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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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비토리오 회슬레는 처음 들어봤지만, 번역자 이신철은 알고 있었다. 이신철은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을 번역했다. 바이저의 『헤겔』이 워낙 좋아서, 덩달아 번역자에게도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실제로 번역도 매끄러웠다.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앞뒤 문장이 모순되는 것도 없었고, 비문도 없었던 것 같고, 억지스러운 번역 말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도 않았다. 버거운 철학책에 취미를 붙이면서 번역자에게도 자연스레 신경이 가게 되었다. 책 자체의 어려움에 오역과 악역(?)이 가세하면 그야말로 난제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뜻 『독일 철학사』를 주문한 것은 입맛을 당기는 목차 덕분이지만 번역에 대한 불안이 없어서기도 하다.

 

『독일 철학사』는 2013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외국어로 번역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회슬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현재 아내는 한국인이다. 그는 <대장금>과 <동이>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 책은 총 15장으로 되어있는데, 4장까지 읽었다. 지금까지는 기대보다 좋다. 번역은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 긴 호흡의 문장이 많아, 끊어 읽어야 할 부분을 잘 찾지 못하면 내용 파악에 어려움이 있다. 보통 번역자는 문장을 임으로 나누지 않는 것 같은데,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이해하지만,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긴 문장은 독자에게 커다란 부담이다.

 

이 책의 부제는 “독일정신은 존재하는가.” 이다. 한 번도 의심해 본적이 없는 질문이다. 철학이라고 하면 밑천이 짧은 나는 칸트와 헤겔을 맨 먼저 떠올린다. 독일 관념론 철학을 대표하는 이 두개의 거대한 이름은 그 자체로 독일정신의 상징이다. 저기 독일정신이 있는데, 도대체 난데없는 이 질문은 무엇일까? 회슬레는 독일정신을 부정하는가? 강조하는가?

 

 

 

01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목표는 독일철학에 대한 간결한 개관, 이를테면 항공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면서 이 철학을 다른 유럽 국민의 철학과 구별 짓는 특유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 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정신개념(Geistbegriff)에 대한 추사유(nachdenken)가 속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일 철학의 모든 전환에서는 그것 없이는 역사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럼직한 발전 노선이 명백해야 한다. p19

 

추사유? 검색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몇몇 간단한 언급이 있지만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1937년 11월 19일’ 동아일보에 <哲學的 思惟의 理解>라는 칼럼이 있고, 여기에 헤겔의 nachdenken이 나온다.

 

「헤겔은 일즉이 "哲學(철학)"을 存在(존재)의 世界(세계)에 대한 "나흐·뎅켄"(追思惟(추사유))으로 보앗읍니다. 이"나흐·뎅켄"이란 實在(실재)나 現實(현실)을 떠난 헛된 觀想(관상)이 아니라 도로혀 어디까지던지 客觀的(객관적)인 實在(실재) 및 그 世界(세계)에 대한 理解(이해)이요 省察(성찰)이겟습니다.」

기록보관의 힘이다. 독일어 검색을 하면 좋겠지만, 독일어 문맹이라 아쉽다. 여하튼 어떤 글에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하던데, 이 부엉이가 황혼에 난다는 점과 한자 追思惟의 追가 ‘쫓을 추’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nachdenken이 실재나 현실 혹은 행위를 뒤따르는 사유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독일정신이란 정신개념을 곰곰이 따지는 사유,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정신에 대한 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왜 그렇게 (읽는 사람) 미치도록 ‘정신’이란 것을 물고 늘어지는지 알만하다.

 

독일정신 혹은 독일철학의 존재 유무를 따지려면 먼저 독일이란 개념이 존재해야 한다. 독일은 1871년에야 뒤늦게 통일국가를 이룬다. 독일이 근대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담지자라는 영예로운 특수역할이었다. 여하튼 1800년 전후로 강력한 독일 국민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회슬레는 이 책이 주로 1720년부터 2000년까지의 약 300년을 다루고 있다면서, “독일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도발적으로 그것이 1750년 이후에야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으로서 독일’ 이라는 말은 19세기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 책의 일차적 독자는, 내게 무척 다행히도, 일반적 교양 시민이다. 이를 위해 회슬레는 정확한 지식이나 복잡한 논증을 의식적으로 포기한다. 중요한 것은 박식한 세부사항이 아니라 커다란 노선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철학이 불러일으키거나 개념화한 의식사적 변화이다. 이 책은 철학사학적이라기보다는 이념사학적이다. 반은 에세이고 반은 역사학인 이 책은 독일철학을 의식적으로 독일 관념론에 비추어 해석한다. 또한 독일철학을 외부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회슬레는 분명 독일인은 아니다.

 

독일에 대한 나의 눈길은 더 이상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 즉 어떤 요인이 독일철학을 인류사에서 두 개의 가장 매혹적인 철학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33~1945년의 도덕적-정치적 대재앙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외국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p28

 

 

02 영혼에서 신의 탄생 : 중세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독일어로 철학함의 시작.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중세 사유의 완성과 돌파

 

라틴어는 전 유럽에 공통된 학문언어였다. 회슬레는 이 책에서 독일철학의 기준을 독일영토가 아니라 독일어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지금의 독일 땅에서 살았더라도 라틴어로 학문을 했다면 그는 독일철학자가 아니다. 거꾸로 독일어를 사용했다면 활동지역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추정) 는 고유의 철학사상을 독일 민중어로 표현한 최초의 독일철학자이다. 그는 단테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에는 보통 신비주의 사상가란 말이 따라오는데, 회슬레는 에크하르트의 철학을 “이성주의적 근본 기획을 직접적인 신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결합한 것” 이라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성주의적 입장은 교부철학자들이 플라톤주의에 작별을 고하고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촉진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성서의 말씀을 자연적인 이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성서는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가 아니라 척도다.

 

에크하르트는 “신에게 있어 존재와 인식은 동일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신에게 있어서는 인식이 존재를 근거 짓는다는 테제를 옹호한다. 인식을 존재보다 위에 놓는 것은 비록 인간이 아니라 신을 염두에 둔 것일지라도 관념론의 근본 작업 과정을 미리 보여준다.

 

에크하르트는 신에 대한 근본적 사랑을 주장한다. 죄와 고통마저도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신이 일정한 방식으로 나의 죄를 원하는 까닭에 내가 범죄를 범하지 않았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 더구나 어떠한 보상도 바라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라도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신에 대한 근본적 사랑의 이념은 칸트에게 있어 마침내 수천 년에 걸친 행복주의 전통의 붕괴로 이어지는 요소 가운데 하나다. 또한 에크하르트의 다른 윤리적 이념도 칸트를 예고하는데, 가령 헤아리는 것은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의욕이라는 그의 견해가 그러하다. p44

 

루터로부터 독일 관념론으로 나아가는 길은 직선이 아니라 에크하르트에게로 되돌아서 가야한다.

