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셀로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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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말은 언뜻 듣기에 참으로 불쾌하다.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어릴 때는 위대한 셰익스피어에 대한 멋진 비유로만 알았던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칼라일의 제국주의적 망언을 그 맥락 속에서 읽어보면 그 느낌이 또 다르다. “만약 우리 영국인들에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 큰 물음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공식적인 말로 대답할 것은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도야 있건 없건 상관없지만 셰익스피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인도는 언젠가는 결국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영웅숭배론』”   이 표현에 보편성은 없다. 철저히 영국인의 입장에서 그 유용성을 따지고 있을 뿐이다. 영국에게 인도는 물적 대상, 그것도 약탈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의 정신을, 영국인의 언어를 표상하고 있다. 칼라일의 말은 물질은 잃어버려도 그만이지만 정신은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듣는 인도인이나, 우리 제3세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모욕적인 비유다. 하지만 1800년대 식민종주국 영웅숭배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흥분해서 무엇 하겠는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셰익스피어 역시 그런 점에서 껄끄러운 점이 없지 않다. 오셀로가 살짝 불편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여하튼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정신적 가치를 대변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셰익스피어는 무엇일까? 세계적 고전을 읽을 때 늘 갖게 되는 의문이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서도 그 고전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무 가치도 찾지 못한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은근한 압박이기도 하다. 내 독해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나의 이성과 감성을 질책하게 된다. 이럴 때는 조금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을 듣고 그의 책을 몇 권 주문했다. 『역사고전강의』, 『인문고전강의』, 『서구정치사상고전읽기』다.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강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사둘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독서회에서 읽기로 한 『오셀로』의 발제이다. <라디오 인문학>의 『멕베스』편과 펭귄 클래식 판 『오셀로』서문과 몇몇 검색 내용을 토대로, 셰익스피어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작품이 미친 영향 등에 대해 간추려 보려 한다. 이런 방법이 고전 읽기에 정말 도움이 될까?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아무 감흥이 없다면 그냥 그 고전 따위는 버려도 되지 않을까? 세상이 무엇이라 부르던, 그건 그냥 내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셰익스피어를 연극으로 본 적은 없다. 연극이란 형식 자체와 가까웠던 적이 없다. 20대에 두서너 번 대학로 소극장을 가보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다. 비싸기도 했고 번거롭기도 했고. 어떻든 우리에게 연극이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셰익스피어 시대에 연극은 대단히 대중적인 문화였던 모양이다. 주로 노동자들이 왁자지껄 모여들어 떠들고 즐기면서 연극을 보았다고 한다. 극장도 야외극장이다. 단정히 입어야 하는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같은 격식 있는 공연장과는 딴판이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는 연극 대본을 쓰는 극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무대에 서는 배우이기도 했고 극장주인지 극단주인지 하여튼 소유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미 런던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것은 소설이 아니라 연극 대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셰익스피어를 고전이란 이름 아래 묵직하게 읽고 있지만, 지금으로 치면 이 고전은  드라마의 대본 정도 된다. 그것도 공연마다 관중들의 반응을 봐가며 조금씩 고쳐 썼기 때문에 어떤 것을 정본으로 삼아야 할지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그런 대본이다. 네티즌 반응에 따라 결말도 바꾸고 배역의 비중도 바꾸는 지금의 드라마하고 닮은 구석이 있다. 그만큼 대중적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를 읽는 좋은 방법은 무대의 배우처럼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이라는 조언도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연극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 대본도 수백 년 후에 고전이 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이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1564년에 태어나서 1616년에 죽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와 얼추 비슷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족사는 험악하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의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했다. 어머니 앤 블린은 ‘천일의 앤’, 이복 언니 메리는 ‘블러디 메리’ 이다. 영화로도 몇 번 만들어진 유명한 가족이다. 헨리 8세가 국교를 바꿔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며 어머니 앤 블린과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던 앤은 간통죄로 처형당하고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며 숨죽여 살았다. 그러나 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메리가 죽고 나자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는 영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여왕이 된다.

  그런데 이 소용돌이 속에 종교적 신념을 고집하다 참수당한 비운의 인물이 있다.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다 반역죄로 처형되었지만 그 덕분에 카톨릭으로부터 성인 칭호를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토마스 모어는 대법관 시절 프로테스탄트를 무자비하게 화형대로 보내는 종교 탄압을 자행했다고 한다.

