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무료함에 지쳐갈 즈음 '친구따라 강남가기 스타디'를 결정하였습니다. 최태성 고급한국사를 함께 공부했던 지인들 중 한 명이 공무원 시험 도전에 나섰는데, 한국사 내용이 우리가 공부했던 것보다 조금 더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고, 거기에 살짝 자극을 받았습니다. 전국민(?) 공무원 열풍이 상시화 된 이 시대에 한국사를 기본이나마 공부했다고 하려면 공무원 시험을 볼 수준은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무덥던 연휴 그 어느날, 한 명의 공무원을 만들기 위해 가을부터 우리는 울기로 아니 머리를 싸매기로 하였습니다. 일종의 페이스 메이커 (pacemaker)가 되기로 하였지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공부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으니,  공무원 시험 pace에 신경쓰지 않고 심화 공부를 하며 우리 나름의 pace를 만들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오늘은 세 명이 불참하고 열 세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교재는 전한길의 <합격생 필기 노트>를 선정하였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많이 본다기에 덜컥, 그런데 온라인 강의는 불행히도 무료가 아니어서 필요한 분들만 듣기로 하였습니다. 한 주에 6쪽 정도 진도를 계획했는데 역시나 처음보는 세세한 내용들이 적지 않게 끼어 있어서 오늘 꼬박 3시간을 했지만 가까스로 4쪽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의 현실은 이 정도이니 무리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노트>

 

오늘은 8쪽에서 12쪽까지, 고조선과 초기 여러나라 그리고 고구려에 관해 공부하였습니다. 오늘 공부중 제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입니다. 요동과 만주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혔던 고조선과 고구려인지라 중국의 여러나라들과 충돌하며 세력다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입니다. 

 

고조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BC7C 경의 『관자』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단군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의 『삼국유사』입니다.  고조선은 BC 2333년에 건국되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건국 연도가 특정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와 조선 시대 역사서인 『동국통감』이 그 출처입니다. 고조선의 8조법은 중국 한나라 때의 『한서』에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뉩니다. 기자조선은 16C 사림들이 적극 받아들였지만 현대 국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자는 주 무왕이 조선의 왕으로 책봉한 은나라 사람이라고 하니, 이에 의하면 중국이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결론이 됩니다.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이것을 식민사관 입장에서 타율성의 증거로 활용하였습니다.

 

고조선에는 BC5C 경에 철기가 유입됩니다. 청동기 군장국가로 시작한 고조선은 BC4C~BC3C 무렵에 '왕'을 칭하고, 왕위가 세습될 정도로 강성해집니다. 이 시기 중국은 전국 시대의 혼란기입니다. 전국7웅 중 연나라가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서로 대립합니다. BC4C에 연이 왕을 칭하며 동쪽으로 확장하자 고조선도 왕을 칭하며 연을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촉즉발의 충돌은 외교적 노력으로 무마되었지만 결국 BC3C 초에 연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고조선은 요하 지역 2천 여리를 상실하는 타격을 입습니다.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하를 중심으로 하는 요령이었는데, 연의 침략으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왕검성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고조선의 왕성입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 위치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고 합니다.)

 

고조선은 BC3C말에서 BC2C초에 또 한번 중국의 영향으로 큰 변화를 겪게됩니다. 중국의 진나가 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지는 진한 교체기에 위만이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건너옵니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국경수비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세력을 키운 위만은 준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BC194년에 위만조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위만조선부터 철기가 본격 수용되고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합니다. 위만조선은 한과 진·예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독점하였습니다. 한무제는 이에 반발하여 예의 영토에 창해군을 설치합니다. 창해군은 한과 고조선의 충돌을 격화시켰고 20년 후 마침내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합니다. 한의 침략에는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한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이었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합할 것을 경계했던 이유도 있습니다. 고조선은 한을 패수에서 대파하는 등 초기에 승리하였으나, 조선상 역계경이 2000여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쪽 지역인 진으로 내려가는 등 한의 침략 1년 만인 BC108년에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멸망한 고조선의 유이민과 100년 전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 세력 등은 남쪽의 진으로 내려갔고 진은 이들 세력을 받아들여 삼한으로 성장합니다. 

