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배우는 본격적 역사는 4대문명에서 시작한다. 4대문명은 4대강 유역의 농경민의 것이고 이후 고대제국의 흥망도 대부분 이들 지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히 역사는 농경민의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역사의 주인은 농경민이 아니라 유목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 만년 농경의 역사에서 농경민과 유목민을 딱 부러지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유목민이 남하해서 정착하면 수 백 년의 시간 속에 토착 농경민이 되어 버리고 농경민이 된 초기 유목민의 후손들은 또 다른 유목민의 침략을 받는다. 이런 과정들이 되풀이 되고, 농경민과 유목민은 거듭 융합되어 새로운 문명과 제국을 만든다. 사실 이렇게 보면 농경민과 유목민을 혹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농경민은 농경민의 생활방식이, 유목민은 유목민의 생활방식이 있고 유라시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이 두 세력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발전해 온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초기 유목민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 덕분이다. 본격적인 유목민 관련 서적을 읽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수준에서나마 맥닐이 설명하는 유목민에 대해 조금 정리해 두려한다.

 

  <아틀라스 세계사>

  

<용선생 세계사 3>

 

“유목문화가 농경세계의 북과 남에서 독자적인 생활양식으로 출현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기원전 3000년 이전에는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사람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p78”

 

유목민들의 터전인 스텝지대는 유라시아 대륙 북위 45도에서 55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수목이 거의 자라지 않아 초기 농경 방법인 화전농법을 하기 힘들었다. 반면 광활한 초원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그래서 스텝의 수렵민은 초창기의 농경민이 발달시킨 각종 기술을 접했을 때, 가축사육을 수용하고 고되고 노동이 따르는 곡물 재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리적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농경을 이해하면서도 경멸하는 독특한 유목민의 생활양식이 출현했다. p78"

 

유목민은 농경민에 비해 수렵 시대의 습성을 훨씬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동경로를 따라 침략자로부터(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축을 보호해야 하는 공동체에는 수렵민 특유의 전투조직과 폭력적 습성이 여전히 중요했다. 이에 비해 초기의 농경민 공동체는 평화롭고 평등주의적이었다.

 

“이후 구세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농경민의 생활에서 비롯된 우세한 인구수와 유목민의 문화적 필요에 부응하는 우월한 정치·군사적 조직 간의 상호작용을 축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p79”

 

고대 제국이 형성되기까지 크게 두 번, 농경민에 대한 유목민의 광범위한 침략이 있었다. BC1500년을 전후하여 전차를 탄 청동기 유목민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고, BC1000년을 전후로 해서 철제 무기를 가진 기마 유목민들이 대거 남하하였다.

 

“기원전 1700년 직후부터 약 300년 동안 문명세계는 야만족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와 동부에 살고 있던 산악민, 시리아·팔레스타인·아라비아 북부 등 사막 주변의 여러 부족, 북방의 스텝지대에서 발원한 각양각색의 전사집단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기존 문명사회의 모든 중심부를 공격했다. 이후의 역사에서 야만족의 정복이 이토록 폭넓게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전문가의 기술을 지탱하는 사회구조가 견고하지 않았던 문명사회의 주변부에서는 야만족의 침입에 의해 그동안 쌓아올린 문화적 성취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문명세계의 양단에 있던 크레타와 인도에서는 아카이아인과 아리아인의 공격을 받아 거의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폐허만 남았다. 그 두 민족의 침략은 기원적 1500년과 기원전 1400년 사이에 가장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p109”

 

아카이아인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그리스인들이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등등, 그리스의 영웅들이 아카이아인들, 말하자면 야만족이란 것이다. 인도의 아리아인은 남하하여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고 갠지스 강으로 이동하여 인도라는 고대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되는 상나라 역시 전차를 이끌고 나타난 야만족의 나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문명을 이루었던 서아시아에서는 야만족이 쉽게 농경민을 정복할 수 없었다. 야만족의 광범위한 침략이 있었지만 문명을 지탱하던 사회구조는 붕괴되지 않았고 다만 미미한 변화만 겪었을 뿐이다. 야만족들이 농경사회를 휩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준마가 끄는 가벼운 전차’ 에 있었다.