  거리의 인문학자 강유원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한마디로 ‘양에 관한 책’ 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의 결과로, 막대한 경작지가 양을 기르는 목장으로 바뀌었다. 농작물에 비해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양모생산을 위해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쫒아냈고, 쫓겨 난 농민들은 런던 등의 도시로 흘러들어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이것을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난했다. 이 때 이미 영국은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는데, 땅을 잃은 농민들의 값싼 노동력은 산업 혁명을 가속화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더불어 도시에는 빈민가가 형성되었고 위생 등의 도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나라의 6~70년대와 거의 비슷한 양상인 것을 보니, 농촌의 붕괴와 산업화, 도시 빈민의 문제는 항상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다.

  여하튼 여기서 등장한 도시 노동자들이 바로 셰익스피어 연극의 관객이었다는 소리다.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쌍안경을 들고 발코니 박스 석에 앉아 관람하는 오페라와는 완전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요즘에 와서 셰익스피어가 종종 이런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는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 그런 품격 있는 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서민성을 지워버린다. 물론 영국에서는 지금도 한여름 밤 셰익스피어의 야외공연이 벌어진다고는 하지만 작업복 입고 영국까지 날아갈 수는 없으니.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보여 준다.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탐욕’ 이다. 인간에게 탐욕이 없던 시대는 없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시대의 특성을 나타낸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적 소유의 강화는 탐욕을 당당한 시대정신으로 격상시켰다. 인클로저란 소유권이 불분명한 공유지나 사적 소유권의 경계가 애매하던 경작지에 울타리를 치고 소유권을 주장한 것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작농이야 굶어죽든 말든,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탐욕적 태도다. 탐욕이 부끄럽지 않은 세상, 드러내 놓고 탐욕을 추구하는 세상, 탐욕적인 태도가 훌륭한 자본가적 태도로 숭상 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 모습의 원형이 바로 이 16C 유럽이었다. 16C 유럽은 기독교 분열, 국가 기구의 강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이윤추구의 논리가 형성되고 있는, 변화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 시대는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태동기였다.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다면 우리가 그 시대의 기본 틀 안에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근대와 중세의 결정적 차이는 '신'에 대한 태도이다. 중세적 세계관은 모든 것이 신의 의지다. 세계를 창조한 것도, 지금 모습대로 있게한 것도, 고난과 고통의 이유도 모두 신에게 있다. 근대란 이런 신으로부터 인간의 독립이다. 신의 섭리보다 인간의 의지를 우위에 놓는 인본주의 정신이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이런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들의 배경은 중세적 모습이 상당하지만, 그 속의 인간들은 신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탐욕을 불태우고 실존을 고민한다. 「맥베스」는 신성한 질서 속의 자신의 위치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욕망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다. 「햄릿」의 “To be or not to be" 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다. 중세에서 자살은 신에 대한 범죄이다. 신이 준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햄릿은 살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셰익스피어가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그는 이미 중세를 벗어나 근대적인 인간의 모습을 고민했던 것이다. 그의 성공한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근대성과 씨름하는 인간들이다.

 

 

  우리에게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영국인들에게 소중한 이유 중 하나는 영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신조어를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저잣거리의 속어 따위도 적극적으로 대본에 사용하여 역동적인 영어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관용구가 된 숱한 표현들도 셰익스피어의 솜씨가 빚은 것들이 많다. 특히 19C에 와서 영국은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에서 벗어나 영어로 쓰인 문학 작품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셰익스피어는 학교와 대학교의 집중 교육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보는 것과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인들에게 언어 그 자체일 수도 있을 테니까.

  셰익스피어의 완역본들을 읽어보면 산문이라기 보다는 운문에 가깝다. 실제 운율에 맞추어 시처럼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번역이 불가능하다. 거꾸로 김소월의 <진달래>를 영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하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뜻은 번역할 수 있지만 그 단어의 맛깔스러움과 정겨움 혹은 회한 따위는 어떻게 바꿔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셰익스피어와 영국인의 셰익스피어는 같을 수가 없다. 외국의 고전이 때로 그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한몫을 할 것이다.

