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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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에서 소설 읽기의 장점은 이런 것이다. 혹은 단점도 이런 것이다. 아~좋은 책이야!, 뭐가 이래ㅡ.ㅡ; , 오..비극적이다..,하고, 가만히 혹은 탁! 책을 덮고 말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니까, 내 취향이 아니예요 하고 입을 다물수는 없으니까, 어떤 이야기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매우 쉬운 책도 있고, 너무 힘든 책도 있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생각할 거리가 없는 책도 있고, 목구멍이 뻐근하거나 혹은 콧구멍이 새큰거려 그 들끓는 감정을 딱딱한 언어로 뭉쳐낼 수 없는 책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쥐어짜내게 되는데, 새로운 생각의 촉매가 될 때도 있고, 아련한 느낌을 파사삭 깨버릴 때도 있다.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굳이 말하라면 후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글머리를 이렇게 시작해버리면 당연히 양자택일의 압박에 놓이게 된다. 그러려고 시작한 말이 아니라면, 저  !와 ㅡ.ㅡ;와 ...는 새빛 둥둥도 아니고 낙동강 동동 오리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글이라는 것이 그렇게 앞뒤 딱딱, 가로세로 각맞는 그런 것도 아니다. 콧구멍은 간질거리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잡히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또 헐벗은 언어가 붙들기에는 너무 풍부한 어쩌고 그런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데, 재미있다고만 말하기에는 그렇고, 무언가를 더 파고 들기에는 평론가의 영역이 될 것 같고, 일상과 엮어보기에는 너무 이야기가 많다. 단편집이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한데, 어느것 하나 그저그렇게 넘겨버리기에는 아까워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려고 덤벼들다간 독서회 회원들의 눈총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안그래도 말이 너무 많아 요주의 인물이 된 지 오래다.

 

7편의 단편 중 마지막인 <꽃의 피, 피의 꽃>이 경험상(?) 제일 친숙하다. 이 단편에는 세상의 모든 도박이 등장한다. 섯다, 도리짓고땡은 기본이고 고스톱, 포카를 거쳐 전자오락 도박, 경마, 라스베가스까지 좌악 펼쳐진다. 하나 없는 것이 있다면, 나의 친애하는 지인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가장 큰 도박"인 주식만 빠져 있다.

 

세상의 이 잡다한 그러나 거대한 도박 중 내가 직접 해본 것은 고스톱 같은 민속놀이를 빼면 경마다. 한 두번이 아니라 한 두 번의 한 이삼십 배는 될 듯 하다. 나야 기껏 하루 열두 경주 중 총 일이만원 정도 잃을 간덩이밖에 안되지만, 낮게 깔리는 음악과 함께 "제 9경주, 마권 발매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면, 초대형 전광판에 숫자들이 촤르륵 나타났다 또 촤르륵 바뀌는데 ,그것이 꼭 바람따라 이리 누웠다 저리 눕는 황금들판의 물결처럼 눈부시었다. 수백에서 시작해서 수천, 수억, 수십억으로 불어나는 그 숫자들의 물결을  보노라면, 어떻게 이삼십분 사이에 저렇게 많은 돈들이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봐도 봐도 신기했다.

 

그러나 배팅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부터는 화장실이며 실내 객장이며 너른 경마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끔 시사프로에 나오는 경마장 꽁지며 큰손이며 예상전문가들도 보게 되고, 일가족이 둘러앉아 예상지에 머리를 맞댄 모습, 피니시 라인에 코차로 들어오지 못한 기수를 향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수십만원인지 수백만원인지 알 수 없는 마권을 뿌려대는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상실감도 목격하게 된다.

