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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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철학은 한마디로 칸트 이후의 철학이다. 칸트를 넘어 나아가거나 칸트에 맞서 대결하지만, 어떤 방향이든 그 출발지는 칸트이다.

 

“칸트의 철학은 결과로 볼 때 분명 이원론적이다.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한편에는 현상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유의 세계가 있다. 칸트의 인식론 역시 이원론적이라 불릴 수 있다. 한편에는 재료로 주어진 것, 즉 감각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선험적 직관형식과 범주의 기능을 지닌 자아가 있다. 인식은 재료에 그런 형식이 적용될 때에야 산출된다. p666”

 

칸트는 역사를 자유의 실현에 근접하는 거대한 발전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창조적 자아 -자유- 역사로 이어지는 이런 사상의 계열이 독일 관념론이다. 한편 칸트는 앎, 특히 과학이란 현상의 왕국에서만 가능함을 입증했다. 19세기 철학의 또 다른 조류인 실증주의와 유물론은 이 길을 택했다. 여기서 철학은 과학의 지식을 요약하거나 종합하는 역할로 축소된다.

 

제3의 길도 있다. 칸트의 한 면씩을 계승하는 앞의 두 입장과는 달리 칸트에 정면으로 저항한 철학이다. 이 저항이 겨눈 것은 칸트 체계 혹은 칸트에서 정점을 이룬 계몽주의 전반의 합리주의 정신이다. 이 저항은 비지성적, 비합리적, 감정적 힘들을 그 근거로 한다. 보편적 필연적 법칙에 반발하여 개별자의 가치와 권리를 부각시킨다. 또한 기계적이고 정태적인 우주 해명을 비판하고 생명의 비기계적 역동성을 밝혀내려 한다. 이 유형의 저항은 낭만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세 가지 방향은 종국에는 칸트 사상과 대립관계에 놓인다. 첫 두 방향은 칸트 체계의 한 면씩만 부각시킨 결과 칸트와 끝내 대립하게 되었고, 세 번째 방향은 처음부터 칸트에 적대적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방향이 출현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다시 신칸트주의가 칸트사상의 비판적 재음미를 주장했다.

 

 

 

 

 

제 1장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

 

Ⅰ. 칸트 철학의 계승과 발전 - 신앙철학자들

 

칸트의 전제들을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이에 반대했던 주요 사상가 세 명은 신앙철학자들이다. 그들은 게오르크 하만, 야코비, 헤르더이다. 하만과 야코비는 언어에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만은 철학 전체가 이성보다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야코비는 칸트에게는 이성의 메타비판이라 할 언어비판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헤르더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가르는 칸트의 이분법을 ‘요술’이라 비판했다.

 

Ⅱ. 피히테 1762 ~ 1814

 

피히테에 따르면 논리 정연한 철학 체계는 딱 두 가지다. 철학이 설명해야 하는 것은 경험 즉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다. 감각론이나 유물론은 사물로부터 표상을 도출한다. 반면 관념론은 표상으로부터 사물을 도출한다. 피히테는 “어떤 종류의 철학을 선택하는가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에 좌우된다” 고 했다.

 

피히테는 관념론을 선택한다. 우리가 사물의 존재에서 출발하면 의식이 사물로부터 생성된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지만, 사유로부터 출발하면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철학의 시초에 ‘사유하는 주체’가 있다고 보았다.(이건 데카르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 사유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 사유하는 주체야말로 모든 것의 시원이자 피히테 철학의 출발점이다. 피히테는 칸트의 가정인 사물자체 Ding an Sich를 거부했다. 비아, 타자는 자아가 산출한 것이다.

 

 

Ⅲ. 셸링 1775 ~ 1854

 

셸링의 철학은 동일철학이다. 칸트의 물자체를 거부한 피히테는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자아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셸링은 피히테를 뒤바꾼다. 자연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이 자연의 산물이다. 자아가 가능한 것은 오직 자연이 근원적 정신이기 때문이고, 자연과 정신, 실재와 관념이 근원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Ⅳ. 헤겔 1770~ 1831

 

헤겔철학의 난해함은 대부분의 철학자들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헤겔철학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그를 빼고 근대철학을 말하기 힘들다. 헤겔 입문서로 가장 뛰어난 책은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이지 싶다.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눈이 반짝 뜨일 정도로 재미있고 이해가 쉬웠다. 바이저에 의하면 난해함 덕분인지 헤겔철학에 대한 오해가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반-합’을 변증법의 핵심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헤겔 자신은 정립-반정립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세계 철학사』에는 헤겔의 정립과 반정립을 ‘지양’ 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양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제거한다, 보존한다, 들어 올린다. 지양은, 선행하는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으로 대립하지 않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섬을 의미한다.

 

19세기 독일관념론은 피히테, 셸링, 헤겔로 대표된다. 피히테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 셸링 철학은 객관적 관념론, 헤겔 철학은 절대적 관념론이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주관정신과 객관정신보다 위에 있다. 헤겔에 따르면 세계 전체의 발전 과정은 ‘정신의 자기 전개’다.

 

“역사 속에서 행위해 나가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이 개인을 자신의 행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계정신이다. 어떤 인물들을 위대한 역사적 위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인격적 특성이나 정력, 열정, 선견지명 혹은 지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정신은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흔히 자격도 없고 미흡하기만 한 개인들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한 개인들에서는 역사적 필연성, 다시 말해 ‘시대정신’이 자신을 구현시켜 나가는 것이다. p708”

 

헤겔의 ‘이성의 간계(지)’ 가 여기서 나온다. 영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이 영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특정한 시점에서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하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객관정신의 자기전개이므로 특정 시점까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은 그 특정 시점에서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성적인 것’, 다시 말해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709” 그냥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다’ 의 뜻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이성은 개인의 이성이 아니라 세계사적 이성이다.

 

헤겔은 말년에 프로이센의 국가철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대 프로이센을 세계사적 이성에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혜의 구현이라 선언하고 자신의 철학 체계는 모든 철학의 완성이라고 천명했다. 헤겔의 견해에 의하면 일종의 역사적 종결상태가 도래한 것이다. 여기서 사유의 과제란 이미 일어난 사건을 조망하고 이를 순수한 의식으로 고양시키는 것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야 날기 시작한다.” 가 나온 배경이다.