 

 

  『오셀로』는 원작이 있다. 요즘 같으면, 원작 누구, 각색 누구 이렇게 명기하지 않으면, 표절로 몰리겠지만, 그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 『오셀로』뿐만 아니라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들도 순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다른 작품에서 따 왔거나 떠도는 이야기, 전설 따위를 각색하여 쓴 것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들은 다 반복이다. 누군가 했던 이야기,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일어났던 사건들을 나름대로 버무리고 거기에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해 내는 것이다. 가치관이라는 것도 자신만의 것은 없다. 고대로부터 축적되어 온 철학들과 사상들, 당대의 패러다임 같은 것들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지적 소유권, 저작권, 특허권 따위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래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적 소유권의 하나로 인정되었을 테니 아마도 자본주의의 산물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이 어느 개인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질문해 봄직도 하다.

 

 

 

 

  『오셀로』의 완전한 제목은 ‘The Tragedy of Othello, the Moor of Venice' 이다. ’the Moor of Venice'는 그 자체로 오셀로가 역설적인 인물임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무어인은 아프리카 흑인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무어인은 유전적으로 흑인이 아니라 백인에 속한다고 한다. 국어사전에는 ‘8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아랍계 이슬람교도를 부르는 말’ 로 정의된다. 브리태니카에 의하면, 요즘 영어권에서는 모로코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고 하는데, 아랍의 안달루시아 문명을 창조한 무어인이 11~17C에 북아프리카에 피난민으로 정착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어인이 아랍인이든 흑인이든 여하튼 베니스인으로 상징되는 서구 문명인이 아니라, 야만인이라는 것이다. 사이프러스를 공격하는 터키인 역시 무어인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이 당시 유럽인들은 터키인, 무어인, 아프리카인을 사실상 구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서구 문명인이 아니면 모두 다 야만인으로 보았을 것이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사를 보면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셀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문화를 구현한 역설적 존재다. 베니스인인 동시에 이방인이며, 서구 문명 속의 야만인이다. 터키인의 공격으로부터 사이프로스 섬을 지켜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종족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오셀로의 비극은 ‘the Moor of Venice’에 함축되어 있다. 더 인종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선과 악의 공존이다. 베니스의 장군으로 찬연하게 빛났던 선은 이아고의 뱀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 무어인으로서의 악마적 본성을 폭발시켜 버린다. 오셀로의 마지막 대사를 보자 “예전에 알레포에서 터번을 두른 고약한 터키 놈이 베니스인을 때리고 베니스 정부를 비방했을 때, 제가 그 할례 받은 개 같은 놈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찔러 죽였다고.(스스로를 찌른다.)”  할례 받은 개 같은 터키 놈은 무어인인 오셀로 자신이다. 그 멱살을 잡고 찔러 죽인 오셀로는 다시 베니스인이 된 선한 오셀로다. 내가 무어인이라면, 인도를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는 것보다 더 모욕적일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인종차별주의자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무어인을 베니스의 장군으로 설정하고 고귀한 품성을 부여했다는 것 자체가 셰익스피어와 인종차별주의를 연관시킬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서구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비 서구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6C 말에서 17C 초를 살았던 셰익스피어에게는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원형처럼 칭송되는 아테나이조차도 여자와 노예는 폴리스의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이 서구 열강을 휩쓸기 시작하던 때였다. 셰익스피어라고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 독자의 눈에 거슬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 더구나 제3세계 국민에게 찜찜함이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오셀로』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단연 이아고로 꼽힌다. 실제 이아고의 대사가 오셀로 보다 300행이나 많다고 한다.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이아고다. 오셀로는 질질 끌려 다니다 파멸하고 마는 꼭두각시다. 그러나 나는 이아고 보다 에밀리아가 더 마음에 든다. 얼마 되지 않는 대사지만 결혼한 여자의 탄성을 자아내는 후련함이 있다.

 

 

  「에밀리아: 글쎄, 우리도 성깔이 있잖아요. 물론 우린 얌전한 여자들이지만, 우리에게도 복수심이 있어요. 남편들도 자기 아내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죠.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들도 시각과 후각을 갖고 있고, 달콤한 것과 신 것을 맛볼 수 있는 미각을 갖고 있어요. 남편들이 우리를 다른 여자들과 바꿔보는 이유가 뭐죠? 재미삼아 그러는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연정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실수를 하는 건 나약함 때문일까요? 그렇기도 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남편들처럼 연정을 품지 못하고, 재미를 바라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은가요? 그러니 남편들이 우리에게 잘 해야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못된 짓이 우리를 가르쳐 우리도 못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을 남편들도 알아야죠.」

 

  현대 드라마들이 열심히 그려내고 있는 소위 ‘맞바람’의 논리적 근거가 이미 셰익스피어에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성깔 있는’ 여자들을 흐지부지 순치시켜 버림으로써 도덕적 통념과 타협하고 만다. 그래서 제대로 붙어 보려는 <네 이웃의 아내>, 이제 막 시작한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떤 결론에 이를지 상당히 흥미롭다.

