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 - 식민적 상처와 탈식민적 전환 트랜스라틴 총서 3
월터 D. 미뇰로 지음, 김은중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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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수준의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라틴아메리카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492년 이후이다.‘ 1492년이라는 해’의 수천년 전부터 원주민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원주민의 역사는 아메리카의 ‘발견’ 이후에나 의미를 갖는 것이다. 파괴되는 그 순간에서야 말이다. 세계사에서 모든 국가를 다룰 수는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의 대륙 자체를 수 천 년이나 무시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서구제국주의의 시작이다. 동양의 향신료를 권력의 상징으로 동경하던 서양이 라틴아메리카에 발을 디디면서 세계사를 뒤집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금은과 플랜테이션 사업을 바탕으로 과학혁명,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완수한 유럽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라틴아메리카 없이 서구의 근대는 존재할 수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해 라틴아메리카로 팔려온 아프리카 흑인도 포함된다. 또다시 말한다면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오, 아프리카의 노예 없이는 오늘날의 서양도 없었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15세기 유럽인들의 도착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파차쿠티’였다.

 

“파차의 여러 가지 의미 중 하나는 ‘어머니 대지’의 의미와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라는 개념이 ‘대지’를 모든 유기체와 연결하는 실마리가 ‘생명’이라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파차는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쿠티는 안정된 질서에 극적이고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변화를 가리키는데, 마치 달리던 자동차가 균형을 잃고 몇 바퀴를 구르다가 뒤집혀서 멈추는 경우와 같다. 그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원주민들의 삶과 사회조직을 자기들 방식대로 바꾸어 버렸을 때 원주민들이 경험했고,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과정으로, 원주민들은 이 과정을 파차쿠티라고 부른다. p107~8”

 

소위 ‘발견’당한 원주민들에게 유럽과의 대면은 느닷없이 당한 자동차 사고와 같았다. 그리고 500년 전의 그 사고는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두고 극과극의 관점이 존재한다. 서양 제국주의의 시작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주의의 시작이었다. 서양의 제국주의는 서양 근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근대성과 제국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근대성과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근대성은 식민성을 극복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식민성을 필요로 하고 생산하는 것이 바로 근대성이기 때문이다. p50”

 

하지만 식민성이 아니라 근대성이라는 말이 보편적 용어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사는 세계가 서구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의미이다. 이름을 점유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아프리카계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사회철학자(?)인 프란츠 파농은 식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식민주의는 단순히 피지배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식민주의의 규율을 강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식민주의는 피지배 국가의 국민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그들 머릿속의 모든 형식과 내용을 박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식민주의는 일종의 도착적인 논리를 사용해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과거를 비틀고, 왜곡하고, 파괴한다. p153”

 

서구제국주의 즉 식민주의는 항상 근대화로 포장된다. 근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근대화는 곧 진보이므로 식민지의 피지배인들은 스스로를 미개인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부정해야 한다. 자기부정 속에 피지배인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며 펼쳤던 논리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환영하며 당대의 계몽주의자들이 합리화했던 논리도 이것이다.

 

 

근대성이 곧 식민성이라는 사실은 ‘라틴’아메리카라는 명명에서도 드러난다. 그 이전에 아메리카라는 명칭부터도 그렇다. 콜럼부스가 발견했다는 그 땅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유럽백인이었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가는 곧 누가 주인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아메리카는 독일인 지리학자가 1507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본 따 붙인 이름이다. 베스푸치는 콜럼부스가 발견한 땅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첫 번째 인물이다. 이리하여 수 천 년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에 어느 날 도착하기 시작한 유럽백인들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금까지도 원주민들의 땅은 유럽적인 이름에 속박되어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하나였던 아메리카 개념은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국민국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반구의 상이한 제국의 역사에 따라 두 개의 아메리카로 분리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북쪽에는 앵글로아메리카, 남쪽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의 라틴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남쪽에 남부-가톨릭-라틴 유럽의 문명을 복원하고, 동시에 식민지 초기의 원주민과 흑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 선택된 이름이었다. 독립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지역의 엘리트들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성과 하나가 되려고 시도하는 동안 원주민• 흑인• 메스티소는 더 가난해지고 더 주변화 된 역사다. p114”

 

라틴아메리카라는 명칭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생겨나고도 수세기가 지난 19세기 중반에 붙여졌다. 그런데 왜 하필 라틴이었을까?

 

“유럽에서 라틴성은 자신들을 라틴어와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 배태된 라틴 에토스를 공유하는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여겼던 남유럽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초국가적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에서 라틴성은 흥미롭게도 로마 제국과는 틀림없이 거의 관계가 없는 지구적 종족-인종 오각형의 다섯 번째 변이 되었다. p134”

 

카리브 해와 중부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것은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어는 로망스어에 속하며 로망스어는 라틴어에서 파생했다. 북아메리카와는 달리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대부분은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에스파냐, 포르투갈(나중에는 프랑스)이 점령했다. 라틴아메리카란 라틴 즉 로마와 연계된 유럽인들이 지배하는 아메리카라는 의미가 된다. 이 명명에는 이 대륙의 원주민도,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잡혀왔던 아프리카인도 배제되어 있다. 라틴아메리카라는 이름은 누가 이 대륙의 주인인가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으며, 이 대륙이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점령된 식민지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영국령' 인도라는 명칭에 대영제국의 상흔이 남아있듯이, ’라틴‘아메리카 라는 명칭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실려 있다. p242”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대결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의 대결과 같다.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북아메리카는 앵글로아메리카라고도 불린다. 라틴성이라고 표현되는 유럽남부의 정체성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포함한다. 유럽북부는 독일과 영국이 대표한다.

 

 

이름붙이기의 의미는 라틴아메리카의 유일한 예외 ‘아이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아이티의 독립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탈선행위였고 이 때문에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 지도에서 언제나 신중한 태도로 배제되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의 ‘일탈’이었고, 독립을 통해 스스로의 행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이티’는 라틴도 아니고 앵글로도 아닌 개념이다. 아이티 섬의 본래 이름은 섬의 원주민 언어로 ‘산이 많은 땅’을 의미하는 ‘아이티’였다. 아프로-아이티(아프리카계-아이티) 주민의 혁명은 스페인식 이름과 프랑스식 이름 대신에 본래 이름을 ‘정복’ 초기의 대량 학살로 숨진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이티를 산토도밍고라고 불렀고, 프랑스의 점령 시기에는 생도맹그로 바뀌었다. 아이티에는 스페인 지배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아이티라는 이름은 혁명을 통한 역사적이고 인식적인 전환의 표시이고, 식민지 노예시기와 프랑스의 제국적 점령 시기로부터 벗어났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아이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어와 호명의 힘은 ‘인식의 혁명’을 위한 근본적인 잠재력이다. ‘라틴’은 아프리카계 혈통이 아니라 유럽계 혈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티는 역설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패턴에 들어맞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와 카리브에 백인 하위주체 정체성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보기에 아이티는 ‘라틴성’ 보다는 ‘아프리카성’에 의해 포착되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은 점차 증가하는 아프로-안데스의 영향으로 발생하고 있는 또 다른 커다란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p190~2”

 

아이티는 ‘아이티’라는 이름 자체가 혁명이다. 아이티라는 이름은 이 대륙의 주인이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볼리바르나 산마르틴과 같은 백인 크리올이 아니라 흑인노예들이 쟁취한 독립국가 아이티는 대서양 지역 경제 질서를 떠받히고 있던 인종적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흑인노예 없이는 유럽의 부도 없었고, 유럽의 부 없이는 유럽의 산업혁명도 시민혁명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아이티에 대한 유럽의 제재는 가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고답적인 말이지만 개명 천지에 이런 일이, 더구나 그 개명을 이끌었다던 프랑스가 이런 적반하장의 배상요구를 할 수 있었고 또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개명이란, 근대란, 그 맨 얼굴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철저히 서구 중심적이다. 유럽이니 아시아니 아프리카니 아메리카니 하는 명명자체가 서구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한다.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은 이 틀을 벗어날 수 있어야만 서구 근대가 만들어 놓은 제국주의/식민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근대(modern)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인용문 대부분(페이지수가 명기된)은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이 그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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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혁명과 남북전쟁

 

  

  <아틀라스 세계사 p86>

 

15세기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를 시작으로 유럽인들은 아시아에 가기 위해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이르는 동남 항로(붉은색)를 개척하자 에스파냐는 서부 및 서남 항로(보라색)를 통해 중국과 남아시아에 도달하려고 했다. 물론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와 카리브해 였다. 그들은 1520년대가 되어서야 그곳이 신대륙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발견한 해로를 다른 유럽인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북서쪽 바다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 제3의 항로(녹색)였다. 그들은 아시아로 가지는 못했지만 카리브해와 북극 사이에 또 하나의 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메리카 북동부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남아메리카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식민지인데 반해 북아메리카가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로 출발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은 기후가 나쁘고 토양이 척박해 처음엔 유럽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604년 프랑스가, 1607년 영국이, 1624년 네덜란드가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유럽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최초의 정착지에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를 기념하여 버지니아란 이름을 붙였다.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농사지을 땅과 일자리, 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왔다. 프랑스는 모험을 찾아 떠난 남성들이 중심인 반면 영국은 정착을 위한 가족단위의 이주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농장을 경영할 땅만을 원했던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추방하거나 몰살시켰다. 초기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짓는 법과 겨울을 나는 법등을 배웠지만 인디언들은 친절의 대가로 목숨을 잃거나 땅을 빼앗기고 서쪽으로 쫓겨났다.