 

그러나 역사적 종결상태란 헤겔의 변증법적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역사에서 변증법이란 보수적 원리가 아니라 혁명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헤겔학파는 변증법에 따라 좌우로 분열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활용해 역사상 유례없는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제 2장 실증주의, 유물론, 마르크스주의

 

Ⅰ. 프랑스 실증주의 : 콩트 1798 ~ 1857

 

19세기 전반 프랑스는 대혁명의 성과를 쟁취하려는 계급들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왕정복고 세력과 제 3계급인 부르주아, 제4계급인 민중 사이의 치열한 투쟁 끝에 1848년을 기점으로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혁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다.

 

철학 사상도 세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좌파의 요구는 이른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생 시몽, 푸리에, 프루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가 배출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생시몽 백작의 제자였던 콩트이다.

 

‘실증주의positivismus’라는 명칭은 콩트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실증주의는 주어진 것, 사실적인 것 즉 실증적인 것에서 출발하고 이를 넘어서는 모든 논의와 물음을 무용한 것으로 거부한다. 실증적인 것은 ‘현상’이다. 실증주의는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을 현상의 영역으로 제한한다.

 

콩트는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개인이 아니라 종속의 사회적 생활에서 나타나는 사태를 다루는 것이 사회학의 과제이다. 콩트는 사회학을 학문체계의 최고로 보았다. 콩트의 영향은 사회학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철학의 경우에는 특히 영국 사상에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Ⅱ. 영국 실증주의

 

로크의 경험론, 흄의 회의론,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영국 민족 특유의 거부감, 영국인의 냉정한 현실감각 등은 콩트의 철학이 고국 프랑스 보다 영국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정신적 토양이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와는 달리 극단적 대립 없이 발전해 갔다. 혁명 보다는 개인의 자유라는 오랜 자유주의적 원리와 사회진보의 이념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영국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제레미 벤담과 콩트의 사상 및 영국 경험론의 전통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게서 하나로 합쳐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은 허버트 스펜서(1820~1903) 등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Ⅲ. 독일 : 헤겔학파의 붕괴와 유물론의 대두

 

독일은 늦게야 시민계급이 형성되었고 1848년 혁명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사회갈등도 그만큼 뒤늦게야 표면화되었다. 슈트라우스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저작은 독일에서 일대 논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저작은 이미 백 년 전 볼테르 시대의 시민적-계몽주의적 정신이 뒤늦게 표현된 것이다. 종교와 싸우는 과정에서 철학적 비판이 훨씬 예리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신이 우리와 동일한 존재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서로 동등하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신 앞에서 정의로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이 어떻게 인간 앞에서 정의로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먹는 빵이 주님의 육신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신을 위해 빵을 얻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신의 것은 신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는 일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주는 일이 중요한 문제이다.p748”

 

 

Ⅳ. 마르크스 : 1818 ~ 1883

 

마르크스의 철학사상은 헤겔의 철학 체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헤겔의 체계가 포이어바흐의 철학, 프랑스의 혁명 이론 특히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론, 그리고 영국 고전경제학의 지식과 통합되었다. 유럽 사상의 3대 조류가 마르크스에게 흡수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혁명의 원리를 발견한다. 변증법의 핵심은 이 세계가 완성된 사물의 복합체가 아니라 과정의 복합체라는 사상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생성과 소멸의 부단한 과정뿐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헤겔과는 달리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에 결부시켰다.

 

변증법 이외에도 마르크스에게 헤겔의 유산은 적지 않다. 마르크스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전체 세계사란 통일적 법칙에 따라 궁극목표를 향해가는 진행과정이라 보았다. 이 과정에서 생성되는 모든 현실적 존재는 전체 과정의 필연적인 통과 단계를 뜻하며, 이런 점에서 이 존재들이 이성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도 두 사상가의 일치된 견해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 이면에는 이념과 현실, 이성과 현실의 완전하고 실제적인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는 (헤겔적) 관념적인 신념이 숨어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삶에서 경제적 토대가 갖는 의미,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의 계급투쟁, 이 요인들이 문화적 정신적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완전하게 인식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식에 사로잡혀 이를 세계 해명의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았다.

 

 

 

제 3장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니체

 

Ⅰ.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1788 ~ 1860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1850년경, 그의 노후에 와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독일과 유럽 각지에서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환멸감에 사로잡힌 지식인층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염세주의의 물결이 유럽 문학계를 휩쓸었다. 헤겔학파가 지배하던 시대의 종말이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전모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계란 의지와 표상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로 시작한다. 이 명제는 칸트의 것과 다르지 않다. 칸트의 업적은 현상을 사물 자체와 구별한 점에 있다. 그러나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결정적 분기점이 사물 자체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에게 사물 자체는 의지이다. 의지의 작용과 신체의 움직임은 어떤 원인에 의해 연결된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다. 이 둘은 동일하다. 신체적 활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활동 즉 의지가 직관에 나타나는 활동일 뿐이다. 신체란 공간과 시간에서 객관화된 의지다.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다. 오직 의지만이 불변의 것이다. 의지는 우리의 모든 표상의 근저에 놓여있다.

 

의지는 자유로운가? 전체로서의 세계의지는 자유롭다. 세계의지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지 자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체들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상위의 전체 의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일 관념론을 끊임없이 비방했다. 관념론자들에게 궁극적 절대자는 정신, 즉 목표를 향해 자신을 전개해 나가는 이성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절대자는 맹목적 의지 즉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세계근거다.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이, 정신이 아니라 의지가 궁극의 절대자이다. 이성은 비이성적 의지의 도구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의 업적 중 하나는 인간 의식의 이면에 대한 안목을 철학에 제공한 것이다. 서양학문에서 무의식의 철학과 심리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한 사람이 쇼펜하우어다.

 

. 쇠렌 키르케고르 : 1813 ~ 1855

 

키르케고르는 시인이자 사상가다. 사상가로서의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본질적인 생각을 말하려 할 때 동시에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보편적인 것, 모든 추상적인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은 거대한 보편적 물음을 다룬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은 보편적 원리에서 저절로 도출된다.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삶의 문제란 언제나 실천적인 개별문제의 유형이라고 보았다. ‘특정한 인간인 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가 참된 문제다. 이것은 실존적 문제다. “객관적 사유는 주체와 그 실존에 무관심하지만, 실존적 존재로서의 주관적 사상가는 자신의 사유에 관심을 가지며 그 사유에서 실존한다.”, “실존과 본질적 관계를 맺는 인식만이 본질적 인식이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해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객관적 지주를 빼앗아 버리며, 모든 개인을 각자의 실존이 지닌 불확실하고 모호한 심연으로 되던져 버린다.

