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 : 주사위는 던져졌다 레오나 시리즈 The Leona Series
제니 롱느뷔 지음, 박여명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최근 스웨덴 산 노르딕 느와르는 다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에 읽은 에밀리에 셰프의 '마크드 포 라이프'도 그랬는데, 이번에 나온 제니 롱느뵈의 '레오나'도 그러하다. 지킬과 하이드 처럼 법과 불법 사이의 묘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을 주인공으로 그린다. '마크드 포 라이프'의 경우, 주인공은 어릴 때 세뇌되어 암살을 한 과거가 있다. 현재 그녀는 그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져 법을 수호하는 검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잊혀졌던 과거가 점점 현실로 고개를 쳐드는 일이 발생한다. '레오나'의 경우는 형사다. '마크드 포 라이프'의 주인공과는 다르게 남편과 자녀도 있다. 겉으론 가장 안정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녀는 심한 도박 중독자다. 그것도 영화 '타짜'에서 딸의 수술비를 도박으로 날렸던 교수처럼 아들의 수술비마저 도박으로 탕진할만큼 중독이 심하다. 때문에 그녀는 날마다 남편이 잠들면 몰래 일어나 데스크탑으로 가서 온라인 포커를 친다. 낮에는 법을 수호하고 밤에는 불법을 자행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킬과 하이드로 부를 수밖에. 




 결국 도박 때문에 그녀는 끔찍한 범죄까지 감행하고 만다. 우리는 이 소설의 처음에서 심하게 학대 받은 아이를 통하여, 아이가 지닌 미리 녹음된 테이프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아이가 더 심한 학대를 받을 것이라고 은행원에게 협박하여 돈을 가져가는 것을 본다. 너무나 잔인한 수법의 범죄라 이 사건은 삽시간에 스웨덴 전역의 관심을 모은다. 바로 이 수사를 레오나가 맡는다. 그러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레오나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주인공 보정을 받기 힘들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녀는 살인까지도 저지르지 않는가!


 정의감이 투철한 독자에겐 인내를 요구할 수 있는 소설이다. 더구나 레오나는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양심 상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오직 문제가 있는 것은 그녀 뿐이다. 바로 도박. 그것을 계속하기 위해 그녀는 거짓말을 반복하며 주위 사람들을 속이고 어린 아이마저 범죄에 이용한다. 남편은 그저 필요하기 때문에 부부로 있는 것 뿐이며, 아이들만은 사랑의 감정을 다소 느끼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만큼 자신의 욕망에 더없이 충실하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 뿐이다. 그녀 스스로도 보통 사람들이 공감이라 부르는 감정들이 차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주인공의 면모 때문에 이 소설은 더없는 독특함을 가진다. 이런 여성 주인공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르 소설에서 등장한 악녀 중에서도 상급이라 할 만하다. 대개 주인공이 악녀일 경우 악행을 저지르는 데 있어선 그래도 뭔가 대의라고 할 만한 게 있었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자식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레오나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녀는 가정을 기꺼이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 한다.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돈을 챙겨 도박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나라로 홀로 떠나는 것이 목적이다. 너무나 색다른 모습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뭐, 그렇게 만드는 동기는 어쩌면 상반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레오나가 어서 처벌 받는 것을 보려고 읽을 것이며, 누군가는 레오나가 어떻게 법망에서 벗어나는지 보기 위해 읽을 것이다. 또 어떤 누군가는 여성 주인공이 너무나 정도를 벗어났기에 페미니즘적 입장으로 읽으려고도 할 것이다. 보통 악녀라는 낙인은 가부장제 사회가 정한 상궤에 벗어나는 여성의 이마에 찍혀지므로 악녀는 페미니즘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존재로 많이 여겨졌다. 레오나 역시 아이에 대한 것이나 자식에 대한 것이나 모두 전통적인 여성상에 극명하게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페미니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유혹을 많이 받게 된다. 그런데 이 악녀의 형성은 바로 가부장제의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레오나는 어려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차별을 많이 당했다. 아버지는 철저하게 남자인 오빠만을 위했고 레오나가 그 서열에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곧장 지하실에 홀로 가둬버렸다. 그 때의 경험은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녀는 늘 무의식의 공포로 자리잡은 지하실의 격리와 어둠으로부터 달아나려 애쓴다. 그녀가 경찰이 되고자 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다시는 자신을 가뒀던 그 질서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키는 자가 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박 중독이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균열을 일으킨다. 알고 보면 그녀에겐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욕망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아버지와 같은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것은 바깥에서 강요로 주입된 욕망이다.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도박 중독은 순전히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난, 오직 자신만의 것이다. 도박 충동,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독립된, 고유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그녀가 형사와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 보다 더 남성 사회에 편입될 수록 마치 거기에 반발하듯, 도박 충동이 거세지는 것도 그렇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한 편, 아버지와 레오나의 관계는 다시 아빠와 올리비아의 관계로 반복된다. 올리비아는 사실 어린 시절 레오나의 분신이다. 재밌는 것은 반복된 올리비아와의 관계에서 레오나가 엄마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오나는 이중적이다. 올리비아를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배에 거듭 종속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레오나에게 왜 이런 이중적 지위를 가져다 준 것일까? 그러고 보면 형사로서의 레오나도 그렇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레오나도 그렇고 다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아직 이것의 의미는 내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데 이야기가 좀 더 진전되면 분명해지지 않을까 한다. 현재 나온 레오나의 이야기는 삼부작 중 1부에 불과하다.


