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을 이끈 빈체제는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였다.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가 부활하였고, 각국의 영토도 혁명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이 전파한 자유사상과 나폴레옹 군에 대항하며 싹튼 민족의식까지 꺾을 수는 없었다. 빈체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럽 각지에서는 자유주의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이 끈질기게 터져 나왔다.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1871년 파리코뮌까지, 인권선언이 명시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위하여 끈질기게 투쟁하였다. 영국은 수차례의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점차 투표권을 확대해 나갔다. 영국 노동자들의 차티스트운동은 당시에는 실패하였지만 보통선거제의 도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르며 노예를 해방하였다. 러시아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어려운 상태에서 차르가 앞장서 농노해방을 선포하였다.
19세기 자유주의 운동으로 뭉뚱그려지는 이 사건들은 사실 자유보다는 평등의 이념에 더욱 가깝다. 귀족들만 가지던 투표권이 부르주아에게, 도시 노동자에게, 그리고 농민들에게로 점차 확대되는 과정은 평등한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노예해방과 농노해방도 신체의 자유와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사실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를 의미한다. 이때의 자유는 평등주의적 자유가 아니다. 평등주의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명칭에서 평등을 숨기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일까...
“19세기 부르주아의 정치적 토대는 자유주의였습니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허용한다는 굉장히 좁은 의미의 시민적 자유주의입니다. 부르주아는 가난한 자들이 착취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그들에게 자유를 용납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대중 정치를 시도하면 부르주아는 가차 없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습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파리코뮌입니다. 부르주아는 또한 소유권과 지배권을 결합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소유권은 지상 최고의 원칙이므로 누군가 자신들의 소유권을 침해하려고 하면 곧바로 응징했습니다. 부르주아는 소유권을 통해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부르주아가 지배를 관철하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권력을 잡아 지배하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지배권을 가진 자본 권력을 통해 지배하고 있습니다. p400 <역사고전강의>”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는 나폴레옹의 정복 활동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나폴레옹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인식되면서 유럽 각국의 민중들은 나폴레옹에 대항해 하나의 민족으로 똘똘 뭉쳐 대항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민족주의 정신의 확산을 통해 19세기 후반에 각각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탈리아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서로마제국의 황제 칭호를 받은 카롤루스 대제가 814년에 죽자 프랑크왕국은 손자 세대에 세 개의 왕국으로 갈라졌다. 서프랑크 지역은 프랑스, 동프랑크 지역은 독일, 중프랑크 지역은 이탈리아로 발전했다. 프랑스는 15세기부터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있었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성장한 이탈리아는 14세기 르네상스를 주도할 정도로 부유하였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는데 비해 여전히 작은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마키아벨리(1469~1527)는 <군주론>을 통해 이탈리아를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그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은 300년도 훨씬 더 지난 1861년이 되어서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탈리아의 통일에는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정신을 고양시킨 마치니, 이탈리아의 두뇌 카보우르, 그리고 빨간 셔츠의 카리스마 가리발디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샤르데냐 왕국의 수상이었던 카보우르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이탈리아의 중북부를 통일하였다. 한편 가리발디는 전쟁을 통해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를 통일하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를 공화국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어떤 체제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이탈리아 전체의 통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샤르데냐 왕국에 그가 병합한 남부 이탈리아를 조건 없이 헌납하였다. 가리발디의 결단 덕분에 이탈리아는 마침내 1861년 샤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후 프로이센과 손잡고, 오스트리아가 장악한 베네치아와 프랑스 수비대가 지키던 로마교황령까지 병합하여 1871년에 통일을 완성하였다.