 

거기에 인생을 건 모든 사람들도 결국 승자는 마사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의 피, 피의 꽃>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듯, 총 배팅 금액 중 72%만 배당금으로 경마꾼들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28%는 마사회로 들어 간다. 판돈의 100%가 돌아도 딴 사람과 잃은 사람이 갈리기 마련인데, 그 판돈이라는 것이 한 판에 28%씩 줄어드는데, 하루 12경주를 모두 배팅하고 나면 결국 처음 100원으로 시작했다면 1원만 가져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1원 중 딴 사람도 나오지만 당연히 잃은 사람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매 경주 사람들은 기대에 차 배팅을 한다. 간혹 1000배 이상의 배당이 터지기도 하는데, 만원만 걸면 1000만원을 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방이니까.

 

<꽃의 피, 피의 꽃>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거다. 몇번을 읽어봐도 결정적인 오타가 있긴 한데, 게임이란 혹은 도박이란 이런것이다,라는 명시적 교훈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아이들도 하는 게임이지만, 이 가위바위보는 목숨을 걸고 하는 내기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위를 낼 수 없다. 상대편은 가위바위보 모두 낼 수 있다. 어떻게 될까? 거듭 말하지만 목숨이 걸려있다.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현실과 확률은 다르니까. 내가 자유롭게 셋 모두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는 무엇을 낼 것인가? 상대는 무엇을 낼 것인가? 결론은 이 게임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위, 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은 상대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당연히 보를 낸다. 비긴다. 1라운드는 끝났다. 2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또 보를 낸다. 비겼다. 2라운드 끝. 3라운드에서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를 낸다. 역시 비긴다. 가위바위보에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걸 상기하라.

 두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같은 라운드가 되풀이될 것이다. 이것이 게임이다. 게임을 더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목숨을 거는 것이 게임이다. 목숨을 걸지만 아무도 서로의 목숨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게임이다. 게임이다.게임.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생에는 게임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p288~9」

 

바위,보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까? 이 비밀을 눈치채셨는가? 셋 모두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선택의 경우가 있다. 이기거나 비기는 것, 이기거나 지는 것, 그리고 비기거나 지는 것이다. 목숨이 걸려 있다면 당연히 '지는 것'이 들어가는 경우는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기거나 비기는 것이다. 그것이 보를 내야 하는 이유다. 내가 보를 내면 가위를 낼 수 없는 상대는 보나 혹은 바위를 낼 것이다. 보를 내면  비기게 되고, 바위를 내면 내가 이긴다. 그런데 머저리가 아닌 이상 상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도 당연히 보를 낸다. 죽을 때까지 보를 낼 수밖에 없다. 내가 진짜 도박꾼이라면, 오후 4시의 권태를 이길 수 없어 손가락을 걸고 내기 상대를 찾아 헤매던 허영만 만화의 주인공 허슬러라면, 나는 아마 가위를 낼 것이다. 상대가 나의 약점을 알고 보를 낼 것이라 예상한다면 나의 가위는 그만큼 승산이 있다. 그러나 가위에는 그만큼의 부담도 있다. 바위가 나오면 내가 죽는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그런데 이걸 부추기는 소위 멘토들도 많으시다.)  그러나 목숨은 손가락이 아니고, 왠만한 우리들은 죽어나 사나 보를 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게임이고, 그것이 인생이란다. 그런데 성석제는 게임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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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쌀 씻어 불려놓고, 그렸다. 잠깐이면 될 것 같아 예전에 정리해 둔 것을 도표로 살짝 바꾸었는데, 컴터에 앉으니 시간이 휘리릭~, 아침상은 허둥지둥, 버섯찌개는 정체불명의 맛으로 항의를 했다. 오늘 『고리오 영감』발제에 쓰려고 괜한 욕

심을 부렸다. 

