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막과 초원을 품은 이슬람 세계

 

1. 동·서 교역로의 강대국, 페르시아

 

   희랍 세계와 전쟁을 하며, <300>이라는 영화에 등장했던 그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망했다. 그러나 이란 민족은 파르티아 왕국과 사산 왕조를 잇달아 세우며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지중해 세계는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는 로마제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충돌의 실제 목적은 영토 다툼보다는 동·서 교역로의 확보에 있었다. 교역의 요충지를 차지하면 평화 시에는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전쟁이 일어나면 무역을 봉쇄하여 로마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 교역의 결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에는 세계 여러 곳의 문화가 전해졌다. 그리스의 철학과 자연과학이 페르시아에서 발전하였고, 인도 문학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2. 아랍에서 이슬람교가 일어나다

 

   같은 아시아에 속하지만 아랍세계는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다. 이슬람교를 믿는 친척도 (거의) 없고, 아랍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TV의 여행 프로그램도 아랍세계를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중동 건설 붐에 대한 70년대의 신화도 지금 세대에게는 가뭇한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아랍세계는 테러, 근본주의, 걸프전 같은 무서운 이미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아랍세계는 진짜 이런 음습한  세계일까?

 

   고대 제국들이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세워지기 시작한데 반해, 아라비아 인들은 1,500년 정도가 지난 기원후 6세기가 될 때까지, 국가 없이 부족단위로 살았다. 사막이 대부분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목생활을 하거나 오아시스 주변에 소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6세기에 들어 아라비아 인들의 삶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와 로마가 다시 전쟁을 하면서 동서교역로가 막히자, 상인들은 무역을 위한 새로운 길이 필요해 졌다. 아라비아 반도는 지중해와 홍해 그리고 인도양을 잇는 뱃길과 육로의 중심해 위치해 있어, 무역의 요충지로 떠오를 수 있었다. 아라비아 인들도 유목과 농경에서 벗어나 무역에 뛰어들었고, 부를 축적한 이들 상인들은 세계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잇는 아라비아 반도 : 아틀라스 세계사 >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의 상인이었다.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아 “신 앞에서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 고 주장하며 유일신 알라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무함마드는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였고, 630년 무렵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여 아라비아인이 중심이 된 국가를 세웠다. 이슬람 공동체는 종교 공동체인 동시에 정치 공동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 공동체는 칼리프라는 선출된 지도자가 통치하다가 곧이어 왕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때부터 갈라진다.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의 핏줄을 인정하는 시아파와 왕조시대를 연 우마이아 가문을 인정하는 수니파로 나뉘었다. 가끔씩 해외 뉴스에 나오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극한 대립은 이슬람교의 초창기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3. 세 대륙을 품은 이슬람

 

   우리나라도 그런 것처럼 이슬람 세계도 한 왕조가 계속 지배한 것은 아니다. 우마이아 왕조가 아바스 가문에 의해 망하고, 이슬람은 세 대륙을 품은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걸친 아바스 제국 역시 곧 여러 왕조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에스파냐 지역을 차지한 후우마이야 왕조는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유명하다. 후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이슬람, 비잔티움, 그리스의 문화가 한데 어울려 수준 높은 문화를 남겼다. 우리가 잘 아는 알함브라 궁전은 훨씬 후대에 지어진 것이긴 하지만, 유럽에 대한 이슬람의 지배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로 남아있다.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파티마 왕조는 나일 강 주변의 풍부한 자원과 무역으로, 이슬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는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이다. 바그다드는 동서교역의 최대 거점지로 활발한 국제 무역을 벌였다. 바그다드는 ‘세계의 시장’ 이었고, 10세기에는 인구 15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이 교역로를 통해 전 세계의 우수한 문화가 이슬람으로 흘러들었고, 이슬람의 문화가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 부르는 것도 사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이슬람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라는 잘못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 라는 뜻을 가진 아라비카 역시 아프리카가 원산지 이지만, 커피 문화 그 자체가 이슬람을 통해 다른 세계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나 남미 대륙에서 재배된 커피콩을 지금도 우리는 아라비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커피가 아라비아에 정착한 것은 14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이슬람 세계가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라 미리 언급하였다.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7세기부터 11세기 무렵까지 이슬람세계의 주인은 아라비아인이었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삼았지만, 민족 차별을 폐지하고 누구나 이슬람법에 따라 평등하게 통치되었다. 종교적 자유도 보장되었고, 천문학과 의학이 꽃을 피우고, 전 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모여들고 퍼져나가는 세계의 중심지였다. 지금 우리가 연상하는 테러, 근본주의, 내전, 기아 같은 무섭고 어두침침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4. 이슬람 세계에 부는 바람