독일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6>
독일 영토는 9세기 동프랑크 왕국에서 비롯되었다. 동프랑크의 오토 1세가 962년 로마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부여받았고, 13세기 경(1254) 부터는 이 지역이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었다.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난 후 신성로마제국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어 300여개의 영방이 되었고, 1806년 나폴레옹의 침략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교황청과 함께 중세 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까지 세력이 미쳤다고 하는데, 실제적으로 통치는 영역별로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에 있지도 않으며, '제국'도 아닌 어떤 것이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왕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칭호를 얻기 위해 엄청 다투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독일지역의 전통적 강자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에 절대 왕정 체제를 강화했고 그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농노제를 폐지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프로이센은 독일지역의 신흥 강자로, 계몽군주 프리드리히2세가 절대왕정체제를 구축했다. 당시 프리드리히2세의 궁전은 탄압을 피해 도망 온 계몽 사상가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다. 새롭게 부상한 프로이센은 독일지역의 패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통일된 독일국가가 탄생한 것은 1871년이다. 독일은 다른 유럽국가의 근대화에 자극받아 꾸준히 통일국가를 이루려 노력해 왔으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라는 두 강자 사이의 대립과 독일의 통일을 꺼려하는 주변 국가들의 간섭에 의해, 통일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통일의 첫 단계는 프랑스 7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834년에 맺은 관세동맹이다. 독일의 경제적 통일을 가장 바랐던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안정되고 통합된 시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라인 강을 따라 하류까지 가는데 무려 37명의 영주에게 관세를 내는 상태로는 산업발전이 불가능했다. 관세동맹으로 독일내의 거래에는 더 이상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독일의 경제적 통일은 영주를 물리치고 부르주아들이 경제 주도권을 잡았음을 의미했다. 관세동맹은 프로이센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통일 독일의 헌법 초안을 마련한 것이다. 프랑스 2월 혁명에 자극을 받은 것인데, 당시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쟁점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 독일을 건설할 것이냐,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소 독일을 건설할 것이냐 였다. 오스트리아는 통일에 소극적이었고 독일은 소독일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의회에서 씌워주는 왕관으로 만든 통일독일을 거부했다. 프로이센이 선택한 방식은 철과 피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1862년 독일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지금 우리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철과 피, 곧 무기와 병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연설하였다.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으로 군사력을 증강한 프로이센은 통일의 방해 세력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연달아 물리치고 마침내 통일을 이룩하였다. 22개의 군주국가와 3개의 자유도시가 하나의 연방제국가로 통일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1871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했다. 프로이센이 이루어 낸 통일은 위로부터 진행된 국민 국가 건설이었다. 독일의 사례는 러시아나 동유럽의 자본주의 발전이 더딘 나라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독일과 이탈리아는 비슷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에 기반 했다는 점과 오스트리아 등의 이웃 국가들과 전쟁을 치른 후 통합했다는 점, 두 국가 모두 공화국이 아니라 제정 혹은 왕정 체제를 이루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다만 독일은 관세동맹이라는 경제적 통합 후 정치적 통합을 이루었고, 이탈리아는 정치적 통합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독일은 근대화의 후발주자였지만, 국가가 적극적으로 자본을 끌어 모으고 계획적으로 산업을 발전시켰다. 독일은 철도, 항만, 운하, 도로 등을 국가 주도로 건설하고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철혈정책을 위하여 대포 등 무기를 생산하는 크루프 공장을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가로 받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풍부한 석탄과 철은 독일을 최고의 철강 공업국으로 부상시켰다. 1880년대부터 벌써 AEG 등 튼튼하고 실용적인 기계들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탄생했다.
통일독일의 문제는 시민계층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이끈 군국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국가 아래 독일 시민계층은 권위에 무기력하게 복종했으며, 독자적이고 건전한 문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귀족계급을 뒤쫓는데 급급했다.
“독일에서는 근대에 대한 사유가 역사적, 지리적 요인 때문에 온전한 힘을 펼칠 수 없었다. 19세기 초 독일인들은 나폴레옹 군대를 통해 단기간에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설익은 이성적 사유는 해방전쟁이라는 목욕물로 계몽사상을 단호히 씻어냈다. 독일 부르주아지의 절대다수는 피히테와 아른트의 이상주의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재발견한 게르만 신화의 세계에 공감하며 그 속으로 도피할 뿐,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인식을 냉철한 기준에 따라 검토하기를 거부했다.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인문고전강의에서 재인용 p447>”
독일시민들은 프랑스의 혁명 정신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싸우느라 자유와 평등에 관한 정신까지 배척해 버리고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는 이런 시민들이 히틀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시민계급이 부패하면 그 사회는 파시즘으로 나아갈 위험이 큰 것이다.
러시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큰 나라이다. 20세기에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했다가 망하고 현재 열심히 자본주의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 정도가 러시아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다. 더한다면 레닌, 스탈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 정도?
