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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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스릴러 소설을 소개할  때, 흔히 '압도적인 서사'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보여 이제는 홈쇼핑 방송의 '매진 임박'만큼이나 신뢰도가 바닥인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소설에 대해서만은 그 말을 쓸 수밖에 없다. 페데리코 아사트의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정말 '압도적인 서사'이다. 여기서 '압도'에 대해 보다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압도인가? 그것은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힘이다.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하여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저 얼른 이야기의 마지막을 보고 싶을 뿐이다. 거침없이 넘어가는 페이지 때문에 572쪽에 이르는 분량조차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소설. 다른 거 하나도 필요 없이 그냥 이야기만으로 읽을 가치가 구현되는 소설. 그것이 바로 '다음 사람을 죽여라'다.



 한 남자가 자기 집 거실에서 머리에 브라우닝 권총을 겨누고 자살하려 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은 지금 여행 중이다. 돌아와 거실 바닥에서 죽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는 사이 누군가 시끄럽게 현관 문을 두드린다. 타이밍 안 좋게 찾아온 외판원이겠거니 여기는데, 이런 '테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꼭 만나야 한다는 게 아닌가?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곧 죽을 거 무슨 상관이냐 싶어서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문득 테이블 위에 쪽지가 보인다. 분명 자신의 글씨이지만, 쓴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쪽지의 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그게 네 유일한 탈출구야.(p. 12)


 마치 이 상황을 정확히 예언한 것처럼 말하는 쪽지 때문에 그는 낯선 방문객에게 문을 열어주고 집 안으로 맞아들인다. 그의 이름은 저스틴 린치. 변호사다. 그는 테드가 자살할 작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면서 자살은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니 이왕이면 남에게 살해당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자신의 조직에 들어오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가족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던 테드는 귀가 솔깃한다. 그래서 조직이 원하는 대로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간 블레인이란 작자를 죽인 뒤, 자기처럼 자살하기 위해 조직에 먼저 들어 와 있던 웬델이란 남자도 죽이기로 한다. 필수 절차다. 그렇게 두 번의 살인을 해야 만 조직이 자신을 자기가 웬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죽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왜 소설의 제목이 '다음 사람을 죽여라'인지 우리는 납득한다. 결국 테드는 두 건의 살인을 무사히 저지른다. 그런데 린치는 웬델에게 아무 가족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테드도 죽일 것을 수락한 것인데, 죽이고 나서야 그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이 사랑스런 아내와 귀여운 두 딸이. 게다가 맙소사! 이름마저 똑같은 가족들이. 실제? 아니면 악몽?


 린치가 말한 정보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그에게 뭔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테드는 자신의 유언장을 맡긴 로비차우드 변호사를 찾아간다. 신뢰에 금이 간 린치의 신상을 털기 위해서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집이 파티 중이었던 것이다. 누구는 자살을 시도하고 살인까지 하고 온 참인데 누구는 부부 동반으로 파티의 수다를 즐기고 있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자기도 잘 아는 고등학교 동창들이. 세상 일이 공평하지 않은 거야 한 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 무심히 넘긴 테드는 로비차우드에게 저스틴 린치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로비차우드의 답변을 기다리다 우연히 블레인 사건의 진실이 린치만 아는 비밀스러운 게 아니라 만인에게 공개된 것임을 알게 된다. 블레인 케이스 역시 린치에게 속았던 것이다. 바로 그  때, 그는 유리창으로 정원에 주머니쥐가 있는 것을 본다. 어제 꾼 꿈에서 잘려나간 아내의 다리를 뜯어먹고 있던 그 주머니쥐다. 바로 그 주머니쥐가 가까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노리고 있다.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테드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 경고하는데,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정원으로 뛰쳐나가보니 쥐는 온 데 간 데 없다. 달아난 게 아니라 원래 없었던 것이다. 과연 그 쥐는 정말 환상이었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린치를 찾아간 테드는 그에게서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가 죽였던 웬델이 실은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것을. 린치가 사진까지 보여주는 통에 믿지 않을 수 없다. 아내의 배신으로 더욱 둔중한 타격을 당해버린 테드는 린치의 사무실에서 나가다가 또 다시 주머니쥐를 보게 되는데...


 여기까지 소개하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제목인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사실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이 전형적인 스릴러가 아니라 뭔가 좀 다른, 독특한 스릴러라는 것을. 그렇다. 사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의 예측을 뒤집는다. 제목과 첫 부분을 읽고 얼른 '보물섬'으로 유명한 로버트 스티븐슨의 '자살클럽'과 유사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우리의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기 좋게 빗나간다. 왜냐하면 파트 2가 시작되자마자 파트 1에 있었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블레인이 죽는 것은 똑같지만 웬델은 살기 때문이다. 거기다 테드와 대화까지 나누며 놀라운 사실까지 알려준다. 아내와 바람을 피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린치였다고! 그것도 린치와 똑같이 사진까지 내보이면서. 그런데 그 사진엔 린치의 것과 다른 점이 있었다. 린치의 사진엔 상대 남자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었는데, 웬델의 사진엔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바로 린치의 얼굴이었다.


 과정의 반복.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결말.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을테니 이 소설은 초현실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인가? 페데리코 아사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남미 작가. 남미하면 역시 가브리엘 마르케스로 대표되는 마술적 리얼리즘. 그렇다면 이 소설도? 아니, 그렇지는 않다.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이 아니다. 다음에 우리가 보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본 모든 것이 실은 테드가 정신과 의사인 로라 앞에서 진술하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는 벌써 몇 달째, 로라 앞에 계속 같은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자신이 자살하려고 하는데, 린치가 찾아와서 '다음 사람을 죽여라' 게임을 하고 그대로 블레인과 웬델을 죽이는 이야기를. 그런데 지금 와서 웬델의 결말이 달라진 것이다. 로라는 그것을 두고 테드가 이제 다른 주기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렇게 상담이 반복될수록, 주기가 달라지고 그만큼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라고. 그러자 테드의 상상 속에서 웬델이 경고한다. '로라는 네 머릿속에 꽁꽁 숨겨둔 뭔가를 알아내려는 거야. 결코 남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말이야.'


 그렇다면 이것은 일종의 게임인가? 지금까지 테드가 말했던 것이 그저 테드의 공상이 아니라 모두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얼른 테드가 어떤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고 로라는 상담을 교묘하게 이용해 테드가 숨겨둔 진실을 찾아내는 이야기로 파악한다. 그러나 그 파악 역시도 뒤에가서 또 배반 당한다. 간간히 반복되었던 체스와 얽힌 테드의 어린 시절 기억. 바로 그것이 실은 아주 무서운 진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지는 것이다. 그것은 테드가 계속 꾸는 빨간 차의 뒷 트렁크로 나타난다. 꿈 속에서 테드는 그 트렁크의 문을 여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과연 트렁크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것이 그의 어린 시절 기억과 어떻게 연결되기에 그런 것일까? 마지막에 드러나는 이야기는 초반에 우리가 생각했던 이야기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본 작가 미쓰다 신조는 이 소설을 두고 '독자의 모든 예상을 가차없이 배신하는 소설'이라 말했다. 여기엔 조금의 거짓도 없다. 당신이 무엇을 예상했듯 늘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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