  에밀리아에 비하면 데스데모나는 너무 밋밋하다. 도대체 왜 캐시오 부관의 복직을 그렇게 열렬히 졸라대는지,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조차 못하는지 답답하다.

  오셀로의 의외성은 그가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확신하고 내뱉는 경악스런 대사에 있다. 아무리 사랑이 증오로 변했다 해도,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오셀로의 고귀한 품성의 이면은 바로 야만성임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오셀로는 베니스의 무어인인 것이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는데, 모두 이아고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기억력 대신에 여기에 덧붙여둔다.

 

 

1. 천성이라고? 쳇!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되는 것은 다 우리 자신 탓이오. 우리 육신은 우리의 정원이고, 우리 의지는 정원사란 말이오.

 

 

2. 시간의 자궁 속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으니 때가 되면 세상에 태어날 거요.

 

 

3. 그 계략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아직은 혼란스러워. 악행의 참모습은 행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

 

 

4. 내가 악당 짓을 한다고 말하는 자 누구인가? 내가 해주는 충고는 순수하고, 솔직하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정말 무어놈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 아닌가? 진심으로 간청하면 마음 약한 데스데모나를 움직이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 그 여자는 너그러운 천성을 타고 났으니까. 그리고 나서 그녀가 무어놈을 설득하는 거지. 속죄의 징표이자 상징인 세례를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의 영혼은 그녀에게 속박되어 있으니,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욕망이 그의 쇠약한 기능 위에 신처럼 군림할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왜 악당이지? 캐시오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될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이게 바로 지옥의 선심이라는 거지! 악마들이 가장 훌륭한 죄를 꾸밀 때에는, 처음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권고를 하지.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말이야.

 

 

5. 비록 저는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는 있지만, 노예에게도 자유로운 것, 즉 제 생각을 말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6. 베니스에서는 여자들이 남편 앞에서는 감히 보여 주지 않는 못된 장난을 하느님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보여 준답니다. 그들에게 최선의 양심이란 못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7.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것들이 질투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성서만큼이나 강력한 효력을 지닌 증거물이 되거든. 이 물건이 뭔가 해낼 수 있을 거야. 무어 놈은 벌써 내 독약을 먹고 변하고 있어. 위험한 상상은 그 자체가 독약이지. 처음에는 그 불쾌한 맛을 잘 알지 못하지만, 혈액에 조금만 작용을 하게 되면, 유황 광산처럼 불타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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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이 끝났다. 총 55회로 1년이 살짝 넘게 방송했는데, 나는 몇 달 전부터 팟캐스트로 들어왔다. 구수한 말솜씨에 끌려 심심풀이 삼아 듣기 시작했는데, 고전을 읽는 깊이가 만만치 않다. 혼자서는 절대로 읽지 않을 고전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했다. 1주일에 1회, 한 회에 20여분 정도로, 한 권의 책을 많게는 10회까지 읽기도 하니, 줄거리만 쓰윽 훑고 가는 피상적인 독해와는 많이 다르다. 내가 들어 본 인문학 강의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틈날 때마다 되풀이 해 들어도 지겹지 않고 좋은 공부가 된다.

 

“라디오 인문학”이란 프로그램 이름에 걸맞게 <맥베스>, <걸리버 여행기>, <오디푸스 왕>,<유토피아(이것도 소설인가?)> 등의 문학, 철학서로는 플라톤의 <향연>, 역사 분야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갈리아 원정기> 등을 읽었고 그 외에도 <군주론>, <판옵티콘>, <직업으로서의 정치> 등을 읽었다.

 

진행자는 항상 “거리의 철학자 강유원 박사님” 이라고 소개하는데, 헤겔 철학을 전공했고, 학교 보다는 주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강의를 하고, 책을 쓰고 번역을 하는 모양이다. 정치철학을 하며, 역사와 전쟁사, 무기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우리 도서관에도 강의를 해 주면 좋겠지만 지방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도서관 담당자에게 한 번 제의해 보려고 한다.