 

“그들은 질주하는 전차에 안전하게 몸을 싣고 적의 대열을 향해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다. p110"

 

당시 전차의 이점은 보병부대와 맞선 탱크에 견줄 수 있다. 전차 몇 대만 있으면 쉽게 정복이 끝날 정도였다. 하지만 청동 전차와 무구를 만드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전차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차의 시대는 귀족주의 시대였다.

 

철기와 기마혁명은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침략을 몰고 왔다. 철기가 의도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이었지만 철제 도구와 무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것은 기원전 800년경부터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유목민들은 말 등에 직접 올라타는 기마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철제 무기와 기마술의 결합은 전쟁을 대중화하였다.

 

“이 기술적 진보가 초래한 첫 번째 중대한 결과는 야만족이 또다시 고대 서아시아의 대제국들에 침입하여 기원전 1200년과 기원전 1000년 사이에 그들을 하나씩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철기시대 야만족이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미개하지만 평등한 공동체사회 특유의 심리적 통합력 덕분에 누구나 제몫을 다하는 병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118”

 

“서아시아에 새로 침입한 자들은 청동기시대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북부와 동부의 스텝지대와 남부 사막의 외곽과 같은 변경지대 출신이었다. 이들 이주자 집단 중에는 훗날 유명해지는 민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란의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의 필리스티아인, 히브리인, 아람인, 에게 해 지역의 프리기아인, 도리아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p118”

 

 

<용선생 세계사 3> 

 

인간은 기원전 2000년 이전에도 가끔씩 말을 탔다. 그러나 기마병이 되려면 말을 모는 동시에 활을 쏠 수 있어야 했다. 이 문제를 청동기 시대의 전차 전사들은 기수와 사수라는 2인 1조의 분업 체계로 해결했다. 기원전 800년을 전후로 인간은 혼자서 두 역할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스스로를 말을 모는 하반신과 활을 쏘는 상반신으로 나누어 분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괴물 켄타우로스와 역사시대의 기마인은 전혀 다른 생물학적 종 간의 경이로운 공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기마가 전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p121”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바닷길이나 비단길보다 초원길이 가장 먼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유라시아 대륙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은 뚜껑을 꽉 닫지 않은 병 안에서 떠다니는 무수한 미립자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한 부분에 가해진 압력은 순식간에 전체로 파급된다. 모든 유목민 집단은 자신들이 독점하던 목초지에서 추방되면 아예 사라지거나, 무력으로 인근 집단의 목초지를 재빨리 빼앗았다. 그래서 목초지 관할권에 어떤 중대한 혼란이 생기면, 그 여파가 몇 계절 만에 초원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파급되었다. 한 집단이 인근 집단을 밀어내는 반복적인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쫓겨난 최약체 집단은 사멸하거나, 스텝지대의 북쪽과 서쪽에 위치한 살기 힘든 삼림지대로 도망치거나, 문명세계의 방위선을 뚫고 남하하여 농경민의 지배자가 되었다.p284~5”

 

유라시아 스텝지대의 동쪽은 서쪽보다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유목민들에게도 혹독한 지리적 조건에 속한다. 스텝지대에서 유목민들 간의 이동이 대부분 ‘서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 사실로 인해, 스텝지대 전체가 유목민 집단으로 채워질 무렵 (기원전 400년경 이후)에는 동서의 기상변화도가 규칙적이고 매우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몽골 고원은 환경이 대단히 가혹하여 사람이나 동물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헝가리 평원까지 뻗어있는 스텝지대의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고 비를 머금은 대서양 바람이 지척에서 불기 때문에 온난하고 습윤해진다. 그러다 보니 스텝지대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뒤에는 피난민 그리고/또는 정복자가 질 좋은 초지와 온난한 기후가 유혹하는 서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서진이 수세기 동안 꾸준히 대세를 이루었다. p193”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서진은 주로 중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의 여러 유목국가들은 중국과의 대결 과정에서 주변 유목민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밀려난 유목민은 연쇄적으로 다른 유목민을 서쪽으로 밀었다. 서쪽 초원 끝의 유목민은 유럽 대륙 아래쪽으로 남하하여 문명세계를 침략했다.