 

 

03 종교개혁에 의한 철학적 상황의 변화 : 파라켈수스의 새로운 자연철학과 야코프 뵈메의 신에게서의 아님

 

철학적으로 본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은 진보일 뿐 아니라 퇴보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주교들의 도덕적 신뢰 상실과 독일 군주들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루터는 자신의 군주의 호의 없이는 승리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군주들의 보호를 받기 위해 (가톨릭과 칼뱅주의에 반하여) 군주에 대한 저항권을 포기해야 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파토스와 부당한 정부에 대해서마저도 굴종하는 것을 제멋대로 결합하는 것은 오랫동안 독일에서 루터교의 징표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루터는 우리가 성격(Charakter)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녔고, 선을 위해서든 악을 위해서든 자신의 종교적 및 언어 창조적 성취를 통해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르게 유럽 공동의 가족으로부터 독일 민족을 분리해내는 데 기여했다. 루터가 츠빙글리와 칼뱅의 또 다른 개혁에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은 라틴계와 앵글로색슨계 나라들이 그에 대한 본보기를 이루는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의 중간 상태에 머물렀다.

 

 

구두장이였던 야코프 뵈메(1575-1624)는 근세 최초의 독일 철학자다. 그는 결코 공부를 한 적이 없고 라틴어를 쓸 수 없었지만, 신비적 체험 이후 루터교적 성서 신앙을 신과 자연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전개에 관한 철학적 설명을 통해 근거 짓고자 했다. 그는 확실히 이성적 신학자는 아니었다. 엄밀하게 논증하는 대신 정신의 이름으로 종종 이성에 반대했다.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단한 용기를 지니고 전통적 신학이 흔히 비껴가는 물음을 제기했다는 점은 논박할 수 없다. 고통과 악은 어디로부터 세계로 오는가? 우리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고전적 대답은 결여론 이다. 즉 나쁜 것 또는 악은 존재에서의 결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악의는 단연코 단순한 결여 이상인 것으로 보이며, 만약 신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면 그것들도 신 안에서 그 근거를 지녀야만 한다. 뵈메는 신 자신 안에 부정적 원리를 갖다 대는 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며, 긍정적 원리와 부정적 원리의 공동작용으로부터 외적 세계에서의 신의 현현, 즉 오로지 신적 본질의 전개일 뿐이고 다른 두 원리를 결합하는 자신의 세 번째 원리를 이루는 신의 현현을 파악하고자 한다. 결정적인 것은 대립이 없으면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그의 사상이다. p71~2

 

악마의 분노는 부정적인 신적 원리의 표현으로, 악마는 신의 내적 본질이다.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이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대립 없이는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을 우리는 보통 헤겔적이라고 하지 않나? 

 

 

 

04 신에게는 오로지 최선의 것만이 충분히 좋다 : 라이프니츠의 스콜라 철학과 새로운 과학의 종합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는 한마디로 천재다. 그는 인류 최후의 보편적 학자로, 철학 뿐 아니라 수학, 자연과학과 공학, 법학과 역사에 창조력을 발휘하였다. 미적분학 창시자의 자리를 놓고 뉴턴(1642~1727)과 싸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17세기에 철학이 이성주의적으로 전환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단순히 권위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의 여러 종파들과 다르게, 권위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심급의 필요성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시민전쟁이 불러일으킨 물리적·도덕적 악의 존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모든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종파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과 제국의 차이는 분명해 졌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왜 바로 독일에서 종교의 이성적 근거 짓기를 향한 노력이 특히 중요했는지, 더 나아가 왜 그것이 종교적 활기를 지니고 추구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단순히 말해 30년 전쟁은 종교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진리 기준을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이성주의이다. 17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불리는데, 바이저의 『헤겔』에는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란 표현이 나온다.

 

과학과 신학의 결합은 근세 자연과학의 일반적 특징이다. 그런데 의지주의자인 데카르트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이성주의자였다. 데카르트는 수학의 공리를 신적 의지의 자의적 정립으로 간주했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본질과 그의 창조를 이성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선험적 반성에 의해 현실의 근본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과학적인 종교적 신앙의 억제는 독일 정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기여였다. 그것도 신의 이름으로.

 

신은 과학의 각각의 모든 새로운 승리가 위태롭게 하는 미봉책이 아니다. 오히려 신은 과학의 기초이며, 과학을 촉진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다. 그와 유사하게 초기 계몽주의적 세계 개선 프로그램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표현이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우리는 과학과 기술에서 신의 창조력을 모방한다. 종교를 가톨릭교회와 동일시한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를 관통하는 이성과 종교의 대립을 라이프니츠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라이프니츠 이후에도 독일 문화에서는 결코 현실적으로 기반을 얻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한 니체는 자신의 독일적 뿌리를 오히려 자신이 동시에 이성에 대해서도 투쟁하는 것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도 역시 볼테르에게는 이해 불가해했을 것이다. p85

 

독일철학은 종교와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종교는 한편이다. 볼테르(1694~1778)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를 대놓고 비웃는다. 캉디드가 만나는 이 비합리적인 세계가 라이프니츠의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의 진정한 모습임을 보여준다. 독일철학의 특수성은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곧 이성에 대한 투쟁과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근세 철학은 아주 단순화하자면, 고대 양식을 모방하는 저자들과 근대화하는 저자들 사이의 경쟁이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우두머리로 하는 근대화 파는 일차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사유하며, 스피노자를 필두로 하는 고대 모방파는 주로 존재론적으로 사유한다. 데카르트는 res extensa와 res cogitans를 이분하여, 고대철학에는 낯선 근세적 발전의 추동력을 일으켰다. 고대양식을 모방한 스피노자는 존재론적 증명을 철학의 출발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는 유일한 실체, 신 즉 자연, 의 실존을 증명하는데 실체는 무한한 속성을 지니지만 그 중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단지 연장과 사유다. 정신적 사건과 육체적 사건은 평행적으로 진행되며, 현실의 두 측면이지 서로 인과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영혼을 부여받고 있다.

 

라이프니츠의 중심 철학은 무엇인가?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라이프니츠에게도 신은 항상 이차적 원인을 거쳐 작용하며, 그 역시 결정론자이며, 오로지 자유가 철저한 결정화와 양립할 수 있는 한에서만 자유를 옹호한다.  동시에 스피노자와의 차이도 중요하다. 스피노자는 논리적 필연성과 법칙론적 필연성을 구별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가능한 모든 세계에 타당하며, 법칙론적으로 필연적인 것은 오로지 해당 자연법칙을 지닌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라이프니츠는 우선적으로 이성 진리와 사실 진리를 구별한다. 이성 진리는 가능한 모든 세계에서 타당하므로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사실 진리는 오로지 현실 세계에만 타당하다.

 

그러나 왜 신은 다른 세계가 아닌 바로 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다른 세계들이 논리적으로 가능했을지라도, 신의 선택을 위한 근거가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충족이유율은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형이상학에 대해 모순율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행위도 역시 바로 자유로운 행위가 근거를 지니는 것이다. 전능하고 전지하며 전선한 존재로서 신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을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실 진리는 -비록 우연적이라 할지라도- 무한한 정신에게는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p88~9

 

라이프니츠는 현실 세계의 특수한 지위를 가치론적으로 정당화한다. 가치 기준은 신 앞에 주어져 있으며 결코 신의 자의에 따르지 않는다. 그는 최대 가치를 지니는 유일한 세계의 존재를 전제한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또 다른 차이점은 실체 개념과 관련이 있다. 스피노자는 일원론자인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다수성을 가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이 다수성의 실체를 모나드라고 부른다. 모나드의 활동성은 오로지 이 모나드와 신 자신에 의해서만 규정되기 때문에 모나드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없다. 그 대신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를 주장한다.

