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구약성서의 <욥기>를 공부하였습니다.

아홉 명이 참석하였고요.

진행은 고구마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보다 비신자가 많아서,

먼저 구약에 씌어진 유대인들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두 주간 많은 부담을 안고 준비하셨다는데요.

저희는 덕분에 누가 누구를 낳고...의 그 한없어 보이는 가계의 연쇄에

발목잡히지 않고 유대의 역사를 개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욥기>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매우 조심스러운 텍스트라고 합니다.

잘못 해석하면 이단에 빠질 수도 있고,

특히 비신자들은 납득하기 매우 곤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유원 선생님이 『문학 고전 강의』에서 굳이

이 난해한 <욥기>를 선택한 것은 신학의 관점이 아니라

철학 혹은 역사 철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학 고전 강의』는 강의 녹취 파일이 없어서 (혹은 못 구해서) 매우 아쉽습니다.

책은 날 것 그대로의 강의에 비해 많이 순화되고 정제되었을 것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압축해 놓았다는 장점은 있지만, 텍스트화하기에 산만하거나 부담이 있는 내용들은 생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 처럼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은 실리지 않는 내용들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간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를 100강 정도 듣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욥기>에 대한 고구마님의 결론은 기독교의 정통 해석일 것입니다.

'한낱 인간이 신의 섭리 혹은 신의 뜻을 따져 묻지 말고 무조건 신을 찬양하고 복종하라, 그렇게 하면 두 배로 돌아갈 것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저로서는 이 결론이 뜬금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심오한 해석이 있었을 이 텍스트에 대해 지금 여기서 비신자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뜬금없을 것이기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지만 글로 옮기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욥기>는 철학이 그렇듯 

해답을 제시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질문을 제기하는 텍스트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욥기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교에 등장한 텍스트라고 합니다.

헬레니즘, 즉 고대 희랍의 정신은 이성적입니다.

원인과 결과, 인과와 응보를 따져묻는 정신입니다.

사탄도 욥의 세 친구들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욥을 바라봅니다. 

욥 자신도 고난의 극한에서 야훼께 따져 묻습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의 원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에 악이 만연한 이유까지 따져 묻습니다.

이유없이 고통 당하는 과부와 고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잘먹고 잘사는 악인들이 하느님이 만든 세상에 가득한 이유를 묻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얻고 공동체의 고난에 공감각하는 각성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야훼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묻는 욥에게 야훼는 전능한 신의 위력을 늘어놓으며 윽박지릅니다.

욥은 야훼의 전능함을 인정하고 그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인간의 머리로 따지려 했음을 뉘우칩니다.

이렇게 <욥기>는 해피앤딩이지만, <욥기>에서 야훼는 끝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악으로 가득한지, 욥이 왜 그렇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리고 욥과는 달리 그 고통 끝에도 끝내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많은 것인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의 마지막은 대반전처럼 느껴집니다.

야훼는 욥이 아니라, 욥의 불경을 나무라고 욥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라고 충고한 세 친구들에게 오히려 벌을 내립니다.

세 친구들은 독실한 신자처럼 보이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야훼를 인과응보의 한계 안에서 바라보았다고 해도

욥 역시 똑같은 관점으로 신을 원망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신에게 논리를 요구한 것은 세 친구나 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는 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이야기를 할 때 욥처럼 솔직하지 못하였다."

야훼가 말한 욥의 솔직함은 무엇일까요?

야훼가 진정 바란 것은 욥처럼 따져 묻는 것이었을까요?

고구마님도, 강유원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세 친구를 벌하고 오히려 옵에게 보상을 내린 야훼의 뜻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것뿐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야훼에게는 지극히 불리한,

혹은 유대인에게는 지극히 불경한,

이 텍스트가 구약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무엇보다 많은 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주는 셰익스피어입니다.

<맥베스>와 <오델로>를 함께 보겠습니다.

 

제26강 ~ 31강 : p245 ~ 314

<2013 인문고전강의> 파일 중 맥베스와 오델로 총 다섯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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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16강부터 25강까지 총 열강이나 했는데요.

