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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평점 :
제 2부 희랍 철학
희랍철학의 창시자들은 서양 철학의 선조이기도 하다. 희랍 세계에서 본래적 의미의 철학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550년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희랍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등 아시아의 철학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발흥하였다. 노자, 공자, 석가 등 중요 사상가들이 기원전 6세기에 출현했다. 그 누구도 이 세계사적 일치를 설명하는 못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말이지 놀랍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이 시대를 두고 ‘세계사의 축을 이루는 시대’ 라고 하기도 했다.
희랍철학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파생물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되어 기원후 6세기에 종결된다. 서기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했는데, 이 사건이 고대의 궁극적 종말이라 할 수 있다. 희랍철학의 역사는 1000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희랍철학은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대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시대다. 신학적 표상에서 벗어나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하나의 원소를 찾으려 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시대는 기원전 600년경에서 기원전 4세기 초까지다.
첫 번째 시대에서 두 번째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소피스트들의 시대다. 이후 희랍철학의 전성기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두 번째 시대는 희랍철학의 황금기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다. 아테나이가 중심이 된 이 시대의 철학을 아티카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황금기는 기원전 5세기 중반 경 소피스트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어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으로 끝난다.
세 번째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이다. 수세기 동안의 점차적 몰락을 거쳐 기원후 6세기에 이르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
제 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이 시기 철학자들의 저작은 단 한편도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토막글들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으로 묶여있다. 이 철학자들의 견해는 이후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간접 전달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Ⅰ.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
밀레토스는 기원전 6세기의 주요무역항으로, 희랍 세계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여러 인종과 종교가 교차하는 이 도시는 희랍의 학문과 철학의 발생지이다.
대표적 철학자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든 존재자의 생성을 하나의 궁극적 원소 내지 물질적으로 파악된 근본 원리에 의해 해명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물을, 다음에는 공기를 궁극 원소로 이해했다.
Ⅱ. 피타고라스
‘필로소피’와 ‘코스모스’는 피타고라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현자(소포스) 대신 필로소프 즉 지혜의 친구 혹은 지혜의 애호가라 부르게 했다. 피타고라스가 세계를 코스모스라 불렀던 것은 세계의 모든 것이 수적 관계에 의해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세운 단체는 일종의 밀교라 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엄격한 계율로 인해 지극히 폐쇄적인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정치 영역에서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으며, 다분히 귀족주의적 경향을 추구했다. 이런 시도는 세인의 공격을 초래했고, 크로톤의 집회소가 방화로 붕괴되면서 학파 자체가 처참히 괴멸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규율이 갖춰진 폐쇄적 공동체에서 종교·철학적 사상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Ⅲ. 엘레아학파
엘레아는 이탈리아에 건설된 희랍 식민지였다. 이 학파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파르메니데스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운동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고 오로지 불변의 항구적 존재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자들은 다원성과 변화를 부정하는 이론이 모순을 낳는다고 반박했다. 제논은 이 반박에 대해 오히려 존재자의 다원성과 운동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낳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나 ‘날아가는 화살’에 관한 제논의 역설이 탄생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제논의 논증은 명백하고 자명하게 여겨지는 견해나 진술도 우리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파고든다면 의심스럽고 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Ⅳ. 헤라클레이토스와 기원전 5세기의 자연철학자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적 발전 이론의 최초 모델을 개발했다. 이 변증법은 2000여년이 지난 후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부활했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대화하다’ 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유래했다. 희랍인들은 ‘주장과 반론에서 논증의 기술’이란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변증법의 좀 더 현재적 의미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는 대립적 힘들의 상호 작용인 생성의 흐름 속에서 진보의 법칙을 통찰해 내는 발전 이론이란 뜻이다.
근원적 에너지로부터 부단히 다양한 것이 전개되도록 만드는 위대한 법칙은 바로 대립의 통일이다. 모든 발전은 양극의 대립적인 두 힘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신은 낮과 밤이며, 겨울과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이고 또 포만과 굶주림이다.” 이념과 이념,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이 투쟁하는 가운데 조화로운 세계 전체가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투쟁 내지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물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활과 리라처럼 서로 갈등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한 평화 속에서 모든 투쟁이 종식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완전한 중지와 죽음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물과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엘레아학파에서는 흙을 만물을 이루는 궁극적 원소로 보았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가지 근본물질을 동등하게 배치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원소’ 관념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하나의 원소를 찾는데 몰두했던 고대 자연철학을 확실히 종결시켰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주로 소아시아와 남부 이탈리아 및 트라키아 지방의 희랍 식민지에서 발달했다. 본토의 뿌리 깊은 인습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 신천지의 분위기는 아테나이를 비롯한 본토의 도시들에 비해 자유로운 정신사조들이 등장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희랍의 본토 도시들에서는 전통과 인습, 특히 종교적 인습이 거의 흔들림 없이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00년 경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아낙사고라스는 철학을 아테나이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아테나이에서 철학이 놀랍도록 융성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누스Nous’ 라는 추상적 철학 원리를 최초로 도입했다. 누스는 이성적이고 전능하지만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유의 정신’ 이다.