 

   11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에 새 주인이 나타났다. 몽골 초원에서 질풍같이 달려온 셀주크 튀르크라는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칼리프는 이름뿐인 종교 지도자로 밀어내고, 대신 정복자 토글리 베그 자신이 이슬람의 실질적인 제왕이 되었다. 그는 술탄이라고 불렸는데, 우리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은 그 술탄이 아마 이때부터 이슬람의 황제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슬람을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

 

   여러 왕조로 나뉘었던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튀르크 아래 다시 하나로 통일 되어갔다. 그 와중에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사로잡혔고, 이 때문에 유럽과 이슬람의 20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다.

  

 

  <유라시아를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 몽골제국  : 아틀라스 세계사>

 

   그러나 이슬람 제국은 다시 한 번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당했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파도처럼 몰려온 것이다. 1258년 바그다드가 점령당하고 칭기즈칸의 손자가 세운 일한국이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가 되었다. 몽골제국은 거대한 유라시아 제국을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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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0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랍세계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 시대의 아랍에 대해 알게 해 줍니다.
또한 아라바아 숫자, 커피와 같이 잘못 알았던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말리 2014-05-0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서가 '편견'이란 말도 알구 있구나. 그런데 사람들은 왜 편견을 갖게 될까? 윤서가 살면서 '아! 난 편견으로 그것을 대했구나' 란 생각을 했던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 맨 처음 이런게 편견이었구나 생각하게 만든 일이 있으면 댓글을 달거나 (글을 써도 되고 ㅎ) 다음 시간에 한번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쓴 2장 3장도 찾아서 읽고, 댓글 부탁한다~ 어린이날 잘 보내고~~
 

 

   3. 드넓은 제국,

       커다란 믿음

 

 

 

 

 

 

 

 

1.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4대 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BC 1,000년경부터 AD 3세기 무렵 사이, 세계 곳곳에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중해 지역의 로마,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가 세워졌다.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제국들의 통치도구는 비슷한 것들이 많다. 잘 훈련된 군대, 체계화된 관료조직, 쭉 뻗은 도로망, 정비된 법률 그리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켜주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제국의 탄생과 함께 거의 동시에 각 대륙에 나타났는데, 통치술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제국들은 수 백 년 만에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문화와 종교는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민족의 삶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각 대륙을 차지한 고대의 제국들 : 아틀라스 세계사 >

 

 

 

 <각 대륙의 종교 : 아틀라스 세계사 >

   

다리우스 1세 시절에 전성기를 맞은 페르시아는 효율적인 통치도구와 더불어 식민지민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약 20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페르시아는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해주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가 만든 이 종교는 세상을 선과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흐리만의 대결로 보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성을 높이 샀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서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등의 내용은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대승 불교에 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2. 폴리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우리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는 단군신화보다 더 친숙하다. 그만큼 고대 희랍문명은 서양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동양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희랍은 고대 그리스의 이름인 헬라스를 한자음을 빌려와 번역한 것이다. 헬레니즘이란 말도 헬라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희랍의 정신, 문화, 사상 등을 가리킨다. 희랍세계는 여러 개의 작은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아테네는 희랍세계의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배출 될 만큼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또 아테네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민주정치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민주정치와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희랍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희랍세계의 여러 폴리스들은 두 편으로 나눠 30년 가까이 전쟁을 했고 그 이후 점점 쇠퇴해갔다.

 

 

 

<희랍(그리스) 세계와 주변국>

 

희랍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폴리스 세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복했다. 폴리스는 망했지만 희랍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시아와 이집트까지 널리 퍼졌다. 이렇게 전파된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하며, 이 문화를 받아들인 지역을 헬레니즘 세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후 유럽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잊어버렸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이슬람 세계가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서양세계에 거꾸로 전해주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을 꽃피워 냈다.

 

 

3.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의 만남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뒤를 이어 헬레니즘 세계를 차지했다. 카르타고까지 물리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로마의 정치는 귀족 공화정이었으나, 카이사르 이후 옥타비아누스를 거쳐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 자리 잡았다. 공화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합의에 의해 통치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현대의 민주 공화정과는 달리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원이 통치하였다.

