을 중시하는 이유는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유용성과 무관한 엄청난 비싼 가격을 보고, 어떤 물건이 값이 비쌀 수록 가치가 없다면, 그들 기술의 진정한 가치와 사물의 현실적인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이 가능할 것인가.. 로빈슨은 쓸모없는 장신구보다 도구를 훨씬 더 아끼고 도구를 만드는 사람을 존경한다. <에밀>

말리 2014-06-06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빈슨 크루소는 고도에서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아무런 도구도 없이 자신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어느 정도 행복까지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필요한 것을 단순히 책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경험하여 좀더 자세히 배우기를 바란다. <에밀>

말리 2014-06-0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분의 블로그에 보니 루소는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인간에게 실용적인 것을 가르치라고 했다고.

말리 2014-06-09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검색한것 :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에밀은 끊임없이 산책하고 공터를 돌아다니면서 자연 가운데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떠오르는 태양, 별자리를 관찰하면서 자연의 법칙도 깨닫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스스로 숙련된 기술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도구를 만들어 충족 했던것처럼 에밀은 공예 기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공예 기술은 다수의 협력이 필요하며 사회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것을 깨닫고 에밀은 직업기술을 배운다.

직업을 배우는데 있어서 우선 극복해야 할 것은 그것을 경시하는 편견이다.
루소는 이 시기를 육체 노동, 수공업적 기술 습득과 연결된 직업 교육에 힘쓰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이론적 지식은 금기이며 오로지 모든실험을 일종의 연역에 의해 연결시키면서 올바른 지식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육체의 교육은 앞으로 행해질 감성 교육의 토대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