 

 

  

 

유럽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했다는 7년 전쟁(1756~1763)은 오스트리아가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서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 지방을 되찾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계승을 반대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계승전쟁을 통해 슐레지엔을 차지했다. 슐레지엔은 철광과 석탄이 풍부하여 섬유업과 광업 등이 매우 발달한 요충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신, 오스트리아 영토 대부분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았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영국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슐레지엔을 놓고 다시 맞붙은 7년 전쟁에서는 동맹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프랑스가 오랜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반대로 영국은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러시아가 중간에 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에 대한 영구 소유권을 획득했다. 7년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독일 근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유럽의 신흥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아틀라스 세계사 p95>

 

7년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해외 식민지를 놓고 프랑스와 치열하게 대립하던 영국이 프랑스를 꺾고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의 통치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의 군사적·정치적 권리를 잃고, 해외 식민지 패권 다툼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제 영국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제국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이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직후부터 미국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북아메리카에 대한 영국의 기본 정책은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며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7년 전쟁 이후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재정은 유럽과 식민지에서의 계속된 전쟁 때문에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영국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식민지를 통해 메우려고 하였다. 설탕세, 인지세, 차세 등 각종 세금을 식민지에 부과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 조지 1세가 발표한 서부개척 금지령도, 영토 확장을 기대하며 7년 전쟁 동안 영국을 지원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크롬웰이 실시한 항해법이 엄격히 적용되면서 경제적 이윤을 침해당한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더욱 증폭되었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유명한 논리를 펴며 영국에 저항하였다. 영국은 차세만 제외하고 다른 상품의 세금을 폐지하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1773년에 ‘보스턴 차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이 팔지 못하고 있던 다량의 재고 차를 차세를 붙여 식민지에 팔려고 하자 인디언처럼 꾸민 식민지인들이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모두 바다로 던져버렸다. 중과세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던 영국도 이번에는 강경 대응에 나섰다.

 

  <아틀라스 세계사 p112>

 

상황이 심각해지자 13개주의 식민지 대표들은 1차 대륙회의를 갖고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영국과 13개주 사이의 첫 전투는 1775년 렉싱턴 전투이다. 미국독립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3>

 

2차 대륙회의 후,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의 대표자들이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미국 독립 기념일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로부터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다 ……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독립선언문>"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로크의 사상이 깊이 반영된 선언문이다. 인민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권력이 인민의 생명과 소유권을 보호하지 못할 때 인민은 권력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있다. 한마디로 우리 재산에 손대면 죽어!, 가 아닐까?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3>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로서는 복수혈전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이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고 나섰다. 프랑스는 또 한 번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으며 미국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재정 악화에 발목 잡힌 프랑스는 곧바로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워싱턴이 이끄는 미국 독립군은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쳐 승리의 계기를 잡았다. 1783년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드디어 미국의 독립을 승인받았다.

 

1789년 제헌헌법이 비준되고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 세계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3개주가 자치권을 가진 연방정부 형태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91>

 

19세기 들어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크게 넓혀 나갔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멕시코를 침략하여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를 강탈하였다.

 

<말랑하고 쫀득한 미국사 이야기>

 

미국의 영토가 엄청나게 늘어남에 따라 이곳에 살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쫓겨나거나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동부에서 쫓겨났던 인디언들은 다시 눈물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쫓겨 갔던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미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북부의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남부는 여전히 전통적인 면화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북부는 선진 유럽에 비해 뒤늦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호무역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원하였다. 남부는 우수한 품질의 면화를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고, 유럽의 질 좋고 값싼 공산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자유무역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남부는 연방정부보다는 주정부의 자치권이 큰 정치체제를 원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산업화에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는 자유로운 노동자이다. 북부는 값싼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원하였다. 그에 반해 대농장을 경영하는 남부로서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고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노예가 꼭 필요했다. 미국의 노예해방은 인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남북의 상반된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첨예한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92>

 

1860년 노예해방을 지지하던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은 공화당이 배출한 첫 번째 대통령인데, 당시 공화당은 주로 북부의 백인과 남부의 흑인이 참여하였고, 민주당은 남부의 백인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 두 정당의 성격은 현재의 공화당과 민주당과는 아주 달랐던 것 같다. 링컨은 노예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덮어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링컨에게 중요한 것은 노예문제 보다 연방의 유지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하지만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연합은 연방을 탈퇴하였다. 타협이 불가능한 남북의 대립은 결국 남북 전쟁으로 치달았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중에 북부는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초반에는 남부가 우세하였지만, 노예해방 선언과 흑인들의 군 입대 허용으로 북부가 전세를 뒤집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865년 북부가 승리하고 4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북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다. 남북전쟁의 결과 자본주의적 경쟁을 신봉하는 도시적이며 산업화된 북부의 생활양식이 미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양키 만세 !^^;;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남북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다. 1869년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다.  광대한 영토는 철도에 의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였고 엄청난 자원과 흑인들의 값싼 노동력이 철도를 따라 어디든 공급되면서 미국은 마침내 유럽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공업국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트러스트, 카르텔 등을 통해 독점 자본가들이 등장하였다. 카네기, 록펠러, J.P 모건 등의 자본가들은 경제는 물론 정치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독점 자본들은 일국을 넘어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라틴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북쪽은 앵글로아메리카, 남쪽은 라틴아메리카로 나뉜다. (파나마지협을 경계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나누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는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제도, 남아메리카를 포함하며 중남미라고도 불린다.  지역은 대부분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지금도 에스파냐어가 가장 많이 쓰인다.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는 로망스어로 분류되는데, 로망스어의 뿌리는 라틴어에 있다. 라틴아메리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물론 라틴아메리카는 로마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55>

 

16세기 아스텍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에스파냐는 멕시코에서 안데스 산맥에 이르는 넓은 땅을 손에 넣었다. 에스파냐인과 함께 온 전염병과 에스파냐의 총칼에 의해 원주민 인구의 90%정도가 죽음을 당했다. 대륙의 인구가 급감하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데려와 일을 시켰다. 라틴아메리카는 원주민 인디오와 유럽 백인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에 더하여 그들 사이의 혼혈 등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물론 평등한 다문화 사회가 아니라 인종에 따른 극심한 차별이 존재하는 억압적인 사회였다.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되자 라틴아메리카 현지에 정착하거나 현지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인이 많아졌다. 이들을 크리오요라고 하는데 메스티소, 인디오, 흑인을 지배하는 특권이 있었지만 에스파냐에서 온 유럽인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라틴아메리카의 주인이 되려고 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영웅들이 대부분 크리오요 출신인 것도 이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독립에 성공한 나라는 아이티이다. 아이티는 원래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곳이다.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착취당하고 있을 때, 카리브 해에도 프랑스 혁명 소식이 전해졌다.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에게도 자유와 평등이 찾아오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점에서 이런 꿈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모임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낸 고종의 꿈처럼 헛될 수밖에 없었다. 흑인들의 해방은 흑인들 스스로 쟁취해야만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6>

 

아이티의 흑인들은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카리브 해 전체에 독립의 기운이 번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에스파냐가 서둘러 진압군을 보냈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에는 프랑스군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아이티 인들은 끝내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1804년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2004년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p177~9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프랑스혁명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들의 혁명이었다. 거의 100년 간 지속된 혁명의 과정 속에 부르주아들은 제 4계급의 권리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탄압하였다. 똑 같은 유럽의 백인들 사이에서도 사정이 이러했는데, 대서양 건너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와 평등이 허용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유럽에 대항해 독립한 아이티는 실패해야만 했다. 아이티의 존재 자체가 유럽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이티혁명은 대서양 지역 경제 질서를 떠받히고 있던 인종적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아이티는 독립한 이후로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혼란과 군부 독재 등을 겪으며 힘든 현대사를 헤쳐오고 있지만 흑인노예들이 아프리카 바깥에 세운 최초의 공화국이라는 위상과 의의는 세계사에 깊이 각인되어야 한다. 서구 근대주의적 역사관을 지닌 모든 책들이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보다 철저하게 근대 혁명정신을 실현시킨 아이티혁명을 역사에서 지워버린다고 해도 말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8>