 레오나 외에 다른 인물까지 눈을 돌리면 페미니즘적으로 볼 여지는 더욱 많아진다. 일단 여자 검사 니나가 그러하다. 그녀는 처음에 원칙주의자로 나오는데, 소설 중반에서 레오나의 유혹에 넘어가 레오나와 한 편이 된다. 바야흐로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에서 가장 멀리 달아난 '악녀들의 연대'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남성 중심의 사회 또는 가부장제 질서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두 여성 약자들의 모습은 악녀가 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의 유화적 혹은 타협적인 제스쳐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여성 약자들이란, 하나는 범죄에 이용되는 학대 받는 어린 여자 아이 올리비아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 권력자들에게 비인간적인 착취를 당했던 매춘부 디나이다. 올리비아는 주로 아빠에게 당하는 소외와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것은 그대로 사회의 가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 관료들에게 당하는 디나의 고통과 이어진다. 그런데 그런 디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게 뭔지는 내가 더 잘 알아요. 뭐 하나라도 변화시킬 수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 처지에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어요. 결국은 내가 똥물을 뒤집어쓰고 말 테니까. 젠장, 지금 이 문제를 놓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요.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고요."(p. 355)


 디나는 남성 중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뭐든 해 봤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소용 없었다고 고백한다. 오히려 자신이 당했다고. 디나의 행위엔 오직 하나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악녀가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디나의 절망이 악녀들의 연대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디나가 말한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다. 문득 이와 비슷한 말을 들려주었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바로 '에이리언'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다. 델마와 루이스는 평범한 주부로 그들끼리 여행을 떠났다가 남성들의 부당한 처사를 경험하고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결국 그들은 범죄자가 되는데, 그것은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여성상에서 가장 멀리 벗어난 모습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들이 남성 중심 사회와 결코 타협하지 않고 차로 절벽에 뛰어드는 장면이다. 리들리 스콧은 절벽에서 벗어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화면을 멈춰 그들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해방의 비상을 하는 것이라 암시한다. 나는 레오나와 니나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섣부른 단정일 수 있다. 아시다시피, 지금 읽은 '레오나'는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된 것의 첫 부분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지금 내가 한 말은 완전히 허황된 것으로 판명날 수도 있고, 들어맞을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그 최종 확인을 위해서라도 얼른 3부까지 출간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의 시대는 끝났다 - 우리 시대 페미니스트 4인의 도발적 젠더 논쟁
해나 로진 외 지음, 노지양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2012년, 한 권의 책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해나 로진이 쓴 '남자의 종말'이란 책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되었는데, 그 책에서 해나 로진은 지금 사회가 가부장제에서 가모장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남자의 시대가 곧 종언할 것이라 내다 보았다. 아무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가지 통계들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증명했기에 첨예한 논쟁이 뒤따랐다. 이것을 캐나다의 유명한 토론 프로그램인 멍크 디베이트가 놓칠 리 없다. 즉각 해나 로진의 책을 가지고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초빙하여 토론을 벌였다. 때는 2013년 11월 15일. 장소는 토론토.


 3,000개의 유료 객석이 전부 매진된 가운데 그 많은 방청객들을 앞에 두고 네 명의 논객이 남성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 내다보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서로 편을 갈라 젠더를 주제로 한 멍크 디베이트가 진행되었다. 내다 보는 쪽엔 '남성의 종말'을 쓴 장본인인 해나 로진과 모린 다우드(클린턴 섹스 스캔들과 관련해 쓴 칼럼으로 퓰리처 상을 탔고, '남자가 꼭 필요한가?'란 책을 쓴 바 있다.)가 편을 먹었고, 반대하는 쪽엔 커밀 팔리아(예술 종합 교육 대학 교수에다 사회평론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을 스탈린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녀는 현대 주류 페미니즘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을 '안티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칭한다. 이미 그녀의 첫 저서, '섹슈얼 페르소나'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뜨거운 찬반 양론을 일으킨 바가 있기도 하다.)와 케이틀린 모란(패널 중 유일하게 영국의 페미니스트로 그 곳에선 '괴짜 페미니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진짜 여자가 되는 법(이 책 개인적으로 추천!)'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바 있는데 여성성을 말하는 데 있어 꽤 대담하고 별명처럼 페미니즘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맑시스트라 부른다.)이 편을 먹었다.



 '멍크 디베이트'의 책들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는 모던 아카이브에서 나왔다. '사피엔스의 미래'와 '감시 국가'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구성은 먼저 왜 이런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지 이유를 소개하고 그 뒤에 실제 토론한 내용들이 나오며 그 후엔 패널들이 토론 전 인터뷰한 것과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자 남성 차별도 여성 차별만큼 중시해야 한다는 에쿼티 페미니스트(케이틀란 모란이 바로 이 입장이기도 하다.)인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진화하는 결혼(이 책도 개인적으로 추천!)'의 저자 스테파니 쿤츠가 토론에 대해 논평한 것을 마지막에 싣는 것으로 되어 있다.


 토론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다소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토론은 직접 들을 때라야 비로소 그 의미의 파악도, 평가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분위기만이라도 짐작할 수 있도록 무모하지만 소개라는 것을 시도해 본다면,


 일단 토론의 포문은 토론의 대상이 '남자의 종말'이기 때문에 그것을 쓴 해나 로진이 먼저 연다. 그녀는 미국과 캐나다의 실상을 통하여 현재 역사적으로 정의해온 전형적인 남성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첫째, 남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둘째, 교육에 있어서도 한 개 대륙을 제외하고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는 이들의 60% 이상이 여성일 정도로 남성이 실패하고 있으며 셋째로, 남성이 주요 소득자인 전통적인 가정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고(이것은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폭력성과 공격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든다.


