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KBS 다큐멘터리 <문명의 기억, 지도>는 매우 유익하다. 세계사 공부를 일단락하고 덧붙여 세계지리를 간단히 훑어보고 있는데, 그 첫 부분이 동서고금의 다양한 세계지도들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총 4부로 되어 있는데 나는 <1부 달의 산>이 가장 재미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혼자 보기는 아까워서 스터디 팀에 소개하고 아예 한 주를 잡아 토론을 하기로 했다. 스터디 준비를 하면서 다큐를 다시 보았고, 보는 김에 대강이라도 정리해 두기로 했다. 4부는 이것저것 끌어 모아 구성이 산만하고 별 깊이가 없어 생략하고 1,2,3부만 정리했다.

 

 

 

1부 달의 산

  

 

<1부 달의 산>은 1402년 조선에서 그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미스터리를 밝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작은 단서를 실마리로 찾아가는 그 과정은 마치 추리극과 같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한국사 강의에서 처음 본 지도다. 중국과 우리나라만 커다랗게 그려놓은 것이 너무 우스워 사실 자세히 보지도 않고 무시했던 지도다. 물론 한국사 시험을 대비해 ‘현존하는 동양의 최고 오래된 세계지도’ 라는 것은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세계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도라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이 온전한 형태로 그려진 세계 최초의 지도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 옆에 딱 붙어 잘 구분되지 않는 인도에 비해 아라비아반도와 아프리카는 매우 분명하게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발견하기 약 100년 전 무렵에 바다로 둘러싸인 아프리카 남단의 모습이 정확히 그려진 것이다. 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파로스 등대도 표기되어 있다. 중국 너머로 나아가 본 적이 없는 조선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그 비밀의 열쇠가 바로 “달의 산” 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지도 오른편 부분에 긴 강줄기가 내려와 두 갈래로 갈라지고 그 아래로 몇 개의 산들이 그려져 있다. 캡춰 화면이 희미해 잘 보이지 않는데, 다음 확대된 화면을 보면 산의 모습이 분명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물론 “달의 산”이란 표기는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자막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달의 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명국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현재 일본에 있다. 일본 학자들이 십여 년에 걸쳐 복원 작업과 연구를 하고 있는데 현재 5000개 정도의 지명을 찾았다고 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필사본이라 알려진 “대명국지도” 역시 조선에서 만든 것인데 현재 일본에 있다. 대명국지도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복원하지 못한 뚜렷한 지명이 하나 보이는데 “저블로함마”라는 언뜻 뜻을 알기 힘든 단어이다.

  

  <대명국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저블로함마는 아라비아어 “자바랄까마르”의 음차라고 한다. 자바랄까마르가 아라비아어로 바로 달의 산이다. 조선의 지도에 어떻게 해서 아라비아어가 등장하는 것일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순전히 조선에서 그린 지도가 아니다. 중국 너머의 세상을 모르는 조선이 아프리카를 상상해서 그려 넣을 수는 없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원나라의 “혼일강리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합쳐서 만든 편찬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도의 지명들도 모두 원나라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그런데 중국의 혼일강리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나라 지도에 아라비아어를 음차한 지명이 있는 것은 충분히 그럴 듯하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이슬람인들 즉 색목인을 매우 우대했다. 색목인은 몽골이 유라시아를 정복하는데 적극 협력하여 길잡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원나라의 관리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해안선이 매우 정확하게 그려진 것을 보아도 이 지도에 이슬람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아랍은 7C부터 바닷길을 개척했고 8C에는 바다를 이용하여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과 우리나라까지 도착했다. 원나라 역시 바닷길을 중시했다.  유목민족이라 해상무역을 등한시 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원나라는 대운하를 정비하여 해상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다. 항저우, 취안저우, 광저우 등의 항구도시가 이때 번영하였다. 원은 대운하로 내륙의 물건을 실어 색목인의 도움을 받아 아랍인의 바닷길을 이용해 동서무역을 전개했을 것이다. 이런 활동들이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정교한 해안선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달의 산으로 돌아가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있는(추정되는) “저블로함마”는 이 지도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알 이드리시 지도는 1154년에 만들어진 이슬람의 대표적인 지도이다. 세계지도 한 장과 지역도 70장으로 구성된 지도책인데, 심지어는 신라도 섬으로 그려져 있다. 남북을 뒤바꿔 그리는 이슬람 지도의 특성상 위쪽에 보이는 대륙이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서 단연 눈에 뜨이는 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보았던 두 줄기의 강과 그 끝에 있는 산이다. 언뜻 보면 낙하산처럼 보이는 저것이 물론 달의 산일 것이다. 확인해 보자. 

