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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의 사랑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평점 :
'알바니아'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이다.
그의 소설 '부서진 4월'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알바니아는 소설이 1980년대라는 비교적 최근의 시간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현대적이지 않은, 마치 여전히 중세인 것만 같은, 신화와 야만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그래서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그런 나라였다. 나중에 그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유럽에 있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카다레가 보여주었던 풍경으론 알바니아가 꼭 중동 어디쯤에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바니아는 그렇게 이상한 나라였다. 유럽에서 유일한 이슬람 국가. 그리고 마치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적 흐름들이 어쩐지 알바니아만은 비켜나가버린 것 처럼 전혀 근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마치 고인 물 마냥 아주 오래도록 전해내려온 고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나라. 그 특이성과 항구적인 불변성은 유럽의 화약고라고도 불렀던 발칸반도에 자리잡은 알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더욱 더 기묘하게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20세기를 휩쓴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자신의 전통을 지켜가며 생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알바니아의 궁금증을 키우고 있던 차에 또 하나의 소설이 불현듯 우리 앞에 도착했다. 그것이 바로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이었다.
수사나 포르테스가 그려내는 알바니아도 카다레와 그렇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다레의 '부서진 4월'이 주로 아직도 꿋꿋이 고래로 부터 내려온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북쪽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쓰여졌다면 프로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카다레가 역사의 중심에서 비껴나 그 역사적 시간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항구적인 대지와도 같이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보여주려했다면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 역사적 중심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가는 알바니아의 모습 자체를 보여주려 한다. 아마도 그것은 카다레가 바로 알바니아 사람이고 포르테스는 알바니아 사람이 아니라 스페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외부인이고 아무래도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의 시선으로 밖에는 알바니아를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마치 인류학자의 시선과도 같아서 참여자로서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라는 테우리로 인하여 시선의 제약 때문에 볼 수 없는 그 바깥을, 관찰자는 내부와 외부 아울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바니아에 대해서 보다 완전하고도 객관적인 지평을 열어보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다가왔던 알바니아를 다룬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 때문이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강하게 연상되는 영화가 하나있다.
바로 '붉은 수수밭'으로도 유명한 중국 감독 장이모우의 '국두'다. 영화 '국두'는 중국의 한 염색을 전문 으로 하는 집안을 배경으로 삼촌이 돈을 주고 데려온 신부와 조카가 금기를 어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다룬 영화이다. 이것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형의 아내와 금기의 사랑에 빠지는 동생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결국 영화 ‘국두’에서 이 금기를 어긴 두 남녀는 아들을 하나 낳는데 조카는 아이의 앞에서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없어 번민한다. 이것 역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주인공에 얽힌 출생의 비밀에서 드러나는 진짜 아버지의 존재와 유사하다. 나중에 삼촌은 중풍으로 쓰러지는데 이제 삼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조카와 아내는 결국 그에게 태어난 아이가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고 분노한 삼촌은 아이를 죽이려고 하지만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친자식처럼 여기고 살려한다. 하지만 결국 삼촌은 염색통에 빠져 죽고 아이는 사실은 자신의 부모인 그들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하고 복수를 하려한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하게 뒤얽힌 치정관계를 보여주는데 하지만 거기엔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사랑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은밀한 의도가 숨어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기에 깃든 보다 깊은 은밀한 의미는 그대로 이와 유사하게 얼혀진 치정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알바니아의 사랑’에도 그래도 통용될 것 같다. 