희랍 비극의 3대 시인의 작품을 하나씩 보았습니다. 

아홉명이 참석했습니다.

 

희랍 비극은 희랍 서사시 이후에 출현한 문예 양식입니다.

BC 5C 특히 아테나이의 황금기에 희랍 비극 역시 절정에 이릅니다.

서사시가 영웅의 명예를 주로 다루었다면,

희랍 비극은 인간의 운명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정한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인과관계를 따져 물으며 인간의 정신으로 이해해보려 합니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희랍의 정신이 그대로 비극에 담겨있습니다.

합리적 정신이야말로 희랍 비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랍 비극에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비극적 상황'이라고 부르는 이율배반입니다.

주인공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율배반의 처지에 사로잡힙니다.

아가멤논의 아들인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일 수도 모른 척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거나 어머니의 아들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동시에 어머니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천륜을 어긴 패륜아가 됩니다.

 

희랍 서사시의 형식은 ' in medias res' 즉 사건의 한 가운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희랍 비극은 서사시보다 훨씬 더 직접적입니다. 별다른 도입부 없이 사건은 정점에서 곧바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도 훨씬 더 처절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습니다. 근친상간은 물론이고 삼촌이 조카를, 아들이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이 죽음은 복수를 부르고 복수는 또 복수를 낳습니다. 도대체 이 비극적 상황은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 걸까요? 

 

희랍 비극의 3대 작가들이 비극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이 결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의 문제는 신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름이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아폴론 신이 정해놓았지만, 오이디푸스는 '손수' 자신의 두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신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결말은 뜬금없습니다. 격정의 분출 끝에 메데이아는 용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가버립니다. 이런 전개를 두고 deus ex machina가 사용되었다는 비난이 있습니다. 기계로부터 나온 신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 작가의 비극이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는 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주는 앞으로 돌아가서 구약성서의 <욥기> 입니다.

먼저 성서의 <욥기>를 직접 읽어 보고, 이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 성서 < 욥기> : 11강 ~ 15강

                          p 125 ~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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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함께 배웠습니다.

아쉽게도 완역본을 읽지는 못했지만,

강유원 선생님의 해석과 더불어

EBS <통찰>과 <플라톤 아카데미 강의> 등을 참고하여 

어릴 때 읽었던 오뒷세우스의 모험들을 조각조각 떠올려 가며 공부하였습니다.

 

 『오뒷세이아』라는 하나의 책을 두고

세 가지 강의에서 선생님들은 제 각각의 관점으로 이 여정을 풀이하여 주었습니다.

완역본을 스스로 읽기까지 우리 자신의 관점을 세울 수는 없지만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의 후일담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 ,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0년 여정을 다룬  『오뒷세이아』,

결국 트로이 목마라는 꾀를 내어 트로이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끈

오뒷세우스는 20년만에 고난 끝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타케로의 귀향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물리적으로 고향에 도착한 오뒷세우는

아들과의 만남, 부인 페넬로페와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정신적 귀향에 성공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homophrosynè 즉 같은 마음을 귀향의 완결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고난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고통과 고난은 끝이 없고, 귀향은 잠시 동안의 달콤한 휴식을 의미할 뿐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길 위에, 고난의 여정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라는 이름이 '증오받는 자', '고통을 겪는 사람', '비탄에 빠진 사람'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인가 봅니다. 

오뒷세우스의 일생이 곧 인간 일반의 일생이라고 볼 수 있을테니까요. 

 

<통찰> 에서는  『오뒷세이아』를 인간 찬가로 보는 것 같습니다.

오뒷세우스는 영생으로 유혹하는 칼륍소도, 동화같은 나라의 행복한 삶을 보증하는 나우시카도 마다하고 고난이 가득한 고향 이타케의 페넬로페를 찾아 돌아옵니다. 

오뒷세우스는 신도 신과 같은 영웅의 삶도 인간의 삶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라도 인간의 삶을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이름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일리아스』의 영웅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고 비굴합니다.

하지만 이미 신의 시대도 영웅의 시대도 지나고 이제 인간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시대에 인간은 인간답게 고난을 겪고 참아내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고

열 한명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다음주는 희랍 비극을 공부합니다.