 

비록 창 없는 모나드들이 오로지 자기의 내적 프로그램만을 연주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정확히 일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함에 있어 각각의 모든 모나드는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관점을 표현하거니와 각각의 모든 모나드는 모든 순간에 그 자신의 이전과 이후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우주 전체를 표현한다. p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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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동양의 지혜>를 끝으로  총 7부로 구성된 한스 요하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를 다 읽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단계인  4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시대>를 시작으로 7부 <20세기 철학사상의 주요 방향>까지 주욱  읽었다. 그리고 돌아가 2부 <희랍철학>과 3부 <중세철학>을 읽고, 마지막으로 1부를 읽었다. 왜 이렇게 정신없이 왔다갔다 읽었냐하면 그것이 내겐 가장 흥미롭고 편안했기 때문이다.

 

15~16세기부터 서구 사회는 근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 근대가 현대까지도 (modern은 근현대를 아우른다) 여전히 서구 사회의 토대가 되고 있다. 불행인지 불행이 아닌지, 서구의 근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근간이기도 하다.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공맹의 도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지만 더욱 많이는 서구 근대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니 희랍이나 중세 보다는 서구 근대 사회가 더욱 친밀하고 이해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가 아닌 바에야 희랍철학과 중세철학은 알면 좋지만 그다지 긴요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서양 근대 사상의 뿌리라는 면에서 무시할 수는 없지만, 끌어 당기는 힘으로서의 매력은 좀 떨어진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동양의 지혜>로 퉁쳐지는 동양철학이다. 1200 쪽 가까이 되는 이 책의 1/6도 안되는 분량이 1부 <동양의 지혜> 에 허용된 지면이다.  인도와 중국만 해도 영토와 사상 모든 면에서 유럽보다 훨씬 넓고 깊을텐데 고작 1/6일 뿐이다. 사실 이 책은 세계철학사가 아니라 서양철학사라 해야 맞다. 그럼에도 굳이 <동양의 지혜>를 집어넣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싶다.  철학도 아니고 그것도 '지혜'라고 하면서.

 

예상대로 1부 <동양의 지혜>는 그다지 읽을 것이 없었다. 아마 작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면서 썼을 수도 있다. 서양의 독자들에게는 흥미가 있을지 몰라도 동양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가 애써 설명하려 하는 어떤 개념들을 우리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듣고 익혀왔다. 개념적으로, 학문적으로는 작가가 더 많이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것의 본래적 의미를 우리는 어쩌면 생득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문학작품을 읽을 때면 늘 아쉬운 것이 있다. 그 작품이 모국 독자들에게 주는 깊이와 감동을 우리는 아마 반 너머 놓치기 일쑤일 것이다. 거꾸로 영어로 번역된 『토지』를 생각해 보면 너무 확연하다. 영미인들이 어떻게 그 감칠맛나는 사투리를 느낄 수 있을까. 동학혁명의 의미도, 일제강점기의 아픔도 모르면서 어떻게 김환과 이동진과 최치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도 그렇다. 문학이 그렇지만 아마 철학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더욱 꼼꼼이 읽어야 하고,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우리가 그래야 하듯 서구인들이 동양을 대할 때도 그래야 할 것이다.

 

1부 <동양의 지혜> 따위는 없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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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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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부 중세 철학

 

기독교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323~337)에 의해 국가적 공인을 받았다. 이후 다른 종교에 비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다, 392년 이교숭배가 전면 금지되면서 궁극적 승리를 거두었다.

 

중세철학의 본질적 주제는 기독교 교의와 고대 철학 사상의 융합이다. 중세철학은 두 시기로 뚜렷이 구별된다. 첫 번째는 교부철학 Patristik 시대로, 사도들의 활동 시기부터 서기 800년경까지다. 이 명칭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르pater’에서 유래했다. 두 번째는 스콜라 철학Scholastik 시대로, 서기 800년경부터 중세철학이 종말에 이르는 1500년경까지이다. 이 명칭은 라틴어 ‘스콜라스티키scholastici’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학교 교사를 뜻했으며 나중에는 선교사를 종국에는 교회 교사를 뜻하게 되었다.

 

 

제 1장 교부철학의 시대

 

Ⅰ. 고대 사상과 기독교의 정신적 태도 차이

 

우리 상식과 별반 다른 내용이 없어 생략한다.

 

Ⅱ. 기독교와 고대철학의 최초 접목 - 초기 교부들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기독교와 철학의 첨예한 대립을 보여준다. 높은 교양을 갖춘 고대말의 희랍〮․ 로마인의 정신과 절대적인 도덕성을 요구하며 모든 현세적인 것을 멸시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은 화합할 수 없는 차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이교적 교양인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할 필요가 있었고,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교양을 익히고 철학적 소양을 쌓아야 했다. 이런 활동을 시도한 사람들을 호교론자라 한다. 유명한 호교론자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0)는 “불합리한 까닭에 나는 믿는다.”는 경구를 남겼다(고 믿어진다). 이 경구는 신앙의 진리와 사유의 진리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는 그의 근본사상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신앙의 진리를 사유의 진리 보다 높은 진리로 확정하며, 이 둘 사이에 대립이 있을 경우, 신앙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종속, 신앙에 대한 지식의 종속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장차 모든 기독교 철학의 특징을 이룬다.

 

Ⅲ. 기독교 내부의 위험

 

1. 그노시스파

 

기독교는 기원초의 수세기 동안 적대적 환경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부단히 고투했다. 이런 와중에 기독교 내부에서도 위협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운동이 그노시스파Gnosis였다. 그노시스는 희랍어로 인식이란 뜻이다.

 

그노시스파는 악의 존재를 해결하기 위해 창조주로서의 신과 구세주로서의 신을 구별했다. 구세주인 신은 무한히 자비로운 반면, 창조주인 신은 구세주와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창조주가 만든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에 빠진 것은 더 이상 인간만의 책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개개 인간의 영혼이란 선한 원리와 악한 원리의 영원한 투쟁이 벌어지는 싸움터일 뿐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원죄를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투쟁을 자기 내면에서 직관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그노시스파는 신앙보다 이런 인식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이 운동 전반에 그노시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노시스파는 신비주의와 결합되기도 했는데, 신에 대한 인식 역시 이성적 인식이 아니라 신비적 인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2. 마니교

 

페르시아인 마니에 의해 창시되었다. 마니교는 유대교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인도 사상을 기독교와 결부시켰다. 마니교의 기본 관념은 영원히 병존하는 두 세계이다. 신성한 빛의 아버지가 지배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아버지와 그의 악마들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투쟁한다. 예수는 빛의 세계에서 강림한 인류의 구원자이고 야훼는 어둠의 아버지다.