 

진시황에 의해 쫓겨난 내몽골 유목민 부족들은 외몽골 스텝지대로 달아나며 오히려 강력한 야만족 연합체를 형성했는데 이들이 한나라를 위협했던 흉노 연합체이다. 이후 흉노는 스텝지대를 횡단하여 서쪽으로 지배력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추방했는데, 이 민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의 영향권에 있던 박트리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흥미롭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왕국은 쇠망해가던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의 중간지대에서 흥기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다른 왕국들보다 훨씬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 기원전 102년에는 중국 군대가 서진하여 멀리 시르다리야 강까지 천자의 종주권을 확립했다. 얼마 후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쿠샨의 왕이 지배하는 제법 강력한 군주국이 이전에 박트리아 왕국이 있던 곳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산악지대를 지나 파키스탄까지 걸쳐 있던 지역-에 세워졌다. 쿠샨인은 흉노가 중국의 서역에서 쫓아낸 페르시아 부족민의 후손이었다. p254~5”

 

정리하자면 인도의 쿠샨은 페르시아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인데 이들은 흉노에 의해 쫓기다가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웠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들을 한나라가 월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무제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고 오도록 장건을 파견했다. 월지도 흉노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가능한 계획이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여년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월지를 찾아냈는데, 이들은 이미 정착하여 잘 살고 있었다. 여기서 월지가 쿠샨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은 한나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장건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흉노와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져와 결국 흉노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비단길이라는 동서교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용선생 세계사 3>

 

 

비단길이 열리고 동서교역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무장 기병의 등장이 그것이다. 스텝지대의 말은 조랑말이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 이전에 파르티아인이 말에게 특별히 재배한 알팔파를 사료로 먹이면서 훨씬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품종의 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은 기병과 말이 완전무장을 해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중무장한 기병은 스텝지대의 경무장 기병이 쏘는 화살도 방어하기 쉬웠고 그들의 퇴각도 방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문명세계의 중무장 기마병과 스텝지대 유목민의 경무장 기마병 사이에는 일종의 대치상태가 형성되었다. 어느 쪽도 상대방의 세력권 안에서는 승리할 수 없었다. 대형 말은 황량한 스텝지대의 빈약한 잡초만 먹어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고, 농경지대에서는 비무장 유목민이 중무장한 신식 기마병에게 승리할 수 없었다. p25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스텝지대의 유목민에 대한 방어선이 구축되자, 문명사회의 정부와 상인은 서로 협력하여 안정적인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잘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며 무거운 통행세가 부과되는 대상로가 중국과 로마를 연결했던 것이다. 대상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 가서 중국의 비단을 로마 제국의 시리아까지 운반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금속, 유리, 상당량의 화폐와 같은 다양한 상품을 싣고 왔다. p256”

 

“거의 같은 시기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 홍해를 근거지로 삼아 활약하던 선장들이 인도양의 규칙적인 계절풍을 이용하여 아덴 해협에서 대양을 횡단하여 남인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벵골 만을 건너 인도의 동해안과 말레이를 연결하는 유사한 항해도 시도되었다. 크라 지협의 짧은 거리를 육로로 횡단하면 동남아시아 연안에서 활동하던 중국의 선박과 접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력기원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말레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지협 구간만 제외하면, 해상교역로가 로마와 중국을 연결하게 되었다. p256~7”

