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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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굳이 프랑스의 영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매니아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나도 한 번 작가가 되어볼까 하는 유혹이 들게 마련이다. 한 번은 그 유혹이 정말 강하여 도전해보자 생각했고 도움이라도 좀 받을까 하여 마침 발간되었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가의 신념'이란 책을 펼쳤다. 그러다 뒤늦게 이 책을 보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써라'에서 다름아닌 이 대목을 만났던 것이다.


 얼마 전 '허클베리 핀' 신판을 읽으면서 내가 이 소설의 구절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는 제임스 T 파렐의 '스터즈 로니건' 삼부작을 다시 읽으면서도 내가 그 구절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 에밀리 디킨슨이 자기 시를 아는 것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신념' p. 39)


 읽자마자 '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사람이야 기계야? 무시무시한 기억력이었다. '허클베리 핀'은 아주 두껍다. 거기다 온갖 미국 방언까지 있다. 스티건 로니건 삼부작은 또 어떠한가? 페이퍼백 판으로도 페이지 수가 무려 896 쪽에 이른다. 정말 상당한 분량인 것이다. 그런데 이걸 몽땅 암기하고 있단 말이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도 대부분 암기하고 있다는 고백이 있다. 그러니 절망했다. 과연 이 정도의 기억력이 있어야 제대로 된 작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나는 꿈을 접었다. 그 때부터 나는 좋은 작가는 괴물 같은 자들만 되는 것이라 여겼다. 천부적 재능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스탠 리의 코믹인 '엑스맨'에 나오는 돌연변이 초능력자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래, 그것이 '작가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 어떤 외경심이라고 해도 좋다. 신탁을 받는 무녀와도 같이 그들이 하는 말을 고이 새겨 들을 준비를 하고 있는. 그랬기 때문에 내게 경이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작가들의 인터뷰로 가득한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는 것은 한 마디로 올림푸스 신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또 어떤 어마무시한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놀랄 준비를 미리 하고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이대로 작가와 독자의 관계란 일방향이었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 그건 창출과 향유의 관계요, 송신과 수신의 관계였으며 생산과 소비의 관계였다. 지금도 여전히 작품의 해석에 대한 권위는 우선적으로 작가에게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 독자란 작가가 새겨 놓은 의미를 캐내기만 할 뿐, 작가 이상으로 작품의 의미를 새롭게 창출하지는 못하는 존재였다. 한 마디로 독자는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만나게 된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전체적인 부분을 일단 그려놓고 시작한다는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고는 모든 작가들이 정작 작품을 쓸 때조차 이 다음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확실히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같은 페이지를 수십 번 썼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고는 엉망진창이라 고치고 또 고쳐야 했다고 고백했으며 폴 오스터는 자신의 작품 '거대한 폐허'에 등장하는 인물의 말을 빌려 '책은 무지에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언 메큐언은 문장이나 문단이 끊임없이 수정되는 방식을 좋아해서 타자기 보다 컴퓨터를 선호했고 필립 로스는 새 책을 준비할 때는 그 책에서 이야기할 문제조차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한 문장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여야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가는 작품 안에서 자신이 철학을 명확히 표현할 권리를 버려야 한다고 단언했고 레이먼드 카버는 매일매일 연속해서 열 시간, 열 두 시간, 열 다섯 시간을 앉아 글을 쓰지만 그 중 많은 시간을 수정하고 다시 쓰는 데 할애한다고 얘기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글쓰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 흐르듯 쉽게 쓰이는 정신 상태라는 건 없으니 자신은 그저 꾸준히 글 쓰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고 고백했으며 작가를 우물에 비유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특히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작가는 자신이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으며 자신은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동시대 작가들을 평가한다고 하면서 '소리와 분노'를 쓸 당시 몇 번이나 이리저리 고쳐도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미진함이 남아서 애를 먹었는데 출판되고 1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결할 수 있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하는가 하면 소설가는 소설을 시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어떤 사건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지에 대해 항상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 EM 포스터 조차 때때로 등장인물이 자신의 계획으로부터 도망을 친 경험을 한다고 털어 놓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아리아드네의 실조차 없는 미노타우루스의 미궁과도 같이 그 때 그 때 떠오른 영감이라는 희미한 횃불에 의존한 채,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출구를 찾아 나아가듯 수없이 반복된 시행착오가 빚어낸 결과였다. 여기서 주목하게 된 것은 그들이 출구를 찾았던 순간은 늘 자기 작품의 독자가 되었을 때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작품은 작가라는 신분이 순전히 생산한 것이라기 보다는 작가와 독자라는 이중 역할을 오가며 상호 협력한 결실에 더 가까웠다. 작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다. 유정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길어내려면 어디까지나 독자의 협력이 필요했다. 결국 작가와 독자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의 관계였고 동반자였다. 의미는 홀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여정 자체였다. 열 네살 때 같이 소풍을 간 친구가 갑자기 발생한 낙뢰에 맞아 죽은 것을 목격한 뒤로 세상 만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깨달은 폴 오스터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세상이 맞는지 알기 위해 '전미 청취자 사연 프로젝트'를 통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던 것처럼 말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도 말한다. '소설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이다. 소설 안에서의 성찰은 본질적으로 가설에 불과하다. (p. 296) 설령 소설가들이 자신들이 사상을 표한한다고 한들 철학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역설이나 즉흥성을 가지고 하는 지적 유희의 습작에 불과하다(p. 297)'고 말이다. 결국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고 해도 그것은 완결된 게 아닌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따른다면 이제 독자의 참여를 기다리는, 비유하자면 보드 게임 판이 놓인 것과 같다. 작가는 문장의 조합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놀기 위한 기본적 규칙을 정해 놓았을 뿐이고 그 진정한 의미는 참여한 독자들의 플레이로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쓰는 것에 비해 종종 열등한 행위로 오해되곤 한다.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눈으로 확인가능한 구체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가란 무엇인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읽는 것도 작가의 글쓰기만큼이나 능동적인 행위였다. 가필이란 형태이든, 수정이란 형태이든, 그것 나름의 의미 경로를 만들어 나가면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독자 자신의 작품을 말이다. 세상의 누구나 저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듯이 읽는다는 행위도 자신만의 책을 쓰는 일이었다. 포크너의 말마따나 이야기로 자신의 불멸을 보장받는 것은 굳이 작가만의 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우리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도 허락된 권리였다.


