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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평점 :
제 5부 계몽주의 철학과 이마누엘 칸트의 저작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린다. (혹자는 산업혁명의 시대라고도 한다.) 계몽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정의는 바이저의 『헤겔』에서 본,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다. 바이저는 “계몽은 이성의 시대였는데, 왜냐하면 계몽은 이성을 모든 지적 물음들에서 최고의 권위, 최종적인 상고 법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중심적이고 특징적인 원리는 우리가 이성의 주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p45” 고 했다.
5부를 이루는 두 개의 장은 계몽주의 시대와 이마누엘 칸트다. 저자가 칸트주의자인지 모르겠지만, 계몽의 완성자인 칸트를 따로 떼어내 80쪽 정도를 할애했다. 오늘은 1장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대표 철학자들에 대해서 정리하려 한다. 아직 칸트는 읽지 않았다. 한꺼번에 하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아질 것 같아 먼저 요약한다.

제 1장 계몽주의 시대
Ⅰ. 영국
1. 영국 경험론의 선구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묶어 외우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용을 모르면서도 경험주의 철학은 왠지 따분할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영국인들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이 더 그런 인상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냉철하고 엄격하고 완고한.
1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최초로 일정한 정치적 자유를 쟁취했다. 영국의 명예혁명이 1688년에 일어났으니, 프랑스 혁명보다 100년 먼저 근대적 자유를 획득했다. 이 시기를 통해 영국 민족은 점점 더 냉철하고 실천적인 현실적 인간의 이상으로 접근해 갔다. 이들은 사변을 거부하고 모든 학문과 철학의 토대로 경험을 철저히 고수했다. “모든 인식을 경험에서 도출하고 모든 학문을 오직 경험에 근거해 수립하려는 이러한 철학적 방향을 ‘경험주의’라 한다. p528”
경험론의 선구자로는 베이컨, 홉스, 뉴턴 등이 있다. 영국 철학은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 발전 도상에서 주요 이정표가 된 사상가가 셋 있는데, 로크, 버클리, 흄이다.
2. 존 로크 : 1632 ~ 1704
이 책에서는 『인간 지성론』을 중심으로 철학자로서의 로크를 다루는데, 별 재미는 없다. 본유관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 의식의 모든 내용은 외적 경험에서 파생한다고 본다. 로크의 『통치론』을 다루는 강유원의 고전강의가 더 재미있다. 명예혁명 이후의 영국의 법과 그것에 큰 영향을 받은 미국의 독립사상과 프랑스 법의 기초가 로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로크 통치의 핵심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의 기능과 법이다. 국가의 임무는 사적 소유권을 지켜주는 것이다.
3. 버클리 :1684 ~ 1753
버클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오직 우리 의식의 현상으로서, 우리 정신의 상태로서 주어진다고 한다. 사물의 존재란 단지 그것이 지각되기에 성립한다. 그렇다면 당장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실제 눈으로 보는 경우에 태양의 표상이 모든 사람의 정신에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눈앞의 세계가 나의 지각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일한 표상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버클리는 신에게서 그 답을 찾는다. 태양은 신이 그 표상을 내게 심어 놓았기 때문에,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태양의 표상은 존재한다. 그리고 신이 나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표상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다. 이것도 대답인가 싶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믿을 만 했던가 보다. 지금도 주요 철학자로 꼽는 것을 보면, 더 심오한 사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대강 이런 내용인 것 같다. 그런데 신이 실제 사물을 창조하는 것과 사물의 표상을 심어주는 것이 다른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생각나는데, 양자물리학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관찰될 때까지 사물은 확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니까, 버클리랑은 다르다.
4. 흄 :1711 ~ 1776
흄은 더 멀리 나간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의식 내 현상들의 변화 과정뿐이며, 이때 의식은 이런 현상들과 분리된 독자적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 그리고 표상들에는 아무런 인관관계가 없다. 지각작용이 보여주는 것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계기관계가 있을 뿐이다.
5. 영국 종교철학과 계몽주의 시대의 윤리학
흄에게 흥미로운 것은 종교철학이다. 그의 본질적 사상은 다음과 같다.