프랑스 혁명은 짧게는1789년~1799년 사이의 10년간을 말한다. 흔히 대혁명으로 부르는 기간이다.  길게는 1871년 파리꼬뮌 시기까지의 약 100년을 전체 혁명의 역사로 본다. 공화정 -제정 - 왕정 - 공화정 - 제정 -공화정으로 체제는 정신없이 바뀐다. 이 100년의 격동을 보면 곧바로 직진하는 역사는 없다. 지금 갈짓자를 그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리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역사는 나아가고, 세상은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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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프로이트 How To Read 시리즈
조시 코언 지음, 최창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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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인간의 자부심에 충격을 안긴 세 가지 사건’ 에 관한 이야기는 프로이트가 한 말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그 세 가지 사건이다. 프로이트는 “이번 현대 정신분석학 연구의 발견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신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존재로 알려지면서 세 번째이자 가장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에고에게 ‘네가 사는 집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 사는 무의식이라는 존재에 대해 약간이라도 아는 것에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진화론은 인간이 신의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는 것, 무의식은 내가Ich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님이 역설적이게도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프로이트 스스로 인간을 강타한 세 번째 충격이라고 한만큼,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은 무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무의식적 현상은 의식 세계의 언어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접신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말똥한 의식에게 무의식은 애당초 이해 불가능한 세계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던 걸까?

 

허먼 멜빌의 『사기꾼』이란 책이 있다고 한다. 미시시피 증기선에 올라탄 한 인물이 매번 변장을 하고 나타나 사람들을 속이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사기꾼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물에 대한 추측만 난무할 따름이다. 사기꾼은 결코 그의 가면 없이 나타나는 법이 없다. 무의식도 그렇다. 무의식은 언제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무의식의 위장술은 전위displacement와 압축condensation이다. 우리는 무의식 그 자체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가면, 전위와 압축이 만들어낸 마스크일 뿐이다. 가면을 벗기려하면, 눈앞의 현실이 사라진다. 진실은 가면 뒤가 아니라 가면 자체에 있다.

 

무의식은 위장을 한 채, 우리의 의식에 교묘히 끼어든다. 그것이 바로 꿈, 농담, 실수 등이다. 무의식이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식의 검열 때문이다. 이 검열관은 밤이 되면 조금 느슨해진다. 너무 꽁꽁 틀어막으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터지기 쉽다. 밤에 살짝 풀어주면, 낮에 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므로 꿈이야말로 무의식에서 방출하는 모든 자극을 처리하는 처리장이다.

 

프로이트는 꿈을 독재정권하의 언론처럼 무의식이라는 기자와 마음의 검열관이 타협한 결과라고 했다. 독재하의 기자들은 검열관의 눈을 속여 행간에 그 의미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기자들이 머리를 쥐어짜 행간에 의미를 숨기듯, 꿈은 ‘꿈 작업’을 통해 애매모호한 단어와 괴상한 이미지를 창출하여 본래 의미를 변형시킨다. 보통 꿈의 해석을, 드러난 꿈의 내용을 통해 잠재된 꿈 사고를 밝혀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꿈의 핵심은 꿈 사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꿈 작업’에 있다. 꿈에는 아무리 해석해도 해석할 수 없는 것이 남는다. 꿈 사고는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이 불가능한 해석에 매달린다고 해서 무의식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별 의미 없이 지나친 하나의 단어 속에 그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꿈을 꾸며 우연히 말한 ‘tutelrein' 이라는 단어에는 꿈이 공들여 세공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휘황찬란한 꿈의 파노라마는 오히려 이 하나의 단어를 위한 거창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How To Read> 시리즈는 좋은 입문서다. 내가 읽은 몇몇 책들은 그랬다. 프로이트 편도 재미있다. 프로이트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리비도, 무의식, 꿈, 죽음충동을 비롯해 나르시시즘, 쾌락원리,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사도마조히즘 등 기본적인 개념을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요약하기에는 모두 다 중요한 개념이라, 무의식과 꿈에 대해서는 간단히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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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물리학 - EBS 다큐프라임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지음, 홍성욱 감수, EBS MEDIA 기획 / 해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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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리가 좋다면 꼭 해보고 싶은 공부가 천체물리학이다. 138억 년 전의 우주, 그 찰나의 빛이 세상을 만들고, 아직도 우주는 그 흔적과 기억을 품은 채 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물리의 세계는 진짜 천재들의 세계다. “나는 그 누구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이 이렇게 말했다니, 그리고 아인슈타인조차 죽을 때까지 코펜하겐학파의 양자해석을 믿지 않았다니, 나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다. 그런데도 나는 거대한 우주와 미시의 양자 세계가 결국 동일하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뜬다. EBS 다큐프라임의 <빛의 물리학>이 방송되었을 때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신없이 화면에 빨려 들었다. 빛을 따라 갈릴레이, 뉴턴을 거쳐 아인슈타인이 밝혀준 우주 공간을 보았고, 그 빛의 엑스터시 속에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을 아주 아주 작고 캄캄한 양자들의 세계로 들어섰다. 아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어둠의 세계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과 모든 생명의 원리가 들어 있다. 그 다큐 <빛의 물리학>이 책 『빛의 물리학』으로 출간되어 도서관 신간코너에 딱하니 꽂혀 있었다.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앨리스는 끝없이 낙하하고 있다. 토끼 굴속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지를 못하고 계속 떨어지고만 있다. 왜? 작가의 은유와는 관계없이 『빛의 물리학』은 이런 답을 할 수 있다. 앨리스가 땅에 닿지 못하는 것은 땅이 계속 꺼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방해를 받지 않으면 계속 직진한다. 관성의 법칙이다. 우주에서는 한 번 힘을 받은 물체는 영원히 움직인다.

