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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오이디푸스 왕』은 희랍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이다. 그리스를 뜻하는 ‘희랍’ 이란 낱말은 예전 세로쓰기 신문에서나 보았을 법한 낡은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단어는 최근에 희랍어 원문을 직접 번역하는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며, 그리스란 영어 대신 널리 퍼뜨리고 있는 추세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헬라스’ 이며, 이것의 중국어 음차가 희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헬라스라 한 것을 그리스라고 번역하는 것은, 외국인이 일연의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신라를 코리아라 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세종대왕이 “우리 코리아는..”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전문가들은 헬라스가 익숙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음차지만 희랍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현대의 국가 자체를 지칭할 때는 공용어-영어 표기인 그리스가 별 문제가 없지만,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직접 다룰 때는 내 생각에도 희랍이나 헬라스가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아직 입에 달라붙지는 않지만 나도 ‘희랍’에 정을 붙이는 중이다. 참고로 아테네를 아테나이로, 스파르타를 스파르테로, 테베를 테바이로 바꾸어 부르는 모양이다. 도시명은 여성 복수명사로 불러야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은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복잡하다. 여하튼 고유명사에 관한 번역은 논란을 부르기 마련일 테지만, 일어판이나 영문판의 중역이 아닌, 원본 직역이 많아지면서 보이는 변화라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 삼부작 중의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로 완결되는 이 삼부작은 막장 중의 막장 가족인 오이디푸스 집안이 거의 씨를 말리며 쫄딱 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7편 중 대표적인 세 작품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순서가 이야기의 전개 과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맨 먼저 상연된 것이 내용상으로는 맨 마지막인 ‘안티고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빈틈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 이유는 소포클레스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이미 희랍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소포클레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줄거리는 이미 전해 내려온 이야기나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소포클레스는 다만 이것을 비극의 형식으로 훌륭하게 완성해내었을 뿐이다. 희랍 비극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까지도 공동창작에 속한다고 한다. 골방 속에서 창작의 산고를 겪는 고독한 작가의 이미지는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희랍 비극의 양식과 그것의 상연 과정은 강유원의 『고전인문강의』나 <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 링크는 작년 말에, 희랍 비극에 대한 강유원의 강의를 내가 조금 정리해 둔 것이다.
고전을 읽다보면 현대 드라마의 전형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모든 신데렐라 드라마의 원형(?.. 내가 아는 한)이다. 우리가 흔히 캔디로 통칭하는 주인공은 사실 엘리자베스이다. 별 볼일 없지만 자존심 하나는 꼿꼿한 여자가 사랑과 왕자님이라는 양손의 떡을 얻어내는 최고의 성공사례가 이미 19세기 영국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영국의 엄마들은 딸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오만과 편견』을 권한다고 하며, 얼마 전 영국은 10파운드 화폐에 다윈 대신 오스틴의 초상을 넣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이 책과 오스틴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마다 다를 것이지만,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문학사적 가치의 이면에 내포된 신데렐라를 향한 여성들의 숨겨진 욕망 때문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해본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그렇다. 지적이고 듬직한 남편과 열정적이고 매혹적인 청년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름다운 여인, 비극적 결말. 삼각관계와 불륜을 소재로 한 소위 막장 드라마의 아름다운 원형이 여기에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막장 드라마의 최강자는『오이디푸스 왕』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넷씩이나 둔 근친상간의 참극은 아무리 막 나가는 현대의 막장 드라마도 감히 넘보지 못할 절대 금기의 영역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어떤 이들에게는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그 금단의 영역을 넘본 아슬아슬함 때문일 것이다. 기껏해야 계모나 계부, 사촌이나 사돈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막장 드라마는 감히 『오이디푸스 왕』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 드라마의 원형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이 고전이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까닭은 무엇일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고전 완역판을 한번 정독해 본다면, 조금이나마 혹은 어렴풋이나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세 편에 걸쳐 펼쳐지는 오이디푸스 가족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훑어보자.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다. 그런데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아버지가 테바이의 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왕이 된 것은 그 유명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재앙으로부터 구해냈기 때문이다. 아침에 네발, 점심에 두발, 저녁에 세발 어쩌고 하는 수수께끼는 그 출처를 몰랐지만 우리 어린 시절 추억의 한 귀퉁이에도 존재하는 유명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한 도시를 구한 영웅으로, 인간들 중의 가장 현명한 인간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자신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희랍어 ‘휘브리스 hybris' 의 뜻은 오만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취임 당시 자신은 휘브리스라는 말을 듣지 않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데, 휘브리스라는 단어를 쓴 것 자체가 ‘나 고전 좀 읽었다’는 휘브리스질 같아 우습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랍 비극의 주제는 대부분 인간의 휘브리스를 경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웅은 오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오만함 때문에 신의 영역을 넘보는 잘못된 판단(하마르티아, hamartia)으로 비극을 맡게 된다. 여하튼 오이디푸스는 희랍 비극의 영웅답게 휘브리스와 하마르티아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데 아들, 딸 낳고 한껏 휘브리스의 절정에 서 있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온다. 테바이에 역병이 돌고, 이 재앙의 원인에 대한 신탁을 받아 오는데, 그 신탁이야말로 오이디푸스 가족에게는 진짜 재앙의 발단이 되어 버린다. 결국 출생의 비밀과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밝혀지자,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가슴에 꽂힌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바이로부터 추방시켜달라고 탄원한다. 여기까지가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즉각 테바이로부터 추방되지는 않는다.