3대 희랍 비극 시인으로 알려진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한꺼번에 봅니다.

이들 세 시인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작품 속에서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제 16강  ~  제 25강  (p171~243)

 

 강유원 선생님 강의 파일로는

<2013 인문 고전 강의> 중 '오디푸스왕',

<라디오 인문학> 중 '오디푸스왕' 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왕'은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으므로 완역본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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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문학 고전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아쉽게도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파일을 구하지 못했지만,

회원님들의 손빠른 검색과 정보력으로 이것 저것 참고할만 한 것을 찾아 내고 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중에는 2013년에 한 <인문 고전 강의>에 동일한 내용이 일부 있어서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도서관에 사정이 있어서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함께 하기로 한 열 한 명 중 아홉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첫 고전은 <길가메쉬 서사시> 입니다.

길가메쉬는 BC 2812년에 수메르 지역의 도시국가 중 하나인 우르크의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으로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역,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위치하였습니다. 수메르에는 12개의 도시국가들이 있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점토판에 씌어져 전해오는데, 여러 판본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토판본은 BC 21C의 것으로, 그후 천년 가까이 이야기가 덧붙여져 변형되어왔고, BC 13C에 산 레케 운니니가 정형화한 토판본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입니다. BC29C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야만인 혹은 원시인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고도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우리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상 서사시를 읽고나면, 사실은 서사시에 대한 설명을 읽은 것이지만,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만큼 완성된 형식과 은유적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이 조화롭게 어우려져 있습니다. 읽고 있노라면 인간의 사유란 것이 길가메쉬 이후 진전되기는 했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완역본이 얼마나 긴지는 모르겠는데, 언젠가 꼭 읽어 볼 책으로 간직해 두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길가메쉬는 자신과 꼭같은 능력을 지닌 엔키두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눕니다. 둘은 신의 숲을 지키는 훔바바를 죽이고, 이쉬타르 여신의 청혼을 거절하고, 신들이 형벌로 내려보낸 황소까지 죽여버리는 오만함을 자행합니다. 분노한 신들은 길가메쉬에게 최고의 고통을 주기 위해 분신과 같은 엔키두를 죽입니다. 엔키두의 죽음을 본 길가메쉬는 죽음과 영생에 관해 진지하게 고뇌하며 우트나피쉬팀을 찾아 떠납니다. 우트나피쉬팀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신들의 파라다이스에서 영생을 살고 있는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 여정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을 필멸로 운명지었다는 충고를 하지만, 길가메쉬는 끝내 영생을 얻으러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갑니다. 우트나피쉬팀은 그에게 가시덤불을 선물하는데, 이 식물의 이름은 'How-the-Old-Man-Once-Again-Becomes-a-Young-Man' 입니다. 이 가시덤불에 찔리면 다시 젊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덤불을 뱀이 가져가 버리고 길가메쉬는 빈손으로 우르크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길가메쉬는 위대한 도시를 세웁니다.

 

우트나피쉬팀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여인숙 주인 씨두리, 뱃사공 우르샤나비, 그리고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에게 반복해서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길가메쉬는 그가 했던 위대한 행위를 나열합니다. 그런데 이 구도 여행의 조력자들은 길가메쉬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당신이 길가메쉬라면, 산지기를 죽인자라면, 삼목산 숲속에 살던 훔바바를 없앤 자라면, 산길에 있던 사자를 죽여버린 자라면, 하늘에서 온 황소와도 맞붙어 그를 처치해버린 자라면, 참으로 그렇다면 당신 뺨이 수척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당신 표정이 쓸쓸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당신 마음이 비참하고 당신 얼굴이 여윈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당신 마음 깊은 곳에 그런 비애가 서린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먼 길을 오랫동안 여행한 사람처럼 추위와 더위에 얼굴을 그을린 까닭을 말하세요! .... 대초원을 방황하는 진의를 말해보세요!"

