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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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이다. 

그의 소설 '부서진 4월'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알바니아는 소설이 1980년대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현대적이지 않은, 마치 여전히 중세인 것만 같은, 신화와 야만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그래서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그런 나라였다. 나중에 그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유럽에 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카다레가 보여주었던 풍경으론 알바니아가 꼭 중동 어디쯤에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바니아는 그렇게 이상한 나라였다. 유럽에서 유일한 이슬람 국가. 그리고 마치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적 흐름들이 어쩐지 알바니아만은 비켜나가버린 것 처럼 전혀 근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치 고인 물 마냥 아주 오래도록 전해내려온 고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나라. 그 특이성과 항구적인 불변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도 불렀던 발칸반도에 자리잡은 알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더욱 더 기묘하게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20세기를 휩쓴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자신의 전통을 지켜가며 생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바니아의 궁금증을 키우고 있던 차에 또 하나의 소설이 불현듯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것이 바로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이었다.

 수사나 포르테스가 그려내는 알바니아도 카다레와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다레의 '부서진 4월'이 주로 아직도 꿋꿋이 고래로 부터 내려온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북쪽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면 프로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카다레가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나 그 역사적 시간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항구적인 대지와도 같이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보여주려했다면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 역사적 중심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알바니아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카다레가 바로 알바니아 사람이고 포르테스는 알바니아 사람이 아니라 스페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외부인이고 아무래도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시선으로 밖에는 알바니아를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마치 인류학자의 시선과도 같아서 참여자로서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라는 테우리로 인하여 시선의 제약 때문에 볼 수 없는 그 바깥을, 관찰자는 내부와 외부 아울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바니아에 대해서 보다 완전하고도 객관적인 지평을 열어보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다가왔던 알바니아를 다룬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강하게 연상되는 영화가 하나있다. 

  바로 '붉은 수수밭'으로도 유명한 중국 감독 장이모우의 '국두'다.  영화 '국두'는 중국의 한 염색을 전문 으로 하는 집안을 배경으로 삼촌이 돈을 주고 데려온 신부와 조카가 금기를 어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다룬 영화이다. 이것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형의 아내와 금기의 사랑에 빠지는 동생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결국 영화 ‘국두’에서 이 금기를 어긴 두 남녀는 아들을 하나 낳는데 조카는 아이의 앞에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없어 번민한다. 이것 역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주인공에 얽힌 출생의 비밀에서 드러나는 진짜 아버지의 존재와 유사하다. 나중에 삼촌은 중풍으로 쓰러지는데 이제 삼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조카와 아내는 결국 그에게 태어난 아이가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고 분노한 삼촌은 아이를 죽이려고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친자식처럼 여기고 살려한다. 하지만 결국 삼촌은 염색통에 빠져 죽고 아이는 사실은 자신의 부모인 그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하려한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치정관계를 보여주는데 하지만 거기엔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은밀한 의도가 숨어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기에 깃든 보다 깊은 은밀한 의미는 그대로 이와 유사하게 얼혀진 치정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알바니아의 사랑’에도 그래도 통용될 것 같다. 그럼 본래 영화 '국두'가 그 치정관계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이 거쳐 온 역사적 변화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금기에 빠져든 남녀 간의 사랑 얘기는 일종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자면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진정으로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삼촌은 공산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중국(청나라)을 상징한다. 금기에 빠져든 조카와 아내는 그렇게 전통적인 중국을 무너뜨렸던 공산주의 혁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세대는 또 그 보다 더 젊은 그렇게 그들의 아이에 의해서 부정되는데 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그러니까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치정 관계는 그대로 중국이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장 이모우는 결정적으로 삼촌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의 재건이 가능했음을 주장하고 또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그렇게 재건된 중국이 사실은 삼촌이 상징했던 전통적이며 가부장적인 중국을 그대로 닮으려 했던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영화 ‘국두’를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는 그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비로소 드러나는데, 나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 역시도 영화 ‘국두’처럼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알바니아의 역사적 변화 자체를 다루는 알레고리로 읽어야 하며 그 때서야 포르테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알바니아의 사랑'을 알레고리적으로 읽을 때, 주인공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보자면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은 도입부를 지나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의 묘사가 눈에 띈다. 거기 자신의 집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은 탑 꼭대기 방이다.(p.15) 그 방은 비좁은 나선형 계단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방이다.(p.14) 이것은 유럽에서 오래도록 유일하게 이슬람을 유지시켜온 그렇게 타자의 침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던 알바니아 하고도 어쩐지 유사해 보인다. 더구나 이스마엘은 신체적으로도 살집이 없고 뼈만 앙상하고 "특히 아치처럼 생긴 쇄골, 손목, 무릎이 그랬는데, 이들 부위는 몸이라고 하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 있었다."(p.33)로 묘사된다. 포르테스는 여기에 '몸이라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라는 비유를 쓰는데 이것은 나중에 또 한 번 반복되는데 작가가 유독 이스마엘에게만 쓰는 표현이다. 즉 작가는 이스마엘의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 유도하는데 여기서 이스마엘의 신체는 대대로 군인으로 유명한 자신의 가문에 맞지 않게 아주 허약한 신체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의 형 빅토르의 신체와 대조되면 더욱 더 그 허약함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신체적으로 어떤 별종임을 암시하고 그것은 그렇게 그에게 깃들어진 출생의 비밀을 함축함과 동시에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끔 하는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면 그대로 유럽에서 북쪽 알프스 산맥으로 고립된 알바니아 자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주인공이 이 소설에서 진정 의미하고 있는 바는 '알바니아'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제목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야말로 정확한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나라 알바니아'가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주인공을 알바니아로 여긴다면 그가 속한, 그렇게 이스마일을 지배하고 있다고도 볼 수있는 라드지크 가문 자체는 독재자 엠베르 호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스마일과 라드지크 가문 사이의 관계의 변화로 증명될 수 있다. 처음에 이스마일은 아버지와 형 빅토르에게 모두 호의를 가진다. 그의 엄마가 이스마일이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버지처럼 대장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형 빅토르 처럼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허약한 신체 때문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반의 이스마일이 가지는 호의는 알레고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냈던 엠베르 호자에게 서슴없이 정권을 이양했던 알바니아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하지만 그렇게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내었던 엠베르 호자는 스탈린과 비슷하게 나라를 고립시키고 오래도록 독재로 다스린다. 후반에 이스마일은 형의 아내가 된 헬레나와 함께 금기의 사랑에 빠지게 됨으로서 서서히 라드지크 가문으로 부터 멀어지는데 그것은 그대로 호자의 오랜 독재에 지쳐 서서히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던 알바니아와 또 그렇게 겹친다.

  이렇게 이스마일을 알바니아로 라드지크 가문을 엠베라 호자로 보는 게 가능하다면 결국 금기의 사랑이라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은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거기에 보다 은밀한 의미가 배여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에 대하여 한 리뷰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맥을 잇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이 헬레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이름을 어디선가 또 본적이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 트로이 전쟁에서이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 파리스에게 여신은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한다. 그녀가 바로 헬레나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로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던 몸이었다. 그런 그녀를 파리스가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난다. 그리고 그로인해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를 이미 만났다.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는 이미 한 남자에게 매인 몸이면서 불륜에 빠졌다는 점에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의 헬레나와 겹친다. 이러한 존재적 겹침은 사실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작가가 의도한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헬레나가 진정 상징하는 것은 그렇게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 그리고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존재로서의 헬레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헬레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레나로 인해 그녀를 유혹한 파리스의 모국인 트로이가 그렇게 무너졌듯이, 그와 똑같이 헬레나를 유혹한 이스마일이 속했던 라드지크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 그렇게 그것이 상징하는 독재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은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여성성'인 것이다. 

