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왔다. 밀양 얼음골 사과, 15kg.

택배 아저씨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커다란 박스가 인터폰 화면에 비쳤다. 분명 15kg다.

 

11월, 막 부사가 나오기 시작하는 철에 지인이 사과 몇 개를 가지고 왔다.  밀양에 놀러간 언니가 농장에서 사 보냈다고 했다. 저녁에 사과를 먹어본 남편이 감탄했다. 자기가 먹어본 사과 중 제일 맛있다고. 남편은 쓸데없이 미각이 발달해서, 유난히 손맛이 없는 나를 고민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정작 자신도 매우 힘겨워 한다. 미묘한 맛들이 너무 잘 느껴지니, 어지간한 음식에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어떤 음식이든 맛있다며 먹는 사람들을 차라리 부러워한다. 슬프게도, 미각은 사슴의 모가지처럼 고고하지만, 현실의 식탁은 싱겁고 짠 간조차 들쭉날쭉이다. 그런 남편이 신선한 산미가 살아있는 맛있는 사과라 극찬했으니, 밀양 얼음골 사과가 맛있기는 맛있는 모양이다. 내 혀는 미련밤퉁이라 대충 맛있는 혹은 대충 맛없는 것들만 구분한다.

 

지역 온라인 몰을 통해 지인이 알려준 농장의 사과를 주문해 먹었다. 그런데 두 번째 주문에 문제가 생겼다. 10kg 36과를 시켰는데, 44과가 온 것이다. 사과는 같은 중량이면 갯수가 많을 수록 싸다.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44과는 딱 보기에도 너무 작을뿐 아니라, 도저히 부사꼴로 봐줄 수 없는 설익은 사과도 섞여 있었다. 온라인 몰에는 아예 44과는 상품으로 올라오지도 않았다. 가장 작은 것이 40과이다. 전화를 했더니 생산자인 그 농장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한창 막바지 수확이 바빴을 때인 그 때, 농장 주인 아주머니는 과수원이라 했다. 사과를 하며 어떻게 해주면 되겠냐는 아주머니의 목소리 뒤로 아저씨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그냥 들어도 싸움처럼 들리는 그 사투리에 나무람이 가세하니 아주머니를 향한 고함이 나에게 날아오는 듯 했다.

 

사실 나는 화가 났다. 지난번 택배는 경비실 문 밖에 놓여 있었다. 내가 전화를 못받았기 때문이지만, 10kg 박스를 들 수 없는 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허리가 약할 뿐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에 상태가 나빠져 무거운 것은 일체 들지 못하고 있다. 남편이 돌아올 늦은밤까지 경비실 문 밖에, 안도 아니라 밖에 먹을 것을 놔두기에는 아무래도 찝찝해서 나는 결국 이웃집에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사실 나는 택배 특히 무거운 택배는 잘 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너무 섬세해서 슬픈 남편의 미각을 위해서 한껏 신경이 쓰이는 택배 주문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농장주인 아주머니는 처음에, 다시 보내줄테니 잘못 보낸 사과는 되돌려 보내라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아픈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하며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은 사과를 이미 냉장고에 채운 후였다. 그러면서 갯수를 정확히 헤아려 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다시 다 꺼내 또 박스에 담아서 다시 택배로 보내고, 택배 기사가 올 시간에 맞추어 집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니, 그러고 다시 택배가 오면 또 사과를 나누어 냉장고에 넣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니, 그 힘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또 하라니, 순간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잔소리를 했다. 문제 해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다만 내가 이렇게 화가 났다는 것만을 일방적으로 알릴 뿐인 소위 '고객불만' 을 말이다. 나의 불평을 난처하게 듣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드릴까요? 라고 아주머니가 묻는 그 순간에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내 귀를 쳤고,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두 제품의 가격 차액을 돌려받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일이 끝난 저녁 7시경에 송금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서야 과수원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번에 주문할 때는 5kg를 더 보내주겠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내가 다시 주문할 것을 기대하는 아주머니가 약간 우습기도 하고, 속으로 살짝 기대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나의 외갓집도 과수원을 했다. 어릴 때는 떨어진 사과나 조금 썩은 사과를 많이 먹었다. 외할머니가 커다란 양철 바케쓰에 주워 담은 사과를 머리에 이고 버스를 갈아 타가면서 가져다 주신 것들이다. 그 강골의 외할머니는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보다 더 억척이시던 분은 외숙모였다. 밀양 얼음골 보다 조금 더 윗쪽인 외갓집 과수원에도 딱 얼음골 사과농장의 주인 같던 외삼촌이 계셨다. 두분도 하루종일 과수원에서, 논에서, 들에서 일을 하셨다. 한번도 살가운 말, 부드러운 눈길을 받아보지 못하셨을 외숙모도 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여름방학에 놀러가면, 사시사철 갈라터진 손으로 콩이며 옥수수이며를 삶아 주신던 외숙모였다. 비오는날 대청마루 위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뜨거운 옥수수 김이며, 흙마당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그림처럼 생각날 때가 있다. 겨울방학이면 광에서 꺼내오시던 국광이라 불리던 사과도 있었다.

 

무어라해도, 허리가 아프다해도, 내 손은 하얗고 말랑하다. 내가 무엇이 힘들까.... 너무 작아 맛이 날까 싶던 사과도 다행히 얼음골 사과의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과는 너무 크지 않은 것이 더 단단하고 맛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조직이 더 치밀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다. 채 자라지 않은 것인지 맛이 아예 이상한 것 두어개를 골라 버린 것 외에는 불만 없이 먹었다. 

 

그런데 얼음골 사과는 사실 비싸다. 집앞 과일 가게의 부사보다 심하게는 두배 혹은 한배 반 정도는 비싸다. 그래서 가게에서 몇 개를 사왔더니, 남편이 이 사과는 흔히 먹는 그런 부사고 얼음골 사과와는 완전히 다르단다. 그래서 또 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온라인몰에는 여러 농장들이 들어와 있어, 다른 농장에서 시킬 수도 있지만, 그냥 그 농장의 사과를 주문하고 전화를 했다.

 

아주머니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살짝 서운(?)했지만, 얘기를 하고 이번에는 잘 확인하고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자기가 무슨 약속을 했냐고 물었다. 나는 15kg를 보내 준다고 하셨지만, 그냥 좋은 놈으로만 보내주시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15kg이 왔다.  나는 5kg의 약속을 기대하고 전화를 했던 걸까? 어쩌면.... 혹은 그냥 외숙모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의 claim에 당한 것도 아주머니이고, 그것 때문에 또 아저씨한테 한 소리 들었을 아주머니... 그러고도 다시 주문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던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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