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10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지음, 이정은 옮김, 송준서 감수, 강치원 추천 / 느낌이있는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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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다지기>

 

러시아 혁명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르의 전제정치와 러·일 전쟁의 패배, 전 세계적 경제위기까지 겹친 러시아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노동자 15만 명과 그 가족들이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아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했다.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한 평화 시위대를 맞이한 것은 총칼로 무장한 차르의 군대였다. 차르를 ‘자애로운 아버지’로 생각했던 러시아 민중은 배신감에 분노했다. 대규모 파업이 줄을 이었다. 6월에는 흑해함대 포툠킨호에서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오데사의 노동자 파업에 동참했다. 각지의 농민반란도 이어졌다. 10월에 시작된 철도 노동자 파업이 총파업으로 번지면서 최초의 민주적 노동자 대표 의회인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입법적 성격의 두마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파업이 중단되자 차르 정부는 탄압에 나섰고, 2년간의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모든 대도시에서 조직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는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참전국들 중 전선은 가장 길었고 산업은 허약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귀족과 농민 사이의 갈등도 깊어갔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이라는 타락한 성직자에게 권력을 내어주고 미신에 빠졌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1917년 러시아 구력 2월 (신력 3월) 27일, 페트로그라드의 농민 반란은 엄청난 기세로 번져 갔다. 진압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농민 편에 가담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반란이 성공하면서 대도시와 농촌 곳곳, 소수민족 지역까지 봉기가 일어났다. 3월 2일에 니콜라이 2세가 퇴위 조서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혁명은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운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볼셰비키(구소련 공산당)는 초대받지 못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 ·병사 대표는 급히 소비에트 1차 회의를 소집하여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자유주의적 자본가와 귀족들의 대표로 구성된 새로운 정권과 군사력을 장악한 노동자 ·병사의 대표인 소비에트 정권이 동시에 탄생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정권의 대립은 예고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기존의 경제 · 사회 질서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고 제국주의 전쟁도 지속했다. 임시정부가 노동자와 병사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1917년 4월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이 돌아와 볼셰비키 대표회의에서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러시아의 정치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혁명 전술을 정리한 10개 조항 이었다. 레닌은 민중들에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모으자고 외쳤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무력 충돌하였다. 러시아 구력 10월(신력 11월) 24일, 발틱함대 순양함 아브로라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10월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0월 25일 소비에트 대표들은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정권을 차지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1918년 3월까지 러시아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모스크바를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로 삼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18년부터 1920년 11월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새 정권에 대항하는 귀족과 지주, 자본가들이 반혁명군을 만들어 내전을 일으켰다. 사회주의 혁명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자본주의 열강들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온 나라가 전쟁터로 변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정부는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여 방어에 나섰다. 식량을 징발하고 산업을 국유화 시키는 등 경제를 특별 관리하고 모든 인력을 전쟁에 투입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온 나라를 큰 군대처럼 만든 결과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 생산이 무너지고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본 레닌은 1921년 신경제 정책 (NEP)을 수립하였다. 신경제정책은 한마디로 혼합경제이다.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여 시장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인정하였다. 신경제 정책이 효과를 보아 소련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려 하였으나 1923년 건강악화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권력을 획득한 스탈린은 신경제 정책을 약화시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국가가 아니라 국가들의 연방이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평등한 입장에서 연방을 형성한다는 문건에 서명하였다. 최고 소비에트 회의와 인민위원회를 각각 국가 최고의 권력 기관과 집행 기관으로 삼고 모든 가맹국은 자유로이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의 연방 조약도 만들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고자 하는 국가들을 위한 가입 방식도 규정했다. 4개 국가로 출발한 소련은 점차 가입 국가가 늘어나 1956년에 15개 국가가 가입했다. 위의 사진은 소련 해체 후 국가들인데,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국가들과 동일하다. 처음 가입한 자카프카지예가 1936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어 3국가 모두 소련 연방에 가입했다.  