 

방송을 마친다는 말에 아쉬워 검색을 해 보니 몇 권의 책이 있다. 그 중 『인문 고전 강의』를 빌려 왔다. 이 책 역시 2009년 서울시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묶은 것이다. 매주 두 시간씩 40주간 진행한 강의에는 <라디오 인문학>의 내용과 겹치는 것도 있지만 주로 다른 책들을 다루고 있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가 있는데, 마침 내년 초 독서회에서 읽을 책으로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이 있어, 참고가 될까하여 그리스 비극에 관해 조금 정리해 두려고 한다. <라디오 인문학>에서도 들은 내용이지만, 책으로 다시 읽으니 정리하기가 훨씬 쉽다.

 

 

 

 

고대 그리스하면 우리는 도시국가, 폴리스를 떠올린다. 그런데 폴리스는 단지 도시 혹은 도시국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폴리스는 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인민을 의미하기도 했고, 그들의 공동체를 뜻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유명한 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정확하게는 “인간은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삶이 공동체의 삶이란 의미이다. 정치적 공동체는 물론 학문, 예술, 운동, 규율까지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정치가 폴리스의 삶 전체를 관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이때의 정치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의미했다. 운동, 전쟁, 연극 관람까지도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폴리스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났다는 것과 같다. 동물적 목숨만이 붙어 있을 뿐 공동체의 삶이 없다는 의미에서 아감벤이 새롭게 유행시킨 로마의 ‘호모 사케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비극 역시 폴리스에서 상연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처음부터 연극으로 상연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읽히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비극 작가 혼자만의 작품도 아니다. 고대의 예술작품은 집단 창작의 성격을 갖고 있다. ‘고독한 예술가’ 라는 이미지는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최근의 개념이다.

 

그리스 비극은 아무 때나 상연되는 것이 아니다. 매년 3월과 4월 사이 디오니소스 축제에 행해지는 연극 경연대회에서 공연된다. 얼어붙은 대지를 깨우고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기 위해 열리는 디오니소스 축제는 폴리스의 주요한 행사다. 돈 많은 시민들 몇 명을 뽑아 돈을 대게 하면, 코레고스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합창단원인 코로스를 뽑고 시인과 배우를 모집한다. 이 때 경연을 공정하게 하기 위해 시인과 배우는 제비뽑기로 추첨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돈이 가장 많은 코레고스가 가장 좋은 시인과 배우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부에 관계없는, 기회의 평등, ‘공정함’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이런 원칙이 실현된 것이다. 그들은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두 민회의 추첨을 통해 뽑았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공직을 맡을 수 있다”고 페리클레스는 말했다. 물론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폴리스의 구성원들 즉 2~3만 명의 남자 시민들이다. 지금의 평등 개념과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공동체적 삶에 포함되지 못했다.

 

여하튼 이렇게 한 팀이 짜이면, 시인은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써야 했다. 비극 3부작을 트릴로기Trilogy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3부작, 3부작 하는 것도 그 근원이 여기에 있다. 3부작이 되어야 ‘완성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비극 Tragedy 의 어원은 트라고디아 Tragodia다. ‘염소의 노래’란 뜻이다. 트라고스 Tragos가 염소, 오디 Odie가 노래다. 비극을 공연할 때 디오니소스 신에게 염소를 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부정을 씻기’ 위해서 이다. 부정을 씻는다는 말이 바로 카타르시스 Katharsis 이다. 카타르시스는 갈등이 해소되어 개운해진 마음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은 “아~ 깨운하다” 는 느낌이다.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는 목적도 바로 이 카타르시스에 있다. 희생제물을 바쳐 부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개운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비극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중심은 코러스다. 코러스 사이사이에 대사가 부차적으로 끼어들어 있을 뿐 대사가 중심이 된 것은 나중에 가서였다. 대사를 에페이소디온Epeisodion이라 불렀고, 이것이 에피소드 Episode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스 비극을 우리가 책으로 읽을 때 코러스 부분을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자세히 읽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코러스의 역할은 다양하다. 코러스는 극의 전체 이야기를 알려주기도 하고, 관객의 입장을 대변하며 감정을 쏟아 붓기도 하고, 등장인물과 대립하며 함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코러스를 통해 우리는 비극의 줄거리와 비극을 관람하는 그리스인의 입장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를 기억해 보자. 시험에 잘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름도 생소하게 들린다.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 그리고 별칭이 없는(?) 에우리피데스가 있다.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을 경험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퀼로스는 그의 비극에서도 신이 주역을 맡으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신에 귀의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비극의 주제를 이룬다. 신이 내린 운명에 발목 잡혀 있으나 신의 의지 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된다. 소포클레스는 페르시아전쟁뿐만 아니라 그에 뒤이은 조국 아테나이의 전성기를 맛보았고, 뒤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조국을 덮쳐 오는 불안한 시기를 두루 겪었다. 한편 조국의 영광에 대해서 소문밖에 듣지 못했던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며, 신에 대한 믿음도 인간에 대한 믿음도 굳건하지 않다. 이들 3대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을 이어서 읽는다면, 세계와 인간의 관계에 따라 어떻게 작품의 서사 양식이 달라지는 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이 확신에 차 있을 때와 그 가능성이 포기되었을 때의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음미해 보는 재미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 왕>은 오디푸스 콤플렉스로 아주 유명해 졌고, <안티고네>는 헤겔 뿐만 아니라 현대의 철학자들도 끊임없이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콜로노스의 오디푸스>는 'less than nothing'으로, 모든 것을 잃고 눈을 찔러 nothing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something인 된 인물로 지젝에 의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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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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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6