  

<알 이드리시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산의 위쪽에는 아라비아어로 “자바랄까마르” 즉 “달의 산”이라는 표기가 선명히 남아있다. 하지만 비밀의 끝이 알 이드리시 지도는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의 아랍어 번역본의 아프리카 부분 >

 

이슬람세계는 또 하나의 유명한 세계지도를 가지고 있다. 820년에 아랍어로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다. 알 이드리시 지도의 “자바랄까마르”는 프톨레마이오스지도의 번역본에서 나온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슬람은 중세 유럽이 무시했던 그리스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꾸준히 발전·전파시켰다. 9C에 아랍인은 유클리드 기하학도 번역해 놓았다.

  

 

AD150 년 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린 세계 지도이다. 그의 「지리학」에는 한 장의 세계지도와 26장의 지역도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2부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한마디로 인류가 그린 최초의 가장 멋진 세계지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의 주제인 달의 산에 집중해 보자.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아프리카 지역도에 지금까지 계속 보아서 익숙해진 그림이 있다. 달의 산이다. 그리스어로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는데 대강 “lune monf." 를 보면 lunar mount가 연상된다. 달의 산이다.

 

먼 길을 왔다. 1402년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달의 산은 약 1250년 전인 AD 15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린 바로 그 산이었다. 이 달의 산을 중세 암흑기에 보존하여 전파한 것은 이슬람이었고 조선은 원을 통해 획득한 정보들로 가만히 앉아서도 아프리카의 모습을 실제처럼 그려넣을 수 있었다.

 

달의 산은 현재 우간다에 있는 르웬조리산이라 추정된다. 르웬조리산은 지역민들에게 나일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나일강은 달의 산에서 발원한 두 물줄기가 합쳐져 지중해로 흘러가는 길고 긴 강으로 고대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집트 문명의 근원을 달의 산이라 해도 될 것 같다.

 

 

 

2부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AD 90년 경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며 AD 168년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이라고 할 때의 그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인데, 지리학에도 뛰어났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를 다큐에서는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왜 그를 그리스인이라고 할까?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는 기원전 수 천 년부터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BC 6C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병합된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여러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BC 4C에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그리스계(마케도니아계) 왕조가 세워졌다. 기원 시작 무렵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로마제국에 속했다. 7C부터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여러 이슬람 왕조들을 거쳐 지금까지도 이슬람세계에 속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리학」을 쓴 AD 150년 경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 시민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리스인이라고 한다. 당시 로마의 통치 방식과 로마 속주에 대한 명칭을 잘 몰라서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당시 이집트는 로마 통치 아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상세한 삶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회 일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인인데, 그가 속한 곳은 이집트였고, 시대는 로마제국 시기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하면 떠올리는 그 폴리스 국가들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사실 중요하다. 헷갈릴 수 있으니까.

 

  

 

각설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그리스의 자연과학과 로마의 동방 바닷길 개척이 결합되어 탄생한 고대의 걸작이다.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미 지구가 구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확인했다. 그리스의 천문학과 수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곡선으로 표현했다. 경도와 위도처럼 위치를 나타내는 수치도 가로와 세로 선에 기입해 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는 서로 아프리카부터 동으로 중국까지 그려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도양이 말레이반도에 의해 닫혀있다는 것이다. 믈라카 해협을 넘어 또 다른 바다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왜 이렇게 그렸던 것일까? 그 답은 당시 로마가 개척한 동방 바닷길에 있다.

 

로마는 동양과의 교역에 주로 육로를 이용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 로마는 가는 곳마다 길을 닦았고 그 길은 유럽 서쪽 끝에서 인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조의 후예인 페르시아 유목민들이 기세를 불리면서 육로가 불안해졌다. 로마는 동양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로마가 선택한 길은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쳐 인도의 남서 해안을 돌아가는 바닷길 이었다. 그 흔적으로 인도 남단 지역에는 로마 시대에 전해진 가톨릭이 계승되어 오고 있다.