 

1923년 레닌이 죽고 권력 투쟁 끝에 1929년 스탈린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식량 수요가 폭증하자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 집단화 운동을 대규모로 실시하였다. 스탈린의 산업화, 집단화는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켰으나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경공업과 농업이 침체되어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기대에 못 미쳤고 경제가 불균등 발전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다지기>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 독일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는 1936년에서 1937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방공협정에 서명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경쟁하는 와중에 추축국이 방공을 천명하고 나섰는데 어떻게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을까?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히틀러는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소련은 위협을 느끼고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에 가까이가려 했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은 ‘위기를 동쪽으로’ 넘기려 했다. 독일의 힘을 빌려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과정에 희생양이 된 것이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독일이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아래 주권을 회복하여 두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쟁을 하면 동맹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해야 할 상황이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던 영국 총리는 히틀러를 만나 독일에 수데텐란트를 넘겨주기로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탈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가 뮌헨에 모여 수데텐란트를 넘겨줄 것을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이 회담에서의 협정을 뮌헨협정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일련의 외교적 과정을 거쳐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일을 이용해서 자국을 제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련은 한편으로는 꾸준히 유럽 국가들과 합동 안보 계획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1939년 일본과 소련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독일과 일본 양쪽에서 군사적 위기를 맞게 되자 소련은 ‘위기를 서쪽으로 넘기려는’ 전략을 세웠다. 독일과 협상을 맺어 시간을 벌기로 한 것이다. 독일 역시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부담을 덜고자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방공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했다. 예상 밖의 공격으로 소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독일 군대가 번개 같은 속도로 소련 영토에 들어왔다. 소련의 피해는 심각했다. 하지만 12월부터 소련은 반격에 나섰다. 혹한의 모스크바에서 겨우내 격렬한 전투 끝에 소련이 독일을 몰아냈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의 첫 패배로 기록되었다. 독일은 소련 침공당시 크게 세 갈래로 진격해 왔다. 남쪽의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중앙의 모스크바, 북쪽의 레닌그라드이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장장 900일 동안 계속되었다.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어 300만 시민이 아사할 위기에 처했지만 꽁꽁 언 호수 위로 물자를 공수하며 끈질기게 버티었다. 1941년에 시작된 전투는 1944년 소련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전투이자 가장 참혹했던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이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와 캅카스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1942년 6월 28일(다른 책에는 8월 21일을 시작점으로 봄) 독일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1943년 2월 2일에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스탈린그라드에 배치 받은 소련군의 평균수명은 24시간, 독일군은 7초마다 한명씩 죽어나갔다는 통계가 나돌 정도이니 그 참혹함은 인류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1943년에 탱크전이 치열했던 쿠르스크 전투도 또 한번의 결정적 전투였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나치 독일의 쇠퇴를 예고했다면 쿠르스크는 나치를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손을 잡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곧바로 대립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냉전을 공식 선언했다. 마셜플랜을 수립하여 유럽에 대한 막대한 경제 원조를 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가 창설되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가 미국 워싱턴에서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했다. 나토는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급기야 1955년에는 서독이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서독의 가입으로 완성된 서방 세계의 안보 시스템은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큰 위협이었다.1955년 동구권에서도 소련을 중심으로 8개국이 바르샤바에서 조약을 맺고 나토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으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출범시켰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소련이 붕괴된 1991년에 해체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의 시대가 열렸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정책과 그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모든 분야에 변화를 추진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 세계를 이끌자’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미국과 서방 국가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냉전은 심화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는 또 한 번의 전쟁 위기를 겪었다.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서도 흐루쇼프에 대한 불만이 커져서 1964년 대표회의는 흐루쇼프를 해임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985년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으로 당선되면서 소련은 다시 한 번 개혁의 기회를 맞았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공산당 일당독재를 완화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방은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만들었고, 개혁도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1990년 6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다음백과 표현 or 연방 공화국?)의 인민대표회의는 러시아 법이 소비에트 법보다 우선함을 공포했다.(러시아 공화국은 소련에 직속된 형태의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공화국의 독자적인 당 서기장직은 1990년에야 성립되었다.) 1991년 4월에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러시아연방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직을 신설했다.  6월 옐친은 국민 투표로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변화에 반발하며  8월에 공산당의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도리어 공산당이 해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1년 12월 21일에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11개국이 모여 독립국가 연합을 창설하였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막아보려던 고르바초프가 1991년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1990년 소련 대통령으로 추대)에서 물러나고 크렘린 궁의 소련 깃발도 내려졌다. 이로써 70년 동안 유지된 소련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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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주~욱 연결하여 이해해보려고 스터디 회원 한분께 러시아 통사를 맡겼다. 두 시간을 차분히 열강하신 회원이 참고했다며 가지고 온 책을 내가 빌려왔다.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시리즈 10권 『러시아사』 이다. 지은이인 맥세계사편찬위원회는 중국의 연구소인 것 같다. 독특하게도 러시아 역사를 중국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관점에 대한 미심쩍음이 없진 않으나 별 오류가 없다면 기초 사실을 익힌다는 목적에는 어긋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큰 염려는 러시아 용어를 중국어로 옮긴 것을 다시 한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주 기괴한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으나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분이 감수했다고 하니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 굳이 자료를 찾지 않아도 딱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의 두 배 정도다. 하지만 인구는 약 1억 4천 2백만 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1/10 정도 밖에 안 된다. 이 넓은 지역의 어디에서부터 러시아의 역사는 시작될까?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동유럽의 평원에 사르마트족이 살았다. 고트족이 나타나 평화롭게 살던 사르마트족을 잡아서 노예로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르마트족은 슬라브라고 불리게 되었다. 슬라브는 노예를 뜻하는 고대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어 slave와 같은 뿌리를 가졌다. 슬라브족은 1세기부터 동슬라브와 서슬라브로 나뉘었고, 유럽에서 게르만이 대이동을 하던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가 남슬라브족을 형성했다.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서슬라브족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고 남슬라브족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살았다.

