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철학이 끝나고 드디어 기독교 철학에 들어왔습니다.
기독교 철학, 보통은 중세 철학이라고 불리는 이 철학은 크게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으로 나뉩니다. 물론 교부학의 시대는 역사상 중세라기 보다는 고대, 로마제국 말기에 해당합니다. 교부학의 대표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4C말~ 5C초까지 살았으니, 로마제국이 말기적 증세를 드러내던 때였습니다.
사도시대에 바울을 통하여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기독교는 희랍의 이성과 충돌하는 한편 희랍적 사유로 기독교 신앙을 해석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적으로는 이단의 도전을 받고, 외부적으로는 이교 특히 마니교에 의해 공격당했습니다. 이러한 공격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옹호하며 교리를 확립해 나갔던 기독교 신부들을 교부라하고, 이들에 의해 확립된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교부학이라고 합니다. 교부학의 목적은 분명히 신앙에 있으나 로마제국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이교도 교양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교부들은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앙을 논증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신플라톤주의가 교부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의 저자 훌리안 마리아스는 기독교 사상을 철학과 엄격히 분리하여, 기독교는 종교일뿐 철학이 아니라고 단언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교부철학이 아니라 교부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을듯 한데 문외한 그것도 초보 문외한으로서는 판단할 도리가 없습니다.
교부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결합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지막 고대인이자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불립니다. 최초의 중세인이 아니라 1000년을 훌쩍 뛰어 넘어 근대인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주제는 신과 영혼입니다. "나는 하느님과 영혼을 알기 원한다. 그 이상은 알고 싶은 것이 없는가? 전혀 없다." 고 단언할 정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혼이란 인간의 내면에 실재하는 '내적 인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내면의 발견' 입니다. 서양 사상사에서 최초로 확립된 내면성은 이후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됩니다. 내면에 대한 확신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루터와 데카르트로 이어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사도 바울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 하느님과 나와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신을 받아들여야 함을 설파했습니다. 즉 바울 - 아우구스티누스 - 루터 - 데카르트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바탕을 형성하는 개인주의가 확립되었습니다. 신과의 일대일 독대로 자신을 돌아보는 내면적 사유에서 출발한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근대인의 불안이라는 특성을 낳게 됩니다. 제3의 보증없이 헤아릴 길 없이 크고 심오한 신의 뜻을 단독자로서 이해하여 실천해야할 짐을 지게 된 개인은 자신이 얼마나 신으로부터 멀어져 타락했는지 또 얼마나 신을 향해 가까이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면의 발견을 토대로 철학의 역사에 이룩한 커다란 성과는 정신철학과 역사철학입니다. 내적 인간인 영혼은 정신적입니다. 정신적이란 말은 물질적인 것의 반대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는 '자기 안으로 들어서는 능력' 을 가리킵니다. 영혼은 자기 의식을 끝까지 밀고가서 스스로를 하느님 앞에 세웁니다.
'자기 의식의 경험에 대한 서술' 이라 할 수 있는 『고백록』이 정신철학의 모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의식의 경험이란 가만히 앉아서 허구를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고백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느님의 참된 사랑(dilectio)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목적을 전제로 자신의 삶의 국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필연적 계기였음을 회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쓴 책이다."
자기의식의 경험이란 삶 속의 경험 즉 겪음(pathos, passion)을 사후에 재구성하여 깊이 성찰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겪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겪음이 내 삶의 어떤 목적에 어떤 계기로 작용했는지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작용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목적은 신의 사랑, dilectio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의식의 경험의 학'이란 부제가 붙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정신철학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헤겔 역시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500년 후의 헤겔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겪음, 즉 수난과 열정의 과정은 bildung, 도야의 과정입니다. 도야란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다스려 바르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용어라 생소합니다. bildung 을 찾아보면 , '철학과 교육이 개인의 태도에 녹아들어 인격적,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갈고닦는 독일적 전통을 말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독일에서는 교육의 개념으로 사용되며, bildung에 관한 소설이 교양소설 혹은 성장소설입니다. '돌아온 탕아'가 주제가 되는 각종 성장소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거친 세상에 나아가 겪을 것을 다 겪고 깨침을 얻는 훈련의 과정이 bildung입니다.
bildung이 중요한 이유는 이 과정 없이는 인간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천국의 사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신에게로 되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른채 그냥 누리기만 했을 것입니다. 백치의 행복과 같은 것입니다. 행복을 행복으로 깨닫지 못하는 행복은 참다운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천국에 위험한 나무를 심은 까닭이 바로 pathos를 통한 bildung에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통하여 돌아온 아담의 후예들은 도야의 과정 덕분에 신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철학에서는 '부정적이지만 필연적인 계기' 라고 합니다. 신에게 등을 돌려 떠나는 것은 분명 악이지만 그것은 궁극의 선을 위한 필연적 계기로 작용합니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도 이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고백록』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8권 7장 16절이었습니다. 8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metanoia, 회심하는 과정입니다. 'tolle lege, tolle lege'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회심 장면이 결정적이지만 저는 회심 직전의 자기성찰이 더 가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결정적 순간인 metanoia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자기반성, self reflection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대자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시각없이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반성 없이 원래부터 착하게 사는 것은 평생 천진무구한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고, 자기반성 없이 온갖 것들을 겪으며 평생 사는 것은 망나니로 사는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똑 바로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아직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백록』이 개인의 도야 과정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또 다른 대표작 『신국론』은 인류 전체의 도야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록』이 정신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신국론』은 역사철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헤겔은 정신철학과 역사철학을 통합하려는 위대한 구상 아래 『정신현상학』을 썼다고 합니다.
후기가 아주 길어졌습니다.
『고백록』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책을 모두 읽으려던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빨려들어 500여쪽의 두꺼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제가 종교적 고전을 이렇게 읽을 수 있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다음주는 제 3부 중세 철학입니다.
p213 ~ p260까지 먼저 공부하겠습니다.
스콜라철학의 전성기인 13C 이전까지입니다.
13C 스콜라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다음 회차에 따로 하겠습니다.
<강유원의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24강 입니다.
파일 25강의 보편 논쟁에 대해서도 미리 들어두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10명이 참석했습니다.
한 분이 탈퇴하셔서 총 인원 12명이 되었습니다.
* 주요 내용 발췌
고백록 Confessiones
1권 1장 1절
오, 주님, 당신은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을 받으실 만합니다. 당신의 능력은 심히 크시고 당신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시 145:3) 그러기에 당신의 피조물의 한 부분인 인간이 당신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
(……)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in te) 안식할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 (……)
(……) 그러나 당신을 모르고서야 누가 당신을 부르겠습니까? 당신을 알지 못하고 부르는 자는 사실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아닌 딴 것을 부르는 것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부르며 설교하는 자 없이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롬 10:14) (……)
2권 6장 14절
이처럼 영혼이 당신을 떠나 돌아서서(abs te) 당신 밖에서(extra te)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찾으려 할 때 곧 외도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당신께로 다시 돌아가기까지는(ad te)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8권 7장 16절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
8권 12장 29절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것이었습니다. (……)
(……) 그 구절의 내용은 “방탕과 술에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고 또한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즉시 확실성의 빛이 내 마음에 들어와(infusa cordi meo) 의심의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