 

 

  <지중해를 차지한 거대한 로마제국 >

 

로마는 각종 실용문화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로마의 법은 이후 서양 근대 법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는 속담에서도 로마법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속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에서 알 수 있듯, 로마는 토목과 건축 분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길은 제국의 동맥과 같다.

크리스트교는 초기의 박해 기간이 지난 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거대한 로마제국을 통해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크리스트교를 이용하여 드넓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다. 크리스트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억압했다.

 

 

 

4.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 마우리아

 

브라만교는 카스트 제도를 따르는 인도의 고대 종교이다. 현대의 힌두교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브라만교를 포함하여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브라만교는 계급 제도를 정당화하며 브라만 계급만이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이런 인도 사회에 반대하며, 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불교는 천민 보다 왕과 전사 그리고 돈을 많이 번 부유한 평민에 의해 더욱 환영받았다. 무력과 돈을 가진 이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은 브라만 계급의 거만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국가의 지배 세력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소카왕은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대부분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아소카왕은 잔인한 전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으나, 이후 살생을 크게 반성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의 진리에 기초한 이상 정치를 꿈꾸었다. 아소카 왕에 의해 아시아 각지는 물론 유럽까지 불교가 퍼져 나갔다. 삼국시대였던 우리나라에도 이 때 불교가 전파되었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탑(인도어로 스투파)도 아소카왕의 지시로 세워졌는데, 스투파는 ‘흙으로 만든 무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누어 넣어 놓아, 이후로 석가모니의 무덤이자 넋이 기린 곳으로 숭앙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 신자들은 탑에 합장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5. 중국의 울타리를 쌓은 진나라

 

주나라가 힘을 잃자 중국대륙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200여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다투다 말기에는 7개의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혼란한 시기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한비자, 묵자들이 그들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자, 이들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국가를 안정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평안케 할 수 있는지를 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사상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과 이들의 학문을 가리켜 제자백가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진나라의 시황제, 즉 진시황이다. 중국을 China라고 부르는 것도 진Chin 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 시대의 여러 나라가 쌓아 놓은 성들을 연결하여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유목 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세운 성이다.

 

 

6.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진나라가 망하자 중국을 차지한 나라는 한나라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나라는 문화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중국의 문자를 가리키는 한자와 한문, 그리고 중국 민족을 의미하는 한족 등의 단어가 모두 漢에서 따온 것이다.

한나라는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가르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였다. 살아있을 때 공자는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았지만, 제후들은 모두 공자를 내쫒았다. 공자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한나라 이후 꽃을 피워 지금까지 중국은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나라는 서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이 길을 통하여 각국의 사절과 상인, 승려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동서양을 느슨하게나마 이어주었다. 특히 비단은 멀리 로마까지 운송되었기 때문에, 이 길을 비단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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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잘 알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도 나와서 재미있었고
많이 들어 보았지만 뜻을 잘 알지 못했던 카스트 제도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이해를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윤서와 함께 공부하는 세계사 교재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이다. 초등 6학년이라 아직 어렵지만 윤서가 하고 싶다고 해서 1주일에 한 장씩 공부하는 중이다. 몇 백년에 걸친 여러 대륙의 역사를 한시간 남짓에 훑어 보려니 나도 벅차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넘어가야 할지 어렵다. 한 시간 내내 열심히 떠들지만 과연 윤서에게 어떤 공부가 되고 있을지 고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매주 정리해 두려고 한다. 나도 생각을 가다듬고, 윤서도 복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1장은  역사관에 대한 내용이라 건너뛰고 2장부터 정리한다.

 

 

 

2.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빚으니

 

1. 인류의 고향, 아프리카

 

지구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138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해서 46억 년 전 태양과 지구가 생겨나고, 그 후에도 상상하기 힘든 오랜 시간이 지나 약 500만 년 전에 인류가 출현했다. 인류의 고향은 아프리카다. 사람들이 가장 뒤떨어진 대륙이라 생각하는 아프리카가 사실 가장 일찍 인류의 삶이 시작된 선진 대륙인 것이다.

 

<검은 색 원 안은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계곡 : 인류의 고향> 

  

인류는 약 1만 년 전부터 채집과 수렵으로부터 벗어나 목축과 농경을 하는 신석기 시대로 접어든다. 풍요와 함께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배세력이 발생하고, 불평등과 자연 환경 파괴의 문제 또한 시작되었다.