 

훈족과 관련된 또 한 번의 대이동이 있었다. 중국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휩싸이기 시작했을 때 북쪽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했다. 흉노와 선비, 저, 갈, 강 부족들이 번갈아 16개의 국가를 세웠다. 이들의 남하로 비게 된 초원을 차지한 후 급격하게 성장한 것이 유연이다. 유연이 서쪽으로 뻗어나가자 다른 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그런 집단 중 하나가 유럽의 역사에 등장하는 훈족이다. 이들은 서기 372년에 남부 러시아에 나타났고, 그 지역을 한 세기 이상 지배하던 동고트족을 몰아냈다. 인접한 서고트족은 훈족이 두려워서 로마 제국 영내로 피난했다. 그 떠돌이 전사집단은 로마 정부와 불화를 빚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변경에서 살아갔다. 서기 410년 로마 시를 약탈한 뒤에,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땅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국은 711년까지 존속했다.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인의 여러 부족이 서고트족의 전철을 밟았고, 다른 부족들은 무시무시한 훈족에게 항복했다. p285”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의 대이동은 훈족 때문인데, 훈족은 북 흉노로 추정된다.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만리장성 아래로 내려간 흉노는 남 흉노, 유연에게 쫓겨난 흉노는 북 흉노이다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북 흉노가 서진하면서 게르만을 밀어낸 것인데, 이들을 유럽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투르크와 몽골 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윌리엄 맥닐이 『세계의 역사1』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유목민에 관한 내용은 이 정도이므로, 부득이 이 글도 여기서 마무리 한다.

 

덧붙임 :  '코미타투스'라는 게르만 전사집단의 시원이 유라시아 유목민에서 시작된다는 KBS다큐 <초원의 제국> 2부 '황금의 맹세'

 

 https://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sugsch&w=tot&DA=GIQ&sq=KBS+%ED%8A%B9%EB%B3%84%EA%B8%B0%ED%9A%8D+&o=2&sugo=15&q=KBS%ED%8A%B9%EB%B3%84%EA%B8%B0%ED%9A%8D+2%EB%B6%80%EC%9E%91+%EC%B4%88%EC%9B%90%EC%9D%98+%EC%A0%9C%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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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의 무료함에 지쳐갈 즈음 '친구따라 강남가기 스타디'를 결정하였습니다. 최태성 고급한국사를 함께 공부했던 지인들 중 한 명이 공무원 시험 도전에 나섰는데, 한국사 내용이 우리가 공부했던 것보다 조금 더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고, 거기에 살짝 자극을 받았습니다. 전국민(?) 공무원 열풍이 상시화 된 이 시대에 한국사를 기본이나마 공부했다고 하려면 공무원 시험을 볼 수준은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무덥던 연휴 그 어느날, 한 명의 공무원을 만들기 위해 가을부터 우리는 울기로 아니 머리를 싸매기로 하였습니다. 일종의 페이스 메이커 (pacemaker)가 되기로 하였지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공부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으니,  공무원 시험 pace에 신경쓰지 않고 심화 공부를 하며 우리 나름의 pace를 만들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세 명이 불참하고 열 세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교재는 전한길의 <합격생 필기 노트>를 선정하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많이 본다기에 덜컥, 그런데 온라인 강의는 불행히도 무료가 아니어서 필요한 분들만 듣기로 하였습니다. 한 주에 6쪽 정도 진도를 계획했는데 역시나 처음보는 세세한 내용들이 적지 않게 끼어 있어서 오늘 꼬박 3시간을 했지만 가까스로 4쪽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의 현실은 이 정도이니 무리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노트>

 

