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세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은 플라톤을 공부하였습니다.
희랍철학 뿐 아니라 서양철학을 통틀어서도 플라톤을 첫 손가락에 꼽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플라톤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광장을 떠돌며 설파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철학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플라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것은 "너의 영혼을 잘 돌보아라" 였습니다.
영혼은 신적이며 예지적인 것으로 육체를 떠나서도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불멸합니다.
잘 돌본 영혼은 풍성한 깃털로 날아올라 좋음의 이데아를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좋음은 존재의 참된 원인, itia입니다.
영혼을 잘 돌보는 방법은 보편적 인간의 아레테인 '앎'을 통해서입니다.
앎은 무지의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논박술을 통해 대화 상대자를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는 이유는 스스로의 무지를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지를 인정한 사람만이 기존 관념을 깨뜨리고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진리로 작용할 수 있는 보편적 정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물들의 본질들을 규정하고 발견하고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이데아론(형상론)을 만듭니다.
세계는 이데아들의 세계와 사물들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두 세계 이론은 파르메니데스가 분명하게 정립해 둔 것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없었던) 두 세계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사물들의 세계는 이데아들의 세계의 그림자입니다.
비록 사물들은 이데아들의 모방물에 지나지 않지만, 이데아들을 분유分有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그 대상이 사람의 이데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혀 없어 보일 때 우리는 "인간도 아니군!" 이라는 말을 합니다.
허영만의 <식객>이라는 만화가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전국의 식당을 돌아다니며 찾아 헤맸던 것이 이를테면 맛의 이데아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음식들은 거의 다 맛의 이데아와는 차이가 납니다.
어딘가 무언가가 모자란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맛의 이데아 즉 맛 그 자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요?
플라톤은 이것을 영혼 상기설로 설명합니다.
영혼이 떨어져 육신에 깃들기 전에 그 이데아를 보았던 것입니다.
레테의 강을 건너며 잊어버렸지만 꾸준한 앎을 통해 이데아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레테léthé는 망각이고, 망각에서 벗어난 alétheia는 진리입니다.
이데아를 상기한다는 것은 곧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위계적입니다.
이데아들 사이에 차등이 있습니다.
최상위의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입니다.
좋음의 이데아가 좋음 그 자체라면, 하위의 이데아들은 좋음을 얼마나 많이 분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계서가 정해질 것입니다.
모든 이데아들이 좋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데아들을 모방한 사물들 역시 좋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플라톤은 "좋음"을 가지고 전 우주를 질서지웠습니다.
좋음이 우주의 근본범주이며, 참된원인인 것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삶의 최종 근거는 마땅히 좋음이어야 합니다.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폴리스 역시 좋음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폴리스를 이끄는 통치자는 좋음의 이데아를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잘 알려진대로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폴리스를 최선의 정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혹은 갈구하는 철학자야말로 앎에 가장 정통한 자이고 따라서 이데아를 가장 잘 상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핵심은 좋음에 근거하여 폴리스를 통치할 수 있는 철학자를 어떻게 교육하는가에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국가』 7권의 '동굴의 비유' 도 단지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세계에 살던 죄수(인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철학자가 되는가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를 앎으로 이끄는 힘은 에로스입니다.
아프로디테의 탄신일에 포로스(방책)와 페니아(곤궁) 사이에서 잉태된 에로스는 미의 추종자인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질을 반반씩 물려받은 metaxý 중간자입니다.
에로스를 찬양하는 심포지움에서의 대화들로 이루어진 플라톤의 『향연』은 메탁시로서의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사랑 혹은 갈망은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알지만 그것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
철학자 역시 앎의 가치를 알지만 앎이 모자라기 때문에 앎을 추구합니다.
에로스는 갈망으로 철학자를 이끄는 힘인 동시에 철학자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래 불사적이지도 가사적이지도 않습니다. 단 하루 사이에 전성기를 누리면서 사는 때가 있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을 때가 그렇지요.) 또 죽어가는 때가 있고, 그러다가 아버지의 본성 덕택에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그가 갖추고 있는 방도는 늘 조금씩 새어 나갑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예 방도가 없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고, 또 지혜와 무지의 사이에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태거든요. 신들 가운데 아무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게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렇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어느 누구라도 지혜로운 자라면 지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지한 자들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기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거든요. 즉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 그럼 그 지혜 사랑하는 자들이란 누굽니까? 지혜로운 자도 무지한 자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내가 말했네.
‘이쯤 되면 적어도 이것 정도는 어린애한테조차도 분명할 겁니다. 이 둘 사이에 있는 자들이고, 또 그 가운데 에로스도 속한다는 것 말입니다. 지혜는 그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속하는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관한 사랑(에로스)이지요. 그래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기원이 바로 이것들에게도 원인 노릇을 합니다. 아버지는 지혜롭고 방도를 잘 갖추고 있지만 어머니는 지혜롭지 못하고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그 신령의 본성입니다. 친애하는 소크라테스, 하지만 에로스가 누구인가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들로부터 추정컨대 당신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것이 에로스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당신에게는 에로스가 아주 아름답게 보인 거라고 난 생각합니다. 사실 사랑받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며 완벽하고 복 받았다 여겨지는 것이지요. 반면에 사랑하는 것은 다른 모습을, 즉 내가 죽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여인에게 에로스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디오티마는 에로스의 본성에 관해 말한 후 '에로스의 사다리' 이야기를 해줍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 앎에 이르는 사다리입니다.
「이 일을 향해 올바르게 가려는 자는 젊을 때 아름다운 몸들을 향해 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끄는 자가 올바로 이끌 경우 그는 하나의 몸을 사랑하고 그것 안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어느 한 몸에 속한 아름다움이 다른 몸에 속한 아름다움과 형제지간임을 깨달아야 하며, 종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할 때,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이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주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파악하고 나면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이 열정을 무시하고 사소하다 여김으로써 느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에게는 충분하며, 이자를 사랑하고 신경 써 주며 젊은이들을 더 훌륭한 자로 만들어 줄 그런 이야기들을 산출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번에는 그가 행실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도록, 그리고 그것 자체가 온통 그것 자체와 동류라는 것을 보도록 강제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몸에 관련된 아름다움이 사소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끄는 자는 그를 행실들 다음으로 앎들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가 이번에는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고, 또한 이제는 아름다움 여럿을 쳐다보고 있기에, 더 이상 어리디 어린 소년이나 특정 인간이나 하나의 행실의 아름다움에 흡족하여 종처럼 하나에게 있는 아름다움에 노예 노릇 하면서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해 보세요. 아름다운 것들을 차례차례 올바로 바라보면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여기까지 인도된 자라면 이제 에로스 관련 일들의 정점에 도달하여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
마치 사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처럼 그는 하나에서부터 둘로, 둘에서부터 모든 아름다운 몸들로, 그리고 아름다운 몸들에서부터 아름다운 행실들로, 그리고 행실들에서부터 아름다운 배움들로, 그리고 그 배움들에서부터 마침내 저 배움으로, 즉 다름 아닌 저 아름다운 것 자체에 대한 배움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그는 아름다움 바로 그것 자체를 알게 되는 거죠. 」
플라톤 철학에서 오늘 우리가 공부한 것은 형이상학으로서의 이데아론과 실천학으로서의 철인 통치에 관한 내용입니다.
『향연』에서는 철학자가 앎을 갈구하고 앎에 이르는 방법을, 『국가』에서는 그런 철학자를 길러내는 통치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주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 세상의 모든 철학> p 116 ~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