  결국 이스마일이 그러한 여성성과 금기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금기란 것이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란 것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의 금기란 그렇게 엠베르 호자의 독재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란 것을 상징하며 그것을 위반하여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는 것은 그렇게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가급적 억제해야만 하는 독재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스마일이 결국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의 보다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렇게 자신을 규정하고(이는 이스마일이 가진 출생의 비밀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시키는(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절대로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스마일은 내내 엄마를 '그녀'라고 부른다. 그는 그렇게 진정한 엄마로 부터 떨어져나온 존재가 된다. (다른 하나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다.)) 독재 체제 자체의 저항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그렇게 독재에 의해서 규정되고 거짓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다 가깝게 알바니아의 본질로 다가가려는 몸짓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마일의 엄마나 헬레나가 다 같이 알바니아의 변방 태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렇게 그들은 엠베라 호자에 의해서 규정된 알바니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이 알바니아의 변방이란 어떤 곳인가 이스마일 카다레에 의하면 그야말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내려져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품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작가는 헬레나가 처음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녀로 하여금 이스마일의 엄마 초상화를 마주하게 하여 거기서 그녀에게 "낯선 여자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P.17) 드는 것을 보여주어 사실은 이스마일의 엄마와 헬레나가 하나의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데, 그 헬레나는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이스마일에게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을 읽고 있었음을 들킨다. 그 소설을 본 날 이스마일은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시를 쓰면서 욕망을 억눌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미워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폐쇄된 나라, 알바니아라고 하는 거대한 벙커에 생길 수 있는 가장 무의미하고 작은 틈새마저도 꽉꽉 막아버리기 위한 작업에 대대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나라을 미워하면서 욕망을 억눌렀다.(P.138) 

  여기서 이스마엘은 두 가지를 고백한다. 자신의 가문과 현 알바니아 독재체제에 대한 증오와 헬레나를 향한 욕망. 이 두가지가 모두 하나의 고백으로 담겨져 나오는 것은 그대로 그 증오와 욕망이 결국 연쇄적인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더없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스마일이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재체제로 부터 벗어나 카다레가 그렸던 본질적인 알바니아의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이. 더구나 작가는 또 하나의 장치를 통해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이스마일과 헬레나가 처음으로 접촉을 했던 날 내렸던 '비'를 통해서이다. 작가는 내리는 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지붕 처마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빗물이 정원의 흙을 파헤쳐 마침내 흙 표면에 작은 구멍들을 팠다.(P.168) 

  그들이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던 날, 내리는 비는 그대로 대지에 구멍을 낸다. 그렇게 비는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고 이것은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동일하다. 더구나 이 비는 이스마일의 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그가 체포되는 순간 다시금 예감으로서 나타난다. 또 한 번에 내려올 거센 비는 아마도 독재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그런 비일 것이라는 암시를 잔뜩 머금은 채 말이다. 여기서 보다 분명하게 되듯이, 결국 이 날 내리고 있는 비는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폭압에 의해 조작되고 거짓으로 위장된 체제의 장막이 그들의 사랑으로 이제 찢겨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인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내리는 비를 통하여 그들의 사랑이 가지는 의미를 더 한층 견고하게 다듬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가는 이러한 저항으로서의 사랑의 의미를 견고하게 만들면서까지 보여주려하는 것일까?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으로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에 그대로 국가 알바니아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스마일이 헬레나를 만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은 서서히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에 눈 떠가는 알바니아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헬레나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이제 알바니아가 더이상 독재체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장면과도 같다. 그렇게 결국 소설에서도 현실적으로도 알바니아는 독재를 벗어났다. 하지만 이스마일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망명자의 신세가 된다. 여기에는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에 현재 중국에 대한 평가를 은밀히 감추어두었던 것 처럼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에 대한 수사나 포르테스의 평가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결국 알바니아 자체를 뜻하는 이스마일이 망명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가 그토록 추구했던 본래적 알바니아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존재임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알레고리고 읽었을 경우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말한 것 같다. 나중에 읽을 이의 즐거움을 위하여 보다 자세하게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독해를 저지하는 것이 적정할 것 같다. 하지만 수사나 포르테스가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 정말 전하고 싶었던 것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결코 모자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말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세부일 뿐이고 거대한 몸통은 드러낼 수 있는 한 다 드러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튼 수사나 포르테스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의 이면에 이렇게 알레고리적 의미를 가미함으로서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를 통해서 그랬던 것 처럼 자신이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개인이 나누는 금기마저 위반한 사랑이 단순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며 그것은 차라리 독재에 대한 저항이며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보다 순수한 알바니아의 본래적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대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알바니아가 거쳐갔던 역사적 과정의 재현이기도 하다. 본질로서 변하지 않는 알바니아의 모습에 천착했던 이스마일 카다레와는 달리 수사나 포르테스는 변화하는 알바니아를 담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남녀간의 금기마저 위반하는 사랑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서 그렇게 간절히 서로를 원했던 만큼 독재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또한 간절했음을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문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 마저 엿보게 되는데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단순한 사실의 기술 보다 더욱 더 재현에 있어서 풍요롭고 전달에 있어서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지극히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문체가 오히려 이렇게 보다 더 풍요롭게 역사적 변화마저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포르테스가 이러한 문학이 가진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끝으로 하나 더. 주인공 이스마일은 헬레나와 직접 접촉하게 될 때까지 시를 씀으로서 욕망을 억누른다. 그렇게 시를 쓰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저항행위였다. 그러니까 헬레나와 만나 그녀와 의 사랑을 통하여 저항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문학을 통하여 알바니아의 독재체제에 저항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름마저 이스마일 카다레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혹시 수사나 포르테스는 처음부터 이스마엘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퍼뜩 든다. 더구나 소설의 결말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의심은 더욱 더 커진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되는데 현실의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도 결국은 독재 체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던 것이다. 이토록 현저히 드러나는 둘의 유사성은 어쩐지 그저 우연으로만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쩌면 정말로 포르테스는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정하고 읽으면 또 다른 색다른 맛을 이 소설을 통해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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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차 싶었다. 매그레 시리즈와 ‘NORDIC NOIR’와의 관계를 쓴다고 말은 했는데 웬걸, 막상 착수하고 보니 예상밖으로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서 참조할 만한 자료도 거의 없었다. 헉!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물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전적으로 내 지식에만 기반 해서 쓰자고해도 딸리는 내공으로 벅찰 게 분명하고. 자, 진퇴양난. 하지만 '이왕 뽑은 칼 썩은 무라도 잘라야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웬 사극조의 목소리가 자꾸만 심금을 경련시키길 래 결국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몰려오는 왜군을 바라보는 신립의 마음으로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순간 가득한 백색의 공포... 도대체 무슨 말로 첫 시작을 해야 할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쓰려고 헤아렸던 말들은 모니터를 마주한 순간 바람에 민들레 홀씨가 날리듯 휙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새삼 심농이 부러웠다. 심농은 저널리스트 시절 그 날의 칼럼을 1시간 만에 흭 휙 써냈다고 하던데. 그렇게 써놓고도 스스로 퇴사할 때까지 오래도록 신문사에 남아있었던 걸 보면 분명 칼럼의 질이 떨어지지 않은 게 틀림없다. 아, 그런 속성의 기술이 내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건 있을 턱이 없으니 이렇게 심농 신에게 가호나 빌 수밖에.
   심농 님, 나를 굽어 살펴서 이 지난한 싸움을 잘 치르게 해 주소서...