 서민층 남성들은 직업을 잃고 자신의 역할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있어요. 여성들이 혼자 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과거 마초들의 본거지였던 곳, 전통적 가치가 중시되던 이 나라의 일부에서 이렇게 가모장제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제가 여성들에게 묻습니다. "왜 아이들 아버지하고 살지 않으세요?" 그러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요. "집에 입 하나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아서요."(p. 36)


 한 마디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남성성이 급격하게 퇴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녀는 이제 남자들도 체모에 엄청 집착하고 있으며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든다.


 이에 반론을 펼치는 커밀 팔리아는 이러한 남성성의 퇴조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는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제조업이 쇠퇴하고 금융과 서비스업이 중심이 된 지식 사회가 되면서 육체 노동을 경시한 결과로 해석한다. 


 지식인 사회가 남성성과 남성다움을 일상적으로 모욕하면 앞으로 여성들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고 헌신과 희생을 존중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포용할 만한, 또는 반체제적인 레즈비언이 거부할 만한, 강한 남성성이 없다면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중심이 잡히고 깊이가 있는 감각을 깨닫기 어려울 것입니다.(p. 41)


  그녀는 페미니즘의 적절한 임무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광범위한 차별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경직된 사회 관습을 공격하고 재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을 편견에 가두고, 하찮게 취급하며, 악의 근원이라고 비난하지 않고도 진보적인 개혁 운동을 펼치는 것은 과거에도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미국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의 책과 글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좌파의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부르조아의 가치와 문화의 특권을 감싼다는 점입니다.(내가 정희진의 글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콕 꼬집고 있어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라웠다.) 중산류층 엘리트들의 사무 능력이나 경영 능력만을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자 인류의 궁극적인 혁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p. 43)


 특히 커밀 필리아는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라 그런지 현재 교육 체제를 많이 공격한다. 이런 교육 체제가 육체 노동 경시 경향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면서 독일처럼 다양한 직업 훈련을 실습할 수 있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토론자로 나선 모린 다우드는 남자다움의 기준이 이미 변해버렸으며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남자나 여자나 양성적인 특성이 존중되는 중성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만 있어요. 왜냐하면 남자다움이라는 기준이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면서도 집에서 살림하고 애 보는 남자는 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죠.(p. 50)


 그러면서 이미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밝힌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앞으로 10만 년에서 천만 년 사이에 지구에서 남자들이 사라질 것이라 예측한 바 있는데 그 이유가 남성 염색체인 Y 염색체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한 마디로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정규 교육은 하나도 받지 않고 오직 집에서 홈 스쿨링을 한 덕분에 생각에 있어서 더욱 자유분방한 케이틀린 모란은 자신의 페미니즘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첫째, 꽥꽥거린다. 둘째, 칵테일을 연료로 한다. 셋째, 맑시스트다.(책에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실은 일본식 표현이므로 원래 표현에 맞게 '맑스'로 고친다.)(p. 56)


 자신은 친여성도, 친남성도 아님을 밝힌 다음, 남성과 여성 모두 공존, 공영(共榮)해야 할 존재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남자나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바라볼 것을 역설한다.


 고통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했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선물하는 근사한 사치품이 아닙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고급 캐시미어 수면 양말이 아닙니다. 평등이란 인류에게는 공기나 물과 같은 필수 요소입니다.(...) 페미니즘이 남녀는 평등하다는 간결하고도 진실한 명제라면, 우리는 미래에 그 명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도와 평등을 쟁취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고, 여성들이 남성이 평등을 쟁취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겠지요.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남자 문제' 혹은 '여자 문제'로 분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모든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시 말해 '인류 공통의 문제'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p. 58)


 이제 겨우 책의 3분의 1만 소개했는데도 글이 이렇게나 길어졌다. 어쨌든 이것으로 대략 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해나 로진은 서민 계층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가모장 가정의 증가를 '남자의 종말'에 대한 중요한 징후 중 하나로 해석했는데 거기에 대해 커밀 필리아는 엘리트 계층과 하위 노동자 계층 사이의 불평등한 임금 구조와 사회 양극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문제는 남자들만의 문제로 볼 수 없고 그러한 것을 낳는 경제 구조를 바꾸는 사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 해나 로진도 동의하며 육체 노동이 주가 되는 분야의 임금도 지식 노동만큼이나 제대로 평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커밀 필리아는 더 나아가 교육 제도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이뤄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남성성이 결코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여성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나는 미국이 아직도 무급 출산 휴가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무급 출산을 유지하는 나라가 세 나라인데 그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스웨덴 역시 1년 동안 유급 출산 휴가를 여성에게 주긴 하지만, 특정한 행동만 하도록 압박하고 있어 문제라고 한다. 해나 로진에 따르면 스웨덴이 미국보다 여성들의 일터 환경이 더 불평등하다고 말한다.(헉! 스웨덴이 그럴수가! 조금 충격인 걸.) 마일리 사이러스에 대한 찬반 논쟁(아, 물론 여기서 토론의 대상이 된 마일리 사이러스는 정확히 2013년 8월 이후의 것이다(책에는 안 나와 있기에 굳이 밝힘.))을 통한 여성성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것 혹은 나는 어느 편에 서는가 하는 것을 밝힐 시점인데, 나는 그것을 전문가 논평에 나온 스테파니 쿤츠의 말로 대신하려 한다. 