 

우리가 공부하는 러시아의 역사는 이 동슬라브에서 시작된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 동슬라브족은 점차 합쳐져 북쪽의 노브고로드와 남쪽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두 개의 부락 연맹을 형성했다. 9세기 중엽부터 이들 부락 내에는 끊임없는 내분이 일어났다. 이틈을 타서 북쪽에서 내려온 바랴크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랴크는 바이킹족이다. 9세기에서 11세기에 바이킹 즉 {북쪽의 게르만인) 노르만들이 유럽으로 대거 남하하던 시기에 동슬라브족에게도 노르만이 찾아왔다. 바랴크의 지도자 류리크가 862년 최초로 노브고로드를 점령하고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노브고로드의 두 번째 대공이 된 올레크가 882년 키예프를 점령하고 정치적 중심지를 키예프로 옮겼다. 이로써 키예프 루시 공국이 탄생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국가로 연표에 등장하는 키예프 공국은 바이킹족 (바랴크) 지배자와 동슬라브족 피지배자로 구성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인 지배자와 말갈족 피지배자로 구성된 발해와 유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러시아라는 말의 어원인 ‘루시’는 슬라브족이 자기 땅에 찾아온 이방인인 바이킹을 가리켜 ‘항해술이 뛰어난 사람’ 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다. 이후로 바이킹과 슬라브족은 서로 동화되어 새로운 슬라브족으로 탄생하였다.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 국가 명칭으로는 루시(바이킹을 가리킴)를 사용하며 지금까지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러시아 역사에는 딱 두 왕조만이 등장한다. 류리크왕조와 로마노프왕조이다. 류리크왕조는 바이킹 지도자 류리크가 세운 것으로 7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노브고로드 공국과 키예프 공국을 통치하였고, 킵차크한국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도 계속되어 모스크바 공국을 다스렸다. 류리크왕조는 이후 로마노프왕조로 이어졌다.