   해서 나는 결국 칼을 빼들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심농과 NORDIC NOIR와의 관계를 재주껏 살펴보려한다. 두구두구둥~(입소리로 효과음을 내고 있는 중임.)

   애초에 이런 기획을 하게 된 동기부터 말하는 게 순서겠지? 그래, 왜 이런 스스로에게도 부치는 기획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매그레가 다름 아니라 1930년대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에 소개되기엔 그 연식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데 있었다. 물론 오래되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이 보다 훨씬 더 연식이 오래된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도 이미 우리나라에 전집이 나온 판이니. 나 역시 셜록 홈즈는 이미 전집으로만 두 세트를, 뤼팽도 전집으로 가지고 있는 형편이니. 그러니 정작 문제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매그레가 그다지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하지 않다는데 있다고 해야겠다. 지금까지 그 어마어마한 시리즈 중 겨우 세 권만 번역되었을 정도로 매그레의 지명도는 턱없이 낮다. 바로 가까운 일본만 해도 매그레가 얼마나 유명했던지(물론 일본에서는 ‘매그레’가 아예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거기서 매그레 부인역을 했던 사토미 토모는 심농 스스로 매그레 부인을 맡았던 연기자 중 최고라는 상찬까지 받기도했다.) 아오야마 고쇼의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는 중요한 조연 캐릭터 이름으로도 버젖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는 세상에! 그게 '콜롬보'란 이름으로 확 바꿔버릴 만큼 턱없이 지명도가 낮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된 데다 더구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매그레를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읽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매그레가 여전히 동시대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른바 ‘NORDIC NOIR’와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매그레와 ‘NORDIC NOIR’가 결국은 일란성 쌍둥이이며 지금 ‘NORDIC NOIR’가 널리 읽히고 있다면 당연히 매그레도 널리 읽힐 수 있다는 걸 밝혀보고 싶은 것이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NORDIC NOIR, NORDIC NOIR 하는 데 그게 대체 뭐냐고? 

  아, 참 그걸 미리 말해놓는다는 걸 까먹고 말았군. 실례. 지금부터 설명 들어가겠다. ‘NORDIC’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북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반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나온다. NOIR는 뭐, 프랑스 말로 '검다'는 뜻이고 구체적으로는 헐리우드에서 1930년대 생산된 범죄 영화의 특징이기도 한, 낮은 조명으로 음습하고 어두운 도시적 초상을 그려내던 영화들을 장르적 범주로 묶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NORDIC NOI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출간된 ‘우울한’ 범죄 소설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NOIR'란, 거기서 나온 소설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런 소설을 펴냈다는 말은 아니고 비평계에서 보니 그 반도에서 나오는 범죄 소설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느와르 적이었다는 의미로 붙여진 말이다. 이 말은 최근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가 헐리우드에 의해 영화화가 됨으로써 그로 인해 그동안 소개되었던 일련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범죄소설에 대해 언론이 새삼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됨으로서 태어난 이름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 비단 지금에 이르러서야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90년대 초반 헤닝 만켈의 데뷔작 ‘얼굴 없는 살인자’가 나왔을 때부터 당시로서는 새로운 작품 분위기와 범죄 소설로서는 이례적인 사회를 해부하는 깊이 있는 시선 때문에 세계적인 비평적 관심을 받은 바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한 작가가 이루어낸 독특한 분위기 정도로만 여겨졌었는데 이 후 노르웨이의 카린 포숨, 아이슬란드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그리고 지금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작가 군들이 그와 비슷한 색깔의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내어놓음으로써 이렇게 ‘NORDIC NOIR’라는 명칭으로 불리울 만큼 하나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이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그들의 이력에 따라다니는 굵직굵직한 세계적 수상경력이나 현재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지속적인 관심만 봐도 충분할 것 같고 여기선 당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뺏기 위해 다만 이들과 심농의 매그레가 어떤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만 살펴보려 한다.



   우선 ‘NORDIC NOIR’가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들이다.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주인공의 모습이다. ‘NORDIC NOIR’에 있어서 주인공들의 모습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일단 주인공의 직업이 모두 형사다(스티그 라르손의 경우엔 예외적으로 저널리스트지만.). 그리고 아주 고독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업무상 관계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회적 관계로 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제대로 된 가정조차 이루고 있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마치 그들은 어디에서도 발붙일 수 없는 그렇게 계속 떠돌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보인다. 더구나 이들에게 개인적 관계란 언제나 상처를 동반한 것들뿐이다. 범죄로 인해 사회가 고통 받는 것과 똑같이 그들은 그들만의 개인적 관계들로 상처를 받는다. 그것은 현재적 상처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묵혀진 과거의 상처들도 있다. 아니 사실은 그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적 상처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근원적 고통이며 오래된 과거라는 점 때문에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렇게 능동적 개입이 불가능한 절대적 고통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픔을 느끼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다. 그들은 그렇게 치유할 수 없는 환부를 가진 불치병 환자들로 현재를 살아간다. 환자들에게 환부란 자신의 모든 것을 삼켜드는 일종의 블랙홀이다. 늘 자신의 환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자는 그렇게 주위를 둘러 볼 여유를 잘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관계마저 파탄을 불러온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아마도 아이슬란드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일 것이다. 그의 캐릭터 에를렌두르 형사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다 끝에 아내와 이혼을 했고 이미 장성한 자녀들마저 소원한 관계로 지낸다. 거기다 그는 경찰이지만 자식들은 모두 마약상용자로 사회 속 패배자로 살아간다. 에를렌두르는 자녀들이 그렇게 된 게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에를렌두르와 그의 가족들은 다만 하나의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범죄가 발생하고 그렇게 하나의 사체가 문득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가던 자신의 딸에게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훌쩍 날아온다. 이 둘은 언제나 에를렌두르에게 동시에 도착한다. 에를렌두르가 수사하는 범죄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된 세월 깊숙이 묻혀있던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에를렌두르와 자식들간의 관계와도 같다. 어떻게 보면 떠오른 범죄는 그들의 오래도록 해묵은 상처가 비로소 그 존재를 열어 보이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범죄의 수사란 사실은 그들이 가진 상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대부분 삶의 깊은 아픔과 질곡들이 배여있는 범죄들이 에를렌두르에게 있어서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해 결국엔 새롭이 딸과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렇게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수사란 사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NORDIC NOIR’의 범죄 수사란 대부분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드러난 상처(만켈이나 포숨에 있어서는 사회가 은닉한 갈등이고 인드리다손에게 있어서는 주인공 자신이 억누르고 있었던 고통이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결국 수사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그것으로 수면 위로 떠올라버린 인간의 삶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NORDIC NOIR’의 주인공들은 수사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산책자’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산책자가 주위의 풍경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듯이 그렇게 그들 역시도 수사를 하면서 오히려 삶 자체를 관조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그대로 심농의 매그레가 보여주는 것과 같다. 매그레의 경우도 늘 범죄가 수사를 개시하게 하지만 정작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범죄 뒤에 숨어있는, ‘생플리앵에 지다’에 나오는 목 매달린 자들과도 같이, 목에 걸린 밧줄처럼 죄어오는 '생(生)'이 가져다주는 고통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그 '삶' 자체이니까 말이다.


