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홉명이 모였습니다.

 

중세철학, 첫 시간이었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가 주로 다루는 시기는 9C ~ 14C 정도인데요.

오늘은 개별철학자로는 12세기까지 했습니다만, 이 책은 개요 부분에서

'중세의 중심 주제들' 이라는 제목으로 중세 전반의 핵심 논점들을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중세철학 전체를 개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의 중심주제는

천지창조, 보편자들, 로고스 입니다.

이 주제들을 놓고 일어난 논쟁 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논쟁' 입니다.

실재론과 유명론의 대립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강유원 선생님은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바꾸어서

보편개념 실재론과 보편개념 명칭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보편개념이 어디에 있건 현존한다는 실재론과 보편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 즉 이름에 불과하다는 명칭론(유명론)의 대립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이 논쟁의 마지막에 오컴사람 윌리엄이 등장합니다. 오컴의 윌리엄은 움베르트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 주인공인 바스커빌의 윌리엄이 연상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도 '장미는 이름일 뿐' 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즉 보편개념 명칭론의 입장에서 서술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장미의 이름』을 읽은 지가 십 수년이 넘어서 상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당시에는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어서 그저 아주아주 재미있는 추리소설로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이상했던 것은 왜 이렇게 어두 침침한 내용에 왜 그렇게 로맨틱한 제목이 붙었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시간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아가야 할 진도는 많고, 읽어야 할 책도 많군요. ㅎ

 

 

다음주는 중세철학의 전성기인 13세기부터 시작합니다. 

대학, 탁발 수도회의 탄생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본격적으로 연구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 스콜라철학은

14세기 유명론의 재등장과 함께 쇠퇴합니다.

스콜라철학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면,

오컴 사람 윌리엄은 신앙과 이성을 분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중세철학은 자연과학과 근대철학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놓게 됩니다.

실제로 강유원 선생님은 오컴의 윌리엄을 중세철학에서 다루지 않고 르네상스 이행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여하튼 13세기와 14세기 철학자를 다루게 되는 다음 시간에는

오늘 개괄 편에서 다룬 보편 논쟁을 다시 한번 공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불참하신 분들도 중세철학 처음부터 꼼꼼이 읽어 오시면 어렵지 않게 따라오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261 ~ p304  

 

<강유원의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25 : 토마스 아퀴나스 부분만 들어도 됩니다. (처음부터 58분까지)

파일 29 : 스콜라 철학 후기 (스코투스, 오캄)

* 파일 26~28은 동양 철학인 송명이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이나 영화로 <장미의 이름>을 보고 오시면 더욱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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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철학이 끝나고 드디어 기독교 철학에 들어왔습니다.

기독교 철학, 보통은 중세 철학이라고 불리는 이 철학은 크게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나뉩니다. 물론 교부학의 시대는 역사상 중세라기 보다는 고대, 로마제국 말기에 해당합니다.  교부학의 대표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4C말~ 5C초까지 살았으니, 로마제국이 말기적 증세를 드러내던 때였습니다.

 

사도시대에 바울을 통하여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기독교는 희랍의 이성과 충돌하는 한편 희랍적 사유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적으로는 이단의 도전을 받고, 외부적으로는 이교 특히 마니교에 의해 공격당했습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옹호하며 교리를 확립해 나갔던 기독교 신부들을 교부라하고, 이들에 의해 확립된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교부학이라고 합니다. 교부학의 목적은 분명히 신앙에 있으나 로마제국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이교도 교양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교부들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앙을 논증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신플라톤주의가 교부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의 저자 훌리안 마리아스는 기독교 사상을 철학과 엄격히 분리하여, 기독교는 종교일뿐 철학이 아니라고 단언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교부철학이 아니라 교부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을듯 한데 문외한 그것도 초보 문외한으로서는 판단할 도리가 없습니다.