882년에서 1240년까지 존속한 키예프 루시 공국은 987년 블라디미르 1세 때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였다. 비잔티움제국의 안나 공주와 결혼한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를 ‘루시의 세례’라고 부른다. 루시와 비잔티움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키예프 공국의 문화가 발전하였다. 비잔티움 황제가 보낸 키릴 형제가 만든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고 루시 최초의 법전이 탄생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1206년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즉위한 후 유라시아 세계는 빠르게 몽골의 지배 아래 놓였다. 칭기즈칸의 맏아들인 주치의 아들 바투가(칭기즈칸의 손자다) 유럽 원정에 나섰다. 1240년에 바투가 세운 킵차크한국은 2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킵차크한국은 공물과 부역을 징수하였지만 루시의 대공들을 승인하고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킵차크한국은 14세기 말에 티무르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후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싸우다가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대패하여 1502년 멸망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모스크바라는 명칭은 핀란드어로 ‘습기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며, 1147년에 처음으로 러시아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모스크바는 원래 수즈달 공국의 남쪽 끝에 세워진 변방 기지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세기에 이반 칼리타 대공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칼리타 대공은 몽골 칸에게 뇌물을 주고 1382년 블라디미르 대공 및 루시 공국들의 수장에 봉해졌다. 몽골인을 대신해 루시 전 지역에서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권한도 얻었다. 이로써 루시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1476년 이반 3세는 쇠약해 가던 킵차크한국에 대한 공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킵차크한국의 군대가 진격해 오자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끈 이반 3세는 마침내 모스크바 공국을 몽골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켰다. 또한 분열되었던 루시를 빠르게 통일시켜 루시의 군주로 불리며 차르의 칭호를 얻었다. 체제를 정비하고 봉건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인 두마에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러시아 최초의 공식적인 황제는 이반 4세이다. 차르 호칭을 처음 획득한 것은 이반 3세지만 차르 호칭을 공식 사용한 것은 이반 4세이다.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여 러시아를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몽골족 (타타르)과의 전쟁을 통해 우랄산맥을 넘어 광활한 시베리아로 진출하였다. 그의 군사, 정치 개혁은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소련의 스탈린도 그의 신봉자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반 4세는 잔혹한 이반 즉 이반 뇌제(잔혹한 이반의 일본 번역어)라고도 불렸다. 노년에는 더욱 난폭해져 임신한 며느리를 때려 유산시키고 아들을 지팡이로 때려 숨지게 만들기도 했다. 1584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사망했다.

 

<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반 4세 사후 왕위를 이은 표도르가 후손 없이 죽자 류리크왕조는 갑자기 종말을 맞았다. 차르 계승권을 둘러싼 극심한 다툼과 혼란이 이어지다 1613년 이반 4세의 친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에 선출되었다. 로마로프왕조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왕조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300년 간 러시아를 통치하였다.

 

로마노프왕조를 시작한 미하일은 귀족들과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토지를 봉지로 나누어 주었다. 그런 한편 농노에 대한 압박과 착취는 갈수록 심해졌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농노제가 해체되고 있던 상황에 러시아는 농노제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농노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잇따라 농노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의 17세기는 ‘폭동의 시대’로 불린다.

 