   

  관성의 법칙에 따른다면 달도, 공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있으며, 지구상에서 하늘로 던진 공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러면 이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중 하나의 방법은 공이 닿기 전에 땅을 내리는 것이다. 땅을 계속 내리다 보면, 공이 지나간 궤적은 둥그런 모양이 되고, 공은 계속 지구 주위를 돌게 된다. p82 」

 

뉴턴의 이 생각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 인공위성이다. 자연위성인 달도 인공위성처럼 떨어지면서 지구를 돈다. 뉴턴은 여기서 공이든 사과든 달이든 왜 떨어지는 가에 의문을 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서로를 잡아당긴다. 달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관성과 지구와 달이 서로 잡아당기는 만유인력 때문에 끊임없이 돌고 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앨리스는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삶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삶의 중력을 떨쳐 내고 비상할 힘이 소년 앨리스에게는 없다.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추락하지 않고 궤도에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초속 7.9킬로미터의 속도를 낼 수 있어야 만유인력과 관성이 균형을 이루어 지구의 궤도에 오를 수 있다. 7.9km/s 조차 없다면 소년 앨리스의 동생처럼 삶의 궤도를 올라보지도 못하고 추락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나타났다. 뉴턴의 말처럼 모든 떨어지는 것은 그것과 지구 사이의 잡아당기는 힘 때문일까? 서로 당기는 이 힘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뉴턴에 의하면 만유인력은 질량과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은 질량과 거리가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유인력과 특수상대성이론 둘 중 하나는 틀렸다. 젊은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중력과 가속도는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진다는 것은 중력의 잡아당기는 힘 때문이 아니었다. 물체에 의해 공간이 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낙하란 휜 공간을 자연스럽게 진행하는 것이다.

   

「가속도의 힘이 존재하는 공간, 즉 중력이 존재하는 공간은 모든 물체를 휘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질량이 있는 곳에서 공간은 휘어진다. 태양 주변도 마찬가지다. 태양 뒤에서 오는 별빛은 직진하고 있지만 휘어진 공간을 따라 오게 된다. 에딩턴이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별 사진을 찍은 것도 별빛이 휘어졌기 때문이었다.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 아니라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답이었다. p110」

 

다시 뉴턴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사과는 왜 떨어질까? 지구가 만든 휜 공간이 사과를 가장 자연스러운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일식 때 태양 뒤의 별빛을 볼 수 있는 것도, 별이 태양이 만든 휜 공간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는 공간을 휘게 만든다. 당신이 나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당기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만든 휜 공간을 당신이 따라 걷기 때문이다. 질량이 클수록 공간은 더욱 크게 휘어진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질량과 거리는 상대적이다. 나를 더욱 무겁게 느낄수록 당신이 나에게 이르는 길은 더욱 가파르게 기운다.