 남자는 퇴물이 아니다. 남자가 퇴물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욕구와 능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성의 부상이 남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주장일 뿐이다. 케이틀린 모란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지금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여성이 평등한 사회를 살아갈 때 여성의 파트너와 그 아들들, 형제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p. 191)


 같은 전문가 논평을 한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는 이 토론을 논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으며 재기발랄하기 이를 데 없는 네 명의 여성들이, 음울하고 매사 발끈하며 '강간 문화(강간이 만연하고 사회에서 용인되는 환경)'에만 집착하는 현대 페미니즘 프레임에서 벗어나 젠더 정치를 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시길 바란다. 이번 멍크 디베이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남자와 여자 모두 한발 더 나아갔다.(p. 185)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가 언급한 '강간 문화'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현대 페미니즘 프레임이란 말마따나 때로는 그 사안이 모든 페미니즘의 생산적 논의를 다 잡아먹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젠더 정치를 보다 폭 넓은 시야로 봐라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들 하나같이 말빨도 좋고 내용도 쉬워서 더욱 그렇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7-07-2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산 문제는 남성의 비협조 문제만이 아닌 정부측의 국가적 압제가 많다고 생각해서 남성의 인식이 향상되어 개선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임금 격차부터 줄여 나가야 겠지요. 그게 출산과 육아 이후의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요.

오드득 2017-07-25 03:52   좋아요 1 | URL
저도 전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국가가 먼저 유급 출산 휴가를 장려하여 업무 환경을 적극 바꿔나가야죠. 어떤 책에서 봤는지 얼른 기억 나지 않는데, 사람은 많이 보고 낯익은 것에 대해선 관대해져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때문에 동성애의 경우에도 커밍 아웃을 보다 많이 하여 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노출되는 게 낫다고 하더군요. 출산 휴가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쪽으로 국가의 선도적인 제도 마련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치매만큼 무서운 것도 또 없는 것 같다. 다른 병들은 비록 육신이 고달퍼도 자신의 영혼만은 그대로다. 내가 누구인지,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과의 기억,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추억 등은 고스란히 남아 오히려 병으로 인한 통증과 절망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치매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육신은 멀쩡해도 그 멀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영혼은 없는 것이다. 거울을 봐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날 아끼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도, 지금 나를 보는 그들의 아픔도 알 수 없다. 육신이 아픈 자들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고 그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서 회자정리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치매는 삶을 정리하기는 커녕 죽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죽는다. 치매 걸린 이에게 허락된 것은 느닷없는 종결 뿐이다. 적어도 그의 입장에선 그렇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치매가 가장 무섭고 끔찍한 병이 아닐 수 있을까?



 당신에게 조금은 뜬금 없을 지도 모를 치매의 이야기를 한 것은 최근 이와 관련한 책을 하나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이다. 바로 '오베라는 남자'로 우리에게도 제법 유명해진 프레드릭 배크만이 지은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라는 책이다. 노인 전문 작가답게(지금까지 그의 소설이 네 권 나왔는데 주인공이 모두 노인이다. 그러니 이렇게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도 할아버지인데, 이 할아버지가 그만 치매 환자인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다. 차츰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라는 소설 제목은 사실 주인공 할아버지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 전에 할아버지는 귀여운 손자에게 인생에 관한 소중한 교훈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을 할아버지가 된 자로서의 의무요, 손자를 향한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 여긴다. 자신의 삶과 손자를 기억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절박함까지 여기엔 가미되어 있기에 예쁜 삽화도 많고 문장은 담백하며 내용은 우리에게도 아주 이로운 교훈들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대화들이 애처롭게 다가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시간 앞에서 속절없이 노쇠해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겨우 160페이지의 적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읽는 시간은 한 3배 정도 더 걸리는 듯한 느낌인데, 그것은 이야기의 어떤 한 순간, 문득 느껴버린 삶의 둔중한 울림에 다소 마음이 먹먹하여 한동안 서성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엔 그런 말들이 있다. 일단 멈춤 표지판을 본 자동차처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말들이... 


 '여기는 내 머릿속이란다, 노아노아.

 그런데 하룻밤 새 또 전보다 작아졌구나' (p. 43)

 '그렇지, 노아노아야, 그렇지. 위대한 사상은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법이란다.' (p. 63)

 '네 발이 땅에 닿을 때쯤 이 할애비는 우주에 있을 게다, 사랑하는 노아노아야.'

 '우리 작별하는 법을 배우러 여기 온 거예요, 할아버지?'(p. 73 ~ 74)

 '나는 계속 한 페이지가 없어진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p. 85)

 '주머니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기분. 처음에는 사소한 걸 잃어버리다 나중에는 큰 걸 잃어버리지. 열쇠로 시작해서 사람들로 끝나는 거야'(p. 103 ~104) 등등...


 어조가 격렬하지 않아서, 그 담담한 어조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기에 더 슬프게 다가오는 말들. 그리고 슬픔의 끝에서 나의 삶은, 나와 사람들은 어떤가를 되새겨 보게 하는 말들. 그 말들로 인해 나는 목초지에 방목된 말처럼 고개를 늘어뜨리고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일렁이는 말들의 물결 속에서.