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은 이 재앙 같은 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지 몰라서 우물쭈물 세월을 보내는데, 그 사이 오이디푸스는 추락한 장님으로서의 삶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느닷없이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추방하고, 오이디푸스의 큰 딸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지팡이를 자처하며 희랍세계를 떠돌다가 콜로노스에 도착한다. 콜로노스는 아테나이의 한적한 교외로 소포클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희랍의 모든 도시들이 이 불행하고 불길한 인간을 재앙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아테나이는 그가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입성을 허락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아무것도 아닌자, 'nothing'으로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 갑자기 테바이의 왕 크레온,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앞뒤를 다투며 그를 찾아 달려온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장성한 뒤 테바이를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로 했는데, 둘 사이 싸움이 일어나 한 아들인 폴리네이케스가 외국으로 달아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로 쳐들어와 두 아들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지지하는 아들이 승리한다는 것으로,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는 서로 오이디푸스를 데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장님이 되어 희랍세계를 떠돌 때, 그를 가혹하게 내친 크레온과 자신을 전혀 도우지 않은 두 아들 모두를 저주하며, 제우스신의 계시에 따라 콜로노스의 숲 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 때 (nothing) 비로소 중요한 무엇인가가(something) 되었다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는데, 정확한 문장은 잊어버렸다. 여하튼 이때의 something이란 nothing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말하는) 'less than nothing' 이다. 속된 말로 하면 바닥을 봐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으로 휘브리스의 절정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장님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것something’ 이라는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자 안티고네는 테바이로 돌아온다. 그러나 전쟁으로 두 오빠 모두 죽고, 테바이의 왕이자 외삼촌인 크레온은 테바이를 침략한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한다. 크레온은 인간의 법을 들어, 이민족을 데리고 조국에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를 처벌한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 맞서 신의 법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다. 국법을 어긴 죄로 안티고네는 산채로 동굴에 갇히고, 안티고네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설득하지 못하자 안티고네와 함께 동굴에서 죽는다. 크레온의 아내 또한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살한다. 『안티고네』로 오이디푸스 삼부작은 완결되는데, 오이디푸스의 일가족 중 살아남은 자는 안티고네의 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딸인 이스메네와 처남인 테바이의 왕 크레온 뿐이다. 이스메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두고, 국법을 먼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니 안티고네와 대립했다. 크레온은 살아남았지만 아내와 자식을 잃고 파멸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대사는 유명하다.
오오 조국 테바이의 시민들이여, 보라, 이분이 오이디푸스다.
그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가 당당했으니
그의 행운을 어느 시민이 선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보라, 그러한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뇌의 풍파에 휩쓸렸는지를!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경구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새겨놓은 것인지, 이미 새겨진 말을 소크라테스가 유행시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여하튼 소크라테스의 말이 인간의 무지를 강조한 것이라면, 신전의 경구는 신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인간일 뿐이므로 그 한계를 알라는 경고에 가깝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운명은 신만이 아는 것이니 까불지 말라는 소리다. 즉 인간의 휘브리스에 대한 경고이다. 코러스가 비통하게 노래하듯 가장 현명한 인간 오이디푸스도 오만에 빠져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신이 내린 운명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다음 장면은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눈을 찌른 후의 것이다.
코러스 : 오오 그대 무서운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떻게 감히 그처럼
자기 눈을 멀게 할 수 있었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허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다.
어쩌면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오만함, 휘브리스는 이 마지막 문장에 있다. 신의 운명을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그 운명에 대한 책임만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 자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이 처연한 의지야말로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만한 도전이 아닐까?
이인화라는 작가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제목이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중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오이디푸스 왕』역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행복하다 기리지 말라는 코러스의 경고는,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신의 경고와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파헤치고야 만다. 오이디푸스는 "Who am I ?" 에 대한 답을 얻은 대가로, 그 휘브리스의 대가로 두 눈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린 그 두 눈을 찌른 것은 신이 아니라 ‘가련한’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오만한 인간의 처절한 파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린 파멸 앞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인간의 그 도저한 의지에 있다. 그것은 징벌인 동시에 구원이다. 손수 자신의 눈을 찌른 순간 오이디푸스는 신이 쳐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칸트는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 두려움에 떠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 거대함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다. (숭고에 관한 칸트의 개념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신이 예정한 파멸에 의해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nothing로 추락했지만, 바로 그 순간 스스로의 눈을 찔러 파멸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음으로써 그는 마침내 어떤 무엇인 자 - something가 되었다.
* 반년 전쯤 나는 민음사판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위해 이글을 쓰면서 인용문은 인터넷과 강유원의 CBS 강의를 참조했는데, 아마도 천병희의 번역판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인용문의 정확한 출처 (번역자)는 잘 모르겠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