 

 

 

뉴턴을 과거로 돌려보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세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영원한 독재는 없다. 세계의 저 너머에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양자역학! 양자역학은 곧바로 상대성이론과 함께 세계를 양분했다. 이 두 개의 물리법칙에는 하나의 영감이 작용했다. 그것은 빛이다. 가장 큰 세계와 가장 작은 세계는 하나였다. 오래된 금언이 맞다. 우리 몸 안에 우주가 있다. 그러나 이 우주는 완전하지도 질서 정연히 아름답지도 않다. 양자역학이 추정하는 코스모스는 카오스다.

   

 

 양자역학의 산실 닐스보어연구소다. 보어는 1916년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된 이후, 이 연구소를 양자물리학의 메카로 만들며 코펜하겐학파를 이끌었다.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이것은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벌써 원자는 희랍에서부터 탐구되었다. 세상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알갱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쪼개지지 않을 것 같은 알갱이 속에는 여러 가지 더 작은 알갱이들, 입자들이 있었다.

 

「1920년대엔 가장 작은 물질이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전자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에 이르자 쿼크라는 더 작은 물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쿼크에 여섯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후 전자와 성질이 비슷하면서 질량이 훨씬 큰 입자인 뮤온과 타우, 3종류의 뉴트리노까지, 12종류의 입자들이 발견됐다. 또 힘을 매개하는 입자인 글루온, 포톤, W± 게이지 보존, Z0게이지 보존과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 입자가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은 이 입자들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는 게 현재 물리학의 답변이다.p298」

 

처음 발견된 것은 전자였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J.J. 톰슨이 원자 안에 음극을 나타내는 작은 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원자는 중성이니 원자 안에는 전자에 반대되는 양의 전기를 가지는 무엇이 있어야 했다. 원자핵을 실험으로 증명한 사람은 러더퍼드였다. 러더퍼드는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원자 모델을 만들었지만, 어떻게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가 달라붙지 않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 문제를 풀어낸 사람이 바로 러더퍼드의 제자 닐스 보어이다.

   

보어의 원자모델에서는 가운데에 원자핵이 있고, 전자는 정해진 궤도를 따라 돈다. 내가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배운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보어 자신도 왜 전자가 궤도를 따라서 도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 타자로 나선 것이 닐스보어연구소의 차세대 주자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과감히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렸다. 보어의 전자 궤도를 없애버린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궤도를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슈뢰딩거가 다시 궤도를 들고 나타났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고 일어난 이 논쟁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보어는 슈뢰딩거에 크게 기대를 걸었지만, 슈뢰딩거 역시 전자를 볼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오늘날까지도 양자역학의 핵심에 있지만, 그 자신도 그의 공식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공식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양자역학이었다.

 

도대체 전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전자는 왜 연속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양자도약을 하는 걸까? 왜 원자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걸까? 하이젠베르크는 다시 생각의 방향을 과감히 틀었다. 원자는 단순히 작아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존재의 불가능성이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탄생한다.

   

「위치를 정확히 재려고 하면 전자의 운동량이 불확실해 지고, 전자의 운동량을 보려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즉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잴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코펜하겐학파가 최종적으로 생각한 원자 모델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안개처럼 뿌옇다. 이전 세상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지만, 이제 세상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성으로 가득 찬 모호한 세계가 되고 말았다. p271」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미래는 알 수 없다는 세계관과 인간이 불완전해서 관측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이 격렬히 부딪혔다.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게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률이론에 의하면 전자는 발견되기 전까지 다양한 위치에 공존한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양이 중의 한 마리인 ‘슈뢰딩거의 고양이’ 다.

