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카페 Less Than Nothing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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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곡6

인지주의와 자기정립의 고리

 

 

  오래된 질문이지만 아직 우리가 전혀 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자기의식이란 무엇인가? 등이 그렇다. 이 장은 호프스태터의 『나는 이상한 고리이다』를 통해, 자기의식의 출현에 관한 다양한 주장을 다루고 있다.

 

  자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네 가지다. 첫 째, 일상적인 이해. 우리가 자연스럽게 나라고 부르는 자아다. 둘 째, 철학적 이해. 독일관념론과 선험적 나는 이 이론의 정점이다. 세 째, 현대의 뇌과학과 인지주의의 자아 이론들이다. 넷 째,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적 주체 개념이다.

 

  뇌과학이 발달하여 우리 뇌의 모든 신경계의 역할을 알아낼 수 있다면 인간의 의식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밝혀낼 수 있을까? 대뇌피질의 주름들 사이사이 하나하나의 뉴런들이 무슨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지 밝혀진다면 인간의 정신을 어떤 특정한 뉴런의 작용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까?

 

  현대과학의 특징은 불완전성과 불확정성이다. 괴델은 수학의 논리체계조차 완전할 수 없음을 입증했고,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불확정성이라는 한계는 측정의 문제가 아니라 입자의 물리적 성질 자체에 기인한다. 이것의 의미는 측정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하더라도 불확정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불확정성 원리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은 칸트에서 헤겔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우리가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의 한계가 아니라 물 자체의 한계이다.

 

  지젝이 뇌과학을 통해 주장하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의 출현,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 자기의식의 발생은 뇌과학의 한계를 극복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신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는 것의 불가능성은 뇌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정신이라 불리는 것 그 자체의 특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젝은 무엇으로 정신의 출현을 설명하려는 것인가? 물론 뇌과학이 무시해 버리는 철학과 정신분석을 통해서이다.

 

 

  독일관념론은 자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씨름해 왔다. 흄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흄에게 그 자체로서의 자아, 지각 대상으로서의 자아라는 것은 없다. 단지 자아라고 할 때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특수한 생각, 인상들, 정서들뿐이다. 그런데 칸트는 흄이 없다고 표현한 바로 그것이 자아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지젝은 여기저기 지겹도록 써먹는 ‘라비노비치식 농담’ 이라는 것을 들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너 자신을 들여다보면 너의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자아도 없는데요. 내 안에는 다수의 표상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주체는 바로 그것, 그 무라니까!” 흄에 대한 칸트의 대답이다.

  독일 관념론자들은 모두 '진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칸트는 나, 이 공백을 접근불가능한 물 자체로 남겨두었다. 피히테는 이 나가 물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에게 출현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헤겔도 마찬가지다.

 

  「칸트부터 헤겔에 이르는 흄 이후의 비판적·초월론적 관념론자들은 비판 이전의, 바위처럼 견고한 에고의 실체적 동일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 그들은 다름 아니라 (코기토를 res cogitans로, ‘사유하는 것’으로 읽는 데카르트 본인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에 의해 진술되고 있듯이) 실체적 동일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환원불가능한 참조점으로 기능하는 자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갖고 씨름하고 있다. p1272」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단순한,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은 전혀 공허한 표상인 ‘나’가 있을 뿐이다. 이 표상에 대해 우리는 결코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가 없으며, 그것은 모든 개념에 수반하는 한낱 의식일 따름이다. 그런데 사고하는 이 ‘나’, 또는 ‘그’, 또는 ‘그것’(사물)에 의해서는 다름 아니라 사고들의 초월적 주체=X 가 표상되는데, 이것은 단지 그것의 술어들인 그 사고들에 의해서만 인식되며, 그것만 따로 떼어서는 그것에 관해서 우리는 최소한의 개념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판단하려면 그것의 표상을 항상 이미 사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결 같이 그것 주위를 빙빙 돈다. p1272」

 

  이 장에서 지젝은 인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철학-정신분석학의 반론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이름도 생소한 인지주의자들, 뇌과학자의 이론을 요약한다는 것은 무모한 욕심일 것이다. 결론적으로만 말하자면, 인지주의자들이 정작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독일관념론이 오랫동안 사고해왔던, 공백으로서의 자아다. 라캉이 말하는 $ 개념과 같은 것 말이다. 메칭거라는 인지주의자의 ‘붉은 화살표’ 에 대해 지젝은 칸트를 빌어 이렇게 답한다.

 

  「이 ‘나’는 예지체적인 것도 또 현상체적인 것도 아니며, 나의 탈주체적인 뉴런적 기층도 또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표상도 아니다. 메칭거에게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 p1278」

 

  「나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에서 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붉은 화살표’는 또한 ‘표상 - 다른 어떤 것을 위한 플레이스 홀더일 뿐’ 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이 ‘다른 어떤 것’은 나의 뉴런적 기층이 아니며, 텅 빈 (자기)참조점으서의 나 자체, 라캉이 빗금 처진 S, $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주체가 정확히 지도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p1278」

 

  「메칭거가 놓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한 플레이스 홀더인’ 보통의 기호들과 반대로 자아를 대신하는 ‘붉은 화살표’는 무(주체 자체 ‘인’ 무)를 위한 플레이스 홀더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나는 나(주체)가 자신을 인식하는 일군의 특징이라는 통상적인 관념을 정정해야 한다. 즉 나는 규정상 나를 부재하는 것으로, 나의 대리자들이 가리키고 있는 텅 빔으로 경험하며, 나는 결코 자신을 직접적으로 나의 대리자들 또는 자아-모델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p1289」

 

  칸트가 ‘나’를 예지체적인 것도 현상체적인 것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제 3항의 잠재적 항이 필요해졌는데, 이것이 라캉이 $라 부르는 것이다. 라캉이 시니피앙의 주체를 $, 빗금처진 것으로 쓰는 이유는, 주체란 자신을 의미화를 통해 표상하려는 시도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이 실패를 수단으로, 실패를 통해 출현한다.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 주체는 증명 불가능한 전제, 그것의 존재가 논증될 수 없으며 오직 직접적 논증의 실패를 통해서만 추론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접근 불가능한 물과 그것에 대한 직접적 접근을 막는 장애물 자체 사이의 이처럼 기묘한 일치는 주체의 지위가 실재의 지위임을 암시한다. -즉 라캉이라면 이렇게 말할 테지만, 주체는 상징화를 강요하려는 실패한 시도들에 대한 ‘실재의 대답’ 이다. p1289」

 

 

  정작 제목이 말하는 '자기정립의 고리'에 대해서는 하나도 요약하지 못했다. 호프스태터에 관해서도 그렇다. 철학에 정신분석학에 인지주의까지는 정말  벅차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은 인지주의에 대해 이 장 보다 훨씬 상세히 다루고 있긴 한데, 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굳이 인지주의를 끌어 오지 않더라도 주체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인지주의나 뇌과학에 대한 고찰과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아마도 철학이 과학의 성과물과 따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호프스태터나 지젝이 언급하는 메칭거, 데넷 같은 과학자들의 이론도 주체에 대한 독일 관념론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그러나 지젝은 자기의식이나 정신의 출현 혹은 주체의 개념은 인지주의적 접근을 넘어서는 독특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들이 뉴런이나 뇌의 다른 기질적 측면에서 자아에 접근하는 한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닐까? 뭔 잘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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