 

Ⅳ. 교회 통일의 확립

 

교회는 한편으로는 교권제도를 확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적 미신을 배척하는 가운데 기독교 진리를 철저히 고수해나감으로써 내외적인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Ⅴ. 아우구스티누스 : 354 ~ 430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랍 철학의 고전시대 이후로는 처음 등장한 탁월한 철학자다. 그의 저작을 통해 신흥 기독교 문화가 최초로 수준 높은 철학적 표현을 얻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5~6세기에 걸쳐 전체 기독교 세계를 휩쓸었으며, 중세 전체를 규정하는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플라톤을 제외한다면 『신국론』만큼 인간의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저술도 없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정론을 주장했다. 자비로운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만, 구원은 선택적이며 철저히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은 현명하고도 불가해한 신의 호의에 따라 애초부터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감정에 반하는 예정설은 교회의 이익에도 배치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발 물러나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신은 애초부터 구원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함에 의해 최후의 결과를 내다보는 것뿐이다.

 

Ⅵ. 아우구스티누스 이외의 후기 교부들

 

로마제국은 동로와 서로마로 갈라졌고, 서로마는 서기 500년경에는 제국의 거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의 지배에 들어갔다. 동로마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시달리고 있었지만 15세기까지 천년 비잔티움 제국을 유지했다.

 

혼란의 와중에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세력을 강화했다. 강력한 교황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고, 수도회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내적인 힘을 풍부히 길러나갔다. 동방에서 시작된 수도회는 529년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창설한 이후 전체 기독교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거의 모든 고전 라틴어 문헌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수도회의 수도원과 도서관 덕분이다.

 

 

 

제 2장 스콜라철학 시대

 

서유럽이 역사의 중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서기 400년에서 800년 사이의 암흑기를 벗어나면서부터다. 중세문화의 중추는 지중해연안에서 알프스 북쪽의 프랑크왕국으로 옮겨갔다. 과거의 야만인들이 문화의 주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독일적 요소들이 동방의 슬라브족에게 전파되었고, 황제와 교황이 각각 지배적 입지를 굳히며 중세 내내 경쟁했다. 전체 중세문화는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정신문화와 철학 역시 통일 이루었으며 초국가적 성격을 띠었다. 모든 지역에서 라틴어가 사용되었고, 중요한 저작은 라틴어로 집필되었다. 이때의 철학은 성직자들에 대한 교육과정의 하나로 수도원 학교에서 생겨났다. 학교교사 혹은 교과목을 뜻하는 스콜라철학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콜라철학의 과제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신앙이 확정지은 진리에 이성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그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스콜라철학은 한마디로 신학의 시녀였다.

 

Ⅰ. 초기 스콜라철학 : 보편논쟁

 

보편논쟁은 현대철학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유명한 논쟁이다. 보편자를 보는 관점에 따라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갈라졌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는 명제에서 소크라테스는 개별자이고 인간은 보편자이다. 실재론은 보편자에 대해 개별자보다 더 높은 현실성을 부여한다. 반대로 유명론은 보편자란 한갓 이름에 불과하며 개별자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보다시피 중세의 실재론은 오늘날과는 그 의미가 판이하게 달라, 오늘날의 관념론에 가깝다.

 

실재론자의 공식은 ‘universalia ante res 즉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보다 앞서 존재한다’ 였다. 유명론자의 공식은 ‘universalia post res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 뒤에 존재한’' 였다.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아벨라르는 ‘universalia in res 일반개념은 개별 사물 속에 존재한다’ 는 공식을 제안했다. 개별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은 부조리하다. 보편자의 구체화인 개별자들 사이의 차이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개별자만이 현실적이고 일반개념은 한갓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릇되다. 일반개념에 포괄되는 개별사물들 내에는 본질의 실재적 동일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일반개념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모든 인간에 존재하는 보편 인간성이라는 동종의 현실성에 상응한다. 물론 이런 보편성은 오로지 개별 인간 내에서 존재할 뿐, 그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개념은 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아벨라르의 견해는 일종의 변증법적 지양이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서 일반 개념은 오로지 사물들 속에 있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 일반개념은 사물에 앞서 존재한다. 일반개념은 피조물의 원형으로서 신의 정신 안에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일반개념은 실제로 사물들 다음에 존재한다. 일반개념은 우리가 사물들의 일치로부터 도출해 내야 하는 개념들로서 존재한다.

 

Ⅱ. 중세의 아랍철학과 유대철학

 

아랍세계의 종교적 중심지는 메카지만, 문화적 중심지는 바그다드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8세기에 아랍에 의해 정복되어 특히 스페인 남부는 1492년까지 아랍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스페인은 10세기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도 했다. 이슬람문화는 고대 희랍의 학문과 결합하여 아랍-희랍 철학을 꽃피웠다. 아랍-희랍 철학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철학이 희랍 학문과 철학의 유산을 습득하고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아랍-희랍철학은 서양철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무어족이 다스리던 스페인의 여러 대학에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서로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보이면서 함께 교수활동을 했다. 거대한 도서관들에는 이들 세 종교의 문헌은 물론 이교철학의 번역물이나 주석서도 소장되어 있었다.

 

Ⅲ. 전성기의 스콜라철학

 

13세기에 들어와 서양의 사상은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도약의 원인은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와의 생산적인 만남과 이를 매개로한 고대 희랍철학과의 만남이었다. 12세기에는 그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문헌을 포함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이 점차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그의 저작은 그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현세적 지혜의 총화로 간주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6세기까지 서양 철학을 지배했다.

 

중세 전성기에 생겨난 대학들은 철학의 훌륭한 배양소가 되었다. 중세의 대학은 모든 것을 총괄하는 기독교 신학을 완성하기 위해 지식의 전 영역을 포괄했다.

 

대학 못지않게 중요했던 기관으로 도미니쿠스파와 프란체스코파라는 두 개의 탁발수도회가 있었다.

 

스콜라철학의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토미즘은 도미니쿠스파의 공식철학이 되었다. 1322년 토마스는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1879년에는 토미즘이 카톨릭 교회의 공식 철학으로 인정되었다. 1931년 새로 제정된 신학교 수업 규정에 의하면, 철학과 사변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과 원리에 따라 강의되어야 한다.

 

스콜라 철학의 세계상은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시작품으로 표현되었다. 중세가 해체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창조된 단테의 『신곡』은 그 수백 년 동안의 정신과 감정이 웅대한 세계묘사로 총괄되어 있다.

 

Ⅳ. 후기 스콜라철학

 

윌리엄 오컴(1290~1349)의 유명론의 혁신은 스콜라철학의 기반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컴의 유명론은 기독교 교의에 적용될 경우 교의 자체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오컴은 신학 전체를 이성적 이해가능성의 영역에서 분리시켰다.

 

모든 지식의 토대는 개별자에서 출발하는 경험이지만 인간은 신에 대해 이런 식의 경험을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신에 대한 본래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 결국 신학은 정확한 논증 등을 구사하는 학문이 될 수 없다. 신학과 현세 사이에 분리선을 그은 오컴은 실제 교회정책에서도 분리선이 존중되기를 바랐다. 오컴은 교회의 세속화를 가차 없이 공격했다. 오컴은 현세를 거부하고 교회의 과제를 종교 영역에 국한시킬 것을 요구했다.