 나와 아주 가까운 분이 지금 치매에 걸려 있다. 벌써 한 4, 5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분이 많이 생각났다. 치매는 당하는 사람보다 지켜보는 사람을 더 많이 힘들게 만드는 병이다. 그토록 눈부셨던 영혼이 하루가 다르게 그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격렬한 슬픔이, 때로는 한없는 무력감이, 때로는 가없는 자책이 또 때로는 그렇게 속절없이 빛을 잃어만 가는 것에 대한 원망이 동반되는 과정이다. 소설을 읽으며 많은 날들이 생각났다. 그 날 중에 밝게 채색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소설 속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이 할아버지처럼 완전히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당신의 영혼과 인생에 대해서 내게 보다 많은 말을 들려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또 자책했다. 그렇게 되시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에게 말을 걸어 더 많이 알았어야 했는데 하고.


 어쩌면 나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오래 읽은 것은 말 때문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실은 그동안 너무 무신경했던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계속 곱씹어져 읽는 걸음을 주저 앉게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소설의 제목이 정녕 진실이라 여긴다. 우리네 삶은 정말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을 잊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지금 커다란 후회가 되는 일을 해 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 그렇게 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 사랑에 걸맞는 관심을 표현하고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너무 뒤늦은 후회는 그 시간만큼 깊고도 짙은 아픔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적인 무더위다.

 더위에 약한 나는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집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현관문에 다다른 내 기분은 아주 힘겹게 42.195KM를 완주한 마라토너와 다르지 않았다.

 땡볕 아래 한창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진배없는 몸과 마음이 그저 바라는 것은 내일이라는 시간이 가급적 늦게 찾아오는 것 뿐인.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일이 줄어든 것도 아니요, 더위가 한풀 꺾인 것도 아니건만, 요즘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로 이것,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둥!! 오랜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전권이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근사한 외관으로 강림해 주었다.

 사진은 정면으로 본 모습이다.

 발간되기를 너무나 기다렸던 아이템이라, 이것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절로 보름달을 본 늑대처럼 크고도 긴 하울링이 나왔다.

 하여, 배경의 사진을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으로 선택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당시에 '핑크 플로이드' 그룹 멤버로 유명한 로저 워터스의 '더 월' 라이브 공연 현장 사진으로

 솔직히 지금 내 기쁨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의 기쁨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박스 옆면의 모습이다.

박스에 마치 번진 핏자국 같은 무늬가 있는 것이 보인다. 나중에 보겠지만 책 표지에도 이와 동일한 것이 있는데,

아마도 책에 있는 무언가(피? 아니면 꿈의 노래?- 이 정체는 직접 읽어서 확인해 보실 것!)가 바깥가지 넘쳐 흐른다는 컨셉인 것 같다.


여기는 반대쪽 옆면. 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무려 66,000원!! 출혈이 컸다만(ㅠ ㅠ),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을 볼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누구는 게임기 켠 김에 왕까지 간다고 하는데,

나는 찍는 김에 위까지 찍는다. 요모조모 다 뜯어보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기에...

박스 위에도 어김없이 흘러 넘친 자국이 있다.



 이제 웬만큼 외관을 감상했으니, 드디어 실물을 받아든 소감을 술회해보려 한다.

 너무나 고대했던 것이라 자못 격정적이 되어도 이해해 주시기를...


  아아... 이 걸작선이 나오기를 기다렸던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은 2008년이었다. 그러니까 한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즐겨 구독하던 '판타스틱'이란 장르 문학 전문 잡지가 있었는데, 2008년 1월호의 '분야별 단신'에서 이렇게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네모 칸 안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엔 단편집이라고 되어 있으나 '샌드킹'이나 '스킨 트레이드' 같은 중편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선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다른 책일 수도 있지 않겠나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글에 분명히 'DREAMSONGS'라고 하고 있으니 이 책이 맞다. 이번에 나온 걸작선 표지를 보면 제목 아래 분명히 '꿈의 노래(DREAMSONGS)'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부터 나는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을 정말 우리말로 읽게 되기를 학수고대 했다는 것이고 무려 십년만에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려운 출판사정에도 불구하고 비록 십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선뜻 걸작선을 발간해 준 '은행나무'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앞서 보인 것처럼 아주 멋진 양장본 박스 세트로 만들어 소장 가치를 높여주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런 마음이다.


보이는가? 사진은 박스의 뒷면을 찍은 것이다.

 저기, 분명히 ':A RRetrospective' 아래 조금 작은 글씨로 'Dreamsongs'라고 각인된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A RRetrospective', 이거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꽤 재치있어 보인다.

 조지 R. R. 마틴의 그 R. R.에 빗대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A RRetrospective'와 'Dreamsongs' 모두 2007년에 나온 원서의 제목이다.

 원서는 두 권으로 나왔는데, 우리나라는 이렇게 네 권이다.


이는 영어를 한글로 옮기면 원래 분량이 상당히 늘어나므로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책의 표지 역시도 원서와 다르다. 원서는 판타지 표지처럼 디자인 되었다.


둘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판본이 소장 가치가 더 크다.


표지가 전면에 드러나도록 찍어 보았다.

나란히 놓고 보니 색깔도 그렇고 훨씬 더 좋아 보인다.

 (왠지 영어 문법 교과서 원서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면 기분 탓이다.)


책의 뒷 모습.