17세기 말에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 차르가 탄생하였다. 10세의 나이에 공동 황위에 오른 표트르 1세이다. 권력 투쟁에 의해 궁중 밖에서 성장한 표트르는 다양한 계층과 어울렸고, 외국인들에게서 새로운 사상과 풍습을 받아들였다. 조선술과 해군력 증강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표트르는 익명으로 직접 시찰단에 끼여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 목공 기술을 배웠다. 영국의 해군력도 직접 배워 와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창설했다. 해군력 뿐 아니라 육군도 증강하여 스웨덴과 전쟁 끝에 발트해로 진출하였다. 서구화를 추진하여 네바강 하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전하였다. 유명한 수염세를 거두어들이며 까지 러시아를 서구화하려고 했던 그는 유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잔티움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그의 개혁은 러시아 역사에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과 연대한 차르 중심의 개혁은 전제 정권을 강화하여 한층 야만적인 착취방식이 생겨났고, 이는 훗날 민중 폭동의 씨앗이 되었다. 서구화 정책은 슬라브 문화와 전통을 사라지게 했고 러시아인의 뿌리를 흔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계몽전제군주를 자처한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는 계몽보다는 전제에 방점이 있다. 계몽 또한 시민이 아니라 귀족 계급에 해당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은 ‘귀족들의 황금기’로 불리며 실질적으로 발전했지만, 농노제는 강화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5%만이 농민이었고 95%는 농노였다.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민군 전쟁이었던 푸가초프의 난도 이때 발생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나폴레옹의 몰락을 이끌어 유럽을 구해낸 인물이 알렉산드르 1세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반하여 영국산 물건에 대한 수입 규제를 풀자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러시아의 넓은 영토를 이용해 나폴레옹의 힘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작전’을 세워 모스크바를 비우고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 들어간 날 저녁에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6일 동안이나 불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빈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은 식량과 무기마저 전달받지 못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이 돌았고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러시아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공격하여 러시아는 대승을 거두었다. 믿기 힘든 나폴레옹의 패배를 지켜 본 유럽은 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결국 패하고 엘바 섬으로 귀양 갔다.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1812년 조국 전쟁’ 이라고 부른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자녀 없이 갑자기 죽자 다음 차르를 두고 혼란이 일어났다. 두 동생들이 서로 차르를 양보하는 사이에 얼마간의 공백이 발생했다. 이틈을 타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공화정을 주장하는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한 날에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참혹하게 진압되었다. 차르로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절대 전제 군주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9세기 자유주의가 퍼져나가던 유럽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크림전쟁 도중에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였다.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2세는 충격을 받았다. 오스만과의 계속된 러·투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해 왔던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을 지원하자 대패한 것이다. 크림 전쟁의 실패로 러시아 전제 군주제의 폐단이 드러났고,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흔들렸다. 러시아에는 개혁이 절실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861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폐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농노의 삶은 더 나빠졌다. 러시아 정부는 기존의 영지를 지주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했다. 농노가 땅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토지 금액의 20%를 보상금으로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 80%는 정부에서 빌려야 했다. 빌린 금액은 49년에 걸쳐 원금과 이자까지 갚아야 했다. 농노들에게는 당장 토지 금액의 20%가 없을 뿐 아니라 빌린 돈을 상환할 능력도 없었다. 농노제도가 폐지된 이후 농노들이 소유한 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농노제 폐지의 실패는 정부에 대한 반감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농노 반란이 1860년 126건에서 1176건으로 늘어났다.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기도가 계속 되었다. 1881년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의 의지당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여러 가지 개혁은 러시아 자본주의 발달의 기틀을 닦았다.

 

농노제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들과 지주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자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들이 나로드니키이다. 농촌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했던 나로드니키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들에 의해 러시아 사회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나로드니키들은 농민의 옷을 입고 농촌을 돌며 혁명을 호소하는 브나로드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농민들은 혁명을 부르짖는 이들 지식인들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며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을 경찰에 밀고하는 일도 많았다. 차르 정부의 탄압으로 브나로드 운동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실의에 빠진 나로드니키들은 허무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가 되어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러시아는 근대화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19세기 말부터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동쪽으로 진출하던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맞붙게 되었다. 러시아의 진출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영국과 미국 등이 일본을 지원하는 가운데 1904년 러·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일본이 중국 뤼순 항에 정박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였다. 일본에 계속 패하던 러시아는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발틱 함대를 파견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는 바람에 아프리카를 돌아 7개월이나 걸려 쓰시마 섬에 도착한 발틱 함대는 일본군에 전멸했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에서는 혁명(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러시아는 1905년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한반도에 대한 관리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 러시아 혁명부터는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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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네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했구요.

카페에 손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중년의 남자분이 등을 돌리고 공부를 하는 것 같았는데요.

부끄러웠습니다.

3년 가까이 카페에서 스타디를 해왔지만,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그것도 아리스토텔레스를 하는데, 그분의 귀에 제 말이 들렸을 것을 생각하니 진짜 부끄럽더군요.

부디 그분이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었기를 바랍니다. ;;

우리의 철학 공부는 이렇게 위태합니다.

제대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는지, 그야말로 " 너 자신을 알라" 고 논박술을 펼쳐줄 소크라테스를 갈망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 다음주도 꿋꿋이 해야겠죠? ^^

 

 

아리스토텔레스는 '체계'의 철학자입니다.

세상 만물을 분류 탐색하여 우주의 원리를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학문의 체계를 세웁니다.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이라는 큰 분류 아래 각각의 세부 학문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론학에는 자연학, 형이상학, 수학이, 실천학에는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이, 제작학에는 수사학과 시학이 포함됩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학문의 도구로서의 논리학이 있습니다.