 

오컴의 유명론과 그의 추론들은 스콜라철학에 의해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신학과 철학, 신앙과 지식의 연대를 실제로 끊어버렸다. 두 영역은 독립되었다. 이중의 진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컴의 행동이 낳은 중대한 결과이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식과 신앙은 각자 고유한 법칙에 따라 발전하며 서로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분화가 우리의 전체 근현대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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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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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희랍 철학

 

 

희랍철학의 창시자들은 서양 철학의 선조이기도 하다. 희랍 세계에서 본래적 의미의 철학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550년경이다. 흥미로운 것은 희랍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등 아시아의 철학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발흥하였다. 노자, 공자, 석가 등 중요 사상가들이 기원전 6세기에 출현했다. 그 누구도 이 세계사적 일치를 설명하는 못하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말이지 놀랍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이 시대를 두고 ‘세계사의 축을 이루는 시대’ 라고 하기도 했다.

 

희랍철학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 파생물이라 할 수 있는 로마 철학은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되어 기원후 6세기에 종결된다. 서기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했는데, 이 사건이 고대의 궁극적 종말이라 할 수 있다. 희랍철학의 역사는 1000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희랍철학은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대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시대다. 신학적 표상에서 벗어나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하나의 원소를 찾으려 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시대는 기원전 600년경에서 기원전 4세기 초까지다.

 

첫 번째 시대에서 두 번째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소피스트들의 시대다. 이후 희랍철학의 전성기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두 번째 시대는 희랍철학의 황금기로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다. 아테나이가 중심이 된 이 시대의 철학을 아티카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황금기는 기원전 5세기 중반 경 소피스트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어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으로 끝난다.

 

세 번째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이다. 수세기 동안의 점차적 몰락을 거쳐 기원후 6세기에 이르러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

 

 

 

 

제 1장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이 시기 철학자들의 저작은 단 한편도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토막글들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으로 묶여있다. 이 철학자들의 견해는 이후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간접 전달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Ⅰ.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

 

밀레토스는 기원전 6세기의 주요무역항으로, 희랍 세계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여러 인종과 종교가 교차하는 이 도시는 희랍의 학문과 철학의 발생지이다.

 

대표적 철학자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든 존재자의 생성을 하나의 궁극적 원소 내지 물질적으로 파악된 근본 원리에 의해 해명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물을, 다음에는 공기를 궁극 원소로 이해했다.

Ⅱ. 피타고라스

 

‘필로소피’와 ‘코스모스’는 피타고라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현자(소포스) 대신 필로소프 즉 지혜의 친구 혹은 지혜의 애호가라 부르게 했다. 피타고라스가 세계를 코스모스라 불렀던 것은 세계의 모든 것이 수적 관계에 의해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세운 단체는 일종의 밀교라 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엄격한 계율로 인해 지극히 폐쇄적인 비밀결사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정치 영역에서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으며, 다분히 귀족주의적 경향을 추구했다. 이런 시도는 세인의 공격을 초래했고, 크로톤의 집회소가 방화로 붕괴되면서 학파 자체가 처참히 괴멸되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규율이 갖춰진 폐쇄적 공동체에서 종교·철학적 사상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Ⅲ. 엘레아학파

 

엘레아는 이탈리아에 건설된 희랍 식민지였다. 이 학파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는 파르메니데스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이나 운동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고 오로지 불변의 항구적 존재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비판자들은 다원성과 변화를 부정하는 이론이 모순을 낳는다고 반박했다. 제논은 이 반박에 대해 오히려 존재자의 다원성과 운동의 실재성을 가정하는 것이야말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을 낳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나 ‘날아가는 화살’에 관한 제논의 역설이 탄생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제논의 논증은 명백하고 자명하게 여겨지는 견해나 진술도 우리가 그것을 비판적으로 파고든다면 의심스럽고 모순적인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는 것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Ⅳ. 헤라클레이토스와 기원전 5세기의 자연철학자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적 발전 이론의 최초 모델을 개발했다. 이 변증법은 2000여년이 지난 후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부활했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대화하다’ 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유래했다. 희랍인들은 ‘주장과 반론에서 논증의 기술’이란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변증법의 좀 더 현재적 의미는 끊임없이 새로운 차원에서 전개되는 대립적 힘들의 상호 작용인 생성의 흐름 속에서 진보의 법칙을 통찰해 내는 발전 이론이란 뜻이다.

 

근원적 에너지로부터 부단히 다양한 것이 전개되도록 만드는 위대한 법칙은 바로 대립의 통일이다. 모든 발전은 양극의 대립적인 두 힘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일어난다. “신은 낮과 밤이며, 겨울과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이고 또 포만과 굶주림이다.” 이념과 이념,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 계급과 계급, 민족과 민족이 투쟁하는 가운데 조화로운 세계 전체가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투쟁 내지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물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활과 리라처럼 서로 갈등하면서 조화를 이룬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원한 평화 속에서 모든 투쟁이 종식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완전한 중지와 죽음을 바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물과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엘레아학파에서는 흙을 만물을 이루는 궁극적 원소로 보았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네 가지 근본물질을 동등하게 배치시켰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원소’ 관념이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엠페도클레스는 하나의 원소를 찾는데 몰두했던 고대 자연철학을 확실히 종결시켰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주로 소아시아와 남부 이탈리아 및 트라키아 지방의 희랍 식민지에서 발달했다. 본토의 뿌리 깊은 인습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 신천지의 분위기는 아테나이를 비롯한 본토의 도시들에 비해 자유로운 정신사조들이 등장하기에 훨씬 유리했다. 희랍의 본토 도시들에서는 전통과 인습, 특히 종교적 인습이 거의 흔들림 없이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500년 경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아낙사고라스는 철학을 아테나이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죽은 후 아테나이에서 철학이 놀랍도록 융성했다. 아낙사고라스는 ‘누스Nous’ 라는 추상적 철학 원리를 최초로 도입했다. 누스는 이성적이고 전능하지만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유의 정신’ 이다.

 

 

 

제 2장 희랍 철학의 전성기

 

Ⅰ. 소피스트

 

기원전 5~6세기는 정신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시기다. 자연적 세계 해명의 지극히 다양한 가능성들이 전개되기 시작하는데, 희랍과 서양철학의 모든 방향은 바로 여기에 근원과 선구를 두고 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희랍의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페르시아전쟁이 희랍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희랍 특히 아테나이는 번영을 구가했고 좀 더 높은 교양을 욕망했다. 아테나이의 민주정 체제에서는 민중의회와 민중법정에서 민중을 휘어잡는 능란한 연설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정치가와 연설가들에게는 철저한 훈련이 필요했는데, 이에 부응했던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이었다. ‘소피스타이Sophistai’는 ‘지혜의 스승’이란 뜻으로. 소피스트들은 일종의 방랑교사였다. 이들은 여러 도시를 떠돌며 일정한 보수를 받고 갖가지 기술과 재주, 특히 논변술을 가르쳤다.

 

대다수의 소피스트들은 객관적 인식이란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객관적 기준이 없어지면 결국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옳은 듯이 보이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논증의 영역뿐 아니라 행위의 영역에도 적용되어, 궁극적 중요성을 갖는 것은 성과였다. 논변술도 논증의 기술이기보다는 설득의 기술이었다. 윤리 문제에서도 모두에게 구속력을 갖는 객관적 법이란 없고 오로지 강자의 법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와 정의의 객관적 기준을 부인했다는 점 말고도 수업의 대가로 적지 않은 보수를 받곤 했다는 점 때문에 그 명칭이 다소 부정적인 함의를 띠게 되었다.