 

1807(8)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침공하자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독립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독립의 불길은 1810년 아르헨티나, 1811년 베네수엘라에서 솟아올랐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들에 대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개입에 반대함으로써 더욱 힘을 얻었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난을 왔다. 이때 브라질에는 영국의 자본이 대거 들어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포르투갈로 다시 돌아간 왕실이 브라질을 예전처럼 지배하려하자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던 황태자가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였다. 브라질의 초대 황제가 된 페드로 1세는 처음에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점차 국민들의 반감을 사다가 물러나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의회를 탄압하고 전제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1810년부터 이달고 신부가, 이후에는 모렐로스 신부가 독립 투쟁을 이끌었다. 1821년 우여곡절 끝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고 혁명을 거쳐 공화국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7>

 

라틴 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귀족 가문의 부유한 크리오요였다. 그는 “우리는 인디오도 아니요, 유럽인도 아닌 중간 존재였다. 출생은 아메리카 인이면서, 권리는 유럽의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메리카 인으로 권리를 가져야 하고,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아메리카에서 살아야 한다.” 고 아메리카의 독립을 촉구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를 미국과 같은 하나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의 이상은 실패하였지만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을 해방시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7>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크리오요였다. 에스파냐에서 군복무를 하며 에스파냐를 위해 싸웠지만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위해 에스파냐와 싸웠다. 산 마르틴은 남부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해방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에서는 산 마르틴이, 북부에서는 볼리바르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군하고 있었다. 페루를 두고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이 과야킬에서 만나 회담을 했는데, 주요한 내용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과야킬 회담 후 산 마르틴은 페루 독립을 볼리바르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이후 산 마르틴은 망명생활을 하다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과야킬 회담 후의 산 마르틴의 행보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1823년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아메리카 문제에 유럽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고 선언하였다.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이 먹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1898년 미국은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가볍게 에스파냐를 물리친 미국은 카리브 해의 요충지인 쿠바를 보호국으로 삼고, 에스파냐의 소유였던 필리핀과 괌도 차지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99>

 

라틴아메리카는 에스파냐로부터 벗어났지만 미국과 영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정치적 갈등도 계속되었다. 독립을 주도한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독립 운동의 본질은 사회 변화 없이 권력의 이동만을 바라던 식민지 귀족들의 정치 운동인 셈이었다. 뒤이은 20세기 후반에도 군사독재자들이 집권하며 라틴아메리카는 오랫동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비중이 매우 높다.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사업은 가격 변동에 민감하고 수입국의 수요에 철저히 종속된다. 예를 들어 유나이티드 프루츠 같은 다국적 기업은 라틴아메리카의 바나나를 독점하고 있다. 바나나 가격이 유나이티드 프루츠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에서 생산국의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기가 쉽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은 이런 현실을 빗댄 것이다.

 

유나이티드 프루츠, 스탠더드 오일, J.P. 모건, 브라운 브러더스 같은 기업들은 라틴아메리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손으로 세운 정부도 자신들의 이해에 맞지 않으면 수시로 무너뜨리고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했다. 라틴아메리카 인들은 이런 미국의 횡포에 맞서 반미투쟁을 벌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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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을 이끈 빈체제는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였다.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가 부활하였고, 각국의 영토도 혁명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이 전파한 자유사상과 나폴레옹 군에 대항하며 싹튼 민족의식까지 꺾을 수는 없었다. 빈체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지에서는 자유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이 끈질기게 터져 나왔다.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코뮌까지, 인권선언이 명시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위하여 끈질기게 투쟁하였다. 영국은 수차례의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점차 투표권을 확대해 나갔다. 영국 노동자들의 차티스트운동은 당시에는 실패하였지만 보통선거제의 도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르며 노예를 해방하였다. 러시아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어려운 상태에서 차르가 앞장서 농노해방을 선포하였다.

 

19세기 자유주의 운동으로 뭉뚱그려지는 이 사건들은 사실 자유보다는 평등의 이념에 더욱 가깝다. 귀족들만 가지던 투표권이 부르주아에게, 도시 노동자에게, 그리고 농민들에게로 점차 확대되는 과정은 평등한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노예해방과 농노해방도 신체의 자유와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사실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를 의미한다. 이때의 자유는 평등주의적 자유가 아니다. 평등주의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명칭에서 평등을 숨기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일까...

 

“19세기 부르주아의 정치적 토대는 자유주의였습니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허용한다는 굉장히 좁은 의미의 시민적 자유주의입니다. 부르주아는 가난한 자들이 착취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그들에게 자유를 용납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대중 정치를 시도하면 부르주아는 가차 없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습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파리코뮌입니다. 부르주아는 또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결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소유권은 지상 최고의 원칙이므로 누군가 자신들의 소유권을 침해하려고 하면 곧바로 응징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소유권을 통해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부르주아가 지배를 관철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권력을 잡아 지배하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지배권을 가진 자본 권력을 통해 지배하고 있습니다. p400 <역사고전강의>”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는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나폴레옹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인식되면서 유럽 각국의 민중들은 나폴레옹에 대항해 하나의 민족으로 똘똘 뭉쳐 대항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민족주의 정신의 확산을 통해 19세기 후반에 각각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탈리아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서로마제국의 황제 칭호를 받은 카롤루스 대제가 814년에 죽자 프랑크왕국은 손자 세대에 세 개의 왕국으로 갈라졌다. 서프랑크 지역은 프랑스, 동프랑크 지역은 독일, 중프랑크 지역은 이탈리아로 발전했다. 프랑스는 15세기부터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있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성장한 이탈리아는 14세기 르네상스를 주도할 정도로 부유하였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비해 여전히 작은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마키아벨리(1469~1527)는 <군주론>을 통해 이탈리아를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그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은 300년도 훨씬 더 지난 1861년이 되어서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탈리아의 통일에는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정신을 고양시킨 마치니, 이탈리아의 두뇌 카보우르, 그리고 빨간 셔츠의 카리스마 가리발디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샤르데냐 왕국의 수상이었던 카보우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의 중북부를 통일하였다. 한편 가리발디는 전쟁을 통해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를 통일하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를 공화국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어떤 체제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이탈리아 전체의 통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샤르데냐 왕국에 그가 병합한 남부 이탈리아를 조건 없이 헌납하였다. 가리발디의 결단 덕분에 이탈리아는 마침내 1861년 샤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후 프로이센과 손잡고, 오스트리아가 장악한 베네치아와 프랑스 수비대가 지키던 로마교황령까지 병합하여 1871년에 통일을 완성하였다.

 

 

 

 

독일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6>

 

독일 영토는 9세기 동프랑크 왕국에서 비롯되었다. 동프랑크의 오토 1세가 962년 로마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부여받았고, 13세기 경(1254) 부터는 이 지역이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었다.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난 후 신성로마제국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어 300여개의 영방이 되었고, 1806년 나폴레옹의 침략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중세 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까지 세력이 미쳤다고 하는데, 실제적으로 통치는 영역별로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에 있지도 않으며, '제국'도 아닌 어떤 것이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왕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칭호를 얻기 위해 엄청 다투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독일지역의 전통적 강자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에 절대 왕정 체제를 강화했고 그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프로이센은 독일지역의 신흥 강자로, 계몽군주 프리드리히2세가 절대왕정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프리드리히2세의 궁전은 탄압을 피해 도망 온 계몽 사상가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새롭게 부상한 프로이센은 독일지역의 패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통일된 독일국가가 탄생한 것은 1871년이다. 독일은 다른 유럽국가의 근대화에 자극받아 꾸준히 통일국가를 이루려 노력해 왔으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라는 두 강자 사이의 대립과 독일의 통일을 꺼려하는 주변 국가들의 간섭에 의해, 통일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통일의 첫 단계는 프랑스 7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834년에 맺은 관세동맹이다. 독일의 경제적 통일을 가장 바랐던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안정되고 통합된 시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라인 강을 따라 하류까지 가는데 무려 37명의 영주에게 관세를 내는 상태로는 산업발전이 불가능했다. 관세동맹으로 독일내의 거래에는 더 이상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독일의 경제적 통일은 영주를 물리치고 부르주아들이 경제 주도권을 잡았음을 의미했다. 관세동맹은 프로이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통일 독일의 헌법 초안을 마련한 것이다. 프랑스 2월 혁명에 자극을 받은 것인데, 당시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쟁점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 독일을 건설할 것이냐,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소 독일을 건설할 것이냐 였다. 오스트리아는 통일에 소극적이었고 독일은 소독일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의회에서 씌워주는 왕관으로 만든 통일독일을 거부했다. 프로이센이 선택한 방식은 철과 피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1862년 독일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지금 우리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철과 피, 곧 무기와 병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군사력을 증강한 프로이센은 통일의 방해 세력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연달아 물리치고 마침내 통일을 이룩하였다. 22개의 군주국가와 3개의 자유도시가 하나의 연방제국가로 통일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1871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했다. 프로이센이 이루어 낸 통일은 위로부터 진행된 국민 국가 건설이었다. 독일의 사례는 러시아나 동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독일과 이탈리아는 비슷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에 기반 했다는 점과 오스트리아 등의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치른 후 통합했다는 점, 두 국가 모두 공화국이 아니라 제정 혹은 왕정 체제를 이루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다만 독일은 관세동맹이라는 경제적 통합 후 정치적 통합을 이루었고, 이탈리아는 정치적 통합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독일은 근대화의 후발주자였지만, 국가가 적극적으로 자본을 끌어 모으고 계획적으로 산업을 발전시켰다. 독일은 철도, 항만, 운하, 도로 등을 국가 주도로 건설하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철혈정책을 위하여 대포 등 무기를 생산하는 크루프 공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가로 받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풍부한 석탄과 철은 독일을 최고의 철강 공업국으로 부상시켰다. 1880년대부터 벌써 AEG 등 튼튼하고 실용적인 기계들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탄생했다.