   

「고양이가 갇힌 상자에는 독가스가 나오는 장치가 있다. 원자핵이 붕괴되어 방사선이 검출되면 망치가 유리병을 깨고, 그러면 유리병에서 독가스가 나온다.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고양이는 과연 죽었을까, 살았을까? 보지 않을 땐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엔 확률적으로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공존할 뿐이다. 슈뢰딩거는 궁금했다. 과연 반은 죽어 있고 반은 살아 있는 고양이가 말이 되는가? 구멍을 열어서 확인해보기 전까지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다면, 고양이는 죽은 걸까, 산걸까? 물론 이 질문은 아직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p266」

 

표현을 정확히 하자면, 확인할 때까지 고양이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확인할 때까지 고양이의 생사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확률적으로 죽음과 삶이 공존한 상태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밤하늘의 달도 보고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인가? 보고 있지 있지 않을 때 달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같이 철학적 세계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세계는 not-all 이며, Whole은 hole 이다. 세계는 완전한데 단지 인간의 능력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세계관은 칸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젝의 헤겔 해석에 따르면, 헤겔은 인식 불가능성을 존재의 불가능성으로 전환했다. 인간이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계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리적인 방법으로 구성해내어 산술적으로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임의의 무모순인 이론에 대해, 참이지만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즉, 산술을 표현할 수 있는 이론은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산술적인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공리로부터 구성된 산술체계에 대하여 이 산술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이 산술체계는 스스로의 무모순성에 대한 진술을 포함할 수 없고 그 역도 성립한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내가 이해하는 대로 말하자면, 이발사의 역설에 대한 답과 같은 것이다. (수학적으로는 엉터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쉽게 이렇게 이해한다.)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면도해 주는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이 이발사는 스스로 면도를 하는 사람의 집합에도 하지 않는 사람의 집합에도 속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은 두 집합 중 하나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집합을 만든 바로 그 이발사 자신만은 어느 집합에도 속할 수가 없다. 즉 '스스로의 무모순성에 대한 진술을 포함할 수 없다.'  체계를 구성한 이발사 자신이 체계의 완전성을 방해하는 구멍, (W)hole이다. 우리는 세계에 갇혀 있지만, 그 세계의 한중심부는 구멍 나 있다. <설국열차>의 심장은 엔진이지만, 그 엔진의 중심은 구멍 뚫려 있다. 그 구멍을 가리고 있는 것은 한 어린 소년의 뼈만 남은 몸뚱이다. 그 소년을 빼내자, 엔진은 정지하고, 세계는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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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지젝 - 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강응섭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지젝을 읽은 지 십년이 되어 간다. 지젝의 이름만 보이면 무조건 읽고, 신간이 나오길 목 빼고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쉽지도 않은 책을 무엇에 홀려서 그리 읽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고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여하튼 지젝은 내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이다. 지젝을 읽다보면 무엇보다 헤겔과 라캉이 궁금하고, 헤겔을 읽으려면 칸트를 거쳐야 하고, 그러려면 데카르트가 필요하고, 뭐 그렇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렇다고 그렇게 읽었다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있다. 라캉에게도 프로이트가 있고, 소쉬르의 언어학, 구조주의 따위가 따라 붙는다. 지젝도 헤겔도 라캉도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쉬운 말을 모르는지, 쉬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상인지, 말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인지, 이해를 위해 쓰는 말인지, 오해를 하라고 꼬아버리는 말인지, 다들 난해하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읽게 된다. 그 난해함에 매혹 당한다. 그 매혹의 중심은 사실 텅 비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글항아리의 『라캉과 지젝』을 사두고 이제 읽었다. 9월말에 샀으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예전 같으면 득달같이 읽었을 것을 한 달이나 묵혀 두었다. 오래된 애인이 이제 시큰둥해 진 걸까? 그것보다는 원래, 여러 명이 쓴 짧은 글들을 묶은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분량 상 깊이가 있을 수도 없고, 이런 저런 주제들로 왔다갔다 산만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젝과 라캉의 난해함을 이렇게 짧은글 속에 제대로 풀어내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니, 그렇게 압축해 낸 글들을 내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학자들이 풀어낸 지젝과 라캉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 소화해내는지가 몹시 궁금하고 또 미리 부러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여덟 편의 글 중 세 편만 읽을 만 했다.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해도 좋은 글을 알아볼 수는 있는 것처럼, 라캉과 지젝을 잘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잘 소화해 쓴 글인지 아닌지는 알 것 같다. 김정한, 이성민, 정혁현의 글은 좋았다. 가장 나쁜 글은 김석의 것이다. 라캉과 지젝에 대한 비교가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지젝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닌데, 비교를 위해 지젝을 자신이 만든 틀 속에 억지로 끼워 넣은 것 같다. 거두절미는 논객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철학자들도 한다.