   ‘NORDIC NOIR’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든다면 사건이 언제나 협소한 공간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NORDIC NOIR’에서는 대부분 사건들이 고립되고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다. 유독 그렇게 사건적 공간을 선택하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보여졌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곳은 현실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은유적 공간에 가깝다. 작가들이 이렇게 공간들을 하나의 은유로 바라보게끔 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그 공간을 통하여 현재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이나 갈등들을 깔때기 처럼 집약시켜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있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그냥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작가가 속한 현재 사회의 모든 모순과 갈등들이 전면적으로 표출되는 광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헤닝 만켈의 ‘얼굴 없는 살인자’이다. 아주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정작 형사 쿠르트 발란더가 보게 되는 것은 그 마을에 아주 깊숙하게 각인된 뿌리 깊은 타자에 대한 혐오증이다. 만켈은 이렇게 발란더가 그 마을에서 목격하게 되는 외국인혐오증을 통해 당시 스웨덴 사회에서 점차 성장하고 있던 파시즘의 징후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얼굴없는 살인자'에서의 작고 고립된 마을은 그대로 현재 스웨덴 사회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 마을은 일종의 반영이며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자아가 그렇게 감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을 마음 한 구석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듯이, 스웨덴 사회가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그렇게 가장 은밀한 곳에다 은폐시키고 싶었던 '이드'가 표출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그렇게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이 종종 '괴물' '연쇄살인마'로 드러나듯이 해닝 만켈을 비롯한 'NORDIC NOIR'에서는 저렇게 하나의 공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밀레니엄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티그 라르손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심농의 매그레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 나온 ‘갈레씨, 홀로 죽다’ ‘생폴리앵에 지다’를 보면 무엇보다 시작하는 부분이 모두 거의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이름 모를 작은 역이라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생폴리앵에 지다’의 ‘노이샨츠역’은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지대에 있고 늘 양쪽 나라 노동자들을 태운 통근열차가 지나다니는데도 그저 국경을 넘느라 잠깐 머물 뿐인 그렇게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역으로 나온다. 매그레 역시 언제나 ‘NORDIC NOIR’처럼 이렇게 어딘가 묻혀진, 작은 공간에다 자신의 소설적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이렇게 제한하는 건 그 공간이 공간 나름의 분위기로 하나의 개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심농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나무’라는 일반명사화된 걸 그리기 보다는 ‘나의 나무’식으로 개별적인 사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키에르케고어가 ‘신 앞에서의 단독자’라고 말했던 그 ‘단독자’하고도 같으며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일반성으로 도저히 포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고유한 단독성 하고도 통하는 개념이다. 그렇게 하나의 고유성을 가진 존재. 무엇이든지 대체 불가능한 독자적 존재. 심농은 그러한 것을 그리는 걸 좋아했으며 그건 공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렇게 공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 그 어느 것으로든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생명을 지니게끔 한다. 그리고 거기에 작품 전체의 주제랄까 분위기랄까 하는 것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래서 협소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NORDIC NOIR’와 매그레는 닮았지만 공간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조금은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NORDIC NOIR’는 사회가 어디엔가 감추고 있는 모순과 갈등들을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공간을 제한하지만 매그레는 오로지 그 어떤 일반성의 잣대로도 잴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개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간을 제한한다. ‘NORDIC NOIR’는 협소한 공간을 통해서 사회를 돌아보게 하지만 매그레는 그 공간 자체를 그가 작품에 담고자하는, 그 어떤 보편성으로 묶일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인간의 삶 자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렇게 그는 아주 고유한 개별적인 공간에다 그와 똑같이 단독자 자체로 온전한 단 하나의 인간적 삶을 담으려하는 것이다. 둘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만 사실 이것은 결국은 똑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 그 둘이 도달하는데 있어서 걸리는 일종의 '거리적'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NORDIC NOIR'와 매그레 둘 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담으려 한다는건 마찬가지지만, 'NORDIC NOIR'는 그것을 사회를 경유하여 그 사회가 가진 모순과 갈등의 결과로써의 인간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삶이 가진 비극의 원인마저도 아울러 명확히 보여주려하는 반면, 매그레는 하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 그 자체로 곧장 뛰어듦으로써 그 어떤 보편적 잣대로도 가늠할 수 없는 고유한 개인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그 원인으로써 배경에 서 있는 사회적 원인들을 아울러 포착하려 한다는 그런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골목을 먼저 들어가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지 사실 그 둘이 담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 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있어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쓰다 보니 어느새 내가 생각했던 ‘NORDIC NOIR’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다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정리하자면 ‘NORDIC NOIR’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주인공들이 사회적 관계망을 거의 맺지 않는다. 그렇게 고독한 존재라는 점. 둘째는 사건은 언제나 협소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늘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은유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셋째 ‘NORDIC NOIR’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범죄의 해결이 아니라 그 범죄 뒤에 가려진 비극적인 삶의 모습이며 그리고 그 비극을 잉태하고 지속시키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 더 많이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크게 이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것은 사이사이 가필해왔던 대로 매그레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왜 이러한 특징을 가진 ‘NORDIC NOIR’가 새삼 이렇게 거센 주목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그래야만 매그레의 동시대적 가치가 진정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왜 ‘NORDIC NOIR’는 지금 인기가 있을까? 물론 그것은 소설이 정말 재밌어서 그런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그런 재미를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은 ‘NORDIC NOIR’에서 다소 이례적인 재미라고 할 만하다. 대부분 ‘NORDIC NOIR’는 눈에 번쩍 뛸만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전개는 느리고 단조롭다. 그들의 수사는 전혀 극적이지 않으며 많은 탐문과 이리저리 얽혀드는 과거의 실타래들은 자주 소설적 쾌락을 주기 보다는 마음속으로 침잠하도록 이끈다. 즉, 여기서는 현재 영미 미스터리 소설들을 읽을 때 맛볼 수 있는 쾌감들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이 소설들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소설이 주는 재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삶을 헤아리는 깊이있는 시선과 그로부터 오는 묵직한 울림 때문이다. 그렇게 NORDIC NOIR’는 '즐김'의 소설들이 아니라 차라리 '관조'의 소설들이라 해야한다. 비유하자면 NORDIC NOIR’를 읽는 것은 ‘수사반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극장’을 보는 것과 같다. 외피만 범죄 소설이란 걸 둘러썼을 뿐이지 그것이 천착하는 것은 고래로 순수 문학이 계속해서 천착해왔던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삶' 자체 말이다. 앞서 ‘NORDIC NOIR’의 주인공들은 고독한 산책자와도 같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독자들 역시 바로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독자들은 그들과 같이 걷고 그들이 보는 것을 같이 보고 더불어 음미하는 것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산책을 했을 때와 같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정확히 ‘NORDIC NOIR’가 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NORDIC NOIR’에서 독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다. 독자들과 작품들은 비애감으로 같이 묶이고 동정과 연민으로서 서로를 위로한다. 