 

20세기 철학에서 실존철학이나 기초존재론과 관련된 모든 사상은 키르케고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미 ‘실존철학’ 이라는 명칭이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사상’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키르케고르의 고독, 내던져 있음, 부조리, 인간존재의 기본 사실로서의 불안 등은 마르셀에서 까뮈에 이르는 일련의 사상가들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이런 사상적 모티프들은 현대 예술과 서정시, 희곡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이런 모티프들이 더욱 발전하면, 본질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지닌 키르케고르의 실존이 무신론자인 샤르트르와도 연결될 수 있다. 키르케고르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와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844 ~ 1900

 

니체의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철학이다. 니체에게 세계의 본질은 의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는 일체의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한 이 말은 그의 사상의 요체다. 영원한 이념, 사물 자체, 피안 등은 모두 망상이나 환영,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세계를 일정한 크기를 가진 힘의 덩어리로 간주한다. 그 안의 존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시간은 무한하다. 따라서 사물들은 언젠가 이미 나타났던 것일 수밖에 없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만물이 영원히 회귀한다는 사상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긍정의 형식이다.

 

니체는 냉철한 비판적 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믿음을 선언하고 제시할 뿐이었다. 현대 사상가 중 누구보다 니체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마르틴 하이데거다.

 

 

 

제 4장 신칸트주의

 

“거의 60년간 조용하고 고독한 인생을 살아온 쾨니히스베르크 출생의 이 위대한 인간, 이 스코틀랜드인의 후예는 1781년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아 세상을 ‘독단의 잠’에서 깨웠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비판철학’은 그 지배적 권좌를 변함없이 유지해 왔다. (.....)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낭만주의의 물결을 타고 잠시 성행했으며 (.....) 1859년 이후에는 진화론이 대두하여 이전의 모든 것을 일소해 버렸다. 그리고 19세기 말에는 니체의 통쾌한 우상파괴의 철학이 무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표면의 부차적 흐름이었을 뿐, 그 저변에서는 칸트주의의 억세고 부단한 조류가 깊게 흐르고 있었다. p824”

 

칸트사상의 재성찰 움직임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칸트 르네상스가 시작되었고 무수한 칸트 관련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신칸트주의는 곧 여러 학파로 갈라졌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칸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칸트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신칸트주의자들이 무엇보다 비판한 것은 칸트의 사물자체였다. 사물자체를 칸트이후 나타난 모든 오류와 오해의 근원이라 보았다. 칸트의 주요 관심사는 인식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윤리적 문제였다. 그런데 많은 신칸트주의자들은 인식론적 문제에 주안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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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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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이름은 들어 보았다. 아니 어쩌면 짧은 글 한편 정도는 읽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상 문학상> 류의 책 표지에서 몇 번 눈에 뜨였으니까. 내가 <세계 테마 기행>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 저 사람이 그 은희경이구나 했던 것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단 뜻이다. 그리고 실망했다. 쉰은 되었을 듯한데, 공주 같은 몸짓에 애기 같은 목소리의 나레이션, 소화가 힘겨웠다.

 

두 번째 인상은 어쩌면 더 나빴다. 어떤 카페의 과제물로, ‘은희경의 <생각의 일요일>을 읽고 논하시오’ 가 나왔다. 論할 것이 없었다. 그 책은 은희경 최초의 산문집이라는 광고문을 달고, 순식간에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만, 산문집이 흔히 그렇듯 신변잡기일 뿐이었다. 게다가 첫 장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블라인드를 걷고, 날씨를 살피고, 커피콩을 갈고 ...” 따위의 문장으로 시작했다. 시애틀, 커피콩, 독일, 맥주, 사인회, 원주와 박경리, ‘반짝이는 문장들을 탁구공처럼 주고받는’ 문인 친구들과의 새벽 트윗질, 그리움, 쓸쓸함, 사랑의 기억... 고급스러운 잡지를 보는 듯 했다. 나는 論하지 못하고, 논하지 못하는 이유만 논했다. 아니 화보 같은 삶을 질시하며, 유명한 문인에 대해 마땅히 취하길 기대하는 경의를 거부했다.

 

세 번째 인상이 좋을 수가 있을까. 어제 다음 주 독서회를 위해 <새의 선물>을 읽었다. 내 눈이 찾아내려 했던 것은 내가 가졌던 인상들을 확신시켜 주는 증거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 증거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고, 그것들이 열두 살에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만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열두 살 진희를 은희경으로 읽고 있었다.

 

그녀는 오만하게도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75)” 오만은 공주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천성이다. “단물만 빼먹고 종구를 차버릴 거라는 짐작으로만 보면 장군이 엄마와 나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한쪽은 악의에서 나온 험담이고 다른 한쪽은 인생에 대한 냉소로부터 비롯된 통찰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236)” 당돌함과 어이없는 자신감에 혀를 차면서도 나는 소리 없이 탄성을 질렀다. 내 느낌이 딱 맞았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야말로 근대적 계몽인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모든 인간을 통찰하는 그녀의 눈빛은 말 그대로 light, 그 눈이 비추는, enlighten, 대상은 그 속을 투명이 드러내는 타자들이었다.

 

18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불린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으로 표현되는 이성의 시대기도 하다. 계몽의 시대를 준비한 것은 과학혁명의 시대인 17세기의 데카르트이다. 그 유명한 사유와 연장의 이분법은 또한 악명으로도 이름 높다. res cogitans 와 res extensa. 데카르트는 자연은 물론 동물, 심지어는 주체의 신체까지도 연장, res extensa, 으로 대상화했다.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나 기계 단추를 누르면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기계나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에게 능동적 주체란 오로지 res cogitans, 사유하는 존재(혹은 사유하는 것, 사유) 뿐이었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나와 다른 대상을 타자화 하여 착취하고 절멸시킨, 탐욕스럽고 잔인했던 서구 근대 역사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12”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중간 중간 무시로 강조되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의 이분법은 데카르트의 연장과 사유를 연상시킨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바라보는 나’ 이다. 그녀의 ‘바라봄’은 자신뿐만 아니라 바라보이는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뚫는다.

 

“최선생님은 내 어깨를 한번 꼭 싸안는다. 술 냄새가 확 끼친다. 술 냄새 속에는 어른으로서 비겁했던 자괴감의 찌꺼기도 있다. 그러나 내일 아침술이 깨고 변소에 한번 다녀오면 찌꺼기는 다 청소된다. p219 ”

 

12살 그녀는 그보다 몇 배나 오래 산 선생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도 확정한다. 알량한 예술적 자부심마저 버리고 금력에 굴복해야 했고, 어린 제자의 성깔 혹은 기지로 일말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었던 한 인간의 복잡다단함을 술 냄새 하나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최 선생님은 그 외의 어떤 인간도 될 수 없다. 되어서는 안 된다.