제 2장 희랍 철학의 전성기
Ⅰ. 소피스트
기원전 5~6세기는 정신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시기다. 자연적 세계 해명의 지극히 다양한 가능성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희랍과 서양철학의 모든 방향은 바로 여기에 근원과 선구를 두고 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희랍의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페르시아전쟁이 희랍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희랍 특히 아테나이는 번영을 구가했고 좀 더 높은 교양을 욕망했다. 아테나이의 민주정 체제에서는 민중의회와 민중법정에서 민중을 휘어잡는 능란한 연설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정치가와 연설가들에게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는데, 이에 부응했던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타이Sophistai’는 ‘지혜의 스승’이란 뜻으로. 소피스트들은 일종의 방랑교사였다. 이들은 여러 도시를 떠돌며 일정한 보수를 받고 갖가지 기술과 재주, 특히 논변술을 가르쳤다.
대다수의 소피스트들은 객관적 인식이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객관적 기준이 없어지면 결국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옳은 듯이 보이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논증의 영역뿐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도 적용되어, 궁극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성과였다. 논변술도 논증의 기술이기보다는 설득의 기술이었다. 윤리 문제에서도 모두에게 구속력을 갖는 객관적 법이란 없고 오로지 강자의 법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와 정의의 객관적 기준을 부인했다는 점 말고도 수업의 대가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곤 했다는 점 때문에 그 명칭이 다소 부정적인 함의를 띠게 되었다.
소피스트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로타고라스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그의 말은 매우 유명하지만, 이 말은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인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는 인간이란 보편 인간이 아니라 개별 인간이다. 즉 인간은 개개인 모두 자신만의 척도를 가진다는 뜻이다. 소피스트들의 공통된 사상처럼 이 말 역시 절대적 진리는 없고 상대적 진리만 있으며, 객관적 진리는 없고 주관적 진리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피스트들은 희랍철학에서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게 완전히 주목한 최초의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사유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그 조건과 가능성 및 한계를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윤리적 가치 기준 역시 철저히 이성적으로 고찰하여 윤리학을 철학적 체계에 논리정연하게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과도기적 현상이었지만, 이것이 없었다면 이후 아테나이 철학의 번영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Ⅱ. 소크라테스 : 기원전 470년경 ~ 기원전 399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이해하려면 당시 아테나이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는 물론,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노예와 여자를 시민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완전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 원칙이 극단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주의 정파들은 이 정치형태를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힘의 결집이 중요한 와중에도 아테나이에서는 정권을 쥔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식 귀족주의를 선망하는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귀족주의 정파의 옹호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아테나이가 전쟁에서 패하자 민주정도 일시적으로 붕괴했지만 이후 민주주의자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성 모독이란 죄목으로 독배를 마셔야 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 그노티 세아우톤 gnothi seauton’ 고 외친 이유는 그가 덕과 앎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바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바른 것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바른 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게 하면 자기 검증과 반성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신이 줄곧 빠져있던 도덕적 빈곤과 맹목성을 깨닫게 되면,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동경을 품고 이를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실제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 그의 독보적인 인품에 근거한다. 소크라테스의 등장 이후로 역사에서는 문화적 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 힘이란 자기 자신 속에 굳게 뿌리를 둔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말한다. 선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하는 내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을 설파하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복음이다.
Ⅲ. 플라톤 : 기원전 427 ~ 기원전 347
플라톤이 배격하고 극복하려한 것은 소피스트 사상이다. 소피스트는 사유와 행동에서 보편적인 구속력을 가진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철학의 과제는 반대로 그러한 기준이 존재하며 그것을 획득할 방법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사유와 행위의 기준은 영원한 이데아 안에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사유와 예감에 의해 이 기준을 포착할 수 있다.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본래적 수단은 개념적 사유, 플라톤의 용어로는 변증법적 사유다.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일 뿐이며, 변증법이야말로 대화라는 공동의 탐색에 의해 보편타당한 것으로 나아가는 기술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제약된 것에서 무제약적인 것으로 상승하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중간 단계를 거쳐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하강한다. 플라톤의 저작이 거의 모두 대화형식을 취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사유에 의해 추출된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이데아는 철저히 실재적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 이데아만이 유일하게 참된 실재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표상은 오히려 그림자에 불과하다. 개별적 사물은 소멸하지만 이데아는 불멸의 원형이기에 무한히 존속한다.
보편적인 것에 개별적인 것보다 더 높은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개별적인 것만이 현실적이고 보편적 이데아란 그저 우리 머릿속의 구성물인 것인지는 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이 본래적 현실성을 지닌다.
플라톤은 다양한 정체, 즉 국가 조직 형태와 그에 부수되는 인간 유형을 탐구하였다. 『국가 ·정체』에는 다섯 가지 형태의 정체가 나오는데, 제7권의 철인정치와 제8권에서 다루는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계철학사』의 저자는 명예정을 빼고 네 가지 정체만 다루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국가〮·정체』에서 직접 인용하는 것이 오히려 쉽고 도움이 될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이 책도 역시 대화 형식으로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철인정치를 이상적인 정체로 주장하며, 나머지 네 가지를 잘못된 정체로 비판한다.