 

인도양으로 나아간 로마는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당시 항해술과 바닷길의 상태는 로마가 믈라카 해협을 넘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로마는 말레이 반도와 아시아 대륙을 잇는 크라 지협에서 배를 내려 코끼리를 타고 육로로 나아갔다. 베트남을 통과해 로마가 도착한 곳은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 때였고 역사서 「후한서」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AD 166년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신이 처음으로 베트남을 거쳐 중국에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로마는 직접 바닷길을 개척하여 중국과 무역을 함으로써 동양의 끝에는 중국이라는 “비단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과 바다는 말레이반도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는 경험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는 이러한 로마의 경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제작이 AD 150년 경으로 추정되는데 반해 「후한서」는 최초의 로마 사신이 AD 166년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로마의 중국 방문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연대기적으로 조금 안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다큐는 그냥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뭐 워낙 추정치이니까 하고 나도 은근슬쩍 의문을 누른다.

 

AD 150년 경이라는 고대에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과 항해 자료를 바탕으로 놀라운 지도를 만들었지만, 이 지도는 곧 유럽인의 머리에서 지워졌다.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는 모두 성경을 바탕으로 하느님이 창조했을 법한 세계를 상상으로 그렸다. TO 지도라고 하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와 비교해 보면 그 퇴보가 놀랍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르네상스와 함께 말 그대로 부활했다. 비잔티움제국이 멸망하자 다른 많은 자료들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도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이렇게 유럽에 다시 등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라고 할 정도다. 콜럼부스는 이 지도를 가지고 항해를 떠났으며 지구가 구형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3부  프레스터 존

  

 

 

세계사 공부를 하면서 유럽의 신항로 개척의 동기 중 하나로 프레스터 존 전설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신항로 개척의 가장 큰 이유는 동방의 향신료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시덥 잖은 전설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떠돈 소문 정도로. 그런데 3부 <프레스터 존>은 그 전설의 실체를 파헤치며 그것이 당시 유럽을 얼마나 떠들썩하게 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유럽에는 두 번의 시대에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선 역사가 있다. 둘 다 이슬람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가 1144년 이슬람의 침입 때이다. 아브라함의 탄생지인 샤르우르파가 함락되자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그 직후인 1145년에 동방에 기독교 왕국을 세운 프레스터 존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프레스터 존이 예루살렘을 도우기 위해 왔다가 티그리스 강에 막혀 돌아갔다는 주교의 보고가 교황청에 올라왔다. 프레스터 존이 쓴 편지라는 것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교황청은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서기로 했는데 그때가 마침 몽골이 유라시아를 휩쓸기 시작할 때였다. 유럽은 몽골이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 아닐까 하고 사신을 파견했지만 몽골의 칸으로부터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원나라에서 활동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프레스터 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럽에 또 다시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부활한 것은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키면서 부터다. 오스만제국을 물리치기 위해 유럽은 또다시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섰다. 이 다큐에 의하면 그것이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을 하게 된 동기이다. 하지만 보통은 다르게 설명한다. 물론 오스만제국 때문이긴 하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자 동방 무역이 어렵게 되었고,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동방의 향신료를 얻기 위해 유럽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이것이 신항로개척의 이유라는 것이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포르투갈이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서기 위해 만든 프라마우로 지도이다. 1459년에 만든 이 지도에는 프레스터 존 왕국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에티오피아이다.

  

 

<프라마우로 지도의 에티오피아 부분>

 

에티오피아에는 프레스터 존이 세운 금은이 가득한 왕국이 있었을까? 포르투갈의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도 프레스터 존을 찾아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에티오피아로 항해했다고 한다. 그의 일지 곳곳에는 프레스터 존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일지>

 

당연히 에티오피아에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은 없었다. 유럽은 끝내 프레스터 존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프레스터 존은 네스토리우스파라고 알려졌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주교로 431년 3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던 일파는 로마제국을 떠나 동방으로 건너갔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한때 동방에서 번성하기도 했는데 그곳이 당나라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635년에 당나라에 유입되었고 경교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질 만큼 성행했다. 781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중국에 전래된 경교의 역사와 활동이 적혀있다. 그러나 경교는 당말기에 탄압을 받아 쇠퇴하였다.

 

당나라의 장안에서 한때 꽃피운 네스토리우스파가 아마도, 동방에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7C 장안 곳곳에 세워졌던 경교의 교회가 수 백 년이 지나 유럽에서 신화로 부활했던 것이다.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유럽을 구원해 줄 부유하고 강력한 기독교 국가에 대한 믿음으로서. 

 

* 모든 캡춰 화면은 다큐에서 따온 것이다. 단 도표는 직접 그린 것이다. 

 

*지도에 관련된 좋은 글이 있어 링크해 둔다.

http://ppss.kr/archives/17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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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세계사 공부는 서아시아의 근현대사이다. 오스만제국의 근대 개혁과 오스만제국이 해체 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탄생된 아랍 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했다. 다음은 오늘 발표한 팔레스타인의 근현대사 요약본이다.