예전에 공부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함께 희랍 철학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철학 전반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 더 훌륭한 수준으로 그는 자신의 시대 이후의 철학이 걸어갈 길을 규정했다. 그는 형이상학적 물음들의 깊은 지층을 발견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정신이 사물들의 존재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사용해왔던 가장 중요한 개념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또한 지금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한 한계들 안에서 실질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그리고 철학사 전반에 걸쳐 아주 뛰어난 두세 명의 전력에 의해서만 수정되었던, 분과로서의 논리학을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너무 방대하므로, 그리고 지루하고 이루말할 수 없이 꼼꼼하다고 합니다, 철학사 차원에서 개략적으로 훑는다고 해도 그 분량이 만만치 않아 공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스타디에서 우리가 다루었던 것은 논리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이었습니다.

 

논리학은 '올바른 사유의 형식과 방법에 관한 이론' 입니다.

사유는 개념에 의해서 전개됩니다.

개념 규정된 말, 의미있는 말을 logos라고 합니다.

logos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즉 본질을 말해줍니다.

'A는 B이다.' 의 형태로 개념이 규정되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 필수적인 종과 유 그리고 종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인간은 사기치는 포유류다."

인간은 종, 포유류는 유입니다.

포유류에는 인간 뿐 아니라 곰, 돼지, 소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포유류다.' 는 말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개념이 그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차가 부연되어야 합니다.

곰, 돼지, 소 등 같은 포유류에 속하는 다른 종들과 인간 종을 구별짓는 본질적인 차이, 그것이 종차입니다.

예시문에서 '사기치는' 은 인간 포유류에만 속하는 특징입니다.

물론 '사기치는'을 본질이라고 하면 너무 슬픕니다만, 재미있는 예시라고 생각하고 예로 들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폴리스에서 사는 동물이다' 고 하였습니다.

희랍 폴리스 시대에 인간 즉 시민은 폴리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의 본질 즉 종차는 폴리스입니다.

 

여하튼 개념 정의된 말 즉 로고스는 그 대상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다시 위의 책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로고스를 가진 동물이기에 진리의 도구다. 사물들의 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거쳐간다. 즉 인간은 사물들을 발견하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진리의 자리에 놓는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물들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존재와 그 존재를 알고 표현하는 사람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토대는 앎, 소피아, 철학이다. 철학에서 존재는 자기의 진정한 실재를 진리의 빛 속에서 획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을 계승하였지만, 그의 형이상학은 플라톤의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플라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이데아들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나뉘어 있습니다.

현상세계의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모방물이거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플라톤이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들이 아니라 이데아를 탐구했던 것은 이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형상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형상은 사물과 별개로 더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속에 있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물을 사물답게 하는 것이 형상인데 어떻게 형상이 사물들 밖에 있을 수 있는가 반문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형상론은 형상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은 형상내재론이라 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이 사물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물안에 형상 즉 본질적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과 사물은 분리불가분의 하나입니다.

이를 우시아라고 하는데, 우시아는 '형상을 내재한 각각의 사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을 다섯 단계로 설명합니다.

감각 → 기억 → 경험 → 기술 → 학문적 인식(episteme) 까지는 사물에서 시작하여 이를 수 있는 앎입니다.

학문적 인식은 논증적 앎, 원리들에 대한 앎입니다.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의사는 환자가 느끼는 감각에서 시작하여  많은 환자를 상대하며 얻은 경험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처방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의대에서 두통의 원리 등을 모두 공부하여 학적 인식까지 성취했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의사도 환자도 왜 하필 그에게 유독 그런 질환이 일어났는지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제1원리는 학적인식으로는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하느님의 뜻" 혹은 "업보" 로 받아들이는 것이 희랍철학의 제1원리, 근본원인과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을 누스라고 했습니다.

누스를 통해 직관적인 앎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피스테메와 누스를 모두 획득할 때 비로소 인간은 지혜 즉 소피아에 이릅니다.

 

대상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의 방법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근대 자연과학자들은 학문적 인식을 목표로 하지, 제1원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점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보다 자연과학자의 면모가 더 두드러진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를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철학자 중의 철학자가 플라톤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고, 저는 당연히 누가 제 일의 철학자인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스타디 교재로 사용하는 『세상의 모든 철학』의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 강의에서  앎의 층위를 논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희랍철학은 초월적인 세계에 있는 것을 제1원리로 삼고 그것에 근거하여 학문적인 인식을 추구한다."