그럼 본래 영화 '국두'가 그 치정관계를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이 거쳐 온 역사적 변화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금기에 빠져든 남녀 간의 사랑 얘기는 일종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보자면 영화속 등장인물들이 진정으로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삼촌은 공산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중국(청나라)을 상징한다. 금기에 빠져든 조카와 아내는 그렇게 전통적인 중국을 무너뜨렸던 공산주의 혁명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세대는 또 그 보다 더 젊은 그렇게 그들의 아이에 의해서 부정되는데 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문화혁명’이다. 그러니까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치정 관계는 그대로 중국이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장 이모우는 결정적으로 삼촌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의 재건이 가능했음을 주장하고 또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아이의 모습을 통하여 그렇게 재건된 중국이 사실은 삼촌이 상징했던 전통적이며 가부장적인 중국을 그대로 닮으려 했던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즉 작가가 영화 ‘국두’를 통하여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는 그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읽어야 비로소 드러나는데, 나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알바니아의 사랑’ 역시도 영화 ‘국두’처럼 단순히 금기를 위반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알바니아의 역사적 변화 자체를 다루는 알레고리로 읽어야 하며 그 때서야 포르테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알바니아의 사랑'을 알레고리적으로 읽을 때, 주인공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보자면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은 도입부를 지나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의 묘사가 눈에 띈다. 거기 자신의 집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공간은 탑 꼭대기 방이다.(p.15) 그 방은 비좁은 나선형 계단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방이다.(p.14) 이것은 유럽에서 오래도록 유일하게 이슬람을 유지시켜온 그렇게 타자의 침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던 알바니아 하고도 어쩐지 유사해 보인다. 더구나 이스마엘은 신체적으로도 살집이 없고 뼈만 앙상하고 "특히 아치처럼 생긴 쇄골, 손목, 무릎이 그랬는데, 이들 부위는 몸이라고 하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 있었다."(p.33)로 묘사된다. 포르테스는 여기에 '몸이라는 지도에 산맥처럼 두드러져'라는 비유를 쓰는데 이것은 나중에 또 한 번 반복되는데 작가가 유독 이스마엘에게만 쓰는 표현이다. 즉 작가는 이스마엘의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 유도하는데 여기서 이스마엘의 신체는 대대로 군인으로 유명한 자신의 가문에 맞지 않게 아주 허약한 신체이다. 더구나 그것은 그의 형 빅토르의 신체와 대조되면 더욱 더 그 허약함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신체적으로 어떤 별종임을 암시하고 그것은 그렇게 그에게 깃들어진 출생의 비밀을 함축함과 동시에 신체를 하나의 대지로 바라보게끔 하는 작가의 의도를 고려하면 그대로 유럽에서 북쪽 알프스 산맥으로 고립된 알바니아 자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주인공이 이 소설에서 진정 의미하고 있는 바는 '알바니아'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제목 '알바니아의 사랑'은 그야말로 정확한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정말로 '나라 알바니아'가 사랑하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주인공을 알바니아로 여긴다면 그가 속한, 그렇게 이스마일을 지배하고 있다고도 볼 수있는 라드지크 가문 자체는 독재자 엠베르 호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스마일과 라드지크 가문 사이의 관계의 변화로 증명될 수 있다. 처음에 이스마일은 아버지와 형 빅토르에게 모두 호의를 가진다. 그의 엄마가 이스마일이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아버지처럼 대장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형 빅토르 처럼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허약한 신체 때문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초반의 이스마일이 가지는 호의는 알레고리적으로 볼 때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냈던 엠베르 호자에게 서슴없이 정권을 이양했던 알바니아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하지만 그렇게 파시즘에 맞서 알바니아를 구해내었던 엠베르 호자는 스탈린과 비슷하게 나라를 고립시키고 오래도록 독재로 다스린다. 후반에 이스마일은 형의 아내가 된 헬레나와 함께 금기의 사랑에 빠지게 됨으로서 서서히 라드지크 가문으로 부터 멀어지는데 그것은 그대로 호자의 오랜 독재에 지쳐 서서히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던 알바니아와 또 그렇게 겹친다.