 

소피스트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로타고라스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그의 말은 매우 유명하지만, 이 말은 언뜻 보기와는 달리 인간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는 인간이란 보편 인간이 아니라 개별 인간이다. 즉 인간은 개개인 모두 자신만의 척도를 가진다는 뜻이다. 소피스트들의 공통된 사상처럼 이 말 역시 절대적 진리는 없고 상대적 진리만 있으며, 객관적 진리는 없고 주관적 진리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피스트들은 희랍철학에서 자연이 아니라 인간에게 완전히 주목한 최초의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사유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그 조건과 가능성 및 한계를 비판한 최초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윤리적 가치 기준 역시 철저히 이성적으로 고찰하여 윤리학을 철학적 체계에 논리정연하게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과도기적 현상이었지만, 이것이 없었다면 이후 아테나이 철학의 번영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Ⅱ. 소크라테스 : 기원전 470년경 ~ 기원전 399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이해하려면 당시 아테나이의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아테나이의 민주정치는 물론,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노예와 여자를 시민에서 제외시켰다는 점에서 지극히 불완전하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 원칙이 극단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주의 정파들은 이 정치형태를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힘의 결집이 중요한 와중에도 아테나이에서는 정권을 쥔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식 귀족주의를 선망하는 세력 사이에서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현실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귀족주의 정파의 옹호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아테나이가 전쟁에서 패하자 민주정도 일시적으로 붕괴했지만 이후 민주주의자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성 모독이란 죄목으로 독배를 마셔야 했다.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 그노티 세아우톤 gnothi seauton’ 고 외친 이유는 그가 덕과 앎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바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바른 것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바른 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게 하면 자기 검증과 반성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인간이란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신이 줄곧 빠져있던 도덕적 빈곤과 맹목성을 깨닫게 되면,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동경을 품고 이를 추구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실제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 그의 독보적인 인품에 근거한다. 소크라테스의 등장 이후로 역사에서는 문화적 힘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 힘이란 자기 자신 속에 굳게 뿌리를 둔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말한다. 선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하는 내적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을 설파하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복음이다.

 

Ⅲ. 플라톤 : 기원전 427 ~ 기원전 347

 

플라톤이 배격하고 극복하려한 것은 소피스트 사상이다. 소피스트는 사유와 행동에서 보편적인 구속력을 가진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철학의 과제는 반대로 그러한 기준이 존재하며 그것을 획득할 방법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사유와 행위의 기준은 영원한 이데아 안에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사유와 예감에 의해 이 기준을 포착할 수 있다.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본래적 수단은 개념적 사유, 플라톤의 용어로는 변증법적 사유다.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일 뿐이며, 변증법이야말로 대화라는 공동의 탐색에 의해 보편타당한 것으로 나아가는 기술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제약된 것에서 무제약적인 것으로 상승하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중간 단계를 거쳐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하강한다. 플라톤의 저작이 거의 모두 대화형식을 취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사유에 의해 추출된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이데아는 철저히 실재적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보듯, 이데아만이 유일하게 참된 실재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표상은 오히려 그림자에 불과하다. 개별적 사물은 소멸하지만 이데아는 불멸의 원형이기에 무한히 존속한다.

 

보편적인 것에 개별적인 것보다 더 높은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개별적인 것만이 현실적이고 보편적 이데아란 그저 우리 머릿속의 구성물인 것인지는 철학의 근본 문제 중 하나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에게는 이데아만이 본래적 현실성을 지닌다.

 

플라톤은 다양한 정체, 즉 국가 조직 형태와 그에 부수되는 인간 유형을 탐구하였다. 『국가 ·정체』에는 다섯 가지 형태의 정체가 나오는데, 제7권의 철인정치와 제8권에서 다루는 명예정,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이 그것이다. 그런데 『세계철학사』의 저자는 명예정을 빼고 네 가지 정체만 다루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국가〮·정체』에서 직접 인용하는 것이 오히려 쉽고 도움이 될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이 책도 역시 대화 형식으로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철인정치를 이상적인 정체로 주장하며, 나머지 네 가지를 잘못된 정체로 비판한다.

 

「네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정체들은 최선자 정체가 점진적으로 쇠퇴되어 감으로써 생기게 되는 형태들인데, 이는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통치자들 속에 이질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체가 ‘명예 지상 정체’ 또는 ‘명예 지배 정체’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최선자 정체와 과두 정체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이 정체에서는 이성적인 것보다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으로,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데, 축재에 대한 욕구도 대단하다. 그 다음으로 생기게 되는 것은 과두 정체인데, 이 정체는 평가 재산에 근거하여 통치자들을 갖는다. 따라서 이 정체에서는 끝없이 재산을 끌어 모으는 부류와 이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가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주 정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이 대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김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과두 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한 다음, 모두가 평등권을 누리며 관직도 추첨에 의해서 배정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 정체를 몰락시켰듯, 이번에는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 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 정체를 탄생시킨다.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참주가 된 자로 인해서 결국에는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만다. p505~506」

 

인용문은 제 8 권의 내용을 요약 설명하고 있는 , <제 8권의 논의 전개> 부분이다. 제 7권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와 철인정치를 다루고 있다. 우생학이라든가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윤리적이고 비민주적인 생각도 있지만, 이천 여 년 전 희랍세계의 정치적 현실에서 나온 플라톤의 국가론은 그 시대의 맥락에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세계철학사』로 돌아와, 이상 국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들어 보자.

 

먼저 국가는 출생 신분에 관계없이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음악, 체육, 계산, 수학, 변증법 등과 더불어 고통과 긴장과 결핍을 견뎌내는 훈련을 실시한다. 20세가 될 때까지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위직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다시 10년간의 교육을 받고 또 한 번 선발 과정을 거친다. 통과한 사람은 5년 동안 철학 교육을 받는다. 35세가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이제 관념의 세계에서 냉혹한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15년 동안 생존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혹독하고 냉정한 생존 투쟁을 견디고 50세가 되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남자로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이 바로 플라톤이 꿈꾸었던 철학자 왕 혹은 왕이 된 철학자 이다. 이들 수호자들은 사유재산을 가져서도 안 되고, 아내와 자식도 사적으로가 아니라 공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자주 성관계를 가져 최상의 자식을 낳아야 한다. 그러나 이 자식이 누구의 자식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현실에서도 과연 이상국가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수천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랍다.

 

. 아리스토텔레스 : 기원전 384 ~ 기원전 322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이자 적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즉위 이전) 가정교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차적으로 과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세계의 과학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구체적 사물과 사실을 수집하고 기록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일적 원리들 아래 정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자적 학문으로서의 논리학을 창시했다. 모순율, 동일률, 배중률, 충족이유율을 사유의 네 가지 원칙으로 내세웠다. 다른 희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최고선이 행복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는 명제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법률과 도덕에 기초한 선한 국가에서 시민들의 윤리적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지고하고 본래적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실제에 적용된 윤리학일 뿐이다. 덕의 고찰은 윤리학의 전 단계이자 이론적 부분에 불과하며, 실제에 적용된 윤리학이자 윤리학의 실천적 부분이 되는 것은 국가론이다.