 

 

2. 역사가 시작된 땅 수메르

 

물은 농경에 필수적이다. 인류의 4대 문명은 물이 풍부한 큰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서남아시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최초의 국가가 등장했다. 문명이 발생한 곳의 국가 형태는 4대 문명 어디나 비슷하다. 강물을 다루는 시설과 기술이 발달했고,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도시에 큰 건축물이 세워지고, 지배세력이 등장한다. 세력을 키운 국가는 전쟁을 일으켜 땅을 점점 넓혀가다 마침내 제국을 형성한다.

   

 

<4대 문명의 발상지 (붉은 색 원안에 표시) : 아틀라스 세계사>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함무라비 법전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구가 냉혹하고 엄격한 인상을 주지만, 이 법의 목적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학대하는 일이 없고, 피붙이가 없는 여자 아이와 과부에게 정의를 가져다주기 위해” 서라 한다.

 

 

3. 지중해를 밝히는 문명의 빛

 

지중해는 말 그대로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이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 둘러싸인 지중해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로마 같은 서양 문명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대 지중해 문명의 시작은 아프리카 대륙의 이집트-나일강 문명이다. 전성기의 고대 이집트는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였다. 나일 강의 범람에 의한 비옥한 토지가 고대 이집트의 밑바탕 이었다. 이 지역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3대 유일신 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지중해 동쪽 현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페니키아인들의 알파벳이 지금 유럽 여러 민족이 사용하는 알파벳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4. 인더스 강에서 황허까지

 

인도 문명은 히말라야의 물줄기가 모여든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했다. 인도를 지배했던 아리아인들이 만든 카스트 제도(인도인들은 바르나라고 부른다)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황허강 유역의 중국문명은 하·은·주라는 국가를 차례로 세웠다. 주나라가 만든 ‘봉건제도’는 춘추시대의 공자가 실현하려 했던 정치제도 이다. 천자가 임명한 제후는 각자 자기 지역의 나라를 다스리되, 천자국은 제후국들이 백성을 어진 마음으로 다스리는지 감독하고 징벌하는 권한을 가진다. 천자와 제후, 백성은 하나의 가족과 같은 관계를 맺는다. 천자는 백성을 자식처럼, 백성은 천자와 제후를 어버이처럼 받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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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브라만과 크사트리아, 바이사 그리고 수드라만도 못한 불가촉천민을 연관지을 수 있어 흥미롭다.
그리고 4대 문명인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 문명, 황허 문명을 알 수 있어 좋다.
 

곰동씨는 이제야 그 영화 <설국열차>를 보았다. 영화관에서 진즉에 사라진 그 영화가 TV VOD 상자에 덜커덩 나타난 것이다. TV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은 곰동씨의 얼굴은 괜스레 발개졌다. 굿 뒤에 날장구 치는 놈이 겸연쩍은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곰동씨는 자판을 톡, 치기 시작했다. “영화는 ....”

 

곰동씨는 생각했다. 너무 노골적이야... 이거 좀 심한걸...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는 딱 하나였다. 너무 분명해, 말 깨나 한다는 어떤 평자도 이견을 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사실 곰동씨는 작년 개봉전후에 쏟아져 나오던 평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곧 볼 것이니까. 그런데 해를 훌쩍 넘긴 것이다. 여하튼 그러므로 지금부터 곰동씨가 중언부언하는 것은 곰동씨 딴에는 새로운 것이다. 남들은 이미 예전에 열을 올리다 이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들이겠지만.

 

곰동씨의 머리에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지젝이었다. 이 영화는 지젝이 귀 딱지가 앉도록 외쳐대는 ‘환상을 횡단하기’ 다. 나쁜 것이냐? 더 나쁜 것이냐? 의 선택. 월포드의 ‘order' 는 나쁜 것이다. 그러나 열차 밖의 얼어붙은 땅은 더 나쁜 것이다. 행복한 삶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땅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얼어붙은 눈 위의 첫발자국을 선택해야 하는가? 봉준호의 답은 그렇다, 이다.

 

시스템 안에서는 어떤 미친 지랄도 궁극에는 시스템의 봉사자로 기여한다. 종교적 구원도 유혈 봉기도 시스템의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다.