오늘은 8쪽에서 12쪽까지, 고조선과 초기 여러나라 그리고 고구려에 관해 공부하였습니다. 오늘 공부중 제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입니다. 요동과 만주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혔던 고조선과 고구려인지라 중국의 여러나라들과 충돌하며 세력다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고조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BC7C 경의 『관자』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단군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의 『삼국유사』입니다.  고조선은 BC 2333년에 건국되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건국 연도가 특정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와 조선 시대 역사서인 『동국통감』이 그 출처입니다. 고조선의 8조법은 중국 한나라 때의 『한서』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뉩니다. 기자조선은 16C 사림들이 적극 받아들였지만 현대 국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는 주 무왕이 조선의 왕으로 책봉한 은나라 사람이라고 하니, 이에 의하면 중국이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결론이 됩니다.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이것을 식민사관 입장에서 타율성의 증거로 활용하였습니다.

 

고조선에는 BC5C 경에 철기가 유입됩니다. 청동기 군장국가로 시작한 고조선은 BC4C~BC3C 무렵에 '왕'을 칭하고, 왕위가 세습될 정도로 강성해집니다. 이 시기 중국은 전국 시대의 혼란기입니다. 전국7웅 중 연나라가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서로 대립합니다. BC4C에 연이 왕을 칭하며 동쪽으로 확장하자 고조선도 왕을 칭하며 연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촉즉발의 충돌은 외교적 노력으로 무마되었지만 결국 BC3C 초에 연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고조선은 요하 지역 2천 여리를 상실하는 타격을 입습니다.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하를 중심으로 하는 요령이었는데, 연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왕검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고조선의 왕성입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 위치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고 합니다.)

 

고조선은 BC3C말에서 BC2C초에 또 한번 중국의 영향으로 큰 변화를 겪게됩니다. 중국의 진나가 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는 진한 교체기에 위만이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건너옵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국경수비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세력을 키운 위만은 준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BC194년에 위만조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위만조선부터 철기가 본격 수용되고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합니다. 위만조선은 한과 진·예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독점하였습니다. 한무제는 이에 반발하여 예의 영토에 창해군을 설치합니다. 창해군은 한과 고조선의 충돌을 격화시켰고 20년 후 마침내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합니다. 한의 침략에는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한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이었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합할 것을 경계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고조선은 한을 패수에서 대파하는 등 초기에 승리하였으나, 조선상 역계경이 2000여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쪽 지역인 진으로 내려가는 등 한의 침략 1년 만인 BC108년에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멸망한 고조선의 유이민과 100년 전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 세력 등은 남쪽의 진으로 내려갔고 진은 이들 세력을 받아들여 삼한으로 성장합니다. 

 

한은 고조선에 군현을 설치하였지만 40년도 채 되지 않아 임둔, 진번, 현도는 무너지고 낙랑군만 4C까지 유지됩니다. 낙랑군은 많은 무덤과 유물로 보아 평양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됩니다. 한에 저항한 토착세력들은 부여와 고구려, 옥저 등 여러나라를 세워 각축하다가 점차 고구려, 백제, 신라에 흡수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고구려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과 접경지역에 자리잡은 고구려로서는 숙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3C와 4C에 중국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는 등 큰 위기를 겪습니다. 3C에 중국은 한나라가 망하고 위진남북조 시대를 막 시작하였습니다. 동천왕은 위나라와 낙랑군의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서안평 즉 압록강 서쪽을 먼저 침략합니다. 위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위와 각축하던 오나라와 수교를 맺기도 합니다. 이에 위의 장수 관구검이 침입하여 국내성과 배후산성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습니다. 

 

4C부터 5C 중반까지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맞습니다. 고국원왕 때 5호 중 선비족이 세운 전연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왕릉을 도굴하는 등 커다란 위기를 맞습니다. 많은 재물로 수습하였지만 얼마 못가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황해도 일대를 두고 다투다 전사하였습니다. 4C말부터 5C초까지 재위한 광개토왕은 선비가 세운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으로 진출합니다. 선비에 대한 복수였을까요? 물론 그 외에도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숙신과 거란을 정벌하여 만주를 차지합니다. 동부여를 복속하고 백제의 아신왕을 공격하여 한강 이북까지 진출합니다. 