 

 

제 3장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희랍과 로마의 철학

 

헬레니즘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망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알렉산더의 사망시기에서 대략 기원을 전후하는 시기까지이다.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이후에도 아테나이는 오랫동안 철학적 중심지로 머물렀다.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철학 연구의 뜻을 품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활동지로 찾아왔다.

 

고대 희랍 철학과 문화의 특성은 질서 잡힌 우주의 총괄 개념으로서의 코스모스, 세계의 근원적 현상이며 만물을 지배하는 이성인 로고스, 윤리적 선과 가까이 있는 미에 대한 몰입을 뜻하는 에로스 등 몇몇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로마인은 철두철미 실제적인 민족이었다. 언어와 문학 이외에 로마인이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로마법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완전성을 띠고 발전한 국가제도이다. 이 시대 철학에서는 사변적 경향이 줄어들고 윤리학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그에 따라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부상한다. 이 두 철학자의 학설에서는 인간과 윤리학에 대한 비희랍적 관심이 당시로서는 가장 강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예술과 종교 이상으로 당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기독교의 대두로 인해 해체를 경험할 때까지 철학은 대로마제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Ⅰ. 스토아학파

 

인간은 본성상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삶은 이성적인 삶이다. 이성적 삶이 유일한 덕이며 행복이다. 이성적 삶과 덕과 행복은 동의어이다. 덕은 동시에 유일한 선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하며 무엇이 아무래도 좋은 것인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런데 올바른 가치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념의 방해를 받게 된다. 정념은 이성을 현혹하고 악한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 인간의 과제는 이런 정념과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데 있다. 이런 정념을 완전히 극복한 이후에야 덕이라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정의 상태를 스토아 사상가들은 ‘아파테이아aphatheia’라 부른다. 스토아학파의 핵심을 금욕주의라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의 세계사적 의의는 기독교와의 연관성에 있다. 스토아 사상가들은 금욕적 도덕을 엄수하고 모든 외적 재물을 경시하라고 설파한다. 이들은 세계 전체가 지고한 존재에서 구현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족과 계층의 구별을 넘어 보편적 인간애를 요구한다. 이 모든 점에서 스토아학파는 기독교에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중세에는 세네카가 최초의 기독교인 중 하나라는 견해가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스토아학파 이외에도 에피쿠로스학파, 회의주의학파, 절충주의학파, 신플라톤주의 등이 이 시대 희랍〮〮로마 철학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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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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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제 2장 현대 철학의 주제와 문제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과 긴밀할 뿐 아니라 긴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부 2장을 지금까지와 달리 인물이 아닌 주제 영역에 따라 나눈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정말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저자의 취향과 편향 때문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Ⅰ. 인간의 모습 (철학적 인간학)

 

칸트에 의하면 철학이 답해야 하는 세 가지 물음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

 

 

Ⅱ.언어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언어는 철학의 핵심주제가 되었다. 언어는 인간의 인식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데, 칸트는 이것을 간과했다. 칸트와 동시대인인 하만(1730~1788)은 “내게 중요한 문제는 ‘이성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언어란 무엇이냐?’ 이다. (....)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다면 이성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칸트를 비판하며 인식비판에서 언어비판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 다른 동시대 사상가인 헤르더(1744~1803)는 이성은 언어에 구속되어 있으며, 이성은 원칙적으로 언어적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경험과 역사 그리고 관심의 구속을 받는다. 실제로 언어에 관한 자립적 학문은 이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최소한 5000개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다양성보다 철학적으로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모든 언어에 일정한 본질적 특징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언어적 보편자가 존재한다.

 

훔볼트(1767~1835)는 철학의 중심물음이 칸트가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인간이란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이다” 고 주장했다. 인간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 세계 안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 행위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이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오직 개개 인간의 생생한 발화 행위에서만 존재한다.

 

소쉬르(1857~1913)는 언어 고찰에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쉬르는 파롤parole 과 랑그langue를 구분한다. 파롤은 개인이 순간순간 사용하는 일회적이고 생생한 언어를 가리키며, 랑그는 기호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언어체계, 즉 모든 개인이 공유하고 있지만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개인들의 총체에서만 완전하게 실존하는 체계를 가리킨다. 소쉬르에 의하면 모든 언어적 기호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모든 언어에는 음성 형태, 즉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가 융합되어 있다. 두 요소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다. 소쉬르는 구조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언어가 철학의 중심이 된 것은 오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비트켄슈타인(1889~1951) 만큼 커다란 기여를 한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철학에서 ‘언어적 전회’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은 그의 사상 때문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모든 텍스트를 독일어로 썼지만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영국이다. 이것은 비트켄슈타인을 현대 영미철학자의 대표자로 간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의 서문에서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쓰며, 자신이 2000년 이상 지속 되어온 철학의 난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켄슈타인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세계와 사상 및 명제에 의한 그 모사 사이에 명백한 관계가 있다는 『논고』의 생각 (그림이론)을 버린다.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은 대개가 다의적이고 모호하며 부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달려있다.(놀이이론)

 

‘언어적 전회’ 라는 간명한 표어는 철학적 문제들이 철학적 언어의 문제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이런 철학의 대표적 집단은 빈학파이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명제나 그것들의 논리적 상호 관계를 명확히 하고 의미 있는 명제를 의미 없는 명제와 구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다. 의미 있는 명제란 참, 거짓이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명제이다. 예를 들어 칸트처럼 “현상 세계의 이면에는 사물 자체의 영역이 있다”는 식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無나 영혼, 세계정신 같은 단어들도 무의미하다. 빈학파는 이렇게 형이상학의 뿌리에 도끼날을 박았다.

 

오스틴(1911~1960)은 언어의 수행성을 주장했다. 언어에는 진술적인 것도 있지만 수행적인 것도 있다. “내가 약속한다”는 말은 곧 약속의 행위 자체이기도 하다. 오스틴은 이것을 ‘언어행위 Speech Act’ 라 불렀다.

 

 

Ⅲ. 인식과 지식

 

칸트의 활동에서 신칸트주의 번영에 이르기까지 100년 이상 인식론은 철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철학은 인식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그 초점을 두 가지로 이동시켰다. 하나는 언어, 특히 인식에서의 그 역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과학 즉 인식이 계획적, 방법적으로 추진되고 점진적 성공을 거두는 영역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식론은 과학론이 되었다.

 

1. 신실증주의

 

실증주의란 특정한 철학이론이나 학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철학적·과학적 기본 입장을 가리킨다. 철학과 관련해서 합목적적인 태도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 명백히 지각될 수 있는 것, 감성적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는 것만 중시하는 태도이다.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실증주의란 명칭을 철학에 도입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정신사에 등장한 사상조류 중에서 주어진 것만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반적 요청을 내세우고 또 우리 인식에 주어지는 것은 감각적 인상들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표방하는 조류는 모두 실증주의라 불릴 수 있다. 실증주의는 언제나 형이상학을 거부해 왔다.