 

길리엄도 월포드 만큼이나 체제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존재한다. 종교란 늘 그래왔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의 옆에 서지만, 그 자리는 늘 같은 곳이다. 가난한자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꼬리칸에. 곰동씨는 아! 나쁜 감독이라, 속삭인다. 종교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까대다니. 구원의 한 가닥 줄마저 잘라버리는 잔인한 인간 같으니!

 

커티스는 어떤가? 목숨을 건 봉기가 체제 전복이 아니라 체제 안정의 도구였음을 알게 된 커티스에게 월포드는 자신의 자리를 제안한다. 체제를 지키는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라! 다 때려 부수어도 좋다. 단, 열차 안에서라면. 커티스 네 녀석도 알게 될 것이니. 인류의 생존은 열차에 달려있고, 열차는 질서와 균형에 의해 달린다는 진리를! 커티스가 엔진을 장악한 것이 아니다. 엔진이 인간을 장악한 것이다. 곰동씨는 속삭인다, 자본주의처럼. 자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상품으로 만들어 자본주의 화하는 괴물. <괴물>이 괴물에 잡아먹혔던 봉준호의 그 영화처럼. 그 때 <괴물>이 싹쓸이한 스크린이 몇 개였더라?

 

그래서, 엔진은 완전한가? 시스템은 영구적인가? 톱니처럼 돌아가는 엔진 틈새로 쪼그려 앉아 뭔가를 닦던(?)) 그 꼬마 아이. 곰동씨는 악! 놀라는 동시에, 오! 감탄했다. 부품을 대신하고 있던 그 아이, 엔진의 치명적 결함을 은폐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그 유색인 아이. 그 조그만 이물질. 라캉의 대상a !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체현하고 있는 아이. 하.하.하... 괴물 같은 시스템이, 그 영구적인 엔진이, 그 무한궤도의 설국열차가 한낱 이물질에, 조그맣고 깡마른 고사리 손에 달려 있다.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아이, 그 아이가 가리고 있는 것은 시스템의 구멍이다. 아이가 부품을 대신하여 구멍을 가리고 있는 한 엔진은 영구적이다. 아이가 빠져나와 그 구멍이 그대로 드러나면 엔진은 멈추고 시스템은 마비된다. 시스템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전체이다. (W)hole ! whole인 동시에 hole인. 대상a는 hole을 whole로 만드는 스크린이자, whole이 hole일 뿐임을 가리키는 지시자이다. 곰동씨는 또다시 속삭인다. 이건 대상a에 대한 최고의 사례가 되겠어, 정말.

 

엔진이 멈추고 콰쾅~ 폭발! 열차는 궤도를 이탈하고, 아니 궤도 자체가 날아가고, 세계는 파멸한다. 누군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무엇도 미래를 보증하지 못한다. 대타자는 없다. 폭발과 함께 인류는 멸종할 수 있고, 운 좋게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 위험을 무릅쓸 미친놈이 아니고는 시스템을 파괴할 수 없다. 시스템 내에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자의 최대치는 커티스다. 커티스인가, 남궁민인가? 남궁민의 한국말은 방언이다. 약에 쩐 놈의 중얼, 중얼, 중얼. 설국열차 안의 사람들에게 남궁민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미친놈, 그래서 선지자이다. 죽음의 땅 너머 가나안을 예언하는 선지자, 그러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곰동씨는 감탄한다. 봉준호는 영리하다. 한국말은 선지자의 방언이며, 주변부 감독의 자부심이다. 곰동씨의 동족들은 열광한다. 오~ ‘어린쥐’ 위로 툭툭 던지는 ‘시발’의 쾌감이란!

 

지배자도, 지도자도, 선지자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는. 너머를 보는 눈을 가진 요나와 시스템의 이물질,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꼬마.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인류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눈밭위에 이들은 생존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답하지 못하지만, 저 멀리서 이들을 일별하는 흰 곰 한 마리. 그래, 곰동씨의 조상은 곰이었지, 웅녀가 보우하사 새로운 나라 만세? 귀여워라 봉준호.