 

희랍철학에서 앎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형이상학』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 "

강유원 선생님은 이 말을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로 꼽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 플라톤의 『향연』에서 인간을 앎으로 이끄는 에로스, 에로스의 사다리 윗층을 차지하는 앎의 아름다움 등 희랍철학에서 앎, 이성, 사유는 인간의 본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 중의 최고의 앎은 테오리아, 관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적 사유, 사유에 대한 사유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불멸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최고의 행복은 테오리아,  관조적 삶이라고 합니다.

신적인 삶은 말그대로 신의 삶이니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꿈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꿈꾼 스승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살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다음주는 조금 여유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양대 산맥을 넘었으니, 웬만한 길은 평탄하게 느껴지겠지요.

고대 철학의 마무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

p 135 ~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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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아이들 졸업식으로 결석한 분이 많았습니다.

 

조선 사회 영역을 끝내고, 조선 전기 문화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조선 문화는 분량이 많아서 앞으로 2회를 더해야 끝날 것 같습니다.

다음회는 설 연휴 끝나고 다다음주에 진행하겠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79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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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은 플라톤을 공부하였습니다.

희랍철학 뿐 아니라 서양철학을 통틀어서도 플라톤을 첫 손가락에 꼽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플라톤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광장을 떠돌며 설파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철학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플라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것은 "너의 영혼을 잘 돌보아라" 였습니다.

영혼은 신적이며 예지적인 것으로 육체를 떠나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불멸합니다.

잘 돌본 영혼은 풍성한 깃털로 날아올라 좋음의 이데아를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좋음은 존재의 참된 원인, itia입니다.

영혼을 잘 돌보는 방법은 보편적 인간의 아레테인 '앎'을 통해서입니다.

앎은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논박술을 통해 대화 상대자를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는 이유는 스스로의 무지를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지를 인정한 사람만이 기존 관념을 깨뜨리고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진리로 작용할 수 있는 보편적 정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물들의 본질들을 규정하고 발견하고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이데아론(형상론)을 만듭니다.

세계는 이데아들의 세계와 사물들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두 세계 이론은 파르메니데스가 분명하게 정립해 둔 것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없었던) 두 세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사물들의 세계는 이데아들의 세계의 그림자입니다.

비록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모방물에 지나지 않지만, 이데아들을 분유分有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그 대상이 사람의 이데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혀 없어 보일 때 우리는 "인간도 아니군!" 이라는 말을 합니다.

허영만의 <식객>이라는 만화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전국의 식당을 돌아다니며 찾아 헤맸던 것이 이를테면 맛의 이데아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음식들은 거의 다 맛의 이데아와는 차이가 납니다.

어딘가 무언가가 모자란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맛의 이데아 즉 맛 그 자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요?

플라톤은 이것을 영혼 상기설로 설명합니다.

영혼이 떨어져 육신에 깃들기 전에 그 이데아를 보았던 것입니다.

레테의 강을 건너며 잊어버렸지만 꾸준한 앎을 통해 이데아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레테léthé는 망각이고, 망각에서 벗어난  alétheia는 진리입니다.

이데아를 상기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위계적입니다.

이데아들 사이에 차등이 있습니다.

최상위의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입니다.

좋음의 이데아가 좋음 그 자체라면, 하위의 이데아들은 좋음을 얼마나 많이 분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계서가 정해질 것입니다.

모든 이데아들이 좋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데아들을 모방한 사물들 역시 좋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플라톤은 "좋음"을 가지고 전 우주를 질서지웠습니다.

좋음이 우주의 근본범주이며, 참된원인인 것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삶의 최종 근거는 마땅히 좋음이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폴리스 역시 좋음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폴리스를 이끄는 통치자는 좋음의 이데아를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잘 알려진대로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폴리스를 최선의 정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혹은 갈구하는 철학자야말로 앎에 가장 정통한 자이고 따라서 이데아를 가장 잘 상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핵심은 좋음에 근거하여 폴리스를 통치할 수 있는 철학자를 어떻게 교육하는가에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국가』 7권의 '동굴의 비유' 도 단지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세계에 살던 죄수(인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철학자가 되는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를 앎으로 이끄는 힘은 에로스입니다.