 

통일독일의 문제는 시민계층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이끈 군국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국가 아래 독일 시민계층은 권위에 무기력하게 복종했으며, 독자적이고 건전한 문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귀족계급을 뒤쫓는데 급급했다.

 

“독일에서는 근대에 대한 사유가 역사적, 지리적 요인 때문에 온전한 힘을 펼칠 수 없었다. 19세기 초 독일인들은 나폴레옹 군대를 통해 단기간에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설익은 이성적 사유는 해방전쟁이라는 목욕물로 계몽사상을 단호히 씻어냈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절대다수는 피히테와 아른트의 이상주의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재발견한 게르만 신화의 세계에 공감하며 그 속으로 도피할 뿐,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인식을 냉철한 기준에 따라 검토하기를 거부했다.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인문고전강의에서 재인용 p447>”

 

독일시민들은 프랑스의 혁명 정신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우느라 자유와 평등에 관한 정신까지 배척해 버리고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는 이런 시민들이 히틀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시민계급이 부패하면 그 사회는 파시즘으로 나아갈 위험이 큰 것이다.

 

 

 

 

러시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큰 나라이다. 20세기에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했다가 망하고 현재 열심히 자본주의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 정도가 러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다. 더한다면 레닌, 스탈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 정도?

 

각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단계가 아니라 세계사 속에 주요 국가들이 어떻게 등장해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도만 짚고 넘어가는 공부라, 러시아에 대해서도 강의에 나온 부분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만 짚어보려고 한다.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세계 대전을 공부할 때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농노해방까지만 살펴보겠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5>

 

중세 러시아 지역은 슬라브 민족의 키예프 공국이 이끌었는데, 몽골의 침략에 의해 망하고 킵차크한국이 세워지면서 1240년대 이후 약 2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경에는 변방의 작은 나라 모스크바 대공국이 성장해서 군주인 이반 3세가 스스로를 차르라 칭할 정도가 되었다. 차르라는 칭호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르던 러시아어인데, 1453년 비잔티움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이반3세가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녀를 아내로 삼고 자신이 비잔티움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차르를 사용했다. 그러나 유럽의 국가들은 차르를 인정해 주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러시아는 유럽 밖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러시아 제국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은 17세기 표트르 대제(1682~1725) 때이다.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서유럽을 본떠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베리아로 세력을 확장하여 청과 충돌하였고, 결국 네르친스크조약을 통해 청과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표트르 대제를 계승한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는 러시아의 세력권을 크게 확장하였다. 시베리아를 넘어 바다 건너 알래스카를 획득하고, 남으로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폴란드를 분할하고 계속해서 동유럽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는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지 못해, 절대왕정 체제에 필요한 재정을 귀족 지주층으로부터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봉건적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국왕은 아끼는 신하에게 4~5만 명의 농노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러시아 국민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농노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9세기 러시아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1825년 일군의 귀족 청년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봉기했다. 이들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헌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였다. 치세 말년에는 오스만제국과 크림 전쟁을 벌였다. 크림전쟁은 알렉산드르 2세 즉위 후에 러시아의 패배로 끝이 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60>

 

크림전쟁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2세는 본격적인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1861년 마침내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국민 대다수가 농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필수요건인 산업이 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으로 당장 농노들의 처지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4700만 명의 농노가 해방되었는데,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에 대한 보상금을 받은 반면, 농노들은 자신이 받은 토지에 대해 49년에 걸쳐 땅값을 갚아야 했다.

 

근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2세는 나로드니키에 의해 암살당했다. 나로드니키 즉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아나키즘, 니힐리즘 등에 빠지면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은 차르들은 자유주의를 탄압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했고, 러시아는 점점 혼란에 빠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61>

 

하지만 혼란 속에서도 산업화는 진행되었다. 1891년 착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1916년에 완공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제국주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73>

 

1870년대를 거치며 자본주의 체제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우리가 어릴 때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배운 이른바 중화학 공업이 탄생하였다. 석유, 전기, 내연기관과 강철, 합금, 비철금속 같은 새로운 재료가 나오고 유기화학 공업도 등장하였다. 중화학공업은 자본주의 후발국인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독일의 크루프 공장은 새로운 강철 제조법을 개발하여 놀라운 성능의 총과 대포를 생산하였다. 철강 왕 크루프는 귀족 작위를 거절할 만큼 자본가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자 새로운 원자재를 얻기 위한 식민지가 필요했고, 더욱 발달한 기술로 대량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 또한 더욱 많이 필요해 졌다. 2차 산업혁명이 제국주의적 경쟁 즉 팽창주의적 무역 경쟁을 촉발했다.

 

“국가단위의 경쟁 즉 제국주의가 시작되면서 1876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단 6개국이 지구 영토의 1/4 을 나눠 가졌습니다. 또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강력한 국가가 대두하고 보호무역주의가 등장했습니다. p411 <역사고전강의>”

 

세계가 분할되고 더 이상 ‘비어 있는 땅“이 없게 되자, 제국주의 국가들은 다른 나라가 차지한 식민지까지 넘보게 되었다. 근대 서구사회의 종말이 전쟁으로 귀결될 위험에 처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72>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것은 1859년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을 통해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진화론의 핵심은 경쟁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적자생존’은 환경의 변화에 우연히 가장 잘 적응한 종이 살아남는 다는 것이지, 종들끼리의 경쟁을 통해 강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아니다. 추운환경에서는 맘모스 같은 큰 동물이 가장 적합하다. 그렇다고 모든 종이 다 몸집을 불린다면 급작스럽게 지구 온도가 상승할 때 살아남을 생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물은 늘 변이를 통해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우연한 유전자의 변이가 다양성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다양해진 생물 중에 어떤 생물은 특정한 환경의 변화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윈이 말하는 적자생존이다. 변이가 다양성을 낳고 다양성이 환경변화에 대한 적합성을 높인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면서 경쟁을 통한 강자 생존이라는 ‘사회 진화론’이 등장했다. 진화론의 오용인 셈이다. 사회진화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 경쟁과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사회진화론자들은 주장하였다. 사회진화론은 또한 인종주의로 발전하여 백인과 유색인 사이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것 역시 타율적 근대화 즉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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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Ⅱ

   

 

나폴레옹의 몰락 후 메테르니히가 이끄는 빈체제는 유럽을 프랑스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의 의식과 열망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빈체제에 대한 저항은 거세게 번져갔다.

 

빈체제는 프랑스에 부르봉 왕가를 복권시켰다. 루이18세의 즉위에 이어 샤를10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프랑스의 정치체제는 1789년 혁명 이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다시 왕정으로 바뀌었다.

 

루이18세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샤를10세는 왕권신수설에 기반 한 절대왕정을 부활시키려 했다. 망명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혁명기간 상실한 귀족의 재산을 보상하는 등 노골적인 반동정책을 폈다. 분노한 시민들은 1830년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반 국왕 파를 당선시켰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시민의 참정권 대부분을 빼앗고 언론․출판을 탄압하였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8일 파리는 다시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학생,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샤를10세를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혁명의 열매를 가져간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부르주아들은 공화주의가 너무 과격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7월 혁명으로 2000여명이 죽었으나 프랑스는 또 한명의 왕을 추대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선에서 혁명을 마무리 지었다.

 

루이 필리프는 처음 ‘시민의 왕’으로 불렸지만, 그의 ‘7월 왕정’은 대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점점 더 보수화되었다. 급진 공화주의자들은 7월 왕정의 입헌군주제, 제한선거(유산계급), 자유방임 경제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7월 왕정은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고 공화주의 협회를 불법화하며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금지시켰다.