 

궤도를 달리던 열차는 날아갔다. 궤도는, 좌표는 없다. 맨 땅, 언 땅에서 길을 만들어야 한다. 루쉰이 말했다. “원래 땅 위에 길은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아니 장자가 먼저 말했던가? 곰동씨는 그사이 까먹었다.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분명히 들었는데, 뤼쉰의 길 운운은 장자에서 따온 것이구나 생각했는데, 고 문장이 생각이 안나네 웅웅;. 머리 한번 따콩 쥐어박고. 다시 돌아가자, 길로. 그런데 새로운 길은 더 좋은 세계로 맞닿아있을까? 곰동씨는 그것이 늘 걱정이다. 그러나 영화는 언제나 그 전에 끝난다. 시원하게 부쉈으면 됐지, 더 뭘 바래? 영화는 그렇게 곰동씨에게 눈을 흘기는 것 같다. 눈 밖에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세상은 설국열차의 질서와 균형 잡힌 세계 보다 더 나을까?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답할 수 없다. 누구도 모르니까. 가지 않은 길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아니, 나지도 않은 길에 무엇이 있겠는가? 곰동씨의 말장난에 의하면, less than nothing 이 있을 뿐이다. nothing 보다 못하지만 nothing은 아닌 것. 곰동씨도 무슨 방언을 하는 걸까? 곰동씨도 선지자? ㅋ ㅋ ㅋ 온 세계에 무능함과 부패함을 널리 알리느라 정신없이 바쁜 곰동씨의 앙칼진 정부가 독이 잔뜩 오른 채 유언비어를 엄단하겠다는 이 시절에 무슨 그런 혹세무민의 농담을! 곰동씨는 그저 주워 읽은 것을 툭 한번 던져 보았을 뿐이다, 말이 되거나 말거나. 여하튼 <설국열차>는 곰동씨를 허연 눈벌판에 내려놓았다.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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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7
소포클레스 지음, 강대진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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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 왕』은 희랍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대표작이다. 그리스를 뜻하는 ‘희랍’ 이란 낱말은 예전 세로쓰기 신문에서나 보았을 법한 낡은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단어는 최근에 희랍어 원문을 직접 번역하는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며, 그리스란 영어 대신 널리 퍼뜨리고 있는 추세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그리스는 ‘헬라스’ 이며, 이것의 중국어 음차가 희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헬라스라 한 것을 그리스라고 번역하는 것은, 외국인이 일연의 삼국유사를 번역하면서 신라를 코리아라 하는 것처럼 어색하다. 세종대왕이 “우리 코리아는..”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전문가들은 헬라스가 익숙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음차지만 희랍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현대의 국가 자체를 지칭할 때는 공용어-영어 표기인 그리스가 별 문제가 없지만, 고대 그리스의 작품들을 직접 다룰 때는 내 생각에도 희랍이나 헬라스가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아직 입에 달라붙지는 않지만 나도 ‘희랍’에 정을 붙이는 중이다. 참고로 아테네를 아테나이로, 스파르타를 스파르테로, 테베를 테바이로 바꾸어 부르는 모양이다. 도시명은 여성 복수명사로 불러야하기 때문이라는 것 같은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복잡하다. 여하튼 고유명사에 관한 번역은 논란을 부르기 마련일 테지만, 일어판이나 영문판의 중역이 아닌, 원본 직역이 많아지면서 보이는 변화라 흥미롭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 삼부작 중의 하나이다. ‘오이디푸스 왕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로 완결되는 이 삼부작은 막장 중의 막장 가족인 오이디푸스 집안이 거의 씨를 말리며 쫄딱 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7편 중 대표적인 세 작품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들이 만들어진 순서가 이야기의 전개 과정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맨 먼저 상연된 것이 내용상으로는 맨 마지막인 ‘안티고네’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빈틈없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 이유는 소포클레스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이미 희랍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소포클레스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줄거리는 이미 전해 내려온 이야기나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소포클레스는 다만 이것을 비극의 형식으로 훌륭하게 완성해내었을 뿐이다. 희랍 비극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까지도 공동창작에 속한다고 한다. 골방 속에서 창작의 산고를 겪는 고독한 작가의 이미지는 근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희랍 비극의 양식과 그것의 상연 과정은 강유원의 『고전인문강의』나 <CBS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 링크는 작년 말에, 희랍 비극에 대한 강유원의 강의를 내가 조금 정리해 둔 것이다.