  사실 이번에 나온 걸작선은 그 의미가 아주 뜻깊다.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발간되는 조지 R. R. 마틴의 선집이기 때문이다. 무려 70년대부터 활동했고 그 때 이미 SF와 호러 양면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R. R. 마틴의 작품들은 장편, 단편을 불문하고 참 만나기 어려웠다. 조지 R. R. 마틴은 최연소 휴고상 수상과 평생 한 번도 타기 어렵다는 휴고상을 한 해에 두 번이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뛰어난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에서 '왕좌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단행본은 커녕, 이런저런 엔솔로지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도 아주 소수의 작품만.


 다시 말해, '왕좌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마틴의 작품은 이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토탈 호러 1'의 '샌드킹'과

  '토탈 호러 2'라는 SF 단편집에 있던  '나이트플라이어'.

 그리고 도솔 출판사에서 나온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에 실려 있던 '두 번째 종류의 고독'.

 더하여 시공사에서 나온, SF 평론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조지 R. R. 마틴의 가장 친한 지인이기도 한 가드너 도즈와가 편집한 '갈릴레오의 아이들'에 들어 있었던 '십자가와 용의 길'.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잡지 판타스틱에서 연재한 '샌드킹(2회 연재)'과 '스킨 트레이드(3회 연재)'.

 이외엔 없었던 것이다.


판타스틱, 2007년 6월호와 7월호에 연속 게재되었던 '샌드킹'.

연재분 1회는 이렇게 양면을 가득 채운 일러스트로 시작되었다

내게 처음으로 마틴이란 이름을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내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세계가 다 동일한 반응이었으니까.

 79년에 발표되자마자 그 해의 SF 상의 양대 산맥인 휴고상과 네불러 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로커스상까지 받았고

작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 끌어 올린데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SF 작품증 하나로 평가하는 상황이니.

딴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몰입감 가득한 이야기와 강렬한 시각적 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갈등 또한 더없이 치열하여 오래전부터 헐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아왔으면서도

 미드 'OUTER LIMITS'에서 시즌 1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것 말고는 아직 성사된 게 없다.

지금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진행중이라고 하는데, '샌드킹'만큼이나 뛰어나고 인상적이며 코스믹 호러가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게 하는 '나이트플라이어'가 먼저 영화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더없이 실망스러웠던 결과만 낳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본이든 제작이든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 참. '샌드킹'은 친구가 피라냐를 어항에서 기르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한다. )


이번엔 판타스틱, 2007년 12월호에서 2008년 2월호까지 3회에 걸쳐 연재된 '스킨 트레이드'의 1회 시작 모습.

'샌드킹'과 마찬가지로 역시 양면 일러스트로 시작하였다.

 '스킨 트레이드'는 원래 스티븐 킹, 댄 시먼스와 함께 '다크 비전 트릴로지'를 위해 발표한 작품으로써

 공포 문학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브램 스토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되었으며, 월드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스킨 트레이드'도 현재 HBO에서 드라마로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나처럼 일찌기 그의 팬이 되어버린 자들은 얼마나 그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갈증에 허덕였겠는가? 

 이토록 오랜 시간 쌓인 갈망을 헤아린다면, 앞서 이 걸작선이 있어 집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는 내 말이 결코 허언도 과언도 아니라는 것을 능히 납득하리라고 본다.

 나는 정말 조지 R. R. 마틴이 '왕좌의 게임'을 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대박을 치고 HBO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또 엄청난 흥행까지 하게 된 것 또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콤보로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면 요즘처럼 출판계의 빙하기에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발간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문득 '다크 타워'의 서문에 스티븐 킹이 이런 이야기를 썼던 게 생각난다. 아시다시피, '다크 타워'는 스티븐 킹이 무려 30년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너무나 오래 연재된 탓에 사람들은 과연 '결말이 어떻게 날까?, 결말이 나기는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했다고 한다. 당연히 독자들에게서 스티븐 킹에게 많은 편지가 왔는데, 그 중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스티븐 킹은 말했다. 하나는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던 할머니. 그녀는 정말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아 아무래도 이대로는 '다크타워'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으니 자신을 가엾게 여겨 부디 결말을 자신에게만 미리 알려주지 않겠냐고 스티븐 킹에게 편지로 사정했다. 결말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고. 다른 하나는 사형수였다. 그 역시 형이 집행되기 전에 결말을 알게 되길 바랐다.


 마틴의 작품에 대한 내 마음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 활자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왔던가. 그의 잡지 데뷔작인 '영웅'을 읽게 되길 원했고 그에게 처음으로 휴고상을 안겨 준 '리아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나게 되길 바랐으며, 그의 판타지 장르 데뷔작인 '라렌 도르의 외로운 노래'와 그가 가장 힘겨웠던 시절에 절치부심하며 써내려 갔던 '터프의 맛'을 한 번이라도 읽게 되길 소망했다. 이왕이면 그가 창안한 세계의 뼈대가 되는 '와일드 카드 셔플'까지 더하여...