1846년 선거법을 보면 투표권이 성년 남자의 3%에게만 주어져있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은행가, 대상인, 교수, 법률가와 자유주의적 귀족들이었다. 투표권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수상 기조는 투표권을 얻고 싶으면 부자가 되라고 했다. 참으로 부르주아적 자유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투표권은 누구나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기만 한다면.

 

소수 부르주아 중심의 지배세력과 노동자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30년 직후부터 공화주의자들은 7월 혁명을 탈취 당했다고 생각했고, 1832년 6월에 군주제를 폐지하기 위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가 숭고하게 묘사하고 있는 바리케이드 전투가 바로 1832년의 6월 봉기이다. 소설 속의 6월 봉기는 민중의 외면 속에 실패로 끝났다. 실제로도 6월 봉기는 실패였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의 패배는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전멸한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라이 전투에 비유되기도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48년 2월 혁명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총 결집하였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증가해온 노동자들, 도시 빈민들, 이들과 연대한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부르주아지들도 혁명에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시대를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자들, 유럽에서의 프랑스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수적 민족주의자들까지 합세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5>

 

프랑스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전 유럽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봉기와 투쟁이 일어났고, 빈 회의를 주도했던 메테르니히가 쫓겨났다.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유럽을 구체제로 되돌리려했던 빈체제가 2월 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혁명세력들은 공화정 수립에 합의했지만 주도권을 놓고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가 격렬히 대립하였다.

 

1848년 4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온건파가 대거 당선되었다. 권력은 또 다시 부르주아지에게로 돌아갔다. 6월, 불만에 찬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정부가 잔인한 진압에 나섬으로써, 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약 3천 명이 살해되었다. 6월 폭동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해체되고 사회주의 신문 발행이 금지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1789년에 시작한 프랑스 혁명의 최종 승리자가 제3계급 부르주아임을 명백히 확인시켜 주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함께 손을 잡았던 제3계급과 제4계급은 혁명의 긴 여정 속에 연대와 대립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혁명의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고 수 천 명의 희생자를 낸 2월 혁명은 제3계급과 제4계급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를 만들었다.

 

부르주아 중심의 제헌의회는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보통선거로 대거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은 농민이었다. 당시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어있던 농민들은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택하였다. 루이가 선택된 이유는 딱 하나,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루이가 삼촌 나폴레옹 1세처럼 프랑스에 영광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세기를 다룬 세 권의 시대 시리즈를 썼다. 1789년 대혁명의 시작부터 1848년 2월 혁명까지는 <혁명의 시대>, 2월 혁명 이후부터 1875년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까지가 <자본의 시대> 이다. 홉스봄의 분류는 2월 혁명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시대는 곧 부르주아의 시대이다. 2월 혁명으로 유럽 각지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들도 금세 사그러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는 유래 없는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로 분류한 이 시기는 대호황 Great Boom 이었다. 부르주아는 정치, 경제적으로 완벽히 승리했던 것이다. 

 

자본의 시대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한 시기이다. 그는 프랑스 제2 공화정의 대통령(1848~1852)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 제 2 제정의 황제(1852~1870)가 되려고 했고 성공했다. 제 2공화정의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 단임으로 규정하고 있어 루이 보나파르트는 중임할 수 없었다. 합법적 개헌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선택한 것은 쿠데타였다.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고 프랑스 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었다. 나폴레옹 1세를 계승하여 나폴레옹 3세에 즉위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또 한 번 거꾸로 돌았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

 

루이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는 파리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친위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농지를 개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농민들의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민은 나폴레옹의 유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정치이념은 애매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등이 혼합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모호성이 다양한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였다. 나폴레옹 3세라는 텅 빈 이름 속에 각 계층은 자신들의 이상을 투영하였다. 여기서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보나파르트주의란,

 

“넓은 정의에서는,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을 옹호하고 포퓰리즘적 레토릭으로 철권 통치자 또는 군사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혁명과 반동, 공화정과 황제가 기괴하게 뒤섞인 키메라라고 할 수 있다.”

 

제정 초기 나폴레옹 3세의 정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포퓰리즘을 통해 지지를 확보하고, 크림전쟁에 승리하여 유럽 내 프랑스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제정 후기로 갈수록 인기가 떨어졌다. 경제 불황과 외교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독일은 1871년 통일되었다. 10세기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은 이후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분류되었다.(신성로마제국의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다.) 그러나 제국은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를 거쳐 일곱명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황금봉투 시대 등 통일된 제국으로서의 성격을 거의 갖지 못했다. 특히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으로 영토가 유린된 이후에는 거의 껍데기만 남아 200여 개의 영방 국가가 난립한 상태였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원정 당시 공식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선언해 버렸다.

 

이런상태에서 유럽 다른 나라의 절대왕정과 시민혁명을 보면서 독일 지역에도 강력한 통일국가에 대한 염원이 커져갔다. 독일 지역의 절대 강자는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와 새롭게 부상한 프로이센 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7주간의 전쟁을 벌인 끝에 프로이센이 승리하였다. 이제 독일 통일에 가장 걸림돌로 남은 것은 프랑스였다.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자극해 전쟁을 유발했다. 1870년에 시작해 1871년에 끝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의 포로로 잡혔다. 프로이센은 파리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나폴레옹 3세를 폐위시키고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도중에 프랑스의 정체가 다시 한 번 뒤바뀐 것이다. 1870년 제2 제정이 폐지되고 제3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파리가 프로이센에 포위당하자 임시 정부는 파리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지만 극심한 굶주림 끝에 민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 항복하였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겼다.

 

1871년 1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마침내 독일이라는 하나의 통일 국가가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이 탄생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감정은 처음부터 극에 달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6>

 

굴욕적인 강화조약과 빌헬름 1세의 베르사유 궁 즉위에 분노한 파리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스스로 총칼을 들고 프로이센에 맞섰다. 이들은 최초의 노동자 권력인 코뮌 정부(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동맹)를 구성하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두 달간 자치정부를 수립했던 파리코뮌은 프랑스 임시정부와 국제 연합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파리코뮌은 처음에는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성격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자 부르주아의 대응도 달라졌습니다.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불과 두 달간 유지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완전한 의미에서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10시간 노동, 야간 노동 철폐, 정교 분리, 여성 참정권 보장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요구를 내놓았습니다. 몽마르트 언덕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코뮌 군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군, 독일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벨기에 군, 영국군이 나섰습니다. 프랑스 정부군만으로 진압하기 어려워 국제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장악한 모든 나라가 참전함으로써 ‘국제적 연대를 통한 폭력적 응징’이라는 상징적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p408 <역사 고전 강의>”

 

파리코뮌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소위 민주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폭력진압의 한계를 깨달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도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계급 갈등을 완화해 보려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가난한 자들이 지배하는 정치라는 뜻으로 통용되었다. 부르주아가 선호하는 체제는 보통선거 없는 정치 시스템으로서의 자유주의였다. 그런데 더 이상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힘들어지자 부르주아들은 헤게모니를 유지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미국의 상원 제도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노동자 농민이 계급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사상적 회유도 시작하였는데, 그 방법이 소위 포퓰리즘이다.

 

프랑스 혁명의 100년은 제 3계급과 제 4계급이 함께 구체제를 무너뜨린 후, 그 성과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대립한 끝에, 결국 제 3계급이 승리하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그러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제 3계급만큼이나 제 4계급도 성장하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노동자들도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등장

 

 

부르주아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이중의 혁명을 통해 마침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앙시앵 레짐은 무너지고 자유주의에 기반 한 근대 민족국가가 수립되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이상은 자유와 평등이었지만, 부르주아지가 원한 자유는 사적 소유의 자유였고, 그들이 원한 평등은 구체제의 특권계급과 부르주아 사이에서의 평등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운 민중들, 재산이 없는 제4계급은 자유와 평등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자신의 몸을 팔아 노동을 할 자유와 굶어죽을 자유 사이에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권선언이 명시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이념은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일 수는 없었다. 제 4계급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도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1792년의 국민공회, 1832년의 6월 봉기, 1848의 6월 반란, 1871년의 파리코뮌 등은 제 4계급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려 했던 실패한(혹은 잠시 성공한) 봉기들이다. 이때마다 부르주아지는 민중들을 철저히 탄압했고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국가를 확고히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만큼 프롤레타리아트,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공장제 기계공업은 다수의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인클로저와 기계제 농업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어와 저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부랑자가 되었다. 자본의 발전은 노동자를 양산했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64>

 

도시는 몰려드는 노동자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도시는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의 공간이었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불빛이, 한편에서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공간이기도 했다. 청년 엥겔스(1820~1895)는 산업혁명의 도시 맨체스터를 관찰하여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썼다. 맨체스터의 노동자는 19세기 서구 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맨체스터의 공간 배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간 배치와 계급 구조는 서로 대응합니다. 노동자 계급은 화려한 상점 뒤편에, 중간계급은 도심과 교외 중간에, 상층 계급은 교외 지역에 삽니다. 간선도로는 상층계급이 사는 교외를 도심과 곧바로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사업 지역이 왼편과 오른편에 숨어 있는 냉혹한 비참함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항상 나의 계급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나의 계급적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사는 것이 근대인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대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계급적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외부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사는 곳’입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337 ”

 

10여 년 전에 유행했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는 광고가 생각난다. 역겨운 광고였지만 현대사회가 여전히 근대사회의 자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 보았던 것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의 살인’ 행위이다. 굶주림, 불결한 위생, 질병 등으로 노동자들은 실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고 일찍 죽었다.