 

 

고전을 읽다보면 현대 드라마의 전형을 발견할 때가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모든 신데렐라 드라마의 원형(?.. 내가 아는 한)이다. 우리가 흔히 캔디로 통칭하는 주인공은 사실 엘리자베스이다. 별 볼일 없지만 자존심 하나는 꼿꼿한 여자가 사랑과 왕자님이라는 양손의 떡을 얻어내는 최고의 성공사례가 이미 19세기 영국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영국의 엄마들은 딸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오만과 편견』을 권한다고 하며, 얼마 전 영국은 10파운드 화폐에 다윈 대신 오스틴의 초상을 넣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이 책과 오스틴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마다 다를 것이지만,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는 문학사적 가치의 이면에 내포된 신데렐라를 향한 여성들의 숨겨진 욕망 때문이 아닐까 살짝 의심도 해본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그렇다. 지적이고 듬직한 남편과 열정적이고 매혹적인 청년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름다운 여인, 비극적 결말. 삼각관계와 불륜을 소재로 한 소위 막장 드라마의 아름다운 원형이 여기에 있다. 『안나 카레니나』와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막장 드라마의 최강자는『오이디푸스 왕』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넷씩이나 둔 근친상간의 참극은 아무리 막 나가는 현대의 막장 드라마도 감히 넘보지 못할 절대 금기의 영역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가 어떤 이들에게는 구역질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도 그 금단의 영역을 넘본 아슬아슬함 때문일 것이다. 기껏해야 계모나 계부, 사촌이나 사돈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막장 드라마는 감히 『오이디푸스 왕』의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장 드라마의 원형처럼 보이는 이 작품들이 고전이라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까닭은 무엇일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고전 완역판을 한번 정독해 본다면, 조금이나마 혹은 어렴풋이나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 세 편에 걸쳐 펼쳐지는 오이디푸스 가족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훑어보자.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다. 그런데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아버지가 테바이의 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의 왕이 된 것은 그 유명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를 재앙으로부터 구해냈기 때문이다. 아침에 네발, 점심에 두발, 저녁에 세발 어쩌고 하는 수수께끼는 그 출처를 몰랐지만 우리 어린 시절 추억의 한 귀퉁이에도 존재하는 유명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한 도시를 구한 영웅으로, 인간들 중의 가장 현명한 인간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었다. 그러니 오이디푸스 자신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희랍어 ‘휘브리스 hybris' 의 뜻은 오만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취임 당시 자신은 휘브리스라는 말을 듣지 않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데, 휘브리스라는 단어를 쓴 것 자체가 ‘나 고전 좀 읽었다’는 휘브리스질 같아 우습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랍 비극의 주제는 대부분 인간의 휘브리스를 경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영웅은 오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오만함 때문에 신의 영역을 넘보는 잘못된 판단(하마르티아, hamartia)으로 비극을 맡게 된다. 여하튼 오이디푸스는 희랍 비극의 영웅답게 휘브리스와 하마르티아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다. 그런데 아들, 딸 낳고 한껏 휘브리스의 절정에 서 있을 때 갑자기 불행이 닥쳐온다. 테바이에 역병이 돌고, 이 재앙의 원인에 대한 신탁을 받아 오는데, 그 신탁이야말로 오이디푸스 가족에게는 진짜 재앙의 발단이 되어 버린다. 결국 출생의 비밀과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모든 죄가 밝혀지자, 어머니이면서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의 가슴에 꽂힌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테바이로부터 추방시켜달라고 탄원한다. 여기까지가 『오이디푸스 왕』의 줄거리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즉각 테바이로부터 추방되지는 않는다.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은 이 재앙 같은 인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지 몰라서 우물쭈물 세월을 보내는데, 그 사이 오이디푸스는 추락한 장님으로서의 삶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느닷없이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추방하고, 오이디푸스의 큰 딸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지팡이를 자처하며 희랍세계를 떠돌다가 콜로노스에 도착한다. 콜로노스는 아테나이의 한적한 교외로 소포클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희랍의 모든 도시들이 이 불행하고 불길한 인간을 재앙으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아테나이는 그가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입성을 허락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아무것도 아닌자, 'nothing'으로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 갑자기 테바이의 왕 크레온,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앞뒤를 다투며 그를 찾아 달려온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은 장성한 뒤 테바이를 번갈아 가며 통치하기로 했는데, 둘 사이 싸움이 일어나 한 아들인 폴리네이케스가 외국으로 달아나 군대를 이끌고 테바이로 쳐들어와 두 아들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신탁은 오이디푸스가 지지하는 아들이 승리한다는 것으로, 크레온과 폴리네이케스는 서로 오이디푸스를 데려가려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장님이 되어 희랍세계를 떠돌 때, 그를 가혹하게 내친 크레온과 자신을 전혀 도우지 않은 두 아들 모두를 저주하며, 제우스신의 계시에 따라 콜로노스의 숲 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닐 때 (nothing) 비로소 중요한 무엇인가가(something) 되었다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는데, 정확한 문장은 잊어버렸다. 여하튼 이때의 something이란 nothing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지젝이 말하는) 'less than nothing' 이다. 속된 말로 하면 바닥을 봐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것.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으로 휘브리스의 절정에 섰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장님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어떤것something’ 이라는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자 안티고네는 테바이로 돌아온다. 그러나 전쟁으로 두 오빠 모두 죽고, 테바이의 왕이자 외삼촌인 크레온은 테바이를 침략한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한다. 크레온은 인간의 법을 들어, 이민족을 데리고 조국에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를 처벌한 것이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에 맞서 신의 법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다. 국법을 어긴 죄로 안티고네는 산채로 동굴에 갇히고, 안티고네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설득하지 못하자 안티고네와 함께 동굴에서 죽는다. 크레온의 아내 또한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살한다. 『안티고네』로 오이디푸스 삼부작은 완결되는데, 오이디푸스의 일가족 중 살아남은 자는 안티고네의 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딸인 이스메네와 처남인 테바이의 왕 크레온 뿐이다. 이스메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두고, 국법을 먼저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언니 안티고네와 대립했다. 크레온은 살아남았지만 아내와 자식을 잃고 파멸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대사는 유명하다.