이 위로의 호소, 위안을 부르짖는 손길, 이것이 ‘NORDIC NOIR’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심농의 ‘매그레’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NORDIC NOIR’에 대해 내가 했던 말들이 그대로 ‘매그레’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새삼 사람들이 이런 삶에 대한 공감, 연민, 위안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NORDIC NOIR’가 나왔던 나라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NORDIC NOIR’가 나왔던, 그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은 어떠한 나라들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를 이루었다고 인정받은 나라들, 국민들 또한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기꺼이 말하는 나라들이 아닌가!(해마다 가장 국민들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나라들 순위를 매기는 데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은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반면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은 늘 꼴찌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에서 나오는 ‘NORDIC NOIR’는 그 어떤 나라의 같은 장르소설들 보다도 어둡고 우울하다. 그리고 내보이는 전망 또한 암울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살기 좋아 보이는 나라들에서 나오는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이렇게 어둡기 만한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의문 앞에서 ‘NORDIC NOIR’는 당당히 고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유토피아에 그래도 가장 근접한 나라들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건 그저 보기좋은 가면에 불과하다고. 사회의 온갖 병폐와 고통들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며 그저 보이지 않도록 덮고만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오히려 ‘NORDIC NOIR’는 복지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그토록 통제하고 억지로 봉합하려 들었던 국가 때문에 개인의 고통만 더욱 더 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대표적인 징후로 헤닝 만켈이 ‘얼굴 없는 살인자’에서 드러냈듯이 ‘NORDIC NOI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점점 성장하고 있는 ‘파시즘’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켈의 소설에선 외국인 혐오증으로 나타나는 파시즘은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 현실 스웨덴에서도 그 세력을 차츰 넓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헤닝 만켈의 소설은 그 파시즘에 대한 문학적 고발이었고 그것은 그대로 지금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중이다. 이들에게 있어 파시즘은 개인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이들이 한 개인의 삶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거대한 권력에 의해 쉽게 짓밟히고 무시될 수 있는 한 개인을 그 자체로서 복원하고 거기에 저항하고자 함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이라는 단독성에 집착하는 매그레와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NORDIC NOIR’에는 국가 혹은 사회의 거대한 손 때문에 ‘내몰린 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고 그렇게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내 몬 손들을 같이 비난하고 성토하는 모습이 있다. 그래서 어디든 거대한 권력이 작동하는 곳이면, 그렇게 국가든 자본이든 이데올로기든 거대한 권력에 의해 개인이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는 곳이면 ‘NORDIC NOIR’의 생생한 목소리는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미국에서도 광범위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즉 지금 미국 역시도 ‘NORDIC NOIR’가 나왔던 그 때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은 그토록 미국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가 그냥 허울 좋은, 거짓 이데올로기였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거기다 9/11 사태는 미국이 지금껏 추구해온 세계의 경찰로서의 위치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타격은 새삼 미국인들로 하여금 문득 자기가 딛고 서 있는 대지가 정말 제대로 된 땅인지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미국인들은 지금 혼돈에 처해있고 그 가운데 미국이 생산한 장밋빛 청사진에 가려져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갈등과 고통들을 새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혼돈, 그 가운데 새삼 각인되게 된 상처들로 인해 그들은 다시금 2차 대전 후 때처럼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서 태어난 ‘NORDIC NOIR’의 호소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즉 ‘NORDIC NOIR’는 개인보다 더 큰 것들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할퀴고 간 커다란 현재의 상처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상처를 먹고 자라나는 나무이다. 그런데 이는 누누히 말해왔듯, 심농의 매그레 역시도 같다. 매그레가 태어났고 성장을 해가던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매그레가 태어났던 당시의 프랑스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았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서 거대하게 뿌리를 내려가던 히틀러의 나치즘을 바로 마주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점점 거세어지는 파시즘의 영향으로 일대 혼돈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공황과 더불어 열악해진 경제적 상황은 더욱 더 프랑스 개인에게 힘들고 비참한 삶을 강요했던 것이다.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게 평가받는 1930년대의 프랑스 영화의 일련의 경향들을 보여주는 시적 리얼리즘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시적 리얼리즘'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휘말려버린 한 개인이 겪는 좌절이나 고통들을 있는 그대로 흔히 그려내곤 했는데 그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했던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영화가 그렇게 시대적 상황에 '시적 리얼리즘'으로 반응했다면 거기에 심농의 ‘매그레’는 문학적으로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정확히 헤닝 만켈이 당시의 스웨덴에서 보았던 그것에 대한 반응과 똑같은 반응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연을 확장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 또한 매그레의 프랑스나 만켈이나 라르손의 스웨덴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극심한 신자유주의는 내내 인간을 거대한 경쟁의 물결 속으로 내몰고 있으며 여기에 점점 현격해지는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빈곤까지 더해져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심히 절하시키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내몰린 자들의 비참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던 매그레와 'NORDIC NOIR'는 지금 그러한 자들의 슬픔이 점점 만연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그러한 존재가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NORDIC NOIR’와 심농의 매그레는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 둘은 또 그렇게 모두 비슷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려움과 불안에 의한 그리고 저항을 위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NORDIC NOIR’가 현재 동시대의 참모습을 알려주는 목소리로서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심농의 매그레 역시도 그러한 호소력을 지금 우리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매그레는 시대에 뒤떨어진 그저 그 때의 추억으로 자신의 생명을 늘려갈 뿐인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때로는 연민과 위안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세 권을 읽어본 현재 나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두서없이 마구 써내려 왔지만 과연 어느 정도 당신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이러한 매그레의 진정한 가치를 음미하기 위해선 앞서도 말했듯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공감을 위한 감성을 가지기 위해선 사실 시간이 필요하다. ‘NORDIC NOIR’의 소설의 진행이 느린 그 진정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그 곳들이 대체적으로 밤이 길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서 밤이란 ‘더불어’의 시간이 아니라 늘 온전한 개인만의 시간이다. 그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희미한 조명 아래서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NORDIC NOIR’는 주로 그 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밤이 긴 만큼 사유의 시간도 길어지고 그만큼 속도도 느려진다. ‘NORDIC NOIR’의 전개 속도는 바로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함이라 할 수있다. 그래서 천천히 소설을 통해 한 인물을 읽듯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매그레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그러한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되도록 혼자인 시간에 천천히 삼켜야 하는 소설이다. 매그레의 문장들은 간결하고 빠르지만 그 심플한 매무새에 담겨있는 것은 오래 숙성시켜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와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강박증과고 같이 늘 뭔가에 그저 빨리 도달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우리들이기에 이렇게 조금쯤은 멈추어 서서 주위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러한 소설들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오래도록 천천히 읽어라! 오랜만에 도시를 벗어나 어느 한적한 산책길을 걷듯이 그렇게. 내가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그러면 매그레야 말로 당신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카린 포숨이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글을 맺을까 한다.