 

20세기 중후반의 철학은, 특히 프랑스 철학은 타자의 문제에 봉착했다. 타자는 계몽의 불빛에도 여전히 불투명함으로 남았다.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하는 포스트 모더니즘도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라는 또 다른 주체를 문제 삼고 있다. 샤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야” 라고 탄식했다.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 이며,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는 힘’ 이다. 타자는 지옥이지만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 이다. 나의 시선이 타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이 나를 규정한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이 소유는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샤르트르는 말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투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속이 훤하게 보이는 사람, 무엇을 할지가 뻔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을까?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 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 할 수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p250”

 

그녀가 사랑을 냉소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번의 배신으로 그녀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었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 냉소와 배신과 적당한 거리두기다. 그런데 집착하지 않는 사랑이 사랑일까? 사랑은 동시에 불안이다. 모든 것을 알고 함께하고 싶지만, 집착하면 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오해가 없었다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사랑은 대상이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가지고 있다고 내가 착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콩깍지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사랑을 냉소하는 그녀는 삶을 냉소할 수밖에 없다. 20세기의 계몽인인 (이 책은 1995년 작이다) 그녀는 냉소주의자이다. 계몽은 양차대전을 통해 파산했다. 책으로 혹은 식민지로 근대를 배운 우리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배회한다. 냉소는 후근대인의 이데올로기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405

 

지난 주에는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에 대해 토론했다. 삶의 끝에선 노인의 지혜는 열두 살 그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쿤데라의 또 다른 소설 제목도 아마 농담일 것이다. 농담 같은 삶을 살아내는 그녀의 방식과 노인이 만든 등장인물들의 방식은 물론 다르다. 그녀의 열두 살을 지켜보며 나는 내내 ‘잔망스럽다’ 는 단어에 시달렸다. 노인의 꼭두각시들은 유쾌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삶은 무의미한 농담이다.

 

 

삶은 정말로 무의미한 농담일까? 가라앉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크레인 꼭대기의 고공농성 노동자를 바라보며, 농담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삶을 그저 농담으로 냉소하고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은 거리의 투사로 내몰리고, 열정에 불타는 고등학생은 강연장에 불붙은 도시락을 던지고, 십상시와 7인회가 국가를 뒤흔들고, 마카다미아넛이 비행기를 되돌리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자살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농담일 뿐이니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갈까, 혀를 차고 잊어버릴까, 나의 소소하고 안락한 일상의 기쁨을 찾아서! 세계에 대한 냉소는 부조리한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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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왔다. 밀양 얼음골 사과, 15kg.

택배 아저씨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커다란 박스가 인터폰 화면에 비쳤다. 분명 15kg다.

 

11월, 막 부사가 나오기 시작하는 철에 지인이 사과 몇 개를 가지고 왔다.  밀양에 놀러간 언니가 농장에서 사 보냈다고 했다. 저녁에 사과를 먹어본 남편이 감탄했다. 자기가 먹어본 사과 중 제일 맛있다고. 남편은 쓸데없이 미각이 발달해서, 유난히 손맛이 없는 나를 고민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정작 자신도 매우 힘겨워 한다. 미묘한 맛들이 너무 잘 느껴지니, 어지간한 음식에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어떤 음식이든 맛있다며 먹는 사람들을 차라리 부러워한다. 슬프게도, 미각은 사슴의 모가지처럼 고고하지만, 현실의 식탁은 싱겁고 짠 간조차 들쭉날쭉이다. 그런 남편이 신선한 산미가 살아있는 맛있는 사과라 극찬했으니, 밀양 얼음골 사과가 맛있기는 맛있는 모양이다. 내 혀는 미련밤퉁이라 대충 맛있는 혹은 대충 맛없는 것들만 구분한다.

 

지역 온라인 몰을 통해 지인이 알려준 농장의 사과를 주문해 먹었다. 그런데 두 번째 주문에 문제가 생겼다. 10kg 36과를 시켰는데, 44과가 온 것이다. 사과는 같은 중량이면 갯수가 많을 수록 싸다.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44과는 딱 보기에도 너무 작을뿐 아니라, 도저히 부사꼴로 봐줄 수 없는 설익은 사과도 섞여 있었다. 온라인 몰에는 아예 44과는 상품으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가장 작은 것이 40과이다. 전화를 했더니 생산자인 그 농장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한창 막바지 수확이 바빴을 때인 그 때, 농장 주인 아주머니는 과수원이라 했다. 사과를 하며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는 아주머니의 목소리 뒤로 아저씨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그냥 들어도 싸움처럼 들리는 그 사투리에 나무람이 가세하니 아주머니를 향한 고함이 나에게 날아오는 듯 했다.

 

사실 나는 화가 났다. 지난번 택배는 경비실 문 밖에 놓여 있었다. 내가 전화를 못받았기 때문이지만, 10kg 박스를 들 수 없는 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허리가 약할 뿐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태가 나빠져 무거운 것은 일체 들지 못하고 있다. 남편이 돌아올 늦은밤까지 경비실 문 밖에, 안도 아니라 밖에 먹을 것을 놔두기에는 아무래도 찝찝해서 나는 결국 이웃집에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택배 특히 무거운 택배는 잘 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섬세해서 슬픈 남편의 미각을 위해서 한껏 신경이 쓰이는 택배 주문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농장주인 아주머니는 처음에, 다시 보내줄테니 잘못 보낸 사과는 되돌려 보내라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아픈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하며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은 사과를 이미 냉장고에 채운 후였다. 그러면서 갯수를 정확히 헤아려 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다시 다 꺼내 또 박스에 담아서 다시 택배로 보내고, 택배 기사가 올 시간에 맞추어 집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니, 그러고 다시 택배가 오면 또 사과를 나누어 냉장고에 넣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니, 그 힘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또 하라니,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잔소리를 했다. 문제 해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다만 내가 이렇게 화가 났다는 것만을 일방적으로 알릴 뿐인 소위 '고객불만' 을 말이다. 나의 불평을 난처하게 듣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라고 아주머니가 묻는 그 순간에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내 귀를 쳤고,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두 제품의 가격 차액을 돌려받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일이 끝난 저녁 7시경에 송금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서야 과수원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번에 주문할 때는 5kg를 더 보내주겠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내가 다시 주문할 것을 기대하는 아주머니가 약간 우습기도 하고, 속으로 살짝 기대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나의 외갓집도 과수원을 했다. 어릴 때는 떨어진 사과나 조금 썩은 사과를 많이 먹었다. 외할머니가 커다란 양철 바케쓰에 주워 담은 사과를 머리에 이고 버스를 갈아 타가면서 가져다 주신 것들이다. 그 강골의 외할머니는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보다 더 억척이시던 분은 외숙모였다. 밀양 얼음골 보다 조금 더 윗쪽인 외갓집 과수원에도 딱 얼음골 사과농장의 주인 같던 외삼촌이 계셨다. 두분도 하루종일 과수원에서, 논에서, 들에서 일을 하셨다. 한번도 살가운 말, 부드러운 눈길을 받아보지 못하셨을 외숙모도 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여름방학에 놀러가면, 사시사철 갈라터진 손으로 콩이며 옥수수이며를 삶아 주신던 외숙모였다. 비오는날 대청마루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뜨거운 옥수수 김이며, 흙마당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그림처럼 생각날 때가 있다. 겨울방학이면 광에서 꺼내오시던 국광이라 불리던 사과도 있었다.