 

   오오 조국 테바이의 시민들이여, 보라, 이분이 오이디푸스다.

   그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 권세가 당당했으니

   그의 행운을 어느 시민이 선망의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보라, 그러한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뇌의 풍파에 휩쓸렸는지를!

   그러니 우리의 눈이 그 마지막 날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인간일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말라,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소크라테스의 저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진 경구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새겨놓은 것인지, 이미 새겨진 말을 소크라테스가 유행시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여하튼 소크라테스의 말이 인간의 무지를 강조한 것이라면, 신전의 경구는 신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인간일 뿐이므로 그 한계를 알라는 경고에 가깝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운명은 신만이 아는 것이니 까불지 말라는 소리다. 즉 인간의 휘브리스에 대한 경고이다.  코러스가 비통하게 노래하듯 가장 현명한 인간 오이디푸스도 오만에 빠져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신이 내린 운명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다음 장면은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눈을 찌른 후의 것이다.

 

   코러스 : 오오 그대 무서운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떻게 감히 그처럼

              자기 눈을 멀게 할 수 있었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다. 내 이

                    쓰라리고 쓰라린 고통이 일어나도록 하신 분은, 허나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다.

 

 

어쩌면 오이디푸스의 진정한 오만함, 휘브리스는 이 마지막 문장에 있다. 신의 운명을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그 운명에 대한 책임만은 신이 아니라 인간인 자신의 뜻에 따라,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이 처연한 의지야말로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만한 도전이 아닐까?

 

이인화라는 작가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란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제목이 너무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중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오이디푸스 왕』역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삶의 종말을 지나 고통에서 해방될 때 까지는” 행복하다 기리지 말라는 코러스의 경고는,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신의 경고와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끝까지 파헤치고야 만다. 오이디푸스는 "Who am I ?" 에 대한 답을 얻은 대가로, 그 휘브리스의 대가로 두 눈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린 그 두 눈을 찌른 것은 신이 아니라 ‘가련한’ 오이디푸스 자신이다.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오만한 인간의 처절한 파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린 파멸 앞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인간의 그 도저한 의지에 있다. 그것은 징벌인 동시에 구원이다. 손수 자신의 눈을 찌른 순간 오이디푸스는 신이 쳐놓은 운명의 그물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칸트는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 두려움에 떠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 거대함을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다. (숭고에 관한 칸트의 개념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신이 예정한 파멸에 의해 오이디푸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nothing로 추락했지만, 바로 그 순간 스스로의 눈을 찔러 파멸의 책임을 온전히 떠맡음으로써 그는 마침내 어떤 무엇인 자 - something가 되었다.

 

 

 

 

 

* 반년 전쯤 나는 민음사판 『오이디푸스 왕』을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위해 이글을 쓰면서 인용문은 인터넷과 강유원의 CBS 강의를 참조했는데, 아마도 천병희의 번역판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 인용문의 정확한 출처 (번역자)는 잘 모르겠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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