이렇게 이스마일을 알바니아로 라드지크 가문을 엠베라 호자로 보는 게 가능하다면 결국 금기의 사랑이라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은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거기에 보다 은밀한 의미가 배여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에 대하여 한 리뷰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맥을 잇는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이 헬레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이름을 어디선가 또 본적이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 트로이 전쟁에서이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준 파리스에게 여신은 약속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선물한다. 그녀가 바로 헬레나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로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던 몸이었다. 그런 그녀를 파리스가 데리고 트로이로 달아난다. 그리고 그로인해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헬레나를 이미 만났다. 트로이 전쟁의 헬레나는 이미 한 남자에게 매인 몸이면서 불륜에 빠졌다는 점에서 '알바니아의 사랑'에서의 헬레나와 겹친다. 이러한 존재적 겹침은 사실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자 하는 작가가 의도한 결과이다. 따라서 여기서 헬레나가 진정 상징하는 것은 그렇게 트로이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 그리고 결국은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존재로서의 헬레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은 '알바니아의 사랑'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헬레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헬레나로 인해 그녀를 유혹한 파리스의 모국인 트로이가 그렇게 무너졌듯이, 그와 똑같이 헬레나를 유혹한 이스마일이 속했던 라드지크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 그렇게 그것이 상징하는 독재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결국은 그 체제를 무너뜨리는 '여성성'인 것이다.
결국 이스마일이 그러한 여성성과 금기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금기란 것이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란 것에서 볼 때, 이 소설에서의 금기란 그렇게 엠베르 호자의 독재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란 것을 상징하며 그것을 위반하여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는 것은 그렇게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가급적 억제해야만 하는 독재체제 자체에 대한 저항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스마일이 결국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의 보다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렇게 자신을 규정하고(이는 이스마일이 가진 출생의 비밀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은폐시키는(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절대로 엄마를 엄마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이스마일은 내내 엄마를 '그녀'라고 부른다. 그는 그렇게 진정한 엄마로 부터 떨어져나온 존재가 된다. (다른 하나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다.)) 독재 체제 자체의 저항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은 그렇게 독재에 의해서 규정되고 거짓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다 가깝게 알바니아의 본질로 다가가려는 몸짓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마일의 엄마나 헬레나가 다 같이 알바니아의 변방 태생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그렇게 그들은 엠베라 호자에 의해서 규정된 알바니아로 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었다. 더구나 이 알바니아의 변방이란 어떤 곳인가 이스마일 카다레에 의하면 그야말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내려져 온 알바니아의 본질을 품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작가는 헬레나가 처음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녀로 하여금 이스마일의 엄마 초상화를 마주하게 하여 거기서 그녀에게 "낯선 여자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P.17) 드는 것을 보여주어 사실은 이스마일의 엄마와 헬레나가 하나의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데, 그 헬레나는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이스마일에게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을 읽고 있었음을 들킨다. 그 소설을 본 날 이스마일은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시를 쓰면서 욕망을 억눌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미워하고, 숨이 막힐 정도로 폐쇄된 나라, 알바니아라고 하는 거대한 벙커에 생길 수 있는 가장 무의미하고 작은 틈새마저도 꽉꽉 막아버리기 위한 작업에 대대적으로 몰두하고 있는 나라을 미워하면서 욕망을 억눌렀다.(P.138)
여기서 이스마엘은 두 가지를 고백한다. 자신의 가문과 현 알바니아 독재체제에 대한 증오와 헬레나를 향한 욕망. 이 두가지가 모두 하나의 고백으로 담겨져 나오는 것은 그대로 그 증오와 욕망이 결국 연쇄적인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더없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스마일이 헬레나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재체제로 부터 벗어나 카다레가 그렸던 본질적인 알바니아의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이. 더구나 작가는 또 하나의 장치를 통해 더욱 이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이스마일과 헬레나가 처음으로 접촉을 했던 날 내렸던 '비'를 통해서이다. 작가는 내리는 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지붕 처마에서 힘차게 떨어지는 빗물이 정원의 흙을 파헤쳐 마침내 흙 표면에 작은 구멍들을 팠다.(P.168)