 

 

1. 팔레스타인 : 영토 이름에서 국가 이름으로 

 

1) 2012년 11월 UN, non-member observer state 승인

2) 영토 혹은 민족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혹은 대항해) 만들어진 것.

3) 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팔레스타인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1차 대전 후 1920년 산레모 회의 (패전국 오스만 해체) -> 영국의 공식 위임통치 : 1923~1948

 

2. 시온주의

 

1) 19세기부터 시작된 “시온의 언덕(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은유)”에 국가를 세우자는 유대인 민족운동

유대인이 유럽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기를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함

2) 기독교의 유대교 박해 역사

유대인이 예수 십자형 주장(교리상의 원수)

교황의 유대인 공직 추방(1078)->고리대금업

십자군이 유대인 약탈

레콘키스타 때 추방(무슬림과 동일 취급)

교황이 게토 강제 이주 칙서(1555)

3) 시오니즘의 가속화

19C 후반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포그롬)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이민물결 폭증

4)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1차 시오니스트 회의: 대표자 헤르츨

5)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팔레스타인 현대사 p67>

 

3. 오스만 제국 시기

 

1) 밀레트 : 종교 공동체

   a) 오스만 내의 비무슬림 종파들이 각각 종교․전통․습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자치권 승인

   b) 3대 밀레트 :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유대교회

   c) 이슬람이 준 선택은 코란, 칼, 지즈야

   d)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밀레트가 붕괴되면서 종교 분쟁화 및 민족운동화

2) 동방문제

유럽은 외교, 발칸반도는 민족, 오스만제국은 영토 문제로 인식

 

4. 영국의 삼중 외교 : 1차 세계 대전 전략과 사후 구상

 

1) 맥마흔(1915~6) : 아랍민족이 오스만과 전쟁을 도와주면 아랍 독립국 수립 약속

2)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

   a) 영․ 프․ 러 의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구상 -> 현대 중동의 탄생

   b) 영- 팔레스타인,요르단,이라크 / 프- 터키,시리아,레바논 / 러-흑해 동남연안 등

   c) 민족과 종교, 종파를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분할

   d) ex) 이라크 - 북부 수니파 쿠르드인, 중부 수니파 아랍인, 남부 시아파 아랍인, 동부 페르시아어 사용 시아파 무슬림

3) 밸푸어 선언 (1917) : 재정적 지원을 하면 유대인 국가 수립 약속

 

5. 영국의 위임 통치

 

1) 위임통치 : 사실상 식민정치

2) 산레모 회의(1920) :오스만과 승전국 사이의 협정

팔레스타인이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됨

3) 영국의 공식 위임 통치 기간 : 1923~1948

4) 맥마흔과 밸푸어가 충돌하며 영국 식민지 정책 혼란

5) 아랍인과 독일이 제휴할 것을 염려 아랍동맹 강화(1938) -> 밸푸어 선언 포기

6) 시오니스트가 미국과 동맹 (1942) : 미국 지지로 유대인 공화국 설립 선언

7)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 UN에 넘김

 

6. UN 이후의 팔레스타인

 

1)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안 (1947)

   a) 아랍인 국가, 유대인 국가, UN 신탁 통치 하의 예루살렘

   b)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2) 아랍인 vs 유대인 인구 변천

   a) 시오니즘 이전 : 90% 수니파 무슬림 Ref: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 -> 시오니즘 운동으로 지속적으로 토지 매입, 아랍인 부재지주 매매

   b) 크림전쟁(1853~6) 직전 : 50만 인구 중 기독교도 6만, 유대인 2만(4%), 오스만 제국의 병사와 관리 5만 , 유럽인 1만, 나머지 대부분은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72%) ref: 팔레스타인 현대사

   c) 밸푸어 선언 당시 (1917) : 무슬림 65만(82%),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8%) ref: 팔레스타인 현대사

   d) UN분할 안 당시(1947) : 아랍인 vs 유대인 = 2 vs 1

3) 팔레스타인인 추방

UN 분할안 발표 12일 만에 유대 땅 예정지에서 팔레스타인인 추방: 난민 시작

4) 이스라엘 국가 선포 (1948. 5. 14) : 미국, 소련 승인

5) 영국 위임 통치 종료 (1948. 5. 15)

 

7. 중동 전쟁

 

1) 1차 중동 전쟁 : 1948. 5. 15 발발 - 인종 청소와 난민 대량 양산

2) 2차 중동 전쟁 : 1956

3) 3차 중동 전쟁 : 1967

4) 4차 중동 전쟁 : 1973

5) 아랍국가의 패배 이유 :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분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비밀 협정