아프로디테의 탄신일에 포로스(방책)와 페니아(곤궁) 사이에서 잉태된 에로스는 미의 추종자인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질을 반반씩 물려받은  metaxý 중간자입니다.

에로스를 찬양하는 심포지움에서의 대화들로 이루어진 플라톤의 『향연』은 메탁시로서의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사랑 혹은 갈망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알지만 그것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

철학자 역시 앎의 가치를 알지만 앎이 모자라기 때문에 앎을 추구합니다.

에로스는 갈망으로 철학자를 이끄는 힘인 동시에 철학자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래 불사적이지도 가사적이지도 않습니다. 단 하루 사이에 전성기를 누리면서 사는 때가 있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을 때가 그렇지요.) 또 죽어가는 때가 있고, 그러다가 아버지의 본성 덕택에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가 갖추고 있는 방도는 늘 조금씩 새어 나갑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예 방도가 없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고, 또 지혜와 무지의 사이에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태거든요. 신들 가운데 아무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게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렇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어느 누구라도 지혜로운 자라면 지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지한 자들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기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거든요. 즉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 그럼 그 지혜 사랑하는 자들이란 누굽니까? 지혜로운 자도 무지한 자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내가 말했네.

‘이쯤 되면 적어도 이것 정도는 어린애한테조차도 분명할 겁니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자들이고, 또 그 가운데 에로스도 속한다는 것 말입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는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에로스)이지요. 그래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기원이 바로 이것들에게도 원인 노릇을 합니다. 아버지는 지혜롭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지만 어머니는 지혜롭지 못하고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그 신령의 본성입니다.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하지만 에로스가 누구인가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들로부터 추정컨대 당신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에로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당신에게는 에로스가 아주 아름답게 보인 거라고 난 생각합니다. 사실 사랑받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며 완벽하고 복 받았다 여겨지는 것이지요. 반면에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습을, 즉 내가 죽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여인에게 에로스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디오티마는 에로스의 본성에 관해 말한 후 '에로스의 사다리' 이야기를 해줍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 앎에 이르는 사다리입니다.

 

이 일을 향해 올바르게 가려는 자는 젊을 때 아름다운 몸들을 향해 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끄는 자가 올바로 이끌 경우 그는 하나의 몸을 사랑하고 그것 안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어느 한 몸에 속한 아름다움이 다른 몸에 속한 아름다움과 형제지간임을 깨달아야 하며, 종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할 때,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이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파악하고 나면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이 열정을 무시하고 사소하다 여김으로써 느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에게는 충분하며, 이자를 사랑하고 신경 써 주며 젊은이들을 더 훌륭한 자로 만들어 줄 그런 이야기들을 산출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번에는 그가 행실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도록, 그리고 그것 자체가 온통 그것 자체와 동류라는 것을 보도록 강제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몸에 관련된 아름다움이 사소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끄는 자는 그를 행실들 다음으로 앎들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이번에는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고, 또한 이제는 아름다움 여럿을 쳐다보고 있기에, 더 이상 어리디 어린 소년이나 특정 인간이나 하나의 행실의 아름다움에 흡족하여 종처럼 하나에게 있는 아름다움에 노예 노릇 하면서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해 보세요.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차례 올바로 바라보면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여기까지 인도된 자라면 이제 에로스 관련 일들의 정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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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그는 하나에서부터 둘로, 둘에서부터 모든 아름다운 몸들로, 그리고 아름다운 몸들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들로, 그리고 행실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 그 배움들에서부터 마침내 저 배움으로, 즉 다름 아닌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그는 아름다움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플라톤 철학에서 오늘 우리가 공부한 것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이데아론과 실천학으로서의 철인 통치에 관한 내용입니다.

 향연』에서는 철학자가 앎을 갈구하고 앎에 이르는 방법을,  『국가』에서는 그런 철학자를 길러내는 통치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주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 세상의 모든 철학> p 116 ~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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