 

한은 고조선에 군현을 설치하였지만 40년도 채 되지 않아 임둔, 진번, 현도는 무너지고 낙랑군만 4C까지 유지됩니다. 낙랑군은 많은 무덤과 유물로 보아 평양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됩니다. 한에 저항한 토착세력들은 부여와 고구려, 옥저 등 여러나라를 세워 각축하다가 점차 고구려, 백제, 신라에 흡수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고구려는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과 접경지역에 자리잡은 고구려로서는 숙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3C와 4C에 중국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는 등 큰 위기를 겪습니다. 3C에 중국은 한나라가 망하고 위진남북조 시대를 막 시작하였습니다. 동천왕은 위나라와 낙랑군의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서안평 즉 압록강 서쪽을 먼저 침략합니다. 위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위와 각축하던 오나라와 수교를 맺기도 합니다. 이에 위의 장수 관구검이 침입하여 국내성과 배후산성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습니다. 

 

4C부터 5C 중반까지 중국은 5호16국 시대를 맞습니다. 고국원왕 때 5호 중 선비족이 세운 전연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미천왕릉을 도굴하는 등 커다란 위기를 맞습니다. 많은 재물로 수습하였지만 얼마 못가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황해도 일대를 두고 다투다 전사하였습니다. 4C말부터 5C초까지 재위한 광개토왕은 선비가 세운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으로 진출합니다. 선비에 대한 복수였을까요? 물론 그 외에도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숙신과 거란을 정벌하여 만주를 차지합니다. 동부여를 복속하고 백제의 아신왕을 공격하여 한강 이북까지 진출합니다. 

 

5C 장수왕은 중국의 정치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외교와 정복전쟁을 병행합니다. 5C 중국의 북쪽은 선비족에 의해 북위로 통일됩니다. 남쪽은 한족이 새로운 왕조를 맞이하여 남북조 시대가 열립니다. 선비가 중국 북쪽을 차지한 사이 초원지대는 신흥 유목민족인 유연이 대제국을 이루어나갑니다. 중국의 남쪽에는 송, 북쪽에는 북위, 초원지대는 유연 그리고 동쪽에는 고구려, 이렇게 4강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진 정책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의 남북조와 균형외교를 수립합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압박을 받은 백제는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습니다. 백제는 또한 북위와 연합하려합니다. 한편 고구려는 북위와 외교관계를 맺는 동시에 북위가 물길(말갈)과 연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연과 손을 잡습니다. 유연과 함께 북방 유목민족인 지두우를 분할 점령하여 흥안령 일대의 초원을 장악합니다. 이렇게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중국의 여러 세력과 한반도의 삼국은 복잡은 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다투게 됩니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는 사건은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게 고구려를 침략해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북위는 이를 거절하고 서신이 고구려의 손으로 들어갑니다. 장수왕의 공격을 받은 개로왕은 아차산성 부근에서 죽음을 당합니다.  장수왕의 남북조 균형외교가 빛을 발한 걸까요?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는 7C에 절정을 향해 치달립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589년 수나라에 의해 끝납니다. 중국이 수나라를 통일하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의 영양왕은 먼저 선제 공격을 합니다. 이후 4차례의 여·수 전쟁이 일어납니다. 1차는 수문제가 2차부터는 수양제가 침략합니다. 2차가 612년의 살수대첩입니다. 2차 수양제의 침입은 신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걸사표를 보냅니다.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원병을 요청하는 서신입니다. 7C는 이른바 십자외교 관계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관산성 전투 이후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신라와 백제는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왜와 밀접한 백제는 고구려와 고구려는 돌궐과 연결하여 수직축을 이루고, 고립된 신라는 수당과 연합하여 수평축을 이루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멸망하고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었습니다. 수나라를 막아낸 고구려도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당과 화친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태종이 즉위하면서 사태가 악화됩니다. 영류왕은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연개소문을 보내 요하 유역에 천리장성을 건설합니다. 당에 대한 강경 정책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과정에 세력을 키워 친당파인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장악합니다. 당태종은 영류왕 살해를 빌미로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안시성을 함락하지 못한 당태종은 퇴각합니다. 한편 신라의 선덕여왕은 백제 의자왕의 공격에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의 성을 뺏기고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이 거절합니다. 진덕여왕 즉위후 김춘추는 당태종을 만나 나당 연합을 결성합니다. 하지만 당태종이 죽는 등 당나라의 정세 변화에 의해 나당연합은 바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고 김춘추가 왕에 오른 후에 백제 공격을 개시합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 중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주는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을 중심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진행은 질의 응답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처음 접하는 내용에 대한 설명은 매 쪽마다 한사람씩 책임지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주 진도와 담당입니다.

 

12쪽 백제 : 갱이

13쪽 신라 : 고구마

14쪽 가야연맹 : 자두

15쪽 삼국 전성기와 정치체제 : 코스모스

 

 

 

 

 

 

 

참고 사이트 소개합니다.

http://cafe.daum.net/artizm/Lh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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