 

“리버풀에서 1840년에 상층계급, 젠트리, 전문인들의 평균수명은 35세였으며 사업가나 좋은 직장을 가진 수공업자의 경우는 32세, 기능공, 막노동자, 서비스 노동자의 경우는 15세였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사망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주로 노동자계급 자녀들의 높은 사망률 때문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349 ”

 

도시 노동자 자녀들의 사망률은 농촌 지역의 사망률보다 높았다. 5세가 되기 이전에 죽는 비율은 농촌이 32%인데 맨체스터가 54%였다. 산업의 발달로 농촌에서 부랑자로 떠돌던 이들이 도시로 와서 도시빈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엥겔스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총 봉기하여 부르주아지가 타도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까닭은 부르주아지가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 계몽주의,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최소한 300년 이상의 발전과정을 거치며 부르주아지는 19세기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자본주의시대를 대표하는 심성구조는 경쟁이다. 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부르주아지 역시 경쟁과 불안에 시달린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불안도 늘어난다.

 

“부르주아계급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주인인 체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19세기 말에 나타난 세기말적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끊임없는 혁명은 불안을 낳아 놓습니다. <역사고전강의> p396 ”

 

“화폐를 매개로 한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노동자의 삶은 한마디로 불안정해졌습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경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제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정성이 노동자들의 심성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404 ”

 

매년 바뀌는 스마트폰, 가전제품들, 인턴제, 비정규직, 기간제 ... 등등,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았던 시대와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경쟁과 그로 인한 불안과 우울은 근대로부터 계속되어온 현대인의 만성 질환이다. 'Modern Times'는 하나의 시대임이 틀림없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와 비참한 노동 현실은 평등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열망을 낳았다. 억눌린 노동자들의 불만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탄생시켰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해 역사적 필연에 의해 부르주아지는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에 일어난 혁명을 계기로 나온 선언문입니다. 1848년 2월 28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곧이어 3월 2일에는 남서부 독일, 3월 1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에는 베를린, 3월 12일에는 빈, 3월 18일에는 밀라노에서 연쇄적으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이러한 혁명의 영향을 받은 20대 후반의 열혈 청년들이 쓴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은 금세 수그러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는 유래 없는 호황기였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대호황 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로 경제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최저점을 찍습니다. <역사고전강의> p309 ”

 

<공산당 선언> 자체는 1848년에 그다지 한 역할이 없다. 혁명이 금세 잦아들었고 경제적 호황이 계속되었으며, 1848년 6월 파리 봉기가 실패한 이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였다. 이때부터 공산당 선언의 정식들은 노동운동의 창출을 뒷받침했고 수 많은 정치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공산당 선언>의 예언이 빗나가고, 지구상에 실질적인 사회주의가 거의 종식된 오늘날에도 <공산당 선언>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 왜냐하면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짧은, 그러나 아직 누구도 능가하지 못한 묘사 때문에라도 고전으로 남을 것” 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 그런 것처럼 <공산당 선언> 역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로 남아있다.

 

“마르크스는 근대 경제의 무제한적인 힘과 지구적인 확장력을 처음으로 환기했다. 그는 세계시장의 등장과 근대산업의 비할 데 없는 생산력의 해방이 채 한 세기도 못 되는 시간에 낳은 놀라운 변화를 처음으로 그렸다. 또한 하나의 현상으로서 근대 자본주의가 지닌,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고 부단히 들떠 있는 미완의 성격을 묘사했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새로운 욕구와 그 충족 수단을 발명한다는 것, 물려받은 모든 문화적 관습과 믿음을 전복한다는 것, 신성한 것이건 세속적인 것이건 모든 경계를 무시한다는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계이건 남성과 여성의 위계이건 부모와 자식의 위계이건 신성시 되는 모든 위계를 흔든다는 것, 모든 것을 판매 대상으로 전환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공산당 선언> 서설 p12”

 

자본주의가 모든 위계를 흔들고 새롭게 확립한 위계는 단 하나이다. 資本. 돈이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부르주아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고 경건한 외경심으로 올려보던 모든 직업에서 그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이 지불하는 임금노동자로 바꾸었다. <공산당 선언> p231”

 

“일련의 예스럽고 유서 깊은 편견과 의견으로 무장한 경직되고 얼어붙은 관계들은 모두 쓸려나가고, 모든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은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더럽혀지며,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생활 조건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냉정히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산당 선언> p232”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우리 역시 의미도 모르면서 2G, 3G, 4G 등등 자고나면 바뀌는 세상을 쫓아 살아야 한다.

 

지난 것만 잘 맞춘다는 유명 점쟁이들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실상을 적확하게 표현해 준 것에 지나지 않을까?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른 레닌-스탈린주의는 70여 년 정도의 실험 끝에 실패했다. 그러나 답이 틀렸다고 문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분명 200년 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남겨진 과제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법을 찾는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노동자계급의 지위도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과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꾸준히 향상되어 왔다. 영국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이후 1차로 선거법을 개정하고 도시 상공인 층에게도 선거권을 주었다. 그래보았자 전체 인구의 4.5%에 지나지 않았지만. 1837년에는 영국의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요구하며 차티스트운동을 벌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탄원서에 서명하였지만 영국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탄압하였다. 차티스트운동은 실패했지만, 계속적인 노동자 투쟁을 이끌어내었다. 2차 선거법 개정은 1867년에 이루어졌다. 선거권이 대다수의 도시 노동자와 소시민 계층에까지 확대되어 유권자는 전체 인구의 9%가 되었다. 영국의 선거법이 21세 이상의 남녀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준 것은 1928년에나 와서 이다. 선거권의 확대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자 ‘위험한 계급’인 노동자들을 국가 체제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동자 자녀들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제공하고,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노동조합 활동도 점차 합법화하였다. 이런 변화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져온 성과인 동시에 계급 갈등을 완화하려는 국가 정책이기도 하였다. 이런 양보가 가능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이윤이 들어오기 때문이었으며 그 이윤은 식민지 민중들의 피와 땀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검색을 해보면 이런 질문이 많다. 나도 궁금한데 읽어봐도 별 명쾌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 교수가 펭귄 클래식 판의 <공산당 선언> 서설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정리해 놓았는데, 그 글을 기준으로 대략 살펴보려 한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국민공회는 급진적 공화주의를 추구했다. 공화주의의 최우선 가치는 평등이다. 부르주아들이 사적 소유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은데 비해 공화주의는 평등주의적 자유를 추구했다. 평등과 자유! 한 쌍의 부부처럼 찰싹 붙여 사용하지만 평등과 자유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자유를 추구하다보면 평등을 침해하기 마련이고, 평등을 주장하다보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프랑스 혁명이념이라 배웠지만, 부르주아지는 자유를 프롤레타리아트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급진 자코뱅이 몰락하고, 왕정복고와 제정, 입헌군주정을 겪으며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평등은 밀려나고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1830년 7월 혁명 때 급진공화주의자들이 다시 등장했다. 평등주의 공화국의 지지자들, 특히 인권협회 구성원들은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을 혁명에의 배신으로 간주했다. 학생들과 불만을 품은 장인들로 이루어진, 주로 파리에 기반 한 이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은 계속적으로 반란을 시도했고, 정부는 점점 더 억압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1835년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었고 이후부터는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금지되었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공화주의 반정부세력의 일부는 지하로 내려갔고, 다른 일부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1830년대 말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금지된 개념에 대한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대체물로서 ‘공산주의’를 제시했다.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사용되지만, 당시만 해도 공화주의는 위험한 이미지를 가진데 비해 공산주의는 온건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1840년대 초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합류하기 시작했다. 1830년대 말 전에는 이 두 입장 사이에는 공동 기반이 크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정치적이었다. 공산주의는 혁명적 공화주의 전통의 부활을 뜻했고, 평등이라는 대의를 특권의 파괴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총공격으로 확대하는 것을 뜻했다. 반대로 사회주의 -생시몽과 푸리에가 영감을 준 일련의 교조들 - 는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정치 형태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평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국가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보다 장기적으로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과학에 의해 가능해진 조화의 출현을 지향했고, 그 중간 과정에서 사회생활 및 경제에서의 경쟁과 ‘이기주의’에 의해 발생되는 ‘적대’의 용매로서 '결사‘나 ’협동‘을 지향했다. <공산당 선언> p38”

 

단적으로 공산주의는 정치적 평등을, 사회주의는 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회주의를 공화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통합시키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가 ‘평등의 열망’과 결부되는 공화주의적 뿌리와 분리되어 ‘사회문제’의 일부로 다시 자리매김 되면서 발생기에 있는 정치 외적 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되었다. 따라서 1841년 5월 보수주의 <프러시아 국가신문>은 공산주의를 ”현대사회의 산업적 궁핍“과 연결시켰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행하고 광기에 찬 계급의 비통한 외침“으로 정의했다. <공산당 선언> p39”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공산주의는 공화주의와 분리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관되었다는 것인데,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말하자면 슬럼가의 빈민, 부랑자, 하층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궁핍, 빈곤, 범죄와 연결되었다.