 

5C 장수왕은 중국의 정치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외교와 정복전쟁을 병행합니다. 5C 중국의 북쪽은 선비족에 의해 북위로 통일됩니다. 남쪽은 한족이 새로운 왕조를 맞이하여 남북조 시대가 열립니다. 선비가 중국 북쪽을 차지한 사이 초원지대는 신흥 유목민족인 유연이 대제국을 이루어나갑니다. 중국의 남쪽에는 송, 북쪽에는 북위, 초원지대는 유연 그리고 동쪽에는 고구려, 이렇게 4강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의 남북조와 균형외교를 수립합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압박을 받은 백제는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습니다. 백제는 또한 북위와 연합하려합니다. 한편 고구려는 북위와 외교관계를 맺는 동시에 북위가 물길(말갈)과 연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연과 손을 잡습니다. 유연과 함께 북방 유목민족인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여 흥안령 일대의 초원을 장악합니다. 이렇게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중국의 여러 세력과 한반도의 삼국은 복잡은 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다투게 됩니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는 사건은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게 고구려를 침략해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북위는 이를 거절하고 서신이 고구려의 손으로 들어갑니다.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은 아차산성 부근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장수왕의 남북조 균형외교가 빛을 발한 걸까요?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는 7C에 절정을 향해 치달립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589년 수나라에 의해 끝납니다. 중국이 수나라를 통일하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의 영양왕은 먼저 선제 공격을 합니다. 이후 4차례의 여·수 전쟁이 일어납니다. 1차는 수문제가 2차부터는 수양제가 침략합니다. 2차가 612년의 살수대첩입니다. 2차 수양제의 침입은 신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걸사표를 보냅니다.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는 서신입니다. 7C는 이른바 십자외교 관계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관산성 전투 이후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왜와 밀접한 백제는 고구려와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여 수직축을 이루고, 고립된 신라는 수당과 연합하여 수평축을 이루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멸망하고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었습니다. 수나라를 막아낸 고구려도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당과 화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사태가 악화됩니다. 영류왕은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연개소문을 보내 요하 유역에 천리장성을 건설합니다. 당에 대한 강경 정책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과정에 세력을 키워 친당파인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합니다. 당태종은 영류왕 살해를 빌미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한 당태종은 퇴각합니다. 한편 신라의 선덕여왕은 백제 의자왕의 공격에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을 뺏기고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이 거절합니다. 진덕여왕 즉위후 김춘추는 당태종을 만나 나당 연합을 결성합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죽는 등 당나라의 정세 변화에 의해 나당연합은 바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고 김춘추가 왕에 오른 후에 백제 공격을 개시합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 중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주는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을 중심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진행은 질의 응답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처음 접하는 내용에 대한 설명은 매 쪽마다 한사람씩 책임지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주 진도와 담당입니다.

 

12쪽 백제 : 갱이

13쪽 신라 : 고구마

14쪽 가야연맹 : 자두

15쪽 삼국 전성기와 정치체제 : 코스모스

 

 

 

 

 

 

 

참고 사이트 소개합니다.

http://cafe.daum.net/artizm/Lh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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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도시에 내려와 살면서 처음 조직한 스타디 팀입니다.

우연히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을 준비하면서 모인 팀인데

벌써 만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초창기 회원을 근간으로 새로운 회원들이 가세하여 유지되고 있습니다.

모두들 한국사와 세계사 기초 공부를 마친 분들입니다.

 

지난주부터 강유원의 <역사 고전 강의> 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여름 다른 팀과 함께 스타디하였습니다.

그때 스타디 후기를 남겼기 때문에 이번에는 별도의 후기는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슷하게 진행될 텐데, 단 그때 보다 세계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 팀이라

'고전' 텍스트에 조금 더 비중을 두어 공부하려고 합니다.