 실은 요즘 읽는다는 것에 많은 회의가 들었다. 나날이 실망스럽기만한 세상의 풍경을 목도하면서 책을 읽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책으로 알게된 것 때문에 더 괴롭기만 했을 뿐. 어쩌면 나 역시도 읽는 행위 자체를 너무 실리적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닌지 싶다. 읽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능동적 창조이며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하듯이 나 자신을 부단히 성장시키는 행위인데도 말이다. 그것을 책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다시금 열심히 읽어 볼 생각을 한다. 문득 하루키도, 오스터도, 마르케스도, 로스도, 카버도 매일 꾸준히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읽기도 마찬가지이리라. 시작을 조이스 캐롤 오츠로 했으니 끝도 그녀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나에게 '빅엿'을 선사했던 바로 그 책, '작가의 신념'에서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이상적으로 볼 때 글쓰기는 열정적이지만 뒤죽박죽이기 십상인 개인적인 통찰과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범주화와 가치 평가에 재빠른 공동 세계와의 균형이기 때문에 이 글쓰기라는 예술은 기술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술이 없다면 예술은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예술이 없다면 기술은 돈벌이만을 위한 것일 뿐이다.(...) 젊거나 갓 시작하는 작가들은 끊임없이 고전과 현대 작품 양쪽을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 이 기술의 역사 속에 푹 빠져보지 않은 작가는 '창조적 노력의 95%가 열정뿐인 개인'인 아마추어로 영영 남게 되기 때문이다."


 광범위하게 읽어야 한다는 말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문득 깨닫는다. 그녀가 나를 좌절케 했던 그 괴물 같은 기억력에 대해 말한 것은 무엇보다도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역시 그녀 자신이 훌륭한 독서가였기 때문에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읽기는 중요하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포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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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3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소설 쓰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텐데, 작가 하면 소설가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어떤 글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겠죠 재미있게 읽으니 쓰고 싶어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작가는 쓰지 않으면 못견디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그런 게 있다면 좋을 텐데, 저는 늘 쓸 게 없어, 하는 생각을 하니까요 책을 읽은 다음에 늘 그러는군요 어쩌다 가끔 좋은 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좋은데 글로 나타내면 어쩐지 이상해지기도 해서...

많이 외우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넓게 읽어야 하는 건 맞을 텐데, 저는 그렇게 못하고 있네요 ‘책 읽기의 즐거움은 그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는 말도 있더군요 책 읽기 자체를 즐기면 좋겠죠 저도 그렇게 못하기도 하는데, 싫어하지 않으니 여전히 읽는 거겠죠

여러 작가들이 하는 말 들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오드득 2015-05-01 06:14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하면 저도 아직 글만큼 힘든 게 없어요. 그래서 더욱 작가들이 대단해 보이죠. 어떻게 저렇게 몇 시간이고 주구장창 쓸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죠. 그런데 확실히 늘 쓰다보면 좀 더 글쓰기가 쉬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백지 상태지만 뭔가 끄적이다 보면 신기하게도 줄기가 잡히고 아귀가 맞아가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럴 땐 어떤 쾌감까지 느끼겠더군요. 어쨌든 열심히 읽어 볼 생각입니다. 작가들의 말을 듣고 싶으시다면 단연코 이 작가란 무엇인가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정말 들을 게 많았어요^ ^

AgalmA 2015-04-3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 캐럴 오츠 리뷰가 있는 [작가란 무엇인가 2]가 아닌 [작가란 무엇인가1]로 풀어나가시다니 재밌습니다.

오드득 2015-05-01 06:16   좋아요 0 | URL
와, Agalma님 말씀 감사합니다. 캐롤 오츠야 인터뷰보다 직접 쓴 `작가의 신념` 제게 너무 커다란 충격을 줘서 그렇게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
 
제비뽑기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김시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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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에는 인력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이 인간의 이성으로 가늠조차 어려운 거대한 비극은 우리의 영혼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한 영혼의 필사라고 할만한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비극 안에서 문학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 이유에 대한 '왜'와 대안을 위한 '어떻게'를 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테어도어 아도르노가 2차 대전 후에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처럼.


 그것을 무엇보다 이번에 나온 미국의 여성 작가 셜리 잭슨의 두번째 단편집인 '제비뽑기'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49년에 나왔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에 담겨진 25편의 이야기들이 2차 대전이 남긴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여전히 전쟁이 남긴 절망과 아픔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을 때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읽으면 과연 그러할까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모든 단편에서 전쟁에 관한 것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안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지극히 사소한 일상적인 장면만 계속될 뿐이다. 이웃을 사귀고,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 그 뿐이다.

 셜리 잭슨은  46년과 48년에 걸쳐 이 단편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47년에 알베르 카뮈는 2차 대전을 흑사병에 비유한 '페스트'를 썼다.) 그토록 시대의 어둠을 가져온 커다란 전쟁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 작품이 세계 제2차 대전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비록 겉모습은 한없이 일상적일지라도 그 속에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고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시작에서부터 알 수 있다. 가장 처음에 소개되는 짤막한 단편인 '취중 대화'는 지금부터 우리가 읽으려는 25개의 단편들이 사실은 그러한 작업임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은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열일곱 살이에요. 큰 차이가 있죠."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 나이 무렵이었을 때...." 그는 지나치게 강조하며 말했다. " ... 여자애들은 칵테일이나 남자친구와의 애무만 생각했지."

 "그게 문제예요. 아저씨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두려워했다면 현재가 이렇게 형편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P.17)


 미래 역시 밝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열일곱 살의 소녀는 전쟁에 책임있는 과거의 어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를 망쳤다고 생각하는데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해야 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다. 물론 타자를 두렵게 여겼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 보다는 타자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편리하게 배척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주입한 프레임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타인에 대한 편견과 적대로 똘똘 뭉친 괴물과도 같은 우리의 자화상을 말이다. 감히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것이 오늘, 여기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태도는 2차 대전을 낳았다.

