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16강부터 25강까지 총 열강이나 했는데요.
희랍 비극의 3대 시인의 작품을 하나씩 보았습니다.
아홉명이 참석했습니다.
희랍 비극은 희랍 서사시 이후에 출현한 문예 양식입니다.
BC 5C 특히 아테나이의 황금기에 희랍 비극 역시 절정에 이릅니다.
서사시가 영웅의 명예를 주로 다루었다면,
희랍 비극은 인간의 운명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신이 정한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인과관계를 따져 물으며 인간의 정신으로 이해해보려 합니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희랍의 정신이 그대로 비극에 담겨있습니다.
합리적 정신이야말로 희랍 비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랍 비극에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비극적 상황'이라고 부르는 이율배반입니다.
주인공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율배반의 처지에 사로잡힙니다.
아가멤논의 아들인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일 수도 모른 척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거나 어머니의 아들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동시에 어머니의 아들이 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천륜을 어긴 패륜아가 됩니다.
희랍 서사시의 형식은 ' in medias res' 즉 사건의 한 가운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희랍 비극은 서사시보다 훨씬 더 직접적입니다. 별다른 도입부 없이 사건은 정점에서 곧바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도 훨씬 더 처절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습니다. 근친상간은 물론이고 삼촌이 조카를, 아들이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이 죽음은 복수를 부르고 복수는 또 복수를 낳습니다. 도대체 이 비극적 상황은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 걸까요?
희랍 비극의 3대 작가들이 비극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이 결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의 문제는 신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름이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은 아폴론 신이 정해놓았지만, 오이디푸스는 '손수' 자신의 두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신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결말은 뜬금없습니다. 격정의 분출 끝에 메데이아는 용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아가버립니다. 이런 전개를 두고 deus ex machina가 사용되었다는 비난이 있습니다. 기계로부터 나온 신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 작가의 비극이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는 것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주는 앞으로 돌아가서 구약성서의 <욥기> 입니다.
먼저 성서의 <욥기>를 직접 읽어 보고, 이 책을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구약 성서 < 욥기> : 11강 ~ 15강
p 125 ~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