 

교부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지막 고대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불립니다. 최초의 중세인이 아니라 1000년을 훌쩍 뛰어 넘어 근대인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주제는 신과 영혼입니다. "나는 하느님과 영혼을 알기 원한다. 그 이상은 알고 싶은 것이 없는가? 전혀 없다." 고 단언할 정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혼이란 인간의 내면에 실재하는 '내적 인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내면의 발견' 입니다. 서양 사상사에서 최초로 확립된 내면성은 이후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됩니다. 내면에 대한 확신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루터와 데카르트로 이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사도 바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 하느님과 나와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신을 받아들여야 함을 설파했습니다. 즉 바울 - 아우구스티누스 - 루터 - 데카르트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바탕을 형성하는 개인주의가 확립되었습니다. 신과의 일대일 독대로 자신을 돌아보는 내면적 사유에서 출발한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근대인의 불안이라는 특성을 낳게 됩니다. 제3의 보증없이 헤아릴 길 없이 크고 심오한 신의 뜻을 단독자로서 이해하여 실천해야할 짐을 지게 된 개인은 자신이 얼마나 신으로부터 멀어져 타락했는지 또 얼마나 신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면의 발견을 토대로 철학의 역사에 이룩한 커다란 성과는 정신철학과 역사철학입니다.  내적 인간인 영혼은 정신적입니다. 정신적이란 말은 물질적인 것의 반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는 '자기 안으로 들어서는 능력' 을 가리킵니다. 영혼은 자기 의식을 끝까지 밀고가서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 세웁니다.

 

'자기 의식의 경험에 대한 서술' 이라 할 수 있는 『고백록』이 정신철학의 모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의식의 경험이란 가만히 앉아서 허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고백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느님의 참된 사랑(dilectio)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자신의 삶의 국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계기였음을 회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쓴 책이다." 

 

자기의식의 경험이란 삶 속의 경험 즉 겪음(pathos, passion)을 사후에 재구성하여 깊이 성찰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겪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겪음이 내 삶의 어떤 목적에 어떤 계기로 작용했는지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작용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목적은 신의 사랑, dilectio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의식의 경험의 학'이란 부제가 붙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정신철학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헤겔 역시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500년 후의 헤겔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겪음, 즉 수난과 열정의 과정은 bildung, 도야의 과정입니다. 도야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스려 바르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라 생소합니다. bildung 을 찾아보면 ,  '철학과 교육이 개인의 태도에 녹아들어 인격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갈고닦는 독일적 전통을 말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독일에서는 교육의 개념으로 사용되며, bildung에 관한 소설이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입니다. '돌아온 탕아'가 주제가 되는 각종 성장소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거친 세상에 나아가 겪을 것을 다 겪고 깨침을 얻는 훈련의 과정이 bildung입니다.

 

bildung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과정 없이는 인간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천국의 사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른채 그냥 누리기만 했을 것입니다. 백치의 행복과 같은 것입니다. 행복을 행복으로 깨닫지 못하는 행복은 참다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천국에 위험한 나무를 심은 까닭이 바로 pathos를 통한 bildung에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통하여 돌아온 아담의 후예들은 도야의 과정 덕분에 신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철학에서는 '부정적이지만 필연적인 계기' 라고 합니다. 신에게 등을 돌려 떠나는 것은 분명 악이지만 그것은 궁극의 선을 위한 필연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도 이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고백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8권 7장 16절이었습니다. 8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metanoia, 회심하는 과정입니다. 'tolle lege, tolle lege'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회심 장면이 결정적이지만 저는 회심 직전의 자기성찰이 더 가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인 metanoia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자기반성, self reflection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대자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반성 없이 원래부터 착하게 사는 것은 평생 천진무구한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고, 자기반성 없이 온갖 것들을 겪으며 평생 사는 것은 망나니로 사는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똑 바로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아직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백록』이 개인의 도야 과정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대표작 『신국론』은 인류 전체의 도야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록』이 정신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신국론』은 역사철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헤겔은 정신철학과 역사철학을 통합하려는 위대한 구상 아래 『정신현상학』을 썼다고 합니다. 

 

 후기가 아주 길어졌습니다. 