 '제비뽑기'는 거창할 지도 모르지만 그 비극의 반복을 막기위해서 그런 때의 사람들이 가진 진실된 자화상을 밝혀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성찰의 동기를 주기 위한 단편집이다. 그것을 위해 셜리 잭슨은 '제비뽑기' 단편집을 모두 4부로 나누고 각각을 기둥 삼아 마치 정교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처럼 유기적(네 기둥이 차츰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으로 하나하나 파악해 나간다.



 첫 기둥은 이유에 관한 것이다.

 왜 우리는 타인을 그저 불안한 존재로 그리고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까?

 '취중 대화'에 뒤이은 두 편인 '유령신랑'과 '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은 근원적인 상황에 대한 비유적 묘사이다. 거기서 전통적인 타인에 대한 신뢰(유령신랑)와 환대(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는 배반당한다. 더이상 타인들은 내가 믿는 대로, 내 생각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득 실종되고 속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홀연히 나 자신의 존재까지 상실할 위험을 가져온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어지는 '결투재판'과 '빌리지의 주민' 그리고 'R.H 메이시와 보낸 시간'은 그 이유를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방의 의미인데, 셜리 잭슨의 작품에서 방이 가지는 의미란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 그러하듯이 그 방을 소유한 자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편들에서 셜리 잭슨은 그 방의 주인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또한 아무리 바뀐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개인의 정체성이 더이상 고유하지 않고 마치 대량생산된 기성품처럼 언제든 교환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존재감의 축소가 타인에 대한 불안과 배척을 낳았다고 그녀는 아주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기둥은 현재다.

 첫 번째 기둥이 가져온 결과이자 정확히는 2차 대전을 가져온 궁극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역시나 처음에 나온 '마녀'는 두 번째 기둥에 담긴 이야기들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다. 거기서 기차 안에서 꼬마가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는 자기 여동생을 토막내어 먹어버렸다고 태연히 말한다. 불안을 야기하는 타인이 이제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뒤이은 '이탈자','당신 먼저, 친애하는 알퐁스', '찰스', '리넨에 둘러싸여 보내는 오후', '꽃으로 꾸며진 정원', '도로시와 할머니와 해군들' 모두 그러하다.

 특히나 압권은 '이탈자'인데 이 단편의 주인공 월폴 부인은 '레이디'라는 개를 기르고 있다. 하루는 이웃집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레이디'가 담을 넘어와 자신의 닭을 잡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번 피 맛을 본 개는 전혀 막을 수 없으니 주인공에게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죽일 것을 내비친다. 놀란 주인공은 레이디를 구하기 위해 방도를 찾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없애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것도 너무나 즐겁게 말한다.


 월폴 부인은 생각했다. 상냥하게 대해야 해. 시골 기준으로 보면 저 영감이 나쁜 놈도 아니고 배신자도 아니야. 누구나 닭을 죽이는 개에 한 마디씩 하겠지. 그렇다고 저렇게 기뻐할 필요는 없을 텐데.(P. 111)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이탈자'는 이제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다. 용서도 없다. 다만 제거할 뿐이다. 같은 고백을 우리는 '꽃으로 꾸며진 정원'의 매클레인 부인에게서도 듣게된다. 그녀는 도시에서 시골로 갓 이사온 이방인이다. 그녀가 가진 도회적인 삶의 자취 때문에 그녀는 차츰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그러다 마을에서 배척당한 흑인을 정원사로 고용하자(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그녀 자신마저 소외되어 버린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말도 안 섞으려고 해요. 전에는 울타리 너머로 버턴 부인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부인이 가까이 다가와 함께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죠. 그런데 이제는 '안녕하세요'라고만 대답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려요.아무도 우리한테 웃지도 않고 말도 붙이지 않죠."(P.188)


 뒤에 폭풍이 불어 버튼 부인의 나무가 매클레인 부인 집으로 쓰러지고 그동안 열심히 가꾸던 정원을 다 망쳐버렸는데도 버튼 부인은 한 번 쓱 보고는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단호히 닫아버릴 뿐이다. '당신과는 완전히 끝났다.'는 표현이다. 결국 매클레인 부인은 이렇게 쓸쓸히 말하게 된다.


 "이만 포기해야 할까요, 존스씨? 도시로 돌아가 정원은 완전히 단념하고 살아야 할까요?"(P. 190)


 개인이 가진 존재감의 축소는 이렇게 타인에 대한 배척을 가져왔다. 자신의 약점을 약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타인의 희생시킴으로써 보강한 것이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아전인수적인 태도는 급기야 2차 대전을 가져온 방아쇠가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세 갈래 길의 궁극엔 그것이 있었다.



 세 번째 기둥은 그러한 모습에 대한 질타다.

 여기엔 1부와 2부에서 셜리 잭슨의 분신들이 당했던 부조리에 대한 셜리 잭슨의 비판이 있다. '담화'에서는 정작 현실의 문제들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현란하기만 하고 복잡하게 만들뿐인 말과 이론만을 생산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한다. 그녀가 누구나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만을 작품에 담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에서는 타인(대프니 힐)을 비판하면서 자신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엘리자베스'는 '오래된 좋은 회사', '인형' 그리고 '모호함의 일곱가지 유형'에까지 이르는 일관된 주제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엷어진 존재감을 물질적 성공이나 자기보다 더 큰 권위에 맹목적으로 기대려는 것으로 강화하려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오래된 좋은 회사'는 오로지 남편의 권위에 기대서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아내들이 등장하며, '인형'엔 남편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아내가 등장한다. 그리고 '모호함의 일곱가지 유형'에서는 자기보다 더 많이 안다면 무작정 수용하고 보는 한 사내가 등장한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이 정확히 이런 경로로 출현했는데 당시의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국민들은 강력한 국가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으로 점점 희석되어지는 존재감의 불안을 지웠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셜리 잭슨은 세번째에 실린 단편들에서 그들과 아주 닮은 전형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냉소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타인들보다 더 잘났다고 할 수 있는가 묻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배척했던 이유조차 진실이라기 보다는 무조건적 추종에 불과했으므로 어리석음까지 더불어 공박한다.