   “오늘날은 뭐든지 빨라야 되고 시간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즉석 식품이나 분말 코코아, 인스턴트 커피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산다는 건 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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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1-07-1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말 좋네요. 시간을 들인다는 것.
 
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뭐든 시리즈의 데뷔작이라면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것도 문학사에 있어 아주 뚜렷하고 거대한 족적을 남긴 시리즈의 데뷔작이라면 더욱 더! 그리고 만일 그 시리즈의 팬이라고 한다면 더!더! 더욱 그럴 것이다. 셜록 홈즈의 팬에겐 데뷔작인 '주홍색 연구'가 그럴테고, 엘큘 포와로의 팬에겐 데뷔작인 '스타일즈저택의 죽음'도 역시 기필코 보아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그건 아마도 팬으로서 전설의 시작을 확인하고픈 마음일수도 있겠고 처음의 시작이 어땠는지를 살펴 사랑하는 캐릭터가 시간에 걸쳐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그 역사를 확인하고픈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똑같이 매그레의 팬임을 자처하는 나에게도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당연히 기필코 보아야할 작품이다. 전설의 목격이자 역사의 확인으로서... 

   1929년 9월 네델란드 항구의 델프제일에서 '괴짜'를 뜻하는 그의 배 '오스트로고토호'가 수리되고 있는 동안 그 옆의 궤짝에 앉아있던 심농에게 불현듯 떠오른 어떤 환상에 의해 이 매그레 데뷔작은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5억권 이상이나 팔려나갔다는 시리즈의 시작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즉흥적인 창조이다. 그래서 혹 이 작품 역시도 즉흥적으로 창조된 작품들이 흔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약점들 그러니까 개연성 없는 플롯, 평면적인 캐릭터, 우연의 남발, 억지스러운 해결등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안심하시길, 그런 약점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쓰여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문장은 마치 흔들리는 배에서 급하게 쓰여진 것 처럼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딱딱 던져줄 정도로 단순 명료하고 거기다 내처 신들린듯 써내려갔는지 전개도 먹이를 덮치기 직전 웅크렸더 덤벼드는 표범처럼 재빠르다. 그렇다고 구성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사실 매그레 시리즈를 과연 추리소설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 자신은 반감이 매우 크지만 아무튼 추리소설이라는 통념을 받아들여 그 입장에 서서 판단해 보아도 소설의 동력이 되는 수수께끼는 빈틈없이 공정하게 잘 해결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 보아도 꽤 성공적이라고 보여지며 지금으로 부터 70여년 전에 씌여졌다고는 그것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씌여졌다고는 도저히 믿지 못할 만큼 현대적이고 탄탄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추리소설의 평가만으론 이 작품이 가진 진정한 매력을 말하기엔 턱없이 모자른다. 어차피 당신 역시 이 책을 읽게되면 나중에 남는 것은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아닐 것이다. 분명 추리소설로서의 지적 쾌감 같은 것은 결말에 가서 범인의 고백을 듣게 되면 그로부터 받는 묵직한 울림 때문에 더이상 신경쓰지도 않을테니까. 그래서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라 불리는데 저항감이 있고 사실 추리소설로서의 잣대는 이 소설에 있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뭣보다 이 소설에 있어 가장 압도적인 면모는 매그레를 매개로 심농이 그려내는 한 인간의 서글픈 초상이기 때문이다. 매그레를 통해 우리가 정말 보게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다. 그건 심농 자신이 고백한 바 있다.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그레를 통해 사건을 중심에 놓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인간을 그 중심에 놓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추적이라는 것도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은 그 인간이 왜 그런 짓을 했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심농에게 중요한 것은 흔히 추리소설에서 묻는 '누가(WHO)'가 아니라 '왜(WHY)이며 여기에서 보자면 이 데뷔작은 그야말로 충실하게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품이 자신이 대답해야 할 질문을 '왜(WHY)'로 삼게 되면 액션은 줄어들고 관조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도 이 작품은 데뷔작이라서 그런지 나중의 매그레 시리즈들 보다 훨씬 더 많이 액션이 넘쳐난다. 그래서 어쩌면 심농이 본격적으로 매그레적 세계를 완성하기 전의 그 과도기적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하다. 거기다 이 작품의 테마라고나 할까? 아무튼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일종의 '정체성 바꾸기' 같은 것인데 사실 이것은 뒤이은 매그레 시리즈(바로 뒤이은 '갈레 홀로 죽다'도 여기의 변주라 할 만하다)나 별개의 작품에서도 자주 반복되는(독자적 작품으로는 33년에 나온 '런던에서 온 사나이'에서 아주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2007년 벨라 타르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것으로 바로 이 소설 '수상한 라트비아인'에는 심농이 평생 꾸준히 천착해온 주제의 원형 같은 것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데뷔작에서 드러나는 심농 소설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이다. 이 작품이 태어난 연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어떤 추리소설에서도 매그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매그레가 드러내는 특징적 세계는 오로지 매그레 혼자만의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추리소설의 대세를 거스르면서까지 심농은 그러한 특징들 -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 - 을 천착했던 것일까? 그것은 또다시 이 소설이 태어난 연대의 유럽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대답이 될 것 같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그야말로 유럽은 정치상황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차대전의 휴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려운 경제적 형편으로 곤란을 겪었고 따라서 범죄가 급증했다. 그러한 힘든 경제사정 가운데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혼란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크게 세 개의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 이렇게.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은 그대로 그 안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 역시도 스스로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거기다 독일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파시즘과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화 과정속에서 동유럽과 러시아의 많은 유대인들과 사회주의에 내몰린 사람들이 중부와 남부 유렵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러한 대량 이주민의 유입은 당연하게도 원래 거주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유럽인들은 내부적으론 이데올로기적 혼돈을 외부적으로 전혀 다른 이민족들에 대한 두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심농의 매그레가 보여주는 특징들은 이러한 상황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많은 이민자들의 유입, 그렇게 전혀 다른 곳 다른 시간을 살았던 낯선 자들의 대량 유입은 심농에게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거센 이데올로기적 혼란들은 심농에게 한 개인이 겪는 정체성의 변화에 주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비단 심농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가사 크리스티 또한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가였다. 세심하게 읽어본 이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끊임없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음을 알 것이다. 특히나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은 시골마을을 무대로 벌어지는 추리소설의 경우엔 더 명확하게 이러한 불안감이 드러나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그 모든 작품들에서 끊임없이 러시아나 동유럽으로 부터 넘어온 이민자들을 그린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특별히 아가사 크리스티가 보수적이거나 국수적이어서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누구네 집에 누구의 숟가락이 몇 개가 있는지 그렇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훤히 다 알았었는데(미스 마플의 작은 전원마을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추리 소설들은 늘 이것을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민자들이 흘러들어온 뒤 부터는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들은 저마다 의혹을 지닌 존재로 때로는 깜짝놀랄만한 비밀을 가진 존재로 아가사 크리스티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거기에 대한 혼란을 겪었고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그런 반응이 그녀의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타자에 대한 관심은 두려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심농의 경우는 아가사 크리스티와 달랐다. 바로 그 다른 점이 같은 것을 느꼈으면서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경우엔 퍼즐러 식의 심리 추리소설로 심농의 경우엔 오히려 인간의 삶에 더욱 더 천착하는 추리소설로  다르게 나아가도록 했는지 모른다. 아가사 크리스티와는 다르게 심농은 그러한 낯선 타인의 삶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심농은 매그레를 통해 그들의 삶은 우리가 보고 들어야할 삶이며 결국엔 껴안고 가야 하는 삶임을 보여준다. 매그레의 깊은 연민의 시선들은 너와 나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통찰이며 아무리 서로가 다른 곳에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이해받지 못할 삶은 없다라는 선언이다. 이렇게 아가사 크리스티와 심농의 소설들이 완전히 다르게 걷게 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아마도 아가사 크리스티는 미스 마플 처럼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물렀고 심농은 반대로 아주 많이 정처없이 유랑을 했기 때문은 아닌지 속 편하게 생각해 본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은 허물어뜨리는 경험을 가져다 주니까 말이다. 