 

" Who are you? "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길가메쉬처럼 답합니다. 명함을 들이 밀거나 이력서를 읊습니다. 세상에 내세울 수 있는 성공적인 일, 번듯한 이름을 나 자신의 본질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가메쉬에게 되풀이 제기된 질문은 그런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 진정한 본질입니다. 야망을 성취한 이후에도 쓸쓸해 방황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려 4천 년에서 5천 년도 더 이전에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묻기를 주저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유는 과연 오 천년의 세월 동안 성숙해지기는 한 것일까요?

 

길가메쉬는 영생을 얻는데 실패하고 돌아와 유한자로서의 영생의 방법을 터득합니다. 불멸의 도시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길가메쉬의 여정, 겪음(Pathos)은 깨달음을 얻고 공적인 업적으로 귀결됩니다.  이 겪음은 천방지축이던 길가메쉬가 성숙한 영웅이 되는 도야의 과정입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서', 길가메쉬는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불멸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저자 강유원이 해석한 <길가메쉬 서사시>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가 헤겔 전공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길가메쉬의 겪음(Erfahrung)의 과정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이며, 즉자적 자기(an sich)에서 즉자-대자적 자기(an und Für sich)로 전환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필멸의 길가메쉬는 긴 여정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유한자의 굴레를 벗지 못한 필멸의 길가메쉬로 동일하지만, 자기를 반성적으로 성찰한 길가메쉬는 불멸의 도시를 세워 그 기둥에 이름을 남기고 오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불멸의 이름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

 

 

 

 

다음주는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입니다. 강의 파일도 있고요. 『인문 고전 강의』 에서 했던 <일리아스>와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책의 분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강의도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구마님이 올려주신 <플라톤 아카데미> 강의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EBS <통찰> 에도 일리아스와 함께 오딧세이아 강의가 있습니다. 각 강의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입니다.

 

<문학 고전 강의 > p 71 ~ 122

<2013 인문 고전 강의 파일 > 2강 ~ 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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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를 끝으로 '처음 철학' season1을 마칩니다. 

우리가 '감히' 철학을 할 수 있을까, 우려 끝에 시작한 공부인데

중단없이 마지막까지 오게되어 아주 아주 기쁩니다.

함께 해주신 회원님들 덕분입니다.

 

교재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를 읽고,

강유원 선생님의 <2012 서양 철학사 강의> 녹음 파일을 함께 들었습니다.

딱딱한 철학 공부에 지칠까 싶어서

<인문 고전 강의>도 사이 사이 함께 읽었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인문 고전 강의> 녹음 파일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인문 고전 강의> 중 '거대한 전환'을 공부하였습니다.

폴라니는 근대국가의 파멸을 분석하고 있지만,

오늘도 우리는 근대국가의 틀 안에서 살고 있고,

상품이 되어서는 안될 노동, 토지, 화폐를 최고의 상품으로 거래하며

이윤을 목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최종근거는 여전히 돈입니다.

 

폴라니가 던지는 질문,

강유원 선생님이 <인문 고전 강의>를 통해 던지는 질문은

우리 삶의 최종 근거를 계속해서 이익으로 삼아도 되는가 입니다.

우리 삶이 돈이 아니라 다른 근거 위에 올려질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열 한명이 참석한 스타디가 끝나고 책걸이 종파티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후식까지 먹고 난 뒤 벌어진 이야기 파티에서 우리의 주제는 다시 돈으로 돌아갔습니다.

아파트 값으로 화제가 집중되었고 우리는 웃으며 한탄했습니다.

6개월 공부 끝에도 여전히 우리 삶의 최종 근거는 돈이라고 말입니다.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끊임없는 반성 없이는 관습에 반하여 사고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매일 매일을 돈에 매여 살아도 우리가 매주 모여서 무한자와와 앎, 명예와 공동체의 운명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 삶을 반성해 보기 위함입니다.

그 반성이 당장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만이 또한 우리가 돈에 매몰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막간 공부로

  <문학 고전 강의> 를 읽기로 하였습니다.

  8월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읽을 수 있는 데까지 

  함께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다음주는 <길가메쉬 서사시> 입니다. 

p 16 ~ 69  

 

참고 자료로는 EBS 교양 프로그램인 '통찰' 중 길가메쉬 서사시 강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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