 그 가장 통렬한 비판은 '인형'에서 아내가 당하는 박해를 목격한 여성이 참다 못해 분연히 일어나 복화술사인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경멸을 욕설로 표현하는) 인형의 빰을 세차게 후려치는 것에서 폭발한다. 마지막 단편인 '아일랜드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어요'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바탕되지 않는 동정심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받는 자에게 더한 굴욕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미국이 행했던 점령지에서 풀려난 유럽이나 우리나라처럼 식민지에서 해방된 아시아 그리고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한 오만한 시혜자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노인(더러운 걸인으로 아처 부인의 방문 앞에서 쓰러지자 아처 부인과 마침 거기에 있던 이웃집 여인들은 그에게 식사를 마련해준다.)은 아처 부인에게 말했다. "제가 흔쾌히 마시기는 했지만 저라면 그렇게 형편없는 화이트와인을 손님에게 대접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부인."(P. 304)


 셜린 잭슨도 바로 이 말을 당시의 미국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억지춘향의 동정심이 아니라 받는 당사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도움을 말이다. 이렇게 세 개의 기둥을 경유하고 나면 드디어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기둥을 마주하게 된다.



 네 번째의 기둥은 경고다.

 만일 지금까지의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고 여전히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편견을 가지고 타인을 배척한다면 이번에는 바로 당신이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선명한 경고는 물론 '제비뽑기'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셜리 잭슨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 악습이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이어져온 전통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한 노인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보여준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P.397)


 여기에서 보듯이 워너 영감은 2차 대전 때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했던 대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진실이라면서 태연히 쏟아낸다. 나중에 그는 무려 77년을 이렇게 해왔다고도 말하는데 그렇게 그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제비뽑기'가 그 기원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즉 '제비뽑기'는 오늘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맞닥뜨리게 될 비극이며 워너 노인은 그런 우리의 미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비뽑기'는 비유하자면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결과다. 그런 한나 아렌트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악이란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제 우리가 타인의 뒷통수를 노리고 던졌던 부머랭은 다시금 돌아와 우리 자신을 노리고 있다. 네 번째의 단편들 중 '당연하지요'에서 타일러 부인이 문득 마주한 이웃의 독선적인 편견으로 인한 곤경이나 '소금기둥'에서 지금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곧 소금기둥처럼 허물어질 것이란 예감에 결국 자신의 존재마저 소멸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움에 빠진 여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러한 경고의 선명성은 아무래도 우리의 성찰이 시급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 같다.

 이렇게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건축물과도 같은 '제비뽑기'를 간략히 소개해 보았는데 더하여 개인적으로 '제비뽑기'가 큰 수확이었다는 것도 밝혀두고 싶다. 이유는 이러하다.



 그동안 셜리 잭슨은 사소한 일상에서마저 거기에 깃든 불안과 공포를 잘 잡아내는 작가로 유명했다. 또한 그것은 흔히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과 결부된 내적 성향의 반영으로만 여겨졌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것과는 어느 정도 단절된 작가로 생각되었다.(작가 자신이 비사교적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작가 자신의 이러한 모습은 앞서 소개한 '꽃으로 꾸며진 정원'에서 흑인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매클레인 부인에게서 나타난다. 이러한 매클레인 부인의 곤경은 훗날 셜리 잭슨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에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몰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회적인 것과 단절된 작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번 독서를 통해 충분히 알게된 것이다. 셜리 잭슨이 민감한 더듬이로 그 어떤 작가들 보다도 사회적인 것과 예민하게 공명하는 작가임을 말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을 진하게 우려낼 수 있는 작가. 그가 바로 셜리 잭슨이었다.

 이는 또한 왜 지금의 우리가 그녀의 책들을 그저 한 때 유명했던 작품들의 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가진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거듭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단편들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곤경은 그들만의 곤경이 아니었고 매클레인 부인을 소외시켰던 이웃들이나 워너 영감 같은 존재를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South Park Season 12 Episode 2: Britney's New Look (2008)

 제목에 나오는 이름은 당시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던 브리트니 스피어스. 악명 높은 사우스파크 답게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고소 당하지 않았을까 염려될 정도로 대차게 굴욕적인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선사하는데 실은 그러면서 파파라치들과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끔찍한 관음증을 풍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나중에 사우스파크의 주인공이 스타도 인격이 있고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쫓아다니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브리트니는 죽어야 한다고 합창한다. 알고보니 민주주의의 발달로 더이상 공개적으로 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미국인들이 잘 나가는 젊은 여성 스타를 하나 선택해 자살하게 만들어 그간 쌓인 자신들의 폭력성을 해소하려 했던 것.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를 폭력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관음증과 연결시킨 에피소드(전 국민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 죽는 불쌍한 브리트니)로 셜리 잭슨의 단편들이 사회적인 것과 연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나 역시 셜리 잭슨의 이야기를 읽다가 한 아이가 생각났다. 바로 내 주변에 있는 초등학생 아이의 실화다. 아이는 교회를 다녔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서울의 유명한 교회였다. 특히 부자가 많이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서 아이는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 둘은 단짝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친구의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친구만큼이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웃으며 자기 별장에 놀러오라고 하기도 하고 친구가 어디 어디 유명 사립 학교를 다녔고 다닐 것인지 줄줄 알려주었다. 그러다 아이에게 어느 학교를 다니냐고 물었다. 아이는 대답했다. 그러자 엄마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아이가 말한 학교는 엄마가 예상한 유명한 사립 학교가 아니라 강북의 평범한 초등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를 나간 아이는 단짝 친구가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걸 보게 되었다. 결국 아이는 엄마에게 말했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이렇게 매클레인 부인은 아직도 우리 곁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영혼들이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어린 영혼이라 할 지라도.