『고백록』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책을 모두 읽으려던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 500여쪽의 두꺼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제가 종교적 고전을 이렇게 읽을 수 있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다음주는 제 3부 중세 철학입니다. 

p213 ~ p260까지 먼저 공부하겠습니다.

스콜라철학의 전성기인 13C 이전까지입니다.

13C 스콜라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다음 회차에 따로 하겠습니다.

 

<강유원의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24강 입니다.

파일 25강의 보편 논쟁에 대해서도 미리 들어두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10명이 참석했습니다.

한 분이 탈퇴하셔서 총 인원 12명이 되었습니다.

 

 

 

 

 

 

 

 

 

 

 

 

 

 

 

* 주요 내용 발췌

 

고백록 Confessiones

 

1권 1장 1절

 

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합니다. 당신의 능력은 심히 크시고 당신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시 145:3) 그러기에 당신의 피조물의 한 부분인 인간이 당신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

 

(……)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

 

(……) 그러나 당신을 모르고서야 누가 당신을 부르겠습니까? 당신을 알지 못하고 부르는 자는 사실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아닌 딴 것을 부르는 것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부르며 설교하는 자 없이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롬 10:14) (……)

 

2권 6장 14절

 

이처럼 영혼이 당신을 떠나 돌아서서(abs te) 당신 밖에서(extra te)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 할 때 곧 외도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당신께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ad te)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8권 7장 16절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8권 12장 29절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것이었습니다. (……)

(……) 그 구절의 내용은 “방탕과 술에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고 또한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즉시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infusa cordi meo) 의심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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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간 머리를 끙끙 싸맸던 희랍철학이 끝났습니다.

좀 섭섭하기도 해요. ㅎ

10명이 함께했습니다.

설 연휴로 한 주 걸러서 만났네요.

 

 

오늘은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내용 반,

강유원 선생님의 <2012 서양철학> 내용 반,

일케 반반씩 공부한 셈입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에는

일반인 대상의 서양 철학사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기독교에 관한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 당시의 기독교와 바울이 정립한 기독교의 차이,

헬레니즘 시대에 기독교 신앙이 희랍 사유와 융합하는 과정 등을

여러 강에 걸쳐 알기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서양 철학 나아가 서양 인문학을 이해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필수적인 강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양적인 모든 것은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저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낯선 사상이라

이번 강의가 아주 좋았습니다.

 

 

흔히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이라 불리는 시기의 희랍철학은

내용적으로는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희랍철학이 진리에 대한 탐구를 포기하고 윤리학에 집중한 시기입니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목표로 아타락시아, 아파티아를 강조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전통을 이은 퀴니코스 학파, 퀴레네 학파 등이 있었고,

우리가 세계사에서 헬레니즘 시대 철학으로 배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등이 있습니다. 

퀴니코스와 퀴레네 그리고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라는 두 쌍은

반복적이라고 할만큼 유사해 보입니다.  

각 쌍 내의 두 학파는 표면상으로

금욕과 쾌락을 대표하며 대립적인 성격을 보이지만

뿌리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금욕을 통하든 평화로운 쾌락을 통하든 방식은 부차적일 뿐이고 

공통된 목표는 지혜로운 인간의 자립과 평정이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 시대 철학의 중요성은

희랍적 사유와 기독교 신앙이 융합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지파에서 벗어나 헬레니즘 문화의 전지역으로 확산됩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 신앙은 필연적으로 희랍 사유로 번역되어야만 했습니다.

단순한 언어의 번역이 아니라 사유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과정을 강유원 선생님이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아마도 저와 비슷하게

기독교라는 것이 유대교에서 출현하여 바로 로마로 넘어간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나아가는데는

희랍적 사유라는 징검다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희랍적 사유라는 것은 곧 '로고스'에 의한 탐구입니다. 

유대교 혹은 나아가 기독교라는 신앙은 

인간의 로고스 즉 독립적인 사유를 원죄로 봅니다.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독립적인 판단으로 지혜의 나무에서 과실을 따먹은 것이 바로 원죄였습니다.