6)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7)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이 6일 전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8. 팔레스타인인 민족 운동

 

1) 목표는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 -> 상호 불인정

2)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 무슬림 형제단 -> 하마스

3) 1차 인티파다 (1987)

4) 오슬로 협정 (1993) : 상호 인정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5) 2차 인티파다 (2000)

   a)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b)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팔레스타인 현대사 p436>

6) 파타 vs 하마스

 

9. 이스라엘의 야욕

 

1) 이스라엘 분리 장벽 설치 : 2002년 이후 ~

2) 정착촌 확장 -> 팔레스타인 땅을 모두 이스라엘화

3) 2014년 백린탄 포격

「이스라엘이 31일 서안지구 베들레헴 남쪽 땅 400㏊(4㎢)를 강제 수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 감시 단체인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이 강제 수용할 땅의 규모가 지난 30년 내 최대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수용되는 땅에는 5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있다”며 “이번 조처는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전했다.」<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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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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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외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오래전에 한 번 갔던 유럽여행이 너무 피곤해서였을까.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강원도이건 강진이건 벚꽃이건 단풍이건 굳이 찾아다니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여행이나 구경이 전부 다 시들해 버렸다. 그래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은 있다. 이스탄불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거기에 놓여 있다는 다리를 화면에서 본 순간부터 이스탄불이 머리에 새겨졌다. 다리를 건너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 수 있다는 신비함은, 물론 관념이다. 육지와 육지를 잇는 바다 위의 다리는 많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바다 위를 달릴 수 있는 아주 긴 다리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라는 구분은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이스탄불의 다리 위에 선다 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다리를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다리 위를 달려보고 싶다. 관념은 인간만의 욕망을 부르니까.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술탄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 중 한 명이 살해된다. 오스만제국이라니, 너무 낯설지만, 몇 년 전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외국인이 본다고 생각하면 대충 감이 잡힐지도 모르겠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은 생소해도 1952년생 오르한 파묵이 쓴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인문주의가 가져온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욕망이다.

 

원근법을 개발한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은 세계를 인간의 눈이 보는 대로 그린다. 게다가 초상화는 개별적 인간, 인간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다. 오스만제국은 전통에 따라 신의 말씀에 따라, 세계를 신이 보는 대로 그려야 한다. 초상화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율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악한 그림이다. 그러나 술탄도 신을 두려워하는 화원도 자신의 초상화를 열렬히 욕망한다. 주체는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 (․․․․) 마치 인간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우월한 피조물이라도 되는 듯, 인간을 그림의 정중앙에 그려 넣고 그것을 우상처럼 벽에 걸어 놓습니다. 인간이 그 그림자까지 낱낱이 그려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피조물입니까? 어느 골목길에 있는 집들이 인간의 눈이 가진 미천한 지각 능력 탓에 갈수록 작아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세상의 중심에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 아닙니까? p2권 155”

 

“ (․․․․) 죽은 엘레강스가 입힌 금박과 테두리는 우리가 책의 한 장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창문을 통해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세상의 중심에, 술탄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그 순간 자랑스럽게 보았던 나의 초상화가 있었다. 며칠 동안 다시 수정하고, 거울을 보고 또 보고, 속수무책으로 안간힘을 썼지만 아주 조금만 나 자신과 닮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림은 모든 세상의 중심에 나를 그려 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사악한 이유, 즉 나 자신을 실제보다 더 심오하고, 복잡하고, 신비롭게 나타냈기 때문에 나에게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흥분을 느끼게 했다. 나의 세밀화가 형제들이 나의 이 흥분을 보고, 이해하고 나와 공유해 주길 원했다. 나는 술탄이나 왕처럼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내게 자랑스러움과 수치심을 동시에 주었다. 이 두 감정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며 나를 편하게 했다. 나는 이 그림에 있는 나의 새로운 위치로 인해 현기증 나는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쾌감이 완벽하게 되기 위해서는 유럽 화가들의 기예로 나의 얼굴, 옷의 주름들, 그림자, 뾰루지, 그리고 반점, 턱수염에서 옷감의의 짜임새까지 모든 부분, 모든 색들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림을 보는 옛 친구들의 얼굴에서 일종의 두려움과 경이, 그리고 우리 모두를 괴롭혔던 그 어찌할 수 없는 질투를 보았다. 그들은 머리끝까지 죄를 뒤집어 쓴 사람에게 느끼는 분노에 가득 찬 역겨움과 함께, 두려움과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p2권 328~9“

 

원근법에 대해 화원들은 이런 논쟁을 벌인다. (2권 p284)

 

“세밀화가는 자신이 본 것이 아니라 신이 본 것을 그리네.”