 아픔은 여전하다. 그런 의미에서 셜리 잭슨의 작품들은 확실히 현재형이다. 타인과의 공존이 불안을 야기하고 누군가가 기피되고 배척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녀의 이야기는 부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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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4-2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이 단편이죠? 시리즈를 쭉 읽다가 단편이라 엄두가 안나서 제쳤는데 리뷰를 더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좋은 평가 받는 작품이니까요 :)

오드득 2015-04-29 19:58   좋아요 0 | URL
네, 단편집이에요^ ^ 꽤 많은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래도 `제비뽑기`만은 꼭 놓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전 사실 그 단편으로 셜리 잭슨을 처음 만났고 그러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 매료되었는데요,(제가 좀 이 시기 여성 작가들에게 쉽게 매료되는 편이긴 합니다만^ ^) 읽으면 읽을수록 뭐랄까 유정 같은 것이 있어서 자꾸 뭔가 캐낼만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

2015-04-23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1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드득 2015-05-01 06:11   좋아요 0 | URL
저도 실은 희선님과 그리 다르지 않았요. 요즘은 세상에 너무 실망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런 걸 써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강하지요. 그러다가 달리 버틸만한 힘이 없다는 생각이 또 들어 쓰기도 하고 그래요. 이상하게 그래도 글 쓸때만은 뭔가 힘을 얻는 것 같더군요. 와, 십이국기를 일본어로 다 읽으신 건가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다 읽어서 아쉽다는 말 저도 어쩐지 알 것 같아요. 예전에 십이국기 다 읽었을 때 제가 그랬거든요^ ^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정말 뒷페이지 넘기기가 싫더군요. 그리고 원래 읽는다는 게 언제든 오독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에 그리 큰 아쉬움을 가지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저도 옛날 리뷰 읽어보면 이게 아닌데 싶어 화끈거리는 게 많더군요^ ^ 희선님 말대로 4월도 다 갔네요. 이제 겨우 하루 남았어요. 왜 이리 속절없이 시간만 서둘러 가는지ㅠ ㅠ 아쉽습니다.

(아, 이런! 희선님 댓글 맞는데 제가 댓글을 달 때 그만 실수를 했나 보군요. 제가 이렇게 좀 허당이에요. 이 댓글도 두번째 다는 건데 처음 것은 그만 로그인을 안하고 써버렸네요. 하하^ ^)

gunho 2019-02-21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이 너무 좋네요. 개인 블로그나 sns는 안하시나요?
 
[세트] 웨이크 시리즈 - 전3권 - 꿈을 엿보는 소녀 + 끝나지 않는 악몽 + 최후의 선택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맥먼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웨이크' 시리즈는 미국의 여성 작가 리사 맥먼의 데뷔작이다. 첫 작품 'WAKE(꿈을 엿보는 소녀)'가 2008년, 그 다음 작품인 'FADE(끝나지 않는 악몽)이 2009년 그리고 2010년에 마지막 작품인 'GONE(최후의 선택)'이 나옴으로써 시리즈가 완결되었다.



 주인공은 제이니 해너건. 2005년 현재, 17살의 소녀다. 그녀에겐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의식이 멀쩡한 상태에서 남의 꿈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꿈을 엿보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한 번쯤 가지게 마련인 것으로 그렇다면 제이니는 꽤 운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능력엔 두 가지 단점이 있는데 하나는 들어가는 꿈이 대부분 악몽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꿈으로 들어가고 나오고를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길을 걸어가다 행여 근처에 누군가 자고 있기라도 하면 '휙' 그의 꿈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하고 차를 운전하는 도중에도 남의 꿈에 휩쓸리는 바람에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맞다. 제이니 해너건은 불우하다. 가진 능력만은 아니다. 사는 처지도 그러하다. 태어날 때부터 아빠는 없었고 엄마는 알콜 중독자다. 제이니가 늘상 보는 엄마의 모습이란 취한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런 엄마가 집안일을 제대로 할 리 없다. 제이니는 철이 들기도 전에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다. 거기다 가난하기까지 하다.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해야 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 공부하고 일해야 할 판에 느닷없이 남의 꿈으로 끌려들어가 그것도 악몽을 같이 체험하느라 다 까먹고 있다니. 만일 신이 불행을 염두에 두고 한 소녀를 빚는다면 제이니 해너건이 되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제이니는 누구보다 '삶'(이라는 세계)을 무겁게 여기는 존재다. 나에게 있어 '삶'이라는 세계는 전적으로 타자라고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서 나는 세계에 압도당할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세계를 압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리사 맥먼이 꿈을 다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제이니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휩쓸리는 타인의 꿈이란 어디까지나 제이니가 마주한 세계의 은유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그것이 또한 리사 맥먼의 의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부에서 제이니는 남들의 꿈에 그저 압도당할 뿐인데 그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제이니가 느끼는 세계의 중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제이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산다. 삶의 평정을 위해 분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만 자신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세계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는 삶을 전혀 주도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의 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거기다 제이니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데 그만큼 제이니 앞에 놓인 세계도 그녀에겐 정체불명이다. 그러니 제이니는 외로울 수밖에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으며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1권의 후반에서 제이니는 자신이 일하는 양로원 환자인 스투빈 부인을 통해 그런 능력을 '드림캐처'라 부르며 그 능력을 가진 이도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스투빈 부인은 장님으로 거의 죽은 듯이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제이니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남긴 편지에서 자신도 제이니와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제이니 앞에 점점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제어할 수 있는지 알게되는 기회가 많아진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부족하고 친구라고 하기엔 넘치는 남자 친구 케이벨과 경찰 서장을 통해서다. 알고보니 스투빈 부인은 그 경찰 서장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 자신의 능력을 경찰 수사를 위해 사용해왔던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해 제이니는 자신의 능력이 다만 저주는 아님을 알게되고 케이벨, 서장과 함께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간다. 동시에 서장에게서 건네받은 스투빈 부인의 노트를 통해 점차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발휘하고 제어하는 지도 배우게 된다.


 여기서 리사 맥먼이 꿈을 세계의 은유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제이니가 꿈에 대한 이해와 통제를 넓혀가자 거기에 발맞춰 현실 세계도 점점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2권은 바로 그런 제이니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여기서 제이니는 진정한 'WAKE', 즉 각성을 하게 된다. 세계에 대해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삶을 주도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불안과 의심은 여전히 남게 마련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만 바뀌었을 뿐, 세계의 본질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달리 본다고 해서 세계가 가진 어둠은 변하지 않는다. 2권에서 제이니가 마주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나이를 먹어 세계의 페이지를 뒤로 넘길수록 더욱 검다는 것을!

 과연 제이니도 스투니 부인의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이 불길한 예언은 그동안 꿈을 세계에 대한 은유로 써온 리사 맥먼에게 나 하나의 힘으로 결코 어쩌지 못하는 세계 앞에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바로 그것이 3권, '최후의 선택'이 가진 이야기다.