 마틴을 알면 알수록 읽고 싶은 작품의 리스트는 자꾸만 늘어나는데, 줄어들 길은 요원하여 반쯤은 포기하고 살아가던 참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다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스티븐 킹에게 결말이 적힌 편지를 받은 할머니의 기쁨이 이와 다를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오랜 마틴의 열혈 신도로써, 신약성경과도 같은 그의 걸작선이 나온 마당에 보다 많은 이들을 마틴의 품 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의 절친 가드너 도즈와는 조지 R. R. 마틴의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조지 R. R. 마틴의 책을 펼치는 독자들이 얻는 것은 수많은 현대 작가와 비평가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메마른 미니멀리즘이라든지 포스트모던 문학 특유의 쿨하고 아이러니컬한 유희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것들 대신 독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강렬한 갈등에 뿌리를 박은 뚜렷한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 그것도 이야기꾼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에 의해 면밀하게 창조된 이야기다. 첫 페이지부터 당신의 마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지를 않는 매력적인 이야기인 것이다.(1권, p. 14~15)


 정확히 내가 마틴의 신도가 된 이유와 같아서 일부러 인용해 보았다. 마틴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흠뻑 빠지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야기. 도즈와는 역시 절친답게 마틴의 매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요즘 가장 각광받는 '왕좌의 게임'이 가진 매력도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취해 사는 존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들은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 각종 매체를 통하여 이야기를 소비하고 감상한다. 하루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를 관통해 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확 잡아끄는 이야기는 별로 만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가 우울하고 피로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아주 재밌고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힘을 잔뜩 받은 듯 일상을 활기차게 보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분명 좋은 이야기엔 그런 힘이 있다. 답답한 일상의 숨통을 트여주고 힘든 일상을 지렛대처럼 손쉽게 빠져나오게 만드는 힘이. 알고 보면 오늘의 고난을 참고 견디게 만드는 내일의 꿈과 미래의 희망이란 것도 이야기다. 자기 스스로 만드는 이야기. 인간의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리의 두뇌 자체가 빼어난 이야기꾼이라 말한다.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기 보다는 먼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맞추어 바깥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말이다. 사람 자체가 이야기의 존재이기에 인간은 밥심 외에 이야기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잡설이 길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탐닉이 그렇게 무용한 것은 아니며 좋은 이야기는 좋은 음식만큼이나 살아가는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여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조지 R. R. 마틴의 소설들을 탐독하라는 것이다.

 마틴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에 의한 존재니까 말이다.

 '이 더위에 무슨 책이냐?' 하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조지 R. R. 마틴의 열혈 신도로써 이렇게 답하겠다.

 '여름의 무더위 따위야 그저 마틴의 서늘한 세계에 더 거세게 빠지게 만들 '거드는 왼 손'에 불과할 뿐!'이라고...


지금까지 언급한 책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다. 이야기만이 가득한 영토에서 그들은 함성으로 선언한다.

 '이야기여, 번성하고 영원하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7-07-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붐칫~붐붐칫~~ 잔치 분위기에 걸맞게 배경 구성지게 바꿔주시고 책도 번쩍번쩍ㅋㅋ 박스세트면 정말 이 정도 화려함은 나와줘야지 싶어요^0^! 외관으로 보자면 66000원 투자가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급~

오드득 2017-07-19 21:33   좋아요 0 | URL
앗! AgalmA님^^ 열성 팬으로써 애정에 걸맞는 정성을 보이기 위해 나름 애쓴 것을 눈치채 주셨군요^^
이 책 나왔을 때 정말로 붐칫, 붐붐칫 어깨춤을 췄답니다. 후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마틴의 작품이 다 실린데다 말씀하신대로 외관까지 근사해서 어깨춤이 더 격렬해지더군요.
그러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거금이 홀라당 사라져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올해는 이 정도로 끝내야지 싶었는데, 아작이 또 맹공하네요.
아니! 그토록 발간되길 오매불망 기다렸던 할란 엘리슨 걸작선이 나온다지 뭡니까!
아악~!! 그 소식 듣고 한 5초간 공중 부양 했어요. 이제 다시 총알 장전 해야겠습니다^^

AgalmA 2017-07-20 07:18   좋아요 0 | URL
저도 할란 엘리슨 걸작선 소식 듣고 읽고는 싶은데 살 수는 없는 쪽으로 결정을....쿨럭)

오드득 2017-07-20 12:30   좋아요 0 | URL
아앗! 이런! 엘리슨의 팬으로써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네요.ㅠ ㅠ
 
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특히 스릴러 소설을 소개할  때, 흔히 '압도적인 서사'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여 이제는 홈쇼핑 방송의 '매진 임박'만큼이나 신뢰도가 바닥인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소설에 대해서만은 그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페데리코 아사트의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정말 '압도적인 서사'이다. 여기서 '압도'에 대해 보다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압도인가? 그것은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힘이다.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저 얼른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고 싶을 뿐이다. 거침없이 넘어가는 페이지 때문에 572쪽에 이르는 분량조차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소설. 다른 거 하나도 필요 없이 그냥 이야기만으로 읽을 가치가 구현되는 소설. 그것이 바로 '다음 사람을 죽여라'다.



 한 남자가 자기 집 거실에서 머리에 브라우닝 권총을 겨누고 자살하려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은 지금 여행 중이다. 돌아와 거실 바닥에서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는 사이 누군가 시끄럽게 현관 문을 두드린다. 타이밍 안 좋게 찾아온 외판원이겠거니 여기는데, 이런 '테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꼭 만나야 한다는 게 아닌가?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곧 죽을 거 무슨 상관이냐 싶어서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쪽지가 보인다. 분명 자신의 글씨이지만, 쓴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쪽지의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그게 네 유일한 탈출구야.(p. 12)