 

이 페이퍼를 매주 수정하면서 간단한 기록사항을 남길 예정입니다.

 

 

1회 

       일시 : 2017. 9. 4

       참석 : 13명 

       진도 : 1~ 2강 / 서양사 초기 개요  

 

2회 

       일시 : 2017. 9.11

       참석 : 14명

       진도 : 3~ 4강 / 헤로도토스의 <역사>      

 

3회

       일시 : 2017. 9.18

       참석 : 13명 

       진도 : 5~8강 /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회

       일시 : 2017. 9.25

       참석 : 13명

       진도 : 9~10강 /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회

 

       일시 : 2017. 10.16

       참석 : 14명

       진도 : 11~13강 /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6회

 

       일시 : 2017. 10.23

       참석 : 13명

       진도 : 14~17강 /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일시 : 2017. 11.13

       참석 : 13명

       진도 : 막간 공부

 

 

7회

 

       일시 : 2017. 11. 20

       참석 : 13명

       진도 : 18~21강 / 비코의 <새로운 학문> 

 

8회

 

       일시 : 2017. 11. 27

       참석 : 7명

       진도 : 22~25강 /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9회

 

       일시 : 2017. 12. 04

       참석 : 12명

       진도 : 26~30강 /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10회

 

       일시 : 2017. 12. 11

       참석 : 9명

       진도 : 31~33강 / 헤르더의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11회

 

       일시 : 2017. 12. 18

       참석 : 13명

       진도 : 34~37강 /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12회

 

       일시 : 2017. 12. 28

       참석 : 9명

       진도 : 38~40강 / 에드워드 카의 <20년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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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쉬고 다시 시작한 첫 주에

<문학 고전 강의> 마지막 스타디를 하였습니다.

열 명이 모였고요.

 

방학 기간 중 그동안 공부한 고전을 한권씩 읽기로 했는데요.

각자 읽은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방학 전에 끝내지 못했던 <팡세> , <파우스트> , <모비 딕> 도 마저 공부하였습니다.

 

 

다음주부터는 <역사 고전 강의>를 공부합니다.

회원도 조금 늘어날 것 같고요.

우리 팀은 한국사, 세계사, 서양철학사에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와 <문학 고전 강의> 까지 모두 공부했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해 말까지 약 14주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역사 고전 강의> 가 끝나면 내년부터는 철학사를 다시 한번 공부하려고 합니다. 

 

다음주 진도입니다.

 

 

   1강 ~ 2강  : p 29 ~ 44

   강의 파일 : 20110211 ~ 201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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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사를 공부하고, 막간에 잠시 틈을 내어 

강유원의  <문학 고전 강의>를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이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맥베스와 오셀로를 공부하였습니다. 

<문학 고전 강의>를 다 읽지 못했지만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는 터라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우리 스타디도 방학입니다. 

남은 팡세와 파우스트 그리고 모비딕은 8월 마지막 주에 한꺼번에 

공부하려고 합니다. 

 

방학 동안 과제를 정했습니다.

<문학 고전 강의>가 다루고 있는 고전들 중 

한 권씩만 골라서 완역본으로 읽는 것입니다. 

스타디 중에는 마음이 있어도 늘 시간에 쫓겨 제대로 읽지를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8월 마지막 주에 <문학 고전 강의> 마지막 스타디를 합니다.

그 때 각자 읽어온 것을 5분 ~ 10분 동안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9월부터는 <역사 고전 강의>를 시작합니다. 

기존 멤버에 새로운 멤버가 합류할 것 같은데요.

대부분은 한국사에 이어 세계사까지 공부하신 분들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그리고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역사 고전 강의> 는 약 12 ~ 16 주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2011년도에 강유원 선생님이 강의하신 파일도 있으니 함께 들으며

우리의 세계사 지식을 조금 더 깊이있게 만들어 봅시다. ^^

 

오늘은 일곱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럼 한 달 동안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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