 

무어라해도, 허리가 아프다해도, 내 손은 하얗고 말랑하다. 내가 무엇이 힘들까.... 너무 작아 맛이 날까 싶던 사과도 다행히 얼음골 사과의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과는 너무 크지 않은 것이 더 단단하고 맛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조직이 더 치밀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채 자라지 않은 것인지 맛이 아예 이상한 것 두어개를 골라 버린 것 외에는 불만 없이 먹었다. 

 

그런데 얼음골 사과는 사실 비싸다. 집앞 과일 가게의 부사보다 심하게는 두배 혹은 한배 반 정도는 비싸다. 그래서 가게에서 몇 개를 사왔더니, 남편이 이 사과는 흔히 먹는 그런 부사고 얼음골 사과와는 완전히 다르단다. 그래서 또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온라인몰에는 여러 농장들이 들어와 있어, 다른 농장에서 시킬 수도 있지만, 그냥 그 농장의 사과를 주문하고 전화를 했다.

 

아주머니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살짝 서운(?)했지만, 얘기를 하고 이번에는 잘 확인하고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자기가 무슨 약속을 했냐고 물었다. 나는 15kg를 보내 준다고 하셨지만, 그냥 좋은 놈으로만 보내주시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15kg이 왔다.  나는 5kg의 약속을 기대하고 전화를 했던 걸까? 어쩌면.... 혹은 그냥 외숙모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의 claim에 당한 것도 아주머니이고, 그것 때문에 또 아저씨한테 한 소리 들었을 아주머니... 그러고도 다시 주문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던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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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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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계몽주의 철학과 이마누엘 칸트의 저작

 

제 2장 이마누엘 칸트

 

Ⅰ. 생애, 인품, 저작 1724 ~ 1804

 

1781년에 출간된 칸트의 첫 번째 주저 『순수이성비판』은 유럽 계몽주의 운동을 완성시킨 동시에 좀 더 높은 단계에서 극복한 저작이다.

 

Ⅱ. 비판철학 이전 시기

 

칸트가 대학을 다니고 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던 시기에 독일의 지배적 철학 체계는 라이프니츠- 볼프 사상이었다. 이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독단적 방법의 합리론이다. 합리론이란 내 이성이 세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곧 진리라고 보는 이성철학이다. 이때 이성은 타고나는 것 (본유적)으로, 경험의 도움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독단적 합리론자들은 실제로 이성이 경험과 무관하고 경험을 초월하는 인식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지에 관해서 먼저 비판적 검토를 해보지 않았다.

 

칸트 역시 독단적 합리론에서 출발했지만,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경험론의 선구자 로크는 지성에는 감성에 의해 미리 주어지지 않은 것이란 전혀 없다고 했으며, 흄은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경험만이 우리 인식의 원천이고 한계이기 때문에, 초감성적인 것에 관한 학문인 형이상학은 불가능하다.

 

한편에서는 합리론을,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론을 주장한다. 칸트는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을 내리려면 먼저 참다운 비판적 방법을 동원하여 ‘전체 인간의 사유기관이 지닌 구조’를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년 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57세에 마침내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다.

 

Ⅲ. 순수이성비판

 

여기서 이 책이 요약하는 『순수이성비판』의 개념을 다시 축약․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이해될 내용이면 『순수이성비판』이 어렵다는 소문도 없을 것이다. 8~9년 전인가,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읽었다. 지인의 지인이 쓴 책이고 비교적 쉽다고 해서, 호기심을 갖고 읽었는데 그때도 어려웠다. 12가지 범주에 관한 설명을 보며 생각했던 것은, 철학자란 이렇게도 꼼꼼한 인간인가 싶었다. 예전말로 밑 닦은 휴지까지 모을 놈 같았다. 칸트야 워낙 그 방면으로 유명하긴 하다.

 

순수이성비판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궁금했던 것은 순수이성과 비판의 관계였다. 순수이성이 비판을 하는 것인지, 순수이성을 비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칸트라면 계몽주의의 정점이고, 계몽이란 놈은 이성을 신처럼 떠받드는데,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흄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가 이성이 누리는 신적 지위가 과연 합당한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성 자신을 법정에 세운 것이 칸트 비판체계의 출발이다. 칸트에게 ‘비판’은 면밀한 검사나, 검증 한계 규정의 의미를 갖는다.

 

『순수이성비판』의 중심물음은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다. 세분하면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특수학문이다. 여기서 순수이성이란, 어떤 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는 원리를 자체 안에 지니고 있는 이성을 말한다. 이 책에 비판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이 책의 의도가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의 원천 및 한계를 비판적으로 판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순수이성의 모든 원리는 초월적transzendental이다. 초월적이란 개념은 경험의 피안이나 경험을 넘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 앞서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란 의미를 갖는다. 칸트에 의하면,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을 다루는 모든 인식은 초월적이다.