희랍에서 로고스는 인간의 본성이자 최고의 아레테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이성을 적절히 사용하여

학문적 지식(epistēmē)과 더불어 직관적 지식(Noūs)을 획득하여

참된 지혜 (sophos)에 이르는 것입니다.  

로고스에 대한 이렇게 상반된 태도는 희랍적 사유와 기독교 신앙의 조화가 매우 힘들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성서 해석에 처음으로 희랍의 사유를 도입한 사람은

기원 전후 시기를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이었습니다. 

희랍 철학자인 필론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였으나

신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비주의의 길로 들어섭니다. 

 

200년 정도 이후에 등장한 인물은

신플라톤주의를 창시한 이집트 출생의 플로티누스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맥이 끊긴 희랍의 형이상학을

마지막으로 탐구하였습니다.

 

플로티누스는 정신계와 현상계로 뚜렷이 구분된 플라톤의 형이상학 체계를

수정하여 단절된 두 세계를 연결하려 하였습니다.

플로티누스는 세계란 The One에서 단계적으로 유출되어 만들어졌다고 보았습니다. The One에서 순차적으로 Noūs와 영혼, 마지막으로 물질이 생성되었습니다. The One과 Noūs는 플라톤의 이데아 즉 정신세계와 같고, 물질은 현상계입니다.

플루티누스에 의하면 이 두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영혼' 입니다. 영혼은 정신인 동시에 물질이라는 두 성질을 갖고있는 제3의 무엇입니다. 기독교에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3의 존재 즉 인간인 동시에 신인 예수와 유사한 역할을 합니다.

 

플로티누스의 The One과 기독교의 신은 모두 일자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것에 반해

The One은 그 자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으로서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희랍적 사유에는 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은 무없이 창조를 사유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희랍철학은 신플라톤주의로 끝을 맞습니다.  플라톤 이후 명맥을 유지하던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폐쇄되었고 희랍 철학 강의도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아카데미아의 마지막 일곱 스승은 망명길을 떠났습니다. 이후에는 기독교 철학이 형이상학의 문제를 사유합니다.

 

희랍철학은 서양에서 가장 일찍 생겨난 철학입니다. 서양철학이 자신의 근본적인 특성과 방법들을 희랍인들에게서 건네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서양의 모든 철학은 희랍 정신이 열어둔 경로들을 거쳐갑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서구인의 사유 방식들은 본질적으로 희랍인들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주는 기독교 철학입니다.

교부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제2부  기독교  p 183~208

 

<2012 서양철학사> 

파일 21강 :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본 사상 (1:12분 부터)

파일 22강 & 23강 :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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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장소를 옮겨 환하고 깨끗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모두들 엄청 맘에 들어 하시는데, 아쉽게도 정기 모임에는 휴일이네요...

열 한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주에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마치고

 오늘은  『인문 고전 강의』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이고요. 아들의 이름을 딴 것은 그가 편집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헌정했다는 말도 있고요.

 

완역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두껍고요. 읽기도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모두 읽지는 못했고    『인문 고전 강의』 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부분 부분 읽었습니다. '중용'의 정확한 개념이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너무 꼼꼼해서 하악 하악 소리가 나오려고 했지만 후대의 칸트나 헤겔에 비하면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함은 두 가지입니다. 지적 탁월함과 성격적 탁월함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의 핵심은 지적 탁월함으로 실천적 지혜를 기르고, 성격적 탁월함으로 중용을 실천하여 훌륭한 시민이 되고 , 나아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관조적 삶을 누릴 수 있으면 최고로 좋은 삶 즉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습니다.