“그렇지. 하지만 숭고한 신께서도 우리가 보는 것을 보네.”

“신은 물론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 하지만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지각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신이 본 세계를, 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계는 신에게 어떻게 표상할까?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내린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신이 만든 세계, 물자체를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독단에 빠진다. 종교가 독단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신을 보았다고 하는 자들도, 신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자들도 인간이다. 인간의 지각에 경험된 신은 인간의 방식으로 지각한 신이다. 우리는 인간이 지각한 신이 신 자체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믿을 뿐이다.

 

서구 근대의 시작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신에 대한 앎으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바라보는 것, 신을 요청하는 것, 혹은 신에게 이르는 것, 그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근대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존재해도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차지한다. 르네상스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불리는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에 원근법과 초상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근본주의가 근대 문명과 충돌하는 것은 세계를 다시 신의 눈으로, 아니 신의 눈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서구가 거쳐 온 암흑기가 그들에게 눈부신 빛의 이미지로 부활한 것은 물론 서구 제국주의의 책임이 크지만, 신을 다시 중심에 세우는 것은 인간의 독단을 불러오는 퇴행이 되기 십상이다.

 

 

 

이스탄불은 그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상상을 할 수 있는 도시다. 벤치에 앉아 비잔티움제국 시대의 성소피아 성당과 오스만제국의 블루 모스크를 번갈아 바라볼 수도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유럽과 아시아를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 유럽의 역사와 아시아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이스탄불에 르네상스 예술이 일찍이 도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시대는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행하고 있었고, 터키의 세밀화는 그 전조를 재빨리 포착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에 의하면.)  물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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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고전 연속 강의 3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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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책으로 가장 기다리던 『철학 고전 강의』가 나왔다.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언젠가는 나올거라 생각했다.

철학자인데 인문고전과 역사고전만 강의하고,

정작 철학고전은 빼놓는다면 

마침표가 없어 결코 끝날 수 없는 문장이 되버릴 테니까.

 

체계없이 배운바도 없이

내키는대로 이 책 저 책, 철학책을 뒤적거린지 10년이다.

대개는 무슨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이 또 읽게하고 또 읽게하는

끌어당김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강유원의 철학 강의를 손꼽아 기다린 것은

내가 읽은 그 책들이 대체 무슨 말인지를

조금이나마 어떤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때문이었다. 

(물론 이 책의 바탕이 된 40주짜리 서대문 구립 이진아 기념 도서관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좋았겠지만)

 

40주짜리 강의를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일 주일 정도 걸쳐 읽었다.

열일을 제쳐두고 읽었더라면 이틀쯤이면 읽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만큼 술술 읽히기도 했고,

다루고 있는 주요 철학자가 다섯 뿐이어서

예상보다 가뿐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내용을, 전부는 언감생심이고,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우선 한 번 읽어 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식으로 쓰여졌는지 너무 궁금해서 먼저 후루룩 읽어 보았다. 

이제 정신을 모으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시 읽어야 한다.

정신을 바짝만 차리면

이제껏 내가 읽고도 맥을 짚지 못하고

단편 단편으로만 기억하고 고민하던 부분들을 조금은,

전체 그림 속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한다.

 

 

『철학 고전 강의』의 부제는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이다.

철학 중에서도 무한자에 대한 사유 즉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이다. 

 

형이상학은 

"간단히 말하면 한정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탐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한정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것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을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한에 대한 호기심과 요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무한에 대한 사유는

유한한 인간 자신에게는 불행한 의식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무한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희랍 철학자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

탐구했던 무한자에 대한 사유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섯 명의 철학자들에 관해

가장 중요한 부분(내가 이것저것 읽은 것들에서 생각하는 수준이지만)

짚어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과 존재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들 다섯 명 각각이 이룬 성과와 남긴 과제를

각각 어떻게 이어받아

어떻게 무한자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켜 왔는지를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강의에서 강유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항상 어버어버하면서 