인지주의와 자기정립의 고리

 

 

  오래된 질문이지만 아직 우리가 전혀 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기의식이란 무엇인가? 등이 그렇다. 이 장은 호프스태터의 『나는 이상한 고리이다』를 통해, 자기의식의 출현에 관한 다양한 주장을 다루고 있다.

 

  자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네 가지다. 첫 째, 일상적인 이해. 우리가 자연스럽게 나라고 부르는 자아다. 둘 째, 철학적 이해. 독일관념론과 선험적 나는 이 이론의 정점이다. 세 째, 현대의 뇌과학과 인지주의의 자아 이론들이다. 넷 째,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적 주체 개념이다.

 

  뇌과학이 발달하여 우리 뇌의 모든 신경계의 역할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인간의 의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밝혀낼 수 있을까? 대뇌피질의 주름들 사이사이 하나하나의 뉴런들이 무슨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 밝혀진다면 인간의 정신을 어떤 특정한 뉴런의 작용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현대과학의 특징은 불완전성과 불확정성이다. 괴델은 수학의 논리체계조차 완전할 수 없음을 입증했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불확정성이라는 한계는 측정의 문제가 아니라 입자의 물리적 성질 자체에 기인한다. 이것의 의미는 측정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하더라도 불확정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불확정성 원리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우리가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의 한계가 아니라 물 자체의 한계이다.

 

  지젝이 뇌과학을 통해 주장하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의 출현,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 자기의식의 발생은 뇌과학의 한계를 극복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신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 것의 불가능성은 뇌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정신이라 불리는 것 그 자체의 특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젝은 무엇으로 정신의 출현을 설명하려는 것인가? 물론 뇌과학이 무시해 버리는 철학과 정신분석을 통해서이다.

 

 

  독일관념론은 자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흄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흄에게 그 자체로서의 자아, 지각 대상으로서의 자아라는 것은 없다. 단지 자아라고 할 때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특수한 생각, 인상들, 정서들뿐이다. 그런데 칸트는 흄이 없다고 표현한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지젝은 여기저기 지겹도록 써먹는 ‘라비노비치식 농담’ 이라는 것을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너 자신을 들여다보면 너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자아도 없는데요. 내 안에는 다수의 표상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주체는 바로 그것, 그 무라니까!” 흄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모두 '진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칸트는 나, 이 공백을 접근불가능한 물 자체로 남겨두었다. 피히테는 이 나가 물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에게 출현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헤겔도 마찬가지다.