 

헤겔도 그렇지만 라캉도 해석이 분분하다. 라캉 스스로도 견해를 끊임없이 바꾸었을 뿐 아니라, 어떤 개념에 대해 똑 부러지게 의미를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일쑤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경향이 드러나는데, ‘증상과의 동일시’ 와 ‘환상을 횡단하기’를 놓고 김석과 김정한은 전혀 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이 두 개념은 정신분석의 완료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라캉에게 정신분석은 임상에 좀 더 가깝고 지젝에게는 정치와 깊이 관련된다. 임상이든 정치든 분석은 어느 시점에서 완료되는가? 혹은 성공하는가? 김석은 증상과의 동일시에서, 김정한은 환상의 횡단에서 정신분석의 완결을 보고 있다.

 

「정신분석 윤리의 근본 지향점은 개별 주체가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를 정립하는 것이다. 존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며 기표적 질서에 대해 ‘탈존ex-sistence’하는 ‘무적인 것 ex-nihilo’ 이다. 존재가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 바로 분석적 상황은 물론이고 일상에서 경험하는 증상이다. 증상은 말하는 주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의 조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증상은 주체가 겪는 병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임상 지표가 아니라 바로 실재의 메시지로서의 증상을 의미한다. 실재의 메시지로서의 증상은 해석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향유의 대상이다. 이제 증상을 통해 대타자가 박탈한 향유에 다가설 수 있다.

존재 회복은 최종적으로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완수된다. 지젝은 환상을 가로질러 이데올로기의 중핵에 있는 실재적인 것과 조우하면서 상징적 질서 너머로 향한 것을 강조하지만, 라캉은 욕망에 대한 철저한 충실성을 통해 실재(증상)에 대해 도달할 것을 주장한다. 지젝이 사회적 환상을 가로질러 상징계를 전복하는 혁명을 주장한다면 라캉은 주체가 갖는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기표 S1-S2로 이어지는 기표 연쇄가 결국 존재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상징계의 무능을 넘어서고자 한다. 정신분석의 윤리는 상징계가 거세하려는 존재를 향하며, 존재로의 귀환은 결국 실재에 속하는 증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가능하다. p42~3 김석」

 