 

여기서 니코마코스는 중용이라는 성격적 탁월함에 대해 공을 많이 들이는 것 같습니다. 중용의 개념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과녁에 맞추는 화살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중용은 양 극단을 배제한 적당히 중간적 위치가 아니라 정확하게 과녁을 맞추는 태도입니다. 중용 즉 성격적 탁월함과 대립되는 품성 상태는 악덕인데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자람과 지나침입니다. 우리는 오늘 중용으로서의 '용기'를 예로 들어서 그 지나친 태도인 무모함과 모자란 태도인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건 지난 주에도 조금 이야기해 보았던 것입니다.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 예를 들어 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용기는 적당히 양심을 무마시킬 수 있는 정도의 행동을 말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까요. "이성이 명하는대로 고귀한 것들을 위해 그것들(두려움)을 견뎌낼 것이다." 즉 용기의 목적은 고귀함입니다. 지난 주말에 끝난 드라마 <도깨비>에서 은탁은 유치원 버스의 수많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브레이크 풀린 거대한 탑차 앞을 자기의 자동차로 막고 죽습니다. 이걸 우리는 용기라고 부르나요? 무모함이라 부르나요? 어쩌면 중용이라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중용을 몸에 익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윤리학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중에 '윤리학의 황금률' 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걸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걸 긍정문 형태로 바꾸면 칸트의 정언명령과 비슷합니다. 성경에도 유사한 구절이 있다고도 하네요. 이렇듯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윤리적 규범이 바로 이 황금률입니다. 뭐, 남을 욕하고 싶을 때 그 욕을 내가 들어도 좋은가 생각해 본다면, 남에게는 손해가 되지만 내게는 이득이 되는 일에 유혹될 때 상황을 거꾸로 놓아본다면 즉 이 황금률을 적용한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음주는 명절 휴일이고요.

8회 모임은 다다음주 2월 6일에 있습니다.

8회 공부할 내용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154~ 178

 

Ⅴ 지혜로운 인간의 이상

Ⅵ 신플라톤 주의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13

파일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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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4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은 여덟명이 함께

지난주에 이어 아리스토텔레스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끝날 즈음에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세 분이 합류하셔서

헤어질 때는 열 한명이 되었습니다. ^^

얼굴이라도 보여주겠다는 그 마음이 참 따뜻하고 고마웠습니다.

다음주까지 일정이 잡혀있다고 하셔서

다음주는 월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에 스타디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난주에 비해 훨씬 수월했습니다.

역시 이론학, 그중에서도 형이상학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분야인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에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플라톤의 형상 실재론 (형상은 사물 밖에 존재한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내재론 (형상은 각각의 사물안에 존재한다)만은

구분하여 기억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앎의 시작을

구체적 사물을 감각하는 것에 있다고 보는 이유도

사물안에 그 본질인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과 사물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다른 개념의 실재인 usia 즉 실체가 있습니다.  

usia는 '형상을 내재한 각각의 사물' 입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와 영혼 개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플라톤은 영혼을 명백히 분리시켜 영혼불멸을 강조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육체와 영혼은 usia처럼 하나로 결합된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오늘 가장 재미있었던 (?) 부분은 'logos' 라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logos는 현재 말, 이성, 비율 등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미있는 말'로서의 logos란 개념을 가진 것 같습니다.

 

의미있는 말이란 의미 규정된 말 즉 definition이 된 말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정의가 그 사물의 logos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ogos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즉 그 사물의 형상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사물은 인간의 logos를 통해 그 진리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멋진 표현이다! 고 감탄한 문장이 있습니다.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기에 진리의 도구다. 사물들의 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거쳐간다. 즉 인간은 사물들을 발견하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진리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물들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존재와 그 존재를 알고 표현하는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토대는 앎, 소피아, 철학이다. 철학에서 존재는 자기의 진정한 실재를 진리의 빛 속에서 획득한다. p137"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이론학과 실천학 그리고 제작학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논리학은 이 모든 학문들의 도구 즉 organon이기 때문에 세 가지 분과 학문에 포함되지 않은 기초학문입니다.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학은 윤리학과 정치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후 서양철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윤리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고 특히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주에 공부할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더 상세히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기초적인 부분만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주의 교재는 <인문 고전 강의> 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한 책이니,

강의 파일과 함께 들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인문 고전 강의>  p147 ~ 183

 

 

 

 

 

 

<인문 고전 강의> 파일 : 20090409 ~ 20090430

                                1시간짜리 강의 총 8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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