 

“슈타인의 설명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한데 묶여, 둘 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형성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주의는 노동문제에 대한 과학적 응답이 되었고, 이는 사회주의와 국가의 분열을 종식시킬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짝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체현되어 있으니,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지와 재산의 결여에 내몰려 실현 불가능한 항구적 재분배를 추구하고 부정의 순환 속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공산당 선언> p39”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1840년대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유재산에 적대를 가진 극히 위험한 계급으로 인식되었다, 마치 유령처럼. 공산주의는 이런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의미였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의 산물이며, 그들에게 고용을 제공하는 공장들과 그들이 모이는 도시들에 의해 단련되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바이틀링이 불러냈던 것과 같은 대도시의 궁핍하고 뿌리 없는 빈민과 더 이상 함께 묶이지 않았다. 이 도시 빈민은 전적으로 별개의 부정적인 도덕적 범주에 처해져, 범죄적이며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정의되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분류되었다. <공산당 선언> p44”

 

<공산당 선언>으로 새롭게 탄생한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지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될 운명이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이 잃을 것이라고는 그들의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며,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p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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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계몽주의

 

 

18세기 프랑스는 유럽의 사회적· 정신적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어가 전 유럽의 궁정과 교양인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발전의 배경에는 영국이 있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상과 이념이 루이14세 사후(1715)에 프랑스로 밀려들어와, 전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영국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도 프랑스를 통해 전 유럽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 매개자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이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하다. 삼권분립은 그의 대표작, <법의 정신>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원칙이다. 삼권분립의 목적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

 

권력분립에 대한 이론적 구상은 몽테스키외의 창안이 아니라 로크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로크는 국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엄격히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명예혁명의 승리자(휘그당)다운 주장이다. 군주는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회가 결의한 법의 구속을 받아야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국가권력의 임의적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여기에 사법권을 추가했다. 사법권의 핵심은 독립성이다. 입법권은 계급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매일 싸우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만, ‘싸움’은 입법권의 본질이다. 근대국가는 계층(급)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에서는 국민 ‘화합’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지지하고 반대 정당을 헐뜯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대국가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p441 <인문고전강의>”

 

하지만 사법권은 속성상 특정 계급이나 직업이 독차지해서는 안 되며, 계급이익의 충돌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재판관이 입법자나 집행관이 되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가 위태로워지며 재판관은 압제자가 될 것이다.

 

 

볼테르(1694~1778)는 소설 <캉디드>의 저자이며, 계몽주의의 걸작 <백과전서>의 편찬자 중 한사람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축이 된 백과전서파는 학문과 이성을 무기로 구시대로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해방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종교와 철학의 시대는 과학의 세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백과전서>는 루소 및 볼테르의 저작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싹틀 틔운 가장 중요한 온상이었다.

 

볼테르는 역사철학의 창시자기도 하다.

 

“나의 목적은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지, 하찮은 사실을 무수히 열거하거나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인간이 어떤 단계를 거쳐 야만에서 문명 상태로 진보해 왔는가를 알고자 한다. p561 <세계 철학사>”

 

 

프랑스 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루소(1712~1778)는 ‘자연 상태’를 참된 낙원이라 생각했다. 루소는 성찰을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기형적 존재로 보았다. 예술과 학문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였다.

 

루소는,

“누군가 어느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땅’ 이라고 주장해 볼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 때 말뚝을 뽑아 버리고, 토지 둘레의 도랑을 다시 메우고는,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과실은 모두의 것이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은 파멸할 것이오!'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인류는 무수한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p573 <세계철학사>” 고 썼다.

 

소유, 정부, 권력은 자연을 떠남으로서 인간이 받게 된 재앙이다. 루소는 <사회 계약론>을 통해 탈출구를 제시하려 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국가가 발생하면서 권력이 창출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지배적 권력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발적인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적법한 지배의 기초는 오직 합의, 즉 자발적 동의뿐이다. 이러한 합의가 바로 사회계약이다. 여기서 개개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것을 내놓고 공동재산으로 간주하여 최상위의 지시체인 일반의지에 종속시킨다. 이렇게 해서 공적 인격이자 정신적 총합체인 국민이 발생한다. 국민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p575 <세계철학사>

 

개개인의 동의로서 구성된 권력은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권력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의지’이다. 그런데 일반의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투표이다.

 

투표의 결과는 곧 일반의지이므로 개개인은 투표에 의해 합의된 모든 법에 동의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채택된 법에도 복종해야 한다. 모든 국가 구성원의 의지가 곧 일반의지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아니라 반대의견이 채택되었다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투표는 내가 일반의지로 여겼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 뿐이다.

 

루소에게 사회계약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의지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루소의 요구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는 사회계약의 목적과 모순된 것이 아닐까? 루소의 영향아래 폭발한 프랑스혁명의 전개 과정은 사실 이런 모순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자유와 평등은 공포정치를 불러일으켰다. 일반의지는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강조했던 인민의 의지처럼 외설적으로 전도되었다.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절대권위를 지녔다. 일반의지는 개개인 모두의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복종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정이 되었고, 불복종자는 반동으로 낙인찍혔다.

 

"혁명을 불러 낸 것은 다름아닌 그의 정신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내적 모순 역시 이미 루소의 사상에 예비되어 있었다. 절대적 개인주의에 대한 루소의 요구는 -루소의 확신과는 달리- 《사회계약론》 제2부에서 제기되는 요구, 즉 일반의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요구와 끝내 해소되지 않는 모순 관계에 있다. 루소는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국가 종교에 대한 일체의 위반 행위가 죽음이나 추방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러한 복종을 강조했다."  p579 <세계철학사>

 

어쨌거나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것은 자연적으로 부여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제1조는 루소의 천부인권사상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1조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0>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을 동경한 루소가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자라는 사실이 사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상당히 인공적인 성격의 자연 즉 이성과 거의 동일시되는 자연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루소의 자연상태가 원시 자연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이런 특성은 그를, 18세기 정신에 반발하여 나타난 19세기 모든 정신운동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질풍노도와 낭만주의, 다양한 종교적 개혁은 모두 루소를 원조로 하고 있다.

 

루소는 독일의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마지막 수호신인 동시에 지극히 신랄한 비판자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단적으로 말하면 근대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특히 프랑스혁명)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이중의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계급은 ‘19세기의 주인공’ 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10년, 25년, 100년 단위로 살펴볼 수 있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1789년 5월 삼부회 소집부터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의 군사 쿠데타까지이다.

 

프랑스혁명을 25년으로 볼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는 1815년까지이다.

 

혁명을 100년의 긴 호흡으로 말할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고 제3 공화정이 들어선 1870년대 까지를 가리킨다.