 그녀는 거기서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드디어 만나게 된다. 비록 의식불명으로 목숨도 오늘내일하는 상태였지만. 아무튼 놀랍게도 아버지도 '드림캐처'였다. 그리하여 결국 제이니 앞엔 선택가능한 두 개의 길이 놓이게 되는데 하나는 스투빈 부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 헨리의 길이다. 설령 비극적 운명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투니 부인처럼 적극적으로 세계의 어둠을 없애려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헨리가 제이니와 엄마를 버렸던 것처럼 내 삶의 평안만을 위하여 철저한 격리를 택할 것인가? 이 고민을 풀어가는 것이 바로 3권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비단 제이니만의 고민은 아니다. 얼마든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오늘 우리의 고민도 될 수 있다. 불법과 부조리가 흑사병처럼 창궐하는 세상에선 누구나 도대체 내가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게 마련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3권을 읽는다면 제이니의 고민이 좀 더 가깝게 피부로 와닿지 않을까 싶다.


 '웨이크' 3부작은 블랙 로맨스 시리즈 중 하나로 나왔고 그러니 물론 로맨스의 비중이 높다. 하지만 내겐 사랑 보다 내 앞에 놓인 불행한 현실, 세계의 어둠에 어떤 태도로 맞서야 하는가로 읽혔다. 제이니가 주로 보게 되는 꿈이 악몽이라는 사실이 주효했다. 그 악몽이란 게 대부분 타인의 무의식 저 깊이 숨겨 있는 트라우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원적 상처를 마주한 그녀이기에 제이니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게 들려왔다. 어차피 사랑도 타인과의 관계이니까 로맨스라고 해서 그런 주제가 엷어지는 것도 아니긴 하다.


 아무래도 문장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이야기보다 문장이 내겐 더 많이 눈에 들어왔는데 오로지 '~한다' 식의 현재형으로만 채워져 있다. 이런 문장만 있는 것은 처음인지라 참 특이했다. 미국의 범죄 수사 드라마처럼 '2006년 8월 10일 화요일 7:45 AM' 하는 식으로 단락을 구분한 것도 새로웠다. 묘사도 많이 절제하고 한 문장에 최소한의 정보만 담는 것으로 그쳤는데 그래서일까 소설 보다는 어떤 동향 보고서를 읽는 느낌이었다. 보고서가 소설 보다 현실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리사 맥먼은 그렇게 해서 독자들에게 더욱 강한 현실감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덕분에 쉽고 빠르게 읽힌다.


 결론적으로 뭔가 새로운 이야기,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을 만나고 싶었다면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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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인, 몸으로 부딪쳐! - 열혈 청춘을 위한 진로 이야기
강상균.조상범 지음 / 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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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로 결정에 대해서 의문이 하나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발적 선택이 많을까 아니면 타율적 선택이 많을까? '이거다!' 하고 확실히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후자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IMF가 결정적이 되어 진로가 더이상 자아실현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을 위한 안정된 기반 확보의 수단으로 바뀌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다. 솔직히 이제 진로는 다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그러니 더욱 마치 공장에서 규격화된 틀로 펑펑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저마다 비슷한 진로로 생각할 여지도 없이 뛰어드는 것이겠지.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수는 정해져 있고 원하는 사람은 많아 병목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은, 내 아이만은 그래도 다르리라는 전혀 입증되지 못한 가설에 매달린 채.


 하지만 이제 그것도 수명을 다했다. 그들에게 충분한 의자를 공급해 줄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률이 더이상 늘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이고 중소 기업이고 할 것 없이 낮은 채용률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시적 경기 불황에 따른 취업 한파면 좋겠지만 예측되는 사정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많은 전문가들이 이제 수출 보다는 내수 경제를 살리는데 신경써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무상 보육이나 의무 급식과 같은 복지 증진은 모두 그것을 위한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터널의 어둠이 더욱 깊어질 것만 같으니 병목 현상은 한층 심해질 것이다. 모두 같은 진로의 레이스를 달리고 있으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비싼 학원비와 등록금을 바쳐봤자 원하는 의자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개인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연줄이나 낙하산과 같은 개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일도 발생하여 열심히 달리는 이들을 힘빠지게 만든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자신의 딸을 5급 사무관으로 특채하여 고려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음서'라는 말을 부활시킨 것도 얼마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전히 같은 진로를 고집한다는 것은 거기서 치뤄야 할 엄청난 시간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생각할 때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제 '대마 불사'라는 믿음으로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기 보다는 뭔가 다른, 자기만의 진로를 모색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덤으로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여 애저녁에 잊혀졌던 '자아실현'까지 이룰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젊은 장인 몸으로 부딪쳐'는 그런 생각으로 읽게 된 책이다. 여기에는 '뭐야, 이런 직업도 있었어?'할 정도로 주위에서 잘 볼 수 없는, 그렇게 남의 진로와 닮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다섯 명의 장인들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제 노트를 만드는 장인, 길거리 포차를 운영하는 안주 요리의 장인, 자전거를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드는 장인, 경마 기수로 일하는 장인 그리고 한옥 시공만 전문으로 장인이 바로 그것이다. 예전에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경마 기수를 제외하고는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 모두 실제 인물들로 새삼 자신만의 신념으로 남들과 전혀 다른 길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이들이 많구나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신만의 진로를 가려고 생각은 하는데 막상 용기가 안난다면 혹시 이 책을 보면 필요한 용기를 얻을 지도 모르겠다. 책은 평균 이하의 성적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기엔 좀 위태위태한 고3 수험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처럼 되어 있다. 캐릭터 설정이 재미있고 그 어법까지 톡톡 튀어서 독특한 진로의 소개가 목적인 책이지만 꽤나 재밌게 읽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만 추구하지도 않는다. 한 꼭지가 끝나면 반드시 실제 모델이었던 사람과 그가 일하는 가게 혹은 블로그를 소개하거나 실제 인터뷰를 수록하여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 진로에 관심이 있었다면 더욱 마춤한 안내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책에서 다섯 장인이 입을 모아 한결 같이 말하는 것은 남들과 다른 꿈을 꾼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행복하다는 것도 누누이 강조한다. 물론 나름대로 성공했기에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실패하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다 그런 것이니 남들과 같은 길을 가다 실패한 것과는 그 마음의 상처가 많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가려고 하는 길이 나만은 다를 것이라는 가설에 기대지 않고 객관적으로 따져보니 시간과 비용 대비 득보다 실이 많다면 다른 길도 하나의 가능성으로써 고려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럴 때 벗하면 좋을 것 같다. 유쾌함과 진지함을 잘 버무려 진로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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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우스 - 토벨라의 심장
디온 메이어 지음, 이승재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소설의 시작은 1984년의 파리.