상대는 알아듣지도 못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형이상학은 역사의 도저한 흐름과는 아주 무관한 사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본다면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이 형이상학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형이상학적 사유 원리의 전환이 시대의 큰 변화에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짐작을 확실한 앎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공부를 통해 이루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철학 일반에 대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형이상학이야말로 철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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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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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연을 쫓는 아이』를 읽은 적이 있다.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하지만, 읽으면서도 어느 나라의 이야기인지 잘 몰랐다. 그냥 낯설고 특이한 분위기 정도만 느낌으로 남아있다. 소설에서 역사적 배경이란 대개, 먼 산의 흐릿한 윤곽 같아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 배경이 우리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 느껴지는 이슬람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같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어제, 오늘에 걸쳐 읽었다. 처음에는 좀 지루했는데 1/3정도가 지나면서 바싹 마음을 졸이며 읽었다. 특히 역사적 사건에 눈을 부릅떴는데, 이번에는 여기가 어디인지 대충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소설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달 우리 독서회의 주제가 이슬람인데, 첫째 주와 두 번째 주는 이슬람의 역사와 IS, 세 번째와 네 번째 주는 소설이 선택되었다.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1965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서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틈틈이 소설을 써서, 2003년 『연을 쫓는 아이』, 2007년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발표했다. 이 소설이 번역된 2007년 현재(원작과 같은 해에 번역되다니!), 난민을 돕기 위한 NGO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15살 무렵에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여 난민생활을 했던 것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자 주인공 역시 비슷한 나이에 아버지뻘 혹은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질곡 속에 던져진다. 아프가니스탄 현대사는 아프가니스탄 민중 전체를 고통 속에 빠뜨렸지만 특히 여성이 겪은 수난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민의 반이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는 가택 감금 상태’에 놓이는데, 그 반이란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사회가 혼란에 빠질 때 가장 고통 받은 것은 여성이었지만, 이 소설을 보면 그 정도가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을 것이라 생각될 만큼 심각하다.

 

 

 

아프가니스탄은 대충 말해서, 페르시아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8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결과 현재 인구의 99%가 무슬림이며, 그 중 90% 정도가 수니파로 알려져 있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고, 최다 민족이 42% 정도의 파슈툰인, 다음이 27% 정도의 타지크인 이다. 그 외로 여러 소수민족이 있다. 동서남북으로 여러 국가와 국경을 접해있고, 역사적으로 교역의 요충지인 탓에, 이런 지정학적 위치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복잡해서 그것을 간추려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도 전근대사는 보는둥 마는둥 넘어가게 된다. 자세히 읽어도 사실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그런데 현대사는 조금 유념하여 보아두어야 소설을 따라 가기도 쉽고, 현재의 IS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독립한 것은 18C초이다. 19C부터는 영국의 침략에 점차 시달리게 되었다. 영국의 간섭을 받으며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졌으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완전 독립하여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국왕은 노예제 폐지, 부르카 착용 금지, 여성 교육 등의 개혁을 실행하였지만, 지방의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복잡한 권력 투쟁이 진행되던 중에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된 것은 1978년 4월, 공산주의 정당이 일으킨 ‘샤우르 혁명’에 기인한다.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몇 달 만에 반군 봉기가 일어나 전국적인 내란에 돌입하였다. 반군 단체인 무자헤딘은 지하드에 참여하는 전사를 의미한다. 이 내전 때문에 소련이 정부군을 지원하게 되고, 1년 뒤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른바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1979년 12월에 침공하여 10년 만인 198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던 공산당 정권은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에 무너졌다. 무자헤딘이 공산정권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과 소련붕괴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등이 무자헤딘에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미국에 돌아간다. 세계 최대의 골칫거리 중 하나인 이슬람근본주의 무장단체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태동되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통해 성장하였다. 이 반군들에게 전투기술과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한 것이 미국 등의 국가들이다.  오사마 빈 라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소설을 보면 많은 아프가니스탄인 젊은이들이 성전을 위해 무자헤딘에 지원하였다. 물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소설에는 공산주의 정책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1978년 4월 혁명이 일어난 날 밤에 태어난 라일라에게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비록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퇴직 당했지만, 이렇게 말한다. “라일라, 이 나라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힘들게 살아왔다.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어쩌면 여자들은 더 자유로워졌는지 몰라. 전보다 더 권리를 누리고 있지.” “아프간 여성으로서는 좋은 때다. 라일라, 너도 그걸 이용할 수 있어.”