  

 

 

프랑스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혁명과 반동,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며 공화정 - 제정 - 왕정 - 공화정 - 제정 - 공화정의 긴 역사를 걸어왔다.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은커녕 고통과 혼란만 보았을 수도 있고, 반동과 퇴보에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전진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혁명의 발단은 언제나 세금이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을 보면 유럽은 항상적 전쟁상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1453년부터 현재까지 패권투쟁의 역사’ 이다. 루이14세가 잦은 전쟁과 사치로 재정의 곤란을 겪었다지만, 18세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는 7년 전쟁(1756~1763) 패배 이후에도 미국의 독립전쟁(약 1775~1781 )을 지원하며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다. 국가재정은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루이 16세는 1787년에 귀족과 성직자를 대상으로 명사회를 소집했다. 농민이 세금을 내는 능력에 한계가 왔음을 알리고 특권신분에도 과세하는 안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789년 5월에 삼부회가 소집됐다. 1계급은 성직자, 2계급은 귀족, 3계급은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제3계급에 속하는 평민은 주로 부르주아들이었다. 관료, 은행가, 금융업자, 법률가, 기업가 등 신분으로는 평민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도 제3계급에 속했다. 제3계급은 반귀족적이거나 급진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지배계급으로 편입하고 싶어 했다. 제3계급은 세금을 내는 조건에 동의하는 대가로 평등한 투표권을 요구했다.(머릿수별 투표)  세금을 내는 대신 정치적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제1계급과 제2계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 평등은 특권의 폐지이고 그것은 신분제가 폐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삼부회의가 소집되는 과정에서 제3계급이 주도권을 잡았다. 제3계급은 특권계급과의 연대가 무산되자 제4계급과 결합했다. 교과서에서는 흔히 세 계급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네 개의 계급이 있었다. 유산자인 제3계급에 비해 평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제4계급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무산자였다. 당시 상퀼로트라고 불리던 제4계급은 독자적 조직력과 군중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투표권 문제로 1,2계급과 대립하던 3계급은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고 국민의회라고 칭했다. 국왕이 국민의회의 회의장을 폐쇄하자 이들은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테니스코트 서약이다. 이에 당황한 국왕파는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파리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 공격은 제4계급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혁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제3계급이었다. 삼부회의 이후 만들어진 국민의회도 제3계급이 이끌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국민의회는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제3계급은 가난한 민중들은(제4계급) 무식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이16세는 국민의회가 공포한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파리의 여자들이 대대적으로 베르사이유로 행진하여 국왕 일가를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이송한 이후에 인권선언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국왕 일가는 끊임없이 혁명에 반하여 오스트리아 등과 접촉을 시도했다. 마침내 1791년 6월에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향했지만 국경 근처에서 잡혔다. 바렌느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왕 탈출 사건은 남아있던 국왕에 대한 우호적 민심마저 이반시키고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한편 1791년 9월에 입헌군주정과 제한 선거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의해 구성된 입법의회에는 국왕을 지지하는 입헌군주파와 공화파인 지롱드와 산악파(협의의 자코뱅)가 서로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연합하여 입법의회를 압박하였고 입법의회는 혁명전쟁을 선포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을 지키려는 부르주아와 민중은 의용군을 만들어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반혁명 동맹군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 의용군이 전쟁에서 거듭 패배하며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16세 일가가 오스트리아에 프랑스 정보를 빼돌린다는 의심이 확산되자 1792년 8월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루이16세의 모든 가족들을 탕플탑에 유폐하였다. 

 

1792년 9월 발미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대한 반격에 성공했다. 혁명전쟁의 진행과 더불어 전투에 기여도가 높은 제 4계급(상퀼로트)의 정치적 권한이 강해졌다. 제4계급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 이끄는 산악파를 지지하였다. 1792년 9월,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산악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민공회를 구성하였다.  1793년 1월 루이16세가, 뒤이어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가 처형되었다.  

 

제1 공화정은 자코뱅(광의의 자코뱅)의 한 분파인 산악파(협의의 자코뱅)와 제4계급이 결합하여 탄생했다. 국민공회의 핵심인물은 로베스피에르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마라, 당통과 함께 제3계급 출신의 산악파였다. 세계 역사에서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어도 지도자는 부르주아지나 지식인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체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철학과 지식에 접근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굳건한 연대만이 혁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의 각종 세력 중 로베스피에르 파가 가장 민중과 가까이 있으며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부르주아지들은 평등은 외면하고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민중이 요구한 것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자유였다.

 

국민공회는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인민주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제1 공화정은 공포정치의 시대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 백 명이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공포정치를 로베스피에르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공포정치의 가장 큰 원인은 주변의 왕정 국가들이 연대를 강화하며 프랑스를 고립시킨 것이다. 유럽 열강이 반혁명 연대를 맺자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결속할 수밖에 없었고 반혁명 혐의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무장한 예언자로 등장하면서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격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옹립했던 혁명적 군중은 국내에서는 제3계급이 중심이 된 온건파와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국외에서는 유럽의 왕정국가와 적대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고립되었고, 그 결과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절멸시키겠다는 의지와 혁명이 원하는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이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아주 강력한 내부 결집을 시도했습니다. p366~7 <역사고전강의>”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몽상가’가 아니라 ‘혁명적 집단 심성의 체현자’였다. 르페브르는 “그의 권력은 파리 대중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파리 대중의 공포정치”였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민중들이 그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체포되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7월이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떨던 반대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공안위원회의 반 로베스피에르 파가 주도했지만 이미 민중들의 마음도 로베스피에르를 떠나있었다. 파리시민이 그를 버렸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의 주도권은 다시 부르주아지에게 넘어갔다.

 

 

 

 

나폴레옹과 빈체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등장한 총재정부는 무능했고 혁명은 혼란에 빠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기 쉬운 것이 군부세력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전쟁 초기부터 발군의 전투 실력을 뽐내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지친 민중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나폴레옹은 재빨리 이 기회를 낚아챘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수호자일까? 반혁명 독재자일까? 지리멸렬했지만 1799년 당시 프랑스는 공화정 체제에 있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공화정 체제를 존속한 채 제1 통령에 올랐으나, 사실상의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마침내 1804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프랑스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박정희의 유신헌법이 그러했듯이 형식적 행위에 불과했다. 프랑스 제정은 혁명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자 퇴행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1789년부터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까지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이 혁명의 수호자, 혁명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현대 ‘민법전’의 효시인 ‘나폴레옹 법전(1804)’은 인민주권을 확고하게 법률화했습니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은 이념과 연줄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만큼 강력하게 혁명의 과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 관료제, 상비군, 경찰제도 등이 정착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했습니다. 이 체제는 급진파의 인민주권론, 초보적인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주의가 서로 어우러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라는 국민의식,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주권 의식, 국민들 각자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라는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근대정신의 주요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p365 <역사고전강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6>

 

나폴레옹은 체제를 역행시키기는 했지만, 혁명의 가치를 그대로 계승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선언했다.

 

“혁명은 모든 특권의 폐지, 즉 영주의 재판권 폐지, 낡은 농노제의 폐지, 봉건적 의무의 폐지를 뜻하며, 동시에 국가가 전 시민, 전 재산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 법전에 따르면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의 부르주아들뿐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나폴레옹은 혁명군의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 원정을 나섰다. 유럽의 부르주아와 민중들도 처음에 나폴레옹의 군대를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은 “나는 나의 법전을 받아들이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를 뿌리려 한다.”며 정복지에서 신분제와 농노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에는 혁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혁명의 파괴자로서의 나폴레옹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나폴레옹은 계속되는 전쟁을 통해 국내 정책과 위성국가들의 정책을 다듬어 나갔다. 1790년대 혁명파들은 구체제 시절 잃었던 프랑스의 대외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효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귀족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모든 동맹국에 봉건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했다. ( .....) 1808년 3월, 나폴레옹은 관직에 따라 직책이 정해지고 대를 이어 인계할 수 있는 귀족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귀족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후대에 국가에 큰 공헌을 하지 못하는 가문은 귀족에서 제외시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새 귀족들에게 분배해줄 영지로는 이탈리아와 저지대 지역, 그리고 독일 영토를 활용키로 했다. p274<Europe>”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군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서유럽 대부분을 프랑스의 손아래 넣었다. 그는 유럽 전역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갈수록 혁명군이 아니라 정복군, 학살자의 행태를 보였다. 점령지 주민들은 나폴레옹군에 격렬히 저항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 패배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1806년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원정에 나섰다가 패하였다.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가 깨어지자마자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해 일어났고, 나폴레옹은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패배한 후 1814년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하여 다시 유럽을 긴장시켰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유럽 전역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이다. 나폴레옹은 정복지의 농노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퍼뜨렸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나폴레옹에 대항해 형성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약탈자로 돌변하자 정복지의 주민들은 프랑스에 대항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초기 프랑스혁명군이 만들어졌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프랑스혁명군은 유럽의 반혁명연대에 맞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프랑스혁명 전만 해도 유럽은 별다른 민족의식이 없었다. 혁명 초기의 프랑스나 나폴레옹 원정 이후의 유럽 각국이나 모두,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촉발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7>

 

1814년 나폴레옹이 추방되자 승전국들이 빈으로 모였다. 2년에 걸친 빈회의에서 유럽의 왕정국가들은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기로 합의했다. 빈회의 이후로 성립된 유럽의 새로운 국제질서라고 해서 이것을 빈체제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다. 4국 동맹 혹은 신성동맹이 주축이 된 빈체제는 보수반동 체제로서 프랑스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려 하였다. 프랑스는 빈체제에 의해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복위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 역사의 흐름도 거꾸로 돌리기는 어렵다. 빈체제는 곧바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자유민족주의자들은 빈체제를 비난하며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스와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에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의 3장과 4장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 내가 읽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들

 

1. 두도시 이야기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58531

2. 고리오 영감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81872

3. 공산당 선언 http://blog.aladin.co.kr/753199155/7287110

4.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http://blog.aladin.co.kr/753199155/644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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