 

칸트는 물 자체 Ding an sich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은 언제나 감관이 내게 전달해 주는 형식으로만 내게 ‘현상’ 한다. 현상 배후에 있는 것, 즉 물 자체 (칸트는 예지체 noumenon라고도 부른다)에 관해서 나는 알 수 없고, 그 한계를 절대로 뛰어 넘을 수 없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물 자체의 존재를 인정했다. 헤겔 혹은 지젝에 의해 해석된 헤겔은 이 물 자체를 현상 안으로 들여왔다. 물 자체는 현상 너머가 아니라, 현상으로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칸트와는 달리 현상 너머의 그 무엇,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실재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지젝에게는 현상이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다. 실재를 현상으로서의 현상 혹은 현상의 틈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지젝은 칸트와 헤겔의 차이는, 어쩌면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라고 한다. 칸트가 불가능한 것으로 세계 밖에 밀쳐놓은 것을 세계 안의 틈, 부정성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가 하나의 물物에 대해 사과를 사과라고 어떻게 동일하게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물 자체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 물의 ‘현상’에 대해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식은 선험적 형식으로서의 공간과 시간, 열두 범주들이 초월적 판단력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의 인식능력 덕분에 우리 모두는 사과를 배가 아니라, 사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인식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우리 인식을 따른다! 칸트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들에 따라야 한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아래서는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선험적으로, 개념들에 의거해 이루려는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한 번쯤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해 보고 그렇게 하면 형이상학의 과제를 더 잘 다룰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도 시도해 봄직한 일이다. 그러한 가정은 (...)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더 훌륭하게 합치한다. 이런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 사상과 마찬가지 의의를 갖는다. 코페르니쿠스는 전체 별무리가 관찰자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가정에서는 천체운동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자 관찰자를 회전시키고 별들을 정지시키면 더 나은 설명이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p618"

 

코페르니쿠스는 옛날부터 참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프로이트뿐 아니라 칸트까지도 코페르니쿠스에 자신을 비유하다니!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물이 실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지구가 도는데도 여전히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일상은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칸트가 말하는 세계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나 한번 고민해 보고 말 일이다. 가끔 적외선 카메라 따위가 세상을 비춰줄 때, 이 세상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내가 아는 세상은 나의 인식이 보여주는 세상이다. 어떤 다른 감관과 다른 지성을 갖춘 생물체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이 있긴 있는 것 아닌가? 무언가가 없다면, 감각을 촉발 하는그 무엇이 없어도 세상이 현상할 수 있는 걸까? 진짜 매트릭스처럼?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데에는 몇 단계의 도구가 필요하다. 감성, 지성, 이성이 그것이다. 감성은 외부의 그 무엇으로부터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능력이다. 개별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 표상을 직관이라고 하는데, 오직 감성만이 직관을 제공한다. 지성은 열 두 범주를 사용하여 직관의 재료들을 개념으로 정리한다. 이성은 다양한 개념과 판단을 다시 결합하여 좀 더 높은 차원의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이성은 이런 통일화 활동에서 자기통제에 실패할 때가 있다. 다양을 단지 상대적으로 더 높이 통일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한 통일성을 산출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이성은 하나의 무조건자를 추구한다. 이 욕구를 이끄는 것은 ‘지도적인 이성개념들’ 즉 이념이다. 완벽한 통일성을 추구하다보면 필연적이게도 최초의 원인인 신의 이념에 다다르게 된다. 신에 대한 이념은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인식은 불가능하다. 순수이성의 감관으로 직관할 수 없다. 신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도 없고 반증될 수도 없다. 칸트는 우리의 (이론) 이성의 한계에 대해 질문한다.

 

“그 한계는 가능한 경험 지식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과 일치한다.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에 관해 이성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성은 신, 자유, 불멸성과 같은 일반적인 형이상학적 이념들 -이것들이야말로 칸트에게는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을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성은 그런 이념들을 반증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한에서 그것들을 믿을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p622”

 

Ⅳ. 윤리와 종교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정언명령일 것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준칙이 뭔지 모르면서도 대충 때려잡아 멋진 말로 기억한다. 원래 언어란 그렇게 문맥 속에서 감으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깐깐하기로 소문난 철학자들에게는 정확한 개념 정의는 탐구의 출발점이다. 일상어와는 다르게 쓰여,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개념들도 꽤 있다. 칸트는 ‘개별적 인간의 행위에만 타당한 원칙’ 을 준칙이라 부른다. 그래서 보통은 내가 하는 행위를 그대로 내가 당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행위만 하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정언명령이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명제를 말한다. 이론이성의 명령은 강제적 성격인 반면, 실천이성은 요구적 성격이이다. ‘마땅히 어떠어떠하게 행동해야 한다’ 고 하지만, 요구하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령과 같다. 명령은 따를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도 있다. 물론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보편적이고 조건 없이 타당한 것은 어떤 특수한 객체에 근거할 수 없다. 보편적 실천 법칙은 객체 즉 질료가 아니라 형식에 의해서만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칸트가 발견한 원칙은 순전히 형식적이고 모든 경험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정언명령이 그렇게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긴다면, 보편타당 할 수 없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에로스도 ‘언제 어디서나 옳고 좋은 것’ 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옳은 것은 반대편 사람에게는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오늘 좋은 것이 내일은 싫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언명령이 임의의 모든 내용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형식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 sollen이다. 그런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가? 정언명령은 우리가 그것을 준수할 가능성이 있을 때, 다시 말해 우리에게 그것을 따를 자유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칸트는 여기서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실천의 가능성, 실천의 자유는 이론이성으로는 결코 입증할 수 없다. 다만 실천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강제한다. 인간은 윤리적 행위를 할 때 현상으로서의 사물 세계를 벗어나 초감성적인 세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인간은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 의지의 자유를 획득한다. 자유는 우리에게 윤리법칙에 대한 의무를 강제한다.

 

인간은 두 세계의 시민이다. 현상의 영역에서 인간의 존재와 행위를 이루는 모든 것은 거대한 필연적 연관 속의 자그마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영역, 즉 초감성적인 자유의 영역에서 속해 있다.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늘 새롭고 더욱 큰 경탄과 외경의 마음을 갖게 하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위의 별빛 찬란한 하늘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 (.....) 처음 것, 즉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군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은 사라져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고 나면 자신을 이루었던 질료를 행성에 돌려줄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예지적 존재자로서의 내 가치를 내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드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 법칙이 내게 현시하는 것은 동물성은 물론 전체 감성 세계와 무관한 삶이다. p630~1”

 

 

Ⅴ. 판단력 비판

 

판단력이란 특수를 보편 아래 포함된 것으로 사유하는 능력이다. 판단력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자연의 왕국과 자유의 왕국을 이어주는 연결 매체다. 판단력은 한편으로 지성이 궁극목적을 염두에 둔 체계적 자연고찰을 수행하도록 도와주며, 다른 한편으로 실천이성으로 하여금 목적의 관점에서 현상을 고찰하게 하여 세계의 윤리적․ 이성적 궁극 목적에 대한 윤리적․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한다.

 

세 비판서 모두에서 칸트는 보편성과 필연성, 즉 합법칙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 법칙은 우리에게서 연원한다. 우리가 세계에 법칙을 이식한다. 그러므로 법칙들을 발견하려면, 세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탐색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우리 인식 능력의 선험적 형식에서 유래한다. 행위에서 합법칙성은 우리 욕구 능력의 선험적 원리에서 유래한다. 세상만물을 목적의 관점에서 판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 반성적 판단력의 선험적 원리에서 유래한다.