   아마도 매그레가 나온 즉시 얻게된 커다란 성공 또한 이렇게 동시대의 유럽 사람들이 겪고 있던 타인에 대한 불안한 심리와 이데올로기적 충돌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 같은 것을 잘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매그레가 펼쳐보이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에게서 자신과 조금 아니면 아주 많이 닮은 모습들을 보았을 것이며 그렇게 심농의 동정적인 시선 속에 오롯이 그려지는 범죄자의 삶을 보며 그들을 동정하였듯이 자신을 동정하고 또한 매그레가 범죄자에게 보여주는 연민을 통해 스스로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매그레를 자신의 옆자리로 초대했던 것이리라. 아무튼 이렇게 앞서 나온 버즈북의 제목 그대로 매그레는 삶을 수사하고 삶 자체를 담는다. 때문에 범인 찾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버리는 것이 훨씬 많고 또한 별 재미도 느끼지 못하리란 걸 미리 알려두어야겠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여러분'을 부를 때 했던 그것. 그러니까 하나의 영혼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하는 것. 모든 선입관과 판단의 무장해제 그것이다. 매그레의 소설들은 깊은 밤과 불면의 새벽을 위한 소설이다. 그렇게 오로지 고독한 자기 대면의 시간 가운데서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루이스 세풀베다든 헤밍웨이든 한결같이 고독한 시간에 벗 삼기에 최고다라고 말하는 것에 정말 유념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그렇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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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와로 2011-05-2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이 오픈키드님이셨군요..! 물만두 추리소설 대회 1등이셨던..ㄷㄷㄷ
남다른 안목이 돋보이는 서평인 듯 합니다 ㅋ

오드득 2011-06-04 02:42   좋아요 0 | URL
포와로님 반갑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서^ ^;
어느새 제 서재까지 찾아오셔서 글까지 남겨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전설의 시작을 손에 들고 있다. 

   이 첫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썼다가 지웠는지 모른다. '타인의 목'을 읽고 매그레의 매력에 빠졌고 더 많은 매그레의 작품을 보게되기를 기다린지가 벌써 십여년을 훌쩍 넘었다. 그래서 다시금 찾아온 매그레가 너무도 반갑고 또한 이 매그레가 세계문학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에도 걸맞게 첫문장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는 머리.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당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크기가 바로 당신이 가진 세계의 크기라고 말했었는데 아... 내 세계가 이다지도 협소했단 말인가... 

   아무튼, 손바닥에 침을 뱉어 그것을 튀겨 방향을 정하는 심정으로 일단 첫문장을 저렇게 써두고, 오매불망 십여년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어 이제 뚜렷한 존재감으로 이것이 꿈이 아님을 말하는 매그레 시리즈의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넘겨본다. 

  혹시 유명한 명탐정들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 

  우리네 시대의 유명한 탐정들이라면 대표적으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아가사 크리스티의 엘큘 포와로 그리고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이 될 것인데 이들은 모두 소설 속 등장인물의 눈에 보여지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그들은 보여지는 대상, 관찰가능한 대상으로서 처음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퍼즐러' 그러니까 수수께끼의 해결이 주가 되는 추리소설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구성이기도 하다. 대부분 이러한 소설들은 거의 초인적인 두뇌 능력으로서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하기에 그렇게 천재적인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과정을 숨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들의 머리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저 바깥으로 물러난 구경꾼이 되어 명탐정이 펼쳐보이는 화려한 추리쇼를 구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독자들은 명탐정에 종속적이며 그런 위치에서 독자들은 명탐정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퍼즐러'의 추리소설에서 독자들이 명탐정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세계'이다. 이에 관해 세계적인 경제학자이기도 한 에른스트 만델이 자신이 좋아했던 추리소설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 '즐거운 살인'에서 왜 하필이면 근대 이후에 '퍼즐러' 추리소설들이 널리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파헤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러한 추리소설들의 인기가 사실은 근대 이후의 혁신적인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급격히 팽창하게 됨으로서 이제 세계가 한 개인의 이해가능한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버렸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이렇게 독자 개인의 이해영역을 넘어서버린 세계를 그래도 자신의 이해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구가 바로 셜록 홈즈를 비롯한 수많은 명탐정의 인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만델의 말 그대로 '퍼즐러' 추리소설에서 독자들이 바라보는 것은 인간이 아닌 '세계'다. 그리고 거기서 명탐정의 수수께끼 해결은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다. 때문에 '퍼즐러' 추리소설들은 급격히 팽창하는 세계로 인해 불안해하던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세계가 불안해지면 불안해질 수록 사람들은 마치 종교를 찾듯이(어떤 작가는 이러한 독자들의 열광을 메시아에 대한 열광과 흡사하다고도 말했다.) 추리소설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920년대에서 30년대를 생각하면 저절로 수긍이 될 것이다. 1차대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들과 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성장... 이렇게 세계 정세가 급변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심농의 매그레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1931년 그러니까 그 황금기에 태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퍼즐러'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길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이었기에 독보적이었다. 매그레가 가지는 그 독특성은 바로 매그레의 첫등장에서 부터 잘 나타난다. 

  매그레의 첫 등장은 이렇다. 

  기동 수사대의 매그레 반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무튀튀하니 굵직한 연통으로 천장과 연결되어 집무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주철 난로의 소음이 왠지 약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매그레는 시작부터 전면에 나타난다. 그는 누군의 눈에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문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바라본다. 그는 더이상 객체가 아니다. 그는 바라보는 주체이다. 뒤이은 문장에서 그는 자신의 사무실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소음이 약해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제 '퍼즐러'에서 하듯이 탐정의 바깥에 있지 않다. 독자는 이제 탐정을 매개로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는 바로 탐정의 내부로 들어가며  바로 그와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구경꾼이 아니라 매그레와 더불어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의 마지막 '느낌이었다.'라는 말처럼 보는 게 아니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퍼즐러' 추리소설에서 있어서 독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기관은 '눈'이었다. 독자들은 혹시라도 단서를 놓치지 않을까 싶어 잔뜩 눈에다 힘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매그레가 새롭게 열어보이는 이 신천지에서는 더이상 '눈'은 중요한 기관이 아니다. 매그레에 의해서 이제 세계는 해석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의 가장 근원적인 정의라고 한다면 '타인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완벽한 이해란 이해의 대상이 되어보지 않으면 불가능할테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대상의 자리에 서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상상력의 힘으로만 그 자리에 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느끼는 것' 즉 감성이다. 