 

신실증주의란 명칭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하나의 철학적 학파를 지시한다. 이 학파는 ‘논리실증주의’나 ‘논리경험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학파에 속하는 모든 사상가에게 논리학은 각별한 역할을 한다.

 

2. 새로운 논리학

 

기호논리학은 다른 모든 사실과학들과 달리 하나의 이론 체계가 아니다. 기호논리학은 하나의 인공 언어에 비교될 수 있다. 기호논리학은 기호들과 이 기호들의 사용규칙을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다. 그러나 이런 언어구성에서는 개별 기호들이 우선은 해석되지 않고 있으므로 기호논리학은 차라리 언어의 골격 내지 도식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이 기호들은 응용논리학의 영역에서야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다. 기호논리학은 수학의 새로운 토대 정립에 제일 먼저 활용되었다.

 

간단히 말해 기호논리학은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운 이런 표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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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셀에서 분석철학까지( 신실증주의 : 빈학파 → 분석철학 : 일상언어철학)

 

러셀(18721970)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인식수단은 자연과학뿐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는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서 차용되어야 한다. 러셀은 만년에 이를수록 점점 더 실증주의로 기울어졌고 실증주의에 의해 인정되지 않은 모든 지식영역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러셀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물질도 없고 정신도 없고 자아도 없으며 오직 감각자료만이 존재한다. 우리 지식의 유일한 원천인 자연과학은 감각자료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20세기 철학유파의 하나로, 통일적이고 강력한 집단이었던 신실증주의학파는 ‘빈학파’라고 자처했던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빈학파는 1938년 이후로는 대개 ‘분석철학’으로 지칭되며 때로는 ‘토대연구’라고도 불린다. 현대 논리학과 결부된 모든 철학은 분석철학이다. 이 학파는 기호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철학자들로 하여금 언어라는 현상에 주목하게 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어냈다. 이들은 인식의 문제를 공공연하게 구호로 내걸고, 증명가능하고 확실한 인식, 즉 과학을 주장했다. 과학적 인식의 이론, 즉 과학론은 이 학파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였다.

 

4. 두 명의 회의주의자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명백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상가로는 쿤(1922~1996)이 있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진보는 단계적·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변혁과 비약의 형태로 수행된다. 패러다임에 접합되지 않는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와 이론적 발상을 요구하며 결국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한다.

 

5.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에 의하면, 세계 사건은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면에서 확실하게 예정되어 있지도 않으며(비결정론) 완전하게 인식될 수도 없다. 지식이란 언제나 잠정적, 가설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포퍼는 확증 대신 반증을 내세운다. 가설이란 확증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증을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이론적 개념들은 우선 인간의 정신, 인간의 상상력에서 자유롭게 창조되며 이것이 나중에야 경험에서 검증되는 것으로 보았다. “내 확신에 의하면, 우리의 사유와 언어적 표현에서 등장하는 개념은 모두가 사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며 감각적 체험에서 귀납적으로 획득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일정한 개념 및 개념 연관들을 습관적으로 감각적 체험에 굳게 결부시키며 그 결과 감각적 체험의 세계와 개념 및 언명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모든 계열의 수란 분명히 인간 정신의 고안물, 다시 말해 일정한 감각적 체험의 정리를 편리하게 하려고 인간이 창조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의 개념을 체험 자체로부터 이를테면 자연스레 생성시키는 방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수의 개념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과학 이전의 사유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성격의 인식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의 가설들은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이것이 추후에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가설로 변환된다고 보았다.

 

6. 해석학

 

해석학Hermeneutik이란 말은 헤르메스 신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달할 뿐 아니라 이를 이해할 수 있게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헤르메스란 이름은 ‘설명하다, 해석하다, 석의하다’ 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해석학은 철학의 고유한 학파를 형성하는데, 대표적 사상가는 가다머(1900~2002)이다.

 

가다머에게 해석, 즉 이해란 보편적 현상이다. 해석 내지 이해란 전승된 문헌과 정신적 산물의 수용은 물론 모든 인간 지식과 관련해서 기초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에는 기초적인 ‘선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다머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적으로 구성된 우리의 세계 정향에 속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모든 세계정향은 언어 습득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라는 세계-내-존재의 언어성은 경국 경험의 전체 영역을 표현한다.”

 

7. 구성주의

 

구성주의자들의 사유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고안한 무엇, 우리 자신의 구성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구성주의의 사상적 선구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현실이란 바깥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장치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8.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인식론자들은 이른바 ‘가설적 실재론’을 기본으로 공유한다. ‘인간에게는 궁극적 확실성을 지닌 지식이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은 틀릴 수 있으며,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학문의 전체 영역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는 테제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 타당성을 엄밀하게 입증할 수 없지만 필연적이며 참된 것이라고 전제되는 ‘요청’이 필요하다.

 

9. 인식의 한계

 

20세기 후반에는 사유의 중심이 인식의 한계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진다. 괴델(1906~1978)은 『수학의 원리』에서, 전개된 자연수의 공리체계는 비록 참이기는 하지만 이 체계의 틀 내에는 입증될 수 없는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어떤 공리체계에서 우리 인식을 확정짓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 괴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과학이란 현실을 정확하고 완전하며 일관되게 서술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한편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양자역학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확인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한 미립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둘 중 하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다른 하나의 측정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측정 행위 자체가 미립자의 상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 다만 아주 많은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만 타당한 통계적 진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우리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연사건에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라 인과성 개념은 상대화되며, 빈틈없는 결정론이란 견지될 수 없는 이론으로 전락한다.

 

 

Ⅳ.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잡다한 이야기가 있는데, 포퍼와 공리주의에 대해서 짧게 요약하고 넘어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20세기는 철학의 ‘다성적 세기’ 라 너무 많은 학파들과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다지 눈이 가는 사람은 없다. 다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체계 혹은 세계는 불완전하다. 세계에 대한 우리 인식의 한계는 세계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인식론에 관한 철학이고, 여기서 곧바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포퍼는 역사주의를 비판했다. 역사 발전의 근본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발전에 관해 근거 있는 진술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로부터 올바른 정치적·사회적 행위의 지침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역사주의다. 계시된 신의 의지나 선택받은 민족의 승리, 변증법적 법칙 또는 필연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이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그런 예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권은 이런 견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플라톤 사상을 공박하고 있으며, 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을 비판한다.

 

영미의 공리주의는 처음 들을 때는 매우 윤리적으로 들린다. 벤담이나 밀은 어떤 행위의 모든 당사자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 내지 최소의 피해를 가져오는 행위는 선하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이로움이란 적극적으로는 행복이나 쾌락을 얻는 것에서 존재하며, 소극적으로는 고통이나 불쾌를 피하는 데서 존재한다. 따라서 언제나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 유용성,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고안한 벤덤의 판옵티콘은 푸코의 해석처럼 감시와 처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윤리적 의도가 가장 비윤리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특히 결과를 최고로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Ⅴ.뇌, 의식, 정신

 

플라톤 시대와 기독교적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에서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대립은 인간도 반으로 갈라 놓았다. 일상적 욕구로 가득 찬 신체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극장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왔고, 20세기 혹은 20세기 후반의 철학사상의 특징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정신의 비밀은 풀릴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세기 철학 전체를 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성향이 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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