 

 

Ⅵ. 비판철학 이후의 저작

Ⅶ. 칸트에 대한 비판과 평가

 

는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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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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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부 계몽주의 철학과 이마누엘 칸트의 저작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린다. (혹자는 산업혁명의 시대라고도 한다.) 계몽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정의는 바이저의 『헤겔』에서 본,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다. 바이저는 “계몽은 이성의 시대였는데, 왜냐하면 계몽은 이성을 모든 지적 물음들에서 최고의 권위, 최종적인 상고 법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중심적이고 특징적인 원리는 우리가 이성의 주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p45” 고 했다.

 

5부를 이루는 두 개의 장은 계몽주의 시대와 이마누엘 칸트다. 저자가 칸트주의자인지 모르겠지만, 계몽의 완성자인 칸트를 따로 떼어내 80쪽 정도를 할애했다. 오늘은 1장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대표 철학자들에 대해서 정리하려 한다. 아직 칸트는 읽지 않았다. 한꺼번에 하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아질 것 같아 먼저 요약한다.

  

 

 

제 1장 계몽주의 시대

 

Ⅰ. 영국

 

1. 영국 경험론의 선구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묶어 외우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용을 모르면서도 경험주의 철학은 왠지 따분할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영국인들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이 더 그런 인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냉철하고 엄격하고 완고한.

 

1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최초로 일정한 정치적 자유를 쟁취했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1688년에 일어났으니, 프랑스 혁명보다 100년 먼저 근대적 자유를 획득했다. 이 시기를 통해 영국 민족은 점점 더 냉철하고 실천적인 현실적 인간의 이상으로 접근해 갔다. 이들은 사변을 거부하고 모든 학문과 철학의 토대로 경험을 철저히 고수했다. “모든 인식을 경험에서 도출하고 모든 학문을 오직 경험에 근거해 수립하려는 이러한 철학적 방향을 ‘경험주의’라 한다. p528”

 

경험론의 선구자로는 베이컨, 홉스, 뉴턴 등이 있다. 영국 철학은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 발전 도상에서 주요 이정표가 된 사상가가 셋 있는데, 로크, 버클리, 흄이다.

 

2. 존 로크 : 1632 ~ 1704

 

이 책에서는 『인간 지성론』을 중심으로 철학자로서의 로크를 다루는데, 별 재미는 없다. 본유관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의식의 모든 내용은 외적 경험에서 파생한다고 본다. 로크의 『통치론』을 다루는 강유원의 고전강의가 더 재미있다. 명예혁명 이후의 영국의 법과 그것에 큰 영향을 받은 미국의 독립사상과 프랑스 법의 기초가 로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로크 통치의 핵심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의 기능과 법이다. 국가의 임무는 사적 소유권을 지켜주는 것이다.

 

3. 버클리 :1684 ~ 1753

 

버클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오직 우리 의식의 현상으로서, 우리 정신의 상태로서 주어진다고 한다. 사물의 존재란 단지 그것이 지각되기에 성립한다. 그렇다면 당장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경우에 태양의 표상이 모든 사람의 정신에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눈앞의 세계가 나의 지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일한 표상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버클리는 신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태양은 신이 그 표상을 내게 심어 놓았기 때문에,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태양의 표상은 존재한다. 그리고 신이 나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표상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다. 이것도 대답인가 싶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믿을 만 했던가 보다. 지금도 주요 철학자로 꼽는 것을 보면, 더 심오한 사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대강 이런 내용인 것 같다. 그런데 신이 실제 사물을 창조하는 것과 사물의 표상을 심어주는 것이 다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생각나는데, 양자물리학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관찰될 때까지 사물은 확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니까, 버클리랑은 다르다.

 

4. 흄 :1711 ~ 1776

 

흄은 더 멀리 나간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의식 내 현상들의 변화 과정뿐이며, 이때 의식은 이런 현상들과 분리된 독자적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표상들에는 아무런 인관관계가 없다. 지각작용이 보여주는 것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계기관계가 있을 뿐이다.

 

5. 영국 종교철학과 계몽주의 시대의 윤리학

 

흄에게 흥미로운 것은 종교철학이다. 그의 본질적 사상은 다음과 같다.

 

“독립적 사유능력이 있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 별도의 종교적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의 동인을 이성에서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적 사유능력이 없는 다수 대중은 도덕적 행동의 동인을 자극받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순수한 종교적 생각이나 이성적 근거에 둔감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먼저 순수한 이성종교의 지배가 가능하다. 이런 경우 다른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종교의 실천적-윤리적 측면이 이성에 근거를 둔 도덕성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음은 종교가 광신이나 미신과 섞이는 가능성으로, 이런 현상은 다수 대중에게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이런 경우 윤리적 효과는 아주 불명확해진다. 보잘 것 없는 공덕이나 위선적 경건함, 피상적 허례허식,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교도 박해와 기타 온갖 부조리한 일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결국 종교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보다 더 못한 상황이 도래한다. 영국이 경험한 가공할 종교적 폐혜는 흄의 이런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p549”

 

또한 흄은 인간의 공감능력을 도덕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 판단은, 타인과 동감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 즉 '공감능력‘ 덕분에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타인들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p552”

 

 

Ⅱ. 프랑스

 

1. 영국 계몽주의 이념의 프랑스 전파

 

정신적 자족감에 충만해 있던 프랑스인들은 루이14세가 죽고 나자(1715), 영국에서 건너 온 것들에 열렬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헌법과 사회제도, 영국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상과 이념이 홍수처럼 프랑스로 밀려들었고, 이는 다시 전체 서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계몽주의는 전체 유럽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인에 의한 영국의 발견은 18세기 초 유럽 정신사에서 결정적 사건이라 불릴 만하다. p553~4”

 

그러나 냉철하고 현실적인 영국인들과는 달리 열정적인 프랑스인들은 훨씬 과격하게 과거와 단절했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는 영국적 관념을 프랑스 정신에 매개시킨 대표적 사상가이다.

 

2. 몽테스키외 (1689 ~ 1755)

 

샤를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남작은 프랑스 혁명을 사상적으로 준비한 인물 중 하나이지만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몽테스키외는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며, 영국인들의 국가이론과 헌법운용을 본보기로 삼는다.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한데, 권력분립의 이론적 구상은 근본적으로 존 로크의 사상에서 빌려 온 것이다. 로크는 국가 행정권과 입법권의 엄격한 분립을 요구했는데, 몽테스키외가 여기에 제3의 권력으로 사법권을 추가한다. 그는 이런 제도가 확립되지 않으면 독재가 발호하고 자유가 말살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 볼테르 (1694 ~ 1778)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인 볼테르는 열정과 끈기 무엇보다 달변으로 99권의 저작을 남긴 사상가다. 고전으로 유명한『깡디드』에서는 ‘모든 세계 중 최상의 세계’를 주장하는 라이프니츠를 신랄하게 야유하기도 했다.