김석은 라캉과 지젝을 ‘증상과의 동일시’와 ‘환상을 횡단하기’로 각각 대비한다. 김석이 말하는 증상은 실재적인 것으로 이것과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가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징계란 기표의 세계로, 주체는 상징계에 들어서는 대가로 존재를 상실한다, 즉 거세당한다. 김석은 환상을 횡단하는 것을 또 다른 환상 즉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이에 반해 김정한은 ‘증상과의 동일시’를 상징적인 것, 다시 말해 상징계에 적당하게 적응해 사는 것으로, 기각한다. 정신병 환자에 대한 임상적 치료는 보통 다른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어울려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젝에 따르면, 밀레의 정치적 입장은 그의 라캉 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정신분석 치료와 관련하여, 초기 라캉이 상상적 동일시를 떨쳐 내고 상징적 질서의 한계를 넘어 실재-물의 너머와 영웅적으로 대면하는 윤리를 제시한다면, 후기 라캉은 이런 ‘한계-경험’ 자체를 거부하고 급진주의를 포기하면서 온건한 방식으로 후퇴한다. 라캉에 따르면 “분석을 너무 멀리까지 밀고 나가서는 안 된다. 환자가 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후기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는 주체성의 철저한 변형이 아니라 국소적 미봉책이다. 밀레는 이 후기 라캉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신분석의 끝을 ‘환상 가로지르기’로 개념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와 반대로 분석의 목표를 ‘증상과의 동일시’로 재정식화한다. 주체는 자신의 독특한 향유 방식을 압축하고 있는 증환이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밀레는 ‘환상 가로지르기’와 ‘증상과의 동일시’를 대립시키면서, ‘증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독특한 향유를 유지하는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정치적 맥락에서 함의하는 바는 “냉소적인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인데 왜냐하면 주체의 안정적인 향유를 위해서는 기성 권력의 상블랑이 향유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성 권력이 규정하는 일상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고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적 상블랑들이 가짜 내지 허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듯 즐기라는 것은 냉소적인 윤리다.p54~5 김정한」

 

여기서 김정한은 별 다른 설명 없이 증상과 증환을 섞어 쓰고 있다. (엄밀히 이 두 개념은 다르며, 김정한처럼 증상을 상징계적으로 본다면 증환은 실재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김정한은 아니 그보다는 지젝은 ‘증상과의 동일시’를 라캉이 아니라 그의 사위인 밀레의 탓으로 돌리며, ‘증상과의 동일시’를 존재의 회복으로 본 김석과는 다르게 존재의 타협으로 본다. 김정한에게 ‘환상 가로지르기’는 상징계의 궁극적 변혁인 반면 ‘증상과의 동일시’는 환자의 임시적 치유에 불과하다. 김정한은 밀레가 후기 라캉을 받아들이면서 ‘증상과의 동일시’를 주장한 반면, 지젝은 급진적 라캉을 바탕으로 ‘환상 가로지르기’를 정신분석의 완료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환상과의 과잉동일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환상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는 반드시 피지배자들의 본래적 갈망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피착취/피지배 다수자가 자신의 본래적 갈망들을 인지할 수 있을 일련의 특징들을 통합시켜야 한다. 요컨대 모든 헤게모니적 보편성은 적어도 두 개의 특수한 내용을 통합시켜야 한다. ‘본래적’인 대중적 내용과, 지배와 착취의 관계들에 의한 그것의 ‘왜곡’” 이라고 지적한다. 피지배자가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사실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니다. 그 이데올로기에 피지배자가 원하는 가치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지한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은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지만, 그 속에는 민중의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가치가 내재해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시장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목표로 했지만, 민중이 갈망했던 것은 분배의 평등이었다. 분명히 부르주아지의 ‘자유와 평등’은 가로질러야 할 환상이었지만, 그것은 민중의 무조건적인 평등이라는 환상과의 과잉동일시를 통해서만 전복될 수 있었다. ‘평등? 그래봤자 부르주아지만 배부른 짓이지’ 라는 냉소가 아니라, ‘그래, 우리는 누구나 골고루 나누어 가지는 평등을 원해!’ 라는 것, 평등이라는 환상에 대한 철저한 믿음, 바로 그 과잉동일시가 1830년 이후의 부르주아 체제를 끊임없이 위협에 왔던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이었다.

 

 

여하튼 지젝은 지젝으로, 라캉은 라캉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라캉은 너무 어렵고 사실 라캉의 세미나들은 거의 번역이 되지 않아서 읽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들 혹은 입문서들은 꽤 있는 편이니 그것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글들은 연구논문 형태여서 학자들 사이의 논쟁에는 생산적일지 모르나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너무 지엽적이고 설명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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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9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