미국 CIA의 최고 암살 요원 도플링을 뒤쫓는 그림자가 하나 있다. 그러다 둘은 인적 없는 거리에서 맞붙는다. 총이 아닌 칼로. 결국 도플링은 추적자의 손에 죽고 죽어가는 그를 보며 추적자인 흑인은 말한다.

 "어디로 갈 거지? 알고 있나?"

 

  '프로테우스'는 (스릴러 장르에 한정한다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 디온 메이어의 작품이다. 본문만 606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볼륨을 자랑하는 이 책은 인용한 마지막 대사처럼 어디로 가는 이야기다. 영화로 치자면 로드 무비에 가깝다. 추적자 흑인이 주인공이다. 이름은 토벨라. 냉전 시절, 소련의 최고 암살 요원으로 활약했던 토벨라는 피와 어둠에 물든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살기로 결심한다. 이 계기는 전작인 '오리온'에 나와있다. 프로테우스는 굳이 오리온을 읽지 않아도 즐기기엔 무리가 없으나 연대기적 순서를 중시한다면 아무래도 오리온을 먼저 읽고 프로테우스를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하튼 BMW의 바이크 가게 점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토벨라는 우연히 한 눈에 반한 여인, 미리암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아들 파카밀레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진정한 제2의 삶을 가지려 한다. 그를 위해 그는 오래도록 자신의 염원이었던 농장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과거의 어둠은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옛날에 빚을 졌던 한 인물, 조니 클레인티에스가 납치 당하고 그를 구하고 싶으면 그가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던 하드 디스크를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그 임무를 그가 맡게 된 것이다.

 무려 600KM에 이르는 거리를 72시간 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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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 먼 곳을 왜 당신이 가야 하느냐고 미리암이 묻자, 토벨라는 말한다.

 

 "난 이 일을 안 할 수 없어."

 "안 할 수 없다고? 당신은 그럴 의무가 없어. 그냥 안 된다고 대답하면 될 일이잖아. 그냥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 당신은 빚진 거 없어."

 "난 조니 클레인티에스에게 신세를 졌어." 그가 되풀이 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했잖아. 그 생활을  깨끗이 청산했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맞아. 그렇게 말했어. 내 마음도 그렇고. 그건 달라지지 않았어. 당신 말이 맞아. 싫다고 말할 수 있어. 그건 내 선택이니까. 그리고 난 옳은 선택을 해야 해. 난 정당하고 옳은 일을 해야 돼. 미리암. 날 명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줄 일 말이야. 그건 정말 내리기 힘든 결정이야. 언제나 힘든 결정이라고.(...) 조니 클레인테스에게 진 빚은 남자 대 남자의 명예가 걸려 있는 거야. 명예는 단지 당신과 파카밀레를 돌보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집에 와서 정직한 일, 평화로운 일을 하는 게 다가 아니야. 신세를 졌으면 갚아햐 하는 게 명예야."(P. 55)

 

 명예다.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져버릴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그 먼 거리를 홀로 갈 수 있도록 만드는 추진력은 바로 명예인 것이다. 보통의 명예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하지만 토벨라의 명예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오로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명예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리 차일드의 잭 리처를 닮았다. 사실 토벨라는 여러모로 잭 리처와 비슷하다. 거구에다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가공할만한 전투력까지 겸비했으니. 흑인 잭 리처, 남아프리카공화국판 잭 리처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사실 지금 토벨라 앞에 놓인 길은 리처만한 능력이 없으면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그 하드 디스크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고 기밀 사항이 담겨 있었고 이미 토벨라가 부탁을 받았을 때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부의 감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부는 하드 디스크를 회수하기 위해 토벨라를 붙잡으려 한다. 공항에서 1차 시도를 했으나 토벨라의 전적을 몰랐기에 실패한다. 이제 토벨라는 간선 도로가 그물망처럼 펼쳐진 육로를 택한다.

 무려 600KM에 이르는 거리를 BMW GS 바이크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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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그 길은 과거의 인연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그 여정이란 토벨라가 버렸던 과거로의 귀환이기도 하다. 제2의 삶을 살기 위해 꼭꼭 봉인해 두었던 기억 속을 달려가는. 즉 '회상'의 여정인 것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이란 책에 따르면 기억과 회상은 다르다고 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일을 재현하는 것이지만 회상은 본질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환기, 재형성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토벨라의 여정은 바로 그런 회상의 여정이다. 그냥 지워버리기만 했었던 과거의 자신과 진정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새로운 삶에 걸맞는 정체성을 다시금 형성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부활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멸시켜야 하는 불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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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바로 '프로테우스'라는 제목 자체에서 드러난다. 프로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이 신은 특히 자신을 마음대로 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토벨라의 유일한 친구이자 전작 '오리온'의 주인공 판 헤이르던은 토벨라를 '프로테우스'라고 말한다. 토벨라가 '끝이라고 끝! 전투도, 폭력도, 총도 싸움도, 증오도 끝이라고! 증오 같은 건 끝이야, 정말 싫어, 끝!'이라고 말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고 했을 때 한 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세상에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네야."

 판 헤이르던은 마치 자기 자신의 사활이 걸린 문제처럼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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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우스의 모습

 

 하지만 판 헤이르던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그는 인간은 프로그래밍된 존재로 결코 달라질 수 없다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새출발? 그런 건 없다는 것이다.

 

 난 인간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고 생각지 않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정도야.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거지. 왜냐하면 엄연히 존재하는 거니까. (...) 우리는 선이 칭송받고 악이 배척받는 세상에 살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관점을 달리하는 것뿐이야. 천성을 바꿀 수는 없다고."(p. 245)

 

 여기에 대해 토벨라는 '그렇지 않아'하고 반박한다. 판 헤이르던은 성악설에다 비관론자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토벨라는 성선설에다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둘은 뚜렷이 대비된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하나 생긴다. 디온 메이어는 왜 주인공들을 이렇게 판이하게 설정했을까? 이것은 '오리온'과 '프로테우스' 작품들만 가지고 풀 수 없는 의문이다. 제대로 헤아리려면 보다 외연을 넓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와 현실을 가져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오리온'과 '프로테우스'를 'POST MANDELA NOIR' 라고 부르고 싶다.