 

볼테르는 근대적 학문정신에 입각한 최초의 역사철학가로서, 별다른 의미 없이 무수한 사실을 나열하는 식의 역사를 거부했다.

 

“그는 큰 맥락에서 사물들을 고찰하고 통일적인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했다. 그런 원리만이 전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볼테르는 군주나 크고 작은 전쟁 대신 사회 운동과 동력, 문화와 정신의 진보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견해에 이르렀다. p561”

 

그런데 300년 가까이 지난 요즘에도 우리는 왕의 이름과 전쟁 따위의 연대기에 집착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그의 언급도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성종교를 주장했다. “복음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소한 일들이 기독교 역사에 출현한 모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원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는데, 누군가 다른 인간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전체 자연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는 무신론을 반대했지만 , ‘예수천국 불신지옥’ 또한 반대했을 것이다. 볼테르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지폈지만, 그는 급진적 혁명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혁명을 바라기에, 그는 너무 보수적이었고 대중의 자발적 통치 능력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

 

4. 백과전서파와 유물론자들

 

“종교와 철학의 시대는 과학의 세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자부심에 찬 이 말은 1751년부터 1789년까지 전28권으로 발간된 《학문과 예술 및 산업의 백과전서》서문에 나오는 것이다. 이 문장은 학문과 이성을 무기로 해서 과거의 권력으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키고 더욱 자유롭고 복된 시대를 열려했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백과전서》는 당대의 지식 전체를 총괄하고 정리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p566”

 

이 책의 전체 제작에는 많은 협력자들이 있었지만,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은 데카르트의 이원론 대신 유물론적 일원론을 주장했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며 물질에 대한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형이상학과 종교를 망상, 착각, 기만으로 매도했다. “최초의 바보가 만난 최초의 악당이 바로 최초의 승려였다.”고 할 정도다. 그들은 계몽을 통해 모든 착각과 기만을 타파하고, 이성의 통제 아래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지극히 낙관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다.

 

5. 루소 (1712 ~ 1778)

 

루소는 언뜻 보기에 계몽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문․ 예술론』에서, 학문과 예술은 진보가 아닌 퇴보의 기념비라 비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선조들의 계몽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행복을 증진할 유일한 자산인 소박함과 무구함과 가난으로 되돌려 주소서.”라고 외쳤다. 루소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것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그에게 자연은 홉스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참된 낙원의 상태이다.

 

루소를 대표하는 저서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이다. 그는 불평등의 기원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이탈한 것에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이 된 것 자체가 불평등의 원인이란 말인가?

 

“누군가 어느 땅에 울타리를 두고 ‘이것은 내 땅’이라 주장해 볼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한 최초의 인간이 바로 시민사회의 실질적 창시자이다. 만약 이때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 둘레의 도랑을 다시 메우고는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과실은 모두의 것이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인류는 무수한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P573” 고, 루소는 쓰고 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다음 설명이다.

 

“그러나 전쟁과 살인을 일삼는 상태를 오래 지속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부자’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이웃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들을 제지하고 각자의 소유물을 보장받으려면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을 서로에게 행사할 게 아니라 최고 권력체로 통합시킵시다. 그리하여 현명한 법률에 따라 이 조직 속의 모든 구성원을 보호하고 공동의 적을 막아 내고 영원히 화목한 생활을 영위합시다.’” 천진한 사람들이 이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와 법률이 발생했다. 국가와 법률은 약자에게 새로운 올가미를 씌웠고 부자에게는 불평등을 영구화할 가능성을 주었다. 부자들의 지배는 처음에 법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지니고 출발했지만 곧 자의적 횡포로 변질되었다. P573~4”

 

지금 읽으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언뜻 홉스나 로크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루소는

사회계약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이란 오직 합의, 자발적 동의인데, 이것만이 적법한 지배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개개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소유권을 내어 놓고 최상위의 지시체인 일반의지에 종속된다. 이렇게 해서 공적 인격이자 정신적 총합체인 국민이 발생한다. 국민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시민은 모든 법에 동의해야 하며, 자신의 의지에 반한 법에도 동의해야 한다. 그들이 시민이고 자유로운 것은 일반의지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반의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투표와 그 결과를 통해 일반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내 의견이 아니라 반대 의견이 압도적일 경우 그것은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 내가 일반의지로 생각했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루소에 대한 볼테르의 반응이 매우 재미있다. 볼테르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루소에게 편지를 보냈다. “반인류적 성격을 갖는 당신의 저작을 잘 받았습니다. ... 당신만큼 기지를 발휘해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다보면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은 욕구가 불끈 일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습관을 이미 60년 전에 버렸기 때문에 그 습관을 되찾기란 불가능할 듯합니다. P577” 『깡디드』의 작가답게 신랄하다. 나도 조금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사실 상당히 인공적인, 잘 가꾸어진 공원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루소는 교육을 강조했다.

 

루소는 흄이나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마지막 수호신인 동시에 이 운동의 초극을 원했던 지극히 신랄한 비판자였다.

 

 

Ⅲ. 독일

 

여기서 이 책은 독일의 계몽주의를 간단히 개요만 살피고 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계몽주의의 정점이자 종결을 뜻하는’ 칸트를 5부 2장에서 따로 떼어 특별히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이미 바로크의 대표 사상가로 다루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일과 외국의 학자들을 궁정으로 초빙하여 독일 계몽주의 운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궁정은 박해받는 사상가들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여, 모든 종교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Ⅳ. 계몽주의에 대한 평가

 

“우리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계몽주의 시대만큼 철학이 여론과 사회발전에 강한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이성을 사용하라는 철학자들의 요구(이때의 표현은 ‘비판’이었다) 그리고 자유와 관용, 인간성의 이상을 실현하라는 이들의 요구는 - 계몽주의의 이상이 처음에는 프랑스혁명의 유혈 사태에서 망각된 듯 보였지만 - 장기적으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관철되었다. 현재까지 우리가 이룬 근본적 성과 중 많은 것은 계몽주의의 이상에 빚지고 있다. P587”

 

 

 

계몽주의, 경험론,로크,버클리,흄,몽테스키외,볼테르,루소,프리드리히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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