 

  「칸트부터 헤겔에 이르는 흄 이후의 비판적·초월론적 관념론자들은 비판 이전의, 바위처럼 견고한 에고의 실체적 동일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 그들은 다름 아니라 (코기토를 res cogitans로, ‘사유하는 것’으로 읽는 데카르트 본인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에 의해 진술되고 있듯이) 실체적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환원불가능한 참조점으로 기능하는 자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갖고 씨름하고 있다. p1272」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단순한,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은 전혀 공허한 표상인 ‘나’가 있을 뿐이다. 이 표상에 대해 우리는 결코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가 없으며, 그것은 모든 개념에 수반하는 한낱 의식일 따름이다. 그런데 사고하는 이 ‘나’, 또는 ‘그’, 또는 ‘그것’(사물)에 의해서는 다름 아니라 사고들의 초월적 주체=X 가 표상되는데, 이것은 단지 그것의 술어들인 그 사고들에 의해서만 인식되며, 그것만 따로 떼어서는 그것에 관해서 우리는 최소한의 개념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판단하려면 그것의 표상을 항상 이미 사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결 같이 그것 주위를 빙빙 돈다. p1272」

 

  이 장에서 지젝은 인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철학-정신분석학의 반론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이름도 생소한 인지주의자들, 뇌과학자의 이론을 요약한다는 것은 무모한 욕심일 것이다. 결론적으로만 말하자면, 인지주의자들이 정작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독일관념론이 오랫동안 사고해왔던, 공백으로서의 자아다. 라캉이 말하는 $ 개념과 같은 것 말이다. 메칭거라는 인지주의자의 ‘붉은 화살표’ 에 대해 지젝은 칸트를 빌어 이렇게 답한다.

 

  「이 ‘나’는 예지체적인 것도 또 현상체적인 것도 아니며, 나의 탈주체적인 뉴런적 기층도 또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표상도 아니다. 메칭거에게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p1278」

 

  「나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에서 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붉은 화살표’는 또한 ‘표상 - 다른 어떤 것을 위한 플레이스 홀더일 뿐’ 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이 ‘다른 어떤 것’은 나의 뉴런적 기층이 아니며, 텅 빈 (자기)참조점으서의 나 자체, 라캉이 빗금 처진 S, $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주체가 정확히 지도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p1278」

 

  「메칭거가 놓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한 플레이스 홀더인’ 보통의 기호들과 반대로 자아를 대신하는 ‘붉은 화살표’는 무(주체 자체 ‘인’ 무)를 위한 플레이스 홀더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나는 나(주체)가 자신을 인식하는 일군의 특징이라는 통상적인 관념을 정정해야 한다. 즉 나는 규정상 나를 부재하는 것으로, 나의 대리자들이 가리키고 있는 텅 빔으로 경험하며, 나는 결코 자신을 직접적으로 나의 대리자들 또는 자아-모델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p1289」

 

  칸트가 ‘나’를 예지체적인 것도 현상체적인 것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제 3항의 잠재적 항이 필요해졌는데, 이것이 라캉이 $라 부르는 것이다. 라캉이 시니피앙의 주체를 $, 빗금처진 것으로 쓰는 이유는, 주체란 자신을 의미화를 통해 표상하려는 시도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이 실패를 수단으로, 실패를 통해 출현한다.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는 증명 불가능한 전제, 그것의 존재가 논증될 수 없으며 오직 직접적 논증의 실패를 통해서만 추론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접근 불가능한 물과 그것에 대한 직접적 접근을 막는 장애물 자체 사이의 이처럼 기묘한 일치는 주체의 지위가 실재의 지위임을 암시한다. -즉 라캉이라면 이렇게 말할 테지만, 주체는 상징화를 강요하려는 실패한 시도들에 대한 ‘실재의 대답’ 이다. p1289」

 

 

  정작 제목이 말하는 '자기정립의 고리'에 대해서는 하나도 요약하지 못했다. 호프스태터에 관해서도 그렇다. 철학에 정신분석학에 인지주의까지는 정말  벅차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은 인지주의에 대해 이 장 보다 훨씬 상세히 다루고 있긴 한데,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굳이 인지주의를 끌어 오지 않더라도 주체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인지주의나 뇌과학에 대한 고찰과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아마도 철학이 과학의 성과물과 따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호프스태터나 지젝이 언급하는 메칭거, 데넷 같은 과학자들의 이론도 주체에 대한 독일 관념론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그러나 지젝은 자기의식이나 정신의 출현 혹은 주체의 개념은 인지주의적 접근을 넘어서는 독특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들이 뉴런이나 뇌의 다른 기질적 측면에서 자아에 접근하는 한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 뭔 잘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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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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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들과 읽을 쉬운 철학책을 찾다 빌려 온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들은 왜 이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지 모르겠다. 원제는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다.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철학의 위안』으로 출간하기는 했다. 도서관 판본은 옛것이라 그대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다. 지난 번에 읽은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도 그렇더니만, 이렇게 말랑하게 제목을 바꿔 애먼 독자가 걸려들면 참 좋기도 하겠다.  하긴 지젝의 『Hegel:Less than nothing』을 『헤겔 레스토랑』+『라캉카페』로 바꿔 놓은 출판사도 있는데, 뭐.  제목만보고 이 두꺼운 책을 덥석 살 독자가 출판사 직원들의 상상 밖에도 존재할까 나는 그것이 참 궁금하다. 잠시 엇길로...;;