 마치 이 상황을 정확히 예언한 것처럼 말하는 쪽지 때문에 그는 낯선 방문객에게 문을 열어주고 집 안으로 맞아들인다. 그의 이름은 저스틴 린치. 변호사다. 그는 테드가 자살할 작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면서 자살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니 이왕이면 남에게 살해당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자신의 조직에 들어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족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던 테드는 귀가 솔깃한다. 그래서 조직이 원하는 대로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간 블레인이란 작자를 죽인 뒤, 자기처럼 자살하기 위해 조직에 먼저 들어 와 있던 웬델이란 남자도 죽이기로 한다. 필수 절차다. 그렇게 두 번의 살인을 해야 만 조직이 자신을 자기가 웬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죽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왜 소설의 제목이 '다음 사람을 죽여라'인지 우리는 납득한다. 결국 테드는 두 건의 살인을 무사히 저지른다. 그런데 린치는 웬델에게 아무 가족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테드도 죽일 것을 수락한 것인데, 죽이고 나서야 그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이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이. 게다가 맙소사! 이름마저 똑같은 가족들이. 실제? 아니면 악몽?


 린치가 말한 정보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그에게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테드는 자신의 유언장을 맡긴 로비차우드 변호사를 찾아간다. 신뢰에 금이 간 린치의 신상을 털기 위해서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집이 파티 중이었던 것이다. 누구는 자살을 시도하고 살인까지 하고 온 참인데 누구는 부부 동반으로 파티의 수다를 즐기고 있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자기도 잘 아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세상 일이 공평하지 않은 거야 한 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 무심히 넘긴 테드는 로비차우드에게 저스틴 린치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로비차우드의 답변을 기다리다 우연히 블레인 사건의 진실이 린치만 아는 비밀스러운 게 아니라 만인에게 공개된 것임을 알게 된다. 블레인 케이스 역시 린치에게 속았던 것이다. 바로 그  때, 그는 유리창으로 정원에 주머니쥐가 있는 것을 본다. 어제 꾼 꿈에서 잘려나간 아내의 다리를 뜯어먹고 있던 그 주머니쥐다. 바로 그 주머니쥐가 가까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노리고 있다.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테드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 경고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정원으로 뛰쳐나가보니 쥐는 온 데 간 데 없다. 달아난 게 아니라 원래 없었던 것이다. 과연 그 쥐는 정말 환상이었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린치를 찾아간 테드는 그에게서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가 죽였던 웬델이 실은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린치가 사진까지 보여주는 통에 믿지 않을 수 없다. 아내의 배신으로 더욱 둔중한 타격을 당해버린 테드는 린치의 사무실에서 나가다가 또 다시 주머니쥐를 보게 되는데...


 여기까지 소개하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목인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사실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이 전형적인 스릴러가 아니라 뭔가 좀 다른, 독특한 스릴러라는 것을. 그렇다. 사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의 예측을 뒤집는다. 제목과 첫 부분을 읽고 얼른 '보물섬'으로 유명한 로버트 스티븐슨의 '자살클럽'과 유사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우리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기 좋게 빗나간다. 왜냐하면 파트 2가 시작되자마자 파트 1에 있었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블레인이 죽는 것은 똑같지만 웬델은 살기 때문이다. 거기다 테드와 대화까지 나누며 놀라운 사실까지 알려준다. 아내와 바람을 피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린치였다고! 그것도 린치와 똑같이 사진까지 내보이면서. 그런데 그 사진엔 린치의 것과 다른 점이 있었다. 린치의 사진엔 상대 남자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었는데, 웬델의 사진엔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바로 린치의 얼굴이었다.


 과정의 반복.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결말.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을테니 이 소설은 초현실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인가? 페데리코 아사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남미 작가. 남미하면 역시 가브리엘 마르케스로 대표되는 마술적 리얼리즘. 그렇다면 이 소설도? 아니, 그렇지는 않다.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니다. 다음에 우리가 보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본 모든 것이 실은 테드가 정신과 의사인 로라 앞에서 진술하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는 벌써 몇 달째, 로라 앞에 계속 같은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자신이 자살하려고 하는데, 린치가 찾아와서 '다음 사람을 죽여라' 게임을 하고 그대로 블레인과 웬델을 죽이는 이야기를. 그런데 지금 와서 웬델의 결말이 달라진 것이다. 로라는 그것을 두고 테드가 이제 다른 주기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렇게 상담이 반복될수록, 주기가 달라지고 그만큼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라고. 그러자 테드의 상상 속에서 웬델이 경고한다. '로라는 네 머릿속에 꽁꽁 숨겨둔 뭔가를 알아내려는 거야. 결코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면 이것은 일종의 게임인가? 지금까지 테드가 말했던 것이 그저 테드의 공상이 아니라 모두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얼른 테드가 어떤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고 로라는 상담을 교묘하게 이용해 테드가 숨겨둔 진실을 찾아내는 이야기로 파악한다. 그러나 그 파악 역시도 뒤에가서 또 배반 당한다. 간간히 반복되었던 체스와 얽힌 테드의 어린 시절 기억. 바로 그것이 실은 아주 무서운 진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는 것이다. 그것은 테드가 계속 꾸는 빨간 차의 뒷 트렁크로 나타난다. 꿈 속에서 테드는 그 트렁크의 문을 여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과연 트렁크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것이 그의 어린 시절 기억과 어떻게 연결되기에 그런 것일까? 마지막에 드러나는 이야기는 초반에 우리가 생각했던 이야기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본 작가 미쓰다 신조는 이 소설을 두고 '독자의 모든 예상을 가차없이 배신하는 소설'이라 말했다. 여기엔 조금의 거짓도 없다. 당신이 무엇을 예상했듯 늘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