 

공산주의 정부는 모든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했고 당시 카불 대학의 학생 중 2/3 정도가 여성이었다. 여자들이 법과 의학, 공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시기다. 이후 탈레반 정권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성 권익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것이 무자헤딘에게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봉기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여자들이란 공부는 물론 나돌아 다녀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그곳에서는 거리에서 여자를 볼 수 없었다. 여자들은 부르카를 입고 남자가 동반해야만 거리에 나갈 수 있었다. 고대의 부족법에 따라 사는 그 지역 남자들은 여자들을 해방시키고 강제결혼을 폐지하고 여자의 결혼 최소연령을 열여섯 살로 높이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법령에 반기를 들었다. 그곳 남자들은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자신들의 딸들이 집을 떠나 학교에 다니고 남자들과 함께 일을 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수백 년이 된 자신들의 전통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란 파키스탄 인접 지역인 남쪽과 동쪽의 파쉬툰 지역을 의미하는데, 수도인 카불은 이에 비해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얼만 후 등장하는 탈레반은 ‘그곳’과 파키스탄 난민촌에서 성장한 학생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혼란했으며 소련군의 침공으로 수백만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죽었고 또 그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여 난민이 되었다.

 

1992년 마침내 무자헤딘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무자헤딘은 분열되어 있었고 곧 내전이 일어났다. 소련이 물러났지만 이제 수도 카불로 군벌들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내전을 종식한 것은 젊은 학생들, 즉 탈레반이었다.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탈레반 정권은 2001년 9.11이후 미국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미국이 탈레반을 공격한 것은 탈레반 정권이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 놓고 미국에 인도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은 축출되었던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엄청난 전력의 차이로 탈레반 정권은 금방 붕괴되었지만, 괴멸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2001년부터 201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2014년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2016년까지 완전 철군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9.11 이후 미국은 이라크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소위 ‘테러와의 전쟁’ 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우려되는 것은 소련에 이어 미국과 10년이 넘도록 전쟁을 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또다시 탈레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세력의 침략과 민주화의 실패는 민중들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 같다.

 

탈레반이 내전을 종식시킨 초기에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탈레반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탈레반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이 드러났다. 탈레반은 전단지를 뿌리며 이렇게 선포했다. “다음은 우리가 집행하고 여러분이 복종해야 하는 법입니다.” 남자들은 수염을 길러야하고 노래와 춤, 카드놀이, 장기, 노름, 연날리기도 금지되었다. 책과 영화, 그림도 금지되고 잉꼬도 키울 수 없었다. 법을 어기면 곤장에서 시작해서 손목과 발목을 자르고,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더 큰 재앙은 여성이 지켜야 하는 법령이었다. 마리암이 주워 든 전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여자들은 항상 집에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이 이유 없이 거리를 나다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갈 경우에는, 마흐람(남자 친척)이 대동해야 합니다. 거리에서 혼자 다니다가 걸리면 곤장에 처해진 후 귀가시킬 것입니다.

여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을 보여선 안 됩니다. 밖으로 나갈 때는 부르카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하게 맞게 될 것입니다.

화장품은 금지합니다.

장신구는 금지합니다.

멋있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말을 걸지 않으면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들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됩니다.

공공장소에서 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적발되면 곤장에 처해질 것입니다.

손톱을 치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적발되면 손가락 하나를 자를 것입니다.

계집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습니다. 여학교는 즉시 폐쇄될 것입니다.

여자들은 밖에서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간통을 하다가 적발되면 돌로 쳐 죽일 것입니다.

이를 명심하고 복종하십시오. 알라-우-아크바르. “

 

탈레반은 “인구의 반을 집에 머물게 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두 여자의 이야기다.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이고, 그 남자는 한 여자의 아버지뻘, 또 다른 여자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노인이다. 두 여자의 삶은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한다. 늙은 남편에게 채찍으로 맞으며, 무자헤딘과 탈레반의 여성 억압에 짓밟히며, 험난한 시간을 함께 견뎌간다. 라이벌로 만나 친구로, 동지로, 혹은 모녀관계로 발전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각성을 일으키며 성장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또 다른 의미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탈레반이 물러갔으나 사회는 여전히 혼란하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말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주겠다던 원조는 오지 않고, 재건축이 너무 더디고, 부정부패는 만연하고, 탈레반이 다시 결집하여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고, 세계는 다시 한 번 아프가니스탄을 잊을 것이라고.” 그러나 라일라는 이런 시 구절을 읽는다.

 

“요셉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헛간은 장미꽃밭으로 바뀔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걸 집어삼키려고 홍수가 닥치면

노아가 태풍의 눈 속에서 너희들을 안내할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라일라의 마음속에는 “천 개의 태양의 눈부신 광채”가 있기 때문이다. 소련도, 무자헤딘도, 탈레반도 빼앗지 못했던 것, 혹은 바로 그들이 라일라의 마음속에 키워 준 것. 천 개의 찬란한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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