 

  알랭 드 보통의 책은 이것으로 딱 세권째인데, 그의 특징이 이런것인가 싶다. 철학이든 소설이든 뭐든 독자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여섯명의 철학자에 관한 설명인데, 소크라테스는 '인기 없는 사람을 위하여', 에피쿠로스는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세네카는 '좌절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식으로 여섯개의 장이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인데 각각 어떤 사람을 위한 철학자일까 맞춰 보는 것도 약간의 재미가 될 것이다.

  여하튼 나라는 사람 역시 인기도 없고 돈도 없고, 수시로 좌절하는 편인지라 조금 위안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예상했던 그런 종류의 철학 입문서나 해설서는 아니다.  애초에 철학을 삶의 위안으로 접근했던 것이 아니라 약간 낯설기까지 하다.

 

  독설가였다는 쇼펜하우어나 광기에 가득찼던 니체의 모습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의 철학에서 알랭 드 보통이 뽑아 낸 것은 그들 철학의 핵심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상심한 사람을 위해 쇼펜하우어를, 곤경에 처한 사람을 위해 니체를 이야기하려다 보니 결코 평범하지 않았을 이 철학자들의 모습에서 독기를 쪼옥 빼 버렸다. 독기나 광기로서 위안을 주기는 힘든 법이니 말이다. 이렇게  말랑하고 긍정적인 철학자를 읽다 보면 니체가 왜 미쳐버렸는지, 쇼펜하우어가 왜 그리 염세주의자로 이름을 떨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알랭 드 보통의 목적에는 충실한 모습이겠지만, 나는 조금 어색하다.

 

  무엇보다 제일 궁금한 것은 왜 이들 여섯명일까 하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섯명은 아니고, 가장 유용한 여섯명일까?  뜬 구름 잡는 형이상학이나 이해하지 못할 관념론 따위가 아니라 우리 평범한 인간에게 가장 실용적인 도움이 되는 여섯명인가? 우리 삶에 직접 위안을 줄 수 있는 여섯명인가? 알랭 드 보통만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왜 하필 이 여섯인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다.

 

  '철학'과 '위안'이라는 뜻밖의 조합에 약간 생소했지만, 나는 세네카에게서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다. 좌절에 자주 빠진다면, 세네카의 위로 아닌 위로가 어쩌면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줌마들과 함께 읽기에 적당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어렵지는 않지만 철학 입문서의 모범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쉽고 좋고 독특한 그런 책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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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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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원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물론 그 저자가 로얄드 달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맛』은 당연히 내가 처음 읽는 로얄드 달의 소설이다.

 

  단편 10개로 묶인 소설집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소설과 같다. 같은 빵틀에  재료만 바꿔 구운 여러가지 맛의 붕어빵처럼. 하나같이 맛있긴 한데, 네개, 다섯개, 여섯개를 넘어가면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배터져 죽기 전에 끝나지만, 첫 맛의 강렬함은 더부룩한 속 때문에 벌써 잊혀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뷔페나 코스 요리가 별로 먹고 싶지 않다. 한 배에 양식,일식,한식,중식까지 우겨 넣고 배를 두드리노라면 잘 먹었다는 만족감 보다는 미련한 짓이라는 후회가 앞선다. 코스 요리도 비슷하다. 배가죽이 빵빵해 질때까지 먹기는 하는데, 숟가락을 놓고 물러 앉을 때쯤엔 쾌감 보다 불쾌감이 앞선다. 소화력이 약해져서 그런지, 단품 요리나 일식 삼찬 정도가 제일 좋다.  그 고유의 맛을 집중해서 잘 느낄 수 있고 오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은 속이는 자가 어떻게  속는자가 되는가에 대한 다양한 변주이다. 잘난척하는 사람, 영리한척하는 사람, 교양있는척하는 사람들 모두, 자기가 놓은 덫에 걸려든다. 덫에 가장 잘 걸려드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 여러가지 사례들이 『맛』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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