“독립적 사유능력이 있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 별도의 종교적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의 동인을 이성에서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독립적 사유능력이 없는 다수 대중은 도덕적 행동의 동인을 자극받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은 순수한 종교적 생각이나 이성적 근거에 둔감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먼저 순수한 이성종교의 지배가 가능하다. 이런 경우 다른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여기서는 종교의 실천적-윤리적 측면이 이성에 근거를 둔 도덕성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음은 종교가 광신이나 미신과 섞이는 가능성으로, 이런 현상은 다수 대중에게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이런 경우 윤리적 효과는 아주 불명확해진다. 보잘 것 없는 공덕이나 위선적 경건함, 피상적 허례허식,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교도 박해와 기타 온갖 부조리한 일이 주요 관심사가 되고, 결국 종교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경우보다 더 못한 상황이 도래한다. 영국이 경험한 가공할 종교적 폐혜는 흄의 이런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p549”
또한 흄은 인간의 공감능력을 도덕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든 도덕적 판단은, 타인과 동감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능력, 즉 '공감능력‘ 덕분에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타인들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p552”
Ⅱ. 프랑스
1. 영국 계몽주의 이념의 프랑스 전파
정신적 자족감에 충만해 있던 프랑스인들은 루이14세가 죽고 나자(1715), 영국에서 건너 온 것들에 열렬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헌법과 사회제도, 영국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상과 이념이 홍수처럼 프랑스로 밀려들었고, 이는 다시 전체 서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계몽주의는 전체 유럽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인에 의한 영국의 발견은 18세기 초 유럽 정신사에서 결정적 사건이라 불릴 만하다. p553~4”
그러나 냉철하고 현실적인 영국인들과는 달리 열정적인 프랑스인들은 훨씬 과격하게 과거와 단절했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는 영국적 관념을 프랑스 정신에 매개시킨 대표적 사상가이다.
2. 몽테스키외 (1689 ~ 1755)
샤를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남작은 프랑스 혁명을 사상적으로 준비한 인물 중 하나이지만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몽테스키외는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며, 영국인들의 국가이론과 헌법운용을 본보기로 삼는다.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한데, 권력분립의 이론적 구상은 근본적으로 존 로크의 사상에서 빌려 온 것이다. 로크는 국가 행정권과 입법권의 엄격한 분립을 요구했는데, 몽테스키외가 여기에 제3의 권력으로 사법권을 추가한다. 그는 이런 제도가 확립되지 않으면 독재가 발호하고 자유가 말살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3. 볼테르 (1694 ~ 1778)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인 볼테르는 열정과 끈기 무엇보다 달변으로 99권의 저작을 남긴 사상가다. 고전으로 유명한『깡디드』에서는 ‘모든 세계 중 최상의 세계’를 주장하는 라이프니츠를 신랄하게 야유하기도 했다.
볼테르는 근대적 학문정신에 입각한 최초의 역사철학가로서, 별다른 의미 없이 무수한 사실을 나열하는 식의 역사를 거부했다.
“그는 큰 맥락에서 사물들을 고찰하고 통일적인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했다. 그런 원리만이 전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볼테르는 군주나 크고 작은 전쟁 대신 사회 운동과 동력, 문화와 정신의 진보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견해에 이르렀다. p561”
그런데 300년 가까이 지난 요즘에도 우리는 왕의 이름과 전쟁 따위의 연대기에 집착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그의 언급도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성종교를 주장했다. “복음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소한 일들이 기독교 역사에 출현한 모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의 원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는데, 누군가 다른 인간에게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을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전체 자연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는 무신론을 반대했지만 , ‘예수천국 불신지옥’ 또한 반대했을 것이다. 볼테르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 불을 지폈지만, 그는 급진적 혁명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혁명을 바라기에, 그는 너무 보수적이었고 대중의 자발적 통치 능력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
4. 백과전서파와 유물론자들
“종교와 철학의 시대는 과학의 세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자부심에 찬 이 말은 1751년부터 1789년까지 전28권으로 발간된 《학문과 예술 및 산업의 백과전서》서문에 나오는 것이다. 이 문장은 학문과 이성을 무기로 해서 과거의 권력으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키고 더욱 자유롭고 복된 시대를 열려했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백과전서》는 당대의 지식 전체를 총괄하고 정리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p566”
이 책의 전체 제작에는 많은 협력자들이 있었지만,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프랑스의 유물론자들은 데카르트의 이원론 대신 유물론적 일원론을 주장했다. 존재하는 것은 물질뿐이며 물질에 대한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형이상학과 종교를 망상, 착각, 기만으로 매도했다. “최초의 바보가 만난 최초의 악당이 바로 최초의 승려였다.”고 할 정도다. 그들은 계몽을 통해 모든 착각과 기만을 타파하고, 이성의 통제 아래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지극히 낙관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다.