 

 만델라의 집권으로 오래도록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고통 받게 했던 아파르트헤이트는 종식되었다. 만델라의 집권은 특히나 차별받고 있던 대다수 흑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으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빈부의 격차는 여전했고 사회 부조리의 만연도 변함 없었다. 흑인들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대표를 뽑고 이제 그 흑인 관료들이 백인보다 훨씬 많아지기까지 했으나 대다수 흑인의 삶은 계속 비참하고 불안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으로 뽑은 흑인들이 예전 아파르트헤이트 때의 백인들과 똑같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챙길 뿐 같은 흑인 민중의 이익을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인종차별 대신 극심한 계층 차별이 존재하고 미래가 가로막힌 이들의 증가로 인해 범죄가 만연하고 있다. 만델라의 집권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이 오래도록 바랐던 꿈이었지만 그것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것은 없었다. 전혀. 바로 여기에 판 헤이르던은 절망한 것이다. 그의 절망, 결정주의, 비관론은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 현실의 반영이다.

 

 거기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토벨라는 말하자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이다. 즉 좋게 될 가능성과 희망의 긍정이다. 디온 메이어는 바로 그 시선을 '프로테우스'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며 정말 토벨라의 말대로 되려면 무엇보다 '프로테우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변화의 긍정이다. 그러고 보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보인다. 그것은 토벨라의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들에 대한 것인데, 그러니까 주로 비밀정보부의 사람들, 그들에게 모두 변화를 거부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토벨라를 함정에 빠뜨린 멘츠부터 토벨라의 라이벌이라고 할만한 마지부코 대위까지 대부분 현재에만 집착하고 자신과 다른 것,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자신과 다른 것은 오로지 제거의 대상일 뿐이며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 조차 보다 더 가열찬 통제의 필요성만 더욱 부각시킬 뿐이다. 토벨라는 바로 그런 존재들을 돌파하여 자신의 길을 여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것이 현재도 희망이 불투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하여 디온 메이어가 제시하는 대안이다. 그 진정한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은 대목에서 여실히 나타나 있다.

 

 토벨라 음파이펠리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로 스며들었다. 검은 하늘에 뜬 환상적인 보름달, 자유주의 대평야, 화려한 달빛에 반짝이며 끝없이 펼쳐진 초원, 여기저기에 어둡게 드리워진 가시나무 그림자, 오토바이 전조등을 따라 눈앞에 나타난 도로. 그는 오토바이를 느끼고, 자기 자신을 느꼈다. 아프리카 대륙이야말로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거센 강물처럼 넘실거리며 그를 이리저리 이끄는 삶이 느껴졌다.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왜냐하면 강렬하고 완벽한 것일수록 이 세상에선 너무나 덧없고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P. 411 ~ 412)

 

 결별해야 할 것은 아집의 자신이다. 희망과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방조가 진정 헤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한다면 행동하라, 빛이 없다면 만들어라!' '프로테우스'의 변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모토다. 토벨라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판 헤이르던은 토벨라를 무엇보다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명예의 중시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삶은 매 순간 선택이며 명예는 오로지 행동으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긍정도 바로 그 행동을 위한 거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해야 한다. 디온 메이어는 그것을 위해 토벨라를 도와주는 많은 인물들을 집어 넣는다. 그들은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해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선의로, 형재애로 토벨라를 도와준다. 이런 장면들 때문에 토벨라의 여정은 더욱 구원의 색채를 띤다.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디온 메이어는 다른 소설에 비해 더 많은 역량을 쏟아 부었다고 밝혔다. 토벨라가 속한 코사 부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했고 이스턴 케이프에 위치한 코사 부족의 심장부를 누비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몇몇 코사 부족 친구들과 장시간에 걸친 토론을 비롯해 길을 가다 만나는 모든 코사 부족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디온 메이어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자신이 창조하고자 하는 토벨라가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토벨라는 디온 메이어에게 전적인 타자였다. 그는 그 전적인 타자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하여 그만한 노력을 한 것이다. 덕분에 토벨라는 아주 생생한 인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디온 메이어의 작업이 '프로테우스'의 주제를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본다. 들뢰즈에 따르면 무언가에 대한 글쓰기란 어디까지나 '타자-되기'다. 강아지에 대해 쓰면 '강아지-되기'고 노예에 대해 쓰면 '노예-되기'다. 이 말을 수용한다면 타자에 대한 글쓰기란 그 자체가 '프로테우스'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변신하는 것이다. 자신의 벽을 기꺼이 허물고 그를 닮아가는 것. 디온 메이어는 스스로 그것을 잘 보여 주었다. 덕분에 '프로테우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실까지 감안하여 판단하건대 더욱 흥미롭게 읽을만한 작품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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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03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바뀔 수도 있고 바뀔 수 없기도 하겠죠 이건 사람마다 다른 듯합니다 그래도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바뀌게 할 수 없지만 자신이 바뀌는 건 할 수 있겠죠 바뀐다고 하니 장 발장이 생각나네요 장 발장이 바뀐 건 바뀔 기회를 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군요 토벨라도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신세를 졌다고 하니... 그러고 보니 다른 책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군요 누구한테나 그런 만남이 찾아올까요

행동하면 안 좋은 것을 바꿀 수 있겠죠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바라는 일이 이뤄졌다 해도 그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기도 한 듯해요 하나가 바뀐다고 모두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희선

오드득 2015-04-17 23:49   좋아요 0 | URL
결국 선택 가능한 길은 두 가지로 귀착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설 것인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오리온과 프로테우스의 길인 것이죠. 작가는 우리나라처럼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조국의 상황을 두 작품을 통해 다 헤아려 보려 했던 것 같아요. 모두가 바뀌는 건 어렵지만 그래도 작은 변화라도 일으키면 그것이 희망이 되어 좀 더 오래 버틸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그런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한 쪽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