그들이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던 날, 내리는 비는 그대로 대지에 구멍을 낸다. 그렇게 비는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이고 이것은 헬레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동일하다. 더구나 이 비는 이스마일의 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그가 체포되는 순간 다시금 예감으로서 나타난다. 또 한 번에 내려올 거센 비는 아마도 독재체제의 종말을 고하는 그런 비일 것이라는 암시를 잔뜩 머금은 채 말이다. 여기서 보다 분명하게 되듯이, 결국 이 날 내리고 있는 비는 바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폭압에 의해 조작되고 거짓으로 위장된 체제의 장막이 그들의 사랑으로 이제 찢겨갈 것임을 암시하는 것인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내리는 비를 통하여 그들의 사랑이 가지는 의미를 더 한층 견고하게 다듬는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가는 이러한 저항으로서의 사랑의 의미를 견고하게 만들면서까지 보여주려하는 것일까?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알레고리적으로 이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과정에 그대로 국가 알바니아가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이스마일이 헬레나를 만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은 서서히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에 눈 떠가는 알바니아를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헬레나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이제 알바니아가 더이상 독재체제를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장면과도 같다. 그렇게 결국 소설에서도 현실적으로도 알바니아는 독재를 벗어났다. 하지만 이스마일 자신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망명자의 신세가 된다. 여기에는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에 현재 중국에 대한 평가를 은밀히 감추어두었던 것 처럼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에 대한 수사나 포르테스의 평가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 결국 알바니아 자체를 뜻하는 이스마일이 망명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현재의 알바니아가 그토록 추구했던 본래적 알바니아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존재임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알레고리고 읽었을 경우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말한 것 같다. 나중에 읽을 이의 즐거움을 위하여 보다 자세하게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독해를 저지하는 것이 적정할 것 같다. 하지만 수사나 포르테스가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 정말 전하고 싶었던 것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결코 모자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말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세부일 뿐이고 거대한 몸통은 드러낼 수 있는 한 다 드러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아무튼 수사나 포르테스는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의 이면에 이렇게 알레고리적 의미를 가미함으로서 감독 장이모우가 영화 '국두'를 통해서 그랬던 것 처럼 자신이 '알바니아의 사랑'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바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개인이 나누는 금기마저 위반한 사랑이 단순한 사랑의 형태가 아니며 그것은 차라리 독재에 대한 저항이며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보다 순수한 알바니아의 본래적 모습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대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알바니아가 거쳐갔던 역사적 과정의 재현이기도 하다. 본질로서 변하지 않는 알바니아의 모습에 천착했던 이스마일 카다레와는 달리 수사나 포르테스는 변화하는 알바니아를 담는다. 하지만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남녀간의 금기마저 위반하는 사랑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서 그렇게 간절히 서로를 원했던 만큼 독재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또한 간절했음을 더욱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문학이 가지는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 마저 엿보게 되는데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단순한 사실의 기술 보다 더욱 더 재현에 있어서 풍요롭고 전달에 있어서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지극히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수사나 포르테스의 문체가 오히려 이렇게 보다 더 풍요롭게 역사적 변화마저 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포르테스가 이러한 문학이 가진 또 하나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끝으로 하나 더. 주인공 이스마일은 헬레나와 직접 접촉하게 될 때까지 시를 씀으로서 욕망을 억누른다. 그렇게 시를 쓰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저항행위였다. 그러니까 헬레나와 만나 그녀와 의 사랑을 통하여 저항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가 문학을 통하여 알바니아의 독재체제에 저항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름마저 이스마일 카다레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혹시 수사나 포르테스는 처음부터 이스마엘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퍼뜩 든다. 더구나 소설의 결말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의심은 더욱 더 커진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 이스마일은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되는데 현실의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도 결국은 독재 체제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알바니아를 떠나 프랑스로 망명했던 것이다. 이토록 현저히 드러나는 둘의 유사성은 어쩐지 그저 우연으로만 보기가 어렵게 만든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쩌면 정말로 포르테스는 카다레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상정하고 읽으면 또 다른 색다른 맛을 이 소설을 통해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다.