5. 루소 (1712 ~ 1778)
루소는 언뜻 보기에 계몽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문․ 예술론』에서, 학문과 예술은 진보가 아닌 퇴보의 기념비라 비판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선조들의 계몽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행복을 증진할 유일한 자산인 소박함과 무구함과 가난으로 되돌려 주소서.”라고 외쳤다. 루소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것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그에게 자연은 홉스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참된 낙원의 상태이다.
루소를 대표하는 저서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이다. 그는 불평등의 기원을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이탈한 것에 있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이 된 것 자체가 불평등의 원인이란 말인가?
“누군가 어느 땅에 울타리를 두고 ‘이것은 내 땅’이라 주장해 볼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한 최초의 인간이 바로 시민사회의 실질적 창시자이다. 만약 이때 말뚝을 뽑아버리고 토지 둘레의 도랑을 다시 메우고는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과실은 모두의 것이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들은 파멸할 것이오!’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인류는 무수한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P573” 고, 루소는 쓰고 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다음 설명이다.
“그러나 전쟁과 살인을 일삼는 상태를 오래 지속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부자’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이웃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들을 제지하고 각자의 소유물을 보장받으려면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을 서로에게 행사할 게 아니라 최고 권력체로 통합시킵시다. 그리하여 현명한 법률에 따라 이 조직 속의 모든 구성원을 보호하고 공동의 적을 막아 내고 영원히 화목한 생활을 영위합시다.’” 천진한 사람들이 이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와 법률이 발생했다. 국가와 법률은 약자에게 새로운 올가미를 씌웠고 부자에게는 불평등을 영구화할 가능성을 주었다. 부자들의 지배는 처음에 법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지니고 출발했지만 곧 자의적 횡포로 변질되었다. P573~4”
지금 읽으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언뜻 홉스나 로크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루소는
사회계약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이란 오직 합의, 자발적 동의인데, 이것만이 적법한 지배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개개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소유권을 내어 놓고 최상위의 지시체인 일반의지에 종속된다. 이렇게 해서 공적 인격이자 정신적 총합체인 국민이 발생한다. 국민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시민은 모든 법에 동의해야 하며, 자신의 의지에 반한 법에도 동의해야 한다. 그들이 시민이고 자유로운 것은 일반의지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일반의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투표와 그 결과를 통해 일반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내 의견이 아니라 반대 의견이 압도적일 경우 그것은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 내가 일반의지로 생각했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루소에 대한 볼테르의 반응이 매우 재미있다. 볼테르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루소에게 편지를 보냈다. “반인류적 성격을 갖는 당신의 저작을 잘 받았습니다. ... 당신만큼 기지를 발휘해 인간을 동물로 만들려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다보면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싶은 욕구가 불끈 일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 습관을 이미 60년 전에 버렸기 때문에 그 습관을 되찾기란 불가능할 듯합니다. P577” 『깡디드』의 작가답게 신랄하다. 나도 조금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사실 상당히 인공적인, 잘 가꾸어진 공원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루소는 교육을 강조했다.
루소는 흄이나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마지막 수호신인 동시에 이 운동의 초극을 원했던 지극히 신랄한 비판자였다.
Ⅲ. 독일
여기서 이 책은 독일의 계몽주의를 간단히 개요만 살피고 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계몽주의의 정점이자 종결을 뜻하는’ 칸트를 5부 2장에서 따로 떼어 특별히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이미 바로크의 대표 사상가로 다루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일과 외국의 학자들을 궁정으로 초빙하여 독일 계몽주의 운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궁정은 박해받는 사상가들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여, 모든 종교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Ⅳ. 계몽주의에 대한 평가
“우리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계몽주의 시대만큼 철학이 여론과 사회발전에 강한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이성을 사용하라는 철학자들의 요구(이때의 표현은 ‘비판’이었다) 그리고 자유와 관용, 인간성의 이상을 실현하라는 이들의 요구는 - 계몽주의의 이상이 처음에는 프랑스혁명의 유혈 사태에서 망각된 듯 보였지만 - 장기적으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관철되었다. 현재까지 우리가 이룬 근본적 성과 중 많은 것은 계몽주의의 이상에 빚지고 있다. P587”
계몽주의, 경험론,로크,버클리,흄,몽테스키외,볼테르,루소,프리드리히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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