각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단계가 아니라 세계사 속에 주요 국가들이 어떻게 등장해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도만 짚고 넘어가는 공부라, 러시아에 대해서도 강의에 나온 부분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만 짚어보려고 한다. 러시아 혁명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세계 대전을 공부할 때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농노해방까지만 살펴보겠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5>
중세 러시아 지역은 슬라브 민족의 키예프 공국이 이끌었는데, 몽골의 침략에 의해 망하고 킵차크한국이 세워지면서 1240년대 이후 약 2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경에는 변방의 작은 나라 모스크바 대공국이 성장해서 군주인 이반 3세가 스스로를 차르라 칭할 정도가 되었다. 차르라는 칭호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부르던 러시아어인데, 1453년 비잔티움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이반3세가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녀를 아내로 삼고 자신이 비잔티움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차르를 사용했다. 그러나 유럽의 국가들은 차르를 인정해 주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러시아는 유럽 밖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러시아가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러시아 제국이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은 17세기 표트르 대제(1682~1725) 때이다.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서유럽을 본떠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베리아로 세력을 확장하여 청과 충돌하였고, 결국 네르친스크조약을 통해 청과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표트르 대제를 계승한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는 러시아의 세력권을 크게 확장하였다. 시베리아를 넘어 바다 건너 알래스카를 획득하고, 남으로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폴란드를 분할하고 계속해서 동유럽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는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지 못해, 절대왕정 체제에 필요한 재정을 귀족 지주층으로부터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봉건적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국왕은 아끼는 신하에게 4~5만 명의 농노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러시아 국민의 절대 다수는 여전히 농노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9세기 러시아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1825년 일군의 귀족 청년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봉기했다. 이들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헌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유주의 사상을 탄압하였다. 치세 말년에는 오스만제국과 크림 전쟁을 벌였다. 크림전쟁은 알렉산드르 2세 즉위 후에 러시아의 패배로 끝이 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60>
크림전쟁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2세는 본격적인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1861년 마침내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국민 대다수가 농노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필수요건인 산업이 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노 해방령으로 당장 농노들의 처지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4700만 명의 농노가 해방되었는데,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에 대한 보상금을 받은 반면, 농노들은 자신이 받은 토지에 대해 49년에 걸쳐 땅값을 갚아야 했다.
근대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2세는 나로드니키에 의해 암살당했다. 나로드니키 즉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자 아나키즘, 니힐리즘 등에 빠지면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은 차르들은 자유주의를 탄압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했고, 러시아는 점점 혼란에 빠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61>
하지만 혼란 속에서도 산업화는 진행되었다. 1891년 착공된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1916년에 완공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제국주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73>
1870년대를 거치며 자본주의 체제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우리가 어릴 때 제2의 산업혁명이라고 배운 이른바 중화학 공업이 탄생하였다. 석유, 전기, 내연기관과 강철, 합금, 비철금속 같은 새로운 재료가 나오고 유기화학 공업도 등장하였다. 중화학공업은 자본주의 후발국인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독일의 크루프 공장은 새로운 강철 제조법을 개발하여 놀라운 성능의 총과 대포를 생산하였다. 철강 왕 크루프는 귀족 작위를 거절할 만큼 자본가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다.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자 새로운 원자재를 얻기 위한 식민지가 필요했고, 더욱 발달한 기술로 대량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 또한 더욱 많이 필요해 졌다. 2차 산업혁명이 제국주의적 경쟁 즉 팽창주의적 무역 경쟁을 촉발했다.
“국가단위의 경쟁 즉 제국주의가 시작되면서 1876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단 6개국이 지구 영토의 1/4 을 나눠 가졌습니다. 또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강력한 국가가 대두하고 보호무역주의가 등장했습니다. p411 <역사고전강의>”
세계가 분할되고 더 이상 ‘비어 있는 땅“이 없게 되자, 제국주의 국가들은 다른 나라가 차지한 식민지까지 넘보게 되었다. 근대 서구사회의 종말이 전쟁으로 귀결될 위험에 처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72>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것은 1859년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을 통해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진화론의 핵심은 경쟁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적자생존’은 환경의 변화에 우연히 가장 잘 적응한 종이 살아남는 다는 것이지, 종들끼리의 경쟁을 통해 강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 아니다. 추운환경에서는 맘모스 같은 큰 동물이 가장 적합하다. 그렇다고 모든 종이 다 몸집을 불린다면 급작스럽게 지구 온도가 상승할 때 살아남을 생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물은 늘 변이를 통해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우연한 유전자의 변이가 다양성을 낳은 것이다. 이렇게 다양해진 생물 중에 어떤 생물은 특정한 환경의 변화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윈이 말하는 적자생존이다. 변이가 다양성을 낳고 다양성이 환경변화에 대한 적합성을 높인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면서 경쟁을 통한 강자 생존이라는 ‘사회 진화론’이 등장했다. 진화론의 오용인 셈이다. 사회진화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 경쟁과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우월한 사회나 국가가 열등한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사회진화론자들은 주장하였다. 사회진화론은 또한 인종주의로 발전하여 백인과 유색인 사이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하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것 역시 타율적 근대화 즉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논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