「네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정체들은 최선자 정체가 점진적으로 쇠퇴되어 감으로써 생기게 되는 형태들인데, 이는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통치자들 속에 이질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체가 ‘명예 지상 정체’ 또는 ‘명예 지배 정체’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최선자 정체와 과두 정체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이 정체에서는 이성적인 것보다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으로,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데, 축재에 대한 욕구도 대단하다. 그 다음으로 생기게 되는 것은 과두 정체인데, 이 정체는 평가 재산에 근거하여 통치자들을 갖는다. 따라서 이 정체에서는 끝없이 재산을 끌어 모으는 부류와 이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가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주 정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이 대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김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과두 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한 다음, 모두가 평등권을 누리며 관직도 추첨에 의해서 배정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 정체를 몰락시켰듯, 이번에는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 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 정체를 탄생시킨다.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참주가 된 자로 인해서 결국에는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만다. p505~506」
인용문은 제 8 권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고 있는 , <제 8권의 논의 전개> 부분이다. 제 7권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와 철인정치를 다루고 있다. 우생학이라든가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윤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생각도 있지만, 이천 여 년 전 희랍세계의 정치적 현실에서 나온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 시대의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세계철학사』로 돌아와, 이상 국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들어 보자.
먼저 국가는 출생 신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음악, 체육, 계산, 수학, 변증법 등과 더불어 고통과 긴장과 결핍을 견뎌내는 훈련을 실시한다. 2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위직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 10년간의 교육을 받고 또 한 번 선발 과정을 거친다. 통과한 사람은 5년 동안 철학 교육을 받는다. 35세가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이제 관념의 세계에서 냉혹한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15년 동안 생존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혹독하고 냉정한 생존 투쟁을 견디고 50세가 되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남자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이 꿈꾸었던 철학자 왕 혹은 왕이 된 철학자 이다. 이들 수호자들은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아내와 자식도 사적으로가 아니라 공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자주 성관계를 가져 최상의 자식을 낳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현실에서도 과연 이상국가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수천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랍다.
Ⅳ. 아리스토텔레스 : 기원전 384 ~ 기원전 322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이자 적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즉위 이전) 가정교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차적으로 과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세계의 과학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구체적 사물과 사실을 수집하고 기록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일적 원리들 아래 정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자적 학문으로서의 논리학을 창시했다. 모순율, 동일률, 배중률, 충족이유율을 사유의 네 가지 원칙으로 내세웠다. 다른 희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최고선이 행복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는 명제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법률과 도덕에 기초한 선한 국가에서 시민들의 윤리적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지고하고 본래적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실제에 적용된 윤리학일 뿐이다. 덕의 고찰은 윤리학의 전 단계이자 이론적 부분에 불과하며, 실제에 적용된 윤리학이자 윤리학의 실천적 부분이 되는 것은 국가론이다.
제 3장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희랍과 로마의 철학
헬레니즘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망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알렉산더의 사망시기에서 대략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까지이다.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이후에도 아테나이는 오랫동안 철학적 중심지로 머물렀다.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철학 연구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지로 찾아왔다.
고대 희랍 철학과 문화의 특성은 질서 잡힌 우주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코스모스, 세계의 근원적 현상이며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인 로고스, 윤리적 선과 가까이 있는 미에 대한 몰입을 뜻하는 에로스 등 몇몇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로마인은 철두철미 실제적인 민족이었다. 언어와 문학 이외에 로마인이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로마법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완전성을 띠고 발전한 국가제도이다. 이 시대 철학에서는 사변적 경향이 줄어들고 윤리학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그에 따라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부상한다. 이 두 철학자의 학설에서는 인간과 윤리학에 대한 비희랍적 관심이 당시로서는 가장 강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예술과 종교 이상으로 당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기독교의 대두로 인해 해체를 경험할 때까지 철학은 대로마제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Ⅰ. 스토아학파
인간은 본성상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삶은 이성적인 삶이다. 이성적 삶이 유일한 덕이며 행복이다. 이성적 삶과 덕과 행복은 동의어이다. 덕은 동시에 유일한 선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하며 무엇이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런데 올바른 가치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념의 방해를 받게 된다. 정념은 이성을 현혹하고 악한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의 과제는 이런 정념과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데 있다. 이런 정념을 완전히 극복한 이후에야 덕이라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정의 상태를 스토아 사상가들은 ‘아파테이아aphatheia’라 부른다. 스토아학파의 핵심을 금욕주의라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의 세계사적 의의는 기독교와의 연관성에 있다. 스토아 사상가들은 금욕적 도덕을 엄수하고 모든 외적 재물을 경시하라고 설파한다. 이들은 세계 전체가 지고한 존재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족과 계층의 구별을 넘어 보편적 인간애를 요구한다. 이 모든 점에서 스토아학파는 기독교에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중세에는 세네카가 최초의 기독교인 중 하나라는 견해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스토아학파 이외에도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학파, 절충주의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이 이 시대 희랍〮〮로마 철학을 대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