  이렇게 그들의 FIRST LOOK에서는 그들이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 독자들이 그들에게 바라고자 하는 것들이 명확히 다른 것임을 똑똑히 드러낸다. 퍼즐러의 추리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점점 자신의 이해가능한 영역을 넘어 커져만 가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그것들을 찾았다. 그렇다면 매그레의 경우엔 독자들이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매그레 시리즈는 전 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5억권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이것은 심농 전체의 소설을 통합한 수치인지라 정확하지 않지만 심농에게 있어서 매그레 이외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매그레 만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 중8 ~90%는 분명 매그레의 것이리라. 그렇게 감하고 본다고 해도 역시 어마어마한 판매량임엔 틀림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많은 독자들이 국경을 넘어 시대를 넘어 매그레를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매그레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했던 것일까? 물론 매그레는 '퍼즐러'가 주었던 것을 주지 않는다. 독자는 그의 소설에서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매그레와 함께 보고 느끼고 세상과 사람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언제나 예외없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운명 앞에서 나약한 비참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심농은 한 인간에서 자신이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인간의 삶을 보다 더 잘 보여주기 위해 그 자신이 매그레와 언제나 일체가 되려고 노력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심농은 한 인간의 삶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 데 있어 아주 공을 들인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은 그가 세공한 그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어쩐지 그가 꼭 그만의 삶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의 삶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어느정도는 보편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잘 구현하면 독자들은 어느 누구든 그의 삶에서 자신의 삶과 닮은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에는 그런 호소력이 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어느 특정한 주인공 개인의 엄마의 일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는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매그레를 읽는 독자들은 거기 구현된 한 인간의 삶이 사실은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남몰래 느꼈던 비애감이나 우울들이 그렇게 다른 누군가에게 투영된 흔적을 본다. 그리고 독자는 생각한다. 그래 나만이 이런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 세상에 다른 누구도 나와 똑같은 고민 나와 똑같은 아픔을 느끼며 살고 있었구나 하는 걸. 더우기 매그레는 그러한 한 인간의 삶에 깊은 이해와 연민의 시선마저 던진다. 매그레는 절대 법대로 처벌하는 법이 없다. 그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생을 마주할 때 그는 절대로 경찰관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보통의 인간으로서, 그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이해한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행동한다. 상처입은 아기사슴을 그저 가슴에 안아줄 뿐이 어린 아이 처럼... 매그레는 그렇게 위안을 준다. '힘들었지?'하며 떨리는 어깨를 토닥여준다. 바로 그러한 것을 매그레가 주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이 세상 어디에선가 여전히 매그레를 벗하고 있는 것이다. 

 

  매그레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읽는 것은 그냥 그저 그런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읽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이다. 매그레의 첫 등장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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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계단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성은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검은 계단'은 루이스 베이어드의 '미스터 티모시', '더 페일 블루 아이'에 이은 세번째 팩션이다. 세 소설 모두 19세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면서도 공간적 배경이 되는 나라는 다 다르다는 특색이 있다. '미스터 티모시'는 19세기의 영국을, '더 페일 블루 아이'는 19세기의 미국을 그리고 본 작품 '검은 계단'은 19세기의 프랑스를 각각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나라들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 그렇게 그 시대 그 나라의 대표적 작가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는데, '미스터 티모시'가 '디킨스'의 분위기를(이 소설의 주인공 티모시는 이제는 자라서 성인이 된, 바로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꼬마 팀이다.)  '더 페일 블루 아이'가 '에드가 알란 포'의 분위기를(에드가 알란 포가 아예 직접 등장한다. 이 소설은 포의 짧았던 미 육군생도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띠고 있다고 한다면 이 소설 '검은 계단'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하겠다.(이 소설의 설정은 뒤마의 '철가면'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세 작품의 미국판 표지들 -  

 

   때문에 이런 생각도 든다. 혹 이 세 작품들은 어떤 개인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나온 일련의 작품들이지 않을까 하는.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나라를 달리하여 각 나라마다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작가들의 분위기로 직조되는 이 소설들엔 분명 아무래도 어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최근 발간된 후속작 '더 스쿨 오브 나이트'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그 소설은 현재의 미국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을 보는, 그렇게 두 세기의 서로 다른 얘기들이 겹쳐진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니까 '미스터 티모시'에서 '검은 계단'까지 루이스 베이어드는 19세기를 19세기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퍼스펙티브 프로젝트'를 끝내었고 '더 스쿨 오브 나이트'에선 이제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려한다고. 

  만일 이 가정이 맞다면 왜 루이스 베이어드가 하필 19세기적 퍼스펙티브에 따라서 일련의 세 작품을 완성했는지 이유가 보다 분명해진다. 그것은 소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대와 공간적 배경을 고려하면 보다 명확하다. 이 세 작품들은 모두 이른바 '근대'라는 것을 태동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움직임들의 휴유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스터 티모시'는 영국의 산업혁명 '더 페일 블루 아이'는 남북전쟁 마지막으로 '검은계단'은 프랑스 대혁명의 휴유증을 다루는 것이다. 결국 베이어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념들이 인간의 영혼들을 마구 유린하던 시절, 그렇게 커다란 정신적 격변기라 할 수 있는 것을 소설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 시간들은 언제나 그 격변기로 부터 수십년이 지난 다음이다. 그러니까 베이어드의 관심은 현재 진행중인 격변기가 아니라 그 격변기가 지나간 후 어떠한 것들이 남았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베이어드가 소설을 통해 집중하는 것은 그 격변기가 인간의 영혼에 남긴 흔적 혹은 상처 같은 것들이다. 때문에 베이어드는 이 흔적 혹은 상처를 제대로 파헤치기 위하여 그것들을 모두 한 인간에다 집약시킨다. 바로 소설 초반에 나타나는 시체들은 그러한 집약된 형태가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것은 누군가의 눈에 밝혀져야 할 대상이 되어 상태와 상처가 관찰가능한 하나의 객체가 되고 나아가 추적을 발동시키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대적 격변이 인간의 영혼에 남긴 생채기를 쫓고자 하는 베이어드의 의도는 결국 그의 소설들을 미스터리로 만들고 그의 눈은 검시관의 그것이 된다.

  시체를 꼼꼼하게 검시하는 검시관... 이것은 베이어드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예술가적 자의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베이어드의 팩션에는 늘 하나의 찬사가 따라 붙는다. 그것은 그 어떤 팩션들 보다도 아주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복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찬사는 그야말로 베이어드가 검시관이 조그만 증거도 놓치지 않으려 꼼꼼하게 시체를 검시하듯 그렇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형상화했기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대적 격변이 남긴 흔적과 상처를 쫓는 검시관의 시선과 검시를 하듯 세부까지 꼼꼼한 인물과 시대상황의 복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베이어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얼까? 우리는 그걸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쾌락 때문인가? 아니면 처음으로 경찰 기구가 만들어지는(일례로 '검은 계단'의 비독은 아시다시피 프랑스 경시청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특정 시점에 집중하여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이 형성되는 것을 보여주려 함인가? 이것도 저것도 물론 답이 아니다. 베이어드가 결국 보여주려 하는 것은 그 시대적 격변기에 처한 한 인간의 윤리적 갈등과 선택이다. 시대적 격변기는 거세한 노도와 같아서 인간을 마구 휘몰아쳐간다. 다른 많은 이념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 격변기에 뛰어들지만 언제나 꿈은 배신으로 희롱되기 마련이고 신념은 현실과 타협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저마가 그 격변기의 흐름 앞에서 사람들은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맞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그 거대한 파도 처럼 몰려오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베이어드가 작품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 소설 '검은 계단'에서 루이 샤를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질문인 것이다. 

  '검은 계단'은 그렇게 미스터리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독자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베이어드의 현실적이면서 풍부한 인물 묘사는 그 질문 앞에 선 개인의 고뇌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 더하여 세밀하게 복원한 당시의 시대 상황은 현장성을 넘치게 해 슬그머니 독자 자신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는 자리로 인